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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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내 나고 자란 고향의 효골에는 ‘잇고개’가 마치 관문처럼 있다. 약간 구불구불한 이 고개를 넘어 학교와 시내를 오갔기에 내게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고개였다. 특히 내 두 할머니와의 아련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두 할머니는 친가와 양가 사이의 동서 간이었다. 양할머니가 18살에 갓 시집을 오셨는데, 양할아버지가 나의 친할머니 친정의 지붕 일을 하시다가 그만 낙상하셔서 병을 얻어 두 달을 사시다가 운명하셨다. 신혼의 단꿈도 접은 양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청상(靑孀) 과부가 되시었다.  집안 어른들은 양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양반가의 체면에 재가를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희생을 하며 살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양할머니는 15년을 당신의 친정과 시댁을 오가면서 남편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망부(亡夫)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 끝내 개가를 하지 않고 수절한 할머니에게 문중은 당신의 시아주버니의 둘째 아들인 조카를 양자로 결정하였다.  할머니는 긴 세월을 기다려 양아들을 맞이했다.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기르며, 바느질과 길쌈을 하여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들여 살림을 늘려가니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들이 서당에서 공부를 잘해, 군 백일장에 나갔는데 ‘국화’라는 제목으로 장원하여 자식 둔 재미를 보셨다. 그 아들이 열아홉 살이 되자 혼인을 시키고 그렇게 바라던 손자들을 손수 받으시면서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총애를 하시었다. 손자들이 어머니 젖을 물리고 나면 바로 양할머니의 차지가 되어, 손자 키우는 재미에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가 홀로 된 처음에는 남편의 죽음이 나의 친할머니 때문이라고 원망도 했었지만, 대신 귀한 아들을 양자로 받아 고마운 마음이 되었고, 더구나 손자를 셋이나 낳고 큰 손자는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 군청에 근무해 기쁘기만 했다. 두 할머니는 서로에게 섭섭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움과 기쁨을 안겨 언제나 다정한 모습으로 큰집과 작은집을 왕래하시었다.  이런 두 할머니를 나는 어려서부터 존경했다. 손자들은 무엇이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양할머니, 그 다음이 친할머니였다. 친할머니는 핏줄을 이어 준 할머니요, 양할머니는 나를 헌신적으로 길러주신 분이지만 정(情)은 길러준 양할머니에게 먼저 갔다. 동생에게 어머니의 젖을 빼앗긴 나는 나오지도 않는 할머니의 젖을 빠느라 퍽도 귀찮게 하던 손자였다.  여느 집안에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집안도 지금까지 형제간에 알게 모르게 시기와 경쟁을 했었다. 처음 경쟁은 집이었다. 큰댁이 넓은 집터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양할머니와 어머니는 샘이 나셨다. “우리도 큰댁과 똑같은 집을 짓고 살자”며 큰 결의를 하듯 말씀을 하시었다. 그러고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터를 사고, 큰댁을 지은 목수에게 똑같이 일을 맡겨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리 이사한 다음에는 자식번성 경쟁이었다. 아들이 많아야 자식 농사에 성공한 것처럼 여기던 그 때에 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엿볼 수가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큰집과 우리집 손자녀들이 무려 17명이나 되어 두 할머니는 든든하고 기쁘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양할머니에게 비운이 몰려왔다. 스물두 살의 큰손자가 1949년 3월,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해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어서 둘째 손자가 6․25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셋째인 내가 집안에 알리지도 않고 월남전에 지원하여 두 할머니는 가슴 졸이며 15개월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무운장구를 빌어야 했었다.  어느 날 효골 집에 신문사 기자가 한국군월남 참전을 취재하러 왔었다. ‘혹 손자에게 불행한 소식이 있어서 전하려 온 게 아닌가?’ 깜짝 놀라신 할머니의 모습이 내 사진과 함께 신문사회면에 나기도 했다. 내가 두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월남에서 무사히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도, 두 할머니는 잇고개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셨다. 내가 두 할머니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니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온 동네를 다니며 “우리 손자가 사지(死地)에서 살아왔다”며 기뻐하셨다. 사진 출처 - 구글  그 뒤 내가 고향을 떠날 때마다 잇고개를 넘으면, 두 할머니는 이제 가면 언제 오느냐며 아쉬운 작별을 하시곤 했었다.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 할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그로부터 수 년 후 이미 팔순을 넘기신 두 할머니는, 잠시 고향을 찾은 손자에게 “서울이 좋다고 하던데 우리도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서울에는 두 할머니의 손자녀가 살고 있었기에 서울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감히 노인들을 서울에 모실 수가 없었다. 기차를 무려 12시간이나 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되고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릴 수 있었을 터인데 두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문중에서는 양할머니가 65년을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며 양반가의 체면을 살렸다고 열부(烈婦) 표창을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두 어버이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으로 효자·효부상을 받으셨고 10년 전에는 나와 아내에게도 두 할머니와 부모님을 잘 모셨다하여 효자상과 효부상을 주었다. 한 집안에서 삼대(三代)가 효열(孝烈) 표창을 받은 일은 백 년만인데, 백 년 전에는 고조부모가 효열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할머니의 소원(유언)을 말씀해 달라”는 나의 요구에 “소원은 무슨 소원이냐 ”하시고는 도선산 앞에 세워진 고조부모의 효열비(孝烈碑)를 눈여겨보시면서 당신이 생각하신 속마음을 말씀하셨다.  “비록 두 달도 함께 살지 못해 정도 들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묘와 쌍봉분(雙封墳)으로 하고, 여유가 있으면 표식이나 해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 진지한 말씀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을 다짐하면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지 10년째 되던 해 도선산 자락에 쌍봉분을 만들고 비문을 짓고 내가 직접 글씨를 써서 묘비를 세워 드렸다. 양할머니를 당당히 우리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었고 손자로서는 응당 해드리는 게 도리였다. 그리고 이듬해 생가 할머니에게도 묘비를 세워 드려 손자녀들의 정성을 올렸다.  요즘은 효열 정신이 구시대적 사고라고 치부해 버린다. 나만 잘살면 그만이고 눈앞에 보이는 순간의 만족이 최고라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만연하다. 효열 정신이 퇴색하니 부부의 도리도 무너져 이혼율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부모 형제간에도 갈등이 늘어만 간다. 