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12.3 내란은 단순히 알코올 중독자이자 망상장애에 사로잡힌 윤석열 개인이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막강한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기는 했어도, 내란을 통해 이런저런 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고급 관료와 장성 그리고 정치인이 없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기반이 중요하다. 비록 그는 인기 없는 대통령이긴 했어도,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지지할 20~30% 내외의 지지자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계엄 실패 후 윤석열은 중국 혐오와 부정선거라는 거짓 선동을 통해 특히 바로 이들을, 자신을 위한 적극적 수호 부대로 만들려 했는데, 이런 시도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1.19 서부지법 폭동, 전광훈 목사와 손현보 목사가 주도했던 극우 집회들, ‘백골단’이나 ‘자유대학’ 같은 청년 극우들의 준동 등은 바로 그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12.3 내란은 파시즘이 21세기 한국에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발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과거의 파시즘에서는 특히 ‘폭민(暴民;mob)’이라고 규정되는 대중들이 지도자와 일체감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나서 정치적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와 혐오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열성적 대중 동원은 파시즘을 단순한 군부 독재와 구분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다른 사안들은 제쳐두고라도, 윤석열의 내란 시도와 그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이런 파시즘적 징후를 읽어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런 식의 광범위한 극우 대중, 특히 ‘청년 극우’의 준동이었다. 얼핏 윤석열의 내란은 우리 현대사의 파시즘 전통을 부활시키려 했던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내란이 촉발한 파시즘적 정치 흐름은 과거와는 기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흐름이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안착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과거의 파시스트 세력은 어떻게든 보수라는 이름으로 민주적 헌정질서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우리 국민 상당수가 이 세력의 내란 옹호 선동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과거 군사 파시즘의 잔재나 부활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사진 출처    카스 무데의 널리 알려진 구분을 빌리자면, 극우(far right)는 ‘극단 우익(extreme right)’과 ‘급진 우익(radical right)’으로 나눌 수 있다. 극단 우익은 파시즘같이 민주주의의 본질인 국민주권과 다수통치를 부정하는 데 반해, 급진 우익은 민주주의의 본질은 수용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요소인 법치나 권력분립, 소수자 권리 등에는 반대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들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다. 이번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 극우 포퓰리즘의 준동을 목격했다. 이 포퓰리즘 개념을 단순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통상 포퓰리즘은, 사회가 선량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들인 ‘우리’와 부패한 엘리트 및 그들이 지지하는 불순한 외부의 적으로 구성된 ‘그들’로 나뉜다고 주장하면서, 이 ‘우리’와 ‘그들’의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를 지칭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로 이주민들과 난민들 및 그들을 나라 안으로 끌어들인 좌파 정치인들이 포퓰리스트 세력이 배척하고자 하는 ‘그들’로 지목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다름 아닌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고 여성이나 장애인 같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면서 이런 서구 포퓰리즘의 정치 행태를 모방하고 있다. 12.3 내란 이후 우리 사회에서 확인된 파시즘적 정치 흐름에서 가장 새로운 점은 바로 이런 극우 포퓰리즘의 전략을 채택하는 데 있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 사이 또는 극단 우익과 급진 우익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고 서로 유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파시즘을 단순히 과거 군부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것은 또한 파시즘을 좁게 과거 유럽과 일본에서 나타났던 특정한 정치 운동이나 정부 형태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파시즘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하고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파시즘이 있다.”라는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날 파시즘을 단순한 역사적 파시즘의 부활이나 특정한 정부 형태라기보다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전술(전략)”이라는 차원에서 파악하자는 미국의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를 둔 그는 최근 트럼프의 두 번째 대통령 당선을 보면서 반-파시즘의 중심지를 만들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의 제안에 주목하고 싶다. 이런 접근이 역사적 파시즘이나 우리의 과거 군부 파시즘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맥락과 조건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극우적 정치 흐름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그 핵심을 “‘우리’와 ‘그들’의 정치”로 규정하는데, 이 ‘파시즘적 정치’는 기본적으로 혐오와 배제의 정치다. 그러니까 선량하고 애국적인 ‘우리’와 반국가적이고 불의하며, 따라서 배제하고 혐오하는 게 정당화되는 ‘그들(난민, 페미니스트, 노동조합, 인종적, 종교적, 성적 소수자 등)’을 갈라치기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모든 정치를 이 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극우 포퓰리즘 운동에서는 물론, 폴란드, 헝가리, 터키, 심지어 브라질과 인도에서도 이런 파시즘적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12.3 내란 이후 윤석열이 촉발한 한국 극우 정치의 전개 양상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최근 우리 사회에서 현재화하고 있는 파시즘적 정치는 단순한 과거 회귀의 시도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 위에서 발생한 정치적 병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병리는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투기적 금융자본주의의 지배가 빚어낸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정성 그리고 문제해결력을 상실한 정치 체제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반감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권력을 획득하려는 일부 엘리트의 모험주의적 정치 기획이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적 정치를 불러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1세기 새롭게 창궐하고 있는 이 파시즘적 정치는 과거와 같은 폭압적 통치 양식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안착한 나라들의 경우 민주주의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민주주의는, 러시아, 헝가리, 터키, 인도 등에서 확인되듯이,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외양은 유지하면서도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온전한 보장이 없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교묘하거나 노골적인 탄압이 일상화되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또는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로 나타난다. 지금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집권 이후 바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단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런 미국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물론 우리나라는 새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12.3 계엄령으로 크게 흔들렸던 헌정질서는 일단 회복되기는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극우로 치닫고 있는 대중들의 불만을 제대로 잠재우지 못해 5년 후에는 다시 미국처럼 더욱 강력한 극우 정부를 불러들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은 앞선 민주당 정부가 경제 정책 등에서 보인 무능이 빚어낸 산물인데,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만약 극우화한 국민의힘이나 그 후속 정당이 다시 집권한다면, 그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과 같은 방식으로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회복력 있는 상태로 만들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에 맞서 방어해 내야 한다. 설사 민주 정치가 ‘파시즘 바이러스’의 확산을 제때 막지 못하거나 파시즘적 정치 전술이 예기치 못한 승리를 거두게 될 때도 민주적 헌정질서만큼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2025-11-04 | hrights | 조회: 21 | 추천: 2
