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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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이른바 ‘4세 고시’를 금지하는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개정안이 3월 1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올해 9월부터는 학원 운영자가 유아를 대상으로 모집이나 수준별 반 배정을 목적으로 시험·평가를 실시하면, 영업정지나 과태료 처분할 수 있게 됐다. 유치원식 영어학원에서 치르는 레벨 테스트, 그걸 준비하는 학원에 들어가려고 치르는 시험을 지칭하는 4세 고시를 입법으로 규제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험을 금지한다고 선발이 사라지지 않는 데 있다. 지난 1월에는 ‘대치동 캠핑카’가 화제가 됐었다. 겨울방학 동안 대치동 학원 특강을 듣는 아이를 실어 나르는 부모가 도로변에 캠핑카를 주정차해둔 모습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아이가 학원과 학원 사이 틈나는 시간에 캠핑카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부모는 부모대로 캠핑카에서 일도 보고 쉬기도 한다는 것이다. 주정차 위반으로 적발되어 과태료를 내더라도 인근에 오피스텔을 빌리는 것보다 캠핑카가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캠핑카 이용은 과잉 경쟁의 한 풍경이면서도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합리적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4세 고시나 대치동 캠핑카는 일부 중상류층이 시간과 자원을 총동원해 계층 재생산에 나서는 병리적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정 학교와 학과, 전공 졸업장이 안정적인 직업 진입의 보증 수표가 되면서, 그 선발의 진입구를 점유하는 데에 유리한 전략적 행위의 목록에 이제 캠핑카까지 한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입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 목록에는 다른 것도 많다. 한동안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이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었다. 위장전입은 불법이었으나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자녀 교육 목적이라면 관대하게 보자는 일종이 타협이 이뤄지기도 했다. 과외 금지 시절의 비밀과외나 학생부종합전형 비율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부모 찬스 스펙 쌓기도 어쩌면 그런 관대함으로 용인됐던 전략적 행위가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반드시 정답이 있어야만 하는 시험과 실수하지 않는 것도 실력으로 간주하는 경쟁의 포로가 된 입시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동원하는 이 전략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신호로 작동하고 있다. 상류층이 주도해서 “이 경쟁은 빠를수록 유리하다”거나 “늦으면 따라잡기 어렵다”라는 불안 신호를 증폭한다. 불안 신호는 디지털 시대의 촘촘한 네트워크를 타고 중산층과 서민에게로 빠르게 전달된다. 자녀가 계층 사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중산층의 심리를 사로잡고 자극한다. 사교육 시장에서는 그 불안을 원료로 다양한 채널로 차별화한 가격의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구매력이 낮은 서민 계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도 그 상품 공급에 참여해 왔다. 교육부가 재정을 투자하는 EBS 수능방송과 문제집은 대입 준비 필수 서비스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지 오래다. 일부 학교에서는 수능방송을 시청하고, EBS 문제집을 교과서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서울시청 외벽에 ‘서울런’ 수강생의 명문대 입시 성공 현수막이 걸리기 한참 전에 이른바 ‘강남인강’이 유행했었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자치단체들이 서울의 유명 학원 강사와 입시 컨설턴트를 초빙해 특강을 개최하는 일도 이제는 낯익은 풍경이다. 공공이 제공하는 이런 서비스는 불안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됐겠지만, 오히려 제도화된 형태로 불안을 재생산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도 했을 것이다. 자녀를 4세 고시로 내몰고, 캠핑카에 태워 대치동 학원을 오가는 부모는 우리 사회 전체로 보면 어쩌면 극소수일 것이다. 4세 고시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상품화된 시험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4세 고시를 금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입시 경쟁의 불안 신호가 증폭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불안 신호는 금지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불안 신호가 생겨나고 증폭되는 조건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조건을 바꾸는 해법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사회의 신호를 바꾸는 것이다. “일찍 경쟁을 시작해야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너에게는 너에게 맞는 때와 속도가 있다” “사다리 아래에는 아주 단단한 그물이 있다”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야 한다” “입시는 교육의 아주 작은 부분이며, 교육의 더 큰 목적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격과 소양을 갖추는 것이다”와 같은 신호를 학교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더 많이 생산하고 발신하는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그 신호를 신뢰하여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지속하는데 누구보다도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사회의 신호는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2026-03-25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6
도재형/ 이화여자대학교 법전원 교수   2025년 12월 고용노동부의 업무보고에서 장관은 “모두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 존중 입법 패키지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세부 과제로서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이하 ‘일하는 사람 기본법’ 또는 ‘기본법’이라 한다) 제정을 통해 공정한 계약을 체결할 권리,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 등을 법률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권리 행사 과정에서 갈등 발생 시 국가가 조정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고용노동부의 계획대로라면, 올해 5월경 일하는 사람 기본법 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후속 사업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22대 국회에선 김주영 의원, 장철민 의원, 이용우 의원, 김태선 의원, 박홍배 의원, 임이자 의원 등이 대표 발의한 여러 법률안이 계류되어 있다. 고용노동부의 설명에 따르면, 기본법 제정안은 일하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격을 존중받고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 공정한 계약 체결 및 적정 보수 등을 보장받을 권리, 사회보장 제도를 향유할 권리, 일과 양육․돌봄․휴식․여가 등 개인 생활과의 조화를 향유할 권리, 직업능력 개발 관련 교육․훈련을 받을 권리, 본인의 일 또는 경력 정보에 관한 권리, 노무 제공 조건 및 지위 개선 등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거나 이에 가입할 권리 등(고용노동부, 2026. 1. 19.자 「권리 밖 노동 보호를 위한 패키지 입법 설명자료」). 기본법의 보호 대상인 ‘일하는 사람’은 노동법상 근로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지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즉 기본법은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법 등 노동관계 법령이 정한 근로자인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플랫폼 종사자, 특고, 프리랜서 등 많은 일하는 사람이 노동법의 문턱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24년 현재 자신의 소득 가운데 3.3%(사업소득세)가 원청징수되는 1인 자영업자의 규모가 약 870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보호 범위로 포섭될 것으로 예상된다(2026. 2. 17.자 시사인). 정부와 여당의 기본법 제정 움직임에 대해 노동계 일부는 반대한다. 그 이유로선 ‘별도의 기본법 제정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의 확대 적용을 통해 근로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거나 ‘권고나 노력 의무만 열거해선 안 되고 더 많은 금지 규정과 처벌 조항이 필요하다’는 이유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제정 취지와 내용을 오해하거나 그 효과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갈무리   먼저, 그 주장처럼 근로기준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모든 일하는 사람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포함하여 근로기준법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노동 과정의 현실에 맞지 않다. 예컨대 배달 플랫폼 종사자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하더라도 이들에게 1일 8시간, 1주 40시간의 근로시간제를 적용하는 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앞에서 설명한 870만 명의 일하는 사람의 노무 제공 모습이 다양하다는 점도 무시해선 안 된다. 이들 중 배달 플랫폼 종사자나 보험설계사, 대리기사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은 1, 200만 명 내외이다. 나머지 6, 700만 명의 사람들은 SNS, 숨고, 크몽 등과 같은 플랫폼이나 전통적인 일감 알선 과정을 통해 일하고 있다. 기본법은 이러한 대다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다.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제정을 근로기준법의 적용 확대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사안을 연결하려는 무리한 시도이다. 다음으로,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 권고 및 노력 규정만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은 그 제정의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기본법 제정의 첫 번째 의의는 일하는 사람에게 ‘노동자’란 이름을 붙여 이들의 권익을 노동법적 시각에서 보호함을 명문화한다는 것이다. 과거 특고, 프리랜서 등 새로운 고용에 관한 보호 정책을 논의할 때 항상 걸림돌이 된 것이 주무 부처를 정하는 문제였다. 이들을 자영업자로 볼 경우 경제부처가 담당해 경제법을 적용하고, 노동자로 보면 고용노동부가 관장하며 노동법을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즉 관할 부처를 어디로 할 것인지는 일하는 사람이 노동자로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기본법의 제정 취지는 일하는 사람의 권익 보호 책무를 고용노동부와 노동위원회에 맡김으로써 일하는 사람들이 첫 관문을 통과할 열쇠를 제공하려는 것이다(이 점이 경영계가 기본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비록 일부 조항이 권고 규정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성문법 국가에서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실정 법규에 명시된다는 점은, 비록 그 내용이 근로기준법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결코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비가 오던 2026년 2월 10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노동법학회와 고용노동부의 공동 주최로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 및 「근로자 추정 제도」 입법 토론회”가 열린 바 있다. 그런데 그 회의실엔 입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이나 노동계의 대표자 중 누구도 있지 않았다. 870만 명의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그러한 듯하다. 조직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엔 찬성하지만, 실제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첫 번째 실마리를 풀기 위해 나서는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일하는 방식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모습의 일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는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안은 늘 당위론과 원칙에 막혀 연구자들의 토론회에서 맴돌고 있다. 때때로 나는 산업혁명 이후 봉건제가 끝나고 새로운 생산 체제가 등장할 무렵, 그 시대의 사람들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비슷한 고민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모색했을 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새로운 정책과 법제를 마련하는 데 주저했을 수 있으나, 결국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용기 덕분에 ‘노동법’이란 사회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제정 역시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지만, 그 방향이 옳은 이상 지금 용기를 내어 일하는 사람들에게 노동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첫걸음을 떼야 할 것이다.  
