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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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석미화(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윤/ 경찰관  나는 간이 콩알만 하다. 그래서 크게 한탕보다는 가늘고 길게 가는 걸 선호한다. ‘고’보다 ‘스톱’을, ‘레이스’보다 ‘콜’을 선택하기에 고스톱이나 포카 판에서는 잘해야 본전이라 웬만하면 끼지 않는다. 10년여 전 친구 권유로 주식을 샀었는데, 가격 등락이 계속 신경 쓰여서 그냥 조금 손해보고 다 팔아버렸다.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3배 이상 올랐을 텐데...  빚을 내기보다는 얼마 안 되는 공무원 봉급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왔다. 그런 이유로 19년째 무주택자다. 평생 무주택자가 아닌 이유는 IMF 경제위기 때 전세 살던 신혼집이 경매에 넘어가 세입자인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경락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 집도 3년 후에 팔았고, 이후 쭉 전세를 살고 있다. 지금 나는 집도 없고 빚도 없는 쌍무자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관점에서 보면 나는 무능력의 표상이다.  나 같은 성격이 공무원에 어울린다고 스스로 위안을 해 왔다. 특히 경찰관은 약소한 금품 유혹이 잦은 직종이다. 겨우 몇십만 원에 퇴직금과 연금을 포기하기엔 내 간에 오는 부담의 크기가 우루사 한 통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지금까지는 가늘고 길게 잘 살아왔다.  그런데 모든 공무원이 나와 같지는 않은가보다. 몇억씩 대출받아 개발 계획이 나오기도 전에 토지, 특히 농지를 사다니. 그건 상위 0.1%에 속하는 그릇의 간을 가지고 있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인생 역전의 통 큰 베팅을 한 사람들을 보면 그 호연지기에 괜스레 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신의 직무와 지위를 이용하여 큰 돈을 도모하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옛날 공무원들이 뜯어먹은 삥 쯤은 그들의 농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묘목 한 두 뿌리 값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모든 공직자에게 재산등록을 하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의 불만이 많다는 기사들을 보았다. 재산등록 제도가 처음 시행된 1993년부터 무려 28년간 재산을 등록해왔고, 등록할 재산이라야 전셋집과 자동차 한 대, 은행예금뿐인 나로서는 그저 무덤덤하다.  경찰은 처음부터 경사 계급 이상이 재산등록 대상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말정산과 함께 매년 초에 찾아오는 상당히 번거롭고 짜증나는 행사였다. 전세 계약서, 통장, 보험금 납입 영수증 등을 모두 사본을 첨부하여 수기로 신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는데, 할 때마다 나 같은 하위직까지 매번 이렇게 가난을 신고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분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간편하게 클릭 몇 번으로 내 재산변동 사항을 체크할 수 있고 신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쉬워진 만큼 그다지 불만은 없고 1년에 한 번 내 재산변동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있다. 간이 작은 만큼 조직에 순종적이고 적응도 잘 하니 천생 공무원이다. 나에겐 어차피 큰 돈 생길 일은 없지만, 어쩌다 하늘에서 돈벼락 맞는 상상을 하다가도 재산등록 할 때 그 돈의 출처를 뭐라고 적어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이 자동으로 생기는 걸 보면 이 제도가 가진 부패 예방 기능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재산등록 제도가 공무원들의 모든 부패를 걸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벤츠 여검사나 스폰서 검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차명 은닉한 재산이나 친구가 대납해준 오피스텔 임대료 등은 재산등록 시스템이 미리 밝혀내지 못한다. 96만 원짜리 불기소 세트도 당연히 찾아낼 수 없다. 마시고 논 것까지 등록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일반적 수준 이상 재산 증감이 있을 때 그 사유를 소명해야 하는 찝찝함만으로도 수억 원씩 하는 부동산 투기는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인천일보  논어 위정편의 ‘錄在其中’이라는 어구를 나는 다음과 같이 멋대로 해석한다. ‘굳이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를 하지 않더라도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하고 가치 있는 일에 주력하면 재물은 저절로 따라서 온다’라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의해 경쟁과 배금주의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공무원까지 이해충돌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그 즐거움의 노랫소리에 맞춰 원망의 소리도 높아질 것이다(歌聲高處 怨聲高).  나에겐 감히 도로시 데이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줄 용기는 없다. 그래도 그녀의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서 기꺼이 벼락 거지의 길을 가고자 한다.
2021-04-07 | hrights | 조회: 345 | 추천: 16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지난 2012년에 시작해서 전 세계적인 지역화폐 모범도시로 일컬어지던 영국 브리스톨시의 지역화폐 브리스톨 파운드가 얼마 전부터 유통을 중단했다.  브리스톨 파운드가 미친 영향은 컸다. 특히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지역화폐 도입을 검토할 때 항상 거론되던 사례였다. 기존 법정화폐와 동일한 가치로 환전이 가능하면서도 공동체 경제를 지키기 위한 목표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적지 않았다. 시가 지원을 하되 운영은 민간영역이 담당하는 시스템은 지역화폐의 대안이 될 만했다.  하지만 가맹점 관리 및 운영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코로나19 시국이라는 대외변수도 있었지만, 정책 또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에서 파열음이 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 구글  우리나라도 이미 전국 243개 지자체 중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미도입 지역을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쩌면 예고된 미래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지역화폐의 특징은 지자체가 적극 나서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점이다. 민간의 공동체형 지역화폐와 별도의 트랙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지난 1996년 충북 괴산에서 먼저 시작된 지역사랑상품권은 2018년까지 60여개 남짓한 지자체에서만 운영되고 있었다. 명색만 유지할 뿐 사실상 유통이 안 되는 지역화폐도 많았다.  그러나 2019년 정부가 최저임금제 도입 이후 소상공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이를 타개할 정책을 찾다가 지역화폐 활성화에 눈을 돌리면서 불과 2년여 만에 지역화폐 전성시대란 기사제목이 붙을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지역화폐의 효과에 대한 논란이 불붙기도 했는데, 이와 별개로 이렇게 지역화폐가 활황을 누리는 것은 유통촉진을 위한 ‘인센티브’ 때문이라는 의견에 반론이 없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온라인쇼핑몰에서는 못 쓰고 지역 골목상권에서만 쓸 수 있는 불편한 돈이기 때문에 재정을 들여 소비자에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한 인센티브의 규모가 이제 ‘10% 할인’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것이 폭발적인 성장의 견인차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높이 날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프다.  정부는 2019년 지역화폐 활성화 방침을 세우고 첫해에는 전국 지역화폐 발행액 목표 2조원을 수립했다. 2년 뒤인 2021년엔 15조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10% 인센티브의 8할이 정부재정이다.  정부는 애초 4년간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재정지원을 예고했다. 2022년까지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역화폐가 이미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변수도 크다. 어쨌건 언제까지 인센티브를 정부 재정으로 이어갈 수는 없다.  만일 정부 재정지원이 끊어지게 된다면 각 지자체의 지역화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시흥시청 지역화폐팀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전화내용이 있다. ‘10% 언제까지 해요?’ 어제는 이런 전화도 받았다. ‘10% 안 하면 누가 지역화폐 사용해요.’  ‘원래부터 소비쿠폰이었어’라고 지역화폐의 역할을 규정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으면 할 말이 없다. 지역화폐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지역 내 사회자산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은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마도 10%의 유혹이 없어진다면 많은 지자체에서 지역화폐는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 이제라도 달콤한 인센티브 없이도 굴러가는 지역화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공동체 경제의 선순환을 위한 지역화폐 사용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고 싸운다. 지난 30여 년간 별다른 지원 없이 공동체형 지역화폐를 일구기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 면구스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와중에 공문 하나가 떨어졌다. ‘지역 차원의 4차 산업에 대응하고자 새로운 산업기회 창출, 사회적 취약계층 포용, 지역 현안 효과적 해결 등을 위한 지능 정보화 기술 기반의 지역화폐 활성화 우수사례 평가…’ 읽기도 숨차다.
