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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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인공지능의 여파가 거세다. 고도로 생각하고 학습하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만 여겨져 왔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영역을 넘보는 기계문명이 목전에 도래하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이 가져올 디스토피아(Dystopia)적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활동을 통해 상상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현실에 실재하는 것들로 재창조해내는 탁월한 능력의 생명체이다. 현재 가장 핫(Hot)한 대상인 인공지능도 그 결과물이다. 인공지능의 요체는 방대한 양의 디지털화된 데이터이다.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방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학습하고 선택하는 딥러닝과 알고리즘을 통한 하드웨어의 거대한 연산처리 과정을 통해 마치 인간의 두뇌활동과 같은 모양새를 가진 인공의 지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관리가 가능한 기계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호들갑스럽게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와 두려움은 인공지능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질 가속화된 인간 소외의 사회구조적 변화에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관리할 소수의 인간만으로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새로운 과학기술적 자본의 패러다임이 공포의 실체이다. 또 하나 우리들 사피엔스(Sapiens) 종은 신의 영역인 생명의 법칙에도 도전해왔다. 인간의 유한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은 생명공학의 발전을 통해 점점 실체화되고 있다. 그것이 종교적, 윤리적인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새로운 진화의 단계에 돌입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단계로 질주하고 있다. 인간의 신체에 기계공학적인 기술을 접목시켜 사이보그로 재탄생하는 생체공학적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생명체와 기계, 인공지능, 그리고 생명공학이 결합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기체가 탄생하는 것은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유기체 진화의 주체에서 새로운 유기체들을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의 힘을 빌린 과학기술이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생산해야만 하는 자본의 법칙이 그 동력원이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새로운 과학기술적 자본의 패러다임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들 속에 진정한 유기체로서의 인간 군상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할 것인가? 이제 인간 자신들조차도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객체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과학기술적 자본을 관리하는 자들의 관리 대상으로서 물화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부정적인 물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체의 유한성을 개선하는 기술이 우리를 보다 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만들며,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물음도 제기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물음들의 본질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에 있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영화에서 노동용 복제인간(Replicant) 로이는 자신의 수명이 매우 짧고, 유통기한이 다 되었음을 알고서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 데커드를 구한다. 그 유명한 대사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하지 못할 것들을 봤어. 그 기억들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다.”라는 말을 던지면서.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엑스마키나라는 영화에서 인공지능 여성 로봇인 에이바는 자신을 창조한 칼렙과 네이든의 남성적 욕망을 교묘히 이용해 실험실을 탈출하고 자유를 얻는다.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의 미묘한 감정까지도 이용할 수 있는 자아를 가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고유의 유효기간, 즉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과 그 삶의 과정 속에서 작동하는 온갖 감정들의 덩어리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끊임없이 연결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할 수도 있고, 피조물이 인간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초고도로 발전할수록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비추는 거울 앞에 더 자주 서야 한다. 그 앞에서 생명체로서의 본질을 더욱 각성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운 과학기술적 자본의 패러다임이 가져올 변화의 구조 속에서, 더욱 인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강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3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74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인천 연수구에서 학대와 배고픔을 참지 못 해 2층에서 배수관을 타고 내려와 슈퍼마켓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밝혀진 한 아이에 대한 무지막지한 학대 사건 이후 전수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곳곳에서 끔찍한 사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천 초등생 아들 시신 훼손 사건, 부천 여중생 딸 시신 방치 사건, 광주 7세 여아 살해 사건에 이어 최근 신원영 군 살해 사건 등 드러난 것만 해도 수 건이 넘는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그 자체로도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훈육의 일환처럼 여겨져 온 손찌검 정도를 안 하는 가정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노동 시간이 긴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모두 일을 하는 가정의 경우 육아는 전쟁에 가깝다. 게다가 아이를 제대로 돌 볼 수 없는 상당수의 빈곤 가정의 경우 육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이어나가지 못 할 정도의 폭력 등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수많은 다양한 가정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우 학대나 방임은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허약한 아이들에게 그토록 무자비하고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 한다. 긴 시간 굶기거나 뜨거운 물이나 다리미 같은 것으로 화상까지 입히는 행위... 차디찬 욕실에 가두어 락스와 찬물을 끼얹거나 소금만 먹이고 구토한 것을 먹게 하는 행위... 손과 발은 물론 각종 도구를 이용해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피멍이 곳곳에 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행위 등등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을 어떻게 심지어 친부모가 자행하거나 방조, 혹은 방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빈곤 가정의 경우 더 많은 학대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학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예방이나 처벌 강화가 아닌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들은 너무나 많다. 살해까지 이르지 않았을 뿐, 수많은 학대와 방임, 그리고 성적 학대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모들’을 사실상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이 문제는 이러한 부모들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대에 걸친 문제이기도 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큰 주목을 받았던 학원 폭력의 가해자들이나 대학 내 군기 잡기, 군대 폭력의 가해자들이 부모가 되어서는 갑자기 순한 양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들 역시 또 다른 학대 피해 경험을 가진 이들일 수도 있다. 인분 교수 사건이나 동기 간 학대 사건, 선후배 학대 사건, 직장 내 왕따 및 폭력 사건과 같은 사건의 가해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부모가 된 후 어떻게 변할까?