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대화모임

2008년 촛불집회와 여성의 역할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여성이 공공성의 주체로 대두하고 있는 모습, 즉 단순히 여성이 공적 분야에서 일한다는 것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위한 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사실 여성은 가정 안에 들어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한 오랜 통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회가 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나누고 여성이 속하는 영역은 사적 영역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을 제한해 왔다. 여성은 가정에만 있어야 하는 존재? 나는 여성이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고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자주 말해 왔다. 여성교육이 확대되어 여대생의 수가 늘어나고 대학 졸업 후 취업하는 여성의 수도 늘어났지만 적어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익, 사회정의,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여성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나의 이런 작은 바람에 대해 한 여성 후배가 “독특하다”고 평한 적이 있다. 좋다, 나쁘다는 평가가 아니고 독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은 표면 아래서 여성의 사회적 관심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많은 여학생들이 학생·노동운동에 참여하여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이들 운동은 많은 경우 위계서열과 집단의식을 특징으로 하였고, 젊은 여성참여자들은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에서 남성 지도자, 동료들을 위한 조력자의 역할을 하였다. 반면 여성은 이와 다른 차원에서 사회 전체를 향해 발언하고 공공의 이익 수호를 위해 나서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2008년의 쇠고기 반대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많은 여성 참여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 공공성의 영역에서 주된 행위자로 등장하되, 이는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권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여성의 희생 위에서 공공의 이익을 획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자들이 여성의 권리 신장, 여성을 위한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전체의 문제, “우리 모두를 위한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책”을 이야기하다 구체적으로 2008년 광장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몇 가지 짚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촛불집회에 여성이 활발하게 참여한 데는 화장품, 생리대, 여학생들의 생명 안전 문제 등 여성 고유의 문제가 부분적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 고유의 문제보다 사회 전체적인 문제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다. 여성은 “나의 생명을 지키면서 모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이는 새로운 국면이다. 보수 세력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보수 세력은 광장에 나온 여학생, 주부들이 동원되고 사주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체 누가 누구의 사주를 받는가. 2008년 광장을 살펴보면 담론의 주체로 등장한 ‘소녀들’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이른바 ‘촛불소녀’들의 전면적인 등장이다. 촛불집회에 나선 소녀들은 스스로의 정치적인 관심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소녀들의 의식전환을 보여주는 예를 어느 네티즌이 글에서 찾아보자. 중 3인 큰 아이는 알아서 책을 뒤지더니 꿈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이 버는 사람에서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요. 특히나 거울공주 작은 딸래미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언니와의 말씨름에서 지지 않으려고 인터넷만 뒤지고 있습니다. 단지 쇠고기 문제만이 대상이 아니었다. 5월 6일 저녁 청계광장에서 만난 여중 2학년 학생은 또렷한 어조로 “대운하 정책만 해도 대통령이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여학생들이 그렇게 집회에 많이 참여했을까. 입시경쟁에다 외모경쟁에까지 시달리는 소녀들은 그런 삶이 고달프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에 대한 애정과 배려에서 출발하여 공익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갔다. 남성들보다 높은 네트워크 이용도는 이런 관심이 표출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과거 남자들의 네트워크가 ‘연줄’에 집중된 것이라면, 현재 여자들의 네트워크는 ‘연대’에 집중된다고 할 수도 있다. 주부들도 육아 사이트, 교육 사이트 등을 통해 다른 여성들과 연결되어 있고, 정보에서도 소외되지 않는다. 특히 주부들은 타인을 보호하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였다. 한 주부는 “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저 아이들은 음식선택권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집회에 참석하여 자기 친자녀들뿐 아니라 모든 청소년의 건강도 함께 지키고자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유모차 부대’가 지닌 진정한 의미이며,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커다란 변화다. ‘유모차 부대’의 핵심은 공적 참여 이처럼 쇠고기 반대 논의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것은 권력욕, 지배욕에 바탕을 두지 않은 공적 관심이었다. 공적 활동이 소득 활동, 권익 옹호만을 의미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여성의 의식과 활동에서의 공공성 확보가 ‘모두의 하녀’, ‘모두의 식모’, ‘모두의 청소부’로서의 여성이라는 성(gender) 논의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평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여성주의는 희생자 담론에 입각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여성이 불쌍하고 배려 받아야 하는 존재인가. 여성은 물리적 폭력 앞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약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전체로서 더 불리한 점은 없다. 여성은 공공성의 주체로서 나를 살리고 전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럴 때 여성은 시민의식을 넘어서 인간적 가치의 실현자로서의 참 인간의 경지를 탐할 수 있다. 나는 여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사랑을 하고 개인적 행복을 누리고 공적 영역에서 권익도 누리면서 공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서 공공성 수호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여성으로 성장해 가기를 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덧붙여야 할 사항이 있다. 패권국가에서는 여성의 위상이 낮다. 미국에서는 힐러리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결국 실패했다. 반면,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여성 대통령도 활동했다. 한국에서 여성이 공공성의 수호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군사주의 극복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동시에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2017-08-08 | hrights | 조회: 39 | 추천: 0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이명박 정권이 공식적으로 내놓은 미디어 정책은 ‘다공영(MBC, KBS) 1민영(SBS) 체제’의 ‘1공영 다민영 체제’로의 전환(MBC와 KBS의 사영화 등), 신문법 폐지를 통한 신문-방송 교차소유 허용, 국가기간방송법 제정,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 체제 해체, 인터넷 규제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이명박 정권의 미디어 정책 내용을 보면서 그리고 실제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을 보면서 ‘불법’과 ‘초법’의 수준을 넘어 ‘무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몰이성적, 몰합리적, 몰상식적인 ‘무법천지 위에 군림하는 독재정권’이 아닌가 한다. KBS 장악 = 언론 장악 KBS 정연주 사장에 대해서도 그렇다. 현행 방송법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KBS 사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만 두고 해임권은 적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 신재민 제2차관이 “해임권까지 있는 것으로 해석가능하다”며 총대를 메고 나왔고,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KBS 정연주 사장을 해임했다. 해임의 표면적인 과정은 감사원의 고발을 받은 KBS이사회가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한 것이지만, 사실상 주요권력기관인 검찰, 법원, 국세청이 총 동원됐다. 그렇다면 이정권이 왜 KBS 사장자리를 그렇게까지 탐을 내고 있을까. KBS가 한국 미디어계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KBS 9시 뉴스는 평균 시청률이 약 20%정도인데 한국의 가구 수가 대략 1천 7백만 가구라 하면 3백 5십만 가구가 9시 뉴스를 보는 셈이다. 보통은 한 가구당 2~3명이 뉴스를 함께 보니 대략 7백만에서 1천 만 명 정도의 국민이 9시 뉴스를 시청한다. 숫적으로만 봐도 실로 엄청난 영향력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언론담론이 순환되는 매커니즘을 이해하면 이것이 단순히 시청자 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조중동 조간신문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KBS 정연주 사장은 좌파다”라고 일제히 보도한다고 치자. 