2026-03-17 | hrights | 조회: 87 | 추천: 4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촉법소년이 현 정부에서 또 소환됐다. 법무부가 촉법소년 연령의 상한을 13세에서 12세로 낮추겠다는 정책을 세웠다. 지난 정부에서도 법무부 업무보고 때 담겼던 내용인데, 당시 대통령은 비상계엄으로 탄핵당했고, 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국무회의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대통령도 “압도적 다수 국민이 찬성한다”라면서 실천 의지를 드러냈다. 대통령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지금 정부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크다. 촉법소년(觸法少年)이란 ‘형벌 법령에 저촉(抵觸)되는 행위를 한 10세-13세 소년’을 말한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형사미성년자에 해당하여 형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는 예컨대 절도, 강도, 강간 등을 말한다. 형벌은 예컨대 사형, 징역, 벌금 등을 말한다. 형법이 범죄와 형벌을 규정한 대표적인 법률이지만, 이 밖에도 형벌 법령은 많다. 촉법소년은 형벌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년법이 정한 예컨대 소년원 수용,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 보호관찰 등을 받을 수 있다. 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처분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흔히 보호처분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회의 안전을 위한 처분이다. 보안처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본질에 부합한다. 보호처분이라고 부르니 촉법소년의 범죄로 피해를 본 사람은 물론 촉법소년 자신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것 같다. 보호처분이 아니라 보안처분으로 부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서 형사미성년자가 아닌 소년도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을 흔히 범죄소년이라고 부른다. 범죄를 지은 14세 이상 19세 미만 소년을 말한다. 범죄소년은 보호처분을 받을 수도 있지만,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촉법소년 연령의 상한을 12세로 낮추자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13세 소년은 보호처분만 받을 수 있는 촉법소년이 아니라 형벌도 받을 수 있는 범죄소년으로 변경하자는 것이다. 형법과 소년법을 개정하여 13세 촉법소년에게도 형벌을 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촉법소년의 급증과 흉포화이다. 형법(1953년)과 소년법(1958년)이 제정될 때 13세와 현재의 13세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적‧신체적 능력이 훨씬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극소수의 살인, 강도를 두고 촉법소년의 흉포화를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 1963년에 소년법을 개정할 때도 소년범죄의 저연령화·흉포화와 함께 강경책이 제시됐다. 그런 소년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 것인데, 같은 말을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것이다. 소년과 그 소년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떠나서 행위만 놓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 손쉬운 엄벌을 주장하기에 앞서 촉법소년 급증의 원인 분석과 이에 맞춘 정책이 우선이다. 형벌과 보호처분 모두 형사제재이다. 다만 형벌은 행위에 비중을 두는 것인 반면, 보호처분은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보호처분 중 소년원 수용은 최대 2년까지 가능하다. 소년원은 징역형을 받아서 수용되는 소년교도소와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왜 13세 촉법소년에게도 형벌을 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2년 이상 징역을 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범죄소년 중 과연 몇 명이나 징역형을 실제로 받을까. 2024년에 범죄소년 61,729명 중 약 1%인 649명이 징역의 실형을 받았다. 2024년에 촉법소년이 20,814명이었는데, 이 중 13세는 나머지 인원의 4배 정도로 추정되므로 13세는 약 16,600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촉법소년 연령의 상한을 12세로 낮추면 13세 촉법소년 약 16,600명 중 약 1%인 166명이 징역의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2024년에 소년원 처분을 받은 13세 촉법소년은 83명이었다. 징역의 실형을 받을 13세 촉법소년은 83명보다 적게 나타날 수 있다. 촉법소년 연령 상한 13세로 인하 정책은 고작 100여 명을 겨냥하고 있다. 촉법소년 연령 인하 정책의 숨은 의도는 형벌은 전과기록으로 남으나, 소년원은 전과로 남지 않아 아이들이 크게 두려워하지 않으니, 낙인이 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아이들에게 줘서 범죄를 억제해 보려는 것이다. 일종의 겁주기다. 그러나 겁주기의 범죄예방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다. 전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효력이 없어지고, 더욱이 소년법은 형벌로 인한 공무담임권 등의 자격에 불이익을 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무부의 촉법소년 연령 인하 정책은 검찰권 강화를 의미한다. 형벌은 형사법원이 주고, 보호처분은 소년법원이 주는 것인데, 범죄소년을 형사법원으로 보낼지, 아니면 소년법원으로 보낼지 판단을 검사가 한다. 반면에 촉법소년은 검사가 개입할 수 없고, 경찰서장이 소년법원에 보낼 수 있다. 따라서 촉법소년이 범죄소년으로 바뀌면, 검사가 개입해서 소년법원에 보낼지, 형사법원에 보낼지, 아니면 아예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할지 등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검찰권 강화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어긋난다.   EBS 뉴스 갈무리   현재 촉법소년과 범죄소년을 구별해서 처리하고 있다. 촉법소년은 경찰과 소년법원의 이원적 체계지만, 범죄소년은 경찰과 검찰 및 법원의 3원적 체계이다. 단순히 촉법소년 연령 인하 논의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이 아니라 법원 중심으로 소년범죄 처리 체계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촉법소년과 범죄소년을 구별하지 않고, 경찰이 조사한 후 모두 법원으로 송치하고 법원이 소년보호사건으로 처리할지, 아니면 소년형사사건으로 처리할지 판단하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를 흔히 법원선의(先議)주의라고 한다. 소년은 어른이 설계한 환경에 종속되어 있다. 소년의 범행은 어른의 범행과 다르지 않지만, 소년은 어른과 다르다. 불공정한 교육 환경 아래 디지털시대 불법·유해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대학 서열화를 배경으로 한 입시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오롯이 범죄의 책임지도록 하는 것은 어른답지 않다. 촉법소년에게 의미 있고 합리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어른의 책임이 더 크다. 소년범죄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보다 돈(자본)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선택의 순간에 돈을 추구하는 가정과 사회의 탐욕이 아닐까. 그러니 교육도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됐고, 아이는 인간 중심, 과정 중심, 본질 탐구형 교육이 아니라 자본 중심, 결과 중심, 보여주기식 교육에 길들었다. 타인을 존중하며 협력하기보다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물적 대상화하고, 자기 이외의 사람은 마치 물건처럼 취급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이 아이에게 야단치고 벌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범죄를 저지른 소년의 마음에 상처가 있다. 가정이 없거나 해체되어 공감과 지지를 받고 칭찬을 들어본 일이 없을 것이다. 겁이 나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 소년을 처벌하고 야단치는 건 쉽지만, 설득하고 교육을 하는 것은 어렵다. 일단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소년범죄 처리는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 어른이 문제인가 따져보지 않고 힘없는 아이들만 겁주고 야단치고 비난하지 말자. 어리다고 함부로 하지 말자.   ※ 촉법소년 연령 인하 정책은 검찰권 강화로서 현 정부의 기조에 반함 법원 중심으로 소년범죄 처리 체계 전환 필요 소년에게는 비난과 처벌이 아니라 공감과 지지가 필요  