이 모두가 효열에 대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가서는 아닐지 하는 마음이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이제 할머니들의 나이에 가까이 들어 느끼는 감정은 시대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 할머니의 순수하고 정감이 넘치는 그 모습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오직 희생정신으로 자식 사랑과 손자 사랑, 그리고 우애와 양보의 미덕을 끊임없이 몸소 보여준 두 할머니들이었다.  나는 가끔 고향을 찾아서 잇고개에서 두 할머니가가 주신 정다운 내리사랑 모습을 떠올린다. 그저 손자가 무탈하게 잘되기만을 바라시던 두 할머니의 사랑이 한없이 그리워지기만 한다. *윤영전(尹永典) 소설가. 수필가. 서예초대작가. 칼럼니스트 소설집(못다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강물은 흐른다) 에세이집(평화,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인연, 아름다운 만남) 희수기념문집. 서초문학상, 국회통일상, 서예초대작가 한국작가회의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수필가. 평통서문예원 원장. 산영수필문학회장 역임 효열상(윤씨문중) 근묵회 회장.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2019-11-06 | hrights | 조회: 788 | 추천: 2
권용선/ 수유너머 104 연구원  그는 말했다. “예전에 정치 저널리스트라는 명칭은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흐, 보댕, 몽테스키외, 블랙스톤, 벤담, 마블리, 사바리, 아담 스미스, 루소와 같은 위대한 저술가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 관계하고 있는 모든 어설픈 저술가들을 지칭하고 있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예언자이며, 사상적인 선지자였던 정치 저널리스트가 이제는 현실의 바람에 흔들리는 깃대가 되어버렸다.”(발자크, 「저널리즘」 중에서.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 그의 시대에 신문기자는 모두 정치 저널리스트에 속했다. 이들 조직은 “기사는 한 문장도 쓰지 않으며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관여하는” 사장, 주필, 사주, 편집장과 무대 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너가수처럼 행동하는 논설위원, 연극의 조연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기자, 편집장이나 사주의 명령에 따라 ‘자크의 요리사’처럼 짧은 기사들을 이리저리 오려붙이는 편집기자, 의원들을 성공시키거나 명성을 실추시키며 정치드라마를 연출하는 국회 출입기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독자를 잡기 위해 각양각색의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던 크고 작은 사이즈의 신문, 잡지, 팸플릿들, “먼저 때려라! 변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구호를 공유했던 정치 저널리즘의 행동양식, 발자크의 눈에 비친 루이 필립 시대의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세부만 살짝 바꾼다면, 같은 방식으로 우리시대의 저널리즘에 대해 풍자하거나 냉소하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법무부 장관 자리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들끓었던 지난 시간 동안 ‘검찰개혁’이라는 구호로 수렴된 ‘사법개혁’의 절박함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한국사회가 지닌 온갖 ‘개혁할 거리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너무 많은 이슈들이 한꺼번에 장관후보자를 매개로 쏟아져 나왔고, 속보와 단독 타이틀을 단 기사들의 홍수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법적 판단의 층위와 도덕적 기대의 차원, 사실과 전언과 정황은 구분되지 않았다. 분초를 다투며 쏟아지는 기사들 대부분은 사건 (혹은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시간을 독자들에게 배려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선결정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기사들을 취합함으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사실과 정의의 서사를 스스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미디어가 되거나 ‘다른’ 미디어의 목소리를 찾기도 했다. 전선은 복잡해졌고, 평소라면 선명한 대립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적어도 언어적 차원에서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었지만, 검찰과 언론의 공조로 만들어진 프레임 속에서, 유죄추정의 분위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레임은 법적인 판단과 근거 이전에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짜였고, 여기에 장관 후보의 정무 감각이나 업무 수행능력에 대한 토론과 판단은 주변화 되었다.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팩트가 아닌 뉘앙스”(권석천, 「검찰청의 편집자들」 중에서)라는 비유는 단순한 비유 이상이었던 셈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 있었던 기자들과 장관 후보의 간담회, 비슷한 질문들에 대한 비슷한 답변과 사과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장시간 반복되었던 기이한 풍경이 여전히 씁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자들 누구도 현장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았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의 스마트 폰에 적혀 있는 질문들을 ‘읽고’ 있었다. 누가 저들에게 질문을 지시하는 걸까, 모든 언론사들이 간담회장을 수습기자들의 필드워크 장소로 활용하기로 약속이나 한 걸까, 누구든 핵심을 찌르는 묵직한 질문 하나쯤 던져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었다. 기자들은 당당해보이지도, 날렵해보이지도, 영리해보이지도, 사려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저들은 왜 기자가 되고 싶었을까.  일전에 만났던 한 주간지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그래도 내가 쓴 기사랑 타사 기자들이 쓴 걸 크로스 체킹할 시간이 약간이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속보, 단독 기사들이 매분매초 튀어나온다고요. 머뭇거리는 순간 도태될지도 몰라요. 물론, 아주 가끔 정말 제대로 된 기사들이 나오기도 해요. 하지만 포털 메인에는 이런 양질의 기사들이 노출될 확률이 제로예요. 절대로 노출되지 않아요.” 사정이 이러니 기자들만 탓할 수도 없다. 광고주를 의식하며 감각적인 제목으로 클릭수를 늘리려는 언론의 욕망과 가벼운 내용으로 최대치의 정보를 얻으려는 유저들의 이해가 맞물려 돌아가는 디지털 환경은 이제 저널리즘 환경의 상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발행인 설즈버거의 말처럼, 포털 사이트가 플랫폼이 되는 언론 환경은 뉴스를 저널리즘이 아니라 단순 콘텐츠 수준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제 지식과 통찰과 결기가 느껴지는 제대로 된 뉴스들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동료, 후배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괴로움’이 없어요. 어려운 시대 특히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인 기자들이 괴로워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주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보도 내용과 전망, 예측이 수천 번, 수만 번 틀렸어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핵심은 어떤 것인지 천착하려는 각고의 노력과 의식이 없습니다. 이익집단의 파수병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그야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 맞는 인내와 각오, 그리고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기획대담; 리영희-김주언」<미디어오늘> 1997. 2. 3) 발자크의 시대로부터 180여 년, 리영희 선생이 활동했던 ‘검열’의 군사독재 시절로부터 수십여 년, 왜 저널리즘에 대한 그들의 걱정이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음이 무겁다.