이것만으로 정연주씨를 좌파라고 믿는 사람들이 수십 수백 만 명이 생겨날 수 있다. 오전 9시경부터는 각종 인터넷 매체에서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오후까지 이어진다. 저녁엔 석간신문인 문화일보가 이 기사를 띄어 저녁때까지 인터넷 매체에서 논쟁이 지속된다. 마지막으로 방송3사의 9시 뉴스(SBS는 8시뉴스)가 이 논쟁의 끝을 이어받는데, 이를 통해 조중동 등의 보수언론들이 퍼트린 담론이 일반 가정집 곳곳에 그대로 스며들게 된다. MBC나 SBS는 기본적으로 KBS의 논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객관적인 근거나 증명의 책임은 중요하지 않다. 기사화되어 보도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담론이 생성돼 많은 사람들의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KBS 사장은 방송에 대한 인사권과 재정을 통제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장의 의중이 9시 뉴스에 항상 반영될 가능성이 열려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새로이 KBS 사장으로 임명된 이병순씨가 차장급에서 사장으로 수직급상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납득하지 못하는 이런 임명의 뒤에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즉 청와대가 방송에 대한 인사권과 프로그램 편성을 좌지우지할 위험이 항상 존재하게 된 것이다. KBS 사장의 파급력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논란이 됐던 디지털TV 전송방식에 대한 결말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관련 전문가들은 경제성이 뛰어나고 이동수신이 가능한 유럽식을 선호했지만, 진대제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 노무현 전 대통령,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의 주도로 결국 미국식으로 낙점됐다. 이때에도 KBS 사장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이 방송장악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비난은 너무도 관대하다. 불법적으로 KBS 사장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임명한 그 순간 이미 방송장악은 완료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MBC나 SBS가 KBS의 의제설정을 따라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방송의 다양성마저 이미 침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민영화란 본격적인 사영화에 불과 좀더 본격적으로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언론정책의 내용과 문제점을 알아보자. 우선 용어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조조정’과 ‘민영화’라는 말은 엄밀히 얘기해서 그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용어다. 구조조정은 사실상 ‘집단해고’라야 맞고, 민영화는 ‘사영화’라 칭해야 올바르다. 한국사회는 1990년 SBS 등장 이후 다공영 1민영 체제를 유지해 왔다. 18년이 지난 지금 SBS는 공영방송의 경영행태, 제작행태, 보도행태를 닮아 왔다. 즉 사영방송이 다공영체제에 수렴되는 효과가 발생하고, 사영방송의 저질화가 저지되는 정기능이 발휘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사영(多私營) 체제로의 전환은 1공영을 무력화시키거나 그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또한 KBS2, MBC를 사영화한다고 할 때, 그 매각 규모상 한국사회에서 그것들을 사유화할 수 있는 큰손은 ‘재벌’ 밖에 없다. 재벌이 방송까지,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신문법 폐지를 통한 신문-방송 교차소유 허용 신문법 15조는 신문-방송의 겸업을 금지한다. 신문-방송 간의 상호겸영을 금지하는 이유는 방송과 신문 모두 여론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소유의 다양성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문화적 다양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규제 목적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신문법 폐지 또는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 현행 신문법이 금지하는 일간신문의 지상파 방송,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소유를 통한 겸영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그 결과가 여론집중 방지장치의 해체다. 조중동이 방송까지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기간방송법 제정 국가기간방송법은 2004년 11월 박형준 의원 외 122명이 발의한 법률이다. MBC와 KBS2의 사영화, 공영방송 적용대상으로 KBS와 EBS 한정, 공영방송에 대한 결산과 예산 결정권은 국회소유라는 것이 그 주요내용이다. 즉 예산통제와 프로그램 통제라는 두 기둥을 통해 공영방송의 관영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터넷 규제 이명박 정부의 인터넷에 대한 통제는 크게 두 축인데 하나는 포털 등을 통한 ‘사적검열’ 강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실명제’의 전면 확대다. 현 정부는 정보통신망법을 개정해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불법유해정보 신고센터’운영을 강제하겠다고 하고 있다. 나아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불법정보 관리실태를 점검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가 충실히 사적 검열을 수행하는지를 수시로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인터넷 통제의 다른 한 축은 아이핀 제도 도입을 빌미로 한 인터넷 실명제의 전면 확대다. ‘아이핀’은 5개 신용정보사업자에게 사전에 휴대폰, 신용카드, 주민등록DB 등으로 실명확인을 받으면 발급받는 주민등록번호 대신 쓸 수 있는 13자리 번호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수사기관이 통신내용이나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요구할 경우 법원의 영장이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공직선거법이나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르면 포털과 인터넷서비스 제공자는 수사기관이 개인정보를 요청하면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 네티즌 수사로 표현의 자유를 마음대로 위축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의 미디어 책략을 봉쇄(KBS장악 과정)와 적대적 무시(촛불에 대한 모르쇠, 케이블TV 편향적인 방송법 시행령 개정강행), 적극적 포용(조중동 사랑)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언론시민운동의 저항은 미약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당사자인 방송내부 종사자들의 저항이 기대수준을 밑돌기 때문이다.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내부 구성원들은 물론 언론시민단체들의 의지와 결의 수준이 한층 높아져야 한다. 앞으로 상당기간 언론시민운동이 대화와 합의라는 익숙한 관행과 결별해야 할지도 모른다.
2017-08-08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우리에게 대학은 무엇인가 이명원/ 문학평론가 사람들은 대학을 지식인들의 거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다소 회의적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들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들의 대부분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굳어진 구조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위기’란 말이 한국의 대학들을 이야기할 때 전혀 무리 없는 표현이다. 크게 보면 현 대학의 위기는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한 구조적 위기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대학의 위기는 한국 사회의 위기를 반영 최근에 언론이 KBS 이사로 활동하다 해직된 경희대 모 교수 문제를 다루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학 당국은 그 교수에게 KBS 이사직을 그만두라는 권고를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해임됐다고 한다. 대학 측은 학교의 승인 없이 이사가 되고, 또 그로인해 수업에 소홀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당사자는 이전에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다가 집권하는 정부가 바뀌니 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항의했다. 정권의 변화에 오락가락하는 대학 운영의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시간강사의 경우는 너무도 고질적인 문제다. 6만 여명의 사람이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이들은 일용직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임용과 재임용에 관련하여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고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강사들이 스스로를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느낀다. 법제도의 사각에서 암울한 대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현 대학사회에 적용되는 교수임용제도나 대학 이사진, 경영진, 총장 등에 대하여 활발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핏 보더라도 연구 능력이 뛰어나고 학생들과 친화력도 좋아 모범적인 교수라 할 만한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이런 교수들 중에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을 주장하다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내 문제가 심각한 대학에서 재단이나 총장에 반대하는 교수들을 해직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신입교수들을 뽑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대학의 교원 임용이 연구나 강의 능력이 아니라 이사장이나 총장의 취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니 어찌 대학이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현상은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1950-60년대에 냉전체제의 영향으로 지식인들을 전폭적으로 통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현상의 일부로 좌파를 착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핵심적인 거점이 대학이었다. 