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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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흠동풍(只欠東風) : 단 부족한 것은 동풍이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말이다. 조조가 중국 통일을 위해 유비의 촉나라에 진격하자 조조의 군인들이 탄 전함에 불을 질러 공격하는 화공(火攻)으로 군대를 물리치려 하였는데 동풍이 불지 않아 화공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갈량이 한 말이다. 어떤 일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었으나 중요한 핵심 조건을 구비하지 못함을 일컫는 말로 회자되는 사자성어다.  부패하고, 무능한 수구 기득권 세력에 항거한 촛불로부터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고 출발한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통해 재조산하(再造山河) 개혁의 깃발을 꽂으려고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의 깃발은 산하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적대적 야당의 철벽을 넘지 못한 채 개혁 입법은 중단되었다. 가히 지흠동풍 형국으로 보인다.  권력의 칼춤으로 미친 굿판은 반복될 수 있다.  시민이 무너뜨리고자 하였던 구악의 폐습. 그토록 간절하게 단절하고 싶었던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 헌법과 법치주의를 유린한 자들을 도려내는 적폐청산은 무너진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타락한 가짜 보수에 대한 적폐청산 필요성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처벌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드는 재조산하가 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적폐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검찰·국정원·재벌 등에 대한 제도적 입법 개혁과 혁신이 뿌리내리지 못하면 언제든지 권력의 칼춤으로 미친 굿판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4·19 혁명은 5·16 군사쿠데타에 짓밟혔고,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항쟁은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에 학살당했고, 1987년의 6월 혁명은 속된 말로 ‘죽 쒀서 x 준' 꼴이 되어버린 변형된 반쪽짜리였다. 혁명은 간 곳 없고, 미친 권력의 굿판이 횡횡하였다.  시민이 환호하고 감격하였던 승리의 달콤함은 짧았고, 패배의 쓰라림은 길고 긴 상흔으로 가슴에 저리게 남아있다. 촛불이 들불처럼 일어나 시대의 경계를 넘고자 하나 한결같이 지뢰밭이다. 2016〜2017년 최신판 박근혜의 헌정문란을 넘어서기 위한 입법 열차가 국회 안에서 멈추어 서있다. 열차가 언제 출발할지, 목적지가 어딘지도 불확실하다. 촛불이 또다시 지울 수 없는 상처만 입을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는 이유다.  촛불 승리의 기억은 개인적 유전자로 체화되고, 이를 넘어서 사회적 유전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촛불 시민이 공유한 소중한 가치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초석이 되겠지만, 한걸음 더 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패배의 쓰라림에 아파하다 산화할지 모른다. 또다시 상처입고 울지 않기 위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아직 촛불을 거둘 때가 아니다. 촛불 개혁이 완수 될 때까지 촛불을 칼집에 넣어서는 안 된다.  촛불혁명의 화룡점정은 OO다.  개혁의 성공을 위한 정치적·사회적 조건은 무엇인가. 끊고자 하였던 패악스런 제도에 기대여 악을 쓰고 반대하는 무리들을 돌파할 방법은 있는가. 물론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보편적 방정식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백만대군을 추풍낙엽처럼 침몰시킨 제갈량의 동풍을 찾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진 출처 - 선거연수원  촛불은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이미 만천하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정신만으로는 단 1센티미터도 양보·타협하지 않는 수구세력을 넘어설 수 없다. 하여 촛불은 어둠을 여전히 밝힐 것이며, 나라의 주인이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올해 6월 13일 지방자체단체 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개혁의 견고한 디딤돌로 만드는 것. 막말 대왕, 무능하고 부패한 자, 시민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자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는 것. ‘백수 만들기 운동’을 통해 용의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그리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어야 한다. 마지막 눈을 찍을 수 있는 궁극적 주체는 주권자인 촛불 시민임을 다시 만천하에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갈량이 말한 이 시대 지흠동풍이 아닐까.  문재인 정부도 촛불 혁명의 화룡점정을 찍을 매우 중요한 주체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디게 밝아 온 아침에 할 일을 모두 마쳐야 한다. 또다시 찾아 올 수 있는 어두운 밤도 대비해야 한다. 하여, 깨어있는 촛불 시민은 문재인 정부가 국회의 개혁 저지 세력을 넘기 위해 과거의 원한과 대결 등을 넘어 오월동주(吳越同舟)도 마다하지 않고, 쥐 잡는 것이 중요하지 흰 고양인지 검은 고양이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의 묘수도 발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정권 획득의 달콤함에 취해 헛발질하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는 타락한 가짜 보수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실수·실책을 할까 조마조마 하기도 하다. 촛불 혁명의 고귀한 씨앗을 발아시켜 미완의 1987년을 넘어설 소중한 기회가 없어져 버릴까 두렵기도 하다. ‘촛불혁명의 화룡점정은 OO이다.’라는 집단 지성을 모아야 할 이유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8-02-07 | hrights | 조회: 357 | 추천: 6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2015년 말의 한일위안부 합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발동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낳은 파장이었다. 외교의 상대인 일본정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 합의는 국제인권기준과 동떨어져 있고, 더구나 피해자들의 견해와 입장은 거의 반영되지 않아 대단히 부실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새로운 정부는 고심 끝에 이 합의를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무효(사실상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나 외교적 보호책임은 인권침해에 대해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 조치가 성취될 때까지 존속하는 것이므로 이 상태에서 체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 자리에서는 식민청산과 관련하여 또 다른 외교적 사안으로서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합사문제를 거론해야겠다. 