2019-10-23 | hrights | 조회: 769 | 추천: 7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예멘 내전 구도  2015년 3월 이후 계속되는 예멘 내전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자금지원을 받는 ACLED 발표에 따르면, 2015년 3월부터 2019년 6월 중순까지 민간인들과 전투원들을 합쳐 9만 1천 6백 명의 예멘인들이 사망했다. 유엔 관계자에 따르면 예멘의 인권 상황은 세계 최악이며, 3천만 명에 가까운 예멘 주민의 3분의 2인 2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과 북서부 예멘에 기반을 둔 후티의 5년에 가까운 분쟁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2012년 2월 21일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는 단독후보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2년간의 과도기간 동안 예멘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임기 만료 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결국 2014년 9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했다. 2015년 1월 22일, 후티는 하디대통령을 사임시켜 가택 연금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만들었다. 2월 하디는 아덴으로 탈출해 사임을 철회하고, 후티의 정권 탈취를 맹비난하였다. 2015년 3월 25일 후티가 아덴을 공격하자, 하디는 보트를 타고 사우디로 탈출하였다. 이 때 사우디가 아랍연합군을 조직하여 하디정부를 복귀시키고, 사나와 주요 도시들로부터 후티 전사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군사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예멘 내전을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 대 후티의 구조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내전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하드라마우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아라비아반도의 알카에다와 예멘 ISIL도 서로 경쟁하면서, 영토 장악을 위하여 후티 혹은 하디 정부 세력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알카에다는 사우디와 예멘의 북부경계-중부내륙-남부해안가를 남북으로 잇는 상당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2019년 8월 남부예멘에서 사우디가 후원하는 하디정부와 UAE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 사이에서 오래 계속된 긴장이 폭발하면서, 사우디와 UAE의 지역 동맹들 사이에서 전투가 발발했다는 것이다. UAE는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기도하다. 전통적으로 매우 강력한 역내 동맹으로 알려진 사우디와 UAE 사이에서 진행되는, 아덴을 포함한 남부예멘 지배권 투쟁은, 역내 정치 변동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중동 역내에서 사우디가 약화되고, UAE가 부상할 것인가? □ 남부과도위원회/하디정부의 분쟁  2019년 8월 15일 UAE가 지원하는 예멘의 남부과도위원회는 남부예멘의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남부과도위원회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1967-1990년까지 남부예멘지역에 존재했던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영역(남예멘)’에 ‘독립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남부독립 국가건설을 반대하는 하디정부와 남부과도위원회 사이의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제 남부과도위원회의 주요한 적은, 주로 서북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후티 반군이라기보다는, 2015년 후티에게 축출되어 아덴에 통치기반을 세우고, 사우디에 망명 중인 하디정부다.  사우디와 UAE는 명목상으로는 사나와 서북부 지역에서 후티를 축출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하디정부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2015년 결성된 아랍연합군의 동맹국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우디와 UAE는 남부 분리 독립 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하고 있다. 최근 하디정부는 아랍연합군에서 UAE를 배제시킬 것을 사우디에게 요구하였다.  올해 8월 초부터 아덴에서 사우디가 지원하는 친 하디정부 세력들과 UAE가 지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세력들이 예멘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는 8월 1일 아덴 근처, 남부과도위원회 제1지원 여단장 무니르 알 야피에 대한 미사일 암살 테러 공격으로 촉발되었다. 남부과도위원회에 소속된 UAE 지원군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하디정부에 충성하는 세력 간에 나흘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후티운동에 맞서 협력하는 아랍연합 소속인 사우디와 UAE 사이에 균열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후티가 이 미사일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고 즉시 밝혔으나, 남부과도위원회는 이 공격의 책임을 하디정부에게 돌렸다. 8월 6일 기자회견에서 남부과도위원회 부의장 하니 빈 브레이크는 ‘하디정부 및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된 이슬라흐 당이 협력하여 아덴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이번 테러 공격을 자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남부과도위원회가 하디정부를 아덴에서 추방할 명분이 분명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후티가 스스로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빈 브레이크가 끝내 이 테러 공격에 대해 후티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슬라흐 당은 1990년 사우디의 자금지원을 받아 창설된 정치 단체로 하시드부족 연맹 및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되어 있다. 하시드부족 연맹은 과거 살레 대통령 통치 시절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부족으로, 북부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빈 브레이크가 하디정부와 이슬라흐 당을 연계해서 책임을 물은 이유는 하디 정부의 부통령이자 정부군 지휘관인 알리 모신 알 아흐마르 장군이 하시드 부족연맹 출신으로 이슬라흐 당의 창설 멤버이며, 북부지역에 위치한 마레브와 알 자우프 소재 이슬라흐 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디 정부군은 알 아흐마르 가문이 속한 북부 하시드 부족연맹과 이슬람주의자 세력인 이슬라흐 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이러한 하디정부군의 특성 때문에 남부주민들은 하디대통령이 남부지역 아비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북부지역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간주한다.  반면에 남부지역 이익을 대변한다는 과도국가위원회 지도부에서는 남부지역 라히즈와 알 달레 출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실 남부의 분리추구 의식은 1986년, 1994년의 주요한 두 번의 예멘내전에서 창출되고, 전임 통치자인 살레의 통치기간 동안에 실행된 남부 차별 정책으로 인해서 강화되어 남부지역에 뿌리깊이 존재한다. 남부분리주의자 군벌을 주도하는 세력은 주로 무장한 살라피, 사회주의자 및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재건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또 지방에서 활동하는 과도국가위원회 연대 세력은 지역기반으로 지방 출신 전사들을 집결시키고, 각 지방에서 하디정부군과의 전투하고 있다. □ 남부과도위원회의 전투력 증강  2019년 8월 10일 하디정부의 내무부장관 아흐마드 마이사리는 “UAE는 남부과도위원회가 하디정부의 수도인 아덴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UAE는 남부과도위원회에게 400대 이상의 장갑차와 쿠데타 민병대를 지원했으며, 수천 명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아덴 전투에 참가시켰다.”고 주장하면서 UAE를 비난했다. 이 전투에서 40명이 사망하고, 260명이 부상당했다.  2019년 8월 1일, 무니르 알 야피에 대한 암살 테러공격 직후, 남부과도위원회 세력들은 아덴과 아덴 주변 지역들 라히즈, 아비얀, 타이즈 등의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8월 9일~10일 라히즈 소재 하디정부군들, 즉 제4 지구 사령부와 헌병사령부가 남부과도위원회에 합류하였고 내무부 산하 부대들, 즉 라히즈 경찰청과 아덴, 라히즈, 아비얀의 특수부대도 남부과도위원회의 편에 섰다. 이로써 남부과도위원회가 아덴 주변 지역 하디정부군들을 흡수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하디정부군에 맞서는 전투를 주도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핵심부대인 보안벨트군은 야피 부족연맹으로부터 병사 대부분을 충원하며 아덴, 아비얀, 라히즈, 달레에 배치된다. 이외에 주요 지역에 기반을 둔 사브와니 정예부대와 하드라미 정예부대가 남부과도위원회 연계 세력들로 활동한다. 사브와니 정예부대는 아덴 동쪽 385㎞에 위치하고,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된 사브와 출신의 병사들로, 하드라미 정예부대는 하드라마우트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된 지방군대다. 보안벨트, 사브와니 정예부대와 하드라미 정예부대는 남부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중추세력들이며, 부족과 지역을 기반으로 전사들을 집결시키고, 각기 해당지역에서 전투에 참가한다. 따라서 이들 부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지휘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8월 말경에 남부과도위원회가 사브와 지역 장악을 시도하면서, 하디정부군과 사브와니 정예부대 사이에 일진일퇴의 격전이 발발하였다.  사실 보안벨트, 사브와니 정예부대, 하드라미 정예부대 등은 2016년 후티 반군의 활동을 막아내기 위한 아랍연합군의 일부로 UAE의 후원을 받아 남부에서 창설되었다. 