강대중/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올해 국정감사는 사법권과 대법원이 가장 큰 주목 대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보건복지위원회와 교육위원회에서 제기된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약물의 오남용 문제에 시선이 갔다. ADHD 약물 문제는 의약품 관리의 차원을 넘어 교육 현장에서 확산되고 있는 ‘학교교육의 의료화’를 보여주는 단면이기 때문이다. 올여름 무렵부터 일부 언론에서 ADHD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상품명 ‘콘서타’ 등)의 처방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이를 우리 사회의 과잉 교육열과 병리 현상으로 연결 짓고 있기도 했다. 국정감사를 계기로 공개된 실태 자료는 몇 가지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첫째,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ADHD 진료 인원은 2020년 7만9,244명에서 2024년 26만334명으로 3.3배 늘었다. 진료비도 같은 기간 652억여 원에서 2,402억여 원으로 급증했다. 20대 이상은 2만5,297명에서 12만2,614명으로 4.8배나 증가했다. 성인 10만명 이상이 ADHD로 진료받은 것도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30대가 6,194명에서 4만679명으로 크게 늘었는데, 그중 여성은 2,325명에서 2만624명으로 급증했다. '성인 ADHD'가 사회현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초등학생 ADHD 진료 인원도 2021년 3만8,452명에서 2024년 7만6,873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한 언론은 현장체험학습에서 교사가 손을 붙들고 다녀야 하는 아이가 과거에는 전교에 1명 꼴이었는데 요즘은 한 반에 2~3명 꼴로 늘었다는 교사들의 체감을 전하기도 했다. 교사들이 체감하는 ADHD 진료 대상은 훨씬 더 많다는 의미다. 셋째, 초등학생보다 중고생 환자 수는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메틸페니데이트 10대 처방이 많은 지역이 사교육 과열 지역과 겹친다. 2024년 청소년 처방량이 많은 상위 5개 지역은 서울 강남구, 서울 송파구, 성남 분당구, 대구 수성구, 서울 서초구 순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입시 철인 10월과 11월에 처방량이 늘었다가 12월이 되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ADHD 약이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이라는 황당한 말까지 유통된다. 넷째, 더욱 심각한 것은 개인이 도저히 복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과다 처방 사례다. 복지위 백종헌 의원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5년 6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메틸페니데이트 최다 처방 환자들의 사용량은 총 20만 정이었다. 연간 1만 4,736정(하루 평균 40정)을 처방받은 사례도 있었는데, 가장 낮은 용량(5mg)이라도 식약처가 정한 성인 최대 안전용량(80mg)의 2.5배에 해당한다. 이 약들이 다른 경로로 다시 유통됐을 가능성도 있다. ADHD는 교육위원회 국감에서도 논란이 됐다. 전남교육청이 2020년부터 ADHD 처방 약을 무상지원하고 있는데, 관련 예산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교육청의 ADHD 심사 학생 수는 2020년 689명에서 2024년 2,110명으로 세 배 넘게 늘었다. 처방 약 지원 학생 수도 2023년 140명에서 2024년 321명으로 한 해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학생 1인당 최대 200만 원이 지원됐다. 약값 지원이 진단 의뢰 학생과 실제 진단 학생을 함께 늘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KBC광주방송 영상 갈무리    한편, 세종시교육청은 2026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 전원을 대상으로 ADHD 검사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ADHD를 조기 발견·치료해야 중·고등학교까지 부적응 문제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낙인 효과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보도에 따르면, 전수조사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교사가 학부모에게 개별적으로 ADHD가 의심된다고 전할 경우 아동학대로 민원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하는 교사노조의 요구가 있다고 한다. 국감장의 ADHD 약물 오남용 논란이나 전수조사 논란은 의료화 담론이 학교교육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교교육의 의료화는 이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 풍경이 되고 있다. 2010년대 초 시·도 교육청에는 학습종합클리닉센터가 설치됐다. 경계선 지능 학생이나 다양한 심리·정서적인 어려움이 학업 부진으로 이어진 학생들에게 학습하는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클리닉’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교사가 교실에서 일상적 교수 활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진단, 처방, 개입하는 곳이다. 학교 바깥의 병원도 학습발달클리닉, 학습인지클리닉, 학습장애클리닉을 열고 의료적으로 교육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이제 흔히 볼 수 있다. 교육과 의료는 서로 다른 언어로 작동하지만, 돌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매우 유사하다. 의료가 상처 입은 몸을 회복시키는 돌봄이라면, 교육은 마음과 관계를 성장시키는 돌봄이다. 전자의 돌봄이 진단과 처방을 기초로 한다면, 후자의 돌봄은 인지·정서·사회적 기술의 습득과 공동체의 참여를 토대로 한다. 오늘의 학교와 그 주변부의 사교육 현장에서는 이 두 언어가 뒤섞이며 교육의 언어가 후퇴하고 의료의 언어가 부상하고 있다. 학교교육의 의료화는 교육의 주체를 증상과 위험, 나아가 잠재적 위협의 존재로 해석하고,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질환으로 번역한다. 의료의 언어가 관계, 배움, 경험, 성장과 같은 교육의 언어를 밀어낸다. 교사는 이상 행동을 식별하는 관리자가 되고, 교육청은 위험 예방의 논리를 앞세워 조기 선별을 위한 전수조사를 제도화한다. 인지 능력을 높이기 위해 ADHD 약물이 오남용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국감장에서 제기된다. 교육적인 돌봄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약물과 검사가 몸을 고칠 수 있지만, 마음과 관계를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하물며 건강한 사람이 약물에 의존하면, 잠깐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작용이 뒤따른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 마음과 관계의 성장을 위해서는 학교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돌봄을 자기의 언어로 내장하고, 그 언어로 관계와 학습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학습은 우리의 뇌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변화된 뇌는 같은 경험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갖는다. 그런 경험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를 불러오고, 관계의 변화가 사회를 다르게 조직한다. 이 변화를 촉진하는 힘이 바로 교육이다. 돌봄의 언어가 충만한 교육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인 이유다.  
2025-10-28 | hrights | 조회: 66 | 추천: 4
길윤형/ 한겨레 논설 위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만들어낸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착실히 성장해 온 대한민국은 ‘국난’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큰 위기를 맞게 됐다. 한국은 미국이 떠받쳐 온 ‘자유무역 질서’ 속에서 지금의 번영을 이뤄냈고, 미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1953)을 통해 안보 문제를 해결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 두 기둥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세계는 미국·중국·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이 자신들의 국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면서 필요한 경우엔 ‘더러운 거래’마저 서슴지 않는 ‘다극 체제’의 시대로 접어들려 하고 있다. 충격적인 사태 – 조지아주 구금사태 이런 가운데 우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지난 9월 4일 새벽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급습해 한국 국적자 317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구금한 것이다. 이들은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입국한 단기 인력들이었다. ‘하늘의 별따기’라고 불리는 미국의 ‘전문직 비자’(H1B)나 ‘일반 주재원 비자’(L1)를 얻지 못해 ‘단기 상용비자’(B1)나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 등을 통해 공장 가동을 위한 작업을 수행해왔다. 이런 사정을 뻔히 잘 아는 미 이민당국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대신, 단속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장갑차·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300명이 넘는 동맹국 국민을 수갑과 쇠사슬로 잡아 가뒀다.   사진 출처   지난달 12일 귀국한 이들이 증언한 체포 과정과 구금 시설 내의 상황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한겨레>의 9월 15일 3면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증언한 구금 시설의 상황은 △위생 △외부와 연락 △이의 제기 상황 설명 등과 관련해 국제 사회가 정한 ‘구금자 처우의 최소 규칙’(넬슨 만델라)을 어긴 것이었다. 