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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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구속노동자후원회]라는 자그마한 인권단체다. 하는 일은 파업투쟁, 노조활동, 정치활동 과정에서 억울하게 구속된 노동자들에게 서신, 책, 영치금 등을 보내며 후원하는 활동을 한다. 올해는 다른 어느 해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아주 바빠 질 때는 대부분 안 좋은 일이 터졌을 때이다. 월평균 30명 내외, 많으면 50명 선에 이르던 구속 노동자 수가 올해 들어 100명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다른 어떤 운동보다 여전히 많은 탄압을 받고 있다는 건 구속노동자 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감옥에 있는 양심수 가운데 70% 가량은 언제나 노동자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양심수가 대폭 줄어들었던 김대중 정권 시기에도 노동자는 892명이나 구속되었고 노무현 정권 들어서는 4년도 안돼 868명이나 구속되었다. “민주화 시대”이후에도 연평균 200~300명씩 꾸준히 구속을 당해 온 것이다. 노동운동에 가해지는 의도적인 탄압은 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고 “국가 안보”를 빌미로 한 “공안정국”으로의 회귀 가능성마저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이 끝나고 포항건설노동자 58명이나 대거 구속되고 난 뒤 어느 날,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오십 대로 추정되는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였는데 우리 단체가 발간하는 소식지를 보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내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말 한마디 할 틈도 주지 않고 마구 퍼부어 대기 시작한다. “뭐 이런 놈들을 석방하라고! 대한민국엔 법도 없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순간 ,우리 사회가 온통 집단 마취에라도 걸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루 종일 우울했었다. 바야흐로 한국에서 노동운동의 위상이 몰라보게 커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70~80년대 학생운동이 가지고 있던 위상을 노동운동이 이어받았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대통령마저도 ‘대기업 노조는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기득권을 포기하라!’며 “대기업 노조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노조를 “사회악” “사회적 약자의 탈을 쓴 폭도”라고 매도하는 언론들도 있다. 정부와 보수언론들의 이런 공격은 노동조합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듯하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면서 군사독재가 자행한 “노조는 빨갱이”라는 식의 참주 선동이 어느 정도 잊혀질 만 했는데, 다시 많은 사람들의 뇌뢰 속에 새로운 편견과 오해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KTX 승무원들이 노동부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발표를 앞두고 마지막 거점으로 잡은 곳은 민주노동당 당사였다. 사진 출처 - 매일노동뉴스 우선 ‘노조의 파업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노동자들의 파업권은 노동자들이 오랜 세월 투쟁을 거쳐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된 기본권인데 파업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계속 심어줌으로써 파업을 탄압하고 규제하는 정부의 정책을 정당화 시켜준다. 물론 파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생산이 중단되고 그로인해 기업의 대주주들이 손해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면 소비여력이 생겨나고 내수 진작에도 도움이 된다. 한국 경제의 어려움이 내수 부진에 따른 투자위축이라고 많이 들 이야기 하는데 그 책임을 노동자들의 파업권 행사에서 찾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인권을 부정하는 발상이다. 경제 불황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지 못하고 사회적 필요보다는 이윤을 좇아 생산하다보니 ‘과잉 생산’은 늘 문제가 된다. 즉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업주들이 시키는 대로 너무 많이 일하다 보니 필요 없는 상품들이 시장에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기업의 이윤은 갈수록 줄어들고 불황은 악순환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대기업 노조는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특권집단이다.’ 노동조합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전부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자기 ‘밥그릇’을 확실하게 챙긴다면 우리 사회 ‘삶의 질’은 확실히 나아질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처럼 약 11% 가량인 소수의 노동자들만 노조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헌법, 노동법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기 위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는 식으로 집요하게 탄압하는, 삼성 같은 생각을 가진 기업주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또한 이들의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면서 어렵게 생존해가는 노동자들이 현실의 장벽을 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소수지만 선두에서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대기업 귀족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전반적인 노동자들의 생활이 향상되거나 더 나빠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대기업 경영자들이 노조에게 양보한 만큼 하청기업을 후려쳐서 결과적으로 하청노동자들이 더욱 어려워진 문제는 대기업 노조가 의도했다기보다는 한국의 잘못된 기업구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문제다. 분명한 건 하청노동자들도 노조를 자유롭게 만들어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만 그들의 현실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하중근 조합원 장례식 날의 모습 사진 출처 - 매일노동뉴스 세 번째 “노조는 사회적 약자의 탈을 쓴 폭도”라는 주장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여름 포항 포스코 점거처럼 과격투쟁을 도맡아 하는 것도 민주노총이고, 지난 5년간 100일 넘게 파업한 장기 분규 사업장 54곳 중 51곳도 민주노총 소속”이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구속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들이 주장하는 “불법”을 저질렀다는 죄목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주장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1500만 노동자 가운데 60% 가량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정상적인 노조 활동을 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법으로는 노조활동이 보장되어 있지만 노조를 만들어도 친목단체 이상의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실질적인 사용자인 원청업주하고는 교섭조차 할 수 없고 생산라인을 끊는 파업을 벌이거나 공장에서 천막치고 농성하다 보면 “업무방해죄” “폭력죄” 등이 성립된다. 지난 9월 30일까지 집계한 2006년 구속노동자 218명 가운데 86%인 187명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사용자들은 법에 어긋난 줄 알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 용역깡패들을 버젓이 투입해서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그래도 그들은 구속되지 않는다. 오로지 일방적으로 얻어맞다가 분에 못 이겨 몇 대 때린 노동자들만 구속당한다. 