2021-03-31 | hrights | 조회: 200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코로나19 사태에 휘말려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의 외출조차 쉽지 않다. 더군다나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닐 수 있는 법적 노인이 되고 보니 더욱 집에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래도 바람을 쐬지 않을 수는 없다. 동네에 넓고 깔끔한 카페가 생겼다. 거기 평소 좋아하는 에스프레소의 맛이 그럴듯하다.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미루었던 책을 읽기도 하고, 그동안 거의 실행한 적이 없는 육필로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글을 거의 컴퓨터로 썼고 간단한 메모조차 폰의 메모장을 이용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권연대에서 보내오는 수첩을 활용해 쓰다가 빈칸이 채워져 새로운 수첩을 사서 볼펜 등으로 육필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오랜만의 육필 운용은 마치 잃어버린 분신 하나를 찾은 듯 신선했다. 그러던 중 아래의 글을 쓰게 되었다. 자유롭게 마음 이는 대로 쓴 것이니, 주제가 오락가락할 수도 있고, 내용이 그저 직관의 심상에 따른 것일 수밖에 없다. 대략 고쳐서 올린다. 2. <2021년 3월 7일 일요일, Trini에서>  욕망에 관해서는 생명과 소유 또는 향유와 관련해 제법 오랜 세월 생각해 왔으나 뚜렷하게 그 작동의 얼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밥이 하늘이다.” 김지하 선생의 말이다. 일본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는 ‘직경(直耕)’을 주장했다. 누구건 저 자신이 경작한 밥을 먹어야지, 천황이건 쇼군이건 사무라이건 남이 경작한 밥을 빼앗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인터넷을 통해 그가 쓴 『법세 이야기』를 읽고 있다.  욕망에 관한 생각을 ‘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생명에 조건을 걸어 욕망을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밥’은 노동의 목적이고, 노동 및 노동의 결과를 상징 · 은유하기도 한다. 그 직접성에서는 생명을 유지 · 강화 · 재생하는 것을 지시할 것이다.  ‘밥과 일’,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 신약성서의 이야기다. 일은 생산 활동이다. 일의 출발은 생명의 압력을 따르는 수동성을 띠지만, 그 과정은 계획과 효율 그리고 재활성화를 염두에 둔 능동성을 띤다.  일 즉 노동은 여러 관계를 따른다. 일하는 자와 일의 대상과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효율을 위한 타인들과의 관계, 교환관계를 규정하는 법과 제도와의 관계, 소유와 처분의 관계, 몸과 도구의 관계, 도구와 사물 그리고 생산-소비에서 주어지는 과제와의 관계, 지식과 실행의 관계, 궁극적으로 욕망과 그 충족/결핍의 조건과의 관계 등으로 일에 연관된 관계들은 사뭇 복잡 다양하다.  욕망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이러한 뭇 관계들을 망라하면서 그 맥락과 계기에 따라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워낙 많고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욕망의 문제가 활동 즉 실천 또는 실행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앎과 일’로 달리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에 관해서는 특히 사회개혁 또는 사회혁명에 관련한 담론에서 워낙 많은 논의가 있었다. 추상화해서 보면, 앎은 진(眞) 즉 옮음과 짝하고, 일은 선(善) 즉 좋음과 짝한다. 앞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설립되고, 뒤에 따라 윤리와 도덕 및 경영이 설립된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일 즉 실천(praxis)은 혁명이었다. 혁명은 노동과 욕망을 둘러싼 법적 · 정치적인 체제를 위시해 심지어 사회문화적인 구성을 크게 바꾸는 것이다. 혁명과 비슷한 어감을 띤 것으로 전향(轉向), 전회(轉回), 회심(回心) 등이 있다. 어느 것이건 기본은 역(逆)의 역(易)이다. 회귀가 아니라 창조다. ‘dynamis’ 즉 잠재적인 위력을 창조를 위한 본질로 본다면, 혁명은 그 본질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革命’의 ‘革’ 자가 궁금하다. 인터넷을 찾아본다. <周易>에서 ‘革’은 ‘택화(澤化)’ 즉 불이 연못의 물이 끓도록 하여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풀이됨을 알았다. 흥미롭다. ‘革’ 자는 ‘革帶(혁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짐승의 가죽을 일컫는다. 그런데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의 털을 벗기면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니 ‘革’은 크게 바꾸는 것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혁명적 실천을 위한 지혜를 철학으로 본다면, 그 철학은 결국 욕망(欲)과 행동(行)과 즐김(樂)으로 요약될 것이다.  좋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하는 데서 출발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플라톤이 어떤 것에 대해 가장 좋은 것을 이데아(idea)라 한 사상은 이성과 지혜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나로서는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 속에서도 그렇고 남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문제는 욕망들 사이의 충돌이다. 자장면을 먹고 싶고 짬뽕을 먹고 싶다. 선택해야 한다. 지금 먹고 싶다고 모조리 먹어치우면 나중에 배고픔을 견뎌야 한다. 조절해야 한다. ‘선택과 조절’, 욕망과 실행에서의 기본 원리다. 선택은 당면한 현재의 문제이고, 조절은 미래를 향한 문제다. 선택을 위해서는 사물의 특질을 알아야 한다. 조절을 위해서는 욕망의 특질을 알아야 한다.  사물과 욕망의 관계에 일정한 본질적인 내용이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을 점차 추상화 · 일반화 · 순화하다 보면 이데아에 이를 것이다. 이데아를 안다는 그 지혜는 결국 욕망과 사물의 본질을 알아 가장 적절한 선택과 조절을 통해, 이른바 탁월성 즉 덕을 이루는 행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앎과 함’의 일치, 즉 흔히 말하는 ‘지행합일’의 덕목이 설립된다.  사물과 욕망의 관계가 크게 문제로 나서는 경우는 타인이 사물로 등장할 때다. 그 타인 역시 욕망과 행위의 적절함을 위해 선택과 조절을 할 것이고 해야 한다. 나의 선택과 조절이 타인의 선택과 조절과 ‘합(合)’을 맞출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양자가 ‘리(離)’ 또는 ‘충돌’로 나타나면 고약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자장면을 먹을 테니, 너는 짬뽕을 먹어라.” ― “싫어, 나도 자장면을 먹을래.” ― “자장면이 한 그릇밖에 없는데 어쩌지? 나누어 먹으면 어떨까?” ― “싫어, 나누면 내가 배고픈 걸, 아니면 먹어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 때문에 먹는 기분이 나지 않는걸.”  나와 남의 욕망 관계에서 선택에 따른 충돌을 조절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예사로 자존심이 개입된다. 내가 너보다 적게 먹을 이유가 어디 있어? 네가 나보다 잘난 게 뭐 있어? 인정할 수 없어. 네가 뭔데!  욕망을 둘러싼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그저 욕망을 충족할 사물 즉 재화를 향한 것만이 아니다. 그 사물을 매개로 서로의 인격 또는 존재의 높낮이를 가늠하면서, 결국에는 서로를 대상으로 삼는 노릇이다. 동일성이나 유사성보다 차이를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차이를 통해서만 우열의 차별이 가능하고 그 차별을 통해 동물과는 다른 인간 고유의 사회정치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욕망 관계에서 작동하는 차이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라면, 즉 서로 질이 다른 대상을 욕망한다면, 선택도 수월해지고 조절도 쉽다. 