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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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서하 / 회원칼럼니스트 개강을 앞두고 수업 정보를 얻고자 접속한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는 오늘도 혐오 발언이 오가고 있었다. 어제는 페미니스트가, 저번 주에는 장애인이, 그 이전 주에는 길고양이가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중국인이었다. “난 착한 중국인은 좋아함. 그러니까 난 혐오자가 아님.”이라는 말이 수십 개의 동의를 받고 추천 게시물로 올랐다. 그리 낯선 말은 아니다. 단어만 달라질 뿐 이와 비슷한 문장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이 싫은 게 아니라 시끄러운 아이들이 싫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일부의 남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싫다, 이동권 시위로 등교를 방해하는 장애인은 싫지만 조용히 지내는 장애인은 지지한다는 말 따위다. 물론 이는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논리는 결국 ‘어떤 피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대는 피해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일종의 특권임을 망각한 시대다. 출처 - 경향신문   세상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인권의식도 진보했다. 적어도 오늘날의 우리는 타인을 차별하는 행위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차별과 혐오에 어떻게든 이유를 붙이려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렇듯 자신이 합리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믿는 이들은 단지 상대를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싫어할 이유가 충분하다며 혐오를 정당화해 잘못된 사고방식을 세상에 전달한다. 혐오와 차별은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급속도로 확산된다.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개개인의 일상과 지위가 불안해지자 안전에 집착하게 되며 평소 취약한 지위에 있거나 사회가 편견을 가지고 있던 소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흑사병 시기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불안정한 시기에 일어난 마녀사냥 등이 증명하듯 2020년의 팬데믹 역시 혐오와 차별이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물론 국제사회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 <COVID-19와 인권 유엔 사무총장 정책보고서>(2020)에서 “평등, 비차별, 포용이 이번 위기의 핵심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거나, 유엔 인권최고대표의 <COVID-19 지침>(2020)에서 코로나 피해를 막는 정책에서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 역시 그런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말대로 포용은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다. 하지만 포용의 정신을 가지기 어렵다면,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아주 조금 사고를 전환해보는 건 어떨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아무 손해도 보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살면서 한 번쯤 손해를 봐야만 한다면 악덕 사장을 만나 임금 미지급에 시달리기보단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과정에서 잠시의 어려움을 겪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손해의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혐오의 총량 역시 마찬가지다. 정해져 있지 않기에 줄일 수도 있다. 선구자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모두가 선구자다. 잠시의 불편을 감내하고 선구자가 될 수 있다면 손해라 칭하긴 어려운 일이다. 출처 - 네이버포스트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카롤린 엠케는 저서 “혐오사회”에서 혐오에 혐오로 맞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증오의 큰물이 계속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이가 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한 지반을 닦아놓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혐오의 연쇄를 끊되, 혐오의 물결 앞에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맞서기를 멈추지 말라는 뜻이겠다. 언젠가 더는 상대를 손쉽게 혐오할 수 없는 시대가 오도록 말이다. 누군가는 개개인의 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혐오 역시도 개인의 생각일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를 끊어내려는 목소리가 모여 정책을 바꿔나가고 포용의 정신을 계속해서 가르쳐 나간다면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이 되듯 점차 나와는 다른 상대의 모습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채우게 되지 않을까. 어지러운 혐오의 시대에 누구 하나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23-03-07 | hrights | 조회: 384 | 추천: 2
김태민 / 회원 칼럼니스트   유튜브에 어느샌가 MZ 신입사원의 직장 생활을 풍자하는 콘텐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영상들은 사무직 종사자들의 세대 충돌을 다룬다고 하면서 MZ 신입사원들의 민폐 행위를 열거하기 시작한다. 영상 속의 MZ 신입사원들은 업무 시간 중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하거나 에어팟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 그려진다. 어떤 이는 업무 공간에서 사적인 통화를 일삼더니 그다음 날 자의적으로 1시간 일찍 출근해서 1시간 일찍 퇴근하려 한다. 제목도 비난의 표적을 명확히 한다. “0x년생 MZ 신입, 이것도 제가 해야 하나요?”, “저 깨우지 마세요. MZ에 당하는 직장 상사” 등등. 나르시시즘적 기행을 벌이고도 의기양양한 MZ 신입사원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콘텐츠들은 곧이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MZ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 이유를 열거하는 노골적인 콘텐츠로 이어진다. 