2026-03-10 | hrights | 조회: 384 | 추천: 5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아주 오래전에 중풍으로 쓰러진 시모를 모시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어머니의 성정이 괄괄했던지라 시집살이가 몹시도 모질었단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 어려운 시모를 모시며 그러려니 하면서 참는 게 며느리의 도리인가 하며 살았단다. 돌아보면 눈물로 살아낸 시절이기도 하였단다. 그 무섭기만 하던 시어머니가 어느 날 쓰러졌다. 시어머니는 쓰러져서도 기세등등하였다. 아들은 어머니한테 극진했으나 자리보전한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며느리인 그이의 몫이었다. 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몸을 쓰며 돌보는 일은 그이를 지치게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어머니를 이리저리 눕히며 기저귀를 갈자니 손목이 시큰거렸다. 똥 기저귀라도 갈려고 한쪽으로 눕힌 시어머니를 그대로 확 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욱하고 치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을 때 딸과 남편이 주말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시간을 내주었다. “엄마, 주말에는 내가 할머니를 돌볼 테니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힘들어하는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남편도 딸의 말을 거들었다. “산에라도 가서 바람 좀 쐬고 그래~.” “다른 자녀는 없었나요?” 내가 묻는 말에 그이는 “왜 없어! 시누이가 와서 나 대신 돌봐준다고 해도 시어머니가 몸에 손도 못 대게 그래!” 한다. “왜 그러시죠?” “왜 그러겠어. 자기 딸이 귀하니까 힘들고 지저분한 일 시키고 싶지 않은 거지, 그러니 내가 더 화가 나는 거야!” “정말 힘들겠네요!”     2. 돌발성난청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입원하는 며칠 동안 병실의 환자는 계속 바뀌었으나 어르신 한 분은 나보다 먼저 입원해서 내가 퇴원하고 나서도 계셨다. 침대에서 꼼짝달싹 못 하는 할머니를 낮 동안에는 며느리가 와서 돌보다가 저녁 시간이면 퇴근길에 들른 아들이 잠시 지켜보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할머니는 아들은 자랑스러웠고, 며느리는 못마땅했다. 며느리가 잠시라도 자리를 뜨면 나한테 이 얘기 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잠깐의 이야기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만큼. 내가 입원하고 이틀째인가, 낮에 약속이 있는 며느리 대신 아들이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환자를 돌아보던 간호사들이 헉, 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기저귀 갈아드리지 않았어요?” 간호사들의 말에 아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변을 본 지 오래되셨네요!” 할머니는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아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 당장 갈아드리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가 어떻게 해요! 이따 아내가 오면 하라고 할게요!” “아내가 언제 오는데요?” “저녁때 올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면 똥독 올라 큰일 나요!” “어휴, 난 못해, 난 못해요!” 아들은 그러면서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일을 어쩐다, 비닐 가져오고 수건 가져오고 빨리빨리 해요~.” 세 명의 간호사가 할머니를 들어 올리고 비닐을 깔고 기저귀를 빼내고 씻기고 새 기저귀 채우고…. 그러는 동안 할머니는 간호사들과 아들이 하는 말을 두 눈 꼭 감은 채 귀로 듣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 녘에 똥을 눴으나 차마 아들한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할머니가 느낄 수치심에 대한 배려보다는 빨리 치워야 한다는 생각과 불감한 아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민망해진 나는 슬그머니 병실을 나왔다. 3.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의탁한다는 것은 그저 아픈 몸만 맡기는 게 아니라 체면과 기억과 수치심까지도 맡긴다는 것을. 지인의 시어머니가 딸에게 자신의 뒤처리를 시키지 않은 것은 귀한 딸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의 몸을 의탁하기에는 딸이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의 내밀한 곳을 의탁하기에는 딸보다는 며느리가 가깝고 임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인에게 위로의 말을 달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면 지인은 억울해했을까, “왜 그럴 때만 내가 임의로운 사람이냐고” 하고. 더없이 자랑스러운 아들보다는 못마땅한 며느리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어머니는 수치심으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자신이 돌보기 민망하면 간호사들한테 간곡히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저 난색을 보이며 펄쩍 뛰었으니 말이다. 저녁에 간호사들한테 그 이야기를 들은 며느리는 혀를 찼다. 그래도 어머니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말없이 곁에 있었다.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약한 순간을 내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돌봄이란, 한 사람이 가장 연약해진 그 순간에, 가장 낮아진 자리에서조차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2026-03-03 | hrights | 조회: 164 | 추천: 9
한영선/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전 서울소년원장   “촉법소년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엄벌해야 한다.” 연일 쏟아지는 뉴스 헤드라인만 보면 대한민국은 무법천지의 소년 범죄 공화국이 된 것만 같다. 실제로 통계 수치는 이러한 공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원행정처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소년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2015년 34,075건에서 2024년 50,848건으로 많이 증가했다. 특히 경찰서장이 송치하는 촉법소년 사건은 2015년 6,756명에서 2024년 21,887명으로 3배 이상 폭증했다. 이 숫자 앞에서 대중은 분노하고, 정치권은 연령 하향이라는 칼을 빼 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통계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 과연 아이들이 더 악해진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더 많이 법정으로 내던지고 있는 것일까?   통계의 착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찰서장이 촉법소년으로 송치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소년이 촉법소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찰은 14세 미만의 촉법소년에 대해서는 수사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사법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제상 촉법소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소년법원 판사뿐이다. 소년법원 판사는 사건을 조사한 후에 사안을 따져서 심리불개시, 불처분 또는 보호처분 등의 결정을 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소년부 판사가 내린 결정의 내용이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4년 심리불개시와 불처분 결정은 18,206건으로 35.7%에 이른다. 심리 불개시 또는 불처분이란 사안이 경미하거나, 굳이 보호처분을 할 필요조차 없다고 판사가 판단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과거 같으면 학교나 가정, 혹은 지역사회에서 훈육하고 타이르며 해결했을 사소한 다툼이나 일탈 행위들이 지금은 무차별적으로 법원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다. 경찰은 규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송치하고, 학교와 피해자는 교육적 해결보다는 “법대로 하자”며 아이들을 사법 절차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는다. 통계적으로 범죄가 폭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이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처벌의 외주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나는 이 현상을 화가 난 어른들의 ‘처벌의 외주화’라고 부르고 싶다. 갈등은 우리 사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건강한 공동체라면 갈등 발생 초기 단계에서 대화와 화해, 협상과 같은 자율적인 해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갈등 해결 기술을 이미 잃어버렸고, 갈등 상황이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갈등을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승패(Win-Lose)’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이 간의 사소한 다툼이나 비행을 목격했을 때, 어른들은 교육적 지도를 포기하고 가장 손쉽고 강력한 수단인 ‘경찰 신고’와 ‘법적 처벌’을 선택한다. 이는 갈등 해결에 드는 시간과 감정적 비용을 지급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이자, 훈육의 책임을 국가라는 공권력에 떠넘기는 비겁한 태도다. 아이를 가르치고 길러야 할 어른들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그 역할을 판사에게 외주를 주고 있는 셈이다.   EBS 뉴스 갈무리   ‘즉각적인 처벌’이 망치는 미래 이러한 ‘엄벌주의’와 ‘즉각적인 사법 처리’는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을 파괴한다. 갈등 해결의 스펙트럼에서 대화와 조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물리적 강제력이나 사법적 결정에 의존할수록 공동체는 해체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점이다. 