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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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지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헌법 제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34조 2항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이제 말하기도 지쳤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꾸로 가는 시계가 언제 제자리로 돌아올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위의 헌법이 과연 대한민국의 헌법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 봅니다. 복지재정 효율화. 증세 없는 복지처럼 두 단어는 어색하기만 합니다. 최근 국무총리실 사회보장위원회는 ‘지방자치단체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비 추진방안’을 의결하고 보건복지부는 곧바로 정비지침을 각 지자체에 통보하였습니다. 2015년이 100일도 남지 않았지만 2016년 각 지자체 예산에 반영될 수 있게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이란 무엇일까요? 비슷하거나 겹치는 것이 있다면 정리하는게 당연하겠죠. 그러나 5,891개의 지자체 자체 사업 중 1,496개의 유사·중복사업 정비목록은 각 지자체 각 분야의 정비계획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걸 보며 ‘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고, 없는 사람 목을 조르는구나!’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업들이 노인·장애인·아동·저소득 계층 등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입니다. 무려 1조원에 달하고 기존 사업들의 대상자만 6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장애인의 예만 몇 가지 들겠습니다. 먼저 장애인 활동지원 시 추가지원 사업은 보건복지부 발굴사업에 들어있습니다. 활동지원제도는 장애인의 일상생활과 사회참여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가가 유급인력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최중증 장애인에게 최대 하루 13시간을 지원합니다. 하루 13시간 지원도 최중증으로 독거 상태여야만 가능한 시간입니다. 이 부족한 시간으로 인해 홀로 남아있던 김주영, 오지석 동지 등이 사망한 사건 이후로 지자체에서는 자체 조례를 통해 24시간을 채워 주었습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처음 4명의 장애인에게 지원해주던 것을 20명까지 늘릴 계획이었으나 이미 보건복지부의 제동으로 10명만 지원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사업도 보건복지부의 지침에 들어있는 통폐합 대상에 들어있습니다. 사회보장사업 정비추진을 반대하며 국회에서 여야 원내대표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져버리고 효율이라는 이름의 예산축소, 복지후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아인들을 위한 자막방송이나, 행사에서 수화통역을 해주시는 분들을 예전보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각 지자체가 지원하는 수화통역센터에서 나오신 분들입니다. 수화통역센터를 통해 더 많은 청각장애인이 일반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일상생활과, 병원, 법원, 학교 등 수화통역사를 파견 받아 사회활동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손말이음센터의 ‘농인영상중계통역서비스’와 유사하다며 예산지원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려고 합니다. 정부는 ‘맞춤형 복지’의 시대로 전환한다고 합니다. 누구 기준의 맞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예산이 적자나는 것에 맞추는 복지 인가요? 당사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중앙정부가 담보해주지 못하기에 지역주민복지를 주 사무로 하는 지자체에서 주민이 뽑은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자치의원들이 조례를 제정하고 합의하여 만든 사회보장 사업을 정부가 무슨 권한으로 통·폐합을 요구하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생각하는 ‘협의’는 ‘합의’ 또는 정부의 ‘동의’입니다. 각 지자체에 검토하라고 했을 뿐 강제한다고 한 적 없다고 하지만, 중앙정부와 협의 없이 진행한 사업비만큼 지방교부세에서 제하고 내려줄 수 있게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통폐합 검토 성과에 따라 지방단체 평가에 반영할 수 있게 한 것이 강요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헌법 34조 1항과 2항을 되새겨봅니다. 사회의 저소득층, 장애인들도 ‘모든’ 인간들이 가지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 사회보장의 효율화가 국가의 의무인 사회보장 증진과는 다른 말이라는 것을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에 어떻게 넣을 수 있을까요! 이 글은 2015년 10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지 4반세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25년 전, 아직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 9월 30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양국 외무장관이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일찍이 1884년 조·러통상조약으로 처음 서로 맺어졌지만,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이후로도 분단과 냉전 등으로 오랜 기간 적국일 수밖에 없었던 양국 역사를 떠올리면, 당시 수교는 거의 100년 만에 맞는 경사였다.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올해 한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많은 행사가 열렸다. 수교일인 지난 9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25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끈 방러 의원단을 포함해, 러시아 상하원 부의장, 정관계, 재계 인사 등 800여 명이 행사에 참석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가 오갔다.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군 ‘유라시아친선특급’, 즉 블라디보스톡에서 베를린까지 14,400km를 19박 20일에 걸쳐 관통하는 평화기원열차대장정의 주요 목적 중 하나도 한·러수교 25주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한·러교류협회, 국제무역연구원, 한국노어노문학회, 한·러오페라단 등 다양한 관련 기관이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나 페스티벌, 전시회를 열었다. 그 중에서 필자에게 확 다가온 것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한·러 미디어아트 전시회 <실재와 가상의 틈>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인 ‘실재와 가상의 틈’은 현실과 허구, 사실과 이미지 사이의 예술적 긴장에 주목하는 팝아트도 의미 있겠지만, 수교 25주년을 맞는 한·러 관계의 실상에도 정확히 대입될 수 있을 거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독특한 시선과 표현방식을 소개하는 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의 ‘실재와 가상의 틈, 한국-러시아 미디어아트의 오늘’전에 소개된 작품들. 레오니트 티시코프의 ‘타이완의 사적인 달’. 경주 우양미술관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 수교 후 25년이 흐르는 동안 한·러 관계는 양적으로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 이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각종 경제 지표들이다. 일례로 한·러간 교역 규모는 1992년 1.9억 달러에서 2014년 258억 달러로 약 135배 증가했다. 한국의 대 러시아 연평균 수출규모는 22.4%, 수입규모는 27.5%씩 성장해, 1990년 수교 당시와 비교할 때 수출은 86배, 수입은 209배 증가했다. 2014년 기준으로 러시아는 한국의 12번째 수출상대국이자 11번째 수입상대국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푸틴의 신동방정책이 만나 그 전진기지가 되는 러시아 극동의 경우, 한국은 러시아 극동의 제1수출국이자 제3수입국으로, 해당 지역 전체 교역액의 약 26%가 한국을 파트너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표들, 기호들 뒤에 숨은 실재는, 실상은 어떠할까? 나아가 4반세기에 걸쳐 교류하며 만들어져 한국에 소통되는 러시아에 대한 기호와 이미지는 그 사실과, 실재와 얼마나 일치할까. 