다수의 국가들이 독립전쟁이나 해방전쟁에서 사망한 전몰자를 위한 추도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무명용사를 기리는 것은 어느 나라나 공통된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국가는 이러한 추도문제에서 원칙적으로 문화적 자율성을 가지므로 이웃나라가 감놓아라 배놓아라 할 수 없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립묘지처럼 유해봉안소나 묘지가 아니라 넋의 보관소에 가깝다. 그런데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를 전몰자 추도시설로 좋게 해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곳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설이 아니라 현창(顯彰)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표하는 곳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태도를 찬양하는 공간이다. 침략전쟁의 수괴들(A급전범)을 합사하는 신사라면 침략전쟁과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 수상이나 일본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군국주의적인 전쟁선동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시아의 주변민족은 그들의 참배에 크게 우려하며 이를 일본의 국내문제로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  침략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일본인 희생자 유족들이 몇 차례 합사철회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모두 패소하였다. 신사측은 신으로 영구적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희한한 논리를 펼쳤다. 사람이 하는 일을 불가역적, 최종적, 신성한 조치라고 우기고 있다. 오로지 전쟁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모아 군국주의 일본을 위한 전쟁신을 집단적으로 창작하는 기만술이라고 생각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또 다른 충격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이 2만 여명도 넘게 강제로 합사되어 있다. 일본정부가 패전 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한 다음에 비로소 대다수 조선인 전사자를 야스쿠니에 합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도의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사망자들의 유해는 전장터에 방치해두고 그 영혼을 탈취하여 군국주의적 국혼을 날조한 것이다. 심지어 생존한 조선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한 사례까지 발견되었다. 사진 출처 - EBS  2007년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인 이희자 선생과 일부 유족들이 합사철회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였다. 유족들은 당시 합사제신명부에서 희생자 이름 말소, 원고 1인당 위자료 500만 엔 지급, 언론을 통한 무단 합사 사과문 게재 등이었다. 2018년 현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다른 유족들이 2차로 합사철회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유족측 변호인들이 소송에서 ‘민족적 인격권’을 주장하였다. 일본정부는 야스쿠니 합사를 국내 문제나 종교문제(야스쿠니신사의 자율권)로 강변하지만 이는 희생자와 유족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안으로서 국제 문제이다. 죽음을 국가화 하는 것, 더구나 희생자와 유족의 의사에 반해서 국가화하는 조치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민족의 차원에서 심각한 권리침해이다. 전쟁법은 사망한 적에 대해서도 인도적으로 처우해줄 것을 요구한다. 1907년 제네바 협약들은 사망한 적을 그의 종교 관례에 따라 매장하고 분묘등록소를 설치하고 희망에 따라 유해의 송환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제17조 제2항 및 제3항). 1977년 제네바협약 제1추가의정서도 묘지의 보호와 유해송환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제34조 제2항). 죽은 자의 고유한 인격권과 가족의 애도의 권리가 전사자에게 중요하다. 인권피해자권리장전(2005)도 죽은 자에 대한 의례에서 유족의 문화적 전통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제22조). 이러한 국제관례를 보더라도 민족적 정체성을 존중하는 선에서 일본정부가 합사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민중들이 전국각지에서 취한 최초의 정치행동은 신사소각이었다. 조선민중은 신사를 종교적인 사적 공간이 아니라 조선인의 정신과 의례를 부정하는 식민잔재로 이해한 것이다. 강제동원위원회가 B.C급 조선인 전범을 민족적 견지에서 식민지강제동원의 피해자로 규정한 사정에 비추어보면 조선인 합사문제를 한국정부가 묵인하는 것은 조화로운 태도가 아니다. 한국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문제에 대한 부실한 합의로 인해 쓰디쓴 외교적 실패와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죽은 후에도 민족적 성원성에 반해서 전쟁과 일본국가주의의 불쏘시개로 활용되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합사철회는 피해자와 그 유족의 개별적 소송을 통해서 합사 철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방치하기보다는 한국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시정해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01-24 | hrights | 조회: 525 | 추천: 7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1월 15일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뜨신지 꼭 2년이 된 날이다. 하루 전인 1월 14일에 성공회대학교 교내 성당에서 2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유력한 정치인들부터 무명의 노동자들까지 많은 분들이 함께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신영복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이 얼마나 깊고 너른 의미의 자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은 생전에 다양한 지식을 섭렵했고 수많은 지혜들을 남겼지만 만년에 유독 강조한 메시지가 있다. 바로 ‘변방이 가진 창조성’에 관한 것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그 중심지가 끊임없이 변방으로 이동해 온 역사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방은 지리적이거나 공간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의식의 변방성, 즉 변방 의식을 의미한다. 변방은 성찰의 공간이다. 문명이든 국가든 혹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성찰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면 그 생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게 성찰하는 변방만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신 변방의 창조성에 관해 생각하다보니 문득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한국대중음악상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내가 15년째 선정위원장을 맡아 진행하고 있는 시상식이다. 