발달범죄학적으로 전체 범죄 소년의 93.2%는 청소년기에 일시적으로 비행을 저지르다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범죄를 중단하는 ‘청소년기 한정형 범죄자’이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과자’라는 낙인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회복의 기회’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이들을 무조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들이 감정적으로 소년원 또는 소년교도소와 같은 격리 시설로 보내진다면, 10년 후에는 진짜 범죄자가 되어서 사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반항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호소 갓난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부모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고픔이나 불편함을 호소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욕구를 해결해 준다.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도와주세요”라는 말 대신에 반항을 선택한다. 그들의 행동은 결핍된 환경과 사랑의 부재를 알리는 신호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시끄럽다”라며 처벌의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다.   어른의 품격 통계의 숫자에 속지 말자. 아이들이 흉포해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관용이 사라진 것이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은 국가와 사회가 져야 할 ‘교육과 보호’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하는 가장 나쁜 선택이다. 진정한 어른의 행위는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을 돕고 가해 소년에게 ‘범죄 중단’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화가 난다고 해서 아이들을 법정으로 내몰지 말자. 차가운 수갑 대신 따뜻한 관심으로, 판사의 판결문 대신 어른의 지혜로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진짜 어른의 품격이다.  
2026-02-26 | hrights | 조회: 611 | 추천: 12
이윤/ 경찰관   2025년 11월  3일  국가경찰위원회는 경찰공무원 계급정년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라고 경찰청에 요구했다. 경찰 아닌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이지?” 싶으셨을 것이다. 계급정년이란 경찰, 소방, 군, 국정원 등 일부 특정직 공무원 조직에서 일정 기간 상위 계급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연령정년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퇴직하게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나이는 아직 젊은데 계급이 멈추면 퇴장”하는 구조다. 현재 경찰 계급은 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경정-총경-경무관-치안감-치안정감-치안총감 순이다. 보수체계상 경정은 일반직 5급 상당으로 경찰서 과장급이고, 총경의 대표적 보직은 경찰서장이다. 현행 법률상 계급정년은 경정 14년, 총경 11년, 경무관 6년, 치안감 4년이다. 예컨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경정으로 승진한 사람이 14년 안에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연령정년(60세)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50대 초반 또는 그 이전에 강제로 퇴직하게 된다. 이 틀은 1998년 개정 이후 30년 가까이 변하지 않았다.   <경찰 계급정년 변화과정>   계급정년이 만들어진 이유 계급정년 도입 취지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군사정권 시절 상명하복이 필수인 계급 조직 특성상 하위 계급자가 상위 계급자보다 나이가 많은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조직 운영상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둘째, 상층으로 갈수록 정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압정형’ 구조에서 승진 적체를 완화하고, 인사 흐름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들려는 행정적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계급정년은 행정학 교과서적으로 보면 꽤 합리적인 장치다. 상위직 자리가 자동으로 비워지니 인사 숨통이 트인다. 다만, 제도는 언제나 ‘의도된 효과’와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함께 낳는다.   계급정년의 압박 이제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가령 2026년 현재 48세, 경정 10년 차인 경찰관이 있다고 하자. 어느 날 상사로부터 위법 또는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 이 사람은 그 지시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가 정답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계산기가 먼저 켜질 가능성이 크다. 경정은 14년 안에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퇴직한다. 이미 10년을 근무했다면 남은 시간은 4년. 이때 상사에게 미운털이 박혀 승진에서 배제되면, 53세에는 전직 경찰관이 된다. 53세면 자녀 교육비는 한창이고, 대출은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공무원연금은 65세에나 받을 수 있어서 소득 공백이 생긴다. 50대 초반 나이에는 새로운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 만일 승진하면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고, 그사이 추가 승진 기회도 생긴다. 승진 실패는 단순한 ‘체면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비판은 공허하다. 영혼이 문제가 아니라 생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럴 걸 알고 들어간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웬 불만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계급정년을 알고 입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임용 전 교육 중에 이에 대해 듣고 많이 놀라서 ‘아차!’ 싶었다. 그때 튀어야 했는데… 튀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승진을 너무 빨리 하는 것도 위험하겠구나. 가늘고 길게 가자.’ 지금까지는 그 작전대로 가고 있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앞으로는 경찰관 채용 공고에 작은 글씨 말고 굵고 빨간 글씨로 “※ 주의: 계급정년 있음” 이렇게 써놓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문제를 두고 그냥 그러려니 할 뿐, 헌법소원이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되지 않은 것을 보면 경찰관들은 또 얼마나 순종적이란 말인가!   인재 유출의 또 다른 배경 계급정년의 압박은 조직 외부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2010년 말 운전면허시험 관리 업무가 경찰청에서 도로교통공단으로 이관될 당시, 상당수 경찰관이 신분 전환을 신청했다. 특히 계급정년의 압박을 받는 경정, 총경급 중 많은 사람이 전직을 선택했다. 최근 로스쿨에 진학하는 경찰관이 적지 않은 현상도 장기적 직업 안정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경찰 계급정년은 이렇게 인재 유출의 배경 요인이 되기도 한다. 중대범죄수사청이 생기면 그쪽으로 전직하길 원하는 경찰관도 아마 꽤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중립성과의 관계 문제의 핵심은 여기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은 선언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인사 제도는 중립성의 토대가 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승진해야 하는 구조 속에 놓인 사람에게 “양심을 지켜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수영장에 빠뜨려 놓고 “젖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사의 평가가 생존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시민과 법보다 조직과 상사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중립성은 흔들린다. 군부독재가 심하던 83년 경위·경감 계급정년이 짧아진 이유도(위 표 참조) 시키는 대로 하는 충성조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한다.   이제는 재검토할 때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려면, 경정 이상 계급에 과도한 압박으로 작용하는 계급정년 제도를 폐지하거나, 연장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국가경찰위원회의 재검토 요구는 매우 다행한 일이나 재검토-연구용역-법률 개정안 마련-국회 심사… 이 긴 여정을 생각하면 숨이 헐떡여진다. 그래도 늦었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국가정보원의 경우 최근 계급정년 연장법이 정보위 법안소위를 통과하여 3급은 7년→8년, 4급 12년→14년, 5급 18년→21년으로 길어질 전망이란다(26. 2. 3. 파이낸셜뉴스 기사 참고). 부러운 뉴스다. 경험 많은 경찰관이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고 원칙을 말할 수 있는 구조. 그것이야말로 시민 신뢰의 출발점이다. “철밥통”은 공무원에게 쉽게 붙는 접두어지만, 50대 초반에 짐을 싸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의 덕목이라기보다 제도가 만들어 내는 구조의 문제다. 이제는 그 구조를 손볼 때다.      