그래도 “폭력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사용자와 합법적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100만원도 안되는 쥐꼬리만한 전임비를 지급받았다는 것 때문에 “공동공갈범”으로 몰려 구속 기소된 한 건설노조 간부의 편지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 건설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누군가가 얘기 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건설노동자들은 수십 년 동안이나 법의 사각지대에서 사회적 냉대와 목숨을 담보로 한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 누군들 세상을 살면서 빡세게 투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억울하게 당하고만 사니까, 하다하다 안되니까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니까 투쟁하고 투사가 되어지는 것 아닙니까?.....건설 노동자들의 피와 땀은 정치권으로 수천억씩 흘러 들어가고 정치하는 놈들은 그 돈 받아 처먹고 건설 자본가 놈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니까 건설현장이 온갖 부조리와 불법이 판을 쳐도 어떤 놈 하나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건설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법을 까발려 봤자 결국 자기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건설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별거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건설노동자들 등골 좀 이제 그만 빼먹고 건설현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시민들이여, 이제는 그만 노동운동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보자!!
2017-07-11 | hrights | 조회: 249 | 추천: -1
무원칙의 대북정책을 원칙 있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요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살펴보면 무엇이 ‘원칙’이고 무엇이 ‘유연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요즘 개그 유행어처럼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똑바로 해 이것들아~~”와 같은 답답한 심정이다. 물론 대북정책뿐만이 아니다. 서민을 위한 정부라면서 정부 인사의 사교육 감소 정책 발언에 대통령이 나서서 자중하라고 경고하고 있고, 부자감세 등으로 줄어든 세입을 채우기 위해 추경예산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덮어씌우고 있는 현실 또한 답답하다. 여기에서는 최근의 남북관계를 살펴보자. 지난 4월 5일, 북한의 인공위성 로켓 발사 이후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반도 정세는 계속 요동치고 있다. 로켓 발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부 결속 증대와 대미 협상력 강화에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악화된 남북관계 또한 이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모두 인지하듯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는다는 ‘듣보잡’ 구호 아래 대북정책에서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비핵개방3000 대북정책 등장, 무조건 기다리겠다는 엄격한 상호주의 전략, 통일부 폐지 시도, 통일부 내에 외교안보라인 강화 결과는 북한의 대남강경 입장들만 강화시켜줬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의 대남 협상세력보다는 강경세력들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지난 두 달여 동안의 대북정책은 그야말로 무원칙, 감정 대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부는 몇 달 전부터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전면 참여를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내부 진통 등으로 현재까지도 혼선을 빚고 있다. 이렇게 전면 참여를 하지도 않을 바에 왜 그렇게 빨리 발표를 했었는가. 대북 엄포용이었나? 격한 감정을 드러낸 것인가? 혹시 대중들에게 정치적 쇼를 한 것이었나? 또한 최근에는 한 달이 넘게 억류돼 있는 현대아산 직원 신병 처리 문제에서도 물의를 빚고 있다. 보름 전에 유명환 장관이 이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기하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도 행동에 못 옮기고 있다. 주변의 상황을 고려하다보니 일이 더 커져버릴 것 같은 판단 때문이다. 역시 실효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진행한 무원칙, 감정 대응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지난 4월 21일, 22분 만에 끝나버린 남북 당국자 첫 공식 접촉은 북한의 개성공단 특혜조치 전면 재검토로 마무리되었다. 현 남한 정부가 6.15와 10.4선언을 인정하지 않는 만큼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원칙은 사라졌고, 더 이상 특혜를 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통보한 것이다. 개성공단 확대·발전은 경제적 이익을 뛰어넘어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불러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북관계의 뒤틀림 속에서 개성공단 운영마저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이명박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무원칙과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상호 신뢰 회복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즉각적으로 취하는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첫째, 6.15선언과 10.4선언을 이행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지금의 개성공단 문제는 단순히 무상 사용료, 낮은 임금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볼 때는 남한이 서로 약속한 공동선언을 파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한국은 지금 깊이 논의되고 있는 PSI에 전면 참여해서는 안 된다. 이 PSI의 강제차단 행위는 국제법 논란 여지가 있으며, 무기 확산 의혹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으며, 한 국가에 군사적 행동과 경제봉쇄까지 가져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시스템이다. 특히 한국이 PSI에 전면 참여할 경우, 영해상에서 군사적 충돌 위험성이 커지고, 이는 결국 남북 간에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므로 글로벌 차원이 아닌 우리 문제로서의 로컬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 남북이 서로 맞대고 살아가는 운명공동체인 만큼 기존의 남북해운합의서 틀과 PSI의 부분적 참여를 유지하면서 슬기롭게 남북관계를 관리해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미관계의 변화를 주목하여 한국의 실리를 챙기는 적절한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 사실 이번 로켓 발사는 미국 오바마 정부가 대북정책을 검토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 오바마가 조만간 대북정책에 대한 정치적 리더십을 확보할 경우, 대북정책 기조가 비핵화와 비확산인 만큼 북한과 대화와 협상을 펼쳐나갈 것은 분명하다.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간의 끝없는 대화이고, 역사철학자 액튼은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했다. 바로 지금의 남북관계의 답답한 상황을 우리는 어디에선가 경험한 듯하다. 바로 김영삼 정부 시기와 유사하다. 당시 93년 북핵 1차위기 때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했고, 이후 조문 파동 등까지 겹쳐 남북관계는 김영삼 정부 말기까지 노태우 정부보다 더 냉랭해졌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 불협화음을 보였고, 북미 간에 발전된 행보를 멀뚱히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다. 실효성 있는 대응을 내놓기도 전에 원칙 없는 발언과 행동 등으로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벌써부터 오바마 정부와의 대북정책이 삐걱거리며 혼선을 빚어가고 있는 듯싶다. 