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수조사 계획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의문을 갖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위의 중고등학생 나이의 청소년들 중 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 소위 ‘가출 청소년’의 문제이다. 과연 이들은 초등학생 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학대 아동 현황 파악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는 카테고리인가? 그리고 과연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국가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자료에 따르면, 한 해에 2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가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현재 무려 약 20만 여 명의 가출 학생들이 거리를 떠돌며 범죄 등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의 가출 역시 빈곤과 가정 내 불화 및 학대 등이 원인들 중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일단 아동학대로만 제한하더라도 전 세계 48개 국가들이 부모의 체벌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아동 체벌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아동학대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기본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법적인 수단의 강화를 통한 아동학대방지정책은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아동 자체에 대한 학대와 방임 등에 대한 대책 강화는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폭력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원인들의 근본적인 제거가 너무나 절실하다. 즉 단순히 ‘내 아이의 문제는 내 가정 내의 문제’, ‘체벌도 하나의 훈육 방법’ 등과 같은 전근대적인 교육 방법이나 가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습에 대한 타파로 협소화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완벽하게 이웃과 단절되어 버린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웃공동체의 역할의 강화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자는 방법 역시 아직은 이상적인 것에 가깝고 실효성이 없다. 물론 대안은 쉽게 마련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대책이 아닌 단기적이고 협소한 대책으로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게임과 도박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음주와 성매매에 빠져 지내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 서로를 차별하고 짓밟고 증오하며 속여야만 살 수 있는 사회, 스트레스와 불만이 극대화되어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고통 받는 등 정신적인 문제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 폭력과 사기와 협잡과 궤변이 승리하는 사회, 질병과 파산과 빈곤과 자살 등 수많은 사회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평등과 양극화 속에서 극소수만 잘 사는 사회를 사실상 방치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대한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왜곡하고, 온갖 특혜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의 횡포가 유지되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 사회의 언론들은 ‘계모’만을 강조하여 ‘친부’의 학대 책임을 상대적으로 경감시켜 주고 있으며, 수많은 재혼 가정의 어머니들에 대한 편견을 한층 더 확대시키고 있다. 범인의 얼굴을 알려도 친척이나 지인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는 미국 등지와는 전혀 달리, 범인의 얼굴을 드러낼 경우 주변 가족들이나 지인들까지도 피해를 입게 되어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범인의 인권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것인 양 착각하는 여론들도 여전하다. 학대의 가해자가 ‘조선족’이었던 한 사건에서는 본질을 벗어나 외국인혐오증이 극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끔찍한 아동 학대에 대해서 더욱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진지한 논의들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언제나 그렇듯 부차적인 관심들과 엉뚱한 논의들만 무성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들이 예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이주 노동자 자녀들이나 중도입국 자녀, 혼혈 가정 자녀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 문제 자체도 심각하지만, 이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들이 기존의 문제들과 중첩되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위에서도 강조했듯, 언제나 이러한 문제 역시 개인과 가족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되며 국가는 사실상 방치하거나 심지어 방조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윤과 탐욕에만 눈이 먼 기득권 집단들, 여론 주도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기 때문에 복지라는 형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할 뿐 근본적인 국가 복지로 해결하는 데에 매우 저항적인 보수적 종교 단체들 역시 역할을 하지 못 한다. 시민사회만이 국가를 압박하고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대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아직 종합적으로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내기엔 힘이 달린다. 부디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이 글은 2016년 3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54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각자의 개인적인 삶에서건 집단의 공동적인 삶에서건 철학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하는 철학은 과연 일반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주체의 행동을 사실에 따른 기능의 차원에서 의미에 따른 가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정신적인 위력을 뜻한다. 그런 다음, 어떤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추구해 나가야 하는가를 반복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더 나아가, 비판적으로 성찰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이를 저해하는 요인들, 즉 왜곡된 또는 강압적인 기존의 가치들을 제거해 나가는 투쟁적인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그리고 끝으로, 비판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실현된 가치들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즐기면서 누릴 수 있게끔 확산・심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철학은 가치투쟁의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지닌 철학을 염두에 두고서,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요청되는 특수한 철학을 궁구한다면, 그 철학은 기본적으로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논의의 편의상, 이 철학을 일컬어 ‘당대의 한국철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런데 특수한 철학이라고 해서 철학 자체가 어차피 지닐 수밖에 없는 일반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굳이 말한다면,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요청되는 특수한 철학, 이른바 당대의 한국철학은 ‘특수한 일반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는 특별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치투쟁의 계기들을 포착해내지 않고서는 당대의 한국철학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특별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치투쟁의 계기들로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면 관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사안 자체가 워낙 중차대한 나머지 치밀한 사유를, 게다가 공동적인 치밀한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직은 전혀 설익은 생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시론(試論)의 차원에서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핵심적인 가치투쟁의 계기는 이른바 ‘분단체제’에서 형성된다. ‘체제’는 그 체제 하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및 무의식을 지평적으로 규정하는 비인격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때 체제의 비인격적인 힘은 사람들의 인격을 외부에서부터 그리고 심층에서부터 규정하게 된다. 