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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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윤/ 경찰관  자치검찰제는 검찰개혁 이슈 중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적게 받고 있다. 검찰로부터 경찰과 공수처에 수사권 일부를 넘겨준 것으로 충분하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불완전하나마 지금의 수사권조정에 이르기까지 험난했던 여정을 감안하면 자치검찰제는 언감생심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완전한 형태의 자치경찰제를 바라는 만큼이나 완전한 형태의 자치검찰제가 시행되기를 바란다.  형사소송법을 처음 공부할 때 접한 ‘검사 동일체의 원칙’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웅동체’라는 말도 동물의 왕국에서 달팽이의 연애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검사 동일체’는 새로운 생물종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하니 ‘검찰권의 행사에 있어서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하복종 관계에 있다는 원칙’이라고 한다. 상명하복이라면 군인이 끝판왕인데 ‘군인 동일체의 원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상하복종 관계 외에 뭔가 더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검사를 안 해봐서 모르겠다. 2003년에 검사 동일체 원칙을 ‘일부’ 폐지하여 '검찰사무에 관한 지휘·감독 관계'로 변경했다고 하는데, 뭐가 달라진 것인지 역시 모르겠다.  수사, 기소, 영장청구, 형집행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하나의 몸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중앙집권적 조직은 일사불란한 의사결정과 행동력으로 큰 힘을 가진다. 게다가 검사는 선출직이 아니라서 정년까지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오죽하면 ‘정권은 유한하지만, 검찰은 영원하다’는 말을 한 검사 출신 정치인도 있지 않은가. 거대하고 영속적 생명을 가진 리바이어던을 눈앞에 둔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형사사법기관은 생명, 신체, 재산을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부여받는다. 국민은 그 권한의 수여자이면서 동시에 대상자인데, 통제 수단이 변변치 않으면 자신이 수여자였음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처분 대상자로만 인식한다. 그래서 리바이어던의 압도적 힘 앞에 굴복하게 된다. 이런 거대한 힘에 대해 국민이 주권자로서 통제할 수단은 분권, 다원화, 민주화다. 이 세 가지는 자치검찰제와 잘 어울린다.  검찰이 굳이 중앙집권적 조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범죄는 각각이 별개의 사건이다. 사건별로 범죄사실이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확인하고, 위법성과 책임성을 검토한 후 실체적 판단 근거인 증거가 충분하고 형식적 요건에 맞으면 기소하고 공소유지하는 것이 검사의 임무다. 전문성을 갖춘 수사관과 검사에게 중앙집권적 조직에 의한 명령체계 및 통일성과 효율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자치검찰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외국의 자치검찰 사례를 보자. 독일은 연방대검찰청, 주고등검찰청, 주지방검찰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연방대검찰청이 주검찰청에 대하여 지휘감독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16개의 주검찰청이 각기 분리/독립하여 운영되고 있다. 미국은 대부분의 형사사건이 주 관할(95%)인데, 주 아래 자치단위인 카운티별로 검찰청이 조직되어 있고, 카운티 검사장(District Attorney)은 대부분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 연방검찰, 주검찰, 지방검찰은 상호 견제를 통해 권력분립의 이상인 ‘견제와 균형’을 실현한다.  2005년 베를린의 한 경찰서에 방문했을 때 마침 그 경찰서 담당 검사도 들렀기에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검사는 거의 매일 경찰서에 방문하여 경찰에서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법률적 자문을 하고, 경찰이 수집한 증거의 증거능력과 증명력에 대해 조언하며, 수사 방향을 논의한다고 했다. 부러웠다. 한국 검사는 개별 사건에 대해 수사관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런 논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지휘권이 있을 때에도 경찰이 보낸 수사서류만 보고 서면으로만 지휘할 뿐이었다. 글로만 하는 의사소통은 일방적이고 얕다. 진정한 협력 관계는 서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자치검찰제를 하면 자치경찰과 함께 지역 주민을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검사업무의 주된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런 검사는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영웅이 된다. 배트맨 시리즈 ‘다크나이트’ 속 정의로운 지방검사 하비 덴트처럼.  ‘더 킹’이라는 영화에 보면 1%의 정치검사들이 부정부패에 눈 감고, 수사 정보로 협박하여 부와 권력을 탐하는 모습이 나온다.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긴 하지만 현실로 구현될 위험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정적을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의혹만으로 많은 검사들이 달려들어 전방위적 수사를 할 위험도 자치검찰제에서는 적어질 것이다. 하이에나가 사자보다 무서운 이유는 상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서 다수 집단의 힘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자치검찰제와 관련된 논의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2016년 검사장 직선제가 포함된 검찰청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고, 2019년 6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도 미국의 검사장 선출방식이 자치검찰제라며 도입에 찬성한 바 있다. 검찰개혁 과정에 검찰이 요구한 자치경찰제가 2021년에 첫발을 떼었다. 경찰은 엉뚱하게 뒤통수 맞은 격이긴 하나 그래도 자치경찰이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이니 불만은 없다. 이제는 조건이 갖추어졌으니 자치경찰의 파트너가 될 자치검찰제 논의도 본격화되어야 할 때다.
2022-02-23 | hrights | 조회: 846 | 추천: 17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지난 세기에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이를테면 천방지축이던 그 당시 X세대들에게 기성세대가 엄근진하게 한마디 하기 딱 좋은 표현이었다.  곧 IMF 금융위기를 맞아 ‘세계는 넓지만 할 일이 없다’로 바뀌었지만, 자서전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음을 알렸던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이 책 제목은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고 있다.  세상은 바뀌었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이제 낯선 시대이다. 탄핵 된 전 대통령은 ‘중동으로 가라’고 호기롭게 솔루션을 던졌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세계화는 레드오션이 됐다.  외부와 바깥을 바라보는 것에 미래를 걸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젠 내부와 주변을 살펴야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동네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니 동네에서 무슨 일이 있겠냐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신의 근처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당근마켓’만 떠올려보자. 당근마켓이 처음 등장할 때 이 자질구레해 보이는 사업이 국내 전체 소셜커머스 시장에서 상위 순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역을 영어로 표현하면 로컬(local), 조금 더 쪼개서 동네를 표현하는 단어는 하이퍼로컬(hyperlocal)로 불리운다. 이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넥스트도어’와 중국의 ‘핀둬둬’는 중고물품 거래 뿐 아니라 공동구매, 물품 공유 등 지역과 동네 단위의 커뮤니티를 바탕에 둔 사업을 통해 기존 시장을 위협하는 플랫폼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근마켓의 성공이 우연이 아니라 큰 흐름을 탄 이유는 뭘까? 일단 초연결사회에서 대자본에 의해 독과점 시장을 이룬 플랫폼 경제에서 파생된 서브 플랫폼의 등장이라는 배경설명이 가능하다.  또 동네에서 뭘 하고자 하는, ‘슬세권’이라고 하는 공간적 범위에 포커스를 맞추고 거기서 더 나아가 가치소비를 덧붙인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확산될 조짐이다. 이를 테면, 새벽배송으로 받은 상품에 겹겹이 쌓인 택배 포장이 부담되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 내 생산품의 직송 거래를 통해 포장지 절감과 신선도를 확보해주는 업체가 등장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사실 하이퍼로컬 비즈니스라는 개념은 이전 국내 시민사회에서 회자되던 골목경제, 공동체경제,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에서 크게 벗어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방식에 있어 앱 기반의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연계와 확장이 매우 유연한 사업 모델이다.(뭔가 새롭게 보이기 위해서는 외국말 신조어가 필요하다)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대자본의 집중과 독점에 균열을 내어 다양성을 유지하고 공동체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공룡인 IBM을 상대로 ‘Don’t be Evil(악이 되지 말자)’고 외치던 스타트업 구글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 본다면, 건강한 하이퍼로컬 비즈니스 또는 골목경제란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할만하다.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지역화폐와 만난다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수 있을까 궁리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정부 차원의 활성화 지원이 이뤄지며 급속하게 성장하고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근래 지역화폐가 확장하는 모습에서 아찔한 장면이 목격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방위 플랫폼을 이끄는 기업이 지역화폐 운영사로 선정되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언론기사에서는 자사 플랫폼 확장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지역화폐가 카드사의 영역 확대에 홍보마케팅 비용 투입 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너무 쉽게 나오기도 한다. 자, 정신 차리자. 지역화폐는 세금으로 급속 성장한 공공재이다.  각설하고, 지역화폐가 하이퍼로컬 비즈니스, 공동체 사업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지역화폐의 최고봉은 동네단위 공동체에서 유휴노동, 시간과 시간을 교환하는 시간화폐(타임뱅크)라고 생각한다. 지역화폐와 이런 사업이 연계된다면 도구로써 화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지점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궁극의 지역화폐에 앞서 시흥시가 준비하고 있는 지역화폐-하이퍼로컬 비즈니스 정책을 소개하려 한다.(결국 시흥시 자랑으로 귀결되는 이 뻔한 전개) ‘시루 동키마켓’과 ‘시루 동네티콘’이 그것이다. 이미 글밥이 채워질 만큼 채워졌으니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사실 사업 명에서 다 나왔다. 동키마켓은 ‘동네를 키우는 마켓’의 줄임말이다. 동네티콘은 ‘동네에서 쓰는 기프티콘’이다. (다음 회에 계속)