많은 연구의 실질적인 목적은 냉전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논리 개발이었다. 냉전체제에서 미국 등의 자유주의 진영의 우위를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책연구에 많은 연구비가 지원되었고, 이 과정에 많은 교수들이 동원되었다. 연구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무기개발, 위성개발을 통한 적국감시, 군사작전과 관련된 내용,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의 체제우월성, 제3세계 진영의 포섭을 위한 전 지구적 비교연구 등이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정부 지원 외에 기업의 연구비 지원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기업과 정치기관이 연구비의 재원을 대고 이에 대학 교수들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한편으로는 조직연구를 수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에서 제공되는 용역 연구를 행했다. 교수들은 국가 주도 연구를 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냉전체계에 협력하게 되었고, 연구 결과 또한 국가의 의도에 종속되는 것들이 나타났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이를 통해 비판적 지식인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연구자의 문제의식이 정형화·협소화되었으며, 학술연구에 대한 국가 통제라는 위험한 관행이 만연하게 됐다. 국가와 시장 권력에 종속된 대학 시대적 상황은 다를지라도 현재 한국에서는 지식인의 통제라는 맥락에서 냉전체제의 미국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와 시장 권력을 위한 대학 지식인의 통제는 특히 IMF 이후에 활발해졌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신자유주의의 맹목적 추구와 더불어 대학 지식인들의 초라한 전락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수계약제 문제도 이 시기부터 대두되었는데, 이때 도입된 것이 교수업적시스템이다. 교수업적시스템을 만들어낸 학술진흥재단은 학술재단에서 인정하는 학술지만 인정하고 평가에 포함시키는 식의 기준을 만들었다. 표준화된 시스템에 의해 우열이 가려지고 이분법적인 평가 잣대가 고착화 되며, 이에 따른 거액의 연구비 지원에 대부분의 지식인과 연구 결과가 종속되는 매커니즘이 탄생했다. 흔히 ‘연구 용역’이라고 쉽게 이야기하고, 쉽게 생각하지만 연구과제가 설정되고 그것을 수주하기 위해 연구팀을 조직하고 지원하며 선정되는 과정에서 교수에 대한 사회통제가 강화되기 마련이다. 취임하자마자 대학에 ‘실용’의 가치를 들이댄 이명박 정부는 대학을 연구 성과가 아니라 학생들의 취업 성적으로 평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해 대학의 취업률이 떨어지면 교육부의 지원을 삭감하고 평가서열을 낮추겠다는 이야기다. 이는 교수들을 학문 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연구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영역에 잘 진입할 수 있는 예비회사원을 얼마나 많이 양성했는가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취업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학과는 구조조정 되고, 얼마나 많은 수주를 받았느냐에 따라 교수에 대한 평가와 대우가 달라진다. 이런 측면에서 취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대학의 위기, 학문의 위기, 교수로서의 정체성의 위기와 직결돼 있다. 교수들의 봉사활동에 관한 항목 또한 정부 관련 위원회나 세미나에서의 강연이나 특강만을 봉사로 인정하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단체에서의 강연은 봉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연구만 열심히 한 교수는 점점 더 좋은 평가 점수를 얻기 힘들어지며,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교수들은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게 된다. 최근 보편화된 대학의 기업화도 시장경제형 지식인을 장려하는 정부의 지향과 연관돼 있다. 학부제가 들어서면서 학과단위가 폐지되었으며, 교수는 교수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실용적 인간형으로 바뀌어가고 대학시스템도 퇴행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이쯤 되면 고등교육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건전하고 합리적인 비판적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노동자를 만드는 것이 과연 고등교육의 올바른 지향이라 할 수 있는가. 내부의 자기반성이 절실하다 대학사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압박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내부에서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의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주체는 교수와 학생이며 그들이 상황을 방치하면 대학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비록 기존 체제의 대안으로 대안학교나 외부 연구공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는 대학 내부 문제에 무책임한 것이 될 수 있으므로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다. 대학은 분류체계에 저항해야 하는 곳이다. 근거 체계에 대한 회의를 하게 만드는 것이 대학의 기능이고 그 존재 이유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교수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최초로 응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등록금과 그 밖의 다른 문제에 대해 주체적으로 나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 교수사회는 정권의 차원에서, 또한 다른 여러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 지점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 대학의 총체적인 상황이며 이 시스템대로 가다간 괴멸이 멀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리=이정아/인권연대 인턴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고전에서 배우는 공부의 비전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고미숙/ 수유+너머 연구원 어딜 둘러봐도 공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새삼스럽게 공부를 말한다는 것에 무슨 뜻이 있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공부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에서 얘기를 풀어가겠다. 먼저, 학교 공부를 보자. 한국의 학교에는 공부가 없다. 다만 성적이 있을 뿐이다. 성적으로 나타나는 학교. 공부가 좋은 대학에 가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공부에 불과하다.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교수들은 돈 되는 프로젝트 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대학생들은 고시와 연애 외에는 관심이 없다. 대학 공부가 잘 나가는 직장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역시 대학에도 공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서는 사정이 나은가. 사회에서는 엉터리 공부들이 유행한다. 다이제스트 판 공부나 인터넷 검색 같은 공부로는 내공을 쌓지 못한다. 당장은 폼이 날지 모르지만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스스로 질문하지 못하니 겉은 화려해도 속은 텅 비게 된다. 이런 공부를 하다 보니 경제적 가치 외에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지적 주체들이 길러지고 있다.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채 소유에 서서히 길들여지는 노예와 같은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소유를 추구하는 삶은 파멸할 수밖에 없고, 삶으로써 결코 완성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든, 정신이든, 물질이든 무언가를 완벽히 소유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유하고자 원하는 대상과의 완벽한 일치가 소유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소유에 길들여진 주체의 욕망과 동선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 ‘진짜’ 공부는 충동에서부터 자유로워짐을 뜻하며, 소유가 가져올 강렬한 죽음에의 욕구에서 자유로워짐을 뜻한다.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하고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사유의 힘을 길러줘야 한다. 이런 공부는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이 아닌 ‘촉발’이고 훈육이 아닌 ‘감염’일 뿐이다. 그렇게 공부는 위, 아래 없이 서로 감염시키며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스승이란 따로 있지 않다. 스승이란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부지런히 배우는 존재를 말한다. 스승이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자일뿐이다. 공부할 때 필요한 것들 공부를 할 때 필요한 것들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공부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나가는 항심(恒心)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하심(下心), 이 두 가지 태도가 공부에 반드시 필요하다. 스승과 도반이 필요하다. 근대 이전에는 학인들이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그야말로 삶의 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스승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훌륭한 공부가 되었다. 근대적 지식에는 이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스승과 도반과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고도의 훈련 또한 필요하다. 강도 높은 학습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학습 없는 토론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맴돌 뿐이다. 이미 이런 문제가 심각해진 대학에서 특히 공부 모임의 재구성이 절실하다. 