특질에서의 종류가 다르니 굳이 비교우위의 결판을 내야 할 까닭도 없다.  그런데 묘한 일은 나도 너처럼 하고 싶다는 욕망의 전이(轉移)다. “네가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하겠어. 네가 누리는 것을 나도 누려야 하겠어.”라는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지는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경향 내지는 습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욕망 전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불안이지 싶다. 귀하다고 여겨지겠지만 남은 가지고 있는 무엇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남이 자신이 소유한 그것으로 나를 무시하고 억압하려 하고 심지어 내가 가진 것마저 빼앗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가 작동하는 데서 ‘욕망 전이’가 생겨나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협책이 등장했다. 내가 가진 것을 줄 테니 네가 가진 것을 나에게 줘! ‘교환’이다. 교환은 선택과 조절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탁월한 기교다. 과연 그럴까? 선택과 조절에서 충돌을 완화하고자 고안한 교환이 오히려 선택과 조절에 영향을 미쳐 큰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렇게나 교환하지 않을뿐더러, 교환의 편리를 추구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기가 막힌 기교를 생각해 발휘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교환관계는 순식간에 확산해 모두와 모두의 교환관계가 되고, 거기에 나와 모두의 관계가 아울러 자리를 잡는다. 모두가 모두를 대상으로 직간접적인 교환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럴 때, 당연히 교환의 보편적인 척도가 요구된다. 교환하고자 서로가 내놓은 재화 사이에 교환 비율을 조절해서 손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손쉽게 선택해서 효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교환의 수단이자 척도로 기능하는 화폐 즉 돈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화폐를 통한 선택과 조절에 따라 시간의 활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교환에서 재화 즉 내가 가진 물건이나 노동력을 주고 화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화폐의 선택은 재화의 선택이 아니다. 돈을 먹고 마시고 입을 수는 없다. 재화를 주고 화폐를 선택한 것은 일단 아무것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뤄지는 교환에서 화폐의 선택은 필수적이다. 지갑 속의 화폐는 당장 어느 재화를 소비하고 향유할 것인가를 미결정으로 미룬 시간의 양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화폐는 알 수 없는 미래에 재화와 교환하리라 작정한다는 증표다. 이에 화폐는 미래의 시간을 늘려 내 삶의 구체적인 시간을 재구성한다. 과거와 결합하지 않은 현재가 없듯이, 미래와 결합하지 않은 현재는 없다. 화폐가 쌓이면 쌓일수록 미래의 시간이 늘어나 현재에 결합한다. 여기에 화폐의 또 하나의 본질이 있다. 화폐가 제공하는 그 미결정의 미래는 현재에서는 순전히 잠재적인 것일 뿐 현행의 충족이 아니다. 화폐는 미래의 시간을 영원하게 만들고, 그 영원성을 현재에 결합함으로써 현재가 마치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많이 소유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착각은 더욱 굳건해진다. 사진 출처 - freepik  이에 화폐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각종 이미지와 상징을 가능케 한다. 기호학적인 용어를 빌어 말하면, 그리하여 기의(記意)가 사라지고 없는 기표(記標)만의 시간과 그에 따른 세계가 대대적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불안은 미래에서 온다. 미래의 시간이 짧을수록 불안의 양은 커진다. 불치병으로 곧 죽을 것 같을 때, 불안은 극대화된다. 돈을 많이 쌓아두고 있으면 불안의 양이 적어지는 것은 돈이 미래를 늘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가상적이기 때문에, 불안의 양이 줄어드는 것 역시 가상적이고, 실질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잠복한다. 거꾸로 보면, 돈을 통해 불안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실제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는 자들의 불안은 강박이라 할 정도로 강하다. “너의 부가 쌓이면 쌓일수록 너의 존재는 빈곤해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이다. 여기에서 ‘존재의 빈곤’은 실질적인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현재의 삶에서 제대로 된 창조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할 수 있다.  화폐가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너도나도 미래의 가상적인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빠져든다. 욕망은 미래에서 열리는 가상의 폭과 깊이를 향해 힘을 발휘한다. 욕망이 영원한 시간 즉 불멸을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멸에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화폐는 가상적인 불멸을 약속한다. 사탕발림의 이 약속에 모두가 미혹되어 넘어져 자신의 존재를 절뚝거린다.  하지만, 화폐를 둘러싼 욕망의 분출과 실행의 길은 누구건 쉽게 비켜 갈 수 없다. 그것은 앞서 말한바, 모두가 모두를 교환하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차이와 그에 따른 차별, 그 차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화폐를 통해 실현 · 충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화폐를 통한 인정 투쟁이 벌어진다. 말하자면, 화폐가 제공하는 가상적인 불멸의 시간 속에 뭇 인간들이 들끓으면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권력이 생겨난다. 긴 미래의 시간을 확보한 자가 짧은 미래의 시간을 가졌을 뿐인 자를 지배한다. 화폐가 개입한 상태에서 권력은 가상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다. 그런데 그 가상은 이미 모든 사람을 휘어잡고서 오히려 실재로서 다가와 힘을 발휘한다. 권력은 가상적 실재를 놓고서 진정한 실재인 양 착각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비록 기술이라는 말을 예술로 달리 번역하긴 했지만, 어쨌든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돈은 길고 인생은 짧다.” 또는 “권력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했다고 해보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첫눈에 벌써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시간은 돈이다.”라는 항간의 말을 “돈은 시간이다.”라는 말로 바꾸었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맞는 말 같다. “내가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어.”라는 말을 “내가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라고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 그러므로 나는 시간이 풍부해.”라고 말한다면, 제법 맞아들어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돈을 향한 욕망, 즉 불멸을 향한 욕망, 그 가상적인 환상이 마치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것 같다. 씁쓸하다.