러시아 전문가로서 필자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러시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러시아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를 늘 먼저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식민, 분단, 냉전과 탈냉전의 근현대사를 얼핏 떠올리기만 해도 제정러시아로부터 소련,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등 현 정부의 주요 외교정책도 러시아를 제외한 채로는 실현이 어렵다. 경제적 차원의 의미는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의식 속의 러시아는 여전히 멀고 낯선 외국이고, 매번 새로이 관계의 의미가 해명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파트너다. 러시아에 대한 표상은 사회주의 종주국이자 냉전의 주축이었던 과거의 위압적 모습, 다른 한편으로는 오일 머니로 좀 살만해진, 그러나 몰락한 제국의 이미지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간다. 이 과장된 공포와 부당한 폄하 사이, 그 속 어디에도 진짜 러시아는 없다. 이렇듯 러시아에 대한 정치·경제지리와 심상지리 사이의 간극은 러시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방해하며, 이것이 또 다른 차원의 ‘실재와 가상의 틈’을 만들어낸다. 러시아에 대한 선언적 이해만으로 추진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요란한 팡파레 아래, 실제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리 기업이나 사업가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일례로 현대중공업이 무려 5천만 달러를 들여 2013년 완공한 블라디보스톡의 고압차단기 공장은 한 번도 기계를 돌려보지 못한 채 쭉 멈춰 서 있다. 한국 영농기업인 아그로상생은 농수로 권리를 두고 현지 중국인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 정부와 힘겨운 소송 중이다. 올 여름 필자가 만난 블라디보스톡의 한국기업 지상사 관련자들에게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독려’하는 장밋빛 미래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멍에였다. 수교 25주년을 맞은 한·러 관계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 4반세기에 걸맞은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실재와 가상의 틈, 그 간극이 최소화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실재와 가상, 사실과 이미지의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사실 어떤 것이 실재이고 어떤 것이 이미지인지 명확히 선을 긋는 것조차 힘들다. 또 가상이, 이미지가 실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러 미디어 아트 전시회는 실재와 가상 사이의 그런 유희적 관계,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효과를 타깃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예술이 아니다. 현실에 필요한 건 불가능하더라도 최대한 실재에 다가가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 그런 노력이 많이 요구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다소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모피어스의, 또는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란 말이 떠오른다. 사막일지라도 러시아의 실재에 가닿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글은 2015년 10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7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이자 민족지학자인 알랭 테스타(Alain Testart, 1945∼2013)가 쓴 『불평등의 기원』(이상목 옮김, 학연문화사, 2006)이라는 책을 읽고서, 원시 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생겨나는 경제적인 바탕은 비축과 정주(定住)지만, 그 사회관계에서의 바탕은 권력욕에 입각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처음에 유동의 수렵채집에 의한 경제생활이 이루어지다가 정주의 수렵채집의 경제생활로 변화하면서 불평등이 현저하게 발달하게 된다. 정주의 대표적인 경제방식인 농업목축이 발달된 사회에서 불평등이 현저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테스타는 한 사회 시스템에서 비축의 유무를 사회 분석의 기초로 삼는다. 비축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불평등이 발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맨 먼저 비축이 발달한다는 것은 비축을 잘 할 수 있는 기술 도구의 발달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보다 비축을 위한 도구를 더 잘 많이 갖추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다른 사람에 비해 곡물창고를 완비한 사람은 생산된 곡물을 상대적으로 더 오래도록 저장하여 비축할 수 있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남은 잉여의 곡물을 버리고 떠나거나 다른 집단이 곡물 외의 다른 재화를 갖고 있을 경우 교환하여 처리한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썩기 쉽고 쥐와 같은 다른 동물들에 의해 침식되기 쉬워 오래 가지 못하는 식료보다는 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이를 통한 위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사회의식(社會意識)이 발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분배 방식이 생겨난다. 사냥꾼이 캠프로 운반해 온 잡은 짐승인 식량의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들에게 분배해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잡은 동물이 남는다고 해서 이를 비축하는 기술이나 장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 수렵채집민의 식량 분배를 통해 사회적인 위신을 확보하는 것과는 달리, 정주의 수렵채집 내지는 농업목축의 사회에서 식량 초과분을 내구재로 전환해 개인적으로 영유(領有)한다. 둘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전자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난다. 비축 시스템의 발달은 분배의 관심을 감소시키면서 제어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결핍에 대비한 비축민의 목표는 집단 내부의 다른 구성원과의 연대보다는 저장물의 증대에 초점이 맞춰진다. 대규모 비축이 시작되면서 과거의 공동체적인 식량 분배 규칙은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에 관련된 규범과 그에 따른 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맨 같은 유동민에게 축재나 비축 같은 독점 행위는 항상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비축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면 사회경제적인 의식과 함께 도덕적인 의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친인척 관계나 우정에 기초한 타인과의 공동성보다는 개인적인 생존에 집착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신뢰 대신에 불신이 생겨나고, 아울러 타인들을 불신하게 된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현행적인 노동보다 비축된 저장물에 함께 저장되어 있는 잠정적인 죽은 노동을 중시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주와 비축에 의해 토지 개발에 대한 배타적인 특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비축 시스템은 사회 전반적으로 인구를 증가시키고, 이러한 인구압(人口壓)은 집단 간의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킨다. 집단 간의 분쟁과 투쟁이 일어나면서 이를 해결하는 인물이 지도자로서 부상하면서 정치적인 계급사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착취가 생겨나는데, 그 논리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생산물이 직접 소비되지 않고 비축될 경우, 특히 비축 기술의 발달에 의해 비축물의 보존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더 생산과 소비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생겨나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시간적이면서 사회적인 간격이 생겨난다. 