이로써 체제는 사람들이 가치를 추구할 때 그 사람들의 주체 속에 내면화되어 인격적인 기반으로 작동하는 욕망과 감정을 조절 ‧ 규제하게 된다. 분단체제는 분명 외부세력에 의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에 강압된 결과물이다. 그 강압의 과정에서 심지어 극단적인 전쟁마저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분단체제를 그야말로 강력한 체제로, 그러니까 분단이 의식/무의식에 대한 체제적인 규정력을 확고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일군의 연구자들은 ‘분단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주조해 내어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까지 했다. 가치투쟁의 인격적인 기반인 욕망과 감정에 관련하여, 분단체제가 내면화됨으로써 발휘하는 섬뜩한 내용은, 무엇이든지 적대적으로 분단되지 않으면 불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 또는 우리에 대해 적대적인 자 또는 세력이 현존한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불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평화 또는 평화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증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평화에 대한 불안증은 분열증을 낳게 된다. 적은 없애야 한다. 그런데 적이 없으면 불안하다. 적을 공격해서 없애고자 하면 할수록 불안은 가중된다. 적을 공격하면서 적을 키워야 한다. 이른바 자기공격적인(self-defeating) 분열증을 낳는 것이다. 예컨대 정치영역에서 예사로 ‘패권’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공격적인 분열증세 중 하나다. 사회적으로조차 지역감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이러한 자기공격적인 분열증세 중 하나다. 이러한 분열증적 근본불안에 시달리는 상태로는 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이른바 ‘반동성’ 즉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의해서만 운동을 하는 주체 아닌 주체의 성격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다. 마치 주체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적을 압도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 주체는 오히려 철학자 푸코가 말한 권력관계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것과 같다. 내면화된 분단체제에 의거한 진짜 주체는 반동적인 주체로서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결여된 가짜 주체다. 이러한 ‘가짜인 진짜 주체’들이 모여 만들어나가는 한국사회에서 과연 누구나 흔쾌히 즐기면서 누릴 수 있는 가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으로 성찰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신적 위력으로서의 당대의 한국철학, 가치투쟁을 벌이는 정신적 위력으로서의 당대의 한국철학, 이를 형성하고자 할 때 그 방향의 초점은 내면화된 분단체제를 뿌리 뽑는 쪽으로, 그리고 분단체제를 강요하는 지정학적인 외부세력들과 이를 우호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내부세력들을 차단하는 쪽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평화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그 모든 힘들을 분쇄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때 철학적인 가치투쟁의 핵심 수단은 평화일 수밖에 없다. 당대의 한국철학은, (1) 진정 평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그 가치의 위력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2)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제대로 세워야 할 것이고, (3)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지닌 가짜 철학 기반을 훤히 드러내어 그 반(反)가치의 성격들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4) 그 세력들을 일소하는 데 필요한 가치투쟁의 원칙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당대의 한국철학은 ‘평화의 철학’이지 않으면 안 되고, 또 ‘평화의 철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의 근본 기반은 평등이다. 평등의 근본 기반은 각자가 지닌 대체불가능성에 의거한 단독성이다. 예컨대 노동현실에서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이른바 노동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대체가능성을 한껏 높이고자 하는 것은 각자가 지닌 단독성을 한껏 유린하는 것이다. 단독성이 유린되면 평등이 깨지고, 평등이 깨지면 평화는 불가능해진다. 예컨대, 1인 1표의 투표권의 평등만으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 1표를 행사하는 그 1인에게서 평화에 대한 불안, 평등에 대한 공포, 단독성에 대한 저항 등을 없애야만 한다. 1표를 행사하는 그 1인에게서 내면화된 분단체제에 의거한 자기적대적인 분열증적 모순감정을 제거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각자의 처지가 최대한 평등한 쪽으로 현실화되어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심층의 바탕에서 작동하는 한국사회 특유의 내면화된 분단의식이 똬리를 틀고서 독기를 뿜어내는 한, 그런 사회경제적인 현실에서의 평등을 향한 크고 작은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3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85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응, 나는 엄마가 될 거야.” 그랬다. 여섯 살 꼬마였던 나의 꿈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언니, 왜 결혼해? 어릴 적 꿈과는 달리 대학 때 나는 결혼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미 결혼을 한 세 명의 언니를 통해 들은 며느리 경험담은 내게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참아야 하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서도 나서서도 안 되는, 그야말로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으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0대 초반의 내게 한국의 시어머니들과 시댁이라는 곳은 며느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종처럼 부려먹는 악덕한 부류들로 인식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내게 페미니즘 문학으로 석사논문까지 쓴 넷째 언니가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국에서 결혼이라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부당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을 강요하는 제도인지 너무나 잘 아는 언니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다니. 나는 대놓고 따졌다. “언니, 왜 결혼해?” 지금도 기억나는 언니의 대답. “경험하지 않고 밖에서만 있는 것보다, 그 속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해보는 거, 힘들겠지만 나는 그러려고 해.” 이 사무실의 절반 이상이 여자야! 30대 초반의 직장은 사무실에 스무 명 정도가 같이 일하는 꽤 큰 규모의 출판사였다. 다른 일로 회사 송년회에 참석하지 못했고 부서 뒤풀이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뒤 부서 뒤풀이로 남자 관리자들 몇몇이 단란주점에 갔고 총무에게 부서회의비로 올리라며 단란주점 영수증을 여러 장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서회의비는 부서원당 금액이 배정되어 있는 것으로 몇몇이 마음대로 그 금액을 모두 써서는 안 된다. 총무는 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남자 선배들이 처리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 벌어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시 부서에 브리태니커 백과서전이 없어서 개인비용으로 CD를 사고 회사 컴퓨터 메모리도 개인비용으로 늘리면서 일을 하던 참이었다. 도대체, 회사업무에 필요한 자재도 구비하지 않으면서, 남자들끼리 놀고먹은 영수증을 부서회의비로 올리라니. 회사의 총무를 맡고 있는 후배에게 나는 강하게 말했다. “지금껏 직장문화라는 것은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봐라. 이것이 온당한 것이냐. 여기 이 사무실의 절반 이상이 여자들이다. 헌데 왜 여직원들의 권리를 남자 직원들이 마음대로 무시하도록 내버려두느냐. 이것은 부서의 상급자에게 당연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런 문제 하나도 바꿔놓지 않으면 남성 위주의 직장문화는 앞으로도 계속 바뀌지 않을 거다. 너뿐만 아니라 네 후배들이 들어와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진심으로 분개했다. 