한 해 동안 한국 대중음악 씬에 등장한 새 작품들 가운데 음악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취를 달성한 작품과 뮤지션들을 골라 상을 준다. 상업적 성공이나 대중적 인지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직 음악적 성취만이 시상의 기준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이 상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이른바 주류 씬이 아니라 주로 비주류 혹은 인디 씬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주류 씬의 음악이 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실제로 적지 않은 아이돌 그룹과 스타급 음악인들이 이 상을 받았다) 다양한 장르 부문을 배려하는 상의 특성 상 아무래도 비주류 음악인들이 상대적으로 상을 많이 받게 된다. 지금 우리 대중음악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주류 음악은 대체로 일부의 장르와 양식에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비주류 음악 씬에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생산되며 늘 신선한 창의적 역동성이 꿈틀거린다. 바로 변방의 창조성이다. 사진 출처 - 한국대중음악상 트위터  문제는 이렇게 창조적인 변방의 음악들이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가지지 못한 채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그들이 생존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TV에 출연하고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것, 요컨대 중심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될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비주류 음악이 최소한의 독자적 생존과 재생산이 가능한 물적 토대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대중이 변방의 다양한 음악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대중음악상은 바로 그런 접점의 역할을 자임해 왔다. 지금까지 그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해 왔는지 정밀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 대중음악 씬의 창조성을 북돋우고 대중의 음악 환경을 다양화하는 데 나름의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신영복 선생은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중심에 대한 콤플렉스와 열등의식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에 대한 허망한 환상을 없애지 못한다면 변방은 그저 변방으로 남을 뿐이며 아류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변방이 진정 창조적 공간이 되려면 중심부를 향한 환상을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논리와 이유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인디 음악을 포함한 모든 비주류의 문화적 실천이 그럴 것이고 한국대중음악상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01-17 | hrights | 조회: 569 | 추천: 6
- ‘평화’에 대한 감수성 높여야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처음 대하는 광경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와! 평화롭다”라는 탄성을 질러본 경험이 있는지….  특히나 이런 감동은 먼 이국땅에서 만난 낯선 풍경 앞에서 배가되는 것 같다. 감동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이질적인 체험, 혹은 기대나 상상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커진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감동이 ‘평화’라는 말로 치환되는 것일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보면, 그 대상이 자연이든 인간 공동체든 처음 마주하는 광경 속으로 뛰어들어 그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일 때 ‘평화’가 온 몸에 들어차 소름 돋는 감동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 평화는 낯선 아름다움인 동시에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떠올릴 수 있다. 얻기가 매우 어려워 어떤 이는 ‘평화’를 꿈이나, 과거의 신화, 유토피아(Utopia)라고까지 말한다.  이처럼 평화는 쉽게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절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가깝게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에 대한 염원이 간절한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평화를 맞아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평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의 실체조차 모르는 건 아닌가.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이상향은 결국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바로 그 풍경 속에 ‘나’가 포함된 ‘평화’ 그 자체인 세상에 다름 아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평화를 진리에 의해 세워지고, 정의에 의해 성립되고, 사랑으로 완성되고, 자유에 의해 실현된 질서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참 평화는 정의의 결실이라고 본다. 평화와 정의는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에서 평화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가톨릭신문  그렇다면 인류가 이루고자 하는 평화는 어떠한 모습일까. 많은 이들이 평화를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화는 적대세력 간의 균형 유지나, 전제적 지배의 결과로 이뤄지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앞서 밝힌 대로 인간사회 유지에 필요한 질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인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정의, 정의의 발현인 공동선(共同善)이 담보하고자 하는 내용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이에 따라 평화 또한 그 구체적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평화는 어떠한 계기로 인해 단번에 영구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꾸준히 건설해 나가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로 평화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평화의 실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그것을 이뤄낼 수도, 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는 모든 인류가 함께 누려야 할 신의 선물이다. 