생산물이 비축 장치를 영유하고 있는 비축자에게로 어떤 방식으로건 옮겨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생산자와 생산물의 소유자가 분리되면서 계급사회 특유의 형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비축은 대규모의 부를 언제나 자유로이 점유해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며, 하루의 노동이 아니라 비축한 전 기간의 노동을 일거에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비축 기술에 의거해서 잉여가 부를 형성하게 되고, 이를 통해 생산자들의 소비욕구와 생산기술의 요구를 넘어선 착취를 통해 오히려 비생산자 계급이 생산 시스템을 지배하면서 정치적인 강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유동 수렵채집민은 사회조직의 유연성과 집단분열의 용이함 그리고 유동성으로 인해 관용의 한계를 넘어선 착취를 허용하지 않는다. 피착취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집단은 해체된다. 그리고 집단의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진다. 그와 달리, 정주생활의 조건인 고정적인 구조물과 비축이란 요인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한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떠날 수 없게 되면 착취는 더욱 심화된다. 착취를 더욱 강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주는 정치적 강제가 발달하는 첫 걸음인 것이다. 이상이 테스타가 책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본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는 “비축”이 핵심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발달된 자본주의, 더욱이 최고도로 발달된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축 시스템과 이를 가능케 하는 비축의 핵심 장치는 무엇인가? 비축의 핵심 장치는 화폐이고, 그 비축 시스템은 은행 제도다. 하다못해 이전의 동전이나 지폐는 녹이 슬거나 찢어지거나 또는 화재나 홍수 등에 의해 크게 훼손될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컴퓨터 시스템에 의거한 비가시적인 수 내지는 전자(電子)의 흐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 금융 자본의 발달에서 바탕은 누군가가 앞으로 돈을 벌어 비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의거한 신용이고, 이처럼 미래 시간을 바탕으로 한 신용을 화폐로 바꾸는 데서 금융 자본의 시스템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용을 가늠하는 척도가 문제고, 그 척도를 거머쥐고 있는 계급이 문제다. 그 계급이 사회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평소 정말 궁금하게 여기는 사안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가계 부채가 1200조 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국가의 공공부채도 900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모두 합치면 2000조 원이 넘는다. 여기에다 사기업들이 지고 있는 부채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많은 채무에 대한 채권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권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가 그 많은 돈을 비축할 수 있도록 한 사회 시스템은 과연 무엇이며,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정치적인 불평등에 의거한 권력 관계가 낳는 부작용이 얼마나 어떻게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학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채권자는 결국 국가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나는 믿지 않는다. 혹자는 부채 덕분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사히 굴러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전 세계의 거대 금융 자본가들이 채권자의 일원으로 작동할 것이고, 수없이 많은 주식 투자자들과 예금자들이 채권자의 일원으로 작동할 것이다. 사진 출처 - EBS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채권자가 있으리라 여기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리라 짐작된다. 그 거대 규모의 부채는 특별히 자산가를 채권자로 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일체의 부채와 채권이 은행을 통해 들락거리면서 관리되고 처리된다. ‘지급 준비율’이라는 기묘한 장치가 그 주범이지 싶다. EBS MEDIA 기획 팀에서 출간한 『자본주의』(EBS <자본주의>제작팀 ‧ 정지은 ‧ 고희정 지음, 가나출판사, 2013)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지급준비율이 3.5%일 때, 예금된 5천억 원은 6조 60억 원까지 대출을 가능케 한다(46쪽 참조). 이에 따르면, 우리 모두의 그 거대한 부채의 채권자는 일종의 ‘유령’이다. 그러니까, 5천억의 자산가는 자기도 모르게 6조 60억 원에 이르는 유령의 금융자본을 위한 매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은행에서 이런 자산가를 얼마나 귀하게 모시고자 하겠는가. 결국, 금융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는 ‘유령’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생겨나 확산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기묘한 유령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그 싸움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그래서 비록 조심스럽게나마 ‘유령 사회’라는 말을 제시해 본다. 유령 사회는 죽은 것이 산 자를 지배하는 사회다. 유령 사회를 인간 사회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즉 죽은 노동의 중심이 아니라 산 노동이 중심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산 자들의 생명과 현존 및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가 끊임없이 이미 늘 무덤 속에서 썩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5년 9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9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엇이 진보적인 관점에서 최선, 혹은 최선은 아닐지라도 무엇이 차선인지에 대해 단호하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종종 처하곤 한다. 제한되거나 왜곡되어 제공되는 정보들로 인해 이러한 곤혹스러운 상황은 자주 발생하곤 하는데, 특히 국제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가령,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핵무기 개발 위협이나 테러나 내전으로 인한 대규모 학살 등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강대국들의 물리적 개입은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곤 하며, 우리에게 진보적 관점에서의 지지와 비판, 그리고 반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현장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국제NGO들의 판단이나 주장, 행동에 대해서도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특히 최근에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국제개발협력 NGO들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렇듯 언제나 ‘선’으로 정의되었던 NGO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의가 생겨나고 있는 데에는 다양하고 많은 이유가 있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은커녕 시장자본주의체제를 교정만 할 뿐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의 고전적인 좌파적 비판은 그만두더라도, 거대해진 국제NGO들의 관료주의화나 지역전문성의 약화, 지원 금융의 문제나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경향, 그리고 사변적 관념주의와 뿌리 깊은 서구 중심적 경향에 대해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우려를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제엠네스티의 성매매 비범죄화 결의이다. 그들은 성매매 여성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 중 하나이며, 차별과 폭력과 학대의 위험에 늘 노출돼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들이 겪고 있는 학대와 폭력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성매매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비범죄화(decriminalizing)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의안에서 줄곧 ‘성노동(sex work)’, ‘성노동자(sex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데에서 보이듯 이번 국제엠네스티의 결의의 논리는 격렬한 논쟁의 한 축인 소위 ‘성노동자’론자들의 논리이다. 