자기 비움의 자세 역시 필요하다. 공부할 때는 자기만의 편견을 싹 비우고 늘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자신을 낮춰야만 한다. 이런 자세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이제 공부의 핵심인 독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영상매체 등에 밀려서 갈수록 독서가 설 자리를 뺏기고 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독서의 힘을 재발견해야 한다. 독서는 단지 지적 능력의 보완이나 정보 습득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의 폭주를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입구이다. 삶과 문화에 대한 전복적인 사유는 책읽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떤 책을 피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우선 논술서적, 처세술을 다룬 책자들을 피해야 한다. 대신 시대의 통념을 뚫고 나와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보여주는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한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이고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고전을 읽자 고전은 흔히 어렵다고 알려져 있어 사람들이 쉽게 손에 들지 못한다. 하지만 고전을 읽는 방법을 알면 생각만큼 어렵지 않고 일상과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대로 된 공부를 위해서는 자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승과 벗들이 필수적이다. 고전에서 그러한 스승과 벗들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정수다. 고전을 읽어갈 때 실천하라고 권하고 싶은 공부법들이 있다. 암송과 구술과 글쓰기이다. 암송은 암기와는 다르다. 일정한 진도가 필요한 암기와는 다르게 몸과 마음을 열어두고 진도 따위는 의식하지 말고 소리내어 암송을 해 보라. 구술이란 어떤 문맥이나 상황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방법이다. 새로운 말과 이야기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삶과 존재도 변모시킬 수 있다. 글쓰기는 공부의 마지막이다. 글은 자신의 신체 혹은 삶의 개별성과 특이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자신의 문체를 살펴보면 된다. 글쓰기를 하면서 자신의 문체를 다듬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도 변화시키는 절차탁마가 필요하다. 이제까지 얘기한 것을 정리하자. 공부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내가 던지는 질문이 곧 나의 운명이니, 나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다른 공부는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여러 실험들을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하도로 하자.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공부이다. 그래서 일상은 언제 어디서건 존재의 생성과 변이를 가능케 하는 혁명의 자리가 된다. 공부에 외부란 없고, 삶의 모든 과정이 공부다. 그러므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공부할 수밖에 없다.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 우리의 선택은 간단하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2017-08-08 | hrights | 조회: 41 | 추천: 0
이현주/ 목사 “걸어보니 강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4대 종단의 성직자들이 팀을 짜 강을 따라 순례한다. 그냥 말 그대로 강을 따라 걷는 것이다. 처음엔 대운하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강을 따라 걸어보니 나와 사람들에게 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서로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이 입을 모아 “강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물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정책은 심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생지가 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없다. 성경 속에서 예수가 “사람 때문에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 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치 사람들은 사람이 물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기에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니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를 볼 때 강이 근본이고 그곳에서 인간의 문명이 나온다. 대운하는 인간 문명의 근본인 강을 거스르는 정책이다. “물과 문명은 선택의 문제” 사람을 중심으로 물과 문명 둘 다 건강하면 좋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식인 문명을 선택한다. 그러나 개개인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커져서 부모를 까맣게 잊다보면 그 때 위기가 시작된다. 인간이 지나치게 문명만을 추구하다보니 천지가 썩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강이 더러워지고, 마실 물이 탁해졌다. 대운하 정책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너를 낳은 뿌리냐, 네가 만든 가지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강물이냐, 편리한 생활이냐” 대운하정책은 우리들에게 더 잘 먹고, 더 편리한 집에서 살기를 고집하겠느냐. 아니면 이걸 포기하고 강물을 살리겠느냐고 묻고 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새만금 때부터 이러한 질문이 계속돼왔다.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듯 대운하도 새만금의 연장선이다. 예전엔 천지의 자연을 무생물이 아닌 인간과 똑같은 인격체로 봤다. 물 한 그릇을 먹어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운하, 우리에겐 절박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자.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비해 우린 너무 잘 먹고 있다. 이번에 잘못 선택하면 새만금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끝끝내 정신을 못 차리다보면 재앙을 각오해야 한다. 그만큼 대운하 정책은 우리에겐 절박한 선택의 문제다. 정리=김혜민(인권연대 자원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조정환 /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파리대학 낭떼르 분교의 학생들이 교육개혁을 외치며 시위에 나선 것이 68혁명의 발단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여성운동, 반핵운동, 반전운동, 동성애자운동 등과 결합되면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 좌파 정당 등 기존의 좌파세력과는 무관한 새로운 운동이었다.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노동조합은 오히려 이 새로운 운동주체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발생한 운동과 동일한 혹은 유사한 성격과 구조의 혁명들이 이후 전 세계 여러 나라에 전염적으로 확산되어 그야말로 전 세계가 혁명적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이탈리아의 경우가 주목할 만한 사례인데 프랑스의 운동이 6월 선거로 종식된 지 일년도 넘어서 시작된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은 1979년 4월의 대진압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10년여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68혁명은 1968년의 프랑스 혁명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전 세계에서 분출된 혁명적 소용돌이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전세계적으로 진행된 68혁명 1945년 이후 20년 이상 동안 유럽은 전후의 장기호황을 누렸다. 산업 노동을 자본주의 발전의 협력적 견인차로 배치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호황이었다. 케인즈의 제안대로 서구 국가들은 노동자에게 생산성 상승에 비례하는 임금상승을 보장하면서 노동계급을 자본과의 성장 동맹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급속한 기계화, 자동화의 과정과 결합되었다. 기계화와 자동화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의 지위를 하락시키고, 따라서 실업자가 늘게 된다. 여성은 기존의 가사 노동에 공장 노동까지 수행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대학이 늘어나면서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도 급락한다. 보장받는 노동계급과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계급 사이의 격차는 심화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말이다. 68혁명에서는 이전의 노동자 중심의 대규모 운동과 달리, 노동 차원에서 제기되던 운동의 과제들이 삶의 차원으로 이동하면서 삶의 다양한 욕망들이 운동의 의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전의 운동이 대항 권력, 즉 새로운 권력의 수립을 원한 것이었다면, 68혁명은 권력 자체에 대한 거부가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권력에서 삶으로의 하방이 운동의 지향으로 드러난다.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불복종 경향은 운동의 목표를 국가권력 장악에 두는 것에 반대하도록 만들고 관료주의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자치를 지향하도록 만든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좌파정당들이 전쟁에 협력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68 운동세력은 참전 거부 등의 적극적 행동을 통해 반전운동을 벌인다. 각 민족의 자결을 바탕으로 국제적 연대를 꾀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진다.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불복종 운동 68혁명의 결과 혁명의 의도와는 달리 초국적 금융자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케인즈주의를 넘어서는 신자유주의를 강화하게 된다. 