출처 - 쿠팡플레이 MZ오피스 MZ 신입사원의 좌충우돌로 세대 갈등의 리얼리즘을 제시하고자 하는 웹 드라마가 특별한 논쟁과 마찰 없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그것이 다소 짓궂지만 ‘쿨’한 자기 패러디로 소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조직의 논리를 체득하지 못한 어색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반영하는 퍼포먼스는 자학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하지만 MZ 세대의 특징을 남김없이 묘사하겠다고 자부하는 미디어 이미지에 실눈을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MZ 신입사원을 “맑은 눈의 광인”이라든가 “머리가 꽃밭인 애”로 묘사하는 어느 유명한 MZ 세대 풍자물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에 관한 미디어 이미지는 조직 상급자의 즉자적인 응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MZ 세대 풍자물의 서사적 코드는 노동시장과 일터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을 잔혹하게 조롱하는 냉소적인 아이러니로 작동하고 있고 영상의 관람자로 하여금 그 냉소의 제스처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소셜 미디어와 OTT 플랫폼에서 쏟아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분명 현실세계를 모사하는 사물로 한정되기를 거부한다. 유튜브 콘텐츠의 섬네일을 통해 시청할 영상을 선택하고 ‘좋아요’를 누르며 댓글란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행위는 모두 이미지들이 제공하는 상상적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미지는 수동적인 관람의 객체를 넘어 현실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주체가 되어버린다. MZ 세대를 풍자하는 미디어 이미지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청년 노동자를 ‘리얼’하게 보고한다는 ‘본격’ MZ 몰카, 콩트, 웹 드라마 또는 밈 이미지는 단순히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노동의 현장을 날 것 그대로 기술하는 대신 일터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과 내적 모순에 상상적인 관계를 부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상상적인 서술 속에서 MZ 세대를 “발암인자”와 다를 바 없이 응시하는 그 ‘눈’은 단연 사업주 또는 조직 상급자의 것이고 이미지에 접속한 관람객은 이미지가 제시한 대로 현실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가장 마뜩잖은 점은 냉소적인 조롱의 코드가 조직 내의 권력자를 향하지 않고 최하위 노동자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MZ 세대를 둘러싼 이미지 체계가 이토록 강력하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나 매끈한 모습의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다. MZ 세대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어떤 사회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는 정치적 인장만 선명해질 뿐 청년층에 대한 조화롭고 객관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공정성의 사도로 묘사된 ‘이대남’과 개혁의 불꽃을 수호하는 투사로 여겨진 ‘개딸’의 대립적 이미지는 명확한 정치적 효과를 거두어낸 편이었다. 하지만 2030 남성들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수직 하강하고 ‘개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실체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 지금 그와 같은 이미지의 체계가 여전히 청년층을 온전히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와 같이 취약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나 하 수상한 시절 ‘안녕들 하십니까’라 물으며 일말의 연대의 가능성을 건져 올리려는 청년의 이미지를 거쳐 ‘일베’라는 반문화적 종족이 돌연 튀어나왔을 때 청년 세대를 온전히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토록 분열된 청년 세대의 이미지로부터 식별되는 것이라곤 정치적 효과의 흔적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대론의 유혹을 더욱 경계하고 그것이 지닌 정치적 효과를 언제나 정밀하게 측정해야 한다. MZ 세대를 신화화하거나 조롱하는 일체의 시도는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MZ 세대를 겨냥한 가학적 코미디가 악의 없는 폭소를 유도한다고들 하지만 그 끝에 의뭉스럽게 남아있는 냉소적 아이러니는 젊은 노동자를 향한 혐오를 내장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나.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려 작정한 이들은 종종 모욕을 줄 의도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당혹스럽고 혐오스러운 이야기를 기어이 들이밀곤 한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진심과 농담이 구별되지 않기 시작하고 바이럴한 효과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MZ 사원에 관한 출처 불명의 악의적인 사례로 MZ 세대의 습속을 운운하는 행위들의 정치적 효과를 경계해야 한다. 이즈음 됐으면 그 짓궂은 ‘농담’들이 화석화된 조직 문화를 탈피하고자 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자율적인 일터 문화를 조직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2023-01-31 | hrights | 조회: 564 | 추천: 1
전예원 / 회원 칼럼니스트   지난 12월 22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홈리스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올해로 스물두 번째 해를 맞은 이번 추모제에는 지난해 집 없이 죽음을 맞은 432명을 기리기 위한 인파들이 몰렸다. 출처 - 저자 432명의 이름이 적힌 천막 뒤로, 화려한 빛을 내는 고층의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건물 상단에 표식된 문구가 똑똑히 기억난다. “We work”. “우리는 일한다”고 말하고 있는 문장에 괴리감을 느꼈다. 추모제가 이루어지는 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 탓이다.   “일하다”는 동사와 “홈리스”를 나란히 두었을 때 느낀 괴리감이 어디에 기인했는가를 따져보니, 그 답은 홈리스를 규정짓는 무의식에 있었다. ‘홈리스 = 일하지 않는 사람’ 으로 도식화하는 오랜 사회적 편견과 정책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홈리스는 어떻게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노숙인을 복지서비스의 대상으로 삼는 노숙인복지법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대한 법률)이 제정된 2011년 이전까지, 홈리스는 도시 안전과 미관을 해치는 ‘부랑인’으로 비쳐졌다. 