즉 이들은 성매매가 몸이나 인격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종의 ‘서비스’를 사고파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에는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극단적인 관념과 여타의 서비스와 차이가 없거나 심지어 더 심한 서비스 노동이 더 많다는 극단적인 궤변, 그리고 성인 간의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직업선택의 자유에 속한다는 극단적인 자유시장주의가 깔려 있다. 물론 엠네스티는 성을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어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비범죄화가 된다고 이러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하다. 더욱이 그러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인한 고통은 고려하는 이들이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돈 때문에 성행위를 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성매매 비범죄화’ 불 지핀 국제앰네스티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러나 이들이 성매매의 현실과 현장에 대해 무지하거나 알기를 기피한다는 데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매매가 성판매자와 성구매자 간의 거래인 양 착각하는 이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고용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는 중간 알선업이라는 착취 고리를 애써 간과하고 있다. 서구에서조차 성매매업은 자영업적 형태가 아니라 중간 알선 착취자들의 막대한 이윤 창출의 영역이며, 성매매를 합법화한 국가들에서조차 여전히 이러한 불법 영역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는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인신매매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신매매에는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그냥 표어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전 지구적으로 성매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다르며, 전반적인 여성인권에 대한 상황이 너무 다르다. 극소수의 서구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일반적 여성 인권 수준도 심각한 상황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자발성을 운운하는 것, 대부분의 성매매가 아동을 포함한 10대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구 중심적, 자유시장주의적, 남성성욕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국제엠네스티의 결의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성매매 산업 내의 식민주의와 봉건적 가부장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권력의 본질을 간과하고 가난한 국가 여성들, 일국 내 빈곤층 여성들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것을 직업 선택권 정도로 생각하는 반인권적, 반여성적 논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성적 자유와 성매매를 구별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성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집중하여 ‘할 만한 노동이나 서비스’로 판단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비범죄화로 인한 성매매 산업의 증가나 성매매 종사 여성의 증가 등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성을 성스럽게 여기는 보수적 입장에서 보다 보니 성매매 여성들의 성은 또 더럽게 여기는 것뿐이라며 성매매에 반대하는 사회과학적 논리를 전혀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그런 허황된 입장에서가 아니라, 대다수의 성매매는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며, 여성의 선택권은 없이 돈으로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성행위를 해야 하는 성적 자기 결정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는 성구매자와 성판매자 간의 거래 행위가 아니라 가장 막대한 이윤이 남는 중간 성산업 착취자들의 탐욕적 이윤과 지대의 원천이며, 이러한 산업은 없어질수록 좋은 비공식 경제의 가장 추악한 부분이기도 하다. 노르딕 모델과 같은 대안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린 국제엠네스티의 포주와 성구매자 등 성산업 범죄자들의 인권만을 생각한 반인권적, 반여성적 결정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이 글은 2015년 9월 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87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광복 70주년이다. 대형건물마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동네 아파트에서도 한 달여 가까이 국기를 게양하라고 성화이다.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참여하는 국민 합창단이 공연을 하는가 하면, 급기야 정부는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주겠다고 까지 한다. 메르스 사태로 인한 경기위축을 회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하겠지만, 70년을 맞은 광복절을 통해 이미 희미해져버린 민족주의, 애국심 혹은 국가의식을 되살리려 애쓰는 정부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올바른 민족의식과 무엇보다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투철한 국가 관념을 가져야 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필자는 민족주의나 특히 국가주의가 그렇게 바람직한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냉혹한 국제현실에서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데에는 일부라도 수긍하지 않기 어렵다. 서울시 광복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과거 서울시청으로 사용했던 서울도서관 건물 외관을 한옥으로 단장했다. 서울도서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 청사로 쓰였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최근의 국제정세를 보면서 100여 년 전의 위태로운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세기말 세계는 이미 자국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수탈을 서슴지 않는 제국의 시대로 바뀌었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이 그러한 열강들에 의해 갈갈이 찟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부적으로 여전히 친청과 친일, 친러가 대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이 이 땅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러시아와의 일전도 불사할 조짐을 보이자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고 이를 유럽의 여러 제국과 미국에게 승인받으려 하였다. 말하자면,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었을 터인데, 황제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이를 정면으로 묵살한 사람은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대신 돌아온 것은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조약’이다. 일본이 청에 이어 러시아마저 패퇴시키자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실력지배를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긴 미국이 이를 은밀하게 승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얻는다는 이 밀약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 그리고 마침내 한일합병으로까지 이어졌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총리 아베가 일본의 군대가 해외에서 군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안보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우리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이를 승인하는 21세기 초, 현재의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본이 말하는 군사 활동이 필요한 해외는 어디인가? 