그러나 2017년 5월 하디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부과도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이 부대들은 남부과도위원회의 주력군이 되었고, 하디정부에 대항하는 독립 투쟁 전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 남부과도위원회의 독립국가 건설 가능성  남부가 통합된 예멘공화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남부가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촉발된 1994년 내전 이후 계속 되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2007년 남부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파벌들과 인물들이 이끄는 느슨한 연합으로 준군사조직인 남부운동이 출현하였다. 남부운동은 예멘공화국으로부터 ‘남부 탈퇴’와, 예멘공화국 창립 이전의 독립국가인 ‘예멘 인민민주공화국’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2017년 남부운동은 전임 아덴주지사 아이다루스 알 주바이디가 이끄는 남부과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UAE와 동맹을 맺은 남부의 정치인들, 부족지도자들, 군부인물들로 구성된 남부과도위원회는 남부운동의 강력한 분리 독립 움직임을 계승하였다.  2019년 8월 15일, 남부과도위원회는 “오늘날 남부주민들의 승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1994년 내전이후, 북부가 남부를 점령하여 25년간 통치하는 동안 남부 주민들의 투쟁은 엄청나고, 희생으로 가득 찼다. 이제 남부 독립 연방 국가를 회복시키려는 남부 주민들의 목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는 정치 선언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UAE가 지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에 맞서 하디정부를 지원하는 사우디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9월 21일 사우디 정부는 리야드에서 망명중인 하디정부의 고문인 무타히르 아드난에게 사우디를 떠나도록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무타히르 아드난이 아랍연합을 비난하면서, 아랍연합이 남부과도위원회 세력들의 아덴 점령을 지원한 UAE를 응징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우디는 예멘 문제로 UAE와의 불화가 심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사우디와 UAE는 중동 역내에서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한편임에도 불구하고, 예멘 내전에서 양국의 이해관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외견상 사우디나 UAE 양 측은 북부지역을 장악한 후티에 맞서 가능한 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부지역에서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은 예멘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후티와 대화를 시도하는 반면, 남부 예멘에서 사우디와 UAE 사이에 놓인 불화에 적극 개입하여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예멘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남부예멘에서는 사우디가 UAE에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에게는 사우디보다는 UAE가 예멘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동 역내정책을 조정하는데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서 남부 예멘에서는 사우디가 후원하는 하디정부가 더욱 약화되고, UAE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면서 남부독립국가 건설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2019-10-08 | hrights | 조회: 1288 | 추천: 2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국가의 구성요소를 주권, 인구, 영토로 보는 것이 상례다. 이 중 핵심 요소는 주권이다. 주권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주권에서 지배를 뺄 수는 없다. 지배는 근본적으로 신체의 자발성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현되는 자유는 신체의 자발성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다. 지배와 자유가 대립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고, 모두가 모두에 의해 지배받는 데서 성립한다. 달리 말하면, 지배받는 인민이 지배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은 지배할 줄도 알고 지배받을 줄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은 평소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실행에 옮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평소에 지배받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늘 실행에 옮기고 있어야 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같이 지배의 권리와 피지배의 의무를 정확하게 인식해서 균형을 잡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정치의식이다.  그런데 누구나 외부의 강압은 물론이고 간섭조차 배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타고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을 타고나는 것이다. 그 바탕은 생명이다. 생명은 무제약적인 본능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명의 무제약적인 본능이 충돌을 일으키면 근대철학자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일어난다. 이를 극복하여 가능한 한 모두가 평화 속에서 복지를 누리고자 형성하는 것이 국가다. 따라서, 지배받지 않고 지배하기만 하려는 사람이나 지배하지 않고 지배받기만 하려는 사람은 국가의 일원으로서 자격이 없다.  국가가 국가로서 모든 국민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바탕은 원칙상 서로가 서로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받기로 한 공공의 계약이다. 공공의 계약이 현실화된 것이 법이다. 법은 지배의 권리와 피지배의 의무간의 균형 잡힌 동시성을 바탕으로 국민의 사회적인 행동이 갖는 정당성과 부당성을 규정한다. 이러한 법 앞에서 예외가 있어서도 안 되고 불평등이 있어서도 안 된다.  현실적으로 국민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누군가가 법을 제정해야 하고 누군가가 법에 따라 국가의 일을 집행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법 위반을 감시하고 처벌해야 한다. 즉 입법과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할 사람들을 정해야 한다. 이들은 모든 국민이 가지는 지배의 권리를 위임받아 그 권한 내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이들에게서 지배할 권리와 지배받을 의무는 직접적이다. 그 반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은 평소 지배할 권리는 간접적으로 행사하고, 지배받을 의무는 직접 지켜야 한다.   이러한 직간접 권리 간의 불균형에 따라, 지배할 권리를 직접 발휘하는 소수가 지배할 권리를 간접적으로 발휘하는 대다수의 국민을 오로지 지배받을 의무를 지닐 뿐 지배할 권리를 갖지 않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 이 문제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 사법 영역이다. 사법적인 권력을 지닌 소수는 임시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러한 권력을 소유한 것으로 자타에 의해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법은 국민의 행동을 대상으로 일치와 위반을 겨냥한다. 하지만 사법 권력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행동 중 법 위반의 경우만을 다룬다. 법 위반의 행동을 하는 국민에 대해 강제적인 폭력을 동원해 처벌을 가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기능이다. 강제적인 폭력에 의한 처벌을 가할 수 없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립할 수 없다. 그 강제적인 폭력을 수행하는 일차적인 국가기구가 경찰과 검찰이고, 그 이차적인 국가기구가 법원이다. 그 배후의 국가기구로서 군대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강제적인 국가기구들의 바탕에는 전체 국민이 있다.  국가가 수행하는 강제적인 폭력의 일차적인 실현은 법정에의 기소이고 최종적인 실현은 판결과 판결의 집행이다. 기소를 전담하는 검찰과 판결을 전담하는 법원, 그리고 검찰에 속한 검사들과 법원에 속한 판사들은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아니다. 적어도 법 위반을 둘러싼 지배의 권리와 그에 따른 권력은 국민이 행사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국민이 아닌 데 국민의 생활 즉 국가 구성에 의한 삶을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은 국민을 위한 도구다. 검찰과 법원이 그러하다. 말하자면, 검찰과 법원은 원칙상 비인격적인 도구다. 그래서 모든 정규직 공무원이 그러하듯이, 선출하지 않고 법령에 따라 쓸 만한 도구인가를 판정해 선발하는 것이다.  비인격적인 도구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 발휘할 수 있고 그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이 지닌 생활 도구를 잘못 사용해 저 자신을 다치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은 철저히 그들 자신이 아닌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도구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자는 도구를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 도구가 주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혹은 그저 눈치만 살피면서 도구 자신을 위해 도구인 자신을 활용하게 되면, 그 도구는 폐기 처분해야 마땅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도구는 하위의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컴퓨터라는 도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니터도 있어야 하고 자판과 마우스가 있어야 한다. 검찰과 법원이라는 도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검사들과 판사들이 있어야 한다. 검사들과 판사들은 저 스스로 오로지 법의 도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법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기에 검사들과 판사들은 국민을 위한 도구다. 