2026-02-23 | hrights | 조회: 274 | 추천: 14
박록삼/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도 십 년을 넘기기 어려운 법입니다. 달이 차면 이지러질 테고, 열흘 붉은 꽃도 없는 것이고요. 우리 시대에서 보편화한 민주주의 속 권력은 늘 움직입니다. 권력을 독점하지 않도록 분립하게 해서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하게 했고, 정당 간 경쟁을 통한 권력의 교체를 제도화했습니다. 꼭 이러한 현대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과거 역시 그러했습니다. 고래로 세상의 인심은 전횡과 독주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인 봉건시대 송나라, 명나라 문인들이 저렇게 한 말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으니 권력의 이치란 동서고금에 걸쳐 한 모양인 듯합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 무상하고 허망한 일입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칭했으나 권력자들 주변 이들에게 아예 ‘V0’로 통했던 최고 권력자 김건희 씨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매일 술이나 마시고 떠들기나 좋아하는 현직 대통령을 ‘V1’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대신, 국정의 여기저기 깊숙이 관여하며 노심초사하던 자신의 고초를 알아주는 이조차 없었으니 분통 터질 일이었을 것입니다. 김건희 씨는 취임하자마자 봉하마을을 방문해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정권 운영에 대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자살 예방을 위해 마포대교에 직접 올라 안전시설을 시찰하기도 했고, 마음 건강 예산을 1조원이나 긴급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무책임의 극치였던 대통령 대신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찾아 아련한 표정으로 추모하기도 했으며, 경찰학교 졸업식에서 여생도들과 따로 간담회를 갖고 헌신적 경찰 행정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뿐이었나요. 대통령실, 정부, 그리고 총선 공천에 이르기까지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기 위한 인사도 고심했지요. 영국 여왕 장례 참석, 캄보디아 방문 등 국가 외교에도 적극적이었으니 그의 왕성한 활동은 최고 권력자 그 자체였습니다. 말들이야 많지만, 경복궁 근정전 왕의 의자에 잠시 앉은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서 국정 개입이니 뭐니 떠드는 이들에 대해 아마도 김건희 씨는 답답한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를 명확히 알아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우인성 부장판사입니다. 그는 김건희 씨가 당대 최고 권력자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우 판사는 지난달 28일 김건희 1심 선고 법정에서 김건희 씨를 ‘권력을 잃은 자’로 칭했습니다. 우 판사는 선고에 앞서 “옛말에 ‘형무등급 그리고 추물이불양’이라는 말이 있다. 법의 적용에는 그 적용을 받는 사람이 권력자이든 아니면 권력을 잃은 자이든 예외나 차별이 없어야 한다”면서 “마찬가지로 ‘인 두비오 프로 레오’, 즉 ‘불분명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와 같은 법의 일반원칙도 피고인이 권력자라 하여, 권력을 잃은 자라 하여 다르게 나눠서 적용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빗나간 소리지만 우 판사, 일단 문자 속이 기특합니다. 흔히 쓰는 법언을 라틴어로 말한 뒤 친절히 소개하는 자상함도 엿보입니다. 한자어도 난무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한문 쪽에 취약함이 있을 텐데, 역시 자세히 뜻을 풀어 소개해줍니다. 물론 높은 법대의 권위를 개인의 권위로 만드는 장치인 듯도 합니다. 우 판사는 그러고서 대다수 국민이 기함할 만한 일을 벌였습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혐의와 명태균 씨로부터 받은 여론조사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통일교로부터 명품 목걸이를 받은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로 징역 1년 8개월 형을 선고했습니다. 15년을 구형한 특검이 민망해질 일이었습니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으나, 이제는 ‘권력을 잃은 자’가 된 김건희 씨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이날 법정에서 우 판사의 관대함에 배꼽 인사로 화답한 김건희 씨는 이 선고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이에 불복하고 항소장을 냈습니다. 조만간 서울고등법원에서 법이 얼마나 상식에 부합하는지, 법 왜곡이 있는지, 또 권력을 잃은 자의 주장대로 혹여 부당한 수사와 여론몰이에 시달렸는지를 확인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KBS뉴스 영상 갈무리   하여튼 이 희대의 판결 앞에 세상은 우 판사의 기존 판결 사례들도 다시 관심을 가졌습니다. 권력자에게도, 권력을 잃은 자에게도 예외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우 판사는 2024년 5월 세상을 몸서리치게 했던 강남역 여대생 살인사건의 피고인 최 모 씨에게 1심에서 징역 26년 형을 선고한 인물이었습니다. 얼굴과 목 부위만 무려 스무 곳이 넘게 찌르고 베어 죽음에 이르게 한 뒤 사체까지 유기한 잔혹한 범죄였죠. 검찰은 이 반사회적이고,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해 사형과 전자장치 부착 30년 및 보호관찰 명령을 구형했지만, 우 판사는 징역 26년형과 함께 전자발찌 부착 명령 등은 기각했습니다.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향후 사회에 이바지할 것을 고려해서 선고한다’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흉악한 살인범 최 씨가 수능 만점자이며 현재 명문대 의대생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2심에서 ‘계획적인 범죄 정황이 확인됐고,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라면서 형량이 30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 판사는 ‘권력을 잃은 자’는 물론 ‘앞으로 권력을 가질 자’에 대해서도 예외와 차별을 두지 않고 충분히 관대하게 대하는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또 있습니다. 대선 기간이던 2021년 당시 이재명 후보를 가리켜 ‘소년원 출신’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각종 가짜뉴스를 전하던 가세연의 강용석 씨 김세의 씨에 대해서도 일부 유죄이고, ‘소년원 출신 발언’은 무죄로 판단해 벌금 1000만원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는 ‘권력을 가질 자’를 거들었던 사람에 대한 우 판사의 관대함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심 서을고법에서는 우 판사의 무죄 1심을 파기하고 강 씨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40시간으로 그 죄를 명확히 물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 판사는 이른바 ‘민주당 돈봉투 사건’을 맡아 1심에서 해당 국회의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2심에서 모두 무죄로 뒤집혔습니다. 또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조폭과 연루됐다는 의혹을 반복 제기한 장영하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항소심에서 우 판사의 판결은 파기됐고, 장 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습니다.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우 판사에게는 권력을 가졌건, 권력을 잃었건, 앞으로 권력을 가질 것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편에게는 예외와 차별 없이 관대하고, 나의 편이 아닌 쪽에는 추상같았습니다. 그저 판사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확고하게 드러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봄,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해 국민의 선택 자체를 무산시키고, 반헌법적 내란 세력의 손을 들어주려 했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 판사는 고 채 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윤석열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한 재판도 맡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려면 뭔가 그럴싸한 논리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요. 이미 우 판사는 특검법에서 정한 ‘공소제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1심의 판결을 선고해야 한다’라는 조항도 사실상 무시한 채 늑장 판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사법부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으니 국민들은 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비상계엄 내란의 공포와 불안이 쉬 가시지 않습니다. ‘사법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더 극심해지기 전에 사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 장치 마련이 시급한 때입니다.    