도시에서 거소를 갖는데 ‘실패’한 7-80년대의 부랑인들은 불심검문을 당하거나 감호시설로 보내지는 등 형벌화 조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부는 적정 주거지가 부재한 원인을 개인의 무능에서 찾았고, 그들을 관리와 규율의 대상으로 고정시켰다. 홈리스를 대하는 정책들이 철저히 그들을 ‘관리하는’ 주체, 즉 정부의 시각에 기반한 것이다.   노숙인 복지법 역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대한 법률’은 그 명칭이 말하듯 ‘자립지원’에 강조점을 둔 법률이다. 이 정책은 일차적으로 홈리스들을 시설로 수용한다. 시설을 벗어나 주거공간을 갖기 위해서는 단계적 절차를 거쳐야 하고, 정기적으로 노동능력과 자립의지를 평가받고 경제활동 실적을 증명해야 한다. 홈리스들의 ‘자립지원’은 그들을 ‘일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문제적인 까닭은 홈리스에게 사실상 두 가지의 선택지- ‘시설로 수용될 것인가?’와 ‘경제활동에 참여할 것인가’- 만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일할 수 없고, 동시에 시설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 이들의 존재는 고려되지 않는다. 탈시설 논의가 본격화 됨에 따라 이러한 상황에 문제 제기를 하는 움직임도 있으나, 정책은 여전히 정부의 시각을 대변하여 홈리스들이 어떤 이유로 거리에 놓였는지를 묻지 않는다. 생존에 필수적인 ‘집’을 담보로 하여 ‘일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정책은 홈리스를 집과 같은 제반조건이 갖춰지지 않고도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존재로 전제한다. 자립의지만 있다면 언제라도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되는 홈리스에 대한 혐오적 인식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홈리스들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은 “어떤 이들을 집에 살게 할 것인가”가 아닌, “이들을 어떻게 집에 살게 할 것인가”이다. 전자의 질문이 집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승인하는 정부의 시각을 대변한다면, 후자의 질문은 보다 홈리스의 시각을 아우르는 질문이다. 안정적인 ‘집에서 산다는 것’을 체감할 수 없는 이들에게, 바로 그 집을 살 것을 조건으로 경제활동을 하게 하는 것을 ‘자립을 지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로를 통한 경제활동을 조건으로 주거를 제공할 것이 아닌, 경제활동과 근로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한 제반조건으로서 주거가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거 우선 원칙 (Housing first)은 주거를 먼저 지원하고, 자활을 돕는 방식을 제안한다. ‘선자립 후주거’의 패러다임을 ‘선주거 후자립’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OECD에서도 이러한 주거우선의 원칙이 수용가능한 방식임을 천명하고 있으며, 이 원칙이 가장 먼저 제시된 미국에서는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논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홈리스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많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의 자립을 지원한다는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가. 이 방식에 홈리스를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짓는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운영되는 정책들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조건들에 대한 얼마만큼의 고민을 동반하고 있는가.  
2023-01-17 | hrights | 조회: 378 | 추천: 3
이서하 / 회원칼럼니스트   2022년 12월 18일에 열린 월드컵 결승전은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격돌이었다. 대한민국과는관련 없는 나라들이지만, 주변에는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모두가 축구 팬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리오넬 메시가 은퇴 무대를 월드컵 우승으로 장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르헨티나를 응원했다.   이렇듯 우리는 직접 관련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쉽게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의 고난에 함께 슬퍼하고 악역에게 화를 내는 것,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것 모두 이러한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요즈음 시대에는 이러한 공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평이 나오고 있는 동시에,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집단에게만 공감한다는 의미의 ‘선택적 공감’이라는 단어가 새로이 생겼다.   출처 - 중앙일보 공감은 동화와는 조금 다르다. 공감은 상대에게 완전히 이입한다기보다도 ‘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상대의 감정이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하나의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나 과잉된 공감, 선택적으로 발휘되는 공감은 이러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한다. 이는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의 발단이 되고, 나와 다른 입장에 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게끔 한다. 즉 공감이 이해가 아닌 타자에 대한 몰이해를 불러오는 역효과를 낳은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2021년 12월부터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탈시설권리 등이 포함된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을 촉구하며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방식의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일 년간 이어진 시위를 두고 여전히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출근과 등교에 지장이 생긴다며 시위를 비난하는 부류,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일만으로도 지연이 생긴다는 것은 오히려 장애인 이동권이 확보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례라며 시위를 지지하는 부류다.   이제 한 번쯤 물어봐야 할 때다. 어째서 시위가 진행되는 일 년 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까? 어째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정부를 비판하는 대신 해결을 촉구하며 시위를 진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일까? 