만약 그들이 개인적으로 지닌 그들 자신의 인격에 따라 검찰을 인격으로 된 기관으로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검찰을 인격의 집합체로 생각해 이해(利害)관계를 다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더욱이 그런 생각을 국가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위헌적인 근본 오류이고 그 자체로 범법이다. 강제적인 폭력인 국가 공권력의 배후인 군대가 군대 자체를 인격의 집합체로 생각해 그 자신의 이해(利害)를 다투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바로 그것이 쿠데타인 것과 동일하다.  국가는 국민의 공동인격체이지만, 검찰은 국민의 도구이지 인격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검사인 한에서 검사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것은 검찰도 검사도 그 자신의 이해 여부를 다툴 수 있는 기구도 기관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검찰이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격체인 양 활동한다면, 그런 활동의 기미만으로도 그런 검찰은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검찰이 쥐고 있는 것이 칼이 아니라, 검찰이 곧 칼이다. 그 칼을 사용하는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이다. 칼이 주인을 해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당연히 부러뜨려 내버리고 새로운 칼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 시민은 지배할 권리를 언제든지 직접 행사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19-10-01 | hrights | 조회: 647 | 추천: 4
이 윤/ 경찰관  한국에는 경찰관 노동조합이 없다. 경찰관 노조라고? 사람들에게 이건 착한 악마라거나 날씬한 돼지만큼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지금까지 경찰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대기업 사주나 정권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농성 중인 근로자들의 파업현장에 투입되어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체포하였으며, 노조 지휘부들을 수배하고 검거하였다. 7,80년대에 노동운동가는 공산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고, 그들을 검거하여 수사하는 것도 호국경찰을 표방하는 경찰의 일 중 하나였다. 2009년 쌍용차 파업 현장에 대한 경찰의 진압, 2019년 민주노총의 국회 앞 집회 도중 차로 점거 및 경찰관 폭행을 이유로 위원장 포함 3명 구속 등 노조와 경찰이 서로 대립하는 입장인 것은 지금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조 잡는 경찰이 자신들의 노조를 만들어 권익을 지키겠다고 하면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이 음주운전을 하겠다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찰조직에 노조를 설립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가당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경찰관들에게 노조가 필요하다.  경찰관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들에게는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다.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중앙집권적 조직체계 내에서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정치적으로 편향되거나 이해관계 일방 당사자에게만 유리한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이 때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기하여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용감한 누군가가 지시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징계에 이은 소송 등 장기간의 외로운 싸움을 견뎌낼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걸고. 그런 경우 노동조합이 있다면 그 사람을 조직의 부당한 조치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조라는 보호막은 경찰관들을 법과 원칙, 상식과 양심에 따라 근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노조가 관찰자가 되므로 조직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부패에 대한 자정기능 효과도 기대된다. 경찰관과 경찰조직을 상대로 막말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노조차원에서 사과를 요구할 수 있고, 경찰과 치안에 관련된 정부의 각종 개혁 작업에 대해 일부 지휘부의 입장이 아닌 경찰관 전체의 공식 입장을 제시할 수 있어 정책의 현실성과 실행가능성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경찰의 기본 업무에 충실하도록 노조가 돕고 인도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간 활동한 경찰개혁위원회에서 마련한 권고안에 경찰관 노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조가 있다면 개혁 작업은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한국 외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는 경찰관 노조가 있다. 2005년 미국 L.A.의 한 경찰서 형사반장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L.A. 경찰관 노조는 매년 시의회와 임금협상을 한다. 뉴욕 경찰은 계급별로 노조가 있어 새로운 제도 도입 시 협상하고, 업무환경 개선, 임금 협상 등을 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는 경찰노조가 설립되어 있으며, 영국을 제외한 나라들에서 노동3권이 모두 보장된다. 종종 프랑스 경찰이 파업 중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 전역의 경찰노조를 아우르는 유럽경찰노조연합과 유럽경찰노조연맹도 있다.  경찰관 노조가 필요하다고 하면 ‘경찰이 파업할 때 치안은 누가 유지하느냐’, ‘경찰이 파업하면서 총기를 사용하면 위험하다’라는 우려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아직 한국 공무원들은 법적으로 단체행동권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경찰관 노조가 생기더라도 파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  요즘 경찰관들은 ‘경찰관에게만 인권이 없다’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주취자로부터 욕을 먹거나 폭행을 당하고, 시위현장에서 똥물을 뒤집어쓰고 매를 맞으면서도 경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인내심의 한계까지 참아낸다. 참혹한 범죄현장과 변사사건 처리에서 받는 심리적 충격은 켜켜이 누적된다. 그러다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찰관도 많다. 최근 4년간 한 해 평균 22명의 경찰관이 자살하였으며, 일반 공무원보다 자살률이 1.7배가량 높다고 한다. 자신의 인권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인권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 것이다. 이제 경찰관 노조 설립도 고려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19-09-23 | hrights | 조회: 2820 | 추천: 52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산자수려하고 공기 좋은 괴산(槐山)에서는 가을이면 ‘홍명희(洪命熹) 문학제’가 열린다. 마치 노란비단자락을 깔아놓은 듯 황금들판이 눈부시다. 마을 곳곳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정취가 더욱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괴산은 <임꺽정(林巨正)>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 작가의 고향이다. 벽초 탄생을 기념하는 문학행사는 인산리 생가마을에서 열렸다. 이백 오십년도 더된 고가는 그동안 관리소홀로 헐릴 뻔했는데 그곳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통한옥이 한 백 칸도 넘는 생가에는 한때 수십 명의 식솔들을 거느릴 정도로 지난날의 사대부가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풍산 홍씨인 벽초는 증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길(祐吉)이고 조부는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낸 홍승목(承穆)이었다.  벽초 그는 1888년 7월 3일 금산군수를 지낸 부친 홍범식(範植)과 모친 은진 송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신학문을 접한 뒤,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서양문학과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탐닉한 수재였다고 한다.  당시 절친하게 지낸 춘원, 육당과 함께 조선의 삼재(三才)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삼재들의 모습이 각각 떠오름에도, 춘원과 육당의 친일행적에 대하여 아쉬움이 크기만 했었다. 그러나 벽초 만은 분단 조국의 통일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벽초는 1910년 1월에 유학해 졸업을 앞두고 귀국했다. 그해 8월 29일 부친이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로 순국하자, 그 충격으로 민족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나라를 찾아라! 친일하지 말라!”는 아버지 유언을 그는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고, 가훈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월 괴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도 치렀다. 1924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장에 이어 1926년 민족의 교육기관인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어서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카프맹원에 연류 되어 1년 6개월 수형생활을 해야만 했다.  해방이후 조선문학가 동맹위원장으로 추대되고 1948년 백범과 평양남북연석회의에 참석 후 남쪽의 정세가 긴박해 북에 잔류했다. 이어 북한의 초대 내각부수상과 IOC위원 올림픽위원장 인민회의 부위원장과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지냈다. 1986년 3월 5일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81세에 운명하였다. 