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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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2020년 한 해를 되돌아보면, 한 단어로 정리가 가능하다. ‘코로나19’.  이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사회와 개인에게 강요됐다. 그 와중에 지역화폐(법적 명칭은 지역사랑상품권)는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지역화폐 활성화 정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고, 전국 지자체 중 95%가 도입을 완료하면서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10%의 할인을 받으며 지역화폐를 접할 수 있었다.  지역화폐의 확산은 할인혜택 덕분이다. 지역화폐 구매(교환)시 제공받는 10%의 할인은 놓쳐선 안 될 재테크가 돼 버렸다. 소상공인 매출 하락을 받쳐줄 단기 처방으로 지역화폐 확산에 예산을 투입한 정부 덕분에 지역화폐는 2020년 올해 승승장구했다.  그렇다면 과연 지역화폐는 2021년에도 더 잘 나갈 수 있을까?  일단 정부가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예산을 1조 원가량 투입할 예정이다. 지자체 발행액의 6~8%를 보전해주기로 함에 따라 2021년에도 전국 지자체 대부분에서 연중 10% 정도의 할인혜택을 부여해 유통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전국 지역화폐 발행량도 2020년을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지역화폐는 2021년에도 잘 나갈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지원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책적 필요에 따라 결정된 정부 지원이다 보니 정책결정 주체의 변화에 따라 변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앞으로도 쭉 정부지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 지역화폐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입장에서도 모두 정부 지원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결국 지원이 줄거나 없어지면, 다시 말해 소비자 할인이 줄거나 없어지면 지역화폐는 ‘혜택 많은 소비쿠폰’의 지위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골목 상권에서만 쓰게 해서 사용도 불편한데(물론 웬만한 카드 가맹점에서는 다 쓸 수 있는 지역화폐도 있다) 혜택도 적으니 ‘지역화폐, 수고했다 너는 이제 장롱으로…’ 이런 식이 될 터이다.  전국 지자체의 95% 이상 도입한 지역화폐는 그래서 발전하거나, 유지에 그치거나, 유명무실해지는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유명무실해지는 경우란, (지역화폐 자체가 쉽게 일몰시키기 어려운 정책이다 보니) 사용자는 없지만 이름만 남는 경우를 말한다.  유지하는 경우란, 각종 복지 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정책시행 등이 뒷받침해 일반적인 구매와 사용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발행 규모와 명목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발전하는 경우란, 인센티브와 발행량은 줄어들지라도(개인적으로 지역화폐 발행량은 향후 1~2년 내 최고점을 찍은 후 감소할 것이라고 본다) 사용자는 늘고, 활용도도 높아지는 것이다.  사용자는 늘고 활용도는 높아지는 것은 무슨 상황일까?  지역화폐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넘어 지역의 공동체성을 강화하며 지역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자본을 구축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된다면 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사진 출처 - 경기도청  이 같은 노력은 제법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역화폐를 활용한 배달앱’이다.  민간 배달앱의 높은 배달주문 수수료가 논란이 된 이후 군산시가 가장 먼저 배달앱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배달의 명수’를 내놓았다. 이후 경기도가 도내 31개 시군 도입을 목표로 ‘배달특급’이란 공공배달앱을 추진 중이다.  서울시는 행정이 개발과 운영을 도맡는 것이 아닌 기존 중소 민간배달앱과 제휴를 맺어 낮은 수수료를 받게 하는 ‘제로배달유니온’을 출범시켜 운영 중이다. 시흥시의 ‘시루 배달앱’, 천안시 등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도입을 준비 중이다.  공공형인가 민관제휴형인가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지역화폐로 결제가 가능한 배달앱이란 점이다.  지역화폐로 주문배달을 할 경우 인센티브 효과를 볼 수 있어 소비자들에게는 상당한 매력이 있다. 시흥시의 경우 모바일 지역화폐인 ‘모바일시루’ 사용자가 시흥시 경제활동인구의 63%인 17만 명에 달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는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를 가져오면 성남사랑상품권을 주는 ‘자원순환가게 re 100(recycling 100%)’을 모두 8곳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성남시 이미 최근 1년간 232가구의 주민이 가져온 2만 1,625kg 분량의 재활용 쓰레기에 538만 1,608원을 보상한바 있다.  춘천시는 지역 내에서 유통할 수 있는 ‘에너지화폐’를 유통시킬 계획이다. 단독·공동주택을 지으면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를 설치하면 휴대폰으로 에너지 포인트(소양강페이)를 지급한다. 지역 내 가맹점을 구축해 이 포인트를 식당 및 마트 등에서 실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지방세, 주차료 등 공공요금도 납부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시흥시는 건강걷기 앱을 자체 개발하여 만보를 걸으면 시흥시 지역화폐인 모바일시루 100포인트를 적립시켜주는 ‘만보시루’를 연말에 공개한다. 시민건강권 증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연결시키겠다는 목적과 더불어 ‘쓰는 지역화폐’에서 ‘버는 지역화폐’로의 인식 전환에 첫 발을 딛겠다는 의도가 있다.  노원구 등은 자원봉사 인정수당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정책을 지난 2018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자원봉사의 무보수성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지만 지역화폐가 지역사회 발전에 복무한다는 인식이 커지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지역화폐를 경제 활성화를 넘어 공동체강화와 사회문제 해결의 도구로 삼고자하는 시도는 소비쿠폰으로 전락할 수 있는 지역화폐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지역화폐라는 도구를 더 잘 쓸 수 있게 하는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할 때다.