미국인가, 유럽인가, 중국인가. 역사적으로 일본은 늘 대륙진출의 야욕을 품어왔고 그 교두보가 되어왔던 곳은 항상 이 땅, 한반도였다. 미국은 어떠한가. 이러한 일본의 욕심을 모를리 없는 미국이 일본의 자위대법 개정을 용인하는 것은 일본과의 경제교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물론 일본을 앞세워 중국의 동진정책, 이른바 동북공정을 제지하겠다는 것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이런 사정을 애써 무시한 채, 우리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국과의 혈맹관계만을 강조한다. 대통령부터 앞장서 미국에 달려가고, 집권당의 대표는 미국 땅에서 참전용사의 무덤에 큰 절을 올린다고 한다. 마치 조선의 대중국정책을 보는 듯 한 이런 일방적인 외교는 그래서 불안하고 편협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수년 전, 요즘 젊은 학생들 가운데는 광복절이 무슨 날인지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노교수의 한탄을 들은 기억이 있다. 딴은 그렇기도 할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생생히 기억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태어나기 50여 년 전의 일을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만으로 가슴에 각인하라는 것은 좀 지나친 요구인 듯도 하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답은 이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은 강제로라도, 주입해서라도, 반복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니면 머리로라도 외우도록,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닫기도 할 것이고, 필요할 때 이를 새롭게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 의미이고, 무엇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인가. 광복절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화문 광장에는 아직도 세월호 가족의 농성천막이 1년이 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불과 1년 수개월 전에 온 국민이 슬픔과 분노에 빠지고 대통령부터 앞장서서 참사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다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 사고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몇 개월을 표류하다가, 조사1과장을 비롯한 핵심보직을 정부의 주장대로 파견 공무원으로 충당하기로 하였음에도 앞으로의 예산을 위원회 요구의 반 토막으로 줄이기로 했다는 지금, 그 아픔과 공포, 분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바쁜 세상, 무엇을 알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것이 남의 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잊어도 되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지혜가, 온 국민에게 지혜가 필요한 광복 70주년이다. 이 글은 2015년 8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15 | 추천: 1
정지영/ 전) 서울DPI 회장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인권교육 요청이 왔습니다. 작년에는 5학년 학생들이 강의를 들었는데 우리를 불러주신 선생님은 올해에는 4학년 수업을 부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인권의 소중함을 좀 더 일찍 알려주는 일이기에 더 반가웠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부탁한 수업의 주제는 장애의 이해입니다. 통합교육으로 장애학생이 한 반에서 같이 수업을 듣기 때문에 학생들이 장애학생을 따돌리거나 놀리지 않고 같은 반 학생으로 잘 지내길 바라는 선생님의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학교의 높으신 분들과 인사를 하기도 하는데 항상 하시는 말씀은 학생들이 모쪼록 이번 교육을 통해 장애인과 같은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는 학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입니다만 저는 항상 ‘인권’을 중심으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인권을 배운다는 것은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사람과 사람간의 예의,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하나 들려드린다면, 초등학교를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은 휠체어를 타는 저를 보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바퀴달린 의자를 타고 달린다고 생각하니 왠지 신날 것 같다나요. 그러나 조금 큰 아이들은 저를 좀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우연히 마주친 초등학생들이 저를 보고 자기들끼리 대화합니다. 앗 장애인이다. 야 그러면 안 돼. 얼마나 힘드신 분들인데 우리가 잘 도와드려야돼. 아이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 어쩐일인지 어른들이 가진 편견까지도 그대로 배웁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니까요. 4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먼저 학생들에게 ‘인권’이 무엇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사람이 가진 권리’라고 답을 합니다. 학교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웠냐고 물으니 배시시 웃습니다. 어차피 외울 거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라고 외우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모든 사람’과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것 찾기 입니다. 저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좀 더 쉽게 찾아냅니다. 눈으로 보이는 다름 뿐 만아니라 좋아하는 운동도, 연예인도, 재미있어하는 과목도 다르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면 서로 같은 점을 이야기 해봅니다. 아이들은 이쯤에서 벌써 서로 다른 모습과 성격, 취향이지만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이해합니다. 휠체어를 타도, 공부를 잘 하거나 못하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키가 크던 작던 사람은 모두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을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권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에 거꾸로 말하면 그 어떤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맞는 그릇이 필요하듯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기 위해선 각자에게 맞는 그릇이 필요한 것인데 여우네 집에는 아직 두루미가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아이들은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생긴다면은요. 제35회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예산중앙초등학교에서는 지난 4월 20~24일을 장애이해 주간으로 정해 '장애! 모습은 다르지만 따뜻한 동행, 함께하는 우리'라는 주제로 신문제작 등의 교내 장애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사진 출처 - 중도일보 제가 처음에 장애인권교육을 시작했을 때 저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었습니다. 차별을 중심으로 얘기하다 보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어른들이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장애인과 어울리기도 전에 미리 혼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방학해도 학원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약자로서의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고 서야 무시당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상을 벌써 알아버린 듯 한 그 눈빛은 마치 장애인의 인권도 소중하다고 열변을 토하던 제게 ‘그러면 저희에게도 권리가 있나요?’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인권이라는 말이 예전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느낌보다 알면 알수록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만큼은 인권을 알고 지키면 서로가 행복하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먼저 알게 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65 | 추천: 0