그는 평양근교 애국열사릉에 잠들었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시대에서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애국지사였다. 만해가 독립운동가요 민족시인이듯, 벽초 또한 해방운동지도자요 남북근대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필생의 역작, 대하소설인 ‘임꺽정’도 남북 동포들이 애독하는 소설로 영원히 남아 있다. 또한 작품으로 ‘학창산화’(學窓散話)가 1926년 ‘조선도서사’에서 발행되기도 했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양주 백정의 아들인 임꺽정이 의적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60년대 말에 ‘임꺽정’이란 영화를 관람하면서 임꺽정의 정의로운 행동에 크게 감동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임꺽정>이 세상에 나온 뒤 금서와 저작권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북의 소설 <황진이>를 쓴 벽초의 손자인 홍석중 작가와 저작권계약을 맺고 벽초 탄생기념으로 임꺽정 소설 전권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는 남북문학작품교류에 큰 장을 열었고 남북의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임꺽정 행사는 벽초의 생가가 있는 인산리에서 선산이 있는 제월리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괴강이 유유히 흘러 산수화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제월광장에는 벽초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었고 비 앞의 통일노둣돌에다 많은 문인들의 친필이 새기어있었다. 나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을 노둣돌 한 장에 손수 써 놓았다.  금서였던 북쪽 작가의 글이 일부 해제되면서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지역 보수단체들이 이념과 사상을 문제 삼아 강제 철거했다가 4년 후에야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탈냉전 시대가 끝난 지 오래지만 문학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 갈등이 일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에 목숨까지 바쳐 순국을 했는데도, 조국분단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광장에는 임꺽정 소설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이 담긴 걸게 만장이 펄럭이고 풍물놀이패가 신명나게 판을 벌였다. 마치 임꺽정 소설에 나오는 서민들의 큰잔치처럼, 참석한 문인들도 막걸리를 나무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벽초의 임꺽정을 그리움에서 어우러진 두레의 판이었다.  <임꺽정>은 벽초의 탁월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남북의 역사소설에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비록 대하장편 열권이지만 봉단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 등 여섯 분류의 편들이 각각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많은 분야의 독서와 조선조실록을 탐독했기에 임꺽정 시대의 실상을 잘 묘사한 최고의 역작이었다.  소설 <임꺽정>이 미국 마가릿 미첼 작가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단 한편의 불변의 명작이라는 것 또한 대단했다. 진정 벽초의 소설 <임꺽정>은 분단조국에서 오직 통일만을 꿈꾸고 실현하려는 의지의 민족작가가 쓴 소설임을 강조하고 싶은 대목이었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 사진 출처 - 구글  이날 벽초의 문학을 평론한 강 교수와 자리를 함께하면서, 내 외가가 나주풍산 홍씨라 했더니 그는 홍명희 선생의 조부가 나의 외가인 전남 나주 풍산리에서 이곳 괴산으로 양자를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벽초 작가는 내 외가의 형님 되는 희(熹)자 항렬이었다. 나는 그의 문학비 앞에 더욱 다가가서 묵상을 올렸다.  이 땅에 분단만 아니었다면 벽초는 물론 남북의 문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하였다면 보다 한반도 문단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노둣돌에 새긴 글처럼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오고 마는 그날만을 더욱 기원하기로 다짐하였다.  나는 벽초 작가의 고향에서 그동안 써온 소설과 수필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단 한편의 작품이라도 당신처럼 격조 있는 작품으로 사랑받는 글을 써야 한다고 다짐했다. ‘임꺽정’의 정의로움과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생각하면서!!
2019-09-18 | hrights | 조회: 1150 | 추천: 5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이차대전 기간 중 자행되었던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은 식민지배의 폭력성이 전쟁이라는 사건 속에서 구체화된 하나의 비극적 사례였다. 종전 후 일본, 적어도 일본정부는 한 번도 전쟁과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보상과 배상, 그리고 진심어린 사과의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거부가 부딪쳤을 때, 사건의 표면에 드러난 것은 경제 분야의 교류를 둘러싼 긴장이었지만, 배후에는 오래 묵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대법원의 판결 후 양국 정부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반일정서와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양심적인 일본의 시민들이 머리를 숙이고 우리와 손을 잡았지만, 아베 정권의 오만함과 일본의 극우세력이 부추긴 ‘혐한’ 분위기 또한 사소하지 않았다. 하나의 사안을 둘러싼 양국 정부의 온도차는 컸고, 시민사회의 분노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뜨거웠다. 소년의 나이에 징용공으로 끌려갔던 이춘식 씨는 95세 노인이 되어 배상판결을 받았지만, 이 모든 사태에 어쩔 줄 몰랐고, 끝내 “나 때문에...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 개인의 삶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의지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저항할 수 없는 제국의 폭력에 떠밀려 징용공이 되었던 이춘식 씨의 경우는 예외적인 개인사가 아니라, 어둡고 고통스러운 한국근현대사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며 그의 고통에 마음을 보탠다. 과거와 현재는 이런 식으로 이어져 있다. 시인 김시종의 말처럼, “사람은 이어진다/ 연고와 이어지고 일과 이어지며/ 세속에 녹아들어 대중”이 (「이어지다」)되기도 하고, 불편부당에 맞서 함께 싸울 때 동지로 거듭나기도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와 재일 원로시인 김시종 씨(오른쪽) 사진 출처 - 한겨레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날카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마다 재일(在日) 한국인들이 자꾸 마음에 밟힌다. 차별과 불편은 그들의 유구한 일상이었고, 특정한 사건들 속에서 그들은 자주 폭력과 혐오의 타깃이 되어왔다. 이 여름의 분위기가 또 그들에게 어떤 불안과 고통의 짐을 지우는 건 아닐까. 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삶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재일’은 여전히 멀리 있다. 보이지 않는 그들, 한국에도 북한에도 일본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들이 일본 땅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마음껏 일본정부를 비판하고 규탄하고 싸움을 벌이는 이 순간에도 바깥에 있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 그들은 대부분 분노를 감추고 숨을 죽인다. 이것이 어쩌면 ‘재일’의 운명이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재일을 산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들여다보면 ‘재일’에도 여러 얼굴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 전쟁무기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노역하는 재일도 있었고, 그들에게 차라리 굶을 것을 설득하던 재일도 있었다. 조선어와 의복을 고수하며 폭력의 타깃이 되기를 자처하고 ‘본명선언’을 통해 입신출세의 길을 스스로 봉쇄하는 ‘재일’도 있지만, 조상의 언어와 고향을 기억에서 지움으로써 스스로 일본인이 되고자 애쓰는 ‘재일’도 언제나 있어왔다.  그래서 김시종은 “저는 목소리가 없어요/ 소리를 지를 만한 의지처가/ 제겐 없어요/ 그저 중얼거릴 뿐/ 목소리는 제 귓속에서만 울리고 있어요”(「창공의 중심에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시인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는 언제나/ 빛 속에서 검어진다”(「조어(鳥語)의 계절」)고 했을 때, “이젤에 기대어 있는 망향처럼 비상(飛翔)은 오로지 재일(在日)의 한가운데에서 시들고 있다”(「전설이문」)고 했을 때, 그는 어쩌면 ‘불길한 검은 새’와 감응하며 삶과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청년 이춘식이 일본의 한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있었을 때, 제주 소년 김시종은 황국신민을 꿈꾸었다. 하지만, 해방 후 소년은 4.3항쟁의 일부가 되었고,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다시 일본 땅에 스며들어 공산주의자로, 조선어 선생으로, 시인으로 ‘재일’을 살았다. “정주(定住) 외국인인 조선인” 김시종은 ‘마음의 지평’에서나 “조상의 땅과 제주도가 재일(在日)과 섞여들어”(「여행」) 감을 감각할 만큼 오래 나라 바깥에 머물렀고, “겸손하지 않으면 견딜 수도 없다/ 둔해지지 말고 썩지 말고 늘어지지 말고/ 소박하게 보듬으며 앞을 양보하자”(「여름 그후」)라고 말할 만큼 파란만장의 삶을 살았다. 그런 그의 눈높이에서 ‘재일’은 역사의 피해자나 제국 안의 약자가 아니며, “재일을 산다는 것은 틈새나 간극의 고통이나 불편함을 오히려 긍정적인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진경,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이 된다.  이 여름의 끝에서 아흔 넘은 두 노인, 청춘의 나이에 식민지를 살았던 그들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그들이 공유했던 고통과 상처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이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마음의 한쪽 끝자락을 붙잡아 역사의 다음 페이지에 이어 붙이고 있는 중이다.