2022-02-16 | hrights | 조회: 536 | 추천: 3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2월의 지리산에 눈이 내린다. 새벽녘부터 내리던 눈이 아침 녘으로는 눈발이 굵어지면서 더욱 세차게 흩날린다. 뱀사골산장을 떠나 간신히 연하천산장에 이르러 눈이 좀 진정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디를 돌아봐도 온통 흰색의 침묵이 깊게 내리고 있다. 그 풍경에 넋을 놓아 버린다. 어제 뱀사골산장에서 인사를 한 청년과 우리를 배웅한다고 연하천까지 따라나선 뱀사골 산장지기랑 연하천 산장지기가 그 깊은 침묵에 젖어 든다.  그치지 않는 눈과 함께 어둠이 내린다. 더 이상 출발은 어려우니 옹기종기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개인의 고민도 있고, 산악인의 전설 같은 무용담도 있고, 세상을 유람하며 도를 닦는 기인의 기행 같은 만담도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이질적이기보다는 묘하게 서로 어우러지면서 우리를 흥겹게 한다. 깜깜한 하늘을 이고 흰 눈으로 덮인 능선이 줄기줄기 서로를 이고 달리는 밤,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또랑또랑한 하늘의 별처럼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데, 어느새 권커니 잣거니 하던 술도 차도 떨어지자 하나둘, 각자의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세상이 하얗다. 그저 하얗다. 그 하얀 능선을 따라 길을 나선다. 우리를 배웅하는 산장지기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벽소령 지나 세석을 거쳐 장터목에서 바로 중산리로 하산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하루를 묵었으니 걸음은 더욱 바쁘다. 그렇게 오름길 내림길 다시 오름길 내림길을 반복하며 세석 지나 장터목으로 돌아드는데 지쳐 퍼진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동안 동행한 청년이 깜짝 놀라며 이름을 부른다. 친구란다. 산에 간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걱정하자 친구를 찾아서 겨울 산에 오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달리다시피 하산길을 재촉하여 중산리로 내려오니 어느덧 어둠이 끼어들고,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는 다시 한 시간쯤 가야 하는데, 진주 가는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하다. 한 사람이 배낭 벗고 달려가 버스를 잡아 놓기로 하였다.  땀으로 흠뻑 젖어 뒤이어 정류장에 도착하니 앞서 달려간 청년이 쫓아와 배낭을 받아 주고, 버스 기사는 웃으며 출발시간 늦었으니 어서 타란다. 몇 명 안 되는 승객들도 버스에 오르는 우리를 보며 오느라 고생했다며 안도하는 표정으로 맞아준다.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리며 꾸벅꾸벅 조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진주란다.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려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지갑을 찾으니 아차, 배낭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다. 허겁지겁 배낭을 다 헤집어 찾았으나 역시나 없다. 아마도 고마운 마음에 버스요금을 내주고는 지갑을 손에 쥔 채 졸다가 버스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다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으나 막차들이 들어온 시외버스 정류장은 문을 닫아 껌껌하다. 순간 하늘이 까매지는 게 이제 어쩌면 좋은가 싶은데 동행한 청년이 “가시죠!” 한다.  진주고속버스터미널로 와서 서울행 버스표를 구입하려고 하니 이제는 표가 없단다. 다시 막막해하자니 매표소에 있는 분이 혹시나 TMO 예비용 표가 한두 장 있을 수 있으니 사무실로 가보란다. 예전에는 TMO라고 적힌 입간판이 기차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 한쪽에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나 남은 표는 없단다. 어쩌나 싶은데 사무실에 있던 분이 혹시 안내양 자리라도 괜찮으냐고 묻는다. 고속버스 안내양 제도는 사라졌지만, 버스에 보조석은 아직 있었다. 동행한 청년이 버스표를 구해 줬다. 청년은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강제된(?) 청년의 선행으로 나는 무사히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물론 고마운 마음 한가득 안고서.  고속버스 보조석은 출입구 계단 위 운전석 조금 아래 있었다. 좌석은 물론 편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뜀박질하듯이 산행하고 내려온 몸은 물먹은 솜이 따로 없었다. 나른하게 처지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또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등받이는 허리까지만 오고 졸다 보면 몸은 흔들거렸다. 자격지심에서인지 기사 아저씨가 자꾸만 흘끔거리는 것만 같다. 운전하는 옆에서 조는 게 안 좋아 보여 그러는가 싶어 정신 차리자 하면서도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어섰다. 기사 아저씨가 내리면서 “자꾸만 흘끔거려 신경 쓰이죠! 백미러 보느라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하신다. “아휴, 참!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오해하고 말이야~~” 그 말씀에 이제는 아예 대놓고 졸았다. 꾸벅꾸벅, 그러다 몸이 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졸고, 5시간을 넘게 그러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불편한 자리 앉아 오느라 고생하셨네! 잘 들어가시게!” 기사 아저씨의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불빛 휘황한 도심 속에서 어제오늘 일을 돌아보니 그 시간이 마치 꿈결 같다.  새까만 밤하늘, 맑은 종처럼 댕그랑 소리를 낼 것같이 밤하늘을 수놓던 수많은 별들, 그 아래 깊은 바다처럼 내려앉은 하얀 능선, 그 능선을 휘돌아 들던 눈보라, 그곳을 떠돌던 인생 나그네들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우연의 일상이 빚어낸, 계획되지 않은 그 축복 가득한 시간을 떠나 돌아온 현재가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 우연의 일상성이 추억으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2022-02-11 | hrights | 조회: 647 | 추천: 5
석미화/ 평화활동가  지난해 말, 친한 그림책 작가가 투박하고 조그마한 도자기를 보여주며 선물 받은 것이라고 자랑을 했다. 거친 표면에 녹색 빛이 도는 그 도자기는 우리가 아는 매끄러운 도자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흙인 듯 돌인 듯 자연을 닮아 있었다. 집안에 놓아두고 감상하면 좋겠구나 생각하던 참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내가 죽으면 돌아갈 곳이에요.”  모든 게 재가 되고 남은 뼈가 돌아갈 집... 유골함이라고 했다. 잠깐 멍하니 이해를 못 하다가 “유골함을 선물해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골함을 미리 장만해 곁에 두고 산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그것을 선물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08골호 프로젝트, 집을 태워 영혼의 집을 구한다> 도예가 김대웅은 108개 뼈의 단지를 만들었다. 108개 흙덩이에 인연들의 삶을 담아내고 기억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나무 장작 쌓아 올린 집을 지어 흙을 구워냈다. 재가 될 인생들에게 욕심내지 말라 하며. 그렇게 마지막 집으로 인연들을 위한 작은 항아리를 만들었다. ‘남편의 유골함을 침대 곁에 두고 자는 스위스 할머니와 오빠의 유골함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어느 화가의 고민 속에 나의 유골과 죽음을 위한 흙의 덩어리는 태어났다.’ 2021.10월 작가노트 중 사진 출처 - 도예가 김대웅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가는 노스승 모리 슈워츠와의 대화를 담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모리는 이렇게 말한다. “불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하게. 매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거야. 그리곤 새에게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가 되었나?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다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나? 라고 묻지...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우게 되니까.”  돌아갈 유골함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노스승 모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것과 같은 것일까. 죽음은 삶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든다. 2022년을 시작하며 다소 무겁지만, 생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했다. 그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 삶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니 늙음 그리고 죽음에 생각이 가 닿았다. 청년의 날들을 지나 중년으로, 나이 듦의 길목에서 나도 새 한 마리를 어깨에 올려놓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름 엄숙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프랑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펼쳤다.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이 책은 단지 노년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만 공감을 주는 내용은 아니었다. 작가는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젊은이의 시간이 아닌 노년의 삶을 연장시켰음을 환기시켜주고, 과학발달과 수명연장이 가져다 준 성숙과 노년 사이의 모라토리엄을 잘 활용하여 인생의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를 살라고 말한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삶을 그 끝에 대한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만큼 인생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또 있을까, 현재만 산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실존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의 지평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단지 어깨 위에 새를 올려놓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책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우리에겐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레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오솔길에서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에 비추어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위의 인용을 그냥 눈으로 휙 읽었다면 다시 천천히 읽어보길 권한다. 일, 참여, 공부를 통해 삶을 배우는 것,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로서 생은 아름답고 값지고 찬란하다. 나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글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2022년, 나와 더불어 함께하는 이들이 삶을 배우고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박한 글을 나눈다.  참, 어깨 위의 새는 어쩐다지?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이성과 논리로 죽음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죽음을 부정적이고 금기시하는 문화에 대해 죽음이 왜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죽으면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박탈이론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바꾸고 질문을 고쳐보려 한다. 어깨 위의 새에게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으로 말이다.