이민세관단속국 요원 등은 쇠사슬로 노동자들의 팔·다리를 묶다가 부족해지자 ‘케이블 타이’를 사용했다. 구금 초기엔 많은 이들을 72인실에 몰아넣다가, 3~4일 정도가 지나자 순차적으로 4.96㎡(1.5평) 정도 되는 2인 1실 방을 배정했다. 심각한 인권침해 당한 한국인들 졸지에 구금된 이들이 가장 고통을 느낀 것은 배변을 보는 일이었다. 화장실이 하체를 가릴 천 하나만 둔 채 완전히 노출된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협력업체의 노동자 조영희(44)씨는 <한겨레>에 “생리 현상에 있어 인권 보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며 “오픈된 화장실에서(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하루 2시간씩 농구장 절반 크기의 ‘야드’에 나가는 것뿐이었다. <연합뉴스>가 9월 14일 소개한 한 노동자의 구금일지를 보면, 구금시설 안 침대 매트에는 곰팡이가 핀 상태였고, 치약·칫솔·담요 등 기본적인 물품들도 구금 이튿날에야 전해졌다. 물에서는 냄새가 나 입술만 축이는 노동자도 여럿이었다. 제공된 음식도 통조림·콩·토스트 정도였다. LG에너지솔루션의 협력직원 ㄱ씨는 <한겨레>에 “(내가) 무엇을 이렇게까지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반인권적 감금을 강하고 있는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은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고 말다. 미국 정부의 법률 위반 이번 단속이 단순한 인권침해가 아닌 법 위반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 인권변호사 캐럴라인 오코너는 9월 2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영국 <가디언> 등의 보도를 보면 이민관세단속국은 B1을 가진 노동자가 체류자격을 위반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도 자진 출국을 요구했다”며 이에 대해 “행정권 남용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이민 및 국적법’에 따르면, B1을 가진 노동자는 미국이 아닌 본국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최대 6개월까지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즉 체포·구금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자가 정한 업무 범위 안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던 중, 즉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상황에서 며칠 동안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출국당하는 험한 꼴을 겪었다는 얘기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공장을 설치하던 동맹국 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반인권적이고, 위법적 단속을 벌인 것이라면, 그에 적합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사과를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 두 번째는 상대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용서를 구하는 것’, 마지막은 다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 등 후속 조처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첫 단계인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것’, 즉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사실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다. 두 번째 용서와 관련해선 9월 14일 방한 중이던 크리스토퍼 랜다우 미 국무부 부장관이 박윤주 외교부 제1차관에게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데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이다. 피해 당사자들은 지금껏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 이전에 필요한 것들 현재 모든 논의는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교부 발표에 따르면, 9월 30일 열린 첫 ‘한-미 상용방문 및 비자 워킹그룹’ 회의에서 미국은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 과정에서 수반되는 해외 구매 장비의 설치·점검·보수를 위해 B1을 활용할 수 있”고 “ESTA로도 이와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또, 대미 투자기업들의 비자 문제에 관한 전담 소통창구를 주한 미국 대사관 내에 만들고, 우리 공관과 미 이민당국과 사이에 접촉선을 구축해 협력하기로 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 정도 선에서 조지아 한국인 체포·구금사태를 마무리해선 안 된다. 이번 사태는 미국 정부가 비인도적이며 위법 가능성이 큰 단속을 통해 우리 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문제이자, 트럼프 정부가 진행 중인 안하무인식의 대외정책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전선에서 쉽게 물러나면 자칫 우리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는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나 우리나라를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소총수’로 내몰게 되는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교섭 등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우리의 소중한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끝까지 할 말을 하며 물고 늘어져야 한다. 조지아 사태에 대해서도, 관세·투자 문제에 대해서도,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025-10-21 | hrights | 조회: 40 | 추천: 4
도재형/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고, 강력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4대 사회보험 체계가 확립된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구 복지국가 시스템을 도입하면 산업재해, 실업, 노령, 질병 등의 사회적 위험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전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 시기 제도화된 사회보장 체계가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조응하지 못한,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 시스템에 기반한 서구 사회보험 제도를 근간으로 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 도입된 사회보험 제도는 남성 정규직-풀타임 근로자를 수급자로 상정하고, 그가 종신고용 관행에 의해 한 기업에서 정년까지 일하다 은퇴한 후 퇴직금과 사회보험을 통해 노후 소득 보장의 혜택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는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이를 대체했다. 그 결과로 역진적 사회보험 시스템이 출현했다. 노동시장과 소득 보장 체계 간의 비정합성이 확대되고 사회보험은 오히려 노동시장 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사회보험은 종사상 지위에 따른 차별적 보호 체계를 구성하고, 그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제도가 차별을 강화하였다. 보호의 필요성이 덜한 정규직은 사회보험의 보호 아래 일하고, 그 필요성이 큰 비정규직은 도리어 그로부터 배제되었다. 사회적 위험 발생이 큰 집단이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소득재분배 기능을 발휘해야 할 사회보험이, 분배의 불균형을 방관한 것이다. 이렇게 1990년대 이후 사회보장이 노동시장과의 정합성을 갖추는 데 실패한 결과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과는 여성 고용의 증가 추세와 연결된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고용이 증가한 것은 1990년대 이후였다. 고용 형태의 유연화와 함께 사회서비스와 같은 여성 친화적 산업의 성장, 여성 취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이 진행되었다. 여기에 여성의 고학력화와 성평등 의식의 고조, 자아실현의 욕구 증대와 같은 요인이 겹쳐 여성의 경제활동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여성 고용은 늘었지만, 그 일자리는 위에서 본 유연화 정책과 겹쳐 비정규직에 편중되다 보니 사회보험의 보호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8년의 외환위기, 2003년 신용대란, 그리고 2009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위기 때마다 여성의 취업자 감소 폭이 남성보다 훨씬 심각하였다. 이 현상은 여성 일자리의 질이 취약하다는 점과 관련된다. 여성은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비중이 높고 직장의 규모도 작다. 그런데 경영 위기 상황에서 기업은 비정규직과 같은 주변부 인력부터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불황에 취약한 것이 영세 중소기업이다. 따라서 영세 중소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여성들이 위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런 여성 노동자의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2023년 여성 비정규직 규모는 2023년 456만 명으로 여성 임금근로자의 45.5%를 차지하며, 이는 남성 29.8%의 1.5배에 달한다. 특히 시간제 일자리 규모는 2023년 8월에 273만 명으로 전년 대비 17만 명이 증가하였고, 이는 2014년 204만 명보단 거의 70만 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이들은 종사상 지위와 노동시간 등 인적 속성을 가입 조건으로 삼는 사회보험 체제에서 자주 배제된다.   사진 출처   여성은 비정규직, 특고, 프리랜서 등의 지위로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경력 단절을 겪으면서 사회보험의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짧은 가입 기간으로 인해 낮은 액수의 사회보험 급여를 받는다. 1990년대 이후 비정규 중심의 여성 일자리는 정규직 중심의 사회보험 체계에서 배제된 채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시민권이 부착되지 못한 노동은 노동시장에서 상품의 지위를 갖는 데 불과하다. 