지난 김영삼 정부의 남북관계 추락이라는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대북정책을 실효성 있는 화해·협력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서 신중한 접근을 통해 한국의 발언력을 계속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요즘 남북관계가 15년 전으로 되돌아갔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만약 개성공단이 이대로 문을 닫아버린다면 남북관계는 30년 전 이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암울한 현실에 놓여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의 경제공동체를 뛰어넘는 통일공동체로의 변화·발전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지난 4월 5일, 이대통령이 “북한은 로켓을 쏘지만 우리는 나무를 심는다.”고 언급하였다. 이렇듯 여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지난 10년 간 남북 화해·협력 정책이 성공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점을 깊이 살피고, 남북관계를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풀어가겠다는 취임사와 같이 지금은 한국의 국익을 생각하여 대북정책을 펼쳐가야 한다. 이 정책이 바로 ‘원칙’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56 | 추천: 0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개인 호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시민단체 회비도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다. 몇 군데 내는 후원금조차도 망설이며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는 자괴감과 동시에 반발심이 생기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배운 얄팍한 모든 것이 동원되면서, 무엇 때문에 사는 지 스스로 점검하게 되는 ‘경지’에 다다른다. 어쩌다 시간을 내서 단체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제대로 못해 미안해하던 마음에서 내가 지지하는 단체는 무엇을 해왔는지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때 마음을 스스로 관찰해 보면 이기적인 속물이 되어 있는 ‘나, 개인회원’을 확인하게 된다. 최고 권력자나 기관을 비판하는 일은 유명한 시민사회단체에서 하는 일이고, 상당히 유명한 시민단체 운동가가 하는 일이라고 미뤄 두었던 일이 이젠 과감하게 ‘내 일이 되는 비약’이 생기게 된다. 자신이 쓴 원고의 글 한 줄도 혹시 정보기관의 감시는 받지 않는 지 자신의 일터나 관계되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는지 숱한 자기검열을 한다. 동시에 망설이던 초라한 자신은 온데간데없고, 배짱 두둑하게 단체 일에 비판도 하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왜 노력이 부족하고 결과는 미미한지 꾸짖어 보는 ‘객기’도 벌이게 된다. 이때가 회원 한사람으로 단체 활동을 가장 빛나는 순간이며, 스스로 역설적인 ‘최고회원’이 되는 때인 것 같다. 지난 4월 17일에 있었던 '4.19 혁명 국가조찬기도회' 모습 사진 출처 - 국민일보 한 단체의 회원인 현직 대통령이 ‘주책’맞은 일을 했다. 지난 4월 17일 ‘4.19 혁명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국가보훈처장을 시켜 대신 읽게 한 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이 북녘 땅에도 함께 임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던 것처럼,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라고 말했다. 이 기도회는 4·19민주혁명회, 4·19혁명희생자 족회, 4·19혁명공로자회 등이 공동 주관하고 4·19선교회가 주최한 행사이다. 기도회를 주관한 3단체는 법률로 정한 국가유공자 단체이다. 반면 기도회의 주최기관은 4.19선교회이다. 이 단체는 지난 84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4.19혁명의 이념을 역사 속에서 선양, 계승하고 정의사회와 국가번영, 조국통일을 위한 사명을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립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한 임의단체이다. 이 대통령은 또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 극복을 칭송하면서 아예 따라 배우자고 제안했다. 올해 초 가자지구를 초토화한 이스라엘의 만행을 알고는 있는가! 남의 땅을 가로채고, 국제법을 어기고,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이들을 따라 배우라니.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4.19와 폭력적 국가주의문화의 상징인 이스라엘을 연결시키는 대통령의 착시와 종교적 맹신이 놀라울 뿐이다. 이 정도면 대통령의 종교관, 정치관, 역사관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것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근무시간에 국가조찬기도회에 나아가 ‘여호수아의 말씀을 깊이 새겨 국정운영에 반영하겠다’고 하여 물의를 빚은바 있다. 대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왜 이렇듯 부적절하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앞세우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이스라엘의 열렬한 추종자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도회에 축사를 한 것 자체도 문제다. 4.19를 기리는 기도회를 하려면 선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조찬기도회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법률로 인정하는 3단체를 주관단체로 내세워 ‘국가’조찬기도회라는 명칭으로 행사를 하였다. 기도회 자체가 마치 국가행사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는 정교분리 위배 혐의가 농후한 행사에 대통령이 가세해 매우 극단적인 종교적 언사를 일삼는 것을 국민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대통령 개인의 신앙은 중요하다. 그러나 제발 대통령이라는 공직의 테두리에 종교를 갖고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왜 신앙고백은 꼭 그렇게 시장이나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앞세워야만 되는 것인가?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난국에 대통령이 다시 이 문제에 불씨를 지피는 발언을 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공무원복무규정과 행동강령이 만들어지고, 문광부에 공직자종교차별신고센터가 설치되고, 국가공무원법·지방공무원법이 개정되어도 종교차별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가 이렇게 대통령부터 정교분리 헌법을 유린하는 것 때문이라는 세간의 지적을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현직 대통령도 한 단체의 회원으로, 한 교회의 신자로 ‘객기’를 부릴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그냥 봐 줄 수 없다. 문제점을 인식한 한 사람부터 스스로 한 단체의 회원으로 더 열심히 회비를 내고 글도 쓰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이명박 회원’도 하는 마당에 더 주저할 필요도 없다. 개인이 속한 단체에서부터 열심히 활동하는 이웃단체까지 스스로 최고의 회원이 되어 일하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회원들끼리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놓고 겨뤄보아야 행복한 세상이 온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95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작년, 이명박 정부는 출범초기부터 무척이나 법과 원칙을 강조해왔다. 집권 2년차인 올해도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촛불을 들었던, 인터넷에 글을 남겼던, 생존권을 주장하는 많은 이들을 법과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꾸준하게 탄압하고 있으니 말이다. 말이 탄압이지 올해 초에는 생존권을 요청하는 철거민들과 경찰 포함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정부는 법과 원칙만을 되풀이했다. 지난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던 유엔인권이사회 주거권 특별보고관 발표 시에 한국의 엔지오들이 용산참사를 언급하며 문제제기를 하였을 때에도 한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반론권을 사용하며 용산참사에 관하여 시위자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경찰의 법집행은 적법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작년에 타올랐던 촛불집회와 관련된 검찰의 약식기소와 불구속 기소가 (현재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만) 이미 600건 가까이 접수되어 진행되고 있고, 10개월 전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고등학생을 경찰이 최근까지 3차례나 경찰서로 불러 조사 하고 있는 모습도 모든 것이 법과 원칙하의 행동이라 한다. 