2022-01-26 | hrights | 조회: 728 | 추천: 6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한겨울 밤중에 늑대울음이 들리면 불길함이 온몸을 파고들어 으스스한 감정에 사로잡힌다고 말하듯이, 울음은 동물들에게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웃음은 오로지 인간만의 반응이다. 일어나는 사건의 규모가 크건 작건, 사건이 실제 현실에서의 것이건 가상적인 상상에 의한 것이건, 이미지에 의한 것이건, 언어에 의한 것이건, 각종 사건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나타내는 특이한 반응이 웃음이다.  그러하기에 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오매불망 바라던 일이 성취되었을 때, 기쁨에 넘쳐 주먹을 불끈 쥐고서 허공을 때려잡을 듯 아래위로 내려치면서 ‘오케이!’ 하고 혼자 춤을 추기도 하고 주변에 누구라도 있으면 부둥켜안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좋아하고서 더없이 즐거워하며 온몸으로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랄까 하는 웃음이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부마항쟁 때 진압군이 아스팔트 바닥에 총을 쏘며 다가오는 지척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다 도망친 뒤 특공대에 의해 장악된 도시 공포의 상황에서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아침 라디오에서 박정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위대한 웃음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 뒤, 세월이 많이 흘러 스무 번 이상의 촛불 시위에 참여한 끝에 그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는 헌재의 최종 판결이 알려졌을 때도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웃음이 온몸을 관통하며 넘쳐 흘렀다.  광대놀음을 덧붙인 판소리 마당극을 보면서 너무나 통쾌 유쾌한 나머지 죽으라고 손뼉을 치면서 아랫배를 끌어안고 심지어 숨이 넘어갈 듯 신나게 웃어젖히는 박장대소(拍掌大笑) 역시 대표적인 웃음이다. 거짓으로 위장된 권위의 껍데기를 벗겨내자 그 속에서 드러나는 비천한 알몸이 훤히 드러났을 때, 그 알량한 모습을 보고서 박장대소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대면서 한껏 즐거워하는 민중의 그 미련없는 웃음이야말로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별달리 잘난 데도 없으면서 유난히 남들을 무시하면서 저 잘난 체 자랑질을 하는 꼬락서니를 목격했을 때 내놓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은근슬쩍 비난의 염을 내보이는 흔히 냉소(冷笑)라 부르기도 하는 비웃음에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한다. 하지만, 아차 그 의지의 끈을 놓쳐 풀리게 되면 실소(失笑)를 금치 못해 씩 웃게 되면 상대로부터 ‘너, 날 비웃는 거야?’ 하는 반응을 유발하여 예기치 않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리하여 그동안 쌓아온 우정이 깨지기도 하고, 심지어 원한과 복수심에 치를 떠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습지도 않은데 높은 놈이 웃으니 억지로라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어 웃는 선웃음이 있는가 하면, 선웃음의 효과가 좌중에 전염되듯 넘쳐 흘러 드디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너나 할 것 없이 그 높은 놈이 웃은 것보다 더 크게 입을 벌려 높은 소리를 내는 홍소(哄笑)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이야말로 소극(笑劇)이 아닐 수 없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2.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당치 않은 일을 일방적으로 당했을 때 짓게 되는 고소(苦笑)라 일컫기도 하는 쓴웃음이 있다. 적당한 수준에서 마땅치 않거나 씁쓸한 느낌이 들면 그저 입가에 씩 입술연지를 바르듯이 쩝쩝거리는 시늉으로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어이없음은 일정한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 원 참!’ 하는 식으로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때도 있고, ‘차라리 죽고 말지.’ 하는 식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는데도 도무지 어쩔 방도가 없어 가슴이 먹먹한 나머지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유지하는 것조차 창피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정도쯤 되면, 쓴웃음을 지을 여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욕지기가 있는 대로 치밀면서 원한과 분노가 솟아올라 견딜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욕지기와 원한과 분노는 그저 상대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고, 그 어처구니가 없음이 겹겹이 쌓여 황당함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급기야 심중(心中)이 무너져내려 무슨 돌 하나를 삼킨 듯 말 그대로 가슴이 먹먹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것이다.  김건희-이명수 전화 녹취록을 통해 전국에 알려진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그러하다. 농락을 당해도 유분수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쓴웃음조차 지을 수 없다. 통화를 통해 들려오는 김건희라는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물론이고 그 목소리조차 너무나, 하도 어이가 없다. “내가 정권 잡으면 그것들 그냥 두지 않을 거야.” ― “너도 양다리 걸쳐. 세상이 어찌 될지 누가 알아? 권력이란 게 무서운 거잖아.” ― “보수는 대가를 정확하게 지급하잖아. 진보는 말이야, 바람은 피우고 싶고 돈은 없고, 그러니까 미투를 당하는 거야.” ― “조국 사건도 그렇게 크게 갈 일이 아니었어. 구속할 필요도 없었는데, 유시민이니 김어준이니 무슨 유투버니 하는 것들이 하도 검찰을 욕을 해대니까, 희생된 것뿐이야. 조국도 안 됐지 뭐.” ― “내가 뭐가 아쉬워서 유부남을 만났겠어? 우리 어머니처럼 돈 많은 사람이 어떻게 딸을 팔아먹어? ― “나는 영적인 사람이야.”  많은 뛰어난 논객들이 이 한마디 한마디에 새겨져 있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으니, 필자로서는 더는 덧붙일 말이 없다. 필자로서는 맨 먼저 그저, 미쳤구나!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을 제 뜻대로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정의나 불의, 선악이나 미추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구나.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특히 그녀와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숭배한다고 확신하고 그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역이용하면 되지 않을 일이 없다고 믿고 있구나. 반(反)사회적이건 몰(沒)사회적이건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신만의 영달을 중심으로 가치 체계와 그에 따른 판단 체계를 정확하게 형성했구나. 그러한 자신의 가치와 판단의 체계가 옳다는 것을 자신이 획득한(또는 타고난) 배타적 지배의 ‘영적인’ 힘이 뒷받침한다고 정확하게 오인하여 믿고 있구나. 그리하여 자신의 그러한 가치와 판단 체계가 옳다는 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돈과 권력의 확보를 통해 실제로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그 ‘영적인’ 탁월함과 배타적인 지배력의 위력을 자타가 공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구나. 남편이 대검중수부장과 검찰총장을 거쳐 바야흐로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지지율 선두로 달리도록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이고 따라서 남편은 자신이 부리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구나. 이런 정도로 자신의 영적인 역량을 발휘해 성공했으니, 이야말로 진짜 최고의 정치적인 수완이고 능력이 아니라면 뭐겠어? 하고 생각하겠구나.  저런 미친 여자가 “(내가)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되면 도대체 이 나라는 무슨 꼴로 어떻게 나락에 빠져들 것인가? “최순실보다 더한 제2의 최순실”이 등장했다고들 한탄한다. 지금 필자는 하도 너무나 어이가 없어 쓴웃음조차 짓지 못하고 얼굴이 화석처럼 굳어버린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의 심경이 이렇게까지 한 덩어리 돌이 되다시피 뭉치고 만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상 이러한 김건희의 폭로된 광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여자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은 다른 일은 제쳐두고라도 부지기수로 반복해서 학력과 경력을 위조하는 것을 보고 이미 생각한 바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안 하면 바보가 아니냐, 하는 식의 그 여자의 삶의 태도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화 녹취록의 폭로를 통해 그 광기의 본색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른바 ‘본부장’의 숱하게 드러난 범죄와 거의 입증되다시피 한 의혹은 물론이고 그녀의 남편 윤석열 후보가 창피해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손바닥 ‘王’자 사건과 그 외 어처구니없는 발언과 핑계의 태도에서 드러난 그 무능력은 우리 모두의 ‘공정과 상식’에 입각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정 필자가 하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원한과 분노에 휩싸이는 것은 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기가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과 수구 언론 권력’을 관통하고 휘감아 나라의 정치판을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수많은 유권자 국민의 눈과 귀를 오랜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여 판단력을 납작하게 뭉개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잖아도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1위 운운하면서 언론에서 발표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곤 했는데, 그 지지율이 실현되는 바탕의 한 축에 심지어 후보자의 아내라는 여자가 ‘발휘하는’ 무속적인 영적 자기도취의 광기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니 이 어찌 하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누군들 마음과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확인하고서 같은 당의 유명 정치인인 홍준표 씨조차 “가슴이 먹먹하다.”라는 글을 올렸으니, 하물며 ‘공정과 상식’을 믿는 집단지성의 국민은 오죽하겠는가. 3.  참으로 다행이다. <서울의 소리> 유튜브 방송과 그 이명수 기자가 큰일을 했다. 이제 이재명 후보가 늘 말하듯 ‘국민의 집단지성’이 크게 발휘되어 광기와 미신의 정치적인 굿판을 확실히 작파(斫破)하여 그 뿌리를 아예 불살라버리는 기회로 삼아 합리적인 공론장을 통한 민주주의 정당 정치의 토대를 제대로 구축하는 데 모두가 힘을 모아 발휘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사회 정치의 파안대소를 맘껏 누렸으면 하고 바란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새삼 신동엽 시인(1930∼1969)의 외침이 뇌리에 사무친다.
2022-01-18 | hrights | 조회: 592 | 추천: 5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어린 시절 내 눈에 기린은 단연코 가장 매력적인 동물이었다. 창경궁 동물원인지 서울동물원인지 기억도 희미하지만, 휴일에 부모님에 이끌려 방문했을 터이고 동물 구경인지 사람 구경인지 모를 정도로 혼잡했다. 사람 숲을 헤치고 동물 우리에 다가가도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기린은 달랐다. 다 자란 기린은 암컷이 4미터, 수컷이 5미터나 되니까 대략 아파트 2층 높이 만큼 된다. 어린아이라도 발돋움을 하고 고개를 처들고 시선을 멀리 던지면 기린을 너끈히 볼 수 있다. 길고 강인한 목 끝에는 작은 머리와 세 개의 뿔이 얹혀 있다. 어린 나뭇잎을 씹느라 입을 연신 좌우로 움직이며, 동그란 눈망울을 굴려 내 쪽을 바라본다. “아, 저기 봐, 기린이다!”  기린에 대해서는 유독 궁금한 게 많았다. 기다란 다리를 휘저으며 뛰는 자태는 에너지와 스피드가 맹수 못지않다. 몸에는 표범 무늬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얼굴은 선량한 모습이다. 몸체와 얼굴이 안 어울린다. 기다란 목의 뼈는 도대체 몇 개일까? 혹시 수십 개 뼈가 아코디언처럼 이어져 있는 건 아닐까? 심장과 머리 사이가 저렇게 멀어서야 혈액을 어떻게 공급할까? 작은 머리가 의료용 스포이드처럼 저 아래 심장에서 피를 죽 빨아올리는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상상력을 보태 자문자답해보기도 했다. 기린은 다른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7개의 경추를 갖고 있지만 긴 목을 상하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위해 제1흉추가 기능상 ‘8번째 목뼈’ 역할을 한다는 사실 1), 심장과 뇌 사이가 워낙 멀어서 뇌까지 혈액을 보내기 위해서는 혈압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기린의 최고 혈압은 300mmHg로 지구상에서 가장 혈압이 높은 동물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기린이 신기했던 건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린은 이국 동물 중에서도 경이와 호기심이 집중된 대상이었다. 기린은 로마제국 원형경기장에 등장했었지만, 16세기 메디치 군주를 위해 진상되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살아있는 기린을 볼 수 없었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Pliny the elder)는 기린을 카멜로파르달리스(Cameloparadalis)라고 명명했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플리니는 기린을 낙타표범(camelopard), 즉 낙타의 형체와 표범의 피부를 섞어 놓은 미지의 동물로 인식했다. 아프리카 내지로부터 들어온 기린 뼈나 가죽은 접해봤지만 살아있는 기린을 직접 보지는 못했던 18세기 유럽 박물학자들은 플리니의 전통에 따라 기린을 유니콘, 그리핀, 피닉스와 같은 신화 속 동물로 인식했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에 실린 기린 삽화에는 기린의 뿔 2개가 유니콘의 뿔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플리니의 『자연사(Naturalis Historia)』에 나오는 서술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2)  “이 신비로운 동물”, “신성한 피조물”에 대한 목격담으로, 사체와 뼈와 가죽으로 점차 기린의 실재가 알려지자 이 동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기 위한 증표로서 실물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프랑스 탐험가 프랑수아 르 발랑(François de Vaillant)은 남아프리카 케이프 내지에서 야생 기린을 관찰하고 기록을 책으로 발간했다. 1810년대가 되면 영국의 탐험가이자 자연학자 윌리엄 존 부쉘(William John Burchell)도 남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고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네발동물”에 대해 면밀히 기록했다. 부쉘이 수집한 약 5만점의 표본 중에는 암수 기린 한 쌍도 있었다. 부쉘이 기증한 박제 기린 한 쌍은 영국박물관에 2층 계단 복도에 전시됐다. 3)  1827년 6월 30일,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에 살아있는 기린이 도착했다. 1826년 수단에서 붙잡힌 새끼 기린이 뱃길로 나일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거쳐 프랑스 남부 항구 도시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기린이 처음 밟은 유럽 땅은 마르세유였던 것이다. 마르세유부터 파리까지는 육로로 900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했다. 수단에서부터 파리까지 이동거리를 모두 합치면 무려 6,000킬로미터에 달한다. 새끼 기린은 ‘자라파(Zarafa)’라고 불렸다. 아랍어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는 뜻의 ‘zerafa’에서 변형된 단어라고 한다.