작년 12월 서울교통공사에서 내세운 시위 대응책은 시위가 열리는 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것이었고, 이에 일각에서는 시민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해, 정부가 아닌 시위대에게 화살을 돌리고자 이 같은 대응을 내놓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그리고 2023년 1월, 그런 비판이 무색하게도 탑승 시위를 진행하려던 전장연 활동가들은 개찰구 앞에서 경찰의 방패 앞에 가로막혔다.   왜 열차를 타고 내리는 행위 하나에도 많은 불편함이 따를뿐더러 때로는 목숨도 걸어야 하는 장애인의 입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이토록 적을까. 시위를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은 장애인이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겪는 불편함보다도, 지금 당장 난처함을 겪는 자기 자신과 같은 이들의 집단에 대해 더욱 손쉽게 공감하기 때문이리라. 공감이라는 단어로 정당화되고 견고해지는 내집단에 대한 옹호는 자연스럽게 외집단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비단 전장연 시위에 대한 반응뿐 아니라, 각종 사회 문제와 정치 현장에서 이러한 선택적 공감이 계속해서 되풀이되며 대립이 격렬해지고 첨예해지고 있다.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는 목소리 중에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며 상대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표어가 종종 보인다. 그런 표어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젠가 자신의 일이 아닐지라도 편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휠체어 바퀴가 빠지기 때문에, 지금의 지하철 역사는 휠체어로 이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예산이 수립되지 않아 정책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 시위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지금의 대중교통이 완벽하다고 느낄지언정 또다른 누군가는 지금의 대중교통을 불편히 여긴다. 그러니 이런 고생을 감수할 만큼 필요한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공감의 중요성은 많은 사람이 이미 인식하고 있다. 공감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나는 여전히 이런 마음들이 가지는 힘을 믿는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함께하고 싶은 이들, 내가 편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만 공감하는 것은 연대라 불리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호감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이들, 나와 다른 입장마저도 헤아리고 살필 때 그것을 비로소 공감이자 연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내가 공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옳은 방식인지, 내가 나만의 생각에 갇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변화를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언젠가, 세상의 많은 투쟁이 비난 대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이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23-01-04 | hrights | 조회: 440 | 추천: 0
김태민 / 회원 칼럼니스트   영부인이 동남아 순방 중 찍은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 논란이 이는 걸 보자 지난해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대사 한 대목이 떠올랐다. 기훈이 프론트맨에게 “왜 그런 짓을 벌이는 거지”라고 묻는다. 프론트맨은 “그냥 꿈을 꿨다고 생각해. 당신에게는 그렇게 나쁜 꿈도 아니잖아”라고 대답한다. 체스 말과 체스 선수의 대화처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대화다. 빈곤 포르노의 말이 되어버린 수많은 아동들이 빈곤 포르노를 기획한 해외 자본과 유명 인사들을 찾아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느냐”고 질문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때 고작 얻게 되는 대답은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고통스러운 과거는 그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 두게. 원조도 받았는데 그다지 나쁜 꿈도 아니지 않나.” 해외자본의 수탈, 국제분업에 의한 계급 분할은 금세 ‘원조’라는 나쁘지 않은 꿈으로 변모한다. 왜 그런 짓을 벌였냐고 질문하면 당신도 즐기지 않았냐는 남성 쇼비니즘적인 대답이 돌아오든가,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라며 다시 생각해볼 것을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유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한다. 당신도 그 관계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되돌아올 뿐이다. 노동자와 사업주의 관계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관계다. 작업장을 가르는 계급적 분할과 사회적 적대는 임금과 노동의 교환관계 속에서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이 되어버린다. 계급 간의 적대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인 것은 자본을 숭상하는 보수 진영의 입장만은 아닐 것이다. 평택 SPL 제빵공장 직원 기계 끼임 사망 사고에서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시민의 안전보건에 대한 위협이 일상화되는 와중에 진보정당에서는 안전보건의 자율 규제를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제안이 별로 놀랍지 않다. 기업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비즈니스 친화적인 자율 규제를 입 냄새 날 정도로 찬양하는 상황에서 자율 규제의 원리가 비경제적인 영역에 거리낌 없이 침투하는 양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노동 개악을 막기에 급급한 국면에서 진보정당이 자율 규제를 산업재해의 해결책으로 제출할 때 우리는 사회 내부의 계급적 분열을 가리키던 정치가 소멸되고 수평적인 개인들의 자율적인 조직과 협치의 인식론만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급적 현실은 무의식으로 침전될 뿐만 아니라 협력이라는 인식론의 도움을 받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이 되어버린다. 물론 정의당에서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를 번역 발간하면서까지 제안한 안전보건체계의 자율 규제가 규제 완화의 취지는 아닐 것이다. 