여기에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법과 원칙이라는 옐로카드 앞에선 별다른 저항 없이 수긍하고 그 무게감을 동의하고 있다. 어찌 보면 어릴 때부터 준법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도덕적 중요 덕목으로 여기고 생각해 왔던 우리들에겐 어쩔 수 없는 한계이자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그토록 그들이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적용되고 있을까? 한참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촛불을 탄압할 때 경찰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경찰직무집행법을 준수하였나?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체포하고 연행했을 때 미란다원칙 고지나 현행 형사소송법을 준수하였나?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여 적어도 600명이상의 사람들을 사법처리하면서 집회시의 경찰 폭력에 대해서 피해 받은 다수의 시민들이 제기한 고소고발에 대해서는 사법처리를 진행하고 있는가? 이후에 인터넷상에 글을 써서 유명세를 받은 사람이 정부정책에 반한다하여 사법처리하는 것은 적법하였는가?(최근의 판결로 인하여 미네르바는 무죄를 받았다.) 재미있는 예가 또 있다. 지난 3월 신문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부동산 경기를 회복하기 위해서 다주택자에게 양도소득세 중과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 채 세금을 깎아 주는 행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 하면 여러 채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집을 사고팔 때 내야 하는 세금을 행정부에서 일부러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세금 징수여부는 철저히 법에 의해서 이뤄져야 하는데 부동산 활성화라는 정부정책에서는 법도 그리 중요치 않는가 보다. 사진 출처 - 필자 또 있다. 현재 용산참사 관련하여 재판이 진행 중인데, 변호인단 측에서 검찰의 수사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재판부에 신청을 하였고 재판부는 검찰수사기록 열람 결정을 하였는데도 검찰 측은 열람을 거부하였다. 거부하였을 때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법의 사각을 이용한 것이다. 변호인단 측에서 아무리 주장을 하여도 심지어 재판부의 결정이 있어도 검찰은 그냥 무시한다.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정부와 경찰, 검찰이 무원칙하고, 법률을 어긴 부분은 대단히 많다. 도대체 뭐가 법과 원칙이란 말인지?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다. 약자들에게는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과 가진 자들에게는 탈법과 무원칙을 적용하는 경우는 도대체 어느 나라 법과 원칙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인권의 관점으로 정부가 법 집행을 할 것은 애당초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법과 원칙을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한 바람이지 싶다. 권력의 유지도구로써 사용되는 법과 원칙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34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대통령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홀트 일산요양원에서였다.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19일 요양원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장애아로 구성된 합창단 ‘영혼의 소리로’의 노래를 듣던 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공연이 끝나자 “여러분 노래가 가슴속, 영혼에서 나오는 소리같이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며 “위로하러 왔는데 우리가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애인의 날이었던 20일 우리는 언론에서 ‘이 대통령의 눈물’을 만날 수 있었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거의 대다수의 언론이 일제히 이 대통령의 눈물 사진 또는 영상을 큼지막하게 보여주었다. 이날 눈물에 대한 사연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다. 그 논조도 대부분 ‘감성이 풍부한 이 대통령’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눈물이 반갑지 않은 건 왜일까? 장애아들의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장애인의 날이라는 적절한 시기를 이용해 “쑈”를 한 것에 대해서도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눈물에 감춰진 진실은 좀 따지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장애인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이 정말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 한 보수언론과 낙태에 관한 인터뷰에서 “가령 아이가 세상에 불구로서 태어난다든지, 이런 불가피한 낙태는 용납이 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라고 말한바 있다. 즉, 장애인을 ‘낙태할 수도 있는’ ‘죽여도 되는’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장애를 가진 것은 비정상이기 때문에 제거해도 된다는 천박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이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장애아들의 공연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니 어찌 그 눈물이 진정성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이 대통령의 눈물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들은 ‘악어의 눈물’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은 슬픔이나 참회 때문이 아니다. 종종 자기 입보다 훨씬 큰 덩이를 삼키기도 하는데 그러고 나서 숨을 급하게 들이 쉬면서 눈물샘이 눌리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먹이를 먹을 때 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것’처럼 위선적인 눈물이고 이 대통령의 눈물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19일 홀트일산요양원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장애아로 구성된 합창단 ‘영혼의 소리로’의 노래를 듣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이 대통령은 20일 장애인의 날 행사장에 영상메세지를 보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이 대통령에게 먼저 묻고 싶다. 장애인에 대한 당신의 편견은 정말로 없어진 것입니까? 눈물이 감동적이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눈물이라는 감성으로 접근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장애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들의 피눈물 나는 싸움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전히 장애인은 이동할 자유조차 제약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교육에 있어서의 차별과 배제는 뿌리 깊다. 민간영역에서의 장애인 고용은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다. 방송에서 장애인을 빗댄 개그와 코미디가 아직도 먹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건 그저 비장애인들의 시각일 뿐이다. 정부의 정책은 훨씬 걸음마다. 장애관련 예산을 보자. 이 대통령은 선거 공약에서 장애인 예산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OECD 평균 2.5%의 1/9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또 올해 장애인 예산은 3.6% 상승했지만 이는 물가상승에도 미치지 못해 실제로는 준 것이라고 한다. 