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의 giraffe, girafe, giraffa는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  기린을 생포해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에게 보낸 이는 이집트의 부왕 무함마드 알리였다. 자라파는 오스만제국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의 봉기를 진압하는 것을 눈감아 달라는 알리의 정치적 계산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당시 왕정복고기의 프랑스도 정치가 불안정한 상태라 알리의 뇌물이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었다. 부왕 알리의 명을 받은 사냥꾼들은 어미는 죽이고 생후 2개월의 새끼 자라파를 생포했다. 젖을 떼기 전의 새끼 기린이라야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젖먹이를 지난 기린은 도망치려다가 불구가 되거나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기린의 정강이 뼈는 곤봉으로, 기린 가죽은 방패용 가죽으로, 꼬리는 파리채로 쓰였고, 고기는 고급 식량으로 팔렸기 때문에, 어미는 도살해 네 마리 낙타에 나눠 싣고 이동했다. 자라파는 어미의 사체와 함께 걸어야 했던 것이다. 어미 잃은 자라파에게 매일 96리터씩 우유를 먹이기 위해 소 세 마리도 일행에 포함되었다. 4)  기린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다. 마르세유에서 파리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동안 지나는 도시마다 기린을 보러 인파가 모여들었다. 낮에 30km 이상 걷고 밤에는 쉬어야 하는데 기린을 보러 사람들이 여관으로 몰려들어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리옹에서는 3만 명이 연도에 나와 구경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단인 하산과 아티르가 여정을 동행하며 기린을 돌봤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저명한 자연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Étienne Geoffroy Saint-Hilaire)가 마르세유로 와서 파리까지 동행하며 관찰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통풍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중년의 생틸레르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 사이 자라파는 3미터 70센티까지 자랐다. 5) 파리에 무사히 도착해 국왕 샤를 10세를 알현했을 때 생틸레르는 감격에 겨워 경과를 보고했고, 국왕은 한 시간 동안이나 생틸레르에게 기린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6) <그림 1> ‘아 라 지라프(à la Girafe)’ 헤어스타일과 기린 색상 드레스를 입은 여성 출처: Women began to truss up their hair à la Girafe and style themselves in giraffe-coloured dresses. Well you would wouldn’t you? The Repository of Arts, Literature, Fashions &c. Third Series, Volume 10. Photograph: Internet Archive Photograph: Internet Archive  1827년 첫 6개월 동안 파리에서 누적 약 6만 명의 관람자가 기린을 직접 보러 왔다. 당시 파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기린 색과 무늬 패션, 기린 뿔 모양 헤어스타일이 유행했고, 인기 색깔은 ‘기린 노랑색’이었다(그림 1). 남성들도 기린 모자, 기린 타이를 맸다. 직물, 벽지, 도자기, 장신구, 가구 어디에도 기린이 새겨졌고 기린 무늬와 긴 목을 디자인에 응용했다. 기린 열풍은 183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7)  아티르는 수단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자라파를 보살폈다(그림 2). 파리 자연사박물관에서 자라파 옆에 거주하며 극진하게 돌봤던 아티르에 대해 파리지엥들은 기린의 정부(情夫)라며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자라파를 고상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숙녀로 의인화하고, 아티르와의 친밀한 관계에 야릇한 시선으로 함부로 성애화함으로써 인간의 의식 속에 가둬버린다. 어미를 잃고 900㎞를 걸어와 파리에 갇힌 기린 자라파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유순하고 우아한 모습이 혹여 체념은 아니었는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1842년 죽은 자라파는 박제가 되어 라로셀 자연사박물관 계단참에 아직도 서 있다. 영면에 들지 못한 자라파가 강제이주에 영원히 항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의 호기심과 과학연구를 위해 동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일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질문하는 건 아닐까? <그림 2> 니콜라 위에가 그린 기린 자라파와 아티르의 초상화 "Study of the Giraffe Given to Charles X by the Viceroy of Egypt," by Nicolas Huet the Younger (1827) A watercolor depiction of the first giraffe ever seen in France, alongside the groom who would look after it for the next eighteen years. 출처: Wikimedia Commons 1) 기린의 8번째 목뼈는 일본의 기린 연구자 군지 메구(郡司芽久)의 발견이다. 군지 메구, 이재화 옮김,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더숲, 2019). 2) Takashi Ito, London Zoo and the Victorians 1828–1859, Woodbridge, UK: Boydell and Brewer Limited, 2014. p.55-56. 3) Ibid., p.60. 4) 마이클 앨린, 박영준 옮김, 『자라파 여행기: 이집트가 프랑스에 선물한 자라파를 통해 본 19세기 정치 문화사』 (아침이슬, 2002), 77-80쪽. 5) 같은 책, 139-152쪽. 6) 같은 책, 184쪽. 7) 같은 책, 186-187쪽.
2022-01-12 | hrights | 조회: 985 | 추천: 5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 이슬람혁명 이후의 비가시적인 동맹 관계 :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이스라엘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정권의 지지자로 간주하고, 팔레비 정권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1979년 2월 11일 시가전에서 반란군들이 샤에 충성하는 군대를 제압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2월 18일 이슬람혁명 임시 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반란군들이 시가전에서 미국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어떻게 제압했을까? 이 의문은 새롭게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들을 인용한 2016년 6월 3일 BBC 보도에서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이 BBC 보도에 따르면, 1979년 1월 27일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지미 카터 정부에 거래를 제안하는 다음과 같은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이란 군부 지도자들은 당신의 말을 듣지만, 이란 국민들은 내 명령을 따른다. 카터 대통령이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정권인수의 길을 열어준다면, 내가 국민을 진정시킬 수 있고, 안정이 회복될 수 있으며, 이란에서 미국의 이익과 미국 시민들은 보호받을 것이다.” 이 비밀 메시지는 프랑스에서 호메이니의 참모인 이란계 미국인 의사 에브라힘 야즈디와 프랑스 주재 미국 대표 웨런 지머만 등이 수차례 직접 대화한 최종적인 결과이며, 호메이니의 이란 귀환과 권력 장악을 이끌어 내었다. 텍사스 휴스턴에 거주하는 야즈디는 이미 CIA요원 리차드 코탐을 통해 워싱턴 미국 관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카터 행정부는 1978년 이란 반정부 시위 때부터 이란 정권 교체 논의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호메이니가 이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혁명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호메이니는 용감하게 미국에 저항했고, 샤의 권력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레이트 사탄’ 미국을 물리쳤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비판적인 이란 태생의 바흐람 알레비가 1988년에 쓴 「호메이니의 이란 : 이스라엘 동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기간에 이란 사박 요원을 영입하여 이스라엘의 외부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협력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이 고용한 사박 요원 중에는 마누체르 고르바니파르가 있었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샤가 몰락한 후에, 고르바니파르를 비롯한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하의 사박 요원들은 계속해서 호메이니 통치하의 사바마 요원으로 일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용했다. 고르바니파르는 양 측, 이스라엘 모사드와 호메이니의 사바마를 위해 일했다. 이란-이스라엘 관계에서 그들의 중심적인 역할은 이란의 샤와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사드가 협력하여 창설한 비밀경찰을 유지하기로 한 호메이니의 결정으로 가능해졌다. 호메이니 정권은 1979년 2월-9월 사이에 사박의 전직 수장 세 명을 처형하고, 사박 조직의 이름을 사바마로 바꾼 것 외에, 그 기능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호메이니 정권은 많은 사박 요원들을 사바마 요원들로 다시 고용하였고, 사바마 요원들은 사박 요원들이 샤를 위해 수행했던 것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사바마 요원들이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에서 무기거래 등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시대와 이란 이슬람공화국 시대는 정권과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념은 바뀌었으나, 실제 정책에 있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연속성이 있으며, 내부적으로도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인 정권 유지 방식은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9년 8월 7일, 호메이니는 ‘예루살렘의 해방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종교적 의무’라고 선언하면서, 라마단의 마지막 금요일을 전 세계 무슬림들이 연대하여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이란 이슬람 혁명정부는 이스라엘 지배로부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주도하는 PLO 편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동안, PLO는 이란 반체제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많은 이란 반체제 인사들은 1970년대에 레바논의 PLO 캠프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PLO 또한 1979년 혁명을 지지하였고, 1979년 2월 17일 야세르 아라파트는 31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테헤란을 방문하였으며, 2월 18일 호메이니를 만났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오늘 이란 혁명이 중동의 세력 균형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이란, 내일은 팔레스타인”이라고 선언했다.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아라파트는 이란이 전력을 강화한 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문제로 눈을 돌릴 것이라는 서약을 호메이니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다.  2월 18일 야세르 아라파트 환영행사에서 총리 메흐디 바자르간이 이스라엘 외교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테헤란 소재 이스라엘 공관이며 이스라엘 외교의 중심지였던 팔레스타인 사무소 열쇠를 아라파트에게 넘겨줌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무소는 PLO에게 넘어갔다. 동시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시아파 운동이 이란을 정치·군사적으로 장악한 이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통치하던 이란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정치·군사적 관계가 종식되고, 이란의 정책이 아랍 국가들과 PLO에 우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실제로 2월 18일 이란 혁명 임시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이란 국영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모든 이스라엘인은 이란을 떠나고, 이스라엘 주재 이란 대표들은 귀국하라고 명령을 받았다’라고 보도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혁명 정부와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함으로써, 8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1988년 8월 20일에 종결된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100만-200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명 살상을 초래한 장기 지속적인 이 전쟁의 결과, 이라크는 이란의 영토를 장악하거나 이라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란 석유생산의 중심지 쿠제스탄 주(이란 내륙 유전 매장량의 80%, 이란 전체 유전 매장량의 57% 보유)에서 아랍분리주의를 강화하는데 실패했고, 이란은 이라크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실패했다. 사실 무기 판매상들만 이익을 본 전쟁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PLO 사이의 관계는 아라파트가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이라크를 지원하는 아랍세계에 합류하면서 악화되었다. 게다가 호메이니 정권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운동을 장악하기 위하여 PLO 내에 이슬람근본주의 파벌을 만든 다음 PLO 내 세속적인 지도부를 친이란 이슬람 근본주의 지도부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 PLO 지도부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침투에 점점 저항하자, 호메이니 정권은 관영언론에서 PLO를 ‘팔레스타인의 대의가 이슬람 운동의 불가분 구성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라고 공격함으로써 PLO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현재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를 후원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조직들의 통합을 막고, 팔레스타인 조직들을 분할통치 하는 이스라엘 전략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무기거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의 동맹이 은밀하게 구축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자 이란 이슬람공화국 대표단은 파리에서 이스라엘 국방부 차관을 만나 ‘무기와 유대인 교환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이란은 유대인들의 이민을 허용했고, 이스라엘은 치프틴 탱크와 미국제 F-4 팬텀 항공기를 위한 탄약과 예비 부품을 이란에 팔았다.  이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이란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용하였으며, 이슬람혁명 이후 10년 동안 이란 유대인의 대다수인 약 6만 명 정도가 이란을 떠나 미국, 이스라엘, 유럽 등지로 이주하였다. 사실 8년 가까이 계속된 장기 지속적인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전쟁터를 떠나 이주하는 것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혜택이자 특권으로 보인다.  텔아비브 대학의 자페 전략 연구소에 따르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이스라엘이 이란에 판매한 무기는 총 5억 달러에 달했다. 