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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1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2-29 17:17
조회
835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 유대인들은 강제 추방당한 난민인가, 자발적 이주민인가?
 2020년 9월 이후, 이스라엘은 UAE・바레인・모로코・수단 등과 국교 정상화(아브라함 협정 체결) 등으로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2021년 현재 이란과 사우디・UAE는 2016년 이후 단절되었던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2021년 4월 이후 1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이란과 사우디는 바그다드에서 고위급 회담을 개최했으며, 2021년 12월 6일에는 UAE 국가안보보좌관 셰이크 타흐눈 빈 자이드가 이란을 방문해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였다. 최근 이스라엘과 사우디・UAE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란과 사우디・UAE 관계 회복 시도는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 개선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이스라엘은 중동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이후를 조용히 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중 하나가 중동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에 대한 배상금 요구 계획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중동 각국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대거 이주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이스라엘국가 건설과 시온주의 강화에 대한 대응으로 중동국가들 내에서 발생한 격렬한 反시온주의 물결로 인한 유대인 탄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인구적인 필요성에 따라, 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 활동 혹은 시온주의자들과 중동국가 통치자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이주라는 견해도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국가들의 反시온주의 정책으로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되었다고 주장한다. 2014년 6월 23일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 이란과 아랍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한 85만 명의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된 난민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기념하여 11월 30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을 채택했다. 2019년 1월 5일 The Times of Israel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란 등 중동국가들로부터 강제 추방당한 유대인에 대해 배상금을 청구할 것이다. 같은 날 이스라엘 Hadashot TV 보도에 따르면, 18개월간 국제 회계 법인을 활용한 조사 결과,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건설 이후 강제 축출당한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에 대해, 이란 및 기타 중동 국가들에 총 2,500억 달러 이상의 배상금을 요구할 계획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강화와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맞서는 중동국가들의 反시온주의 및 反이스라엘 정책으로 중동국가 거주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난민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인구적인 필요성과 중동 국가들보다 좀 더 발전된 사회, 경제적인 여건을 선호해서 중동국가 통치자와의 합의하에 자발적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인지에 대한 균형 잡힌 설명이 필요하다.


 이란은 이러한 설명을 위한 좋은 사례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재위: 1941.09.16-1979.02.11.)가 통치하던 시대의 親이스라엘 정책이 급격하게 反이스라엘 정책으로 변경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란의 정책 변화로 이란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당했는가? 이슬람혁명 이전과 이후의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비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한 것인가 혹은 강제 추방당한 것인가?
 2021년 현재 이스라엘 내 이란 출신 유대인 공동체는 20만-25만 명(기타 자료에는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 구글


□ 이슬람혁명 이전의 비공식적 동맹 관계
: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이란 제국과 이스라엘
 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레자 샤 팔레비(재위: 1925.12.15-1941.09.16.)가 통치하는 이란제국에서 나치독일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고, 나치독일은 이란으로부터 중동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더구나 레자 샤 팔레비가 나치독일을 편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나치독일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 체결)을 파기하고 이란 북쪽에 인접한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레자 샤 팔레비의 나치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연합국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때 나치독일은 소련에 대항하는 기지로 이란을 활용하려고 시도하였다.