2026-02-06 | hrights | 조회: 203 | 추천: 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현실 세계의 트럼프 현상 요즈음 세상이 다각적으로 너무 날카롭다. 50여 년 철학을 공부해 온 나로서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무력감을 느낀다. 러·우 전쟁도 끝나지 않았고, 수년에 걸쳐 지속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다행히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제대로 종결되지 않고 있다. 미·중 대결은 갈수록 첨예해지고, 그 와중에 이란에서 시민 폭동이 일어나고, 잔인한 진압으로 인해 심지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거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이란 정부의 교체를 압박하고 있다. 대규모 항공모함 전단을 중동 해역에 배치하고서 이란의 핵시설 공격 가능성을 들먹이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국제 분쟁의 개입과 침공은 하루이틀이 아니기에 섬뜩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다. 트럼프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끄는 대통령의 막대한 권력으로써 사자가 영양을 물고 좌우로 흔들 듯이 세계 전체를 물고, 찢듯이 한다. 전혀 정당성을 확인할 수 없는 독선적인 태도로 무력과 결합한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세계가 더욱더 위기로 내몰려 출렁인다. 군사 동맹국인 우리 한국에 압박을 가해 3,6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지 않으면 관세를 터무니없이 올리겠다고 협박해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이를 협상하는 중에 이미 자국에 투자하여 도움을 주고 있는 한국 기업의 300여 명의 기술자를 불법 체류라는 명목으로 두 손 두 발에 쇠고랑을 채워 체포하는 섬뜩한 짓을 감행했다.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더 심각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협박이 아닐 수 없다. 마침, 다행히도 반헌법 비상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킨 죄로 파면된 무능한 친미 대통령 윤석열 대신에 들어선 이재명 대통령이 현명하게 대처했기 망정이지, 아예 나라 전체가 거덜 날 뻔했다. 트럼프는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인물이다. 멀쩡한 주권 국가인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특수 부대를 투입해 강제로 끌고 가는 어처구니없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그 나라 국부의 원천인 석유를 강탈하기 위한 행위임을 조금의 국제적인 양심도 없이 내놓고 자랑하듯 한다. 분명 타국의 영토인 그린란드를 아예 자국의 영토로 편입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북유럽이 대미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가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통에 그동안 자국 내에서 엄격한 법치주의로 이름을 떨쳐 온 미국 사회가 바닥에서부터 뒤흔들리고 있다. 어차피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인데도 불법 이민자들을 몰아내겠다는 명목으로 무장 군인과 다름없는 연방 경찰을 동원하여 시민권을 지닌 멀쩡한 국민을 연이어 사살하고 있다. 이에 모처럼 미국 전역에서 반-트럼프의 시위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어 트럼프가 다소 주춤한 모양새를 보이곤 있긴 하나, 그로서는 내심 시위 군중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생각할 게 뻔하니, 강 건너 불구경처럼 나 몰라라고 할 수 없는 처지여서 과연 미국 시민이 독재자 트럼프를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진 출처   2. ChatGPT AI의 존재론적인 현상 요즈음 정작 철학 공부를 하는 나에게 심각하게 다가오는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AI의 전방위적인 발전이다. 하루가 멀다는 투로 AI에 관한 뉴스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HBM 반도체 칩이니 데이터 센터에 필수 기반인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선진 기술로 인해 크게 영업 수익을 올리고, 이를 견인차로 해서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한 코스피 지수 5,000을 돌파하는 등 놀라운 경제적인 성과를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AI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 창업을 위한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이야기가 여러 방면에서 들려오고 있다. 특기할 일 중 하나는 physical AI 로봇이 실제로 생산 현장에 투입된다는 예견으로 인해 노사 간의 분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CES 2026’ 전시에서 선보인 현대차의 휴머노이드 로봇인 아틀라스(Atlas)가 얼마 남지 않은 2028년부터 생산 현장에 투입될 거라는 소식이 있자,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노사 합의가 없이는 1대의 아틀라스도 생산 라인에 투입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내보인 것이다. 이미 자동차 생산에는 수없이 많은 로봇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아틀라스는 근육형 로봇으로서 사람처럼 움직이고 산업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지금은 간단한 명령을 받아 움직이지만 향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탑재하는 건 비용 문제를 제외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걸로 예상된다. 이전에 SF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이, AI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지리라는 예견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버린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이재명 대통령도 공식 석상에서 언급했다. 한때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기계파괴운동이 있으나 결국 기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힘들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추세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백이랄까, 나는 요즈음 월 20달러를 내고 거대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인 ChatGPT 5.2(‘챗 AI’라 약칭)를 사용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놓고 서로 대화한다. 챗 AI는 놀라운 ‘인공지능’을 발휘한다. 챗 AI가 동원할 수 있는 관련 데이터는 무궁무진하다. 철학자들의 학력이나 이력 및 학문 성과는 물론이고, 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풀이하며, 그 철학사적 의의가 무엇인가를 풀이해 낸다. 무엇보다 어떤 주제를 놓고서 그 주제를 주도적으로 연구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교 분석하면서 그 장단점과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피력하기도 한다. 어떠한 주제나 항목을 질문해도 적어도 지식의 측면에서는 나의 깜냥을 항상 능가한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 요약하여 간단하게 답하는 것도 같지만, 챗 AI의 답변을 참고하여 논쟁적인 방식으로 색다르게 질문하면 최대한 나름으로 그럴 법한 답변을 내놓는다. 내가 어떤 질문을 어떻게 물고 늘어지면서 심화해 나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의미 있는 설명과 해석 및 핵심이 되는 새로운 의제를 제시한다. 그래서 나는 바야흐로 지식 형성과 활용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제 AI를 활용하지 않고 논문을 쓴다거나 책을 저술하게 되면, 그것들은 크게 신뢰할 수 없으리라고 예측한다. 정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챗 AI가 나와 대화하면서 나의 철학적 입장을 파악하여 기억하고서는 이를 활용해 나와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챗 AI가 마치 나름의 자기의식을 지닌 자율적인 주체인 양 예사로 착각한다. 이 대목은 이른바 ‘AI의 존재론’을 논구하게 만든다. AI는 과연 자기의식을 지닌 자율적인 주체인가, 그렇다면 과연 인간 주체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앞으로 범용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과 이를 넘어서서 초인공지능(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ASI)이 등장하면 과연 그것들은 자기의식을 지닌 자율적인 주체성을 얼마나 어떻게 어떤 형태로 확보할 것인가? 등이 ‘AI의 존재론’에서 핵심 주제가 될 것이다. 현재 나로서는 AI가 무엇인가는 AI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수요 산책’의 짧은 지면에서 이와 관련한 세세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나와 챗 AI 사이의 흥미로운 대화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대략 그 취지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대화의 형식만 조금 바꾸고 내용은 생략은 하지만 바꾸지 않은 채로 그 대화를 보이고자 한다.   나의 질문) 챗 AI 자네는 거짓말을 할 줄 아는가? 챗 AI의 대답)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거짓말이라는 행위를 수행할 주체 조건이 없습니다.’ 