대부분은 이스라엘에 전달된 이란산 석유로 지불되었다. 호메이니 정부를 위해 일한 이란의 무기상 아흐마드 하이다리에 따르면, 전쟁 시작 직후부터 호메이니 통치 기간 동안 테헤란이 구입한 무기 중 약 80%가 이스라엘에서 왔다. 무기 구입은 정권 유지와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무기거래는 국가 간 동맹의 핵심적인 동력이며 상징이다.  1991년 12월 8일 The New York Times 보도에 따르면, 지난 3개월 동안의 100명 이상의 전·현직 정부 관리, 무기거래상, 정보 요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한 The New York Times 자체 조사는 “1981년에 미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와 이스라엘의 총리 메나헴 베긴은 이스라엘에게 이란이 요청한 미국산 예비 부품과 기타 장비 문제를 사안별로 검토하고 승인하기로 하는 합의를 도출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1981년 이스라엘 국방부 고위관리로 후에 외무부 국장을 지낸 아브라함 타미르 소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무기거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매달 우리는 이란에 팔고 싶은 미국제 무기 목록과 예비 부품 목록을 미국에게 주었다. ‘구두 합의’는 적어도 18개월 동안 유효했고,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였던 사무엘 W. 루이스에게 요청 사항들을 기록한 목록을 주었다. 헤이그 장관과의 합의에 따라, 1981년과 1982년 미국산 무기를 이란에게 판매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무기 무역상들, 이스라엘인, 미국인들, 영국인들이 이란에 계속 무기를 판매했다. 이란에 판매한 미국제 무기는 수십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이란 이슬람공화국에게 무기를 제공한 이스라엘의 동기에 대해, 1981년 메나헴 베긴 총리는 “1980년 9월 시작된 전쟁에서 이라크가 승리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의 강한 열망 때문에 이란에 예비 부품을 기꺼이 제공하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중동 역내에서 이라크를 가장 큰 적으로 보고, 1981년 6월 7일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하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이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큰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무기를 판매했고, 무기판매는 미국 관리들과 철저히 논의되었다”라고 미국에서 연설 중에 밝혔다. 1982년 10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모세 아렌스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무기를 수송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최고위층과 조율하여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도 이라크가 이란을 지배하게 되면 역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을 우려하면서, 이스라엘의 대이란 정책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란 이슬람공화국 무기고는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기간 획득한 미국제 무기와 영국제 무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미국제 및 영국제 군사 장비를 필요로 했다. 1980년 10월 24일, 스콜피온 탱크 부품과 F-4 제트기용 타이어 250개가 이스라엘에서 이란으로 운송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스라엘 소유의 다른 군수품들이 유럽의 저장소에서 이란의 차바하르, 반다르 압바스, 부셰르 항구로 비밀리에 수송되고 있었다. 군수품에는 미국이 제작한 F-4 제트기, 헬리콥터, 미사일 시스템을 위한 예비 부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직후, 레이건 행정부는 이스라엘에게 이란 정부에 수십억 달러 상당의 미국제 무기, 예비 부품, 탄약을 팔도록 허락하였다.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납치된 미국인 인질들이 레이건 대통령 취임에 석방되고 난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무기가 이란으로 이송되었다. 1981년 7월 터키-소비에트 국경에서 이 무기들을 운반하던 3대의 항공기 중 1대가 추락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이란으로의 비밀 무기 수송이 폭로되었다. 이스라엘 관리들에 따르면, 이 3대의 수송기는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 날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인질들이 풀려난 직후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1981년 9월 16일 유엔 주재 이라크대표부 대표 사이브 바피가 유엔 총회에 보낸 공식 서한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와 이스라엘 사이의 무기 협력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서한은 이스라엘, 미국, 이란 이슬람 공화국 사이의 무기거래 협상 내용, 장소, 시기, 무기 종류 및 무기 운반 경로 등을 다음 기사들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1980년 11월 2일 런던 주간 Observer, 1980년 11월 3일 서독의 Die Welt, 1980년 11월 5일 파리에서 발행된 정기 간행물 Al Watan Al Arabi, 1980년 11월 11일 프랑스의 V. C. D와 1980년 11월 14일 Jeune Afrique, 1981년 3월 31일 쿠웨이트 일간지 Al Siyassa, 1981년 7월 15일 미국 텔레비전 네트워크 ABC, I98I 7월 21일 이스라엘 일간지 Maariv, 1981년 7월 24일 아르헨티나 두 개 일간지 Cronica와 La Prensa, 1981년 7월 25일 런던 Sunday Times, 1981년 7월 27일 프랑스 신문 Le Figaro, 1981년 7월 27일 서독의 Der Spiegel, 1981년 7월 29일 스위스 Tribune of Lausanne 등이다.  세계 각국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들로 볼 때 이란-이라크 전쟁 초기부터 이스라엘, 미국,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의 무기거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이니가 통치하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표방한 反시온주의・반미 정책이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대내적으로 팔레비 왕정을 전복시킨 이슬람혁명을 합리화시키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있어 1978년-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협정으로 이집트 아랍공화국이라는 강력한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외견상 새로운 적의 필요성으로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1년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및 역내 분할통치 전략, 대체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적인 정권과 이슬람 세력의 대결 구도라는 측면에서 활용도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정책은 아랍국가들이 후원하는 서안을 통치하는 자치 정부와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대결 구도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호메이니 정권은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구입에 반대하고 이라크와 평화를 추구하는 초대 이란 이슬람공화국 대통령 아불 하산 바니 사드르(재임: 1980.02.04.–1981.06.22)를 축출하였다. 유엔 주재 이라크대표부 대표 사이브 바피가 유엔으로 보낸 서한은 1981년 8월 20일 미국 텔레비전 ABC가 방영한 바니 사드르의 인터뷰 내용을 포함한다. 이 인터뷰에서 바니 사드르는 “이상한 것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한 것이다.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구입은 이슬람 성직자들이 권력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 나는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 구입을 반대했다. 나는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면, 왜 이라크인들과 화해를 하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이라크인들과 화해하는 것이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바니 사드르는 이스라엘과의 무기거래를 반대했으며, 각료회의에서 이란인들이 이라크와 화해하고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니 사드르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세속주의자들이 통치하는 이라크와 평화를 성취한다면, 이란 집권 종교세력은 이란 군대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려서 전복당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라크와 평화를 성취해보려는 사드르 자신의 노력이 좌절되었다’고 역설했다.  사실, 바니 사드르는 샤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과정에서 1963년 프랑스로 도피하여 호메이니가 이끌던 반정부 조직에 참가하였다. 1979년 2월 호메이니와 함께 귀국한 바니 사드르는 1980년 1월 25일 국민투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5.6%의 압도적인 득표(총 투표율67.42%)로 4년 임기 대통령에 당선되어 2월 4일에 취임하였다. 그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성직자들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이슬람공화국 헌법 하에서 호메이니는 대통령을 해임할 헌법상의 권한을 가진 이란 최고지도자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며, 세속주의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새로 구성되는 의회를 장악하면서, 바니 사드르 대통령 축출에 나섰다.  사실, 이란 혁명 기간 동안 세속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민전선당은 이슬람공화국이 군주제를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혁명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의 주요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1년 6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의회는 대통령의 입법 저지권을 제한하는 법안과 보복법을 승인한 이후, 호메이니의 신정정치 세력과 국민전선당・바니 사드르 대통령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1981년 6월 11일, 호메이니는 자신이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게 1980년 2월 19일 수여한 이란 군사령관 직위를 박탈하면서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을 무력화시켰다.  1981년 6월 15일,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국민전선당은 테헤란 시민들에게 호메이니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으며, 처음으로 호메이니에게 억압과 공포 정치에 책임이 있다고 호메이니를 직접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호메이니는 이 시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시민들에게 국민전선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세속적인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 대한 호메이니의 공격도 이 과정에서 나왔고,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 대통령이 TV와 라디오에서 국민전선당이 주도하는 시위를 지지한 것에 대하여 공개 사과해야한다고 선언하였다. 호메이니는 국민전선당을 규탄하고, 보복법 반대자들을 배교자라고 위협하였다.  결국, 1981년 6월 21일, 이슬람 성직자가 다수를 차지한 이란의회는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 대한 탄핵동의안을 채택하였고, 22일 호메이니는 이 탄핵동의안을 승인했다. 1981년 7월 28일 바니 사드르는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여, 호메이니 정권 전복을 호소하였다. 1981년 7월 국민전선당은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란 내부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이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상황은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1952년 이집트 혁명에서는 세속적인 자유장교단과 무슬림형제단이 연합하여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축출하는 혁명을 성공 시킨 후, 세속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자유장교단 출신의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하고 무슬림형제단 세력을 축출하면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979년 이란에서는 성직자들이 최종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혁명 동지들을 축출하면서 상징적으로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이란 이슬람 성직자들은 세속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반대파 국민전선당을 제거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슬람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동지였으며,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반대하고 이라크와의 화해를 추구하던 바니 사드르 대통령을 제거하였다. 반면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설정한 이스라엘과 실제로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정권을 유지・강화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9년 2월,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호메이니는 1979년 이란혁명의 원칙을 배반했고, 그와 함께 테헤란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매우 쓴 맛을 남겼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경제제재를 통해 이란을 굴복시키려는 노력은 기존 체제를 강화하면서 일반 이란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내버려 둔다면, 이란 체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바니 사드르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2016년 이후 이란에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19년 11월 15일 정부가 가스 가격 200% 인상 발표 이후, 마슈하드, 케르만, 쿠제스탄 등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발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대는 “성직자들은 왕과 같이 살고, 국민들은 더 가난해지고 있다”는 구호와 함께 성직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테헤란을 비롯한 100개 이상의 도시로 퍼져나갔다. 이 시위에 맞서 2019년 11월 17일,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대통령 재임;1981.10.09.-1989.08.16., 최고지도자 재임: 1989.06.04-현재)는 정부 관리들과의 회의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라. 이것은 내 명령이다. 