2021-03-24 | hrights | 조회: 143 | 추천: 0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올해는 지방자치 3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2020년 12월 9일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1988년 이후 32년 만에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주민주권과 참여확대, 지방의회의 독립성 강화, 중앙과 지방의 협력, 대도시 등의 특례부여 등이 주요 핵심 내용이다. 정부는 주민자치 원리 강화, 주민참여권 신설, 지자체의 주민에 대한 정보공개 의무규정 신설 등 자치분권 확대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자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맹이가 빠졌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지방분권, 자치분권의 핵심은 ‘주민자치’에 있다. 주민자치(住民自治)는 중앙집권적이며 관료적인 지방자치를 배제하고 주민이 지방자치의 주권자가 되어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영국에서 발달한 제도이다. 지방분권이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의회의 권한만 강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지만 실제로는 주민의 참여와 권한을 확대, 강화시킴으로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풀뿌리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것이다. 지난 2013년부터 7년간 행안부는 ‘지방자치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과 지방조례에 근거해 주민자치회 시범사업을 하고 있으며 2020년 6월 현재, 118개 시군구 626개 읍면동에 주민자치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주민자치회’ 관련 조항이 모두 삭제된 채로 통과되었다. 이번에 정부가 제출한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은 ‘주민자치회 운영과 기능 수행에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명확히 하여 현재 시범사업으로 운영 중인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고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서 풀뿌리 주민자치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국민을 아직 미성숙하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주민자치에 대한 부동의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는 마을공동체와 주민자치의 활성화를 위한 중간지원조직으로 2020년 7월 전국 최초로 시 출연재단으로 출범하여 민관거버넌스 체계를 통해 주민과 마을, 행정을 연결하고 협력, 협치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춘천시 민선 7기 시정 철학은 ‘춘천, 시민이 주인입니다’라는 슬로건에서 말해주듯이 시민을, 주민을 주체로 세우고 시민의 권한을 강조하는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민자치회’ 설립과 운영 활성화는 중요 핵심과제 중 하나다. 3월 현재, 춘천시 25개 읍면동 중 13개 읍면동에 주민자치회가 설립되었고 5개 읍면동에서는 주민자치회 전환협의체를 구성하게 된다. 20명에서 50명까지 주민들 누구나가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고 마을의 의제를 공론화, 숙의를 통해 마을계획을 수립하여 실행까지 하는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겠지만 이런 참여와 책임의 민주주의를 풀뿌리에서부터 실천하는 과정을 주민들 스스로 실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매년 마을 의제를 주민들로부터 수렴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각종 자생단체, 모임, 공동체로부터 일반 주민들까지 해결하고픈 문제나 살기 좋은 마을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의제가 읍면동별로 많게는 70~80개씩 쏟아져나온다. 물론 이런 의제들이 다 채택되지는 않지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살피고 생각을 이야기하고 투표와 총회를 통해 총화하는 경험은 시민들이 마을의 정책과정에 참여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신나고 즐거운 일일 것이다.  몇 가지 넘어서야 할 과제들도 보인다. 자칫 소위 명망가 또는 의회진출을 노리는 몇몇 위원이나 자치회장에 의해 휘둘릴 소지도 있고, 또 다른 기득권 단체로 전락해 완장만 채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상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고 지난한 다툼이 있는게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서로의 목소리를 내고 차이와 다름을 숙의와 토론을 통해 마을의 공통의제로 합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한 생활권인 마을에 공존하고 있는 각 종 이해관계자들과 기존의 자생단체, 마을공동체들과의 연계와 네트워킹도 주민자치를 풍부히 하고 성숙시키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작년 마을의제들을 보면 코로나로 인한 아이들과 노인들의 돌봄 문제가 크게 대두되면서 주민들의 관심사로 많이 올라왔다. 또 쓰레기 문제나 환경문제도 주민들이 걱정하는 마을의 숙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주민자치회 단독으로 이러한 의제를 실행하고 의미 있는 결과물로 만들어내기에는 인력도 재원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마을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관심 갖고 활동하고 있던 많은 단체, 공동체들도 있으며 시정부의 행정력과 예산의 뒷받침이 필요함도 느낀다. 주민자치가 스스로 독립적으로 마을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백번 옳지만 고립된 대립 관계가 아닌 민관협력, 민민협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방자치(시군)-주민자치(읍면동)-마을자치(통리 등 마을단위)는 ‘국민(시민, 주민)의 주권이 생활터전인 마을에서 실현’되는 가장 확실한 주권행사이며 강력한 방법일 수 있다. 아직은 주민들의 의식도 교육도 경험도 부족하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임에는 틀림없음을 잊지 말고 골목에서 마을에서 지역에서부터 행복한 꿈을 꾸며 한발 한발 걸어갔으면 좋겠다.
2021-03-23 | hrights | 조회: 125 | 추천: 0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석샘, 이거 좀 참여해서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비용, 시간 부담 별로 없어요. 한번 봐 주시겠어요?” 평화활동을 하는 이 선생님의 메시지였다. “네 좋은 취지의 활동이니 당연히 함께 해야지요. 신청은 포스터에 있는 대로 하면 되겠지요? 마감이 얼마 안 남아 서둘러야겠네요.” 그저 머리 하나 보태는 마음으로 신청을 마쳤다.  올해로 23회를 맞는 지학순정의평화상은 故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실천하고 정의, 평화, 인권 활동을 하는 이들과 단체를 수상자로 선정해왔다. 1997년 제정된 이 상의 첫 번째 수상자는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었다. 이후로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등 해외 단체를 주로 수상했고, 지난해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사단법인 저스피스로 새롭게 출범했다. 사단법인 저스피스는 정의평화실천 활동으로 풀뿌리 연대, 여성·성소수자·청년 등 새로운 주인공과의 연대, 생태위기·사회부정의에 대한 대응 등을 새로운 활동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지학순정의평화상은 ‘시민참여형 풀뿌리 일꾼 찾기-시민의 참여와 발굴, 시민의 추천과 선정’이라는 슬로건 아래 시민추천위원단을 구성해 후보 추천을 받고 2차에 걸친 투표 과정을 거쳐 수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다 계획이 있었던’ 저스피스의 큰 그림 속에 덜컥 시민추천위원단으로 참여한 나는 신청서 작성 후 그냥 부담 없이 투표 일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샘, 해외 단체 한 곳도 추천 부탁드려요~~~ 18일 마감입니다.” 마감 이틀 전 이 선생님의 메시지가 당도했다. 난감했다. 베트남과 평화교류 활동을 하고 있지만 베트남은 관 주도의 단체가 대부분이라 사실상 이 상의 취지에 맞는 곳을 추천하기가 어려웠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던 중 내가 잘 아는 선배의 기사를 만났다. 그렇지. 국제분쟁전문기자인 이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의 전화였지만 안부는 짧게, 바로 상황을 이야기하니 기다렸다는 듯 주저 없이 한 단체를 추천한다. “난 이 단체는 꼭 상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해. 왜 아직까지 이들의 활동에 대해 한국 시민사회가 관심 갖지 않는지 모르겠어.” 선배가 던져 준 기사와 자료를 보고 추천서를 작성했다.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연합’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 지역의 폭력적 인권상황에 저항하고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 추천서를 작성하고 숙제를 마친 듯 이 선생님에게도 공손히 보내드렸다.  하지만 추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새로이 관심 갖고 알게 된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연합이 수상자가 되길 기대하는 건 당연했다. 추천한 사람의 책임감도 발동했다. 후보로 올라온 전세계 16개 평화인권 단체들의 활동은 훌륭했다. Avaaz 세계행동, HOPE-말레이시아, TAKAD-말레이시아, Womwn Cross DMZ-미국, FED(교육개발재단)-미얀마, Share Mercy-미얀마, Afghan Peace Volunteers-아프간, HRDF-인도, 피스보트 프로젝트-일본, iLAW 표현의 자유 기록 센터-태국, Thai Lawyers for Human Rights-태국, Sounds of Palestine-팔레스타인, CTUHR-필리핀, MPI-필리핀, GABRIELA-필리핀 모두 후보 단체의 이름이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22명의 시민추천위원이 투표에 참여해 두 개 단체로 최종후보를 가렸다. ‘팔레스타인의 소리’,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연합’이 후보에 올랐다. 최종 후보에 오른 만큼 추천서도 다시 보완해 전달했다. 그리고 총 370명의 투표인단으로 진행된 2차 투표에서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연합’이 제23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단체로 최종 선정되었다.