냉전 종식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고, 정통적 사회주의가 붕괴하게 된다. 정리 해고의 광풍 앞에서 노동 거부 요구가, 세계화 드라이브 앞에서 국제주의가 무력화되고, 인권 요구가 지배논리로 전환하는 등의 측면에서 본다면, 68혁명은 패배했고, 자본이 혁명을 흡수했다고 볼 수 있다. 혁명흡수 또는 흡수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이 과정은 삶의 혁명적 요구를 자본이 받아들여 자신의 축적 논리로 내면화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반혁명의 조건 위에서 새로운 혁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후세인에 대한 쿠르드의 저항, 미국 LA에서의 흑인들의 반란, 멕시코 치아빠스에서의 원주민들의 봉기, 프랑스의 공공부문 노조 파업을 계기로 프랑스 파리에 생겨난 시민평의회 등 다양한 혁명적 기운이 여러 나라에서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시애틀에서 본격화된 반세계화 운동은 세계사회포럼이라는 상설적 운동체를 만들어냈고, 중남미 전역에서 새로운 운동이 촉진되고 있다. 21세기형의 새로운 혁명은 68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것은 삶의 내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사회에 제기하는 운동이다. 1960년대와 달리 세계화, 민영화, 금융화, 정보화, 사회화를 통해 자본이 끊임없이 혁신을 거듭하는 상황이 운동의 새로운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삶의 내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운동으로 자본의 세계화에는 국가와 국민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인 다중들의 연합을 통해 돌파해야 한다. 민영화는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운동을 한정하지 말고 좀 더 의식적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돌파해야 한다. 금융화는 코뮤니즘을 통해, 정보화는 정보에 대한 보편적 접근, 정보를 통해 생산된 부에 대한 보편적 접근의 권리의 획득을 통해, 사회화는 공장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 서로 다르면서도 연결되어 공통된 존재들인 다중(multitude)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가 되면서 돌파해야 한다. 68혁명은 운동이 위로부터 관료화하고 권력화한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과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적 자유, 자치, 자율의 운동이었다. 68혁명이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지적도 일면 근거가 있으나, 그렇다고 68혁명의 정신과 주체성이 소실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흡수 혹은 반혁명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동혁명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혁명의 한계와 위기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그 흡수의 한계와 위기를 직시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 혁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실재적 힘의 지속성, 즉 혁명적 주체성의 재구성을 발견하고 그것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일련의 이런 고민을 좀 더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음의 책을 권한다. 조정환,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6 조정환, [지구제국], 갈무리, 2003 조정환, [21세기 스파르타쿠스], 갈무리, 2003 네그리와 하트, [자유의 새로운 공간], 갈무리, 2007 빌라 하엨 외, [1968 그리고 그 이후], 현장에서미래를, 2002 편집부 엮음, [프랑스 5월혁명], 백산서당, 1987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이후 타리크 알리 외,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2001 네그리와 하트, [다중], 세종서적, 2008 빠올로 비르노, [다중], 갈무리, 2005
2017-08-08 | hrights | 조회: 41 | 추천: 0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안건모/ 월간 <작은책> 발행인 거짓이 없고 감동이 있는 글, 비판의식이 있는 글,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글. 나는 이러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월간 <작은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게 계기가 되어 ‘안건모의 일터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당시 주목을 받게 되고,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고 ‘시내버스로 정년까지’라는 제목의 생활수기를 냈는데 우수상에 당선되었다. 그 때 쓴 글을 보면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도 않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인데도 새벽 4시까지 신명나게 글을 썼다. 그 글을 쓰면서 눈물이 많이 났다. 살아온 지난 시절이 그만큼 고달팠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노동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들어간 곳은 의자공장이었다. 공장에서 6개월 정도 일하고 다시 공부하려는 마음에 검정고시를 봐서 한양공고에 들어갔지만, 이것도 2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보안사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82년 제대하여 나와 보니 기술이 없는 터라 먹고 살 게 전혀 없었다. ‘인간시장’이라고 불리는 직업소개소에 5만원만 내면 사람들이 와서 사간다.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얻게 된 일자리가 비정규직은 아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버텨내지 못하기 일쑤다.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기가 차가운 방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대형면허를 따고, 버스회사를 찾아가 일을 했다. 대형면허를 딴 지 5개월도 안 되는 때에 버스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우이동에서 신림동을 가는 333번 버스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처음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매우 떨렸지만,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내가 초보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 정거장 정도를 지나니까 ‘내 직업이 이거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겨우 2, 3일 만에 버스가 내 몸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시작하면서 버스운전사가 내 평생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이동에서 세 정거장이 지나면 버스가 도통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이 너무 많은 탓이다. 서울역을 지나고 나면 버스는 총알이 된다. 이 모두가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다. 앞 버스와의 배차간격을 유지시키지 못하면 버스운전업계에서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또 막노동에 비하면 월급은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짝수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안내양이 없어지면서 버스기사가 출입문을 조종한다고 ‘문짝수당’이라는 것을 따로 주었는데 나중엔 그것도 없어졌다. 사업주들이 얼마나 기사들의 임금을 떼어먹는지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당시 버스기사의 배차실은 달랑 컨테이너 한 칸이었다. 사업주들이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주눅 들게 만들게끔 그러한 환경을 자연스럽게 조성하는 것이다. 노동의 정도도 고되다. 하루 2, 3시간 자며 3일 연속 내내 운전만 하면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또 80년대 종로에는 데모가 많이 일어났다. 버스의 왼쪽은 전경, 오른쪽은 시민. 짱돌과 최루탄이 버스 위로 날아다녔다. 그런데 신기하게 차 안으로 짱돌이나 최루탄이 날라들지는 않았다. 주변 동료들이 부당해고를 당해도, 그게 부당한 일인지조차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쿠바와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을 보게 되었다.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인디언 집단학살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고 내가 그동안 알았던 것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참으로 순진하게 살았다. 버스 운전을 하면서 버스 요금을 잘 모르는 승객을 간첩이라고 신고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책 한권을 만나면서, 나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세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소설 <태백산맥>은 버스운전을 하면서 짬짬이 읽었다. 10권을 운전석에 앉아 20일 만에 다 읽었다. 내가 변하게 된 데에는 아마 우연과 필연이 겹쳤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싶어서 파고든 것은 누군가 억지로 내게 가르치려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내가 받는 임금의 항목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했고 이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틀 치 임금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엔 근로기준법을 알고 싶어서 근로기준법 책을 샀다. 그런데 이 책을 들고 다니고부터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나보고 빨갱이라고 불렀다. ‘아, 내가 얼마나 빨갱이를 무서워하는데... 반공사상에 익숙한 내게 빨갱이라니...’ 오기가 생겼다. 근로기준법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내게 반말하던 관리자들이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가장 구식버스(똥차)를 배정했다. 이후에도 나는 회사 측에 쉬는 시간, 일한 시간 등을 계산하여 연장수당을 지급하라고 요청했고, 이는 금방 받아들여졌다. 