만약 시위를 즉시 중단시키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하메네이는 시위대가 거리에서 자신의 포스터를 불태우고, 호메이니 동상을 파괴한 것에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단체 메흐르 센터(Middle East Human Rights Center, Mehr Center)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월 15-17일에 3천명 이상의 시위대가 이슬람공화국 보안대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2만 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는 1979년 이슬람공화국 수립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격렬한 시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바니 사드르의 주장처럼 이란이 경제제재를 받지 않고, 개방되고 발전된 체제로 나아간다면, 성직자가 주도하는 보수적인 이슬람 정권은 유지되기 힘들어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권에게 개방과 경제 발전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미국에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체제를 가진 이란보다, 권위주의적이며 취약한 체제를 가진, 적대적인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중동의 한 축을 운영하는 형태로, 중동을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 세력으로 분할 지배하는 것이 유리해 보인다. □ 관계 정상화 가능성? : 이란 핵 문제와 이란-이스라엘 관계 전망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이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한 직접 공격을 이란에 대해서도 되풀이할 수 있는가? 2021년 10월 18일, 이스라엘은 이란 핵 프로그램에 맞서는 군사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서 15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이스라엘이 1960년대 중반부터 중동 역내에서 군사적 우위 및 핵 독점을 누려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이란은 이스라엘의 역내 군사적 우위 및 핵 독점에 도전하며, 이스라엘의 역내 패권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보유 시도에 맞서 군사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이란에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의 모든 불법적인 제재를 제거하기 위해 핵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란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란에 대한 모든 경제제재를 해제하기를 원한다. 사실, 2018년 5월 미국이 핵 협정에서 탈퇴한 이후. 이란 국민들은 지난 3년 동안 미국의 경제제재 강화와 Covid-19 대유행에 대한 정부의 대처 부족, 높은 청년 실업률 속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게다가 기후 변화 및 무리한 댐 건설로 인하여 이란의 강 하류 지역은 심각한 물 부족에 직면하고 있다. 이란 기상청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이란의 97% 지역이 가뭄을 겪고 있다. 2021년 7월에는 섭씨 50도에 달하는 쿠제스탄 주의 아랍계 농민들이 물 부족에 대하여 야간 시위를 벌였으며, 11월에도 이스파한 등지에서 식수 부족으로 인한 시위가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이란 보안군은 실탄발사, 최류탄과 곤봉 등으로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제스탄 주 시위대 동영상에는 “시위는 평화적이다. 왜 총을 쏘느냐?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담겨있어, 이 시위대가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 9월 이후, 이스라엘은 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 등과 국교 정상화 등으로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는 2002년 3월 당시 사우디 왕세자 압둘라가 베이루트에서 개최된 아랍연맹 정상회의에서 아랍평화안(Arab Peace initiative)을 제안했을 때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아랍평화안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종식에 대한 응답으로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이 관계 정상화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아랍평화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종식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였으나, 당시에도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아랍평화안의 실제 목표는 이스라엘-아랍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2020년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종식 및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표면적인 아랍대의 명분을 버리고, 실제 목표를 성취하였다.  그런데 2003년 4월 말-5월 초에 이란도 2002년 아랍평화안을 수용하면서, 미국 국무부에 포괄적인 이란-미국 평화안을 제안했다. 로마 소재 Inter Press Service 보도에 따르면, 이란-미국 평화안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이란외교정책 전문가 트리타 파르시가 입수하여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란-미국 평화안은 “이란이 2002년 아랍평화안을 수용하고, 1967년 국경 내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중단하기 위하여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에 압력을 가하고,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중단하고,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단순한 정치 조직이 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며, 평화적 핵 기술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조건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훨씬 더 엄격한 통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트리타 파르시를 비롯한 이란 안보정책 분석가들에 따르면, 이란 국가안보 고위관리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수용하고 양보하는 대가로,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이란의 안보와 지정학적・정치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된 미국과의 협상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2003년 이란이 제시한 이란-미국 평화안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볼 때, 이란도 역시 국익을 추구하고 국제 사회에서 활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이미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10월 26일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 네자드는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란 최고지도자이며 이란 외교정책의 궁극적인 책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슬람공화국은 결코 어떤 나라도 위협한 적이 없으며,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아마디 네자드의 발언이 국제 사회에서 야기한 논란을 잠재우려고 시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기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입장은 이란 내부 반대파들을 누르고 역내에서 편을 가르는 공격적이며 선동적인 발언과 이와 모순되는 국익을 추구하는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이란의 외교정책을 이야기할 때,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수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실제 정책이 은폐될 가능성이 있다. 사진 출처 - KBS  2021년 1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단시킨 2015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합의한 159쪽으로 된 이란 핵 문제에 관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JCPOA)의 복구 및 재협상 여부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2015년 7월 20일, JCPOA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2231호에 의해 승인되었다. JCPOA는 2014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미국과 이란 간의 협상을 통해서 마련된 이란 비핵화 방안을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와 독일(P5+1)이 수용한 결과다. 이란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이 JCPOA의 핵 관련 조항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협정에 명시된 특정 요건에 따라 검증한다. 또한 JCPOA는 2015년 10월 18일부터 2025년 10월 18일까지 10년 동안 실행되며, 동시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2231호는 종료된다.  그런데 이란의 명백한 합의 준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18년 5월 8일 일방적으로 JCPOA에서 탈퇴했고, 그 후 이 협정에 의해 해제된 이란에 대한 모든 제재를 다시 가했다. 2018년 5월 21일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이란에게 재협상 조건으로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야하고, 플루토늄 농축을 중단하고 재처리를 절대하지 말아야하며, IAEA에게 이란 전역에 대한 완전한 사찰을 허용하고, 탄도 미사일 규제,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예멘의 후티 민병대 등에 대한 지원 중단, 시리아 전역에서 이란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병력 철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원 중단, 이스라엘 파괴 위협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로의 미사일 발사 등 위협 중단”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재협상 조건은 이란이 JCPOA를 위반했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고, 핵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란의 역내 패권과 관련 있는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란과 나머지 국가들은 미국의 탈퇴에 반대했다. 2019년 5월 8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이 JCPOA 탈퇴를 발표한 지 1년이 된 날, 국영방송에 출연해 이란도 우라늄 농축과 중수 생산 제한 등 JCPOA 일부 조항의 이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2021년 10월 14일, 이스라엘 신문 Haaretz에 따르면, 이스라엘 총리 베네트는 JCPOA 합의를 2015년 네타냐후가 주장한 것처럼 ‘역사적 실수’로 보지 않으며, 네타냐후 총리의 촉구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5월 8일 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을 더 이상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베네트 총리는 2018년 미국이 JCPOA 탈퇴 이후 3년 동안 이란의 핵 능력이 대약진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핵협정이 이란이 핵보유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최선의 방책으로 보고 있다. 사실, 미국이 JCPOA를 탈퇴할 때까지 이란은 JCPOA를 준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21년 9월 27일, 유엔 총회연설에서 베네트는 “이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분수령을 맞이했고 우리의 관용도 마찬가지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임계점에 왔다. 우리는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은 핵우산 하에서 이 지역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란 핵 문제는 중동 역내 패권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관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JCPOA를 탈퇴한 후에 내놓은 재협상 조건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란 핵 문제는 타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2021년 11월 5일, 이란 국영 Press TV에 따르면, 이란 원자력기구 대변인 베흐루즈 카말반디는 이란이 20% 농축 우라늄 210kg 이상을 생산했고, 순도 60%로 농축된 우라늄 비축량이 25kg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란 에브라힘 라에시(대통령 재임: 2021.08.03-) 정부는 미국의 모든 불법적인 제재를 제거하기 위해 핵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란은 핵 협상이 원활하게 타결되기를 원하지만, 열쇠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가 주장한 것처럼, 미국과 이스라엘 및 국제 사회의 이란에 대한 제재가 일반 주민들에게는 경제적인 고통을 주지만, 이란의 이슬람 정권에게 직접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2020년 5월 18일 이란의회가 통과시킨 ‘이스라엘의 행위에 맞서기’ 법 제정 등은 반정부 시위 등에 맞서 주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일반 주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대를 잠재우고,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유효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행위에 맞서기’ 법은 공식적, 비공식적 이스라엘 단체들과의 상업적·학술적·문화적 활동, 정치적 합의·협상·정보 교환 등을 금지하고 있다. 이 법은 이란의 모든 행정 기관은 평화와 안보를 해치는 시온주의 정권의 적대 행위 및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 이슬람 국가들,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대항하는 범죄 등 시온주의자 정권의 적대 행위에 맞서기 위하여 지역적, 국제적 역량을 사용할 것을 규정한다.  이렇게 이란과 이스라엘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갈등은 유대인이냐 혹은 무슬림이냐 등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차이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며,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열정으로 강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국가는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수사를 정치적 타협을 가로막고, 적대관계를 연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결국,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이스라엘은 각각 종교적・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수사를 통해서 반대파를 제압하고, 동맹 세력들을 결집하고 지원함으로써 역내 정치에서 분할 지배를 위한 비가시적인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란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세력들, 즉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함으로써, PLO로의 팔레스타인 민족통합을 저지하고, 결국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분할통치 지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反시온주의 수사를 활용하여 유대인들이 탄압받아왔으며, 강제로 추방되었다는 수사를 개발하고 활용함으로써, 유대인을 위한 이스라엘국가 존재와 이스라엘국가 방위를 위한 무장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1