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연합(Jammu Kashmir Coalition of Civil Society, 약칭 JKCCS)은 2000년 설립된 인권단체로 20여 년 동안 카슈미르의 폭력적 인권상황에 대응해 사선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단체이다. 잠무카슈미르 지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점령하고 있는 곳으로, 카슈미르인들이 70년 전에 국제사회로부터 약속받았던 자치권을 박탈당하면서 정치적으로 강대국들의 무력개입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JKCCS는 카슈미르인들의 자치를 향한 수년간의 투쟁과 노력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해 지치지 않고 기록하고 알려왔다. 이 단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현장에 들어가 고문, 성폭력, 학살과 반인권적 상황 등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알리고 있다. 제23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잠무 카슈미르 시민사회연합’. 사진 출처 - (사)저스피스  JKCCS 대표 임로즈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광주민주화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불의에 맞서 싸운 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있다. 양심적인 이웃(국가)들, 아시아 친구들이 카슈미르 이슈에 완전히 무관심한 현실은 내게 꽤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이 말은 내 귓속에 공명을 일으키며 JKCCS의 활동을 추천하고 애쓰게 만들었다. 그의 말이 나와 같은 이를 향하고 있었다. 고통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해자 피해자라는 단순 등식만으로도 해명되기 쉽지 않다. 베트남전쟁, 미얀마 군부학살, 카슈미르 인권탄압, 어느 분쟁이든 모종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상이 오랜 분쟁의 고리를 끊어낼 수는 없겠지만, 현지 활동가들에 대한 격려를 넘어 작은 금 하나를 내기를 바란다. 그저 머리하나 보태는 일로 시작한 일이 큰 보람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2021-03-10 | hrights | 조회: 220 | 추천: 3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을 활용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곳에서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 중 <제3회 세계여/성노동자대회> 조직위원회는 올해 행사의 초점을 임신과 출산 노동에 맞추고, 임신과 출산이 인간 생산 노동임을 전면에 부각하며 임신과 출산의 생산 노동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고자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임신·출산을 생산과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가치화하지 않는 것은 가족과 국가와 시장의 통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가족과 국가와 시장들은 여성을 통제합니다.”라는 이들의 주장은 구미가 당긴다. 이들의 성 노동론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동안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임신/출산을 재생산 노동이라 칭하며 부차적인 노동, 혹은 노동이 아닌 생물학적 활동으로 가치절하하는 현실에서 여성운동이 전면화하여야 할 의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미즈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경제를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나누는 전략은 처음부터 자본축적의 과정”, 이라고 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당연히 ‘진짜’ 경제로부터 배제”되지만, “사실상 이 부분(보이지 않는 부분)은 보이는 경제의 근간을 이룬다.”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여성들이 하는 노동은 가사노동과 임신/출산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일차적인 노동과제는 ‘재생산 노동’이라는 가사 및 임신, 출산, 육아로 한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들의 자리는 여전히 가정이라는 인식, 가정은 공적 영역에서 동떨어진 곳이며 따라서 여성들의 노동은 공적 노동이 아닌 사적 노동으로 가치 평가되며, 무급으로 진행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도록 만들어낸다. 그러나 소위, 생산영역의 노동은 이러한 여성들의 비 가시화된 재생산영역의 노동이 없으면 작동하기 힘들다. 여성들의 노동은 근본적으로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가정주부가 가정에서 생산하는 것은 단순한 사용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이러한 여성의 생산력이 전제될 때 남성 임노동자의 생산성이 작동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핵가족이야말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생산되는 사회적 공장(달라 코스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정주부인 여성과 그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이 아니라, 잉여가치 생산 노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노동을 사적인 노동으로 비가시화하고, 공적 노동에서 배제함으로써 무급화 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착취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제3회 세계 여/성노동자대회 페이스북  그런 의미에서 <제3회 세계여/성노동자대회>가 임신과 출산을 ‘인간 생산 노동!’으로 호명하고, 이의 가치와 의미를 전면화함으로써 노동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고 확산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현재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여성운동 세대들은 구 여성운동 세대들과 달리 ‘몸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세대들이 법과 제도 등의 제/개정 등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 즉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영역에 끼어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신세대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을 거부하고, 대의 정치체제를 비판하며, 가부장제가 가장 친밀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것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몸의 착취를 통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모든 사적이라고 보여지는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 착취가 결국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정치가 작동하는 기제라고 문제 제기하고 있다. 여성의 몸을 통해 가해지는 가부장제의 폭력과 억압이 자본축적의 원천이라고 본다. 이는 가부장제가 공공정치 영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여성의 몸-섹슈얼리티와 생식능력-에 대한 통제에 기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남성국가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대표적인 통제가 낙태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와 생식능력을 사회적 노동으로 가치화하는 것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제동을 거는 행위가 된다.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을 노동으로 정당화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평가와 보상을 받는 것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그 착취구조를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생산의 개념에 대해서도 착취적 구조가 아닌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의 분리가 아닌, 생산과정이 곧 노동과정이라는 합의, 이윤창출의 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이 되는 노동과정, 이러한 인식과 합의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결국 노동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는 정치환경을 구성하게 한다. 이는 결국 경제와 정치, 공과 사, 이성과 감성, 정신과 몸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는,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의 생식능력을 재생산이 아니라 생산으로 호명하는 것은 그 시작이자 도전이 될 것이다.