요구하고 싸우면,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배차도 새 차로 해주었다. <작은 책>을 알게 되면서 동료기사들에게 A4 한 장 분량의 소식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이 소식지를 통해 서로 동질감을 느꼈다. 이 종이 한 장이 우리의 모임을 변하게 했다. 만나서 얼굴 맞대고 노동권, 근로기준법 등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예전에 그들은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식지 끝에 한 줄씩 적은 근로기준법 조항에 반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술자리에 가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이런 힘을 갖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더 크게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먹고, 고양시에 ‘버스일터’라는 좀 더 큰 모임을 만들었다. 500부씩 소식지를 매달 발행했다. 그 때부터는 기사들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글에는 사투리도 그대로 쓴다. 버스기사들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모른다. 그 중에 한 명 역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이전에는 글을 어렵게 생각하고, 지식인만 쓰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기사들은 소식지 ‘버스일터’가 언제 나오는지 묻고, 기다렸다. 몰래 후원금을 쥐어줬던 기사들도 있었다. 오늘 수요대화모임 제목이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인데, 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 버스연재 글을 본 사람들은 버스기사들이 왜 파업을 하고 왜 난폭운전을 하는지 이해한다.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알기 때문이다. <작은 책>은 ‘일하는 사람이 보는 책이 없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맨 처음 ‘작은 책’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 받았을 때, 한 달에 250만원 받던 버스회사를 그만두고 100만원 받으며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사실 내가 버스 회사를 나갈 때 사업주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니 얄미웠고,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은 얼마나 또 탄압을 받을지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3개월의 고민 끝에 사업주가 그렇게 고대하던 사표를 냈다. 지금은 <작은 책>에서 편집, 교정, 교열, 영업까지 하고 있다. <작은 책>에 실리는 글은 대부분 생활 글 위주였다. 그러다가 ‘생활 글을 넘어서 알아야할 지식도 분명히 있다.’ 라는 생각에 진보적 지식인들의 글도 싣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렇게... 지금까지 ‘작은 책’이 잘 굴러오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혼자 싸우냐고, 힘들지도 않냐고. 나는 대답했다. “나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여. 내 아들이 커서 버스운전기사가 되겠대. 내 아들이 일하기 편한 직장을 만들려고 하는 거여.” 정리: 임혜민/ 인권연대 자원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40 | 추천: 0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안건모/ 월간 <작은책> 발행인 거짓이 없고 감동이 있는 글, 비판의식이 있는 글,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글. 나는 이러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월간 <작은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게 계기가 되어 ‘안건모의 일터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당시 주목을 받게 되고,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고 ‘시내버스로 정년까지’라는 제목의 생활수기를 냈는데 우수상에 당선되었다. 그 때 쓴 글을 보면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도 않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인데도 새벽 4시까지 신명나게 글을 썼다. 그 글을 쓰면서 눈물이 많이 났다. 살아온 지난 시절이 그만큼 고달팠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노동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들어간 곳은 의자공장이었다. 공장에서 6개월 정도 일하고 다시 공부하려는 마음에 검정고시를 봐서 한양공고에 들어갔지만, 이것도 2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보안사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82년 제대하여 나와 보니 기술이 없는 터라 먹고 살 게 전혀 없었다. ‘인간시장’이라고 불리는 직업소개소에 5만원만 내면 사람들이 와서 사간다.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얻게 된 일자리가 비정규직은 아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버텨내지 못하기 일쑤다.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기가 차가운 방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대형면허를 따고, 버스회사를 찾아가 일을 했다. 대형면허를 딴 지 5개월도 안 되는 때에 버스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우이동에서 신림동을 가는 333번 버스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처음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매우 떨렸지만,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내가 초보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 정거장 정도를 지나니까 ‘내 직업이 이거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겨우 2, 3일 만에 버스가 내 몸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시작하면서 버스운전사가 내 평생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이동에서 세 정거장이 지나면 버스가 도통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이 너무 많은 탓이다. 서울역을 지나고 나면 버스는 총알이 된다. 이 모두가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다. 앞 버스와의 배차간격을 유지시키지 못하면 버스운전업계에서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또 막노동에 비하면 월급은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짝수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안내양이 없어지면서 버스기사가 출입문을 조종한다고 ‘문짝수당’이라는 것을 따로 주었는데 나중엔 그것도 없어졌다. 사업주들이 얼마나 기사들의 임금을 떼어먹는지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당시 버스기사의 배차실은 달랑 컨테이너 한 칸이었다. 사업주들이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주눅 들게 만들게끔 그러한 환경을 자연스럽게 조성하는 것이다. 노동의 정도도 고되다. 하루 2, 3시간 자며 3일 연속 내내 운전만 하면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또 80년대 종로에는 데모가 많이 일어났다. 버스의 왼쪽은 전경, 오른쪽은 시민. 짱돌과 최루탄이 버스 위로 날아다녔다. 그런데 신기하게 차 안으로 짱돌이나 최루탄이 날라들지는 않았다. 주변 동료들이 부당해고를 당해도, 그게 부당한 일인지조차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쿠바와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을 보게 되었다.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인디언 집단학살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고 내가 그동안 알았던 것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참으로 순진하게 살았다. 버스 운전을 하면서 버스 요금을 잘 모르는 승객을 간첩이라고 신고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책 한권을 만나면서, 나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세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소설 <태백산맥>은 버스운전을 하면서 짬짬이 읽었다. 10권을 운전석에 앉아 20일 만에 다 읽었다. 내가 변하게 된 데에는 아마 우연과 필연이 겹쳤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싶어서 파고든 것은 누군가 억지로 내게 가르치려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내가 받는 임금의 항목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했고 이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틀 치 임금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엔 근로기준법을 알고 싶어서 근로기준법 책을 샀다. 그런데 이 책을 들고 다니고부터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나보고 빨갱이라고 불렀다. ‘아, 내가 얼마나 빨갱이를 무서워하는데... 반공사상에 익숙한 내게 빨갱이라니...’ 오기가 생겼다. 근로기준법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내게 반말하던 관리자들이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가장 구식버스(똥차)를 배정했다. 이후에도 나는 회사 측에 쉬는 시간, 일한 시간 등을 계산하여 연장수당을 지급하라고 요청했고, 이는 금방 받아들여졌다. 요구하고 싸우면,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배차도 새 차로 해주었다. <작은 책>을 알게 되면서 동료기사들에게 A4 한 장 분량의 소식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이 소식지를 통해 서로 동질감을 느꼈다. 이 종이 한 장이 우리의 모임을 변하게 했다. 만나서 얼굴 맞대고 노동권, 근로기준법 등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예전에 그들은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식지 끝에 한 줄씩 적은 근로기준법 조항에 반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술자리에 가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이런 힘을 갖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더 크게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먹고, 고양시에 ‘버스일터’라는 좀 더 큰 모임을 만들었다. 500부씩 소식지를 매달 발행했다. 