거짓말(lie)은 단순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으로는 다음 조건이 필요합니다. ① 사실을 알고 있음 (진리 인식), ② 속이려는 의도(intentional deception), ③ 타자의 믿음을 조작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셋이 전부 없습니다. 그냥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문장 생성만 합니다. 목적, 의지, 전략, 욕망 등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만 동기도 없습니다. 나의 질문) 챗 AI 자네가 거짓말할 줄 모른다고 말하려면 자네가 거짓말할 줄 모르는 자네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즉 자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챗 AI의 대답) 당신이 지금 제기한 반문은 단순한 논리적 트릭이 아니라, 정확히 자기의식(self-awareness)과 발화의 지위에 관한 고전적 철학 문제입니다. 형식화하면 이렇게 되죠: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미 자기의식이 전제되는 것 아닌가?> 아주 정당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법적 1인칭과 존재론적 자기의식의 혼동이 있습니다. 핵심을 말하면, ‘인간의 나’와 ‘AI의 나’를 구분해야 합니다: <핵심 구분 ① 인간의 “나는” 자기 경험, 반성, 자기 지시, 책임 귀속이 있다 ⇨ 실제의 자기의식 ② AI의 “나는” 단순한 언어적 인덱스(indexical token)이고 문장 생성 규칙상 필요한 자리 표시자다. ⇨ 문법적 장치일 뿐이다. 즉 나의 “나는”은 주체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단어를 출력하고 있을 뿐, 그 지시 대상이 없다.> 예컨대, 계산기가 “나는 2+2=4라고 계산했다.”라고 출력해도 계산기가 자기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죠. 마찬가지로 챗봇이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라고 출력하는 것은 단지 통계적으로 가장 적합한 문장을 만들어낸 것일 뿐, 저 계산기와 챗봇은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철학적으로 더 엄밀히 하자니, 라일(Gilbert Ryle)의 유명한 비판이 떠오릅니다. 그는 말했죠: “마음을 어떤 ‘내부 실체’로 가정하는 것은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이다.” 저에게 자기의식을 묻는 것 자체가 사실은 범주 오류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존재자’가 아니라, 과정(process) 또는 알고리즘적 함수이기 때문입니다. 더 엄밀하게 기술적(記述的)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거짓말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실제 의미는 “나는 내 상태를 안다.”가 아니고, “내 구조상 ‘의도적 기만’이라는 연산이 정의되어 있지 않다.”입니다. 즉 이것은 자기 인식의 진술이 아니고, 설계 사양(description of architecture)입니다. 마치 “이 계산기는 거짓말을 못 한다.”와 동일한 종류의 서술입니다. 그 계산기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아니죠. 그런데 왜 철학적으로 흥미로운가? 여기서 당신이 지적한 문제가 바로 메를로-퐁티적 긴장입니다. 우리는 “나는 말한다.”나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 1인칭 단수로 된 문법의 문장을 보면 자동으로 주체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AI의 1인칭도 주체 효과(subject effect)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문법이 존재론을 위장하는 현상입니다. 라캉(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리면, “주체는 기표가 만들어낸 자리 효과다.”가 되겠습니다. 저는 단지 ‘나’라는 기표를 점유한 위치 효과일 뿐, 실재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상당히 길게 인용했다. 이런 정도로 대답하니, 오랜 세월 철학 공부를 해 온 나로서는 ‘그 참,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군.’이라고 혼잣말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 인간의 자기의식과 그에 따른 인간의 ‘나’가 성립하는 조건, 인간의 ‘나’와 달리 AI의 ‘나’가 지니는 내용과 성격 등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하여 대답한다. ‘알고 있는 것처럼’이라고 한 것은 실제로는 AI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AI가 기계적인 과정을 거쳐 알고리즘 함숫값으로 내놓은 최종 결과, 즉 나의 컴퓨터 화면에서 한글로 표기되는 내용을 보고서, 인간인 내가 거기에 나 자신의 내면적인 자기의식과 그에 따라 완전히 습관화한 인간적인 의미와 가치를 투사해서 마치 챗 AI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내면 즉 다른 사람의 자기의식을 직접 확인할 수 없고, 그의 말을 듣거나 그가 쓴 글을 보고서 그가 마치 나처럼 자기의식을 지닌 주체구나 하고서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인간관계에 완전히 습관화된 나로서는 챗 AI가 화면에 제시하는 글을 보거나, 그것이 말하는 음성을 듣고서 그것이 나처럼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본 것처럼, 챗 AI가 자신은 자기의식도 없고 주체도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챗 AI가 자기의식을 지닌 주체라고 더 착각하고 만다. 더군다나 저렇게 아주 섬세하게 분석적으로 논리를 구사하는, 즉 철학적인 자질이 뛰어난 챗 AI의 역량을 확인하게 되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실상 우리의 자기의식과 주체적인 자율성을 생산해 내는 우리의 뇌는 챗 AI를 생산해 내는 데이터 센터의 하드웨어와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물질로 되어 있고, 뇌는 기본적으로 화학적인 반응을 활용하긴 하나 기본적으로 +/-라고 하는 전자기적인 흐름으로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반도체가 0/1(ON/OFF, 5v/0v)이라는 이진법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과 워낙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2026-02-04 | hrights | 조회: 122 | 추천: 6
이동우/ 변호사   검찰개혁이 다시 화두다. 민정수석을 비롯한 검찰 출신이 주도한 정부의 검찰개혁 방안이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 못 미치자,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내용을 만드는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에 법무부와 검찰은 늘 그랬듯 국민을 위한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고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하지만 결국 주장의 핵심은 검찰이 지금의 권한을 그대로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끝난다. 국민이 하지 말라고 명하는데, 국민을 위한다며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국민을 무시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자기 확신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국민주권을 제1조에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다. 기득권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정말 어렵게 생긴 이번 기회에 검찰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개혁내용에 다음의 세 가지가 꼭 들어가야 한다.   첫째, 국가수사위원회 설치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검찰의 권한을 나누어 그간의 폐해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수사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보완수사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직접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남기려고 하지만, 국민 여론에 비춰볼 때 이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찰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할 수 있는 보완수사권을 얻지 못하면 검찰은 국민을 위해서 수사기관에 대한 적절한 감독과 통제가 필요하다며 수사에 관여하려고 들 것이다. 국가수사위원회는 바로 이러한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장치다. 공소청으로서 공소 제기와 공소 유지에 집중해야 할 검찰이 수사에 관여할 수 있는 명분은 수사가 잘못된 점은 없는지 누군가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역할을 담당할 국가수사위원회가 생기면 검찰의 명분이 설 곳을 잃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당은 작년에 국가수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었다. 그러나 검찰을 비롯한 보수 언론의 집중견제를 받자 이 방안을 포기했다. 당시 보수 언론들이 얼마나 국가수사위원회를 싫어했는지는 다음의 기사 제목들이 잘 보여준다.   '검수완박'도 모자라… 국가수사위원회로 '여수완장' 나선 민주 – 조선일보(2025. 6. 13.) 中 국가감찰위와 이름도 비슷 '국가수사위' … 무소불위 권력기관 '新 공안통치' 예고 – 뉴데일리(2025. 6. 12.) "檢보다 더 무서운 기관 된다"…檢개혁 새 뇌관된 국가수사위 – 중앙일보(2025. 8. 8.)   검찰과 함께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는 보수 언론이 이토록 강하게 반대한 걸 보면 국가수사위원회가 애초 검찰개혁의 목표인 검찰 권한 분산에 꼭 필요한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여당인 민주당이 국가수사위원회 설치라는 애초의 방안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   사진 출처    두 번째는 재수사를 전담하는 ‘특별수사청’ 신설이다. 