장애인 고용은 어떤가. 2008년 공공부문 장애인 의무고용률도 1.76%에 불과해 법적 규정조차 공공연히 어기고 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장애인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축제여야 할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 당사자들은 거리에서 ‘투쟁’을 외치고 길바닥에서 노숙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화려하게 진행된 장애인의 날 행사장에 가지 않고 마로니에 공원에 모여 ‘장애인차별철폐의날’ 행사를 가진 이들이 주장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탈시설-주거권 전면 보장 △장애인차별금지법 무력화 시도 중단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 개악안 철회 △발달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실질적 정책수립 △장애인연금제도 즉각 도입 △활동보조권리 보장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 △장애인교육법 실효성 제고 정책 시행 △장애인 의료보험 및 의료정책제도 개선. 이른바 장애인 생존권 9대 요구안이다. 이런 일들이 어찌 손수건으로 훔칠 정도의 눈물로 해결될 수 있겠는가. 이 대통령이 정말로 장애인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립서비스’나 ‘쑈’가 아니라 정부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져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이 아니라 ‘위로 받을 수 있는 정책’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24 | 추천: 1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올해에는 새로 신입생 1학년을 맡게 되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볼을 하고 아직은 어색한 교복을 입고 부산하게 수업준비를 하고 교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는 것 자체가 교사로서 큰 행복이다. 이 눈망울을 마주대하면서 교사들은 수업이나 교육활동에 대한 최선을 새삼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1학년 신입생들을 지도하는 데에는 어려움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처음’ 이라는 것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넘쳐나는 의욕으로 반짝거리고, 그 모습에 교사들은 힘들지 않게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마다 조금씩 그 느낌이 달라지고 있다. 싱싱하고 보송보송해야 할 우리 새내기 1학년 아이들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모든 선생님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배추 고갱이와도 같은 싱싱함을 지니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아침부터 늘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사들끼리 올해 신입생 아이들에게 ‘절여진 배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수업시간마다 절여진 배추 헹구느라 힘들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많다. 이 지역의 많은 아이들은 입학 전에 이미 엄청난 선행학습을 하고 온다. 수학과목의 경우, 이미 1학년 과정, 또는 2학년과정까지 마치고 고교과정인 ‘수학정석’을 풀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아이들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상 영어사교육 또한 엄청나다. 대학교수준에 해당하는 ‘TEPS’를 공부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며, 더 나아가 아침 7시에 영어 학원 수업을 1시간 듣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다. 학력수준이 제각각인 이런 아이들 40여 명이 앉아 있는 교실에서의 학교수업이 학생들 개개인에게 새롭고 흥미롭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쳐 늘어져 있는 이 아이들과 하루하루 씨름을 하고 있는 우리 교사들도 수업이 끝난 후 뒤통수 개운하게 교실문을 나서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난 달 KBS 추적60분에서 방송한 ‘이래서 사교육이다!’라는 프로그램은 현장교사로서 정말 착잡하다 못해 참담한 기분을 떨칠 수 없게 했다. 일명 ‘스타강사’로 불리우는 대치동 학원가의 강사들과 학부모들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학교현장에서는 열심히 하려는 교사가 왕따 당한다.” “교사들이 다시 열정을 가지고 교육활동을 하면 공교육은 살아날 것이다.” “우리도 공교육이 잘 되길 바란다.” “성과급을 주면 뭐하냐? 1/n로 나눠 갖는데...” “학교에서는 인성교육도 학력신장도 다 제대로 못하고 있다.” 등등. 그리고 한 해 20조원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사교육시장, 거기다 600억 원을 재투자하는 명문학원들, 카이스트졸업생들을 연구원과 비서진으로 10여 명 씩 두고 있는 연봉 수십억의 스타강사들의 모습, 월 평균 한 아이 당 300만 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쓴다는 강남 학부모들의 이야기, 족집게 강의를 받은 서울 강남구, 서초구, 양천구 학생들의 서울대 입학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자료들.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앵커의 클로징 멘트는 학교가 달라져야 한다는 거였다. “입시제도나 정책만 탓할 것이 아니라, 교사들이 스스로 변화해야 공교육이 살아날 수 있을 것” 이라고. 그 방송을 보면서 정말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스타강사나 학부모들의 인터뷰내용에 진정성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웬만한 가정의 한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사교육에 쏟아 부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저지른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10여 명의 연구진을 거느리고 오로지 성적향상만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몇 몇 스타강사의 일상과 하루에도 몇 건 씩 보고해야 하는 공문처리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겸하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학교교사의 일상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어느 교육학자의 말처럼 학력신장을 학교교육의 목표로 삼는다면 공교육이 이미 골리앗이 돼버린 사교육을 이긴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앵커의 주장을 존중해 교사가 현장에서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변화한다고 해도 학원을 따라잡을 순 없다. 차라리 이 정부가 좋아하는 ‘효율’을 따진다면 학부모에게 이중과세하지 말고 차라리 공교육기관인 학교를 모두 없애고, 이 정부가 진리로 믿는 ‘시장의 원리’에 교육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알아서 학부모의 경제력에 맞게 능력껏 학원에서 ‘실력’을 향상시키면 될 일이다. 이 해괴한 우리의 교육현실이 빚어진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경쟁제일주의’라고 봐야 한다. ‘초등학교부터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감이 승인한 국제중을 비롯한 자립형사립고들이 늘어나고, 대학들이 고교를 등급화 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일이 중단되지 않는 한 모든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1등과 꼴찌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수학도 아닌 산수로 풀어도 되는 쉬운 문제 아닌가? 이렇게 쉬운 답을 애써 외면하고 공교육 부실의 원인을 교사들의 탓으로 슬쩍 넘겨버리는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에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추진할 교사평가를 위한 초석을 다지려는 의도는 아닌지 말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차분히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 공교육기관인 학교의 교육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민주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게 한다.’로 기억하고 있다. 