 소련은 재빨리 연합국과 동맹을 맺었고, 1941년 7월과 8월에 영국은 이란 제국에게 모든 독일인들을 이란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자 샤 팔레비는 독일인 축출을 거부했다. 결국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기습 공격했고 레자 샤 팔레비 정부는 즉각 항복했다. 이 침공의 전략적 목적은 소련으로 가는 보급선 및 유전과 아바단 정유소(앵글로-이란 석유회사 소유)를 확보하고, 터키와 이란을 거쳐 바쿠의 유전과 영국이 통치하는 인도로 진격을 시도하는 나치독일의 이란 내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결국, 1941년 9월 16일 영국은 레자 샤 팔레비를 강제 퇴위시키고 추방하였다. 샤의 직위는 그의 21살 난 아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로 교체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레자 샤 팔레비의 배려로 1941년 9월 18일까지 터키 국경을 통해 탈출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란은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게 원조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란에서 나치독일이 축출되고, 영국의 영향력이 강화된 이후 1942년 시온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유대기구는 테헤란에 ‘팔레스타인 사무소’를 개소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무소 개소 목적은 폴란드 유대 난민들을 도와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주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무소는 이스라엘 공관으로 1979년 혁명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찬반 투표에서 이란은 다른 이슬람, 아랍 국가들과 함께 반대투표를 했다. 1947년 2월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종식시키겠다고 발표한 이후, 유엔총회는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분할하여 예루살렘지역을 국제 통치하에 두고,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를 수립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유엔 56개 회원국 중 기권국과 불참국을 제외한 유효투표의 2/3의 찬성이 필요했다. 당시 시온주의자들이 이 결의안을 지지하지 않는 국가들에게 지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이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56개의 회원국 중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찬성 33개 국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반대 13개 국가, 중국과 영국을 비롯한 기권 10개 국가로 통과시켰다. 반대한 13개 국가는 이란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 파키스탄, 예멘, 터키, 이집트, 인도, 시암(태국), 쿠바 등 주로 이슬람 국가와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이슬람 국가들과 아랍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유대국가 수립을 요구하는 유엔 분할안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에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관계가 왜 비공식적인 관계로 유지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의 사회경제적 개혁의 필요성은 서방, 특히 미국 및 이스라엘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1949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미국 방문 이후, 이란은 1950년 3월 6일 이란 의회가 신년 휴회하는 중에, 이란 정부는 의회승인 없이 이스라엘을 사실상 국가로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3월 7일 유엔 총회 의장이며 초대 유엔 주재 이란대사인 나스르 알라 엔테잠이 유엔 이스라엘 대표부 대표이며 주미 이스라엘 대사인 압바 에반에게 이스라엘 국가 인정 사실을 통보했다. 3월 26일 이란 정부는 장관 직위를 가진 이란 외교관 레자 사피니아를 특사로서 이스라엘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6월 13일 뉴욕 소재 Jewish Telegraphic Agency는 “6월 12일, 이스라엘에서 테헤란을 대표하는 이란 전권대사 레자 사피니아가 예루살렘에서 공식 축하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한 이후(1949년 12월 13일 이스라엘 의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투표로 결정) 예루살렘에서 외국 외교관이 갖는 첫 번째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데이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몇몇 장관들, 두 명의 수석 랍비들이 참석했다.”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한편 1951년 3월 15일, 이란의회 의원이며 국민전선당 당수인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주도하는 이란의회는 이란 석유산업의 국유화법을 통과시켰다. 곧이어 4월 28일 의회는 모사데크를 총리로 선출하였고,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모사데크가 총리로서 집권한 직후, 5월 1일 모사데크는 영국계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그 자산을 국영 이란 석유회사에 넘기고, 1993년에 만료예정이었던 이 석유회사의 석유채굴권을 취소하였다.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가 이란 석유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석유산업 국유화 조치 이후, 영국 및 서방측 석유회사들의 숙련 기술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유럽에서 석유 수출 시장을 찾지 못한 모사데크 정부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51년 7월 7일, 모사데크 정부는 재정난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영사관을 폐쇄하였으나 이스라엘 국가 승인을 취소하지는 않았으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은 계속되었다. 모사데크는 이스라엘 유니온 은행 대표에게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이란출신 유대인들에게 자금을 이체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은행 대표는 우호적인 해결책으로 양국 사이의 상업적인 네트워크를 세우자고 제시하였다. 결국 양 국가의 국립은행 사이에서 50억 달러의 정산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모사데크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이란과 관계 정상화를 강력하게 추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관리들은 이스라엘을 법률적으로 승인하라고 이란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의회 내의 민족주의자들과 강력한 종교인들 때문에, 모사데크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법률적으로 승인할 수가 없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공산품, 의료 장비 수입 및 기술 지원의 대가로 농산물을 제공하였다. 1953년 6월 11일, 이스라엘과 이란 국립은행들 사이에 신용대출 개설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때 이란-이스라엘 무역회사 IRIS도 설립되었다.