2021-12-29 | hrights | 조회: 750 | 추천: 2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 유대인들은 강제 추방당한 난민인가, 자발적 이주민인가?  2020년 9월 이후, 이스라엘은 UAE・바레인・모로코・수단 등과 국교 정상화(아브라함 협정 체결) 등으로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2021년 현재 이란과 사우디・UAE는 2016년 이후 단절되었던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2021년 4월 이후 1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이란과 사우디는 바그다드에서 고위급 회담을 개최했으며, 2021년 12월 6일에는 UAE 국가안보보좌관 셰이크 타흐눈 빈 자이드가 이란을 방문해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였다. 최근 이스라엘과 사우디・UAE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란과 사우디・UAE 관계 회복 시도는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 개선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이스라엘은 중동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이후를 조용히 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중 하나가 중동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에 대한 배상금 요구 계획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중동 각국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대거 이주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이스라엘국가 건설과 시온주의 강화에 대한 대응으로 중동국가들 내에서 발생한 격렬한 反시온주의 물결로 인한 유대인 탄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인구적인 필요성에 따라, 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 활동 혹은 시온주의자들과 중동국가 통치자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이주라는 견해도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국가들의 反시온주의 정책으로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되었다고 주장한다. 2014년 6월 23일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 이란과 아랍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한 85만 명의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된 난민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기념하여 11월 30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을 채택했다. 2019년 1월 5일 The Times of Israel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란 등 중동국가들로부터 강제 추방당한 유대인에 대해 배상금을 청구할 것이다. 같은 날 이스라엘 Hadashot TV 보도에 따르면, 18개월간 국제 회계 법인을 활용한 조사 결과,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건설 이후 강제 축출당한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에 대해, 이란 및 기타 중동 국가들에 총 2,500억 달러 이상의 배상금을 요구할 계획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강화와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맞서는 중동국가들의 反시온주의 및 反이스라엘 정책으로 중동국가 거주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난민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인구적인 필요성과 중동 국가들보다 좀 더 발전된 사회, 경제적인 여건을 선호해서 중동국가 통치자와의 합의하에 자발적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인지에 대한 균형 잡힌 설명이 필요하다.  이란은 이러한 설명을 위한 좋은 사례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재위: 1941.09.16-1979.02.11.)가 통치하던 시대의 親이스라엘 정책이 급격하게 反이스라엘 정책으로 변경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란의 정책 변화로 이란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당했는가? 이슬람혁명 이전과 이후의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비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한 것인가 혹은 강제 추방당한 것인가?  2021년 현재 이스라엘 내 이란 출신 유대인 공동체는 20만-25만 명(기타 자료에는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 구글 □ 이슬람혁명 이전의 비공식적 동맹 관계 :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이란 제국과 이스라엘  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레자 샤 팔레비(재위: 1925.12.15-1941.09.16.)가 통치하는 이란제국에서 나치독일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고, 나치독일은 이란으로부터 중동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더구나 레자 샤 팔레비가 나치독일을 편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나치독일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 체결)을 파기하고 이란 북쪽에 인접한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레자 샤 팔레비의 나치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연합국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때 나치독일은 소련에 대항하는 기지로 이란을 활용하려고 시도하였다.  소련은 재빨리 연합국과 동맹을 맺었고, 1941년 7월과 8월에 영국은 이란 제국에게 모든 독일인들을 이란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자 샤 팔레비는 독일인 축출을 거부했다. 결국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기습 공격했고 레자 샤 팔레비 정부는 즉각 항복했다. 이 침공의 전략적 목적은 소련으로 가는 보급선 및 유전과 아바단 정유소(앵글로-이란 석유회사 소유)를 확보하고, 터키와 이란을 거쳐 바쿠의 유전과 영국이 통치하는 인도로 진격을 시도하는 나치독일의 이란 내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결국, 1941년 9월 16일 영국은 레자 샤 팔레비를 강제 퇴위시키고 추방하였다. 샤의 직위는 그의 21살 난 아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로 교체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레자 샤 팔레비의 배려로 1941년 9월 18일까지 터키 국경을 통해 탈출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란은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게 원조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란에서 나치독일이 축출되고, 영국의 영향력이 강화된 이후 1942년 시온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유대기구는 테헤란에 ‘팔레스타인 사무소’를 개소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무소 개소 목적은 폴란드 유대 난민들을 도와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주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무소는 이스라엘 공관으로 1979년 혁명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찬반 투표에서 이란은 다른 이슬람, 아랍 국가들과 함께 반대투표를 했다. 1947년 2월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종식시키겠다고 발표한 이후, 유엔총회는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분할하여 예루살렘지역을 국제 통치하에 두고,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를 수립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유엔 56개 회원국 중 기권국과 불참국을 제외한 유효투표의 2/3의 찬성이 필요했다. 당시 시온주의자들이 이 결의안을 지지하지 않는 국가들에게 지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이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56개의 회원국 중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찬성 33개 국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반대 13개 국가, 중국과 영국을 비롯한 기권 10개 국가로 통과시켰다. 반대한 13개 국가는 이란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 파키스탄, 예멘, 터키, 이집트, 인도, 시암(태국), 쿠바 등 주로 이슬람 국가와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이슬람 국가들과 아랍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유대국가 수립을 요구하는 유엔 분할안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에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관계가 왜 비공식적인 관계로 유지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의 사회경제적 개혁의 필요성은 서방, 특히 미국 및 이스라엘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1949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미국 방문 이후, 이란은 1950년 3월 6일 이란 의회가 신년 휴회하는 중에, 이란 정부는 의회승인 없이 이스라엘을 사실상 국가로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3월 7일 유엔 총회 의장이며 초대 유엔 주재 이란대사인 나스르 알라 엔테잠이 유엔 이스라엘 대표부 대표이며 주미 이스라엘 대사인 압바 에반에게 이스라엘 국가 인정 사실을 통보했다. 3월 26일 이란 정부는 장관 직위를 가진 이란 외교관 레자 사피니아를 특사로서 이스라엘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6월 13일 뉴욕 소재 Jewish Telegraphic Agency는 “6월 12일, 이스라엘에서 테헤란을 대표하는 이란 전권대사 레자 사피니아가 예루살렘에서 공식 축하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한 이후(1949년 12월 13일 이스라엘 의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투표로 결정) 예루살렘에서 외국 외교관이 갖는 첫 번째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데이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몇몇 장관들, 두 명의 수석 랍비들이 참석했다.”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한편 1951년 3월 15일, 이란의회 의원이며 국민전선당 당수인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주도하는 이란의회는 이란 석유산업의 국유화법을 통과시켰다. 곧이어 4월 28일 의회는 모사데크를 총리로 선출하였고,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모사데크가 총리로서 집권한 직후, 5월 1일 모사데크는 영국계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그 자산을 국영 이란 석유회사에 넘기고, 1993년에 만료예정이었던 이 석유회사의 석유채굴권을 취소하였다.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가 이란 석유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석유산업 국유화 조치 이후, 영국 및 서방측 석유회사들의 숙련 기술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유럽에서 석유 수출 시장을 찾지 못한 모사데크 정부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51년 7월 7일, 모사데크 정부는 재정난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영사관을 폐쇄하였으나 이스라엘 국가 승인을 취소하지는 않았으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은 계속되었다. 모사데크는 이스라엘 유니온 은행 대표에게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이란출신 유대인들에게 자금을 이체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은행 대표는 우호적인 해결책으로 양국 사이의 상업적인 네트워크를 세우자고 제시하였다. 결국 양 국가의 국립은행 사이에서 50억 달러의 정산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모사데크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이란과 관계 정상화를 강력하게 추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관리들은 이스라엘을 법률적으로 승인하라고 이란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의회 내의 민족주의자들과 강력한 종교인들 때문에, 모사데크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법률적으로 승인할 수가 없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공산품, 의료 장비 수입 및 기술 지원의 대가로 농산물을 제공하였다. 1953년 6월 11일, 이스라엘과 이란 국립은행들 사이에 신용대출 개설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때 이란-이스라엘 무역회사 IRIS도 설립되었다.  그런데 1952년 10월 영국대사관과 관리들이 이란에서 축출되었다. 이때 영국은 미국에게 모사데크 정권이 불안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란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이란의 엄청난 석유 자산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미국이 이란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영국 및 미국 CIA와 공모하여 모사데크를 권좌에서 강제로 축출하라는 칙령을 발표했고, 1953년 8월 19일 파즈롤라 자헤디 장군이 탱크부대를 동원하여 모사데크를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기간 동안 외국 정부의 전복에 처음으로 참여한 영미 비밀 합동작전이었다. 이 쿠데타 이후 이스라엘과 이란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56-1963년 7년 동안 이스라엘 외교관 즈비 두리엘이 테헤란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1953년 8월 19일 모사데크를 축출한 쿠데타 성공 이후, 샤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으로 되었고, 이란은 미국 및 이스라엘과 수십 년 동안 긴밀한 관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이집트에 맞서 이스라엘과 이란은 더욱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1957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사드의 도움으로 비밀경찰이며, 국내 보안 및 정보기관으로 사박을 창설하였다. 사박은 샤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창설한 비밀경찰로 반대파들을 자의적으로 체포하고 고문을 하면서 반대파를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 최고 정점에서 6만 명의 조직원(15,000명 이상의 상근 인력과 수많은 시간제 정보원)들이 활동하였다. 사박은 총리실에 소속되었고, 사박 국장은 국가안보 업무를 담당하는 부총리 직함을 맡았다. 사박의 많은 간부들은 동시에 군대에서 복무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아야톨라 호메이니 정부 하에서 1979년 2월-9월 사이에 처형된 248명의 군인 중 61명이 사박 간부들이었다. 호메이니 정부는 사박을 정보보안부, 즉 사바마로 대체하였다.  비록 이스라엘과 이란 외교 공관이 테헤란과 텔아비브에서 각각 운영되고 있었지만, 양국 관계는 ‘애매하게 비공식적’으로 남아서, 1979년 혁명 때까지 계속 작동했다. 양국 간의 실질적인 관계는 이란이 이스라엘 석유 수요의 60%를 공급하고, 무역, 수출입, 이스라엘 비행기 엘 알 정기 항공편 운행, 학생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존재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농업, 의학, 군사 등 세 가지 주요 분야에서 특히 강력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카즈빈 프로젝트와 같은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에서 이란과 협력하였다. 1962년 9월 이란의 카즈빈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 이후, 카즈빈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란의 구호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계획 전문가들을 보냈다. 