2019-08-28 | hrights | 조회: 788 | 추천: 5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2019년 8월 6일(화)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서안 깊숙한 곳에 2천 3백 4채의 이스라엘 정착촌 주택을 건설하도록 승인하였다. 8월 10일(토), 이스라엘 군에 의해서 포위된 가자와 이스라엘 경계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 쪽에 있던 팔레스타인 4명을 사살하고, 사체를 가져갔다. 8월 11일(일) 이슬람희생제 첫 날, 점령지 동예루살렘에서 무슬림들이 알 아크사 모스크로 들어가려는 450명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저지하자, 이스라엘 경찰이 알 아크사 모스크 내에서 고무탄과 최루탄을 발사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무슬림 6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서안, 가자, 동예루살렘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의 22%이며, 1967년 6월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한 영토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서안과 가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국가 건설을 원한다.  1948년 5월 이스라엘국가 건설과 함께 발발한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마을 50% 이상을 파괴했으며, 팔레스타인 아랍인 중 약 75%(72만 6천명)를 축출하면서,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의 78%를 차지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78% 영역을 넘어서 나머지 22%, 즉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주권과 지배권 확장을 획책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침략 정책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건설할 권리가 있다는 시온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온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현대 유대인들은 1세기에 로마에 의해서 팔레스타인 땅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후손들이며, 독점적인 상속인들이다. 오늘날 조상의 땅으로 귀환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천부적인 권리다.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여 ‘하나의 민족으로 유대민족’은 항상 존재했다.”이다. 이를 바탕으로 시온주의자들의 목표는 예루살렘(시온)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 전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국가 건설 사업은 1차 세계 대전 직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17년 영국이 내놓은 기획,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고향 건설’이라는 밸푸어선언은 시온주의를 비현실적인 꿈으로부터 성취될 수 있는 사업으로 변형시켰다.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총리 재직:1916-1922)는 ‘영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되어야한다고’ 결정하였고, 영국은 시온주의자들을 영제국의 이익 보호를 위한 동맹으로 만들었다. 1920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는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땅의 일부에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의 기획에 반대하는 反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이 있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음은 1919년 3월 4일 미국 내 反시온주의자 유대인들 300명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서 작성한 성명을 발췌한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충돌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과 이스라엘 경찰 사진 출처 - 연합뉴스 反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의 성명, 1919년 3월 4일 ▶ 미국 시민들인 우리는 미국과 유럽에 있는 시온주의자 단체들이 제안한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건설에 반대하며, 어떤 나라에서든지 유대인을 민족 단위로 분리하여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 가장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시온주의자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중 소수, 즉 전체 350만 명의 유대인들 중 단지 15만 명을 대표한다. ▶ 우리는 유대인을 민족 단위로 재조직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의 요구에 맞서 소리 높여 경고하고, 항의한다. 시온주의자들은 현재나 미래에 민족 단위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서 영토 주권 수립을 약속한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민족 고향 건설’이라는 시온주의 프로젝트를 거부한다. ▶ 시온주의는 러시아와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강요된 견딜 수 없는 환경 결과 발생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6백 만 명에서 1천 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국가 유대인들의 고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러시아와 루마니아에서의 유대인 문제는 이 국가들이 유대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각 국가 내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 우리는 유대인을 정치 단위(민족 혹은 국민)로 구분하는 것에 반대한다. ▶ 팔레스타인은 종교, 인종, 혈통에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 민주적인 정부 형태로 통치되어야 하며, 그 정부는 어떠한 종류의 억압으로부터도 나라를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이나 미래의 어느 때라도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국가로서 조직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反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은 이 성명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이 성명은 ‘시온주의자 국가에 맞서 윌슨에게 이의 제기: 유대인 대표들이 윌슨에게 이 성명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 요구’라는 제목으로 1919년 3월 5일자 뉴욕 타임즈에도 실렸다.  이 성명에 따르면, 당시 시온주의자들은 다수 유대인들의 대표가 아니었으며, 대다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영토 주권을 가진 민족 단위로 재편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의 기획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국가 건설 운동은 유럽에서 탄압받던 유대인들의 간절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전략적인 전초 기지로서 팔레스타인 땅을 확보하고자하는 영국의 기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反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의 제안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지 않았다. 따라서 파리평화회의에서는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의 기획이 실행되었으며, 2019년 현재에도 이 기획은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협조로 실행 중에 있다.
2019-08-13 | hrights | 조회: 1899 | 추천: 5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용산에서 화마에 쓰러져 가는 철거민들에 대해서도, 잊을 만 하면 생기는 작업현장의 사고로 희생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건이 되고나면 그나마 여기저기서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도 얘기해 보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아니, 이 나라는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살기에 너무 바쁜 세상이므로.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하는 것 같다. 매일 30도를 훌쩍 넘는 혹서가 계속되는 와중에, 서울에서 가장 번잡하다는 강남역 사거리 전봇대 위에 한 사람이 단식농성 중에 있다. 그는 이미 25년째 삼성과 투쟁 중이다. 그의 나이가 이제 60이 되었다 하므로 35세 때부터 지금까지, 말하자면 오롯이 한평생을 싸워온 셈이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지난 날 자신이 부당해고를 당했으므로 삼성은 이에 대해 사과하고 자신을 복직시켜 달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정년이 지났으므로 사실 복직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은 삼성의 책임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삼성의 각종 불법행위 – 그 자신에 대한 감금과 협박, 그의 아내에 대한 성폭행 미수 및 그의 가족에 대한 협박 등 – 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해 달라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런 요구까지는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벌써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절박하고 한 서린 그의 외침을 우리 모두는 듣지 못한다. 매일, 매시간 수만 명의 사람이 오가는 강남 사거리에는, 붉은 글씨 선명하게 내걸린 현수막에도 불구하고, 공중에 매달린 그의 존재를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 투신에 대비해 에어매트가 깔려있고 한편에는 경찰차량이 항시 대기 중이지만, 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저 평소대로 한쪽에서는 즐기고 한쪽에서는 일을 하며 바쁘게 오갈 뿐이다.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사람이 먼저’라는 현 정부가 가져야 할 태도인가. 청와대는 물론 노동부의 어떤 관료가 현장에 와 보았다거나 이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한일 갈등으로 북핵문제로 바쁘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풀기 어려운 현안들이 늘 산적해 있음을 잘 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한 사람이 목숨을 내걸고 주장하는 이 상황이 이렇게 무시 되어도 되는 것인가. 혹 어쩌면 그 이유가 이 사람이 싸우고 있는 상대가 ‘삼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것인가. 서울 강남역 사거리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기둥 위 김용희씨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언론도 마찬가지다. 농성이 시작된 지 40일이 지나도록 주요 일간지와 방송들은 이 뉴스를 전하지 않는다. ‘민중의 소리’나 ‘매일노동뉴스’ 같은 조금은 특수한 매체에 몇 번 언급된 것이 고작이다. 