2021-02-24 | hrights | 조회: 192 | 추천: 1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메디나 오아시스 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카즈라즈 부족과 아우스 부족은 622년 양측 간에 수자원 확보 문제와 연루된 유혈 분쟁의 조정자로 예언자 무함마드를 메카에서 메디나(야스립: 이슬람 시대 이전 명칭, 본고는 편의상 메디나로 통일)로 초대하였다. 이 두 부족은 아랍인들이라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들이 갖고 있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메디나로 이주하기 이전 메카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무함마드는 부유한 상인으로 다신교인이던 꾸라이시 부족의 우마이야가문 수장 아부 수피얀 등에게 탄압을 받고 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꾸라이시 부족의 하심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같은 부족 내에서 개인들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다신교인, 유대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마니교인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공존하던 메카에서 다신교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반면, 메디나는 유대인들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유대교는 무함마드가 등장하기 2세기 전에 이미 메디나에서 잘 확립되어 있었고,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유대인들이 메디나에 거주하였다. 이 유대인들은 경우에 따라 부족 단위로 오아시스 농업, 금은 세공업, 무역업 등 서로 다른 직업을 가졌고, 아라비아반도에서 예언자의 출현 등에 관한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 유대인들은 아랍어 사용자들이었고, 아랍 이름을 가졌다. 다양한 문서들에 따르면, 메디나의 각 부족들은 하나의 종교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 기독교인, 다신교도 등 다양한 종교인들을 포함한다고 알려져 있다. 메디나는 유대교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각 부족 내에 다양한 종교인들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메디나 헌장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주도하는 메카 출신의 이주민 무슬림들과 메디나 주민들 사이에서 체결된 공존 협정으로,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이듬해인 623년에 만들어졌다. 이 헌장은 무슬림들과 다양한 메디나 주민들, 특히 유대인들이 하나의 공동체(국가)를 결성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및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부족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강조하였다.  다음은 메디나 헌장의 주요 내용이다. 메디나 헌장 자율적인 유대인 공동체; 무슬림과 유대인은 각각의 종교와 경제권을 가진다. 유대인의 권리: 유대인들은 사회적, 법률적, 경제적으로 무슬림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유대인과 무슬림 동맹: 유대인의 적들은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들과 동맹한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자율적인 다종교 공동체: 유대인 외에도 이 공동체에 포함된 다른 종교인들도 무슬림과 정치 및 문화에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 전사 공동체: 외부인들과의 관계는 모두 전쟁에 참가하거나 완전히 평화 상태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전쟁에서 메디나의 주민들은 모두 같은 편. 이 조약에 서명한 자들은 메디나가 공격을 받을 경우에 서로 도와야만 한다. 무함마드의 위상: 무함마드의 허락 없이 전쟁을 할 수 없다. 전쟁 비용: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스스로 전쟁 비용을 부담하고, 무슬림들도 스스로 전쟁 비용을 부담한다. 이 공동체 구성원 중 누가 공격을 당하면 다른 구성원이 도와야만 한다.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무슬림들에게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메카의 꾸라이시: 적들인 메카의 꾸라이시와 그들의 동맹은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다. 꾸라이시 상인들은 보호를 받거나 지원을 받지 못한다. 꾸라이시 상인들은 메디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돕는다. 9개 부족의 유대인들 명시: 아우프 부족의 유대인들, 낫자르 부족의 유대인들, 하리스 부족의 유대인들, 사이다 부족의 유대인들, 자샴 부족의 유대인들, 아우스 부족의 유대인들, 싸흘라바 부족의 유대인들, 주프나 부족의 유대인들, 샤트비아 부족의 유대인들은 무슬림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종교가 있고, 무슬림들에게는 그들의 종교가 있으며, 이 원칙은 유대인들의 후원자들과 유대인의 친구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악한 행동이나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스스로와 가족에게 악행을 불러오기 때문에 여기서 제외된다. 메디나는 성지: 이 헌장에 나오는 주민들에게 메디나 안은 성지다. 사진 출처 - 구글  메디나 헌장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메디나로 초대한 두 부족인 카즈라즈와 아우스 부족을 포함하여 9개 부족(아우프, 낫자르, 하리스, 사이다, 자샴, 아우스, 싸흘라바, 주프나, 샤트비아) 유대인들에 대해서 동맹관계를 강조하였다. 낫자르 부족, 하리스 부족, 사이다 부족은 더 큰 규모의 카즈라즈 부족을 구성한다. 이 헌장은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규정하면서 다른 주민들에 대해서는 유대인들과 가까운 친분관계가 있으면, 유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다종교 공동체이다.  또한 이 공동체는 전사 공동체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무슬림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일지라도 적들과 내통하거나 그들 편에 서면,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다. 실제로 624년 메카와의 전쟁에서 메카의 꾸라이시 적들 편에 섰던 일부 유대인들이 메디나에서 추방당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많은 자료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불화로 몰아감으로써 종교 간 충돌로 결론 내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인 5세기 후반 아브라함의 순수한 일신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무함마드의 증조부 하심 빈 압드 마나프(하심 가문을 세운 시조다. 464-497년)는 증조모 살마와 함께 메디나에 거주하였다. 이 증조모 살마는 카즈라즈-낫자르 부족 출신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조부 사이바 빈 하심(497-578)은 메디나에서 이 증조부모, 하심과 살마의 아들로 태어나 메카로 이주하였고, 카바 신전의 잠잠 우물을 발견하여 관리하였다. 특히 그는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를 키웠다. 이러한 사실은 무함마드가 무슬림 예언자로 우뚝 서기전에 일신교, 메디나 및 카즈라즈-낫자르 부족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언자가 된 이후 무함마드는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면서 카즈라즈-낫자르 부족과 함께 거주하였고, 예언자의 모스크가 카즈라즈-낫자르 부족의 마당에 세워졌다. 또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들은 카즈라즈-사이다 부족이 소유한 건물인 사끼파에서 아부 바크르를 무함마드를 잇는 후계자인 제 1대 칼리파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이 카즈라즈 부족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메디나로 초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메디나에서 정착하여 활동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이 부족은 무슬림으로 개종하였으며, 무함마드 사후에도 무슬림들의 정복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메디나 헌장 속에 나타나는 무슬림들은 각 부족 내 유대인들과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고, 종교나 부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하거나 분쟁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021-02-17 | hrights | 조회: 335 | 추천: 4
이윤/ 경찰관  몇 년 전 서울의 한 지구대에서 근무할 때였다.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우리 지구대에 주의를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집에서 거의 매일 가정폭력을 이유로 112신고를 하는데, 출동한 직원들이 현장 조치로 사안을 종결할 뿐이고 신고는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지구대 및 경찰서 전체 성과평가 점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낮은 성과평가는 다음 해 급여액 감소를 의미하여 직원들 모두가 신경 쓰는 일인데 왜 신고처리를 부실하게 하였을까? 더욱 걱정되는 것은 가정폭력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군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팀장들과 직원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112 신고자는 아들과 함께 사는 여성인데, 20대 중반인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집안 물건을 부수거나 엄마를 폭행한다는 것이다. 약을 먹으면 괜찮은데, 엄마가 매일 일을 하러 나가야 해서 챙겨주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약을 먹지 않는 경우가 많고, 특히 아침 출근 시간에 아들이 행패를 부리면 출근할 수가 없어서 112신고를 하여 경찰관들이 아들을 붙잡고 진정시키면 자신은 출근한다고 하였다. 이 분의 목적은 아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출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처벌이나 격리, 접근금지 등 다른 가정폭력 관련법상 조치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과평가에도 좋지 않고, 직원들도 매일 돌아가며 시달리고 있지만(그 아들이 힘이 엄청 세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가서 도와주고 있고, 과거에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봤지만 엄마 스스로 아들을 돌보고 싶어 하여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였다.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성과평가나 직원들 힘든 것도 문제지만 지금까지 하던 대로 계속 아들을 저지하고 진정시키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칼 같은 흉기를 휘두르거나 집에 불을 지른다거나 하여 자신의 엄마나 주변 사람들의 생명과 신체, 재산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위험이 장래에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을 엄마 의사에 반하여 떼어놓는다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가능성 여부를 떠나) 것이 옳은 일인가? 혹시 그 엄마는 아들을 입원시킬 경제적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먼저 이 엄마와 상담하여 진정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다음은 아들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후 위험성 평가를 거쳐 조치결정을 하는 것이 맞는 순서일까? 등등 많은 생각을 했다. 