이스라엘이 시작한 작은 프로젝트인 한 마을을 재건하는 것은 유엔에 의해 시작된 더 큰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지진에 의해 황폐화된 지역을 조사하고 계획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로 인해 여러 마을에 대한 종합적인 지역 계획과 세부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스라엘의 이란 지원은 또한 양국 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즈빈 지진은 건축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전문지식을 입증하고 개발 주체로서의 이스라엘의 국제적 이미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테헤란 소재 이스라엘 공관 2인자였던 아리에 레빈은 The Times of Israel에 “1956년 수에즈 작전 이후 아랍과 서방세계로부터 석유 구매를 거부당한 이스라엘은 이란산 석유 구매에 성공했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이란의 농업, 도시계획, 그리고 다른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2년 카즈빈 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지진 이후, 이란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헌신적이고, 열심히 일하며,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카즈빈 지역에서 그들의 농업, 마을 건설, 공동체 조직을 계획하고 다시 만들었으며, 우수한 농업인인 이란인들을 도와 현대적 생산과 농사를 지도하는 재능 있고 경험 많은 전문가들이었다.”라고 밝혔다. 이때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무역 관계가 번창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관료들은 이란 정부와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와도 매우 가까웠다.  1970년대 중반 이란의 무기개발 및 군사력 강화 정책은 이스라엘과 협력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77년 4월 이란의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와 이스라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가 이스라엘-이란 프로젝트(암호명 Flower)를 ‘무기와 석유 교환협정’으로 체결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판매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첨단 지대지 미사일, 즉 무게 750㎏ 사거리 300마일의 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생산하는 사업이었으며, 이 미사일들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었다. 이란의 첨단 지대지 미사일 보유는 이란을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강국으로 만들려는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계획의 일부였다. 1978년 이란은 첨단 지대지 미사일 개발 계약금으로 2억 6천만 달러 상당의 석유를 카르크 섬에서 선적하여 이스라엘로 보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에게 첨단 무기 개발을 위한 자금뿐만 아니라 석유공급도 보장해 주었다. 1979년 2월 이슬람혁명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이란에게 제공할 첨단 지대지 미사일을 거의 완성했다. 그러나 이슬람혁명 발발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군사 협력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런데 2013년 11월 1일 The Times of Israel에 따르면, 이란은 1957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연구」에서 미국과의 협력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평화적 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란은 1967년 테헤란에 미국이 제공한 연구용 원자로를 갖춘 핵연구센터를 열었다. 1968년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1970년 비준했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이 분야에 대한 이란과 미국의 공식적인 협력도 끝났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 발발하지 않았으면,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이란 제국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도움으로 핵 강국이 되었을까? -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2
2021-12-29 | hrights | 조회: 815 | 추천: 2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중간지원조직’이다. 춘천시에서 조례를 통해 출자출연기관의 형태로 설립한 재단법인 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이하 춘천마자센터)이다. 작년 7월 1일 문을 열였고 나는 6월 15일 홀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49년을 야생이라 할 수 있는 시민단체와 농촌에서 농부로 마을활동가로 살아온 내게 춘천마자센터는 약간의 설레임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흔쾌히 동의되지 않는 머뭇거려지는 기관이었다.  이제 1년 6개월밖에 안 되는 미천한 경험과 소회를 가지고 전국의 수많은 중간지원조직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오만일 수도 있겠다. 다만, 요즘 서울시를 보면서 또 이번 시의회에 출석해 한 시의원님으로부터 들은 한마디가 이야기하게 된 자극이 되었다. “마을자치지원센터가 정치색을 띠는 것처럼 비춰지면 안되잖아요. 그래야 혹시 정권(지방자치단체)이 바뀌어도 계속 유지될 수 있죠” 비아냥은 아니었길. 우려였고 걱정이었고 휘둘리지 말고 제 역할을 하라는 조언이었을 거라고 애써 맘먹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국의 수많은 분야 – 마을만들기, 공동체, 주민자치, 사회적경제, 도시재생, 상권활성화, 문화, 기후위기, 생태, 환경, 사회혁신 등등 – 에서 일하고 있는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이 정치색에 의해 좌우되는 또는 개인의 입신양명만을 위해 현장을 떠나 자칫 양쪽(행정과 현장)에서 욕 들어 먹기 딱 좋은 곳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은 현장에서 오랫동안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채득한 경험과 가치를 도모하기 위해 뛰어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믿고 싶다. 실제로 전국 곳곳에서 행정만이었다면 어려웠을 유의미한 결과물들을 내고 있음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현장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경험, 혁신적인 상상력과 실천력 등 민간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새싹들이 풀뿌리처럼 골목마다 마을마다 전국에서 서서히 움트고 돋아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먼 것 같다. 행정의 민간, 시민들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도 극복해야 하고 현장의 이해 부족으로 인한 우격다짐에도 평화롭게 응대해야 한다. 법과 제도, 규정에 가로막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모순을 보며 답답함도 좌절감도 경험하게 된다. 전국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배우던 활동가들은 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처럼 자유를 속박당하기도 한다. 서글퍼지는 활동가들의 모습도 보이는데, 안락함과 매너리즘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야생성과 신념은 마음속에 굳건히 품고 현실에서는 유연함과 여유로움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자칫하면 현장성은 잃고 행정에 익숙해지면서 중간꼰대 혹은 중간갑질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pngtree  대부분 중간지원조직은 민간위탁형태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행정으로부터 요구받는 성과, 실적에 허탈해지고 용역회사 취급하는 갑질에 울분을 삭이기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언제든지 위탁취소가 되거나 예산이 깎여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는 불안정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야기하다 보니 하소연이고 푸념만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지만 나름 애를 쓰고 맘을 쓰며 운동성을 잃지 않으며 살고있는 활동가들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어렸을 때 즐겨 불렀던 노래가 떠오른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청년이다”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이여 힘내시라 그리고 언제든 자유로울 용기를 잃지 않기를 간절한 맘으로 응원한다.
2021-12-29 | hrights | 조회: 513 | 추천: 3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지난 11월 24일 인천지법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60대 남편을 살해한 아내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국민 배심원들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이 피고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려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 중이지만, 이 피고인 – 가정폭력의 피해자 – 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기사(2021년 11월 24일 자 문화일보)를 보면 남편은 의처증이 있었고, 이로 인해 상당 기간 – 아마도 결혼 기간 내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 가정폭력을 행사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일에도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남편은 집을 나가라고 했고, 이에 아내가 “이혼하자.”라고 하자 목을 조르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친정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 이에 분노한 아내가 함께 몸싸움을 벌이던 중에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경우 국민참여재판은 예전에도 있었다. 2015년 경기도에서는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당해 왔던 아내가 사건 당일에도 술에 취해 흉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둔기로 내려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징역 2년에 처해 진 사건이다. 이 재판에서 국민배심원들 9명 중 5명은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천의 위 사건의 경우에는 배심원들 전원이 10~13년의 구형을 선고하라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6년이라는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퇴행적인 판결이 선고된 것일까?  가정폭력으로 인한 ‘부부살해’는 전체 살인 사건의 10%에 이른다. 2019년 SBS가 ‘부부살해’를 조사한 자룔르 보면 2018년 부부간 살인 사건은 31건이고, 살인 사건은 322건이었다. 이 중 남편에 의한 아내 살인 사건이 2배에 이르고, 부부살해 중 가정폭력이 언급된 사건은 10건 중 8건에 육박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가정폭력이 ‘부부 다툼’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이자 가족 구성원들의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고, 생사여탈의 문제가 달린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범죄/폭력 행위가 일회성이 아닌 결혼 기간 내내 지속된다는 점에서 피해자는 엄청난 심리/정서적 억압과 두려움을 내장하고 있어야 하고, 신체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언제고 자신을 폭행하거나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건 끔찍함을 넘은 공포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가해자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범죄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이러한 경험이 없는 이들은 가해자와 함께하는 일상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사진 출처 -마부작침  이번 판결의 핵심은 무경험의 오류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법의 해석에, 그리고 아마도 피해자가 본인의 피해 경험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하지 안/못했거나, 아니면 ‘피해자답지 못’해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배심원들이 생각하는 피해자의 유형과 피해의 유형을 피해자로부터 증거로 제시받지 못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다. 동일한 경험은 “아!” 하면 “어!”라고 할 수 있는 반응, 즉 수용과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아마도 가정폭력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배심원들이었다면, 본인들이 경험하지 않고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보는 피해와 피해자의 전형이란 것이 있었을 것이고,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어 둔감해진 피해자의 폭력 상황에 대한 설명, 또 우발적 이마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기력과 자기소외는 충분히 본인의 폭력피해 경험에 대해 자세하고 구체적이고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이고 정기적으로 폭력과 지배를 당해 온다면, 대다수 사람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법적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내 가족이고, 이 사회가 가족 내의 문제는 사생활영역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강요하고, 자녀들이 부모들이 “그냥 너 하나 참으면 조용해진다.”라고 억압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신체적 폭력과 지배는 심리 정서적 지배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노예로 길들여 진다는 것과 그 상황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우리는 모른다. 경험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접경험을 통해 직접 경험자들의 고통을 인지할 수도 있다.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과 처벌의 수위는 관련법이 제정될 당시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다. 이번 판결은 되레 퇴행한 것으로 비춰진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폭력피해의 경험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직접경험이 아니라 간접경험을 통해. 이는 일찌감치 가정폭력의 부정성에 대해, 이를 실천하지 않을 방안에 대해, 가정폭력 목격자로서 행해야 할 태도에 대해 교육을 통한 간접경험의 기회를 높이는 것이다. 나아가 가정폭력 피해의 지속적, 정기적 특성의 잔혹함을 인정하여, 가해자 남편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여야 한다. 누구도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고 공식적인 노예는 없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노예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직시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가정의 평화’ 운운함으로써 피해자를 가해자에게 돌려보내는 법적 판단은 ‘노예제’를 존속시키는 봉건적 행위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여성 인권의 발전 정도가 제발 시간에 역 비례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살고 싶다.
2021-12-08 | hrights | 조회: 694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