-한 평의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일생일대 가장 큰 프로젝트인 주택을 구입하고 전면 리모델링에 돌입한 지 두 달째. 우리 부부는 개조하는 면적이 신고에 해당하는 정도여서 리모델링 공사를 건축사무실에 맡기지 않고 직접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여 시공 발주를 했다. 다행히 집 짓는 현장에서 30년 동안 뼈가 굵은 지인이 있어 현장 감독을 맡아 주기로 했다. 38년 된 원래 집의 도면을 그린 뒤 우리 가족이 살기 편한 구조와 공간을 위해 새 도면을 그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기존의 방을 늘리거나 줄여서 새롭게 공간을 재배치하는 구상으로 한 달 여 동안 수첩 한 권 가득 도면을 그리고 또 그렸다. 시공 책임자에게 스케치한 도면을 보여주고 의견을 나누기도 하면서 최종 리모델링 도면이 완성되었다. 그러면서 집을 짓거나 고칠 때 가장 중요한 과정이 바로 공간 배치 혹은 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공간을 어떤 크기로, 집의 어느 지점에 배치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들의 연령대, 취미, 생활 패턴 등을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가족들이 주로 어느 시간대에, 어디에서, 함께 혹은 따로 시간을 보내는지, 가족 구성원들의 성격이나 취향은 어떤지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을 짓는 경우가 아니라 고치는 수준에서는 적절히 타협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생겼다. 어떤 경우는 구조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증축에 해당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공간을 만들지 못하기도 했다. 기성품만 쓰다가 자급자족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공간 배치가 이미 다 되어 있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건축사도 인테리어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두 개 층의 공간 배치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공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아파트 공간 배치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부엌과 거실이 서로 오픈되어 있다는 점인데, 개인적으로 음식을 할 때 발생하는 냄새나 열이 거실을 통해 온 집안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 요리할 때 온전히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부엌은 독립된 공간인 것이 좋다. 거실에서 노는 아이를 틈틈이 부엌에 있으면서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오픈형 거실-부엌이 갖는 장점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부엌은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거실은 부엌의 소음에서 자유로워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자료들을 보면 요즘엔 아파트뿐만 아니라 주택에서도 부엌을 독립된 공간으로 배치하지 않고 거실과 서로 마주보거나 이어지는 형태로 배치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주택의 공간 구성은 평면적인 아파트보다 다채롭다. 꼭 이층집이 아니어도 낮은 다락이나 지하실이 있을 수 있고, 방과 방을 연결하는 짧은 복도가 생길 수도 있고, 하다못해 대문과 현관 사이 좁은 마당이라도 있을 것이다. 이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평면적인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벽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다 해도 왠지 숨을 공간이 없는 것 같다. 구성원 간 갈등이 생기거나 혼자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평면적인 이동으로는 기분이나 감정이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층위가 달라 온전히 몸을 숨길 수 있거나 바깥 공간으로 이동하면 그 꽁무니를 잘라 버리고 뭔가 감정 정리를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한 뼘이라도 마당이 있다면 더 깊고 크게 한숨을 쉬거나 소리라도 한 마디 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집이 좋아(포복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21 참고로 내게 도움을 준 책들을 정리해 둔다. 『주거해부도감』 『주거 인테리어 해부도감』 『공간배치의 방정식』을 읽으면서 어떤 식의 공간배치가 우리 식구들에게 효율적인지, 또 세계적인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한 주거 인테리어에서 얻을 점은 무엇인지를 노트했다. 『집짓기 바이블』은 단독주택을 짓는 사람이라면 책 제목처럼 바이블로 여겨도 좋을, 정말로 꼭 필요한 항목들이 건축주, 건축가, 시공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123명의 집』vol.1과 vol.1.5, 『작은 집이 좋아』는 효율적이면서 창의적인 인테리어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다. 『작은 집이 좋아』는 몇 해 전 처음 읽었을 때 좁은 공간도 인테리어를 통해서 용도에 맞는 멋진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책이다. 이 외에도 여러 책을 참고해서 리모델링 도면을 완성했는데, 책이나 다른 정보들을 많이 접할수록 아이디어는 넘쳐나지만 내 집과 가족 구성원들의 요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 1편 보기 이 글은 2015년 7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08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간혹 민주화 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 정의, 자유, 인권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부조리, 모순, 불의를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절대선의 영역을 넘나드는 분들이다. 이 분들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틈만 나면 빠트리지 않고 하는 말씀도 꼭 있다. “요즘 애들은 정의감이 없어!” 참, 지지리도 못났다. 현실감 없는 꼰대 그대로다. 꼰대들의 면모를 보자. 민주화 운동 경력을 앞세우면서도 우리 편이 저지르는 불의나 부정에는 관대하다. 편 가르기에 충실한 모습이다. 소위 진보세력이 진영논리에 매몰된 순간, 진보는 사라지고 편싸움만 남는다. 이론과 사상만 쫓아 현실은 도외시하고 실현 불가능한 이상만 현실에 투사하여 사회를 읽는 뜬구름 잡기 세상 인식이 판친다.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북한 인권은 의제에 없다. 꼰대들의 세상 보는 눈 때문이다. 인권은 정치적이란다. 그래서 인권을 이야기하는 순간 정치논리에 빠진단다. 북한은 특수한 집단이기에 일반적인 인권이라는 틀에서 접근하면 안 된단다. 혹자는 우리나라 인권도 열악한데 북쪽 인권까지 다룰 정신이 없다고도 한다. 집안부터 고치잔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북한을 특수한 관계에 있는 우리 형제요, 민족이지 외국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보면 북한 인권 문제도 집안 문제일 텐데...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꼰대들이 말하는 정의는 진영논리에 휩싸여 있다. 또 꼰대들이 젊은이들보고 정의감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성내지도 않고 사회를 바꿀 힘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힘들다. 꼰대들 마냥 어영부영 대학 나와도 쉽게 직장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꼰대들은 이들의 마음이 정의감에 불타오를 수 있도록 전의를 북돋아준 적도 없이 욕만 했다. 그림 출처 - 문화일보 그러고 보면, 진보라는 진영에는 꼰대가 너무 많다. 걸핏하면 다른 사람 비판만 하지 자신은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성역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은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숭앙한다. 상대 진영 정치인은 동물로 비하하면서 말이다. 진보연하는 꼰대는 많아도 진정한 진보의 사표가 없는 꼴이다. 숭앙할 것은 내 진영의 정치인이 아니라 올바른 진보적 가치다. 얼마 전 모 진보정당원이 쓴 통렬한 비판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저자는 진보운동가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당신들을 보면 종전된 줄 모르고 저 태평양 외딴 섬에 고립돼서 밤마다 여전히 ‘천황폐하 반자이’를 외치는 일본군 같아요. 