따라서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를 외치며 평화를 독점하고자 하는 미국이 이러한 평화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일궈나가는 평화가 아니고는 평화라는 이름을 달 수 없다.  새해! 평화를 공부해보자.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 나갈 때 참 평화로 난 새로운 길이 열리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에서 벅찬 감동을 느끼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8-01-10 | hrights | 조회: 537 | 추천: 17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TV에서 북 지도자의 신년사를 실시간 생방송으로 시청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TV조선이 한시라도 바삐 북을 왜곡하는 보도 욕심에 곧잘 앞장을 서왔던 생중계이다. TV조선이 국가보안법이 속박해 온 우리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터준 셈이다. TV조선 스스로 이적목적이 아니라 반북목적이 명확한 입장에서 국가보안법에 겁먹지 않고 무시한 결과 국가보안법에 역행하여 도리어 국가보안법을 죽이기에 나선 꼴이 되었다.  내가 변론한 사건 중에는 2009년 북의 신년공동사설 전문과 그 분석 기사를 소모임 게시판에 링크 게시하였다는 이유로 이적표현물 반포 혐의로 기소된 사례도 있다. 선군정치나 사회주의자립경제의 우월성 등을 찬양하거나 옹호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북의 신년사 내용을 링크 형식으로 그대로 게시한 것은 북의 주장에 동조하려는 이적 목적 하에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공안검찰의 논리였다.  북 지도자의 신년사 생중계가 가능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실은 국가보안법에 기생하는 극우광기의 폭력이 판을 친다. 통일을 바라는 마음에서 통일나무 가지에 태극기와 함께 인공기를 그려 표현한 어린이 그림 수상작을 은행 달력에 삽입했다가 모 은행은 종북몰이 대상이 되었다. 제1야당 당 대표는 인공기가 등장한 은행달력에 경악하며(아마도 마음속으론 쾌재를 불렀으리라) 안보불감증에 걸린 국민들을 탓하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총력대응의 길에 앞장설 것을 맹세한다. 사진 출처 - 우리미술대회 홈페이지  제1야당의 당 대표는 평화통일을 바라는 어린이의 인공기 그림과 그것을 게재한 은행의 달력이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이적표현물 제작과 반포행위로써 국가보안법 위반이 된다고 여기는 게 틀림없다. 그는 필경 반북 왜곡보도를 위한 TV조선의 신년사 생중계는 국가보안법위반이 아니고 애국적 보도라고 강변할 게 틀림없을 게다.  분단 70년이 넘도록 오늘날까지 반북적대의 광기 하나로 제멋대로 국민들을 가두고 국민의 기본권을 약화시키며 제 잇속을 극대화하는 이중 잣대의 극우언론과 극우정치인들을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보장하며 평화공존의 통일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첩경이다. 극우보수세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의 정의, 인권, 평화, 통일은 요원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극우보수세력을 우리 사회에서 추방하려면 외세와 극우보수세력을 제외한 누구에게나 백해무익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때만이 극우보수세력은 이 땅에서 숙주를 잃고 퇴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극우보수세력의 마지막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숙주가 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길에 우리 사회의 정의와 인권, 평화와 통일이 있기에 우리 모두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국가보안법이 대체 무엇이기에 아직까지도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가?  국가보안법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분단적대구조의 산물이다. 같은 민족인 북의 동족을 우리의 적으로 삼아 악마화하며 북을 대결과 불신, 증오와 비방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법이다.  반면, 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반대하는 일체의 주장과 활동도 북을 이롭게 하여 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적활동으로 위험시하고 처벌하며 금기시하고 있다.  한국민들은 북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미군철수, 국가보안법폐지, 북미평화협정 체결 등 북의 정책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형성하여 공감, 수용, 이해하거나 동조, 지지할 수도 없고 북의 정책에 공감하는 표현활동이나 북과 연대하여 조직결성 및 공동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다.  특히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 고무, 동조, 이적표현물 소지, 이적단체 구성 등)는 북의 정책에 동조하여도, 북의 책자를 소지하여도, 미국과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하여 북의 주장을 지지하는 글을 써도 이적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민은 남북관계 및 한미관계에 대해 친미사대반북적대의 목소리 외에는 다른 생각을 갖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한국민들은 민중 주권 시대의 민주주의에서 필수불가결한 표현, 언론, 결사, 양심(의견을 형성할 권리)의 자유를 완전히 통제당한 채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다.  결국 한국민들의 자유와 주권자로서 완전한 권리 행사를 위해서는 북을 적으로 삼아 동족대결을 강요하며 친미사대 반북적대의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에 기반한 극우보수세력의 영향력을 유지, 키워주는 반통일적 반민중적 악법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야 한다.  북은 남과 같은 민족으로 자주적 평화통일의 상대방이고, 서로 존중하고 화해하며 신뢰를 증진해 나가야 할 동반자이다. 따라서 남북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은 남북 한민족 전체의 역사적 사명이다.  2017년 8월, 수원지방법원 판사가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이 조항이 표현, 양심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하고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였고, 유엔인권이사회는 2017년 11월 9일 한국을 대상으로 한 국가별 정례인권검토에서 국가보안법 7조가 평화로운 표현에 대한 권리, 언론,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개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바야흐로 낡고 유치한 허깨비 같은 극우보수세력 추방을 위하여 우리 사회에 백해무익한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을 가속화할 때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8-01-03 | hrights | 조회: 895 | 추천: 12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헌법 제32조 제5항은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청소년의 노동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는 미비하거나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으며 교육당국이나 노동당국도 10대 알바의 문제점을 살피는 전담 관리 부서를 갖춘 곳이 없다.