2020-11-18 | hrights | 조회: 805 | 추천: 5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자신을 의식한다. 이를 두고서 심리학에서는 “자의식”이라고 하고, 철학에서는 “자기의식”이라고 한다. 자기를 의식하게 되면, 인식 관계 즉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의 관계에서, 내가 둘로 나뉜다. 마치 거울을 볼 때처럼, 나를 보고 있는 나와 내가 보고 있는 나로 나뉜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말을 “나는 나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으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  데카르트가 활동했던 시대는, 비록 각자 신을 자기 요령껏 다르게 해석하고 활용했을지라도, 신이 사람들의 생각을 온통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 나타난 인물이 예수라 생각했고, 그 예수가 머리가 되어 거대한 하나의 몸인 교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그 교회에 속함으로써 내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교회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알게 모르게 생각했음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나타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감히 해버렸으니, 시대 전체가 크게 요동치게 된 것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성당이나 교회당에 함께 모여 미사 또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저 자신을 생각할 알 줄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데 교회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내놓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런 탓에 당시 교황청은 데카르트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다.  데카르트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거의 읽지 않았고 그저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것저것을 요모조모 생각하는 일에 탁월했다. 기상 시간이나 취침시간 등이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예사로 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기 일쑤였다. 그는 생각함에 중독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여왕을 비롯한 왕가에 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문제는 궁정의 매사가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라고 해서 이를 어길 수는 없었다. 이에 억지로 적응하려는 과정에서 무규칙에 습관화된 그의 몸은 그 나름의 리듬을 잃어버렸고, 그 스트레스에 면역기능이 약해져 결국 독감에 걸리고 독감이 폐렴으로 전화되어 54세에 사망했다. 2.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목숨을 걸고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있다. 돌연변이를 통해 생물 종이 진화하듯이 열심히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개념 미술가라고 할 수 있는 바바라 크루거는 1987년에 <무제>(Untitled)라는 제목의 회화 작품에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글을 크게 써넣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쇼핑으로써 인간을 얼마나 헤어나지 못하게 중독시키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홈쇼핑 중독으로 변환되고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더군다나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으면 도대체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음을 데카르트가 역설 내지는 고백했다면, 바바라 크루거는 이놈의 자본주의 세상은 내가 쇼핑하지 않으면 도대체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몰아붙인다는 사실을 폭로 내지는 역설한 것이다. 3. 나는 나를 스스로 보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바바라 크루거가 자본주의적인 쇼핑 중독을 폭로한 지 벌써 30년도 더 지났다. 이제는 무엇을 하지 않으면 도대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고 여기는가? “나는 페이스북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두드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들 대다수가 SNS 플랫폼을 드나들면서 그 다양한 기능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낙인찍혀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나 버린다는 불안에 시달리다 못해 공포감에 휘둘리는 것 같다. 어쩌다가 집을 나서 이미 지하철을 탔는데, 아차!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순식간에 불안감이 밀려온다. 마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 것 같고, 오늘 하루가 완전히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듯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것만 같고, 거래처가 모두 달아날 것만 같은 황망한 상태가 되고 만다. “나는 내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심중한 사태가 실감 나는 장면이다.  나는 1989년에 마크 포스터(Mark Poster, 1941∼2012)가 쓴 『푸코와 마르크스주의(Foucault, Marxism, and History: Mode of Production Versus Mode of Information)』라는 책을 민맥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 포스터는 사회의 근본 구조가 생산양식에서 정보 양식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신용카드를 예로 들어, 신용카드로써 대금을 계산함으로 우리 모두 자신의 정보를 알아서 어딘가에 일일이 보고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이 책을 출간한 1985년 당시에는 대중적인 정보장치가 겨우 신용카드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컴퓨터를 산 것은 1988년이었다. 그땐 아직 ‘www.’ 즉 ‘world wide web’이라는 탁월한 인터넷 기술도 없었고, 초고속정보도로망을 깔 수 있는 광섬유 기술도 없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오늘날엔 스마트폰이라는 마치 괴물과 같은, 크기에 비해 어마어마한 정보장치가 전 세계인들의 손바닥을 뒤덮었다. 게다가 완전히 무선 인터넷 통신이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던 사실이 코로나19 펜데믹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확진자가 한 명 생기면, 그가 그동안 어디에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움직였는가를 여지없이 밝혀내어 그가 바이러스를 퍼뜨렸을 것이라 예상되는 곳을 지목해서 그날 그 시간에 그곳을 드나든 사람들을 찾아낸다. 