그 때부터는 기사들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글에는 사투리도 그대로 쓴다. 버스기사들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모른다. 그 중에 한 명 역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이전에는 글을 어렵게 생각하고, 지식인만 쓰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기사들은 소식지 ‘버스일터’가 언제 나오는지 묻고, 기다렸다. 몰래 후원금을 쥐어줬던 기사들도 있었다. 오늘 수요대화모임 제목이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인데, 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 버스연재 글을 본 사람들은 버스기사들이 왜 파업을 하고 왜 난폭운전을 하는지 이해한다.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알기 때문이다. <작은 책>은 ‘일하는 사람이 보는 책이 없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맨 처음 ‘작은 책’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 받았을 때, 한 달에 250만원 받던 버스회사를 그만두고 100만원 받으며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사실 내가 버스 회사를 나갈 때 사업주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니 얄미웠고,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은 얼마나 또 탄압을 받을지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3개월의 고민 끝에 사업주가 그렇게 고대하던 사표를 냈다. 지금은 <작은 책>에서 편집, 교정, 교열, 영업까지 하고 있다. <작은 책>에 실리는 글은 대부분 생활 글 위주였다. 그러다가 ‘생활 글을 넘어서 알아야할 지식도 분명히 있다.’ 라는 생각에 진보적 지식인들의 글도 싣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렇게... 지금까지 ‘작은 책’이 잘 굴러오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혼자 싸우냐고, 힘들지도 않냐고. 나는 대답했다. “나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여. 내 아들이 커서 버스운전기사가 되겠대. 내 아들이 일하기 편한 직장을 만들려고 하는 거여.” 정리: 임혜민/ 인권연대 자원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 요즘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현안부터 말을 하겠다. 지난 10년 동안 진행된 ‘개혁’ 작업 중에 가장 의미있는 것이 바로 기초생활보장체계의 출범이다. 그저 보호의 대상이던 ‘생활보호대상자’가 ‘수급권자’, 곧 가난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할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중요한 반전이다. 물론 생활보호대상자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수급권자가 되었거나, 사회복지 예산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 사회가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기초생활보장의 지급 체계가 노무현 정권에 의해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다. 임기가 다 끝나가는 정권이 김대중 정부부터 시작된 개혁의 성과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다. 현재의 급여 체계는 이른바 ‘통합형 급여 체계’이다. 수급권자가 되면 주거,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급여를 지급하지만, 수급권자가 아닌 ‘차상위 비수급 빈곤층’의 경우에는 급여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차상위 계층 중에는 일정한 수입이 있어도 수급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거에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 때문에 빈곤의 악순환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급방식을 바꾸자는데 여관이나 여인숙 등에 주거하며 수입의 대부분을 주거비용으로 쓰는 어떤 사람에게 임대주택이 제공된다면, 그는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근거를 가지게 된다. 수급권자가 아니라도 주거, 의료, 교육 등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지원이 필요하고, 지금과 같은 ‘통합’의 방식이 아니라, 지급 방식을 분리(개별급여체계로)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었다. 자활후견기관이나 일부 NGO에서도 이런 주장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의미있는 주장에 대한 정부의 답변은 복지의 확대를 통해 보다 많은 빈곤층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생각하는 개별급여체계는 기초수급권자들에 대한 보장 수준을 낮춤으로써 절감되는 예산을 갖고 비수급권자들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밑돌을 빼서 윗돌을 쌓겠다는 셈이다. 한국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다른 나라보다 선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근로능력이 있어도 실업상태로 빈곤에 처하게 되면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한 달 내내 일했는데도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액수만을 번다면, 그 차액은 국가가 지급해 준다. 이런 급여를 받는 사람들을 ‘조건부 수급자 ’라고 부른다. 조건부 수급자들은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1만명 정도 밖에 안된다. 비수급 차상위 계층이 대략 400만명 정도 된다고 볼 때, 399만명쯤은 배제되는 제도이다. 그렇지만 자활후견사업에 참여한 각 기관, 단체, 대학 등은 자활사업을 통해 ‘자기들만을 위한’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였다. 빈민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도 자활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자기들의 ‘밥그릇’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활기관 종사자들은 수급권자들에게 지급되는 예산을 줄여서라도 자활기관의 사업대상이 되는 비수급권자들을 위한 예산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수급 빈곤층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다면 교육, 주거가 필요하면 주거, 의료가 필요하면 의료 서비스를 더 많이 제공해주고, 수급권자에게는 이전처럼 모든 영역의 생활을 다 보장하겠다는 것이 ‘개별급여체계’의 핵심이라지만, 앞서 밝힌 것처럼 기초보장을 줄여서 ‘아끼는’ 예산을 갖고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치는 그저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수만 늘리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꼼수에 불과 기초생활보장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적인 안전장치이다. 수급권자(受給權者)라는 말은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생소한 표현을 쓴 것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국민은 국가로부터 적정한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확인을 하고자 한 것이다. 최소한의 생활수준은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만약 지금 정부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개별급여체계로 간다면, 이러한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체계의 원칙이 무너진다. 즉, ‘최저생계비 = 선정 기준 = 보장 수준’이라는 기초생활보장의 삼위일체 원칙이 훼손되는 것이다. 수급권자의 수가 줄어들게 되고, 지급받는 급여의 액수가 주는 것은 지금도 부족하기만 급여 지급을 통한 기초생활의 보장이라는 원칙을 훼손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전의 생활보호체제에서는 급여가 시혜였지만 지금의 체계에서는 권리이다. 복지병이 있기는 하나? OECD 가입국 중에서도 가장 부끄러운 수준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가 한국인데도 일부에서는 ‘복지병’이 문제란다.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초수급을 받기 위해 일을 안한다는 거다. 복지병 환자들 때문에 아까운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어선 안되고, 그저 국가의 도움에만 기대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활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논의가 가능하려면 ‘과연 복지병 환자가 있냐?’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복지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유감스럽겠지만, 적어도 한국에는 이른바 복지선진국에 있다는 것과 같은 복지병 환자들은 없다. 기본 제도 자체가 엄격한 기준을 갖고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기초생활보장의 혜택을 받고 있을 뿐이다. 혹시 일부 장애인들이 앞서의 지적에 해당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일자리가 있는데도, 일을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도 게을러서 또는 생활보장으로 받는 급여가 탐나서 일부러 일을 하지 않는 장애인은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고, 장애인 자립생활센터 등에서는 기껏해야 월 6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 굳이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55만원의 급여를 받으면서 의료보험 등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굳이 5만원을 더 받기 위해서 언제 짤릴지 모르는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일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게 복지병에 걸린 장애인의 탓인가, 아니면 실질적 복지를 보장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잘못인가.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근로장려제가 올해부터 도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일을 하는 수급권자들에게는 받은 임금에 대해 그만큼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거다. 