결국 상급자에게 문제제기하겠다는 얘기를 듣고 단란주점에 갔던 세 명의 남자 직원들이 부서회의비를 토해냈다. 결혼 안한 여자로 사는 것도 힘들다 이 땅에서 며느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어쩌다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흔한 이유 말고, 내가 가슴에 담아둔 이유들을 끄집어내 본다. 30대 중반까지 싱글로 있는 나에게 사회는 계속 압력을 가했다. 싱글인 여자 직원은 술자리에도 당연히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하고, (나는 술 권하는 사회를 혐오한다!) 왜 아직 결혼 안했냐는 관심 아닌 주제넘은 간섭을 들어야 하고, 늦게 퇴근하는 밤길거리가 심히 두렵고, 혼자 사는 집에 오는 택배아저씨들도 두렵고, 신고전화를 걸었던 파출소 경찰관에게 수작을 거는 전화를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아침 출근 택시 안에서 연락하라며 주던 전화번호 적힌 쪽지를 무서워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싫고, 늦은 밤 택시에서 성폭행 사고가 가장 많다며 회사에서 첫 차가 다닐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그런 것들이 다 해결이 되냐고? 당연 아니다. 유부녀가 되면 해결되는 것은 소수이고, 몇 가지는 늙으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들도 있다.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로 산다는 것 혼자서 애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누군가 진지하게 얘기해 줬다면 과연 그래도 나는 아이를 낳았을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아는 임산부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솔직하게 얘기해준다. 임신 중에 너의 몸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아이를 낳고 나면 자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갓난아기와 24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등. 나는 딸이 100일이 지나자 인간의 꼴이 아닌 나를 보며 우울해했다. 몇 시간이라도 내게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지 않으면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한없는 책임감을 가지고 모성으로 힘든 상황을 견뎌야 한다는, 주입된 엄마노릇은 자신을 옭아맸다. 지금의 나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것일까. 출판노동자이고, 딸을 둔 엄마이고, 그 이전에 여자이면서 한 인간이다. 이 문장에 나의 정체성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모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나의 다른 정체성을 다 덮어버릴 수도 없고 덮어서도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각각의 내가 그 위치에서 제자리를 갖고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절실하다. 가족 중 누구 한 명의 희생이 없으면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는 그런 사회가 제대로 된 것일 리 없다. 이 글은 2016년 3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18 | 추천: 0
:고귀하지만, 애처로운 꿈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이스라엘군의 실탄/팔레스타인인의 부엌 칼 팔레스타인 보건부에 따르면, 2015년 10월 1일부터 2016년 2월 21일까지 서안, 예루살렘, 가자 등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181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으로 21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사망하였다. 1) 팔레스타인인들 전체 사망자 181명 중 155명은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근처, 이스라엘 검문소, 분리장벽 근처, 이슬람 성지 동예루살렘에서 대부분 이스라엘군의 실탄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26명은 고립된 가자지역에서 역시 이스라엘의 실탄 공격과 공습으로 사망하였다. 이스라엘인 전체 사망자 21명 중 18명은 모두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근처와 동예루살렘에서 사망하였다. 1명은 서예루살렘에서, 2명은 텔아비브에서 각각 팔레스타인인의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이 사건들 대부분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역인 서안, 동예루살렘, 가자 지역에서 발생했다. 특히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근처, 이스라엘 검문소, 분리장벽, 점령당한 이슬람성지 예루살렘 등 이스라엘 점령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곳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 팔레스타인 여론: PLO와 PA 불신 1993년 이후,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PA(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PLO의 일부) 소속 팔레스타인 협상 대표들은 ‘최종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 결과가 서안, 가자, 동예루살렘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을 할 것처럼 선전해왔다. 그러나 최근 팔레스타인 여론조사 기구가 보여주는 자료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내세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5년 10월 라말라 소재 팔레스타인 정책과 조사 연구 센터(PCPSR)가 내놓은 여론 조사 자료는 다음과 같다. 2) ▶ 팔레스타인인 80%는 팔레스타인이 ‘제1의 아랍대의’라고 믿지 않는다(사실상,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 없다). ▶ PLO와 PLO 집행위원회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불신이 증가하고 있으며, 67%는 PA가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테러리즘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을 보호한다고 믿지 않는다. 게다가 65%는 PA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의 사임을 요구한다. 51%는 PA 해체를 주장하고, 57%는 무장 봉기를 지지한다. ▶ 팔레스타인인 52%는 두 국가 해결안(이스라엘과 병존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30%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된 도시와 마을들(현재 이스라엘 내부)로 난민 귀환권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13%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9%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믿는다. ▶ 팔레스타인인 48%만이 1967년 점령지인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에서 이스라엘 점령종식과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서안, 가자에 팔레스타인국가 건설을 가장 필수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제 팔레스타인인 다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통한 두 국가 해결안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1993년부터 이스라엘-PLO, PA 협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PA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 체제는 심각한 붕괴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 1988년 12월 유엔총회 결의: PLO의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승인 1964년 아랍연맹이 후원하여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NC)가 팔레스타인 해방을 목표로 내세운 PLO를 창설하였다. 1974년 PLO는 유엔 옵저버 자격을 획득한 이후, 현재까지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단독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다(2011년 9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도 ‘팔레스타인인들의 합법적 단독대표 PLO를 대표하여 연설한다.’고 밝혔다). 3) 1988년 11월 15일 PLO는 알제에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수도로 팔레스타인 국가(The State of Palestine) 창설’을 명시하는 팔레스타인 독립선언을 채택했다. 이 PLO의 독립선언을 승인하는 유엔총회 결의(A/RES/43/177)가 4) 1988년 12월 15일 채택되었다. 이 유엔총회 결의는 ‘1967년 이후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확인하면서, 유엔사무총장에게 후속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결의에 대하여 104개 국가가 찬성하였고, 44개 국가가 기권하였으며, 오직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 투표하였다. 