이게 잘못된 것이라면 지금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학교교육의 목표를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교사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싶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아이들과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타성에 젖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점검하는 일도 우리 교사들의 몫임은 인정한다. 며칠 전 또 100여 명의 교사들이 ‘진단평가’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일제고사에 ‘불복종선언’을 한 바 있다. 공교육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이 진정이라면, 학교현장에서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교사들의 주장을 ‘불법집단행동’으로만 매도하는 것을 당장 중단하기 바란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15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변호사가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검찰은 피고인이 유죄라는 어떠한 증거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의심’에 입각해 판단해 주십시오.” 잠시 후 판사가 물었다. “배심원단은 일치된 의견에 도달했습니까?” 배심원은 신중하게 하이라이트로 달려간다. “매사추세츠 검찰 대 ㅇㅇㅇ사건은 … 유죄가 아닙니다(Not Guilty).” ‘보스턴 리걸’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 ‘미드’에 완전히 푹 빠졌다. 2004년 처음 시작해 2008년 시즌5까지 이어진 이 길고 긴 드라마는 보스턴에서 최고로 꼽히는 ‘크레인, 풀 & 슈미트’라는 로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모은 법정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백미는 형사사건에 나선 변호사들이 배심원단 앞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며 토해내는 최종변론 장면이다. 특히 주인공 앨런 쇼어 변호사가 피고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달변을 뽐내는 모습에 나도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다. (앨런 쇼어 역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1989년 깐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제임스 스패이더가 열연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앨런 쇼어 변호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항상 강조하는 게 있다. ‘합리적 의심’이다. 시즌3 마지막 회에 보면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형제가 나온다. 앨런 쇼어와 그의 절친한 친구 데니 크레인이 한 명씩 변호를 맡았다. 두 변호사는 서로 상대방이 맡은 피고인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배심원단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결국 검찰이 ‘두 형제’를 공범으로 기소했지만 공범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두 형제는 석방된다. 드라마 한글자막은 언제나 배심원단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번역하지만 실제 배심원단은 결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Not Guilty” 즉, ‘유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유죄가 아니니 피고인을 잡아가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고인을 피고인으로 삼은 경찰과 검찰에 내리는 준엄한 항의다. 결국 피고인이 유죄임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된다. ‘보스턴 리걸’을 보면서 내가 정말 부러워하는 점은 유죄 여부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는 점이다. 만약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거나 ‘합리적 의심’을 풀어주지 못하면? 피고인은 풀려난다. 심지어 기소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면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재판에서 배격한다는 원칙에 따라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 한 변호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피고인이 검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면 이를 입증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한국에선 검찰이 고문하지 않았단 사실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고문을 당했다는 걸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한 소비자운동가가 내게 말해줬다.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정부가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안전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면 위험”이다. 한국에선 “위험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니 안전”이다. 결국 “그거 먹고 죽은 사람 봤냐?”는 거다. 지난 3월18일 법원은 한미FTA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법정 구속된 정창수 전 보좌관에 대해 항소를 기각했다. 그는 2007년 한미FTA와 관련 정부가 중요한 협상 목표로 제시하던 미국의 반덤핑제도 완화 등 무역구제안이 물 건너갔다는 정부문건을 유출했다. 국회 진상조사도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고 법원은 2007년 말 구속영장청구을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9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 조용준 부장판사는 비밀누설에 대해서는 뚜렷한 영향이 없다고 했는데도 항소기각으로 결과가 나왔다.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복역 중인 정창수씨. 사진 출처 - 시사인 나는 검찰에 묻고 싶다. 자신들이 주장한 ‘사전에 협상전략을 노출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는 기소사실을 입증했는가. 설마 협상전략을 노출하는 바람에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나는 법원에 묻고 싶다. 검찰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는가. ‘보스턴 리걸’이 보여준 세계는 “유죄가 아니니 당신은 석방입니다.”라고 외친다. 내 주위에선 지금도 “당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했으니 감옥에 가시오.”라고 소리친다. “닥치고 법질서 지키는 게 좋‘읍’니다.”란 속삭임과 함께.
2017-07-11 | hrights | 조회: 250 | 추천: 0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이거 참 야단인걸...”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음이 괜스레 찜찜하고 부산스럽다. 갓난아기의 살결 같은 봄이 왔다. 미처 환영할 시간도 없이, 봄을 살아야 할 준비도 안했는데 이렇게 봄은 내 앞에 와있다. 지난주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망울들을 볼 때는 환한 기쁨이었다. “반갑고 고맙다.” 겨울이라는 깊은 고요를 견디어 내고 다시 살아낸 생명들에 대한 경이로움에 감동하면서 눈인사를 나누었더랬다. 그렇게 천천히 봄을 음미하며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춘분이 지난 며칠 사이 꽃들은 활짝 피었다. 천천히 다가올 줄 알았는데 왈칵하고 달려든 봄이 못내 야속하다.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낸 온난화의 영향이 자연 조차도 숨 가쁘게 돌아가게 하고 있다. 일찍 서두르느라 얼마나 힘들까. 꽃들 역시 준비 없이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영 어색할 것 같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화작용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재앙을 동반한다. 인간에게는 재앙이지만 자연에게는 생명의 순환이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계절의 변화를 보며 두려움이 드는 까닭이다. 이렇듯 마음이 번잡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한숨이 나왔다. 