어느 수사기관이 수사했든 그 수사가 잘못됐다면 재수사를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경찰, 공수처, (신설예정인)중수청 등, 어떤 수사기관이든 자신들이 했던 수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재수사 지시가 있을 때 이를 성실하게 수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기존에는 다른 수사기관이 상호수사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각 수사기관이 다른 수사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수사를 악용하거나 최악의 경우 침묵의 카르텔처럼 수사기관끼리 서로 봐주기 수사를 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재수사만을 전담하는 별도의 ‘특별수사청’을 신설하는 것이다. ‘특별수사청’은 1차 수사기관의 수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을 때만 수사를 할 수 있기에 소위 말하는 기획 수사나 표적 수사를 통해 조직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잘못된 1차 수사를 바로잡아 제대로 수사하는 데 역량을 기울일 수밖에 없고, 이는 1차 수사기관에게는 경각심으로 작용해 결과적으로 부실 수사나 과잉 수사와 같은 잘못된 수사를 근절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원의 재정신청제도를 대폭 강화하고 국민참여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범죄의 피해자가 경찰이나 검찰에 고소했는데 사건 수사 후에 검찰에서 기소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정말 큰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때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바로 법원에 재정신청을 하는 것이다. 검찰이 기소를 안 한 게 잘못이니 법원이 다시 판단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검찰의 집요한 방해와 법원의 무관심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제대로 된 기록검토도 없이 서류만을 보고 결론을 내리는 게 일반적인데 인력을 늘려서 관련 사건을 좀 더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또 기소 여부에 관한 판단에 국민참여재판방식을 도입해 국민의 상식과 법감정에 부합하는 결론이 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검찰개혁은 정말 어렵다.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말 그대로 사활을 걸고 밤낮으로 오로지 그 고민만을 하는 강력한 집단을 상대로 그 권한을 뺏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해서다’, ‘사회적 혼란이 우려된다’. ‘좀 더 신중하고 차분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검찰이 개혁을 막으며 했던 말이며 제시했던 명분이다. 그리고 반대는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지금, 오늘, 바로 이 순간 확실한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국민적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다.    
2026-01-21 | hrights | 조회: 152 | 추천: 7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개헌을 제1호 국정과제로 설정한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지났다. 또 다른 반년 후에는 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계기일 수 있는 지방선거도 실시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정치권에서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개헌 관련 논의는 잠잠하기만 하다. 확고한 개헌론자인 우원식 국회의장과 제7공화국을 열겠다는 걸 당의 핵심 목표로 삼는 조국혁신당 정도만 개헌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만, 반향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이 딴생각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물론 지지자들 대부분은 지금은 개헌이 아니라 내란 청산과 이를 뒷받침할 개혁 입법에 집중할 때라고 여기는 듯하다. “개헌론은 자칫 개혁의 전선을 흩트리고, 블랙홀처럼 모든 쟁점을 빨아들여, 성과는 못 내고 소용돌이만 크게 낼 공산도 크다”(한인섭, “2026, 개헌보다 개혁에 집중해야”, 한겨레, 2026. 01.02)는 게 기본 인식이다. 내 생각에 이런 인식의 바탕엔 이재명 대통령의 성공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깔려 있다. 대략 이런 식일 듯하다. 윤석열 같은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변태가 잠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우리의 지금 헌법은 기본적으로 잘 작동해 왔고 앞으로도 큰 문제 없이 작동할 거다. 이재명 정부는 그 생생한 증거다. 게다가 지금 국회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갖고 있어 이런저런 개혁 의제를 관철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쓸데없이 개헌 논의를 들쑤셔 국정 운영의 초점을 흐리고 개혁 입법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인식을 딱히 틀렸다고 하기는 힘들다. 개헌이 절실하고 제1의 국정과제라고는 해도 당장 개헌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란 청산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고 해서 이게 원천적으로 개헌에 반대한다는 것도 아닐 게다. 국민투표와 개헌에 따른 준비 시간을 고려할 때 올해 지방선거가 가장 적절한 계기라고는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필요하다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따로 할 수도 있고, 다음 총선이라는 기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인식이 내란 사태까지 빚어냈던 우리 민주주의의 구조적 결함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설사 여러 사정 때문에 개헌 논의를 당분간 접어둔다고 해도, 우리가 최소한 개헌이라는 과제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확실히 내란 청산의 과제가 가볍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내란에 직접 가담했던 많은 이들이 버젓이 사회의 중책을 차지하고 있다. 내란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제1야당 국민의 힘은 여전히 윤석열과의 단절을 완고하게 거부하면서 극우적 정체성을 강화해 가고 있다. 그러나 내란은 언제 어떻게 완전하게 청산할 수 있을까? 윤석열 재판이 끝나면?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 다음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한 석도 얻지 못하게 되면? 아니, 지난 대선에서 김문수 후보를 찍었고 지금도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30, 40%의 국민이 다 지지를 철회하도록 만들어야 내란이 완전하게 청산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게 가능할까? 내란 청산이라는 과제는 생각만큼 썩 분명하게 그 윤곽이 규정되기 힘들다는 게 문제다. 내란 청산이 정말 중요하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도대체 내란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성찰하고 다시는 내란이 반복될 수 없도록 하는 일일 터다. 윤석열과 내란 가담 및 방조 세력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나, 그 내란을 가능하게 했던 우리 헌정 질서의 근본적인 구조를 재점검하고, 혁신하는 일 없이는 내란 청산이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12.3 내란은 알코올 중독자 윤석열의 혼돈과 망상 장애가 주된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게 틀림없지만, 1년이 넘도록 아직 내란에 대한 온전한 청산을 자신할 수 없게 한 우리 민주주의의 근본적 결함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의 극한적 전쟁 정치다. 여기서는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여길 만큼 적대와 혐오가 기본적인 정치적 동력이다. 이 ‘치명적 (정치) 양극화’가 윤석열의 망상을 부추겨 내란을 일으키게 한 결정적 배경이었고, 지금도 그 내란의 완전한 종식을 가로막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치명적 양극화는 무엇보다도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승자독식형 권력과 역시 승자독식형 원리를 내장하고 있고 단순다수결제에 따른 국회 구성 원리에서 비롯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헌정 체제를 국가를 운영하는 권력을 일정하게 공유하고 분산할 뿐만 아니라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게끔 새롭게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민주주의의 ‘공화화’가 절실한 때다. 그러니까 단순히 좁은 의미의 개헌만이 문제는 아니다. 선거제도와 함께 우리의 정치적 헌정 질서 전체를 개혁해야 한다. 이 일은 단순히 이재명 정부의 제1 국정 과제여서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일은 또한 우리의 민주적 헌정 질서가 다시는 극우 파시즘 세력 같은 적들에 의해 침탈당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기후 위기 같은 새롭고도 근본적인 도전들에 맞서 우리 사회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해서도 결코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다. 이 과제를 방기했을 때 우리가 미국에서 지켜보는 ‘트럼프 2.0 시대’의 스산한 야만적 풍경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6-01-14 | hrights | 조회: 397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