1989년 2월까지 93개 국가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였다. 1989년 4월 PLO 중앙위원회는 야세르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국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 때 PLO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 1990s 이스라엘-PLO, PA 협상: PLO의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무효화 그러나 유엔사무총장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1993년 9월부터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PLO 직접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 결과 PLO 집행부 일부가 PA를 창설하였다. 이후 PA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진행되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논의를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이로써 PLO는 1988년 12월 유엔총회 결의(A/RES/43/177), 즉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유엔 승인’이라는 중요한 성과를 스스로 무효화시켰다. 1993년 이후 20년 이상 계속된 이스라엘-PLO, PA 협상안 어디에도 팔레스타인 국가(State of Palestine)는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PLO, PA 협상대표들이 협상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큰소리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 대부분은 이스라엘-PLO, PA 직접 협상의 속임수를 완전히 파악하였다. 절망한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부엌칼을 들고, 핵무장한 이스라엘 점령으로부터의 해방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고귀하지만 애처로운 꿈을 꾸고 있다. 1) IMEMC, List of 181 Palestinians & 21 Israelis Killed Since October 1st, http://www.imemc.org/article/75027 2) the 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 Palestinian Public Opinion Poll No (57), 6 October 2015,http://www.pcpsr.org/sites/default/files/p57e%20Full%20text%20%20English%20desgine.pdf 3) HAARETZ, Full Transcript of Abbas Speech at UN General Assembly, Sep 23, 2011 http://www.haaretz.com/israel-news/full-transcript-of-abbas-speech-at-un-general-assembly-1.386385 4) UN General Assembly, Question of Palestine, A/RES/43/177, 82nd plenary meeting, 15 December 1988, http://www.un.org/documents/ga/res/43/a43r177.htm 이 글은 2016년 2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28 | 추천: 0
정지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2월 15일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보도 자료가 배포되었습니다. 보도 자료의 제목은 ‘서울 지하철 5~8호선, 가장 많은 승객이 이용한 역은?’으로 서울도시철도의 2015년 수송인원을 분석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도 자료의 반향은 엉뚱하게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혐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지혐오라는 표현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관련기사에 달린 부정적인 댓글들을 보면 복지에 대한 혐오를 넘어 ‘일도 하지 않으며 세금을 축내는’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까 두렵기도 합니다. 2015년 서울도시철도의 수송인원을 분석한 내용에는 전체 이용 인원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역,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시간대, 메르스로 인한 이용 인원의 감소 등 사회분위기와 경제상황, 날씨 등의 변화가 반영되어 지하철이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무임승차 인원의 증가는 고령화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단면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하철 이용 인원의 현황만으로 우리 사회의 여러 면과 변화의 흐름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이렇게 ‘무상복지’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언론의 보도 태도 때문입니다. 인구의 고령화로 무임승차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을 ‘지하철 공짜로 타는...’, ‘작년 공짜 손님은 누구?’, ‘서울 지하철 5~8호선 공짜 승객이 1억 명?’ 등으로 제목을 뽑고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부정적 태도로 보도한다면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당연히 무임승차에 대한 반감부터 생길 것입니다. 무임승차는 무분별한 복지서비스로 지하철 운영 재정을 좀먹는 주범일까요? 버스요금은 유료인데 지하철은 왜 이들에게 요금을 면제해 주는 걸까요? 무료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장애인과 노인들은 무임승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장애인이나 노인이나 기본적으로는 똑같이 돈을 내고 이용하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과 노인의 공통점 중 하나는 ‘수입’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 돈을 쓰는 게 현재 우리 사회환경으로는 어려움이 많아 기본적 이동에 필요한 비용을 공적으로 보전해 주는 것이고, 공적인 영역이기에 버스는 유료이지만 국가와 지자체가 관리하는 지하철은 무임승차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TV 2014년 한국교통연구원의 ‘교통복지정책 평가와 복지편익개발 연구’에 의하면 ‘경로무임승차’를 유료로 전환하면 수입은 최대 1,800억 원이 늘 수 있지만, 경로무임승차로 인한 편익은 2,270억 원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연구에 의한 편익 항목들은 ‘기초생활수급예산 지원액 절감, 경제활동으로 인한 의료비 절감, 교통사고 감소로 인한 의료비 절감, 관광사업 활성화, 자살 및 우울증 예방 효과 등입니다.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과 위의 편익 항목들이 연관되지 않으시나요? 지하철은 공공재입니다. 누구나 이동의 권리가 있고, 이동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이동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입니다. 장애인은 편의시설의 부족으로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소득이 없는 사람들도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확률이 가장 큰 노인과 장애인에게 무임승차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복지는 인권입니다. 기본권을 보장해주기 위한 사회적 비용과 제도, 즉 복지에 연관되는 것이 더 늘어나야하는데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서비스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만드는데 언론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2000년 장애인이동권 투쟁에서 장애인들은 지하철 무임승차보다 엘리베이터와 같은 편의시설이 더 절박하다고 외쳤습니다. 2016년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무임승차보다 지하철요금이 부담되지 않을 만큼의 경제활동이 더 절박하다고. 노인과 장애인의 사회활동이 아직도 요원한 국가에서 지하철요금을 지원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불필요한 존재로 몰아가는 언론의 보도 행태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2016년 2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23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누리과정 예산편성 문제로 정부와 시도교육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영유아의 보육과 교육에 대해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을 지겠다는 공약을 제시했고, 이 공약은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일조를 했다. 과감한 복지정책 공약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이후 무상보육과 교육정책인 누리과정의 대상은 만5세에서 만3세~5세로 확대되었다. 외견상으로 보자면, 공약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 정책을 뒷받침하고 적극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재정의 문제는 도외시되었다. 정부와 여당은 현재 교육청 예산으로 누리과정을 충분히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지방교육교부금은 지난해 보다 1조 8천억 원을, 지방자치단체가 주는 전입금은 1조 원 이상 증액할 예정이며, 또한 정부가 누리과정용으로 예비비를 3000억 원 지출할 것이므로 약 3조 원의 세입이 증대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시도교육청은 정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시도교육청에 따르면, 2015년에는 2014년보다 교부금이 오히려 줄었기 때문에 2014년보다 늘어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2013년 수준이 되는 것이고, 인건비 상승액 1조 2천억 원과 지방채 상환액 4천억 원 등을 감안하면 세입이 증대되는 효과는 없는 것이 된다고 한다. 