노동시장에서 여성 노동의 취약성은 사회보험 영역에서도 그대로 유지됨으로써 여성 노동자는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한 권리를 얻는 데 그치곤 한다. 즉 그들 상당수는 일하는 시민임에도 사회보험에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미성년자로 남아 있다. 위와 같은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적 노력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 등 비정규직 보호 입법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 정책 및 근로장려세제의 확대 등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노동시장과 관련한 이러한 정책 또는 법적 대응에 관한 논의를 별론으로 한다면, 다양한 형태의 여성 노동에 사회적 시민권, 그중에서도 사회보험수급권을 부착하는 사회정책적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특정 직종 등을 대상으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사회보장 제도를 보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먼저 특별법을 만드는 대응의 예로는, 2021년 제정된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과 「사회서비스 지원 및 사회서비스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들 수 있다. 이 두 법률은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사회서비스 업종의 노동자를 공식화하기 위한 특별법이다. 다음으로, 정규직 근로자 중심의 현행 사회보험 제도를 모든 유형의 노동자를 적용 대상으로 하는 제도로 개편하는 대응이다. 2020년 12월 발표된 「전 국민 고용보험 로드맵」에선 소득 기반 고용보험 추진도 포함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소득정보 기반으로 고용보험 체계를 전면 개편함으로써 취업 형태와 관계없이 일정 소득 이상인 일자리는 고용보험 가입이 가능하고, 사각지대 없이 모두 적용되게 된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고용보험은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과 유사하게 관리 체계를 개인별로 변경하여 전 생애에 걸친 다양한 취업 형태 변화가 빠짐없이 적용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조금 긴 안목의 입법 정책적 대응을 제쳐두고 당장 시급한 먼저 생각한다면, 사회보험 보호 대상에서 초단시간 근로자(1주당 15시간 미만 일하는 근로자)를 배제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백번 양보하여 업종이나 사업장 규모에 따라 사회보험의 적용을 배제하는 걸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단지 노동시간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사용자가 관련 행정 업무에 응할 능력이 있는데도 그 노동자를 사회보험에서 배제하는 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단시간 근로자의 경우 생업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과거의 편견에 기인한 것이며 오늘날 노동시장의 현실과 맞지 않다. 결국 사회보험에서 여성 노동자의 배제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작업과 연결된다. 이 과정은 우리가 사회보험 시스템 도입 과정에서 한 실수를 교정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5-10-21 | hrights | 조회: 43 | 추천: 6
윤동호/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학에 입문하여 한동안 이런 의문이 있었다. 진실은 하나이고 명백할 텐데, 왜 법적 다툼이 있고, 정해진 진실을 두고 변호사는 왜 돈을 벌까. 그 이후 형법을 전공으로 공부하면서 그 의문이 조금 해소되었다.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 과거의 일이고 인간의 인식능력과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바라보는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진실을 다르게 본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진실을 숨기거나 조작하기도 한다. 진실을 밝히기도 어렵지만, 밝혀진 진실이 형법이 금지하는 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도 간단하지 않다. 이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인데, 행위의 상황과 의도에 따라 그 행위가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또 이를 처벌하는 형법규정에서 표현된 문언의 의미는 해석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남성이 고속버스 안에서 음란동영상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던 중 그의 팔이 잠이 들어 있던 옆자리 여성의 신체에 닿은 경우 법원은 추행의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강제추행죄를 인정하지 않고, 공연음란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형사절차는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이 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절차이다. 범죄혐의의 유·무를 판단하고 처벌 가능 여부 및 그 정도(양형)를 결정하는 절차이다. 형사절차는 흔히 신고, 수사, 기소, 재판, 교정(집행)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런데 각 단계의 권한을 누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행사하고, 다음 단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할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사진 출처   한국의 검찰청 검사는 형사절차의 중심에서 다양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형사절차를 좌우해 왔다. 검사의 형사절차상 권한이 상대를 압박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검찰청 검사의 권한 오·남용이 심각하여 결국 검찰청 폐지가 확정되었다. 내년 9월 검찰청은 중수청과 공소청으로 분리된다. 검찰청 검사의 수사권은 신설하는 중수청에, 기소권은 신설하는 공소청에 각각 부여된다. 검찰청을 폐지하고 이를 대신하거나 보완하는 기구를 신설시킬 법률들은 검사가 타인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법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찰의 수사에 대한 검사의 지휘권을 2021년부터 폐지했다. 수사에 관한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상명하복의 지휘관계에서 상호협력관계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전건송치제도를 선별송치제도로 전환하고 경찰에게 불송치결정권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검사가 수사하는 경찰을 함부로 하지 말고, 그 판단을 존중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불송치결정권은 경찰이 수사한 결과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면 사건을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이다. 2020년까지는 경찰이 수사 후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더라도 무조건 검사에게 송치해야만 했다. 송치하면서 기소나 불기소의 의견만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경찰에게는 범죄 혐의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주지 않고, 검사에게만 준 것이다. 경찰은 사건을 검찰로 나르는 지게꾼에 불과했다. 그런데 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면서 전건송치제도를 부활하여 불송치결정권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사건의 신속한 처리와 수사경찰의 권한 오·남용에 대한 검사의 통제 필요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불송치결정권에 대한 검사의 통제장치는 현재도 마련되어있다.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사건, 법리적 다툼이 있는 사건, 증거 확보에 어려움이 있는 사건 등은 경찰이 아니라 검사가 하더라도 신속한 처리가 어려울 수 있다. 오히려 불송치결정을 하면서 고소인에게 그 취지와 이유를 모두 통지해야 하는 것이 신속한 처리에 장애가 될 수 있다. 현재 검사는 불기소결정을 할 경우 그 취지만 고소인에게 통지하고, 고소인의 청구가 있는 때만 불기소결정의 이유서를 통지한다. 경찰도 불송치결정을 하면서 그 취지만 고소인에게 통지하고, 고소인이 요구할 때만 이유서를 통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경찰의 불송치결정은 잠정적 결정이다.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후 검사가 기소결정으로 변경할 수 있다. 불송치결정은 받은 피의자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그러나 고소인이 이의신청을 하면 검사에게 송치되고, 검사가 기소결정으로 변경하면 다시 대응해야 한다. 따라서 경찰은 범죄 혐의 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불송치결정이 아니라 송치결정을 하여 사건 처리가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불송치결정과 송치결정이 병존하는 사건은 분리하지 않고 모두 송치결정을 하여 검사가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안업체 직원이 근무 도중 협력사인 물류 기업의 사무실 냉장고에 있던 1,050원가량의 음식을 무단으로 먹은 것을 두고 법원이 절도죄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가벼운 사건은 검사의 기소유예결정이 옳고, 나아가서 경찰이 이런 사건도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적 설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검찰개혁은 검사가 타인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 경찰의 불송치결정권은 존치가 타당하나 개선 필요    