더하여 국가나 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법령이 사업장에 따라 달라져야 할 안전보건상의 조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자율 규제가 그토록 자랑하는 성공적인 노사 참여 지향의 프로젝트와 사업장에서의 실제적 경험을 충실히 반영한 위험성 평가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이 필요조건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5% 미만이고 전체 사업장 대비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설치된 사업장이 0.25%다.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을 기대할 수 없는 수치다. 중대재해처벌법 입장 발표 (민중의소리) 간단히 떠올려보자. 산업안전보건법에 이미 갖춰진 수많은 규정들이 집행되지 않은 이유를. 기초적인 안전보건의 조치 없이 일하던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장에서 그토록 침묵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노동자들의 135건의 안전조치 개선 요구가 묵살된 끝에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한화 공장의 사례를 애써 언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렇고 그러한’ 사업장의 권력관계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비대칭적인 힘의 구도 속에서 ‘노사 참여’나 ‘노사 협력’같은 미사여구는 그리 힘 있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을 만족하지 못할 경우 자율 규제의 본래적 의미가 실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정부의 표준 규범 이상의 규제라는 주장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로벤스 보고서>의 자율 규제 프로그램의 ‘본래적’ 규정대로 높은 강도의 자율 규제와 정부 규범이 병존하는 모델이 한국 사회에서 실천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없다. 여전히 시장의 자유가 부족하다는 성마른 외침을 일관하는 대통령의 언표와 안전과 보건에서마저 추출해낼 이윤이 있는지 입법 저지와 개악 시도를 남발하는 기업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자율 규제 프로젝트가 제시하는 사업장의 수평적인 파트너십, 성과 중심의 위험 관리, 노사 참여 지향의 규제라는 꽤 나쁘지 않은 청사진은 흡사 작업장의 계급 관계가 감쪽같이 사라진 듯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로벤스 보고서>로부터 이어지는 자율 규제 프로젝트는 적어도 안전보건 문제에 관해서는 노사 간의 공통의 이해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특권적인 전제를 두고 있다. 하지만 노사 간의 공통의 이해관계라는 말도 신자유주의 거버넌스가 늘상 이어오던 동어반복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노사 협력 지향’의 자율안전경영을 위해 반드시 장착해야 할 기업가적 에토스를 떠올릴 수 있다.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리스크를 관리 및 경영하는 테크놀로지는 안전보건의 질적 경험이 아닌 고도로 추상화된 경제적 척도들일 것이다. 회사 사정 좀 생각하자는 권고에 맞추어 안전보건 투자를 측정 및 평가하는 재무회계적 기준들은 이미 외부 민간 업체에 마련되어 있다. 노동이 힘을 받지 못하는 사업장 또는 산업에서 재무 계산서에 구속받지 않은 안전의 질적 보장을 요구하던 노동자들은 마지못한 수동적인 수긍에 익숙해졌고 암묵적인 협박, 실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부당한 현실의 끝에서마저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상호 협력적인 노무 계약의 환상일 것이다. 심히 미학적으로 구축된 새 안전보건 거버넌스의 자율 규제 프로젝트가 감히 언급하지 못한 계급투쟁은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에 대한 대항 담론을 조직할 자기 논술의 언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다. <로벤스 보고서>가 산업재해의 주요 원인으로 노사 당사자 간의 무관심을 지적하고 산업재해를 노사 협력을 통해 축출할 수 있는 외적 위협으로 치부하면서 적대 없는 연대, 계급 없는 투쟁을 호소할 때 너무 많은 사실관계가 왜곡된다. 그러므로 가정과 전제를 다시 설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확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전제들을 살펴보는 작업은 운동 자체가 위협받는 지금 그 어떤 작업보다 긴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구조 없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에, 그저 생명의 연장을 위해 삶을 폐기한 벌거벗은 개인이 아니기에 좀 더 근본적인 가정들에 연연해야 할지도 모른다.
2022-12-21 | hrights | 조회: 443 | 추천: 4
김지혜 / 회원 칼럼니스트 이런 비상식적 현실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지난 15일 SPC그룹 계열의 제빵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소스 배합기계에 끼여 숨졌다. 전통적 산업 현장이 아닌 제빵공장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9월까지 SPC 계열사 공장에서 37건의 사고가 있었고 이 중 15건은 끼임 사고다. 심지어 사측은 사고 일주일 전에도 손가락 끼임 사고가 발생했으나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유로 병원에 이송조차 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사업장에서 근로자는 공장 내 부속품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SPC 사업장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다. 노동자의 안전을 경시하면서까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시장경제의 현실이 산재사고를 만들고 이를 지속시킨다. 산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계속 발생하지만, 이것은 개별 사건, 사고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고가 대다수일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공장에서 다친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산재로 죽고 다치는 노동자가 속출하는데도 기업은 타격 받지 않고, 감독하고 규제해야 할 정부는 낙수효과를 이유로 기업의 편을 들기 바쁘다. 이러한 불균형한 힘의 관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과 연대가 필요하다. 법이 아무리 개정되어도 일하는 자, 일을 시키는 자의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산재사고는 멈출 수 없다.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은 힘의 관계이자 구조에 좌우되는 현재, 우리는 안전, 건강, 생명을 말하고 주장하며 요구해야 한다. 제빵공장에서 젊은 여성이 기계에 끼어 숨지기 불과 하루 전날에도 지하철 스크린도어 교체 작업 중 지하철에 치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금은 법 탓을 할 때가 아니라 일하는 환경을 하나라도 더 점검하고 보강하고 연대해야 할 때다.