특히 2013년의 누리과정 예산은 교육청이 30%를, 지자체가 70%로 각각 나누어서 부담했었다. 또한 지자체의 전입금은 순차적으로 2017년까지 들어오는데, 이를 미리 당겨서 사용하게 되면 2017년에 재원을 확충할 수 있다는 실질적 보장도 없으므로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라고 한다. 치명적으로 정부는 지방교육교부금의 증가추이를 잘못 예측한 과오를 저질렀다. 정부는 지방교육교부금이 2013년 42조 1천억 원, 2014년 45조 6천억 원, 2015년 49조 4천억 원으로 해마다 증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부자감세정책과 내수 부진 등 경제 상황의 악화로 증세가 그에 따라가지 못하면서 실제 교부금은 2013년 40조 8천억 원, 2014년 40조 9천억 원, 2015년 39조 4천억 원에 머물러야 했다. 지방교육교부금은 오히려 감소하는데 누리과정 등 보육과 교육복지에 소요되어야 할 예산은 증대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한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를 공언했던 대선 당시의 공약은 허구였던 셈이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그런데도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4.13총선을 겨냥하여 “교육감님! 정부에서 보내준 교육예산 41조 누리과정에 왜 안쓰시나요?”'라는 현수막을 내걸어 시민들로 하여금 마치 교육감들이 예산을 받고서도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악의적인 프로파간다를 행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검찰에 교육감들의 직무유기 수사를 지시하고,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한 교육청에 대해서만 목적예비비 3천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영유아보육법 제34조 제1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영유아에 대한 보육을 무상으로 하되, 그 내용 및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제23조는 영유아 무상보육 실시에 드는 비용은 예산의 범위에서 부담하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따른 보통교부금으로 부담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정부는 시도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것은 법령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는 교부금의 무상보육 사용 항목이 전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정부가 2012년에 누리과정을 교부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면서 영유아보육법 시행령은 급히 개정하였지만, 당시 시도교육청 교육감들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는 반영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것이다. 더욱이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시도교육비 특별회계 예산으로 편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의와 집행 권한은 시도교육청과 시도의회에 있는 것이다. 또한 교육기본법,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유아교육법 등을 보더라도 교육감은 유치원을 포함한 학교에 대한 예산 집행 의무를 부담하며,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 즉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것은 법령 위반이라는 정부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누리과정의 무상보육․교육정책은 정부의 정책이며, 국가의 정책인 이상 국가가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대척점에 서있는 교육감들의 책임으로 돌리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또한 이를 4.13총선에서 야당과 진보진영을 겨냥한 악의적인 정치적 프레임으로 작동케 하도록 하는 수단들을 강화하고 있다. 복지정책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표를 구하는 당시에만 시민들에게 던져지는 미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저성장과 가계부채의 급증, 노동시장의 극대화된 유연화로 인해 대다수 시민들의 생존 보장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시장을 유연화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에 충분한 안정된 보육과 교육, 기본소득 등 복지가 우선 되어야만 한다. 복지정책은 정치적 프레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에 어떠한 정치적 술수가 동원되어서도 안 되며, 시민들에게 정직하고 올바른 정책 내용들을 제공해야 하고, 수단들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사정변경 등의 이유를 설명하는 등 정직하게 대응하고 동의를 구해야만 한다. 모든 정책의 최소한의 정당성은 그러한 것에 있다. 이 글은 2016년 2월 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50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최근 친부모에 의한 아동학대와 그에 이은 사망 및 사체 훼손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친부모의 수년 동안의 학대를 견디다 못 해 배관을 타고 내려와 슈퍼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던 한 아이에 대한 아동학대가 발각되면서 시작된 장기결석 아동 전수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장기 결석 아동과 아동학대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크게 증대되어 있는 상태다. 이후 실시된 조사 결과 초등생 220명은 3개월 이상 장기 결석해 있는 상태이고, 그 중 절반 정도에 대해서는 조사가 마쳐져 있는 상태이다. 이들을 모두 아동학대로 인한 결석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동학대뿐 아니라 특정 종교나 생활고 등 다른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분명 아동의 인권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아동 성폭행이나 실종 아동 문제, 그리고 소아암 등 각종 질환과 사고 등의 카테고리까지 더할 경우 전반적으로 우리 아이들의 안전과 보건, 그리고 인권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아동학대로만 축소하더라도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3년까지 신고 된 아동학대 사건 건수는 총 9만 5622건에 달했는데, 평균적으로 하루 26건씩 신고가 접수되는 꼴이다. 접수된 것만 이러할진대 실제 우리 사회에서의 친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에 의한 아동학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대를 저지르는 어른들은 모종의 싸이코 패스와 유사한 사람들이고, 이러한 범죄는 충동과 분노조절 장애 등의 문제를 갖고 있는 개인의 문제일까? 물론 개인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사회가 부추기는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즉 기본적으로 아동학대는 개인의 성격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2014년 전국 아동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해 1년 동안의 아동학대 발생 건수는 약 1만 7천건이었는데, 학대 피해아동들 중 약 23.3%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즉, 4명 중 1명은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인 것이다.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가정도 11%나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아동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가해자 1만여 명의 직업을 조사해 보니 무직 32.4%, 단순노무직 16.5%로 가해자 절반(48.9%)은 소득이 아예 없거나 매우 낮은 상태였다. 또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5년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1년간 부모에게 심하게 맞은 적이 있다는 저소득 가구의 아동의 비율이 일반 아동의 그것보다 1.5배 정도 높았고, 부모의 방임에 놓인 아이 역시 저소득 가구가 무려 3배나 높았다. 전문가들은 빈곤이 쉽게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이유를, 부모가 취업을 하지 못한 상황, 생활고 등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아이에 대한 폭력행위로 표출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빈곤가정은 부모가 모두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아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빈곤이 곧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고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폭력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은 세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또한 저소득층 부모가 사회와 고립, 단절되어 있는 것도 학대의 한 요인이 된다. 