(한겨레 신문 중)  중인이가 다니는 학교는 일반고 3학년 가운데 뒤늦게 직업교육을 받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탁받아 가르치는 산업정보학교다. 학급의 학생들 대부분은 가정경제, 수습생 등의 이유로 오후에 알바를 하고 있다.  일반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에 필요한 자격증(조리사, 제빵사, 미용사 등)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는 산업정보학교는 사설학원서 방과 후 많은 돈을 지불하고 받던 교육을 1년 동안 무료로 실시하는 공교육 기관이다. 증설의 요구가 높아, 2011년 서울에 3곳(서울, 종로, 아현)이던 것이 현재는 6개로 늘어났다.  얼마 전 중인이는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으려고 늦게 줄을 섰다가 학생들이 즐겨먹는 돈가스가 모자라 다른 음식으로 주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영양사에게 급식판을 바닥에 던지며 욕설과 폭언을 하며 당장 돈으로 보상하라며 난동을 부렸다 이런 상황에 너무 놀란 영양사가 울면서 급식실로 가는데도 화를 참지 못한 중인이는 교사들의 제어가 힘들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지난 후 중인이는 “식당에서 알바를 하다보면 손님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항의와 욕설을 받고, 식당주인에게서 또다시 접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야단”을 맞는 이런 억울하고 불쾌한 기억들로 인한 감정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었다가 폭발해 영양사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고 했다.  경계선 지능(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아닌 지능지수(IQ) 70에서 85 사이, 정상지능과 지적장애 사이)인 택이는 알바 하는 주점에서 늘 혼자 식당 뒷정리 후 문을 잠그고 퇴근하면 새벽 1~2시에 집에 간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수업시간에는 늘 졸고 있고 식사가 불규칙한 관계로 위장병에 걸려 병원을 들락거린다.  연소자의 근로로 규정된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면 손님들의 부당한 폭언에 노출되지도 않고, 뒷정리를 시키는 부당한 처우에 위장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까지 청소년의 아르바이트로 위험천만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청소년 노동에 대한 인식은 바닥이다. 학교에서도 최소 18시간 이상의 노동인권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반항으로 생각하는 업주가 많고 이를 빌미로 해고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당한 사례로부터 노동부나 정부기관으로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부당함을 알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냥 참고 견디는 가운데 청소년 노동인권은 무너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법제적 장치가 필요하다. 청소년 노동인권에 대한 전인적인 교육을 실시해야하고, 청소년 노동자 스스로도 목소리를 내어 자신들의 노동권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청소년 노동문제와 그 해결을 전담하는 감독관을 만들고 업주에 대한 사전 감독을 실시해야한다. 또한 미래의 어른인 청소년 노동자의 마음이 치유되기 위한 시설도 만들어 진다면 좋겠다.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청소년 아르바이트 10계명  1. 만 15살 이상만 근로 가능 2. 청소년의 부모님 동의 필수 3. 근로계약서 작성 및 교부 4. 성인과 같은 최저시급 보장 5. 하루 7시간, 주 40시간 이하 근무 6. 야간·휴일근무 땐 50%↑ 가산임금 7. 주 15시간 이상 일하면 주1회 유급휴일 8. 위험한 업무, 유해업종 불가 9. 산재보험법·근로기준법 적용10. 체불임금 등 국번 없이 1350 상담 자료:부산시교육청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12-27 | hrights | 조회: 269 | 추천: 2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책 읽고 말하기를 업으로 삼기 시작할 무렵,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책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 지지 않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었다.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으로 거짓과 기만을 타파하고 정의롭고 계몽된 사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힘이 아니라 말로, 물리적 탄압이 아니라 합리적 대화로, 이성적 논증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었다. 감춰진 진리가 드러나면,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그동안 무지와 편견을 조장했던 어둠의 세력에 대해 단죄(斷罪)를 외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고 말한 독일의 어느 철학자의 말을,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어야 하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새겼다.  역사에 관해 당구풍월(堂狗風月)한지 서른 성상(星霜)도 더 지난 지금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꿈꾸지 않는다기보다는 꿈이 실현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더 이성적으로?) 되었다. 2018년을 한 달 앞둔 지금도 현실 세계는 여전히 책의 세계보다 힘이 세다. 책의 세계를 지배하는 명징하고 싱싱한 이성적 주장이 널리 알려지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되리라는 생각은 틀렸다. 이성적 논증으로 거짓 주장을 반박하면 사람들이 기꺼이 그릇된 주장을 버리리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거짓과 기만에 사로잡힌 편견인데, 누구는 그것을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인다. 확신에 찬 사람이 바뀌기란 어렵다.  왜 그럴까? 특히 정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거나 보수주의적 정견을 지닌 사람들의 속내가 나는 궁금했다.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와 행동은 대체로 이해관계의 속셈에 따라 갈라진다는 학설도 들어 보았다. 가진 게 많고, 지킬 게 많은 사람일수록 정치적 보수주의에 경도된다는 언설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지킬 권력은 더욱 없는 사람들은 왜 ‘보수’(편의상 ‘보수’라고 쓰지만 ‘수구’라고 새기는) 정당을 지지하는 걸까? 명명백백한 사실을 보고도 저 지역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럴까? 오랜 세월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공세’나 허위의식 조장 탓이라는 해석에 일견 수긍하면서도 앓던 이가 빠지는 개운함은 얻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에 그들의 머릿속을 환히 들여다보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책 한권을 발견했다. 사진 출처 - yes24  ⌈똑똑한 바보들-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The Republican Brain: The Science of Why They Deny science and Reality⌋. 