2025-10-14 | hrights | 조회: 100 | 추천: 7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어릴 적 나의 놀이터는 골목이었다. 골목을 벗어나면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가 나왔고,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던 기억도 있다. 술래잡기하다 꼭꼭 숨는다고 친구와 골목을 벗어나 먼 시장까지 갔다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엄마한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다. 저녁 무렵이면 집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밥 짓는 냄새가 온 골목에 퍼졌다. 우리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 가운데는 부모님이 농사짓는 분들도 많았다. 비 오는 날 부침개라도 부치면 앞집 뒷집으로 접시에 담아 돌렸고, 아주머니들은 접시를 씻어서 주면, 다음에 얻어먹지 못한다고 접시를 그냥 손에 들려 보냈다. 김장하는 날이면 집집이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한 가운데 담그곤 하였다. 어릴 적 이런저런 기억의 잔상들은 이렇게 땅에 발을 디딘 농경사회의 끝물을 보여준다. 어린것들이 미처 느끼기 전에 우리는 급격한 변화 속으로 내던져졌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마을은 점차 도시화하기 시작하여 논밭이 사라지고, 공장이 들어서고, 아이들이 뛰놀던 들판이 사라졌다. 친구들 가운데 공부는 잘하나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은 일찍이 진로를 정하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공고로 여자아이들은 여상으로.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어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는 아주 착한 딸의 진로였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는 산업체에 스카우트되어 가기도 하였다. 세상은 바야흐로 자본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편입되고 있었다. 이후 세상은 내가 느끼든 못 느끼든 더욱 빠르게 변했다.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컴퓨터와 인터넷이 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중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원고지에 볼펜으로 쓰던 기사를 처음 PC로 작성했을 때의 그 낯선 기분, 그런데 지금은 그게 일상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세상에서, 손안에 쥔 휴대전화로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사진 출처 한데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끼는 건 어지럼증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모든 것을 삼킬 것만 같은 세상에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가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다. 예전의 변화가 삶의 도구를 바꾸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변화는 사고방식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두려움. 인공지능은 질문에 답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심지어 내 감정까지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흙먼지를 마시며 자란 내가, 디지털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내게 '놀이'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놀이는 화면 속에서 펼쳐진다. 내게 '배움'은 선생님의 목소리와 칠판에 쓰인 글자였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유튜브와 인공지능이 선생님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농경문화 속에서 보냈고, 청소년기에는 산업사회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으며 어른이 되었어. 그런데 지금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격변하는, 종잡을 수 없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잖아. 내가 살아온 감수성과 지금 이 시대 아이들의 감수성이 공감하는 지점을 만들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그러자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 꼰대 같은 생각하지 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잘 지내. 잘 지내고 있어! 네 생각으로 아이들을 끌어들이려고 하지 마.” 농경사회의 느림, 산업사회의 역동성, 정보사회의 연결성, 지금 현기증 나는 인공지능 시대를 관통하는 감수성은 무엇일까? 한편으론 흥미진진한 기대감과 한편으론 “어떻게?”라는 물음. 아마도 그것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서로를 잇고, 인간다운 길을 잃지 않으려는 ‘깊은 성찰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2025-09-30 | hrights | 조회: 97 | 추천: 8
이윤/ 경찰관   1990년대 초 영국 심리학자 에릭 셰퍼드(Eric Shepherd)는 ‘수사를 위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며 과학적인 면담’이라는 의미로 ‘수사면담’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수사면담은 기존의 신문, 조사, 취조라는 말을 대체하며, 면담 목적 패러다임이 자백획득 ➜ 정보수집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보수집형 수사면담을 대표하는 기법이 영국의 PEACE 모델이다.   PEACE 모델 탄생 배경 영국 경찰은 1985년까지 수사와 기소를 모두 할 수 있었다. 큰 권한을 너무 오랫동안 가졌던 탓인지 강압수사로 허위자백 얻기, 증거위조, 법정 위증 등 위법한 수사를 자행하였다. 잘못된 경찰 수사로 인한 형사사법상 많은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영국은 국가위원회를 거쳐 ‘경찰 및 형사증거법(PACE ACT 1984)’을 제정하였다. PACE ACT에는 ‘모든 용의자 면담은 녹음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많은 수사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규정이 시행되자 수사관들이 조사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상대하고 질문하는지 드러났다. 영국 정부는 수사관들의 신문방법에 문제가 많다는 결론 아래 PEACE 모델이라는 수사면담 지침을 만들었고, 1992년부터 이를 이용하여 경찰관 대상 면담교육을 하였다.   PEACE의 의미 PEACE라는 이름은 일부러 ‘평화’를 연상하게끔 작명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수사면담 각 단계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두문자어다. P는 계획과 준비, E는 도입과 설명, A는 진술청취, 명확화, 설명요구(추궁), C는 종료, E는 평가를 의미한다. 각 단계 이름만 봐서는 기존 신문기법과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수사관들에게 보여주면 ‘이미 우리가 다 하는 건데요.’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맞다. 그래서 ‘모델’이다. 이미 하는 것들을 반영한 평균적이면서도 이상적인 형태다.   출처 : NCF(National Crime Faculty), A Practical Guide to investigative interviewing 2000, p.25   기존 신문기법과 조금 다른 것은 라포형성과 개방형 질문을 핵심 요소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걸 수사관들이 낯설어한다. 라포란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와 공감이 바탕이 되는 친밀하고 편안한 관계’를 의미한다. 수사관은 면담 상대가 용의자, 피해자, 목격자 중 누가 되었건 간에 면담 중에는 라포를 형성하고 유지해야 한다. 라포를 형성하려면 잘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때리거나 소리 지르면 안 되는 건 당연하고, 사무적으로 무뚝뚝하게 대해도 안 된다. 그래서 수사면담은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다. 개방형 질문이란 답변의 내용과 방식을 제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이다. 예를 들면 ‘지난주 수요일, 회사에 출근하고부터 퇴근할 때까지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기억나는 대로 꾸미지 말고 모두 말하세요’와 같이 묻는 것이다. 개방형 질문을 사용하면 수사관의 확증편향을 예방할 수 있고, 질문으로 인한 암시를 막을 수 있어 정보 왜곡을 차단할 수 있다. 그 효과가 실험으로 입증되었기에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PEACE 모델을 원형으로 하여 실무 수사관들의 요구에 맞춘 전략적 기법들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스웨덴의 ‘전략적 증거사용(SUE)’, 노르웨이의 ‘책략적 면담 모델(TIM)’, 네덜란드의 ‘일반 면담 전략(GIS)’ 등이다.   한국에 필요한 인권친화적 수사면담 교육 PEACE 모델은 영국, 북유럽, 미국,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세계 여러 나라 경찰기관에서 교육 및 활용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수사관을 포함한 모든 경찰관에게 교육시킨다. 순찰 경찰관이 사건 직후 범죄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여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진술을 바로 청취하는 것이 정확한 사건 해결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2004년부터 경찰수사연수원에서 수사관 대상으로 교육되고 있으나 최근에는 교육받는 사람 수가 일 년에 200명도 안 되고, ‘수사면담 교육과정’은 명맥만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아마도 의사결정자에게 ‘사람 조사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교육까지 시키나’라는 인식이 있는 듯하다. 그저 범죄자는 계좌랑 통화내역이랑 행적이랑 먼지 털 듯이 탈탈 털고, 출국금지에 압수수색까지 해서 일 못 하게 만들고, 구속시키겠다고 겁 좀 주고, 가족과 친구들까지 잡아넣겠다고 하면 술술 다 불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까지 처벌하는 그런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수사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과연 ‘인권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검찰은 어떤 방식으로 사건 관련자와 면담하고 있는지, 매뉴얼이나 지침은 있는지, 면담에 대해 무얼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설마 심리학자들이 강압적 면담방법이라고 비난하는 ‘리드테크닉(Reid Technique)’을 교육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조만간 검찰청은 폐지되고, 중대범죄수사청과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대부분의 범죄를 수사할 예정이다. 앞으로는 각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인권친화적 수사면담을 채택 및 교육하게 하여, 죄 없는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당당하고 편안하게 수사기관에 출석하여 진술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교육은 수사관이 보유하는 지식의 분량뿐만 아니라 태도도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의 지식보다도 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에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2025-09-22 | hrights | 조회: 159 | 추천: 8