함께 일하고 있는 아저씨가 묻는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무슨 걱정이 있어?” “아니요... 난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는데 봄이 벌써 왔잖아요. 보세요, 온갖 꽃들이 너무 일찍들 피어나고 있어요. 쟤들도 즐겨야 할 시간이 있을 텐데 너무 일찍 피는 게 안쓰럽고 그래서요.” 아저씨는 웃는다. “이 사람아 준비는 벌써 했어야지. 암튼 날씨도 미친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끝을 흐리시며 아저씨는 한 말씀 더 얹어놓으신다. “일찌감치 준비해둬. 조금 있으면 여름이야 허허허.” 땅을 밟고 앉아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내린 비로 복수화와 미선나무의 꽃잎들이 꽤 저물어 있었다. 촘촘히 빗물을 머금고 있는 풀들과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순환하는데 인간의 탐욕은 변함이 없다.”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물러앉았다.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너의 신발을 벗어라. 그래야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겠다.” 미선나무의 곷잎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러고 보니 나는 흙을 밟고 있었다. 막 피어나고 있는 풀들로 가득한 흙. “아 이것이 생명이구나. 어느 것 하나 생명 아닌 게 없는 세상이구나.” 뭇 생명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흙 한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 텐데 나는 종종 잊고는 한다. 편리함과 무지의 탈을 쓴 이기심 따위들로 인해 말이다. 신발을 벗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신세라니... “그렇구나! 봄을 맞이할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구나.” 봄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왔지만 나는 생명의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 마음은 겨울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파헤치고 덧씌우고 짓누르고 불태우는 건설과 파괴의 시절이다. 건설과 파괴는 자본이 아니라 자연의 몫이어야 한다. 피의자의 얼굴로 권력의 실체를 가리는 파렴치한 시절. 권력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전토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은 노상강도와 같다. 청와대 비서관과 대법관이 전자우편으로 헌법과 법을 유린하는 대한민국이다. 이 웃지 못 할 상황에서 나는 매우 똑똑한 총리에게 영어 단어를 배웠다. 전자우편은 e-mail이다. 젠장! 생명들이 스러지고 유린당하는 곳에서 내 마음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시시각각 꽃들은 피어나고 나무는 푸르러질 터인데 말이다. 잠시 눈을 감는다. 세상근심에 마음을 빼앗긴 내가 스승과 함께 걷고 있음이다. 순간 스승이 뒤돌아 가시며 처음 머물렀던 자리로 향한다. 나는 놀라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흐르는 곳이 네가 머물러야 할 자리이다” “흐르는 곳에 머무름은 무엇입니까?” “지금 있는 그 자리가 흐름이며 머무름이야. 들꽃들과 나무들의 변화는 있는 그 자리에서의 흐름이며 또한 머무름이다. 그럴 때에 꽃들은 피어나고 열매는 맺어지는 것이지.” “아...” “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네 자리에서 흐르며 또한 머물러라. 깨어 있는 꽃들은 제아무리 혹독한 겨울을 겪어도 피어낼 줄 안다.” 눈을 떠보니 여린 풀잎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머무는 자리에서 바람과 함께 흐르고 있음이다. “그래 그렇지.” 고개 주억거리며 마음이 스르르 눈 뜨는 순간이다. 그렇다 봄이다. 이제야 온전히 봄을 환영한다. 꽃은 피어야 한다. 아직 피지 않은 나는 다만 깨어있기를 바랄뿐이다. 피어라 꽃이여 피어라 생명이여!
2017-07-11 | hrights | 조회: 243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3월, 개강이다. 이번 학기 일탈과 범죄와 관련된 수업을 하나 듣게 됐다. 첫 시간, 교수님은 수업 이해를 위해 영상물 하나를 보여 주셨다. 청소년 범죄에 관한 내용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원인 분석이나 조사를 잘 해서 상당히 잘 만든 보도물이라고. 처음엔 어린 아이들이 절도와 폭행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걸 보고 청소년들을 그냥 저렇게 방치해도 되나 싶었다. 최근 여중생이 친구를 사정없이 폭행하는 영상이 떴을 때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충격적이었다. 국가의 미래, 희망이라 일컬어지는 청소년이라는 사회 내 특수한 위치가 있는지라, 청소년 범죄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다뤄진다. 나 역시 그렇게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사례를 보여주고는 그 원인은 가정환경이라며 파고 들어가는 패턴을 느끼면서부터였다. 모든 건 가정환경의 탓이었다. 물론 사례로 나오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은 다 불우했다. 가난하고 부모님이 이혼했다든가 자주 싸웠다든가. 어쨌든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마치 그게 사실의 전부인 양, 가정만 화목하면 청소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의심할 만하다. 영상을 보면, 아이에게 열린 질문은 하진 않는다. 질문은 이미 '가정문제'로 앞서 나가 있고 카메라는 벌써 그 아이의 가정사를 훑고 있다. 이때 정부의 역할은 그저 부모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상담하거나 교육하기를 요구받는 데 그칠 뿐이다. 비단 청소년 범죄의 원인에만 가정환경을 헤집고 들어가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사회적 범죄가 일어나도, 늘 그 사람의 가정환경부터 파헤치기 일쑤다. 오히려 사람들은 범죄자에게 불우한 가정환경이 있어야지만 안심하지 않는가.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회 전체에 폭력이 난무하는데 가정 내에서 폭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 폭력에 노출돼 있다면 꼭 청소년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정신이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정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자꾸만 폭력과 가난에 노출되는 가정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특히 청소년 문제를 곧바로 가정불화와 연관 짓는 문제의식의 틀이 그토록 불편한 걸까. 나는 더듬더듬 내 불편함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개인의 불행한 원인을 가족에서 줄곧 찾는다. 외부에서도 그렇게 규정하고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가족은 잘 보호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힘을 받는다. 가족의 임무는 막강해진다. 재생산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지면서 말이다. 과연 가족이 작동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가족은 이러해야 한다는 환상은 계속 주입되고, 그 환상은 현실과 이상과의 틈을 자꾸 벌여서 개인의 행불행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정상적인 가족의 모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성원 역시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만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1순위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짐처럼 여겨지는 걸까. 솔직 하자. 나는 그렇다. 사회의 모든 질서와 도덕의 결정체인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늘 싸워야 한다. 수긍하지 않기 위해서. 물론 개개인과의 애정은 별도다. 그것과 별개로 '가족'이라는 것은 내게 짐이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때의 그 행복의 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구호만으로 어떻게 가족 구성원의 행복이 가능할까.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늘 구분해서 나누는 것도 내겐 늘 목에 가시와 같다. 청소년은 늘 보호의 대상이다. 청소년은 판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성숙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많은 정책들이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앞세운다. 