사람들의 삶이 LTE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게 언젠데 아직도 모르스 부호야. 짱개집 간판 내걸었으면 하다못해 짜파게티라도 끓여 내와야지. 언제적 군둥내 나는 청국장이에요.” 이 시대 자유, 정의, 진보, 인권을 외치는 이들이 모두 귀 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남 욕하기 전에 나를 한번 돌아보자. 진영에 갇힌 꼰대가 너무 많아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꼰대가 많은 것은 정말이지 국가적 불행이다. 이 글은 2015년 7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41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흔히 정치인이라고 하면 ‘여의도 정치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입법을 책임지고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최근 이른바 ‘유승민 사태’를 보면서, 정치인의 인권은 과연 성립하는가, 성립한다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띠게 되는가, 하는 다소 생뚱맞다고 생각될 수 있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최근 국회의 입법권과 대통령의 시행령 간의 ‘헌법적 지위’를 다툰다는 빌미로 터무니없게도 여당의 원내대표를 희생양으로 하는 여당과 청와대 간에 이전투구의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상식으로는 당연히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이 대통령의 시행령보다 상위의 권위를 지닌 것 같은데, 그게 아닌가? 그래서 헌법을 챙겨보게 되었다. 헌법 제75조에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헌법 제76조의 제①항과 ②항에 전시를 비롯한 아주 긴급한 재난 등의 경우에 대통령이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고 해 놓고서는, 제③항에 “대통령은 제1항과 제2항의 처분 또는 명령을 한 때에는 지체 없이 국회에 보고하여 그 승인을 얻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제④항에는 “만약 제3항의 승인을 얻지 못한 때에는 그 처분 또는 명령은 그때부터 효력을 상실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헌법의 내용을 보면, 적어도 입법권의 권한은 철저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회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입법권에 준하는 대통령령을 발하는 대통령의 권한마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이라는 단서에 따라 행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의 행정권을 발휘하기 위한 시행령을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의 “구체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발하여 시행한 것이 예사였던 모양이다. 이야말로 위헌이 아닌가, 그래서 그 위헌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령이 국회가 제정한 법률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법률을 여야가 합의하여 제정했다. 그런데 그 법률이 현직 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전에 그가 국회의원 시절에 발의한 적이 있는데도, 심지어 대통령의 입장에서 긴급하게 요구된다고 하는 공무원연금법을 포기해도 좋으니 그 법률만은 안 된다는 취지의 내용을 여당 지도부에게 알렸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여야가 합의하여 이른바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그래서 대통령이 국회에 재의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되지도 않는 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그와 같은 여야 합의에 원내사령탑인 유승민 국회의원이 앞장섰으니 여당에 속한 대통령으로서 그런 ‘배신’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내놓고 한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판관들이 어떤 견해들을 가졌는지, 그리고 헌법학 교수들이 어떤 견해들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십 년간 철학에 종사해 온 본인으로서는 이번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이 어째서 위헌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거니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그 유명한 말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만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적반하장의 반(反)헌법적인 대통령의 입장이 우선 문제거니와 그런 반(反)헌법적인 자신의 입장을 거슬렀다고 해서 엄연히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한에 따라 오히려 헌법을 제대로 준수하도록 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고 해서 자신의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을 내세워 원내대표를 압박하여 ‘꼬리를 내리고’ 자진 사퇴를 하도록 강요하는 ‘몽니’를 부리고 있으니, 양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어찌 일단 개탄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건 정치인의 인권을 짓밟는 짓이라고 여겨졌던 것이고, ‘엉뚱하게도’ 과연 정치인의 인권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장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유엔인권선언>의 내용을 들춰 보게 된다. 살펴보니 정치인의 인권에 관련된다 싶은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눈에 띈다.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수치심을 주는 처분 혹은 처벌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 제21조 3항, “인민의 의지는 정부가 갖는 권위의 기초다. 이는 보편 평등한 투표에 의해 행해지는 그리고 비밀 투표 혹은 그에 준하는 자유로운 투표 절차에 의해 실시되는 주기적이고 성실한 선거로 표출되어야 할 것이다.” 제29조 1항,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충분하게 발달시키는 것이 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의무를 갖는다.” 제5조에 따르면, 정치인이라고 해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수치심을 주는 처분 혹은 처벌”을 그 어떤 권력인 또는 권력집단에 의해 강요받아서는 그 인권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만약 이를 무시하는 정치집단이 있다면, 그 정치집단은 반(反)인권적인 집단으로서, 흔히 말하는 조폭 집단이나 파쇼 집단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제29조 1항에 따르면, 정치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충분하게 발달시키는 것이 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의무”를 함부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아니, 정치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바로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최종 최선의 삶의 의미로 삼아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만약 자신의 자유롭고 충분한 인격의 발달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공동체, 즉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롭고 충분한 인격의 발달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특히 정치인의 입장에 선 경우 의무 처음부터 아예 의무 준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들 조항에 따른 정치인의 인권에 대해 토대가 되는 것은 제21조 3항이다. 정부가 갖는 권위, 따라서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갖는 권위는 오로지 인민의 의지에 입각할 경우에만 성립한다. 그런데 그 인민의 의지는 정부나 대통령의 권위뿐만 아니라 국회와 국회의원의 권위에 대해서도 기초가 된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치인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의지가 대표적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정치인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탄압은 당연히 인민의 의지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고 탄압이다. 