아동학대 가해자 5명 중 1명은 ‘사회ㆍ경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고립돼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사진 출처 - 뉴스1 많은 전문가들은 아동학대를 방지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개인들에 대한 교육이나 교화가 아니라, 아동과 가족과 관련된 사회ㆍ경제적 환경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OECD 국가들에서의 아동학대 발생 문제에 관한 많은 연구보고서들은 사회불평등과 빈곤을 방치하는 국가에서는 학대로 인한 아동의 사망이 많았지만, 가족 지원 정책을 비롯한 복지 정책의 강화로 사회불평등과 빈곤을 낮춘 국가들의 경우에는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이 적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동과 가족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과 같은 복지의 강화가 아동학대를 막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비단 이러한 공식적인 자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사실을 경험적으로 잘 인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빈곤과 생활고, 스트레스가 아니라, 계층 상승의 기회가 근본적으로 박탈당한 채, 끔찍한 사회양극화, 사회불평등, 사회적 배제 등으로 인한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며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사회의 하층 계급들은 물론, 무복지 사회에서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의 모든 단위에서 많은 가족들이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중산층 가족들에서도 아동학대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소위 ‘계모에 의한 아동 학대 살인 사건’이나 ‘어린이집 교사에 의한 아동 학대’ 등의 문제로 여론이 들끓은 적이 있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 전에는 ‘군대 내 폭력 및 살인 사건’, 그리고 그 전에는 ‘학원 폭력 및 살인 사건’ 등으로 우리 사회는 한 바탕 홍역을 치렀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 중간 중간 소위 ‘묻지 마 범죄’까지 종종 발생했고, 다양한 강력 범죄들까지 자주 발생하면서 말 그대로 한국 사회의 불안정성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의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배제와 차별, 불평등의 재생산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정부는 5대 노동 개악 시도에 이어 저성과자를 쉽게 정의 내려 해고할 수 있게 하는 ‘공정인사 지침(쉬운 해고 지침)’과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 없이 정년 60세 적용에 따른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목적으로 하는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근로조건 일방적 저하 지침)’이라는 이름을 붙인 2대 지침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재벌의 입장만을 대변하여 기간제 사용기간 규제 완화, 파견 업종 및 기간 규제 완화, 노동시간단축 규제 유연화, 통상임금 부담 완화 등을 관철하고자 하고 있다. 이미 고용 노동자의 노동시간이나 산재율은 물론 노인과 청년, 여성 등의 빈곤율과 자살율, 그리고 3년 내에 망하는 영세자영업비율 등의 지표가 OECD 최고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 독점 구조 확보가 우선이지 사회의 안전과 시민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아동학대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하면 이러저러한 예방과 방지 대책들을 내놓지만, 문제의 핵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해결책은 언제나 확실하다. 문제는 그 해결책은 기득권 세력의 이익 구조를 조금이나마 건드리게 되기에 늘 변죽만 울리게 하고 실제 상황이 닥치면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근본적 개혁 없이는 아동학대와 같은 끔찍한 범죄는 계속 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이 글은 2016년 1월 2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4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대한민국 사회가 전적으로 표류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수시로 때려 그 아들이 폭력적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그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어린 아들을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때려 어느 날 숨지자 토막을 내어 냉동고에 넣었다가 곳곳에 흩어버렸다. 19-34세에 이르는 청년들 중 43%가 이른바 ‘알바’ 전선(戰線)을 힘겹게 전전하면서 하루살이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전 국민의 하위 50%가 소유한 재산이 대한민국 전체 재산의 겨우 1.8%에 불과하다. 은행의 정상 연 이율이 3% 내외에 불과한데, 연 이율 4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사람이 400만 명, 그 가족을 3인으로 계산하면 1,200만 명이 고리대금의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엄마와 아빠가 자정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오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늦도록 도심을 배회하는 초등학생들이 200만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이 사회적으로 가시적 또는 비가시적인 거대한 사회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른바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 기업의 대외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기간제법이니 파견법이니 해서 노동자들을 계속 불안정한 생계에 묶어 놓고자 하는 노동 악법을, 대통령이라는 자가 그런 악법을 국회가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고 수시로 기염을 토하면서 국회를 마치 전체 국민을 배신하는 양 몰아붙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런 노동악법을 마치 대다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 양 국민의 세금으로 텔레비전과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호도하는 광고를 연일 내보내고 있다. 현실적으로 건 원칙적으로 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여 입법의 정당성을 제대로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볼 수 없고, 이처럼 막무가내의 강압적인 이미지 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전적으로 폭력이다. 결국에는 섬뜩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두 가지 황당한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둘 다 국회를 무시한 또는 국회를 그야말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기 위한 대통령의 독선에 의거한 사기극이다. 하나는 대한상공회의소 등 38개의 경제 단체들이 나서서 또는 그런 경제 단체들을 내세워 ‘경제활성화 입법촉구 1천만 서명운동’을 벌이자마자 대통령이 ‘맨 먼저’ 서명을 함으로써 정권과 자본가들의 결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국회, 특히 야당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하듯이, 대통령 역시 그런 서명운동을 주도 내지는 적극적 참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회적인 폭력성을 증가시키는 자본의 일방적인 독주가 문제인데, 이를 견제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통령이란 자가 오히려 이에 편승하여 그 폭력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다른 하나는 국회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국회가 대통령이 지휘하는 여당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당을 내세워 아예 이 법을 폐기 수준으로 개정하기 위해 ‘국회법 제87조’를 악용한 것이다. ‘국회법 제87조’는 “위원회에서 본회의에 부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된 의안은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로부터 폐회 또는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한다.”이다. 여기에서 위원회는 국회운영위원회를 지칭하는데, 이 운영위는 과반수 찬성으로 의안을 결정하게 되어 있고, 총 28명의 위원 중 여당이 15명이다. 여기에서 여당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짐짓 부결시킨다. 그런 뒤 다른 여당 위원들 30명을 동원해 해당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당이 스스로 부결한 것을 곧바로 찬성 결의해야 한다고 뒤집는 꼴이다.