2022-12-12 | hrights | 조회: 387 | 추천: 1
전예원 / 회원 칼럼니스트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 살던 집은 볕이 들지 않는 반 지하로, 벽지 곳곳에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베란다가 없어 방안에 빨래를 널면 방안 가득 습한 기운이 들어 섬유유연제로 가려지지 않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같은 자습실을 쓰던 학생들에게 옷에서 나는 냄새를 지적받고 자습 공간을 옮길 때, 볕이 잘 드는 집에서 사는 일이 부러운 일임을 알았다. 서울에 살게 된 이상 볕이 잘 드는 집을 구하는 일이 멀고도 요원한 것이라는 사실도.   <출처 - 국민일보>   사람에게 있어 ‘집’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모두는 ‘주거 안정’을 요구하지만, ‘주거 안정’이 의미하는 바는 제각기 다르다. 상경한 이후 내게 ‘집’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한 임대료에서 가장 그럴듯한 조건을 갖춘 것을 찾는 것, 즉, 임대의 대상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재개발 소식에 쫓겨나듯 이사 나가거나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고, 임대료 인상을 염려하여 갱신일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대체로 ‘그럴듯한’ 집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면 곰팡이가 슨 벽이나, 녹물이 흐르는 수도 같은 것은 자연스레 후순위로 밀렸다. ‘내 집 마련’이 먼일처럼 느껴지는 임차인으로서 집을 갖는다는 것, 바꿔 말해 ‘주거안정’의 의미는 적절한 임대료와 보증금 내에서 안심할 수 있을 만큼의 임대기간을 보장받는 것으로 생각되곤 했다. ‘안정적인 임대 상황’을 ‘주거안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임대가 보장되는 것만으로 볕이 들지 않고 녹물이 흐르는 집에 사는 것을 안정된 주거상황이라 볼 수 있을까. 높은 임대료를 피해 반지하나 옥탑으로 가거나, 신식 수도관이나 자동화된 소방시설들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방향에서 주거 안정을 해친다. 예기치 않은 폭염이나 폭우, 그 밖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제반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는 집에 사는 것이 재난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집에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어떤 비용과 방식으로 안정적인 거소를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거 안정’이란 안정적인 거소를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주거환경을 갖춘 집에 살 권리를 폭넓게 아우르는 개념이다. UN 해비타트는 주거권을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보장을 넘어서, 안전하고 평온하며 인간으로서 존엄이 보장되는 공간의 보장’으로 정의하며, 우리나라 주택법에서도 국민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제3조 1호)을 정부의 의무로 규정한다.   그러나 ‘주거안정’에 접근하는 정부의 태도는 ‘내집 마련’에 방점을 두어, 주거 공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지난 8월 정부는 『국민 주거안정 실현방안』을 통해 ‘주거불안’에 대한 진단으로 ‘내 집 마련’을 준비해온 자의 상실감 확산을 들었다. ‘주거 안정’을 패러다임으로 내세우면서도 공공임대주택 분야에 투입되는 예산 5조 7천억을 삭감하고 공공임대주택 목표 물량을 17만 채에서 10만 5천 채로 줄였다. 이에 반대하는 일부 여당인사들은 지난 달 22일 공공임대주택 예산삭감 저지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 공공임대주택의 예산을 둘러싼 정치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내 집 마련’과 ‘임대주택의 물량 확보’는 주거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방식들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하나, 이 과정에는 ‘어떤 집에 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동반되어야 한다. ‘주거 안정’의 함의가 ‘집을 공급하는’ 양적 측면에 그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위험한 까닭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집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야가 촉각을 세우는 ‘주거안정’의 의미는 얼마만큼의 질문들을 동반하고 있을까.   ‘주거 안정’이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재개발 소식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의 밤이나, 샤워기의 녹물 필터를 갈아 끼거나 내벽에 스민 곰팡이를 닦아내는 사람의 일상을. 지하에는 물이 들어차고 옥탑에는 폭염이 들이닥치는 사람의 집을.
2022-12-01 | hrights | 조회: 476 | 추천: 4
이서하 / 회원칼럼니스트 대학수학능력시험 고사일이 코앞이다. 수시 접수는 끝난 지 오래고 예체능 계열 실기가 한창이다. 주위의 수험생들은 바짝 다가온 시험 앞에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심각하고 비장해지거나, 자유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외려 즐거워하거나. 어느 쪽이든 의문이다. 대학 입학이 인생의 큰 관문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도, 그것을 위하여 자유가 없다고 느낄 만큼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것도. 성적만을 전부로 여기는 사회구조에 대한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꾸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학력주의는 학벌주의, 연고주의, 능력주의, 엘리트주의 등과 결합하여 그 세를 불리고 있다. <출처 : pixabay> 고된 노력 끝에 서울 소재의 대학에 들어가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대학 간 입시 결과로 다시 서열이 나뉜다. 같은 대학 안에서도 각 학과의 입시 결과, 미래 전망 등으로 학과 간 서열이 나뉜다. 바야흐로 모든 일에 경쟁이 적용되는 무한경쟁 시대인 셈이다. 사람의 성실함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수치화할 수 없기에 이 경쟁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사람을 구분하는 좋은 지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해 왔듯 학벌의 배경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개입한다. 타고난 지능, 사교육의 기회, 물질적 뒷받침 등이 그렇다.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하려면 공평한 기회의 제공, 능력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축적한 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고액 과외를 받으며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사람과 학원을 갈 여력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소년가장의 격차, 집 앞에 각종 학원이 가득한 대도시 학생과 종합학원 하나가 전부인 낙후 지역 학생 사이의 격차를 떠올려 보자. 