자치단체 복지담당 직원을 찾아 그 가정에 대한 일종의 솔루션을 추진하는 방안도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만 하던 와중에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으로(1월 말에 갔는데 3월 초 인사는 정말 예외적이다) 그 지구대를 떠났다.  양천 아동학대 사건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었을 때 문득 지구대에서의 그 일이 떠올랐다. 만일 그 아들에 의해 엄마나 주변 이웃들에게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면 무고한 희생이 따랐을 것이고, 신고와 출동이 반복되었음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난 비난과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 위험 발생 예방과 피해 우려인의 의사, 당사자 조치방법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현장 경찰관들의 고충도 느꼈다.  경찰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관련된 권리는 서로 충돌한다. 때로 그 권리들은 생명권, 주거권, 행복추구권 등 기본적 인권에 해당한다. 인권 충돌 상황에서 경찰관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나마 고민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사치다. 흥분되고,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현장에서는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빠른 판단하에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어떻게 하지?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이거 해도 위법한 것은 아닌가?  이럴 때 즉각적인 판단에 적용하라고 만든 기준이 비례의 원칙이긴 한데, 도대체 충돌하는 인권 중 무엇이 중한지 모를 일이다. 사람과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인권에도 가벼운 인권과 무거운 인권이 따로 있지 않은데 뭘 비교하란 말인가. 이럴 때 과거 경찰 선배분들은 ‘주변 상황을 면밀히 고려해서, 현명하게 판단하여, 슬기롭게 대처’하라고 했는데 비례의 원칙은 이보다 거의 한 발자국 정도 나은 기준일 뿐이다. 즉각적이고 적절한 행동을 하려면 요건과 조치 행동, 효과가 구체적이고 명확한 법규와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무자가 법규와 매뉴얼을 따랐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형사·민사·행정상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일관되고 신속하며 당당한 경찰활동이 가능해지고, 가래로 막을 위해를 호미로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입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많은 분이 경찰권을 굉장히 대단하다고 여겨 경찰이면 강제로 뭐든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시간 되시는 분들은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경찰관직무집행법을 한 번 읽어 보시라. 경찰관들은 질문하거나, 보호하거나, 경고하거나, 피난시키거나, 제지하거나, 통행을 제한 또는 금지하거나, 출입하거나, 조회할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을 가질 뿐이고, 이 모든 것에 강제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있더라도 상당히 미약하거나 간접적인(공무집행방해죄를 매개로 한) 강제력에 불과하다. 체포, 구속, 압수와 같은 엄청난 강제력은 전체 경찰업무의 1/4에 지나지 않는 범죄 수사에 필요한 형사법적 강제조치일 뿐, 사전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강제력은 아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누군가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경찰에게 기본권을 보호하게 하려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기본권 침해는 헌법에 의해 유보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이고 이 역시 입법의 영역이다. 비극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형벌을 높이는 방식의 입법 조치와 책임질 사람을 찾아 처벌하고 징계하는 것보다는, 사회가 보호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를 위해 허용할 것과 포기할 것은 무엇인지, 절차적 정당성과 실효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민주적 논의와 합의를 활발하게 하여 다음에는 동일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2021-02-03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12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얼마 전 2020 경기기본소득박람회 자료를 다시 살피다 뒤늦게 눈에 띄는 자료를 보게 됐다. 인태연 청와대 자영업 비서관의 발제 토론자료였다.  장표 하나를 보는 순간, 한국형 지역화폐를 정확하게 정리했구나! 싶은 생각에 바로 출처를 밝히고 여기저기 써먹어야겠다는 궁리를 하게 됐다.(ㅎ)  인 비서관은 지역화폐의 개념을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법정화폐 이외의 지불결제 수단’이라고 정리했다. 여기서 ‘지자체가 발행하고 해당 지역 가맹점에서만 사용하는 유가증권의 일종’을 덧붙이면 더 깔끔한 마무리가 되겠다.  이어 목적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지역 시민들의 소득이 외부에서의 소비를 통해 유출되지 않게 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발행’이라고 적시했다. 여기서 눈에 확 꽂히는 말은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가 되겠다.  그동안 우리나라 지역화폐의 특징이라고 하자면, 법정화폐와 동일한 가치로 교환이 가능한 태환형 지역화폐이며 지역경제 활성화를 최우선 목적에 두는 보완화폐라고 주로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인 비서관은 경제 활성화가 아니라 지역공동체 복원을 지역화폐의 목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반가웠다. 그동안 공적인 문서나 공공영역 관계자의 입에서 지역화폐를 설명하며 ‘공동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역경제 활성화는 중간 다리이고 궁극적으로는 공동체 강화라고 말할 때 구구하게 설명을 덧붙이던 것에서 순간 퀀텀 점프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우리나라의 지역화폐는 경제와 연결되어 이해되는 상황이니만큼 인 비서관은 지역화폐의 골목상권 보호 기능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술하고 있다.  그는 ‘지역화폐는 사용지역 및 사용상권 제한 등의 방식을 활용하여 지역경제 선순환과 대기업 위주의 지역상권에서 자영업 소상공인 상권을 보호하고 활성화하는 균형추’라고 밝혔다. 아래 이미지 자료는 무릎을 '탁' 쳤던 그 장표이다. 어떤 지역경제 활성화를 말하는지 길을 찾아주는 나침반 같은 느낌이었다. 출처 - 인태연 청와대 자영업 비서관  먼저 ‘지역경제 선순환 구조’는 지역 내 소비의 부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지역에서 돌고 돌아야 한다는 ‘역외유출 예방’을 뜻하며, 이는 내부에서 돈이 돌게 됨에 따라 지역화폐가 지역경제 돈맥 곳곳에 흐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상공인 영업기반 확충’, 이 부분이 우리나라 지역화폐의 지속가능성을 가를 분기점이 될 개념이다. 장표에서 표현하는 ‘대기업 상권’은 쉽게 말해 대기업 프랜차이즈를 말한다. 이를테면 대기업 본사의 다양한 홍보 마케팅을 통해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들을 말한다. 같은 계열 프랜차이즈끼리 포인트 적립도 가능한 그런 가게들이다. 이를 ‘기업형 자영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건너편에 있는 ‘골목상권’은 가게 마케팅도, 홍보도 홀로 해야 하는 동네 가게를 말한다. 시흥시의 기준으로 하자면 가맹 본사가 있더라도 유통산업발전법 상의 상호출자제한기업(대기업) 외의 프랜차이즈인 경우에는 포함된다. 동네 치킨집을 상상하면 된다. 다른 표현으로 ‘생계형 자영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역으로 가둬둔 돈의 흐름이 한 곳으로만 쏠리게 된다면 이것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지역에서 순환하는 돈이 골고루 흘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에 두 번 갈 것을 한번은 동네 빵집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면 위의 장표에서 표현한 것처럼 골목상권 내에 돈이 머물게 하면서 균형발전을 이루게 된다는 설명이다.  사실 지난 2~3년 사이 급속하게 성장한 우리나라의 지역화폐는 지역 소비의 역외유출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역 내 소비의 쏠림현상을 막았는지에 대해서는 되짚어봐야 한다. 골목상권을 보호하여 대기업 상권과 상생할 수 있도록 지역화폐가 균형추 역할을 했는지 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각종 지원금이 지역화폐로 지급되자 다소 불편하지만 가계에도 도움이 되고 동네 골목상권도 살리는 협력적 소비를 바탕에 둬야 하는 지역화폐가, 마치 정부가 제공하는 소비쿠폰처럼 인식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게다가 ‘카드업계, 지역화폐 시장 잡아라…올해 15조 규모’라는 뉴스 제목까지 보고 있자면, 지역화폐의 의미와 목적이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넘어 지역화폐 자체의 존망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걱정이 든다.  지역화폐를 둘러싼 이슈는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 지역화폐로 지급되고 있다. 정치적 폭발력이 큰 기본소득 이슈에 지역화폐는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난 2012년에 시작해서 전 세계적인 지역화폐 모범도시로 일컬어지던 영국 브리스톨시의 브리스톨 파운드가 얼마 전부터 유통을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가맹점 관리 및 운영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인데, 코로나19 마저 덮쳐 유통량이 크게 줄어 운영을 멈춘 채 새로운 결제방식 등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역화폐가 단순한 소비쿠폰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안팎으로는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역화폐와 관련한 이슈 및 정책 환경 변화가 너무 빨리 추진되고 변화하고 있다. 한 해의 트렌드를 정리해 매년 발간되는 도서의 올해 슬로건이 ‘방향보다는 속도’라고 하던데, 과속하다 치이면 갈 길이 없어질 수도 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다.