원제와는 다소 다르지만 책 제목부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지정보를 확인해 보고서야 2012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며, 저자인 크리스 무니(Chris Mooney)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았다.(부끄럽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를 무작정 공격하거나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수와 진보는 뇌부터 다르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양한 과학적 실험 자료를 활용하여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뇌(심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굉장히 흥미롭게 분석한다. 이 책의 큰 전제는 모든 사람은 동기에 영향을 받으며 편향되게 사고한다는 ‘동기화된 추론’이다. 즉 자신의 신념을 지지하는 증거만을 선택하고,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는 증거들을 무작정 거부하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동기화된 추론’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불편한 사실을 부정하고 반증이 나와도 버티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특히 내게 흥미진진한 대목은 명백하고 과학적인 사실을 갖고 반론을 펼칠 경우에 “백파이어 효과(backfire effect)”라고 불리는 현상을 촉발하기도 한다는 분석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신념을 굳건히 견지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며, 모순되는 증거나 논박을 보고 나면 더 집요하게 자신의 틀린 관점을 고집하는 현상”을 말한다(71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장문의 출생증명서를 공개했을 때 그의 미국 출생을 믿지 않는 자들의 행동이나 사담 후세인과 911테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게 밝혀졌음에도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태도 등이 그렇다. 저자는 이처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를 “똑똑한 바보 효과”라고 부른다.(74쪽)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의 핵심적 ‘신념체계’는 뭘까? 저자는 “보수주의의 가장 깊숙한 요소”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규정한다. 아니, 그들도 변화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이 이전에 좋았다고 느끼는 것을 회복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다(133쪽). 역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반동(reaction) 혹은 퇴행이다. 그 방향을 낭만적으로 포장한 자신의 상상 속의 과거이다. 그들은 이전의 상황을 선호하며, 그 이전의 상황이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 필요도 없다. 존재했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열망하는 것이기만 하면 된다.  요컨대,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잘못된 신념에 부합되지 않은 과학적 증거라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진보주의자보다 더 강하게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며, 최소한 정치 분야에서는 합리적 논증으로 인해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더 적다!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언제나 평등을 증가시키는 진보적 변화와 정책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통선거권의 확립 운동 때도 그랬고, 여성참정권의 확보, 인종차별의 철폐, 인종의 혼인,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폐지 때도 그랬다. 그들의 욕망은 존재한 적도 없는 것을 회복하려는 희망이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인지부조화 타령을 읊어댄다.    책 한권 읽고 보수주의(자)를 심리적 차원에서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오해를 두려워 않고 말하자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똑똑한 바보가 된다. 똑똑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고정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개방적 태도가 필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을 과학과 팩트에 더 가깝게 데려다 주는 것은, 그들이 동기화된 추론을 일반적으로 덜 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개방성을 갖고 복잡한 세상을 알아 가는데 흥미를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341쪽)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7-12-13 | hrights | 조회: 401 | 추천: 3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틈만 나면 반만년 이어온 역사를 강조하는 것과 달리 한국 사회는 역사적 맥락에 참 둔감하다. 사회현안을 둘러싼 토론에서 역사적 맥락을 따지는 건 꽤나 낯선 모습이다. 몇 년 전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초(史草) 폐기 소동’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조선 시대 사관이 현장을 기록하는 게 사초다. 그걸 다 모은 뒤 정리해서 실록을 만든다. 실제 조선시대에 사초를 폐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건 심각한 중대범죄다. 그게 조선시대 법이었다.   당시 실록을 편찬하고 나면 자하문 밖 세검정 차일암에서 사초를 모두 물에 빨아 내용은 없애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그걸 세초(洗草)라고 한다. 혹시라도 사초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조선시대 법이었다. 그런데도 21세기 한국에선 느닷없이 ‘연산군도 하지 않은 사초 폐기’라는 황당한 주장을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내놓았고, 그게 또 어느 정도 먹혔다. 한마디로 뿌리 얕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쪽팔린 자화상이다.   세금인상 문제는 갈수록 중요한 정치쟁점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안은 거센 논쟁 끝에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나마 정권 초기이고 ‘선별증세’에 대한 지지여론이 높은데도 이 정도였다. 이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선은 남북관계보다는 오히려 세금문제다. 세금을 기준으로 해서 노무현 정부는 세금폭탄,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 박근혜 정부는 서민증세로 시대구분이 가능할 정도다.  