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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퇴행하는 여성 인권(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2-08 17:09
조회
698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지난 11월 24일 인천지법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60대 남편을 살해한 아내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국민 배심원들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이 피고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려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 중이지만, 이 피고인 – 가정폭력의 피해자 – 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기사(2021년 11월 24일 자 문화일보)를 보면 남편은 의처증이 있었고, 이로 인해 상당 기간 – 아마도 결혼 기간 내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 가정폭력을 행사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일에도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남편은 집을 나가라고 했고, 이에 아내가 “이혼하자.”라고 하자 목을 조르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친정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 이에 분노한 아내가 함께 몸싸움을 벌이던 중에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경우 국민참여재판은 예전에도 있었다. 2015년 경기도에서는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당해 왔던 아내가 사건 당일에도 술에 취해 흉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둔기로 내려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징역 2년에 처해 진 사건이다. 이 재판에서 국민배심원들 9명 중 5명은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천의 위 사건의 경우에는 배심원들 전원이 10~13년의 구형을 선고하라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6년이라는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퇴행적인 판결이 선고된 것일까?


 가정폭력으로 인한 ‘부부살해’는 전체 살인 사건의 10%에 이른다. 2019년 SBS가 ‘부부살해’를 조사한 자룔르 보면 2018년 부부간 살인 사건은 31건이고, 살인 사건은 322건이었다. 이 중 남편에 의한 아내 살인 사건이 2배에 이르고, 부부살해 중 가정폭력이 언급된 사건은 10건 중 8건에 육박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가정폭력이 ‘부부 다툼’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이자 가족 구성원들의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고, 생사여탈의 문제가 달린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범죄/폭력 행위가 일회성이 아닌 결혼 기간 내내 지속된다는 점에서 피해자는 엄청난 심리/정서적 억압과 두려움을 내장하고 있어야 하고, 신체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언제고 자신을 폭행하거나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건 끔찍함을 넘은 공포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가해자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범죄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이러한 경험이 없는 이들은 가해자와 함께하는 일상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사진 출처 -마부작침


 이번 판결의 핵심은 무경험의 오류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법의 해석에, 그리고 아마도 피해자가 본인의 피해 경험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하지 안/못했거나, 아니면 ‘피해자답지 못’해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배심원들이 생각하는 피해자의 유형과 피해의 유형을 피해자로부터 증거로 제시받지 못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다. 동일한 경험은 “아!” 하면 “어!”라고 할 수 있는 반응, 즉 수용과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아마도 가정폭력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배심원들이었다면, 본인들이 경험하지 않고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보는 피해와 피해자의 전형이란 것이 있었을 것이고,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어 둔감해진 피해자의 폭력 상황에 대한 설명, 또 우발적 이마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기력과 자기소외는 충분히 본인의 폭력피해 경험에 대해 자세하고 구체적이고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이고 정기적으로 폭력과 지배를 당해 온다면, 대다수 사람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법적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내 가족이고, 이 사회가 가족 내의 문제는 사생활영역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강요하고, 자녀들이 부모들이 “그냥 너 하나 참으면 조용해진다.”라고 억압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신체적 폭력과 지배는 심리 정서적 지배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노예로 길들여 진다는 것과 그 상황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우리는 모른다. 경험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접경험을 통해 직접 경험자들의 고통을 인지할 수도 있다.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과 처벌의 수위는 관련법이 제정될 당시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다. 이번 판결은 되레 퇴행한 것으로 비춰진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폭력피해의 경험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직접경험이 아니라 간접경험을 통해. 이는 일찌감치 가정폭력의 부정성에 대해, 이를 실천하지 않을 방안에 대해, 가정폭력 목격자로서 행해야 할 태도에 대해 교육을 통한 간접경험의 기회를 높이는 것이다. 나아가 가정폭력 피해의 지속적, 정기적 특성의 잔혹함을 인정하여, 가해자 남편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여야 한다. 누구도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고 공식적인 노예는 없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노예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직시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가정의 평화’ 운운함으로써 피해자를 가해자에게 돌려보내는 법적 판단은 ‘노예제’를 존속시키는 봉건적 행위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여성 인권의 발전 정도가 제발 시간에 역 비례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