자신을 통해 표출되는 인민의 의지를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한에 있어서 정치인의 인권은 제대로 설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권을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인간인 한에서 기본적으로 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각종 권리라 생각한다. 그런 우리의 생각은 당연히 옳은 것이고 실천적으로 더욱 굳건하게 발휘되어야 한다. 하지만, 각자는 자신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그 나름의 존재가치를 특수하게 구체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각자가 추구하여 형성해 온 존재가치가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여 형성한 특수한 존재가치들을 훼손하거나 저해하지 않는 한, 각자의 특수한 존재가치는 보호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 진작시켜 나갈 수 있도록 사회나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하물며 정치인이 지닌 특수한 존재가치는 원칙상 더욱 더 그러하다. 정치인은 자기 자신보다는 국가 공동체의 가치와 국가 공동체에 속한 국민들의 가치를 더욱 더 높이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존재가치는 근본적으로 국가 공동체의 존재가치를 향상시키고 발달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한 정치인의 특수한 존재가치를 그 해당 정치인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헌법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렇게 노력했다는 이유로 강압적으로 억압한다거나 자신의 공공을 위한 신념을 버리고 왜곡된 정치권력에 영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함으로써 인격적인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의 인권을 근본적으로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인에게도 인권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특수한 인권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특수한 인권이야말로 국가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의거한 인권이다. 따라서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인권을 내세우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어떤 정치집단의 논리로써도 정치인의 인권을 억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제에 제발 ‘정치공학’ 운운하는, 반(反)인권적인 정치놀음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이 글은 2015년 7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10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지역 분쟁에 대하여 '종교 혹은 종파투쟁이라는 신화 만들기'는 '열강들의 석유•가스 지배권과 무기판매시장 확보'를 위한 투쟁이라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다. 20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은 중동지역 지배를 위한 전략적인 관문 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목하였다. ○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중요성 1946년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가 펴낸 Great Britain and Palestine 1915-1945에 따르면,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은 이라크 키르쿠크로부터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하이파로 이어지는 원유 파이프라인의 출구로서 영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라크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을 때, 최종적인 목적지는 유럽이었으며, 원유 파이프라인은 최소한 선박운송료의 40%이하로 운송비용이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하였다. 이 원유 파이프라인은 이라크 북쪽에 위치한 키르쿠크 유전지대로부터 요르단을 경유하여 팔레스타인 하이파로 연결되었다. 원유가 이 파이프라인을 완전히 통과하는 데는 약 10일 걸렸고, 하이파에 도착한 원유는 하이파 정제소에서 정유되어 탱크에 저장해서 선박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운송되었다. 1934 키르쿠크-하이파·트리폴리 파이프라인 그림 출처 - 필자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이점은 현재 21세기 미국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책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적절한 예로, 2003년 미국은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키르쿠크로부터 이스라엘 하이파로 가는 석유 파이프라인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내놓았다. 2003년 8월 미 국방부의 요구에 따른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조사결과 키르쿠크와 하이파 사이의 직경 42인치 파이프라인의 건설에 1㎞당 40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장관 유세프 파리츠키는 하이파 항구를 이라크 석유의 매력적인 출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을 보호하라: 영국-유대 무장단체(하가나) 동맹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들은 1918년에는 전체 인구의 8%인 56,000명에서 1945년에는 전체 인구의 31%인 553,600명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 동안에 현격하게 증가하였다. 아래 팔레스타인 인구변화 표에서 보듯이, 1918년부터 1947년까지 실시된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인구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팔레스타인 인구변화  특히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이민은 1932년 이후 5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1932년은 영국위임통치지역 이라크에서 요르단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연결되는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된 해다. 이민자 유대인들은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을 아랍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국정부는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과 하이파 정제소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제로 이 파이프라인은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지중해를 통해서 영국군과 미군이 사용하는 연료의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팔레스타인으로의 대량 유대이민을 추진하는 영국정책에 저항하는 아랍대반란 동안(1936-39), 아랍인들의 중요한 공격 목표 중의 하나는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었다. 이에 맞서 오르데 윈게이트 소장이 이끄는 영국-유대 합동특수야경단(1938년 창설)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아랍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이 파이프라인을 보호하고 아랍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결국 5만 명의 영국군대와 1만 5천 명의 유대무장단체 하가나로 구성된 영국-유대 합동 특수야경단이 아랍대반란을 진압하였다. 영국-유대 합동 특수야경단의 한 축을 구성한 유대 무장단체 하가나에 대하여 영국은 이미 공식적으로 불법단체라고 규정한 상태였다. 영국-유대 합동특수야경단의 아랍대반란 진압작전은 매우 무자비했다. 진압작전 과정에서 5천명 이상의 아랍인, 3백 명 이상의 유대인, 262명의 영국인이 사망하였다. 이 진압작전에 대한 포상으로 영국정부는 윈게이트 소장에게 무공훈장을, 그의 부하 장교들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아랍대반란 동안 영국위임통치정부는 외딴 지역의 유대정착촌에도 무기를 분배하였다. 게다가 영국위임통치정부는 하가나에게 박격포와 수류탄 등의 무기제조를 허락한 반면, 무기를 소지한 아랍인에게는 사형을 부과하였다. 1939년 아랍대반란 진압 이후, 하가나는 완전한 규모의 명실상부한 조직과 장비를 갖춘 군대로 발전하였고, 1948년 5월 이스라엘국가 창설과 함께 이스라엘 국가방위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8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