이렇듯 각자의 삶이 매우 다른 사회에서, 학업 성취도를 온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면 학력이 상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중요하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하여, 어쩌면 생존하기 위하여 대학 대신 일터를 선택한 이들은 어린 나이로 받는 무시와 고졸 출신으로 받는 차별에 맞서며 치열하게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그 삶의 무게와 부단한 노력이 대학 졸업자가 학업에 사용한 노력보다 못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 pixabay>   최근 덕성여자대학교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이 파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주장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조교 임금도 그것보다 낮다”라는 것인데, 이는 대학에 다니는, 혹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조차 그보다 적게 받으니 더 요구하지 말라는 학력주의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청소노동자의 임금이 동결되는 것이 아니라 조교의 임금이 올라야 모두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지난 8월 연세대학교 청소 및 경비노동자들은 이와 비슷한 시위 과정에서 학생들로부터 고소·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약자, 소수자를 향한 적대감은 비단 학력주의뿐 아니라 취업난과도 연결되어 있다. 능력주의에 따르자면 대학을 나오기까지의 고생만큼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회 어디에서도 그를 보장하지 않는다. 외려 수많은 대학 졸업자 사이에서 졸업장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학벌주의, 곧 대학서열주의는 아주 세밀해진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소한 차이도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시대 청년들은 능력주의를 내면화한다. 이처럼 사회현상은 여러 가지 요인과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다. 그런 만큼 구조를 깨는 것은 어렵다. 구조에 순응하는 것 역시 이 시대를 걷는 사람으로서 함부로 잘못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데에 있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면, 일정 부분 구조에 순응하면서도 그 폐단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을 모순된 위선자라 부른다면, 이 잘못된 구조에서의 탈출은 더욱 요원해질 테다. 그러니 이따금 물었으면 한다. 이 무한한 경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도 함께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내가 이 정도에 그쳤으니 나보다 못한 너는 거기서 더 바라지 말라고 깎아내리는 목소리도 있다. 이토록 다른 가치가 충돌하는 사회에서, 더 나은 길이 무엇일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하고 부딪힐지라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큼은 잊지 않기를. 잔물결 끝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이토록 사소한 시작으로부터 언젠가 학업의 굴레를 벗어나 타인의 참된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날이 도래할 것을 믿는다.
2022-11-09 | hrights | 조회: 476 | 추천: 2
조혜원 / 회원 칼럼니스트   출처- 여성신문 (2022.09.23)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요구에 왜 여성을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답인가. 여성들은 일터에서 불법촬영 당하고 스토킹 당하는 것도 부족해 조직 내 왕따, 환영받지 못하는 반쪽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가.”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성노동연대회의가 주관하고 총 86개 단체가 주최한 집회에 약 500명의 시민들이 모여 신당역 사건 피해자를 추모했다. 또한 일터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방관하고 노동자를 위험에 몰아넣은 서울교통공사와 정부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날 집회에서 이현경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대의원은 “서울교통공사는 야간순찰 여직원 비율을 줄이거나 화질 좋은 CCTV를 설치하겠다는 등 겉핥기 식의 대책만을 늘어놓을 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며 사고의 근본 원인에 대한 해법을 외면하는 서울교통공사를 비판했다. 또한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고 요구했는데 왜 여성을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답이 되는가” 며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2018년, 성폭력 가해자인 관리자를 피해 여성노동자의 인접 근무지로 발령을 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심지어 그 뒤에는 공사가 성희롱 사실을 폭로하고 후속조치를 요구해온 피해자의 동향을 감시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2020년에도 서울교통공사 노동자 5명 중 1명이 성희롱을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적이 있다고 응답할 만큼 직장 내 성폭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2020년 서울시 유관기관별 성별임금격차 공시에 따르면 서울교통공사의 여성 직원 비율은 전체의 10.3%로 26개 기관 중 가장 낮다. 성별 임금격차 또한 35.71%로 기관 중 높은 편에 속한다. 2019년 하반기 감사원 감사 과정에선 2016년 당시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가 무기계약직 전환 과정에서 여성 지원자들의 면접 점수를 조작해 모두 탈락시킨 채용 성차별 정황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공사 면접 관계자는 '(업무가) 여성이 하기 힘든 일'이라거나 '여성용 숙소가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여성 지원자들의 점수를 조작하였다. 이미 이전부터 수 차례의 징후들이 공사 내부에서 발생해온 셈이다.  