지난 6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2018년도 예산안 및 부수법안 처리를 위해 열린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야당에선 증세를 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럼 다음 인용문은 어떤가. “세금 안 내고 국가가 발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금 없이 국가를 튼튼하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세금 안 내고 우리가 경제 건설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도 없는 것이며, 여러분들 자녀들에 대한 의무 교육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71년 대선에서 야당후보였던 김대중이 내놓은 감세 공약을 비판하면서 박정희가 수원유세에서 직접 했던 발언이다.  사실 박정희야말로 한국현대사에서 첫 번째 증세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장본인이다. 국세청을 처음 설립한 것도 박정희였다. 종합소득세와 부가가치세도 모두 박정희 정부 작품이다. 당시는 산업화를 위한 자원동원을 위해 세수증대에 몰두했던 시기였다. 첫 국세청장 이낙선은 세입 700억 원 달성을 독려한다며 자동차 번호판에 ‘700’이라고 써놓고 다녔다. 하지만 당시 증세정책은 ‘복지없는 증세’였다. 국민들은 동원대상일 뿐이었고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권위주의는 국가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었다.  유신체제는 폭압적이지만 또한 취약했다. 세입확대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부문의 자본축적 지원을 위한 감세정책으로 조세정책의 초점을 바꿨다. 1974년 1월 14일 ‘긴급조치 3호’는 상징적이었다. 대통령 뒷담화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른 긴급조치와 달리 긴급조치 3호는 소득세 면세기준을 월 1만 8000원에서 5만 원 이하로 대폭 올렸다. 소득세 납세자의 85%가 소득세를 내지 않게 됐다. 그렇게 박정희 정부는 ‘복지없는 감세’로 돌아섰다.  아시아 최초로 1977년 시행한 부가가치세는 박정희 정부 조세정책이 갖는 모순을 보여준다. 사실 엄청난 증세정책이고 조세저항과 여론악화도 상당했지만 막상 조세부담률은 1976년 16.1%에서 1979년에는 16.7%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각종 공제 인상과 비과세소득 범위 확대와 함께 부가가치세를 시행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부가가치세는 ‘감세를 위한 증세’였던 셈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열어제낀 ‘감세 국가’는 오랫동안 한국의 국가정책의 근간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열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한 노태우 정부 전반기와 대통령이 나서서 증세문제를 공론화하려 시도한 노무현 정부 후반기가 예외였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문재인 정부가 오랜 관성을 깨려는 명확한 시도를 갖고 있는지 확신이 서진 않는다. ‘핀셋 증세’라고 이름붙인 ‘선별증세’는 부자들한테만 세금을 더 걷으니 좋은 정책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치적 갈등에 비해 실제 세입은 기대에 못미친다는게 치명적이다.  어쨌든 박근혜조차 ‘증세 없는 복지’를 천명했을 만큼 이제 복지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리고 박근혜조차 실제로는 각종 증세정책(금융소득종합과세 인상,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연말정산 개혁 등)을 했을 만큼 이제 증세는 불가피하다. 대선을 통해 확인된 정의로운 국가, 나라다운 나라, 더불어 잘사는 나라는 모두 더 많은 ‘국가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우리가 더 많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나라다운 나라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세금을 더 내고, 이건희 손자에게도 억지로라도 무상급식을 먹게 해야 한다.  두 가지 비교를 해보고 싶다. 한국은 부가가치세율이 10%인 반면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국가들은 25%(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와 24%(핀란드)나 된다. (모든 국민한테서) 부가가치세를 더 걷어서라도 더 많은 재원을 마련해 그 돈으로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에 쓴다. 인권선진국일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인권후진국일수록 세금을 더 적게 내는 이유를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싶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12-12 | hrights | 조회: 223 | 추천: 2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11월 24일, 중학교 동창을 만난 이야기 한 열흘 전, 동창 A를 만났습니다. 거의 30여 년 만에 만난 셈입니다. 중학교 때만 해도 꽤 활발하고 명랑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중학시절 때 서로가 공유했던 추억 거리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던 동창 B가 십여 년 만에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잘됐다 싶었습니다. 저: 오늘 너 만나기를 잘했다. B가 12월에 온다는 소식 들었지? A: 음… 나는 못 가…. 제 기억 속의 A와 B는 단짝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B의 이야기를 꺼내면 A가 중학교 시절의 명랑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A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자꾸 캐묻는 저에게 A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A와 B는 사소한 의견 차이로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비난하며,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합니다. B: 너는 돌대가리야. A: 너는 새대가리야. B: 육갑하네! A: 지랄하네! B: 미친 새끼! A: 병신! B: ……. A는 이제야 알겠냐는 듯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그게 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유치한 말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저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B는 소아마비였습니다. A는 물론 소아마비인 B를 겨냥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B에게 내뱉은 한마디에 화들짝 놀란 것은 A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A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B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30여 년이 지나도 그 미안함은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A의 말을 듣고 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 B가 그걸 기억이나 하겠어? 그리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A는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11월 27일,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며칠 전,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세월호 유골 은폐 사건은 국정조사해야 한다는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출연했습니다. 