2021-01-28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2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2021년을 맞이하게 되면서 이제 21세기도 중반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이끄는 위력은 단연 A.I.를 중심으로 한 고도과학기술의 가속하는 발달이다. 빅 데이터 활용에 따라 각자의 프라이버시의 내밀함이 증발하고, 그 대신 스마트폰이 마치 각자의 기계적인 영혼인 양 위력을 발휘한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현실화되는가 하면, 구글을 중심으로 영생불사를 향한 기술 개발이 박차를 가한다는 소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인간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매스컴을 타고 간간이 흘러나온다. 무엇보다 A.I.로 무장한 알파고가 이세돌 천재 기사에게 전적인 승리를 거두고 곧이어 강력한 딥러닝으로 무장한 알파고 제로가 알파고와 바둑을 두어 백전백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A.I. 기술 기반의 범용 로봇이 인간을 넘어서서 대체해버리거나 적어도 인간을 노예로 삼거나 하는 사태가 현재로서는 터무니없지만 머지않은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라는 불안이 암암리에 확산하고 있다. 2000년에 미국 대통령의 과학기술자문 위원회를 이끌던 빌 조이가 오래 가지 않아 인간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한 예측이 결국 현실화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인류 전체의 불안이 암암리에 확산하는 것이다. 이에 뇌의 비밀을 밝혀 지능의 정체를 알아 기계적으로 전용하고자 하는 ‘뇌 신경 인지과학’이 첨단의 복합적인 융합학문으로 떠오르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생물학적인 기계 인간인 사이보그 인간을 모델로 해서 ‘포스트 휴먼’ 담론이 인간 존재에 관한 첨단 담론인 양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어쩌면 역사상 최대의 전 지구적 역병으로 기록될 것 같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류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 각종 장벽이 건설되고, 국가 내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활동 시간의 강한 제한이라는 방역 정책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분리와 고립이 당연한 일상인 양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의 감정이 무기력의 우울인 ‘코로나 블루’에다 방향과 이유가 없는 분노인 ‘코로나 레드’가 겹친 상태로 치닫고 있다. 입고 먹는 데 필요한 것들이 비대면 택배로 공급된다. 하지만, 먹고 입는 것만으로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직접 만나 온몸으로 복합적인 감각을 주고받을 때, 그 만남을 바탕으로 그 수준과 상관없이 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공유할 때,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문화생활을 구체적으로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런 만큼 인간다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대면 접촉에 따른 이러한 인간됨의 구체적인 실현의 영역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말 그대로 붕괴하는 중인 것이다. 물론 이삼년 지나면 예전의 정상 상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붕괴한 인간 됨은 쉽게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고 난 뒤의 사회 양식을 뜻할 수도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진정되고 난 뒤의 사회 양식을 뜻할 수도 있다. 후자의 뜻으로 본 ‘포스트 코로나’는 대대적인 생명 위협에 따른 불안과 공포가 집단 트라우마를 형성함으로써 사람들의 감정과 사유 그리고 행동을 새롭게 가져가도록 할 것이다. 그 아주 가까운 미래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이때를 떼돈을 벌 기회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전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였을까, 세계 유수의 제약회사들은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WHO를 비롯한 각국의 백신 허가 관청에서는 2상이니 3상이니 하는 검증 절차를 간소화해서라도 접종 허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과 소련에서 먼저 접종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미국과 EU를 비롯한 선진국에서 접종이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심지어 백신 접종 후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비롯해 백신 접종의 각종 부작용에 따른 불안과 공포가 확산하면서 백신 접종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상당 정도에 이른다는 여론 조사의 결과가 보도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백신과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치료제의 개발과 같은 의료 과학기술 말고는 확실한 해결책이 없다.  이 와중에, 빅 데이터를 장악하고서 세계를 호령하는 몇몇 세계적인 플랫폼 기업들이 백신 속에 극미한 디지털 장치를 숨겨 넣어 전세계 사람들을 노예화하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으니 백신 접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퍼뜨리는 변종 기독교 집단이 나타나고, 그 일부의 극단주의자가 미 의회를 공격해 들어가 의기양양 파안대소를 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무슨 ‘BTJ ― back to Jerusalem ― 열방 센터’인가 하는 제정신을 잃어버린 기묘한 기독교 선교집단이 이와 연결된 모양이다. 작년에는 ‘신천지’니 뭐니 하는 집단 광기의 기독교 집단이 코로나19 확산에 불을 붙여 문제가 되고, 정체불명의 인물인 ‘전광훈’을 중심으로 한 ‘태극기 부대’의 광화문 집회니 ‘사랑제일교회’니 해서 반(反)민주정부 변종 기독교 세력들이 코로나19 방역에 역행하여 문제를 일으키더니, 새해 들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지를 회복하자는 둥, 과거 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온갖 잔인무도한 폭력적인 사태를 일으켰던 십자군 운동을 되살리자는 둥, 시대착오적인, 아니 21세기 불안과 공포를 역용한 종말론적인 변종 기독교 광신 집단이 전면에 드러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러한 변종 기독교 바이러스가 나타나는가? 모든 일에 대해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수백 년이 되었고, 오늘날 그 정점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근대과학혁명이 일어나 기계론적인 우주론이 확립됨으로써 전 우주의 운행에 신의 의지와 섭리가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신은 우주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19세기 진화론과 유물론이 발달하여 지성의 세계를 장악하다시피 하자, 신은 생명 일반의 영역에서 쫓겨났다. 그런가 하면, 이와 같은 세기에 새로운 기계기술과 산업 경영의 획기적인 발명에 힘입어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자본이 인간 욕망과 감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행동을 장악하게 되고, 20세기 들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홀로코스트를 수반한 양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거대 악이 이어지자, 이제 신은 인간의 삶으로부터도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히틀러 나치가 ‘유대인 소탕’을 목표로 하루에 몇천명씩 독가스실로 보내 홀로코스트,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할 때, 곧 희생당할 누군가가 “야곱의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하고 외쳤다고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신의 침묵이다. 얼마 동안에는 신의 침묵을 계시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지속하면 신의 침묵은 신의 무능력으로 해석되고 급기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그런가 하면, 이제 21세기에 이르러, 앞서 기술한 것처럼, 첨단과학기술들이 신의 고유한 영역을 최대한으로 잠식하고 있다. 진화론을 원용하기도 하면서 이루어지는 유전공학의 발달은 생명의 유물론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인간을 비롯한 생명 창조의 영역을 장악하는 중이다. 인공수정에 이어 유전공학의 발달로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 복제가 실현되고, 이에 게놈 구조가 똑같은 개개 인간의 복제가 원리상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A.I.로봇 기술의 발달로 신이 창조한 최고의 창작물인 인간 존재의 탁월성을 뒤로 물리칠 범용 A.I. 기계 생명체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고가 예사로 매스컴을 타고 있고, 이러한 A.I. 기계 생명체를 만드는 기술공학자는 자신이 혹시 신이 아닌가, 하는 심중한 착각을 할 정도다. 이 고도과학기술들이 인간 삶을 근본에서부터 결정하기 시작하자, 그나마 형이상학적-신학적으로 남아있던 인간의 영혼마저 기계적인 영혼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으면서 이제 신은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헐벗은 ‘거지’ 신세가 된 셈이다. 신이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와 함께 특히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 기독교 자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전세계적으로 기독교는 겉으로 보기에 건재하다. 모르긴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한 자들의 장례식에서 슬픔에 젖은 유가족들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맞은편에 신부나 목사가 망자가 내세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같이 아직 기독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죽음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과 전쟁과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을 정확하게 알리고 드러내는 위력이다.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사멸과 무의미에 대한 확신에 기반을 두고서 그 사멸과 무의미를 넘어섰으면 하는 실현 불가능한 바람에 상상이 결합해 생겨난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구원과 행복뿐만 아니라 심판과 공포와 저주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신이 자리를 잡고서 가상적인 지상 최대 최고의 주권적인 위력을 발휘해 온 것이다. 방역을 방해하는 광화문 집회에서 “죽음은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인 거야!”라고 떠들어대는 ‘전광훈’의 말이 이를 잘 나타낸다. 과연 전광훈만일까? 죽어도 좋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야말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진정한 구원의 백신이고, 그 구원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는 이념을 믿어야 한다고 기독교도 일반이 주장할 것이고, 그 믿음을 최면을 걸어서라도 강화하기 위해 기도를 올린 것이다.  결국, 문제는 죽음이다. 그런데 인간 개체의 복제 기술을 숨긴 상태로 영생불사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많은 자본을 투자해 그 결과가 상당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면, 인간들은 과연 신에게 구원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발버둥 치듯 돈을 벌어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술에 의한 구원을 청할 것인가.  이전에도 특히 대대적인 전쟁이나 대역병으로 사회정치적인 대혼란이 일어나 신이 위기에 처하면, 온갖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변종 기독교 집단들이 생겨나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앞서 기술한 것처럼, 21세기에 겪는 신의 위기는 이전의 위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백신 약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극미한 감각-통신의 디지털 기계를 숨겨 백신을 맞은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세계 지배 세력의 음모를 운운하는 신종의 변종 기독교 바이러스의 출현은 신의 절대적인 위기와 그에 따른 기독교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 해답은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발달시켜 온 우리 인간의 이성을 앞세워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이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성은 종교건 기술자본이건 인간의 죽음을 볼모로 대중을 선동하여 무지와 무명(無明)을 강요하는 ‘사탕발림’을 내세운 권력의 욕망을 폭로할 수 있고 분쇄하는 최소한의 인간 능력임은 분명하다.
2021-01-20 | hrights | 조회: 186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