이렇게 하면 근로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빨리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누구나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대안이 시행되는데도 복지병 운운하면서, 수급권자들의 급여수준을 낮추려는 정부의 의도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초생활보장법의 입법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 그래도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복지병 환자가 많다면(아니, 있다면) 근로장려제를 시행하여 그 효과를 분석해보고 난 다음에 제도를 바꿀지를 고민해도 늦지 않다. 수급권자들의 급여수준을 낮추면 안된다 나는 그동안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해왔던 인권단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노력해줄 것을 바란다. 자활후견기관 등이 각자의 처지에 따라, 각자의 밥그릇 때문에 원칙에서 한참 벗어난 모습을 보이는 지금과 같은 때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권단체들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기 때문이다. 정리: 임수정/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박홍규/ 영남대 교수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이제껏 투표를 안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부끄러워 어디론가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 대선 하루 전날 아예 외국으로 떠날까 싶기도 하다. 정말로 최악의 대선이다. 대선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이번 대선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고 싶지 않고, 학생들 앞에 서야 하는 선생으로서도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하다. 요즘은 세상에 대한 허무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런 나의 현재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출가는 욕망을 끊어내는 길 그동안 한국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발언도 해 왔지만, 최근 내가 붙들고 있는 화두는 다름 아닌 ‘출가(出家)’다. 단순히 현실로부터 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실존적 상황을 근본적으로 되묻는 것이다. 그렇지만 출가를 비롯한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내가 부처로부터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부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와 속세에서 말하는 출가의 차이가 무엇일까. 흔히 말하듯 출가는 숭고한 것이고 가출은 천박한 것인가. 오랫동안 불교를 공부했는데, 오랜 의문중 하나가 부처의 출가에 대한 것이다. 재가는 속세에서 불교를 믿는 것이고 출가는 속세를 떠나 불교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는 16세에 결혼하고 13년 만에 득남을 하고는 자신의 아들에게 ‘나훌라’(악마를 의미함)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아들과 처자식, 부모님을 버리고 도를 닦기 위해 도망을 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부처의 출가가 숭고한 것인가. 그것이 가족파괴는 아닌가. 그래도 부처의 생애에서 가족의 이야기는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생애에서는 가족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누가 내 가족이냐? 나의 어머니와 형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다.”라고 언급했을 뿐 아니라, “예언자는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사람이다.” 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반가족적인 사람인가 보다. 어찌 보면 예수는 가족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저런 패거리를 만들어 살고 있다. 한국적인 패거리 문화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지만, 내 생각에 해결책은 그냥 혼자 살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패거리하고도 관련 없는 모임을 만들어 거기에만 참여하면 된다. 무슨 무슨 단체 등의 높은 자리 따위는 맡지 않아야 한다. 특히 학계의 패거리는 일반인들의 패거리보다 대처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주, 종을 갈라 얽어두는 패거리들이라서 그렇다.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면 학계에서 자발적인 왕따가 되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패거리의 반대편에 서야 한다. 내가 시골에서 산 지 꽤 오래 되었는데, 이런 것도 패거리에 섞여들고 싶지 않아서 한 선택이었다. 현실에서 설 곳이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인권, 자유, 평등이라는 말도 그렇다. 10년 전만해도 인권이란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요새는 인권, 노동이라는 말이 우습게만 들린다. 전공인 노동법은 전태일 열사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그분은 “노동자 자신의 실천적 자각의 표상”이다. 그분의 희생은 낮은 학력을 가진 분이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권리, 책임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고,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된 방법이 분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밑바닥의 역할을 했었던 노동자 자신이 자각적으로 자기의 권리, 인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고, 그만큼 내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에게 전태일 열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헌법에는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권리란 무엇인가? 오로지 소유권만 권리로 인정되는 사회, 강남에 사는 사람들만의 자유와 권리인 것처럼 여겨진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활동하고 있는데, 나는 ‘국가’와 ‘인권’이 하나의 이름으로 붙어있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국가가 정말 인권을 보장하고 있는가. 지난 10년 동안 민주화가 진행되었다지만, 내가 보기에 그 민주화는 온통 소유한 만큼의 민주화이고, 그만큼의 인권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처럼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인들이 심어놓은 말과 체제가 여전히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자유, 권리, 평등이란 말을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나는 날마다 괴롭다. 그리고 창피하다. 로스쿨은 교육을 돈으로 사는 것일 뿐 이런 상황에서 현재 추진되고 있는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은 나로 하여금 부처의 출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고 싶은데, 요즘 로스쿨을 둘러싼 정부와 대학의 모습을 보면 가히 ‘미친년 널 뛰듯’ 하고 있다. 물론 이 표현을 통해 여성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로스쿨은 한국 대학의 법학교육을 뿌리 채 흔드는 이상한 짓이다. 돈이 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의학, 법학 등의 분야에 전문대학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은 미국을 본 뜬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100년 정도의 역사를 거치면서 드러난 문제점을 많이 보완했다. 그렇다고 우리도 앞으로 100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로스쿨의 설립 취지는 교육다운 교육을 하고, 실례를 통해 살아있는 법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돈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기준에 따르면 1년에 3~4,000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하고, 그보다 낮은 경우에는 로스쿨이 운영될 수 없다. 내가 교단에 서서 3~4,000만 원이나 되는 등록금을 내는, 그럴 능력이 자신에게든 부모에게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소위 잘 나가는 5% 정도의 계층에게나 혜택이 돌아갈 로스쿨을 통해 나머지 95%는 아예 잘 나가는 직업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게 피하기로 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도 로스쿨을 추진하는데, 내가 로스쿨에서 가르칠 자신은 없어서, 법대를 나와 교양과정부로 갔다. 스스로 왕따를 선택했다. 내 식으로 출가를 한 거다. 로스쿨 문제 말고도 노무현 정권의 실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진보라는 이름을 내걸고 나온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 거의 사라져간다. 참담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욕망을 잘라내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 부처가 출가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자리에 대학생들도 있는데, 나처럼 늙으면 희망을 찾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기도 하지만, 20대에는 언제나 희망만 함께하기 마련이다. 희망의 주체인 20대들이 모두 즐겁고 힘차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오늘날의 20대의 희망과 2, 30년 전 20대의 희망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정의, 대의, 사회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희박해지는 반면 자본, 물질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이기적이다. 자신의 욕망과 이해에 충실한 것은 좋다. 현실적으로 사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그런 개인의 사적인 이해를 사회의 공공성과 함께 보는 태도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 정리: 노은미/ 인권연대 자원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4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