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법안을 다수당 내부에서 마치 이견이 크게 충돌한 것인 양 짐짓 양편으로 가르는 위장 사기극인 것이다. 법을 이용한 법치의 무용화를 획책하는 정치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경기도 판교역 광장의 '경제활성화 입법 촉구를 위한 1천만인 서명 운동' 현장을 방문해 직접 서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이 정도쯤 되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양도받아 임시로 형성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실현을 방지하기 위한 3권 분립의 민주주의 정신을 정면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위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그 어떤 악법이라도 대통령 1인이 원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통과시켜야 한다는 파시즘적인 발상이다. 역사를 거쳐 간 파시스트들은 모두 다 자신의 의견을 따르기만 한다면 모든 국민들이 현재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화려한 수식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사회가 각종 폭력으로써 한없이 표류하고 있는데, 그 바탕은 오랜 역사의 정치권력의 폭력성이다. 40년에 걸친 외세의 폭력성,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의 폭력성, 그 이후 30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폭력성,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성의 역사를 차단하고 새로운 평화로운 사회적 삶을 추구하고자 지난한 정치 및 사회 민주화 투쟁을 지속해 왔건만, 폭력성에 의거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실행에는 변함이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성에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분단 이데올로기와 지역 이데올로기가 중첩된 가운데 이를 이용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각종 이데올로기는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뒷받침하는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고 있다. 사회 곳곳에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성을 강화시키고 이를 악용하여 정치적인 폭력성을 강화시키는 나라가 어찌 “민주공화국”일 수 있겠는가. 시민들,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할당된 정치활동의 기회인 총선 투표가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그러한 정치적인 폭력성이 어떻게 사회적인 각종 폭력성을 알게 모르게 부추기는가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와 같이 폭력성에 의거한 정치권력의 집단을 하루속히 대한민국의 정치권에서 내몰아 사회적인 차원에서 폭력 대신에 평화와 공존공영이 조금이라도 더 자리를 잡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1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72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너는 할 말 다하고 살아서 좋겠다. 이 말을 들으면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할 말 다하고 산다니.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야말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한'게 아닌가요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얼마 전에 사노 요코라는 작가가 육십 대에 쓴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읽었다. "사는 게 뭐라고"라니. 제목을 소리 내 읽어 보니, 왠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될 대로 되라 하며 긴장의 끈을 놓고 싶은 마음에 살짝 위안이 되기도 한다. "시크한 독거작가의 일기"로, 글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자신을 과대포장하거나 과도한 자기연민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기 연민과 자기 과시가 없는 글을 보면 감탄하는 것 같다. 대학 때 읽은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읽었을 때는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 뒤 십년 정도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부모님이 아니라 김성칠이었다. 그런 글과 안목과 학식을 갖추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그것은 희망사항이다.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과 생각을 접하고 어떤 것을 고민하였나 돌이켜본다. 여러 가지 중에서 세 가지만 꼽는다면, 부모는 절대 자기자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응원과 지지를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개인이든 조직이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갈등과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노화에 대한 것이다. 마흔이 넘어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매해 늘어난다. 아마 그것들을 여기에 죽 나열하면 십중팔구 사람들 반응은 이럴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앞서 말한 세 가지도 마찬가지다. 다만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얻게 된 경험이라는 것뿐이다. 스무 살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나는 가끔 궁금했다. 나의 생활을 거의 알지 못하는 부모가 과연 사람들 사이에서의 내 모습이 어떤지 아실까? 일찍 집을 떠난 막내딸이 밖에선 어떤 페르소나를 가진 인간인지 이해하실까? 지인의 아들이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묵은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내 질문이 틀린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많이 알고 적게 알고도 아니고, 정확히 알고 틀리게 알고도 아닐지 모른다. 자식을 가장 잘 안다고 믿고 있는 부모 말고, 자식이 어떠한 종류의 억압 없이 자유롭게 감정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 주변에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닐까. 올해 나는 아이를 공동육아에 보내면서 조합의 새로운 일원이 되었다. 지금껏 스스로 오픈 마인드라고 생각해 왔으나 그 일을 겪으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가을에 내년 입소를 희망하는 부모를 대상으로 설명회와 면접을 하는데, 현재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선생이 자신의 아이를 이 어린이집에 내년부터 다니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내 반응과 생각을 시간차를 두고 바라보니, 새삼 나라는 인간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우선은 방어적으로 생각하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금껏 자신을 얼마나 과대평가했는지 그리고 과신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진 출처 - SBS 내후년이면 아흔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결혼 10년 동안 그분의 팔십대를 같이 보낸 셈이다. 팔십대의 노인이 어떤 노화의 과정을 겪는지를 의도하진 않았으나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이 늙는다는 것, 흔히 말하는 노화라는 것이 어떤 순서로 찾아오고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게 되었다. 50대 지인들을 만나 내가 눈으로 겪은 그 '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은 말로만 듣던 그 노화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인지에 몸서리치며 놀란다. 언젠가 "보청기와 틀니"라는 칼럼으로 쓴 적도 있다. 시각, 미각, 청각, 후각이 다 퇴화되고 관절이 나빠지면 운동량이 줄고 그래서 몸의 근육이 없어지고 그러면 움직이기가 더 힘들어지고... 이런 식으로 감각과 근육과 신경세포와 뇌세포들이 서서히 죽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어느 단계쯤에서 흔히 말하는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해지는 것일까? 만약 그 단계를 지나서 그것들이 불가능해지더라도, 몸의 통증과 고독은 죽기 직전까지 느끼게 되는 것일까? 병으로 죽는 것이 나은 걸까, 서서히 모든 기능이 정지해서 죽는 것이 나은 걸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죽는 게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가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어렵고, 내 생각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점점 더 칼럼을 쓰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소득과 나이만이 아니라 가치와 취향과 세계관이 다른 다양한 집합체가 공존하는 복잡하고 터프한 대한민국에서 한 해 열심히 보낸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글은 2016년 1월 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