그의 주장이 들을 만한 가치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이 없다고 생각해서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잘못 되었다고, 자신은 노조를 조직하려다가 해고당했다고, 그래서 명예회복과 복직을 원한다고 말하는 그의 절규는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언론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의 외로운 싸움은 성공할런지도 모른다. 아무리 삼성이라도 다수의 비난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은 이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모두가 침묵한다. 못 본 척 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보지 않는다. 다시, 무엇 때문인가. 솔직히, 한국 최고의 기업이자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은 아닌가. 대한민국 주요 언론사의 최대 광고주로서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삼성의 경제력 때문 아닌가. 심지어 ‘그래, 삼성이 조금 잘못했다 한들 어떡하겠어.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삼성은 잘 돼야지. 이렇게 어려운 경제상황에’ 라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현실주의 때문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그의 생명은 타들어간다. 평소 79kg이었던 그의 몸무게는 이제 50kg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온몸의 지방과 근육은 이미 다 소실되었으며 이제 최소한의 생명유지가 쉽지 않은 상태라고 의사들은 경고한다. 이런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 정부와 언론, 나아가 우리 모두는 죽음의 (어쩌면 살인의) 방관자이다. 아니, 공모자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삼성에게 호소한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삼성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역량을 갖추고 있다. 추상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인권경영’을 운위하기 전에, 뜨거운 폭염에 숨조차 내쉬기 어려운 한 노동자의 생명을 건 외침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떤가. 백번 양보하여, 삼성의 주장대로 그가 예전에 일하던 회사가 이제는 더 이상 삼성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삼성으로서는 어떤 법적 책임도 지기 어렵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렇더라도 지난 날 그에게 가했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은 남는 것이 아닌가. 세계적인 기업으로서, 힘없는 한 노동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대강자로서 최소한의 사과와 위로를 할 생각은 없는가. 이나마 가능한 시간은 이제 얼마 되지 않는데 말이다. 도대체 이미 공룡처럼 커져 버린 이 거대기업은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제 삼성이,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답할 차례이다.
2019-07-24 | hrights | 조회: 1229 | 추천: 13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강자의 논리에 따르면, 약자는 강자에게 지배받아 마땅하다. 이때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겉으로 보면, 무력이 더 우세하면 강자고 그렇지 못하면 약자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보면, 무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강하면 강자고 그렇지 못하면 약자다. 또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보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는 강자고 목숨을 위해 자유를 버리는 자는 약자다.  강자의 논리는 개인들보다 집단들 사이에서 더 잘 작동한다. 개인은 쉽게 눈에 띄지만, 집단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내놓고 자신이 더 강하다고 내세우는 자는 자칫 속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집단들 간에는 강자의 논리가 집단 무의식적으로 쉽게 표현된다.  자신들이 강자라고 여기는 집단은 약자라고 여기는 집단을 덜 인간화되어 있고 그만큼 더 동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약자의 집단은 자유보다 생명을 더 중시한 나머지 굴욕과 예속을 수치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우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강자의 논리는 보편적인 원칙이나 가치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목숨보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자들에게까지 자유를 허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자의 논리에 따른 자유의 원칙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래서 약자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인권을 말살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했던 과거를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현재 그들보다 더 강한 자들에게만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약한 탓에 식민의 예속을 경험한 집단은 강하기에 식민의 지배를 부린 자들에게 잘못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항간의 말은 강자의 논리가 관철되는 시대적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강자의 논리에 따르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은 강자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근본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강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친밀하게 굴고, 친밀하게 구는 것을 건방지다고 여기면 일정하게 굴복하고, 굴복하는 것마저 부족하다고 여기면 아예 예속되어서라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약자에게 할당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기는 것은 약자의 논리다. 하지만 이런 약자의 논리는 강자의 논리에 속해 있다. 그 핵심은 ‘약자는 자유로울 자유가 없다.’라는 것이다.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생명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 역시 아무도 없다. 자유롭지 않을 자유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유를 위해 생명을 저버릴 수 있는 자는 주인이고, 생명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노예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예는 주인의 노예가 아니고 생명의 노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기의식에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이 공존하면서 투쟁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강자라고 여기는 자에 의해 나에게 극단적인 위기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면서 목숨을 애원할라치면, 같은 자기의식의 다른 곳에서 ‘죽일 테면 어디 죽여봐!’ 하고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자기의식에서 이같이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이 일어나 충돌을 일으켜 싸우기도 하거니와 한 집단 안에서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이 일어나 충돌을 일으켜 싸우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한쪽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위기에 처했는데 자존심이니 자립심이니 하는 한갓 감정을 내세워 무책임하게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과연 그렇게 허약한 것은 자립심도 자존심도 없는 맹목적인 생명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과 노예의 대결은 쉽게 주인의 승리로 끝날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헤겔에 따르면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길든다. 다른 한편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생산물을 통해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된다.  타인의 생명을 겨누고 노리는 자는 기실 타인의 자유를 겨누어 탈취하고자 하는 자다. 자유는 생명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의 판별은 얼마만큼 자유를 위해 생명을 활용하는가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전략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 보 후퇴에 스며들어 있는, 오로지 목숨 부지를 위한 기회주의적인 속내를 정확하게 제거하기가 전혀 쉽지 않다. 이 보 전진은 핑계일 뿐 일 보 후퇴가 바로 투항이기 쉽다. 특히 그동안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계속해서 싸워 온 자가 아닐 경우 더욱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생의 최선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행복은 인간 고유의 기능인 “탁월성에 따른 이성적인 영혼의 활동” 자체라고 했다. 그러면서 탁월성에 지적인 탁월성과 성격의 탁월성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하고, 성격적 탁월성의 핵심을 중용이라고 했다. 죽음이 두렵다는 감정을 가지면서도 정의로운 일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중용에 의한 용기라고 말한다.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나아가면 만용이 되고, 죽음을 너무 두려워해서 물러서면 비겁함이 된다고 했다. 매사에 중용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지혜를 ‘프로네시스(phronēsis)’ 즉 ‘실천적 지혜’라고 말하면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자유를 위한 이성적 활동을 포기하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사진 출처 - 구글  삶은 습관이다. 많은 물질적 여유를 누리다가 그러지 못하는 처지가 되면 불행하다고 여기고, 조금의 물질적 여유만을 갖다가 조금 더 여유를 갖게 되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모두가 가진 것을 잘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누면 풍족한데, 거머쥐고 있으면 부족하다. 집단 구성원 모두가 자유를 위한 생명을 추구한다면, 나누는 일을 더욱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두려움은 거머쥐게끔 하고, 거머쥐게 되면 그만큼 부족하다고 여기게 된다. 위기가 닥치면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되어 드러난다. 위기가 기회인 까닭이다.
2019-07-24 | hrights | 조회: 524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