자신의 동료가 죽음을 맞이한 그 일터에도 다음날 어김없이 출근을 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지난 20일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조는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역무원과 같이 승객 접점 부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이들은 서울교통공사가 이번 사건을 “단순 해프닝” 정도로 여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조직 내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단 한 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와 2019년 혜화역을 가득 메운 그 외침이 현재까지 유효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여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출처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0805 조연주, “여성노동자가 일하다 죽었다, 신당역 살인사건은 ‘산재’ … 민주노총이 분노하며 연대하는 이유”, 노동과 세계 (2022.09.17)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59788.html 곽진산, “보신각 밝힌 신당역 추모 ‘죽어야 찔끔 변화, 이게 선진국인가’”, 한겨레 (2022.09.22)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208 김민주, “서울 도심서 '신당역 사건' 추모 집회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여성신문 (2022.09.23)  
2022-10-12 | hrights | 조회: 438 | 추천: 0
전예원 / 회원 칼럼니스트  기성세대가 격세지감의 감정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인 ‘요즘 애들’의 당사자로서, 시기와 상황에 따라 ‘우리 세대’를 일컫는 말이 달라짐을 느낀다. 고등학교 때는 ‘N포 세대’ 같은 단어가, 이번 대선에는 ‘이대녀(남)’같은 단어가 자주 귀에 걸렸다.  이 가운데 근래 가장 많이 들려온 단어는 '엠지(MZ)'이다. ‘MZ세대’로 불리우며, “MZ세대라서 그래”, “이게 MZ구나” 같은 말로 기성세대와 손쉽게 구분되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이는 미디어에 비춰지는 ‘MZ’들이 기성세대와 달리 SNS 사용에 능하고, 확고한 자기인식과 신념을 분명히 표현하는 세대로 이미지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대를, ‘MZ’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감각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에 온전히 부합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MZ’의 이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MZ’라는 단어는 그 용례부터가 광범위하다. 이 용어를 처음 만든 미 여론조사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1980~1996년생을 M세대, 1997~2012년생을 Z세대로 나눈다. 각종 미디어들이 M세대와 Z세대를 아울러 폭넓게 일컫는 것과 달리, M세대와 Z세대의 사이의 간극이 작지 않은 것이다*.  초점이 80년 ~ 96년생에 해당하는 M세대에 있을 때는 ‘N포담론’이나 ‘욜로족’, ‘소확행’ 과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저성장과 고용불안 등 사회구조적 문제로 다양한 가치와 취향을 포기하거나(N포세대) 맹목적으로 좇게 된(욜로족, 소확행) 청년세대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반면 Z세대가 이야기되는 방식은 조금 차이가 있다. Z세대를 향한 여론과 인식을 다룬 사회학 연구들은 이들을 고유의 취향과 정체성을 중시하고, 이를 소비성향에 반영하며,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세대로 특징짓는다. 다시 말해 Z세대는 분명한 자기취향과 소비욕을 가지고, 이것을 SNS에 전시하는 세대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이는 ‘M’세대를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하는 구조적 측면에서 조명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이다. 출처-pixabay   SNS도 하지 않을 뿐더러 소비나 전시의 욕구도 그다지 높지 않지만 ‘Z세대’로 불리는 입장에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경유하는 미디어가 달라졌다 뿐이지, ‘삐삐’나 ‘싸이월드’ 등 비대면 소통에 대한 욕구는 기성세대에도 존재하던 것이 아니었는지. 아울러 ‘자기 PR'이라는 관용어가 상당 기간 통용되던 것을 보면, 접근성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기표현의 욕구나 수단 역시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했던 것 같다.  이 의문이 어디에 기인했는가를 따져보면, 가능한 답은 ‘성취’이다. Z세대가 이전세대와 미디어 사용능력과 방식에서 달리 평가받는 것은, 이들이 미디어를 통해 창작물을 ‘산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적 ‘수익’까지 내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한 자기표현은 단순히 타인과의 소통경로라기 보다는 자기 성과에 대한 보고이기도 하다. ‘좋아요’와 ‘하트’를 받기 위해서는 ‘능력’과 ‘성취’를 증명 받아야 하는 것이다.  Z세대를 떠올리면 따라오는 개성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부각됨에 따라, 이 세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가장 성취지향성이 높은 세대라는 사실은 자주 망각되는 것 같다. 결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전시하고자 하는 것은 성취지향사회의 논리를 고스란히 답습한 결과이다. 그러나 'N포 세대'가 ‘포기’라는 단어로써 청년세대에 가해지는 구조적인 억압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것과 달리, Z 세대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이미지들에는 ‘성취지향사회’나 ‘능력주의’의 함의를 찾기 어렵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직접적으로 연상할 수 있었던 N포세대와 같이, Z세대에도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감각적 이미지로 은폐되는 능력주의의 단면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미디어와 매체에 비춰지는 어린나이에도 높은 성취를 일군 ‘영보스’나 ‘여고생 댄서들’의 모습은 능력과 성취에 대한 강한 선망을 드러낸다. 이전에는 ‘성실한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성취에 열중했다면, 이제는 “뛰어난” 능력과 “멋진” 성취까지를 요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MZ’의 이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어쩌면 Z세대는 기성세대와 완전하게 분절된 신인류가 아니라, 성취와 능력으로서 증명해야 하는 이전세대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대일지도 모른다. * “MZ세대라는 말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미디어오늘, 2022.09.20 (2022.09.27. 열람)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805
2022-10-05 | hrights | 조회: 523 | 추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