박록삼/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검찰청이 사라집니다. 지난 7일 발표된 정부조직 개편안에 따라 1년간 준비 절차를 거친 뒤 검찰청은 해체되고 법무부 산하에 기소를 담당하는 공소청과 행정안전부 산하에서 수사를 맡는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내란·외환·부패·경제·공직자·선거·대형참사·마약 등 9개 중요 범죄에 대한 수사는 중수청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등과 함께 수사를 맡는 체계를 구축합니다. 1948년 사법부에서 독립한 뒤 78년을 이어오며 온갖 영욕을 누려온 검찰 조직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는 역사적 장면으로 남을 것입니다. 기소권과 공소권을 가진 공소청은 검사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 기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검찰청법 4조 1항은 검사의 지위를 ‘공익의 대표자’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죠. 또한 4조 3항에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적법 절차를 준수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검찰청이 해체되는 마당에 새삼스럽게 검찰청법을 들먹이는 것은 이번이야말로 검사 집단이 스스로 돌아보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다짐을 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2년 전 윤석열 정부가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에 정순신 검사를 지명했던 당시 상황이 떠오릅니다. 검찰에 이어 경찰까지 완벽히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지요. 다만 정 본부장은 아들의 심각한 학폭 문제가 불거지며 임기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짧은 사퇴의 변에서 정 본부장은 국가수사본부장 지원을 철회한다면서 ‘수사의 최종 목표는 유죄판결이며 초동 수사 단계에서부터 공판경험이 있는 수사 인력이 긴요하다’, ‘수사와 공판을 두루 거친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수사발전에 이바지하고자 국가수사본부장에 지원하였다’ 등으로 짧지만 구구히 설명했습니다. 기가 턱 막혔던 부분은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던 ‘수사의 최종 목표가 유죄 판결’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입에 발린 말일지라도 ‘법과 정의의 수호자’, ‘공익의 대표자’라는 인식은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검찰이 마음먹고 시작한 수사라면 사건의 진실도, 피의자의 인권도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실토한 발언이었습니다. 강압 수사, 별건 수사, 먼지 털이식 수십·수백 차례 압수수색, 피의사실 불법 공표, 여론 재판 유도, 심지어 조작 수사에 이르기까지 그간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많은 악행이 그냥 괜히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검찰 조직이 철저히 이러한 기조 아래에서 움직여 왔으며 오랜 시간 동안 ‘인권의 보호’, ‘정치적 중립’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는 ‘자기 고발’이었습니다. 아직 모든 게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세부 개편안 마련을 위한 1년 유예 기간 동안 간단치 않은 힘겨루기 과정이 예상됩니다. 아무리 끈 떨어진 연 신세라고 하지만 80년 가까이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하며 유지되어 온 검찰 권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검찰청 해체 발표 직후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의 말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노 대행은 “헌법에 명시돼 있는 검찰이 법률에 따라 개명 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는 검찰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으로 깊이 반성한다. 앞으로 검찰 개혁 방향에 대해서 세부적인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성’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보다는 검찰 조직의 ‘개명’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검찰청의 이름만 바꾼 것으로 의미를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의도된 발언이었죠. 어떻게든 보완수사 기능을 확보해 수사권을 여전히 유지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밝힌 셈입니다. 마지막 일전을 치러보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에 가깝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또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 중 일부가 최근 소속 검찰청으로 복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합니다. 검찰 조직이 해체되는 마당에 특검 수사를 열심히 해봤자 향후 승진 인사 등 기대할 만한 보상이 없을 것이라는 실망감이 컸으리라 이해도 됩니다. 아니면 검찰청 해체에 대해 정치적으로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컸을 수도 있겠죠. 검찰 개혁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임은정 서울지검 동부지검장을 가리켜 ‘임 지공장(지방공소청장)’이라고 비아냥대며 깐죽대는 검사들도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퇴직 검사들의 모임인 검찰동우회는 “국민이 원하는 진정한 개혁은 위헌적 논란을 감수하며 명칭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어도 충분히 가능하다”라면서 “개혁의 핵심은 명칭이 아닌, 검찰이 국민을 위해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식이건 앞으로 1년의 기간 동안 다양한 방식과 내용으로 수사권을 획득하기 위한 검사들의 집요한 요구 내지는 저항과 반발이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검사들의 뜻을 관철하기에는 70년 넘는 시간 동안 검찰이 저질러온 불공정과 반민주적 행태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왔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기소권과 수사권을 양 손에 쥐고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피의자를 만들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범죄 혐의를 발견할 때까지 먼지 털이식으로 별건에 별건 수사를 계속해 대고, 제 눈에 들어찬 사람은 불기소로 덮어주는 기소편의주의를 마음껏 누려왔습니다. 지난 5일 국회 법사위 소위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검찰 고위 간부와 수사관의 모습은 검찰 해체의 당위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했습니다. 검찰은 스스로 확보한 국정 농단의 핵심 증거물을 인멸했습니다. 그러고도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4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검사건, 검찰 수사관이건 그날 국회에 출석한 증인 중 누군가가 ‘범인’일 것입니다. 여전히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건진법사로 통하며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더불어 희대의 국정 농단을 일삼았던 무속인 전성배 씨 집을 압수수색해서 증거물로 확보한 한국은행 관봉권 5,000만 원의 비닐과 띠지 등을 저연차 검찰 수사관이 감히 없앴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누가 했건 죄를 덮고 만들기를 일삼곤 했던 검찰 집단의 행위였음은 분명한 일일 것입니다. 검찰청 조직 공식 해체 직전 그 조치의 정당성을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검찰 조직의 해체는 만시지탄이자 사필귀정입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진전입니다. 형사소송법 제424조는 검사는 피고인을 위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대법원은 2002년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실체적 진실에 입각한 국가 형벌권의 실현을 위하여 공소제기와 유지를 할 의무 …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하여야 할 의무를 진다’는 판례를 남기도 했습니다. 2010년 대법원 판례는 ‘검사는 공소 과정에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하여야 할 의무를 진다고 할 것이고, 검사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위하여 이를 법원에 제출하여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기소와 공소 유지에 힘쓰는 것이 비로소 검사의 제자리가 될 것입니다. 중수청, 경찰, 공수처 등의 수사 과정에서 국민 인권 보호에 미흡하지는 않았는지, 법 적용에 미비점은 없었는지 꼼꼼히 살피는 ‘공익 대표자’, ‘법과 정의의 수호자’ 역할에 충실한 ‘대한민국 검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응원합니다.      