그때 그가 김현정 앵커와 나눈 이야기 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정: (…) 유골 은폐 문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 정말 국정조사감이다 (…) 이것은 아마 국민과 유족 가슴을 몇 번 더 아프게 한 사건이 아닌가 (…) 김: (…) 그런데 세월호 유족들은 (…) 그동안 세월호 진상규명에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심지어는 방해가 되는 말까지 해왔던 자유한국당이 지금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느냐. 가족협의회 입장 어떻게 보세요? 정: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진상규명에 그렇게 반대를 했습니까? 진상규명은 밝혀져야죠. 그리고 같이 세월호 특조위도 했기 때문에…. 김: 세월호의 ‘세’ 자도 입에 담지 말라는 게 가족협의회 위원장 이야기더라고요. 정: 그건 그분들의 생각이고요 (…) 그것 참….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저는 한참 동안 생각이 툭 끊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니 2,000년 전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지요? “네가 유대의 왕이냐?”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대의 말일 뿐!”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11-29 | hrights | 조회: 397 | 추천: 9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재난(disaster, 災難)의 한자상 의미는 자연(물巛과 불火)의 힘이 커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게 된 곤란한 상황이다. disaster의 어원적 의미도 ‘별(aster) 또는 천체(astrum)의 어긋남(dis)’이다. 자연의 질서가 기존과 어긋난다고 느껴지는 현상을 재난이라고 한다. 이 때 자연 현상 또는 질서를 곤란한 상황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의 힘에서 인간이 곤란을 겪지 않고 피해로 느끼지 않으면 그것은 재난이 되지 않는다.  가령 지진(地震)은 맨틀 위에 떠 있는 지각 판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움직임 자체는 자연의 질서이고 조화이고 끝없는 균형 과정이며, 지각들이 ‘빈틈’을 향해 움직이는 현상이다. 폭풍도 태양열로 데워진 대기의 순환 현상과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기압의 변화 과정이다. 그것은 ‘약한 곳’과 ‘낮은 곳’을 향해 움직이는 공기의 이동 과정이다. 대기가 급격하게 움직여 인간에게 피해가 닥치면, 우리는 그것을 천재(天災)라 하는데, 천재도 원칙적으로는 자연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문명이 시작되면서 자연의 힘이 재난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연이 인간적 성취의 과정이자 산물인 문명을 파괴하자, 인간은 그것을 재난으로 명명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문명이 자연의 흐름에 비해 대단히 나약하다는 뜻이다. 애당초 자연의 힘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문명을 인간의 대단한 성취인 양 여기는 태도에 이미 인간의 오만함이 들어있다. 자연에 의한 문명의 파괴는 천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인명이 살상되고 온갖 성취가 인간을 덮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서 진도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건물이 부서지고, 기울고 사람이 다쳤다. 땅이 흔들려 사람이 다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명에 사람이 다쳤으니 천재이자 인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지진의 경우는 이전과는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든다. 진앙에서 2km 떨어진 곳에 건설 중인 포항지열발전소가 지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지열발전소의 원리는 대강 이렇다. 지하 암반과 암반 사이의 틈을 벌려 그곳까지(포항의 경우는 땅속 4.3km 지점까지) 관을 심고 강한 압력으로 물을 주입하면 뜨거운 암반 사이에서 물이 데워지고 그 물과 수증기를 다른 관으로 끌어올려 터빈을 돌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상에서 고압으로 물을 주입할 때마다 다음날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일이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지진도 그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스위스 바젤 등 해외에서도 지열발전소로 인해 소규모 지진이 계속 발생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발전소 건설사측에서는 지열발전과정과 이번 지진은 무관하다면서 나름 해명 중이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5천8백t 정도의 소량만(?) 주입했기에 지진이 발생할 정도의 양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열발전 전문가가 아닌 마당에 나로서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 단언할 능력은 없다. 다만 기존 암반 사이를 인공적으로 벌려서 외부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주입하는 이런 방식과 발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땅속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 10m에서 섭씨 15도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땅속 열에너지를 가정용 냉ㆍ난방 에너지로 활용한다는 소규모 지열 시스템만 상상해보던 나로서는 땅속 수천m 아래에 있는 암반의 간격을 강제로 벌린다거나, 암반 사이에 적게는 수천t, 많게는 수백만t의 차가운 물을 강제로 넣는다거나 하는 발상과 방식이 자못 두렵기까지 하다. 지진 그 이상의 천재, 아니 인재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평창올림픽을 대비해 인공강설 실험을 한다거나, 서해에 인공강우 커튼으로 중국발 미세먼지의 유입을 막겠다거나 하는 소식을 기술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뉴스를 보면 인간의 무모함에 겁이 나기도 한다. 어딘가에 홍수가 내리면 어딘가는 가물기 마련이다. 북경에 나비가 날자 뉴욕에 폭풍이 인다 하지 않던가. 인위적인 변화는 늘 위험을 초래한다. 자연을 독점할 권리가 특정 국가나 특정인에게 있다는 말인가. 자연은 반드시 빈틈을 따라 흐르면서 인간의 성취에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자연의 힘을 무모하게 강탈하는 행위를 대체에너지라는 이름으로 눈감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개인, 사회, 국가 간 합의를 통해 피차 자연에 대한 좀 더 겸손한 자세를 갖자는 합의를 어렵더라도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핵실험으로 지진이 발생하고 백두산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던 그 비판의 눈길을 이번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도 거두면 안 될 것 같다. 인간이 지진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다 보니 인류의 미래가 더 불길하게 다가온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11-28 | hrights | 조회: 556 | 추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