 그런데 1952년 10월 영국대사관과 관리들이 이란에서 축출되었다. 이때 영국은 미국에게 모사데크 정권이 불안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란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이란의 엄청난 석유 자산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미국이 이란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영국 및 미국 CIA와 공모하여 모사데크를 권좌에서 강제로 축출하라는 칙령을 발표했고, 1953년 8월 19일 파즈롤라 자헤디 장군이 탱크부대를 동원하여 모사데크를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기간 동안 외국 정부의 전복에 처음으로 참여한 영미 비밀 합동작전이었다. 이 쿠데타 이후 이스라엘과 이란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56-1963년 7년 동안 이스라엘 외교관 즈비 두리엘이 테헤란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1953년 8월 19일 모사데크를 축출한 쿠데타 성공 이후, 샤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으로 되었고, 이란은 미국 및 이스라엘과 수십 년 동안 긴밀한 관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이집트에 맞서 이스라엘과 이란은 더욱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1957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사드의 도움으로 비밀경찰이며, 국내 보안 및 정보기관으로 사박을 창설하였다. 사박은 샤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창설한 비밀경찰로 반대파들을 자의적으로 체포하고 고문을 하면서 반대파를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 최고 정점에서 6만 명의 조직원(15,000명 이상의 상근 인력과 수많은 시간제 정보원)들이 활동하였다. 사박은 총리실에 소속되었고, 사박 국장은 국가안보 업무를 담당하는 부총리 직함을 맡았다. 사박의 많은 간부들은 동시에 군대에서 복무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아야톨라 호메이니 정부 하에서 1979년 2월-9월 사이에 처형된 248명의 군인 중 61명이 사박 간부들이었다. 호메이니 정부는 사박을 정보보안부, 즉 사바마로 대체하였다.


 비록 이스라엘과 이란 외교 공관이 테헤란과 텔아비브에서 각각 운영되고 있었지만, 양국 관계는 ‘애매하게 비공식적’으로 남아서, 1979년 혁명 때까지 계속 작동했다. 양국 간의 실질적인 관계는 이란이 이스라엘 석유 수요의 60%를 공급하고, 무역, 수출입, 이스라엘 비행기 엘 알 정기 항공편 운행, 학생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존재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농업, 의학, 군사 등 세 가지 주요 분야에서 특히 강력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카즈빈 프로젝트와 같은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에서 이란과 협력하였다. 1962년 9월 이란의 카즈빈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 이후, 카즈빈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란의 구호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계획 전문가들을 보냈다. 이스라엘이 시작한 작은 프로젝트인 한 마을을 재건하는 것은 유엔에 의해 시작된 더 큰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지진에 의해 황폐화된 지역을 조사하고 계획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로 인해 여러 마을에 대한 종합적인 지역 계획과 세부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스라엘의 이란 지원은 또한 양국 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즈빈 지진은 건축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전문지식을 입증하고 개발 주체로서의 이스라엘의 국제적 이미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테헤란 소재 이스라엘 공관 2인자였던 아리에 레빈은 The Times of Israel에 “1956년 수에즈 작전 이후 아랍과 서방세계로부터 석유 구매를 거부당한 이스라엘은 이란산 석유 구매에 성공했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이란의 농업, 도시계획, 그리고 다른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2년 카즈빈 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지진 이후, 이란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헌신적이고, 열심히 일하며,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카즈빈 지역에서 그들의 농업, 마을 건설, 공동체 조직을 계획하고 다시 만들었으며, 우수한 농업인인 이란인들을 도와 현대적 생산과 농사를 지도하는 재능 있고 경험 많은 전문가들이었다.”라고 밝혔다. 이때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무역 관계가 번창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관료들은 이란 정부와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와도 매우 가까웠다.


 1970년대 중반 이란의 무기개발 및 군사력 강화 정책은 이스라엘과 협력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77년 4월 이란의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와 이스라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가 이스라엘-이란 프로젝트(암호명 Flower)를 ‘무기와 석유 교환협정’으로 체결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판매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첨단 지대지 미사일, 즉 무게 750㎏ 사거리 300마일의 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생산하는 사업이었으며, 이 미사일들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었다. 이란의 첨단 지대지 미사일 보유는 이란을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강국으로 만들려는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계획의 일부였다. 1978년 이란은 첨단 지대지 미사일 개발 계약금으로 2억 6천만 달러 상당의 석유를 카르크 섬에서 선적하여 이스라엘로 보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에게 첨단 무기 개발을 위한 자금뿐만 아니라 석유공급도 보장해 주었다. 1979년 2월 이슬람혁명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이란에게 제공할 첨단 지대지 미사일을 거의 완성했다. 그러나 이슬람혁명 발발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군사 협력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런데 2013년 11월 1일 The Times of Israel에 따르면, 이란은 1957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연구」에서 미국과의 협력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평화적 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란은 1967년 테헤란에 미국이 제공한 연구용 원자로를 갖춘 핵연구센터를 열었다. 1968년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1970년 비준했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이 분야에 대한 이란과 미국의 공식적인 협력도 끝났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 발발하지 않았으면,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이란 제국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도움으로 핵 강국이 되었을까?


-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