2025-09-18 | hrights | 조회: 215 | 추천: 13
황문규/ 중부대학교 인문사회학부 교수   지금은 검찰개혁의 시간이다. 오는 2025년 9월 25일이면 검찰을 해체하여 공소청을 법무부에 신설하고,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행안부에 신설하는 정부조직법이 개정될 것이다. 이번 검찰개혁의 핵심은 수사-기소의 분리에 있다. 따라서 현행 검찰의 기소 기능을 담당하는 공소청과 수사 기능을 담당하는 중수청의 소속을 동일한 법무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법무부 장관의 지휘․감독권을 매개로 양 기관이 통합됨은 물론, 현행 검찰 인력이 양 기관으로 분산되더라도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으로 인해 검찰에서의 관행을 쉽사리 탈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검찰의 연속성 단절이라는 지금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100년 후면 모르지만, 지금은 중수청을 행안부에’ 두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검찰의 수사 인력만으로 중수청을 구성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중수청은 검찰과 경찰, 군수사기관, 공수처, 그리고 변호사 등 모든 수사 가능한 인력으로 혼합 구성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중수청이 ‘제2의 검찰청’ 또는 ‘공소청의 손발’이 될 수도 있다. 일각에서 행안부 산하의 중수청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와 같이 통제받지 않는 수사기관이 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국수본과 중수청은 강제수사를 위해서는 검사와 판사의 영장 통제를 받고, 범죄혐의 있어 송치한 사건은 검사의 기소 여부에 의한 통제를 받게 된다. 범죄혐의 없어 불송치한 사건도 국수본과 중수청의 자체 수사심의를 받거나 피해자 등의 이의신청에 따른 검사의 통제를 받는다. 장경태 의원안에 따르면 국가수사위원회(국수위)의 통제도 받게 되어, 이중 삼중의 통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만약 법무부 산하의 중수청이 되면, 정치검찰의 경로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한 최소 100년 동안 (공소청) 검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서울=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 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열린 검찰개혁 법안 관련 공청회에서 황문규 중부대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법안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2025.7.9.   수사-기소를 분리하자는 이 와중에도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러한 주장은 첫째, 검사의 “보완수사권=직접수사권”임을 간과하고 있다. 검사의 보완수사권은 향후 공소청에 수사인력을 두기 위한 논거이며, 결국 무늬만 수사-기소를 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완수사권은 그 한계가 있을까? 예컨대, 사건의 동일성 범위 내에서만 보완수사를 허용하자는 등의 주장이 있으나, 그 한계를 넘어선 보완수사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극히 소수의 사건에서 ‘위법한 수사’라는 대법원 판례를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이미 수년이 경과한 후이며 심지어 그 판례가 다른 사건에 적용된다는 보장도 없다. 왜냐하면 (공소청) 검사는 그러한 판례가 나오더라도 한계를 넘어선 보완수사를 계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검찰이 구속일수를 ‘날(일)’이 아니라 ‘시간’으로 계산한 지귀연 판사의 결정을 오로지 윤석열의 석방에만 적용하고, 나머지 사건에는 적용하지 않은 것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둘째, 검사의 보완수사권이 과연 진실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만 작동할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식구 감싸기 또는 전관예우가 작동하는 장치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수사권조정 직후 어느 일간지(2022. 4. 6.자 한국일보)에서 보도한 <부장검사가 낸 교통사고... 경찰의 중과실 판단 뒤집은 검찰>이라는 기사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게다가 검사 스스로 검찰청법 제4조1항에서 규정한 ‘공익의 대표자’임을 외면한 전례도 있다. 경찰이 강간당한 피해자의 팬티에 대한 DNA검사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하면서 범죄용의자를 구속한 사건(대법원 2001다23447판결)에서, 검사는 ‘구속된 범죄용의자의 유전자형과 다르다’는 DNA검사 결과를 받고서도 이를 1심과 2심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그 범죄용의자는 1심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검사가 검찰이라는 ‘불멸의 신성가족’ 이외 정작 평범한 시민들의 진실 발견과 정의 구현에 얼마나 진심이었을까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검찰이 압수한 5000만 원짜리 관봉권 띠지 훼손·분실 사건에 대한 최근 검찰의 대응은 검사의 보완수사권과 기소권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일부 정치 검사들만의 문제라는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 해체 수준의 검찰개혁을 하려는 역사적 맥락을 보지 못한 채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셋째,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이 없으면 범죄자들이 판치는 세상이 된다는 우려도 있다. 검사의 수사는 우월하다는 편향된 인식과 다를 바 없다. 2024년 기준 전체 160여만 건의 형사사건 중에서 검찰이 직접 수사한 사건은 단 1%인 1만 5천 건도 안된다. 검사의 (보완)수사 여부에 관계없이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은 언제나처럼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임을 말해준다. 어쩌면 검사의 수사와 기소로 인한 억울한 사람이 줄어들 것이다. 검사의 수사가 특별하게 보였던 것은 기소권을 뒷배경 삼아 마음껏(예컨대 기소권으로 수사대상자들을 회유하거나, 수사에 불법 또는 탈법이 있더라도 기소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수사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점에서 보완수사권은 통제받지 않는 ‘검찰이 다시 판치는 세상’을 만들 것을 우려한다. 검찰을 폐지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은 검찰개혁의 시작이다. 이른바 공소청법, 중수청법, 형사소송법 등 관련 법률의 제·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듯이 검찰개혁의 악마는 제·개정되는 이들 법률에 있다. 검찰 관련 기득권자들에게 디테일은 목숨을 건 투쟁의 최일선이다. 안타깝게도 디테일을 결정하는 요소요소에 기득권자들이 포진해있다. 때문에 공수처의 사례처럼 중수청을 무능하게 만들거나, 검사의 수사지휘권 박탈에 대한 반발로 ‘검경간 사건핑퐁’을 양산하여 ‘수사지연’ 프레임을 씌웠던 꼼수를 경계해야 한다.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악마가 숨 쉴 틈 없는 디테일한’ 검찰개혁의 시간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유다.  