영화 심의등급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 존재 이유는 청소년 관람불가와 전체 이용가를 나누기 위함이다. 청소년이 봐도 되는가 보면 안 되는가를 말이다. 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친다고 해도 청소년에게 의사를 물어보진 않는다. 그나마 부모님께 동의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임무가 청소년들을 더 나약하게 만든다. 청소년이라는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보호가 명분이 되어 청소년이 가족에 의존하고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에 그저 따르는 것이 과연 당연한 걸까? 청소년을 무조건 가정 안에 밀어 넣고 그 안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요하는 게 뭐 그리 범죄 예방에 효과 있을까.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저 범죄를 막기 위한 범죄 예방이 얼마나 대단하게 청소년들을 '희망'으로 꽃피울 수 있을까. 나는 기차에 내려 서울역 밖으로 나설 때마다 ‘청소년은 한국의 미래입니다’ 라는 커다란 글귀를 본다. 갸우뚱해진다. 이걸 추구하는 사회의 방식에 대해. 비단 청소년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늘 어떤 희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할 뿐 행복의 구성을 고민하는 일은 늘 뒷전이다. 누군가의 진짜 희망이고 진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을 사유해야 하지만, 늘 쫓기듯 오늘도 고단해 하며 달릴 뿐이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범죄 예방.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섣불리 책임전가하지 않고 차근차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는 건 다들 비슷할 테니 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38 | 추천: 1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이명박 정부 집권 후 1년이 지났다. 축하하는 자리보다 성토하는 자리가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1년이 꼭 100년 같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정부가 지난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고, 모든 것을 바꿔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 양상을 살펴보니, 대통령이 항상 서두에 말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갖고 있는 자, 더 많은 땅과 돈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바로 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불행은 권력, 땅, 돈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복지, 교육, 노동, 인권, 환경 등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민주적 권리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짓밟혔고, 무참히 꺾였다. 현재진행형이다.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럽다. 이제는 ‘대의적 권력집중주의’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최근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는 우리를 초대하기는커녕 발로 걷어차고 있는 현실이다. 정책을 집행하다보면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계획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그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여 정책을 새로 짜고, 집행하면 된다. 왜냐하면 정부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는 오히려 잘못으로 드러난 정책을 강화시키려고, 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입과 생각을 막고, 죽음으로 내몰고, 실제로 죽이고 있다. 교육 정책만 봐도 그렇다. 대학입시 자율화, 일제고사, 영어몰입교육 등으로부터 나온 1년 동안의 결과는 처절하다. 사교육비 절반, 반값 등록금 정책과는 다르게 2008년도에 사교육비가 무려 23%가 뛰어 올랐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가계 지출이 줄었음에도 사교육비 만큼은 폭등했다. 여기에 정부 학자금대출 연체율은 점점 더 올라가고만 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불도저 밀어붙이기식으로 정책 고수, 강화만을 부르짖고 있다. 정책 결과에 대한 반성이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은 지난 2월 25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부근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청소년단체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모임 세이노(Say-no)'가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의 일제고사 부활과 무한경쟁교육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1년 만에 20여 년간 쌓아왔던 남북 간 신뢰가 다 무너졌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유신정권 때보다도 못하게 모든 교류가 다 끊겼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까지도 운운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는 교육정책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인한 결과다. 6.15 및 10.4 선언 불이행, 비핵개방3000, 통일부 수장에 냉전적 사고방식을 지닌 외교안보전문가 등장,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엄격한 상호주의 등의 정책이 지금의 불행을 가져왔다. 입으로는 ‘상생과 공영’을 얘기하지만, 결국 지금의 한반도는 ‘상극과 공멸’로 가고 있다. 여전히 반성이 없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념 없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군대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어떠한 일을 잘못 처리하고, 잘못 생각할 때 사용하곤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일반적인 지식 및 보편적인 관념이 부족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009년 계획을 세울 때 전년도인 2008년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린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새로운 계획을 짠다. 바로 이것이 ‘기본적인 개념’일 것이다. 하물며 정부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는 만큼 더욱 냉정하고 면밀하게 지난 성과와 과오를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집단에게 탄압을 가하고 있다. 정부가 한 개인보다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기본적인 개념’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잘못된 정책으로 드러난 2008년 정책을 2009년도에도 들이밀고 있다. 여전히 ‘존경하는 국민’과는 소통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아예 언론을 시작으로 해서 미리미리 다 틀어막으려고 한다. 사법부까지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반성도 안 한다. 엄마한테 회초리를 맞는 아이보다도 못하게, 국민의 회초리를 꺾어버리고 있다. 현 정부에게는 냉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2008년의 잘못을 세계 경기 불황 탓으로만 돌리는 짓은 멈춰야 한다. 그리고 2009년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게, 남북이 직접 만나서 얘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초리를 휘두를 권리가 있는 국민들과 소통을 해야만 한다. 따끔한 회초리도 맞아야 한다. 바로 이 시작이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한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개념’이 바로 서는 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3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