2025-09-09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1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환상으로 시작한 기독교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신약성서 중에 <사도행전>이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이른바 예수의 죽음·부활·승천 이후에 예수의 열둘 사도를 통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예수 운동과 바울을 비롯한 여러 동역자가 넓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벌인 ‘예수 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그리스도 즉 세상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가 기적 행위와 설교에 따라 순식간에 5천 명에 이르도록 늘기도 하고 수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 사실이 그러했는지 믿기 싶지 않지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럴 수 있었던 핵심 이유는 이른바 환상과 기적이다. 특히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그네들의 환상을 통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와 천사의 말을 예사로 듣는다고 하고, 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걷게 하기도 하고, 귀신 들렸다는 많은 정신병 환자를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고친다.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한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소문을 내는 등 해서 그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자들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는 사도들과 그들을 따른 무리가 모였을 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나라말)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베드로나 바울이 누군가에게 손을 얹기만 해도 그에게 성령이 내려와 여러 나라의 방언으로 따로따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는 한마디로 신비한 환상과 기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베드로와 바울이 전도의 대상으로 삼은 주된 대상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주된 장소는 유대인들이 모여 예배드리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회당이었다. 베드로와 바울은 예수의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서 태어나 활동한 것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중심으로 한 예언적인 이야기와 시편의 여러 예언적인 이야기에 따라 예수가 탄생해 그리스도 즉 세상을 구원할 자로서 신적 권위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과 신앙을 모독한다고 해서 격분했고, 예수 운동을 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로마의 식민 정부에 고발당해 체포·구금·고문을 심하게 받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에 갑자기 환상적인 일이 벌어지면서 손과 발을 묶은 쇠사슬과 쇠고랑이 저절로 풀리기도 하고 무장한 간수들이 보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감옥을 벗어나 있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2,000년 전쯤의 당시에는 어느 지역의 어느 부족이건 간에 사람들 모두가 그들 나름의 신을 믿고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오늘날처럼 제대로 된 과학적인 지성과 기술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오늘날로 치면 지어낸 신화에 불과한 것을 진실이라 믿는 미신과 광신이 횡행한 시대였다. 그럴 때 강력한 환상적인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해 많은 사람을 포섭했던 인물들이 바로 초기 예수 운동을 일으켜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물론 복음이라 전해오는 예수의 사랑에 대한 사상과 말이 큰 힘으로 작동하기도 했을 것이다. 급기야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정도로 정치권력과 곧바로 유착하게 되고, 서구의 역사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잔인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종교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결과를 연출했다. 그 바탕에 절대적인 배타성을 지닌 유일신 신앙이 작동함은 물론이다. 기독교의 역설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 특히 가난한 자와 병든 자 등 이른바 소수자 내지는 타자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러한 사랑을 믿고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그 계명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자는 무조건 적으로 삼아 죽음에 이르도록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위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사랑하더라도 반드시 예수 공동체의 이름으로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2. 예수의 재림이 문제다 이러한 기독교의 형성 기반은 비합리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반지성주의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근본은 반성을 통한 비판적인 성찰이 전혀 아니고, 예수를 비롯해 이른바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행한 기적의 신비를 통해 이루어지는바 순간의 절대적 회심과 평생에 걸친 무조건적인 복종의 감정이다. 만약 오늘날 이러한 예수가 등장했고 이를 믿는다고 한다면, 당연히 미신이라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신도들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하나님에게 내놓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쓸 걸 명령했고, 자신의 땅을 팔아 그 값의 조금 일부를 숨겼다고 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를 연달아 죽게끔 했다는 잔인한 기적을 믿는데 어찌 미신이라 하지 않겠는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동안 그의 형 아론이 주동해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다고 해서 레위 지파가 그들의 동족 3,000명을 죽이도록 한다거나, 그 레위 지파 중 일부가 모세에게 저항했다고 해서 아예 땅이 갈라지게 해서 수백 명의 그들을 집어삼키거나, 남은 자들이 이에 항의했다고 해서 14,700명을 역병으로 죽게 했다는 그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여호와라는 부족의 신이 예수의 아버지인 하나님이라고 믿는데 이를 어찌 미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순결한 처녀의 몸에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예수, 그래서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라는 명칭보다 그전에 아무도 말하지 않은 하늘의 아버지를 수시로 외쳤던 예수였다.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미쳤다고 할 것이다. 죽음을 가장한 게 아니라 진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실제로 밥도 같이 먹고 소통하며 지내다가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 게다가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에 모인 사람 중에 누군가는 죽기 전에 자신이 다시 세상에 오는 걸 보리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언한 예수였다. 오늘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가 제아무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거나 자기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 것이고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는 아름답고 놀랍고 멋진 말을 했다고 할지라도, 이런 황당한 인물인 예수를 누가 믿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그 당시 당장 이른바 재림해 최후의 심판을 시행할 것 같았던 예수가 2,000년이 넘도록 당연히 아직 세상에 오지 않고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뭇사람을 악마적인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게 위대한 그가 곧 다시 오리라 예언했으니 분명히 곧 올 거라거나 심지어 이미 왔을 것이라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도대체 예수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로마 제국을 집어삼켜 세계 종교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행사하게 되니 그 권력을 찬탈하고자 하는 욕망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역사상 자신이 재림예수라거나 그와 비슷한 초월적인 지위를 지녔다고 주장한 인물이 수없이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제법 큰 교세를 확보했으나 기존의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의해 이단으로 내몰려 핍박받기 일쑤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곧 재림하리라는 예수의 말을 믿고서 재림한 예수를 당장이라도 찾고자 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내몰리고, 이른바 정통 신앙을 고수한다는 자들은 예수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온 세계에 한 명뿐인 교황 유일의 지배 체제 아래 전 세계의 교회가 보편 교회로서 하나이고 그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갖춘 가톨릭에서는 이러한 이단이 좀처럼 나올 수 없다. 하지만, 목사나 교회와 아무런 상관없이 누구나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른바 ‘만인 제사장 원리’를 믿는 신교에서는 수없이 많은 신앙의 변종 즉 이단들이 생겨나 판친다. 신교가 바로 가톨릭의 이단으로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신종 이단들의 핵심은 자신이 메시아 내지는 재림예수 또는 하나님 또는 그에 버금가는 유일한 영적 지도자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경우가 통일교를 일으킨 문선명, 전도관을 일으킨 박태선, 구원파를 일으킨 유병언, 신천지예수교를 일으킨 이만희, 기독교복음선교회를 일으킨 정명석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다고 큰소리치는 전광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신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가 부패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외부에서 보면, 종교의 다양성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고 또 바람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 제20조에는 국교는 인정하지 않으며, 뭇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된다는 점을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네 기독교 이단들, 전광훈은 말할 것도 없고 통일교와 신천지 그리고 정명석 등이 정치권 심지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통치 권력과 내통하여 뇌물을 주고받으며 정교 유착에 따른 부패한 이익 주고받기를 자행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핵심 요인은 부와 권력이다. 집단이 커질수록 그 집단을 이끄는 인물의 권력도 커진다는 사실,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러한 집단을 이용하거나 그 집단에 소속되는 것만으로도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이를 위해 국가의 법을 내놓고 무시하거나 어김으로써 사회 전체를 어지럽히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을 비판적인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심리적인 노예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3. 기독교의 절대주의 이러한 볼썽사납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 과연 이단 종교에서만 일어나는가? 그렇게만 단정할 수 없다. 기독교가 인간인 예수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그 위력으로써 부활하고 승천했고 이제 재림해서 최후의 심판을 하리라는 환상적인 신비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한, 그 신앙의 강요는 기필코 신도들을 여러모로 심리적인 노예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심리적인 노예 상태에서 이른바 영적 지도자로서 심지어 신도의 구원을 책임진다고 자임하는 자들이 내린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적인 명령을 목숨 걸다시피 하면서 수행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만이 참된 국가라고 여기는 것에 무관하지 않다. 헌법이 명기한 종교와 정치의 분리와 결합한 종교의 자유에 국가의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오로지 영적인 천국만을 참된 국가로 여길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으로 포함된 셈이다. 국가 공동체의 절대성을 주장함으로써 자칫 민주주의와 반하는 파시즘으로 나아갈 원리적 가능성을 지닌 국가주의도 비판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인 파시즘의 원리와 역사를 지닌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의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무한한 사랑으로써 돌봐야 한다는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마저도 이러한 유일신 하나님의 절대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한 그 한계는 불을 보듯 뻔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더욱이 거기에 예수가 아버지가 없이 성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확실하게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믿고, 살아있는 몸 그대로 대기권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고, 반드시 다시 산 몸으로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하리라고 믿고, 결국에는 예수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 환상적인 믿음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한, 그와 같은 기독교의 참된 실천적 윤리의 실행은 그러한 믿음의 환상적인 미신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존재를 둘러싼 환상적인 신비를 믿는 믿음이 알고 보면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돕는 무한한 사랑의 실천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신비에 대한 믿음을 무시하고 사랑을 실천한 인간 예수만을 바라보고 본받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믿건 안 믿건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역설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기독교의 역설은 현실에서 거의 실현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2025-09-09 | hrights | 조회: 115 | 추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