스마트폰 덕분 또는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이른바 ‘태극기 부대’가 10월 3일 광화문 모임을 독려하는 포스터에 “핸드폰 끄고 모여!”라고 외치기도 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켜 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이제 “나는 나의 행동을 빅 데이터에 보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첨단기술에서 핵심은 수없이 많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무선 인터넷 통신 기술이다. 음성,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 인간의 모든 인식 형태가 무선 인터넷을 통해 전자파로 바뀌도록 하고, 이어서 이 전자파가 0/1 즉 5v 전압에 의한 on/off라는 이진법 디지털로 바뀌어 저장되도록 한다. 그런 뒤 필요에 따라 실시간 또는 지연된 시간에 맞추어 다시 전자파로 바뀌도록 하고, 그 전자파가 다시 음성,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으로 바뀌어 전달되도록 한다.  인간의 인식뿐만 아니라, 사물 인터넷 기술을 통해 사물들이 서로 이러한 각종 형태의 정보를 주고받는다. 여기에 이제 바야흐로 A.I. 기술이 함께 작동함으로써 그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인식 영역이라 여겨진 음성, 텍스트, 사진, 동영상을 인간보다 훨씬 더 미세하고 정교하고 정확하고 빠르게 만들고 전달하고 해석하여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가 되고 있다. 아직은 이러한 A.I. 로봇에 의한 정보들이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이 기술적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애플리케이션(앱)이 개발되어 수시로 각자의 스마트폰에 장착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는 등 해서 화려한 개개 기능들을 발휘한다. 그럼으로써 음성,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을 자기 취향 또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편집, 변형, 조작, 복사, 호환 등을 거쳐 수십억의 지구인들에게서 생산되고 전달되고 소비되도록 한다. 무한에 가까운 그 모든 내용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거대한 중앙정보시스템의 무한정한 데이터 저장고에 남김없이 쌓인다. 온 지구인 각자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는 정보를 받고 보낼 수 있는 각기 고유한 주파수의 전자파가 따로따로 할당되어 있다. ― 사물 인터넷의 기술에는 사물들끼리 인터넷을 통해 주고받아야 하기에, 그 사물들 각각에도 고유한 주파수의 전자파가 할당되어 있다. ― 그래서 각자가 인터넷의 어느 사이트를 방문했거나 그 사이트에서 어느 특정한 아이템을 클릭해서 검색했거나 내려받거나 한 것, 그리고 지인들이나 불특정한 상대와 주고받은 내용, 그러니까 댓글이나 ‘좋아요’ 또는 ‘구독’ 또는 ‘팔로업’ 등을 클릭한 것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자판이나 마우스를 움직인 일체의 것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고유한 주파수를 주소로 해서 빅 데이터에서 이미 늘 개인별로 분류되어 확실하게 저장된다. 그리고 누군가 또는 대체로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동시스템이 필요한 사항을 빅 데이터에 요청하면 그 필요한 사항이 누구에 관한 어떤 것이 되었건 또는 어떤 기업이나 단체에 관한 어떤 것이 되었건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는 소프트웨어 로봇인 검색 엔진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속도로 관련 내용을 찾아내어 제공한다. 이에 어떤 물질 상품이나 서비스 상품이건 간에 그것을 욕망하리라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마치 정밀한 미사일 폭탄이 필요한 탄착지점에 정확하게 가닿듯이, 수시로 반복해서 광고 정보를 보내어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예상 소비자들은 이미 그동안의 인터넷 활동을 통해 스스로 저 자신이 어떤 욕망의 존재인가를 탈탈 털어 보였기 때문에,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또는 데스크탑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한 그러한 원치 않는 광고의 공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 때문에 당연히 탁월한 해킹 실력을 갖춘 자들이 나타나 온갖 도적질을 일삼아 이익을 보는가 하면, 그 반대로 암호 기술을 통한 보안 시스템의 개발이 엄청난 이윤을 올린다. 4. 나는 중독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결국에는 한 마디로 중독이다. 즉, 기술중독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가상 세계에의 중독이다. 점점 더 직접 만나 보고 만지고 싶은 욕망이 줄어든다. 그래서 한편으로 오히려 산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텃밭을 가꾸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인터넷 가상 세계에의 중독이 얼마나 심한가를 반증할 뿐이다.  흡연, 음주, 도박, 마약, 음식 등에 의한 중독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 중독들에 대해서는 물론 무조건 제대로 성과를 나타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모로 방어책들을 구사했고, 적어도 그 나름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온 지구인들을 끌어당겨 푹 빠지게 만든 이 인터넷 가상 세계에의 중독은 좀처럼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국가와 기업들이 제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내걸고서 디지털-A.I.를 중심으로 한 고도 첨단기술들을 둘러싼 격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고, 그 경쟁에서 이기는 길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외치는 상황이 전반적인 현실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서 당신은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하고 물을 것 이다. 필자로서는 뚜렷한 대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속내를 드러내어 말한다면, “나는 만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목에 걸고서 길을 걸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특히 어린 시절의 학교 교육이 인터넷 교육 대신에 지금 여기에서 육중하게 물질적으로 다가오는 이 모든 아름다운 자연들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기르며 함께 사는 법을 더 힘쓰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코트라이트가 쓴 『중독의 시대』(이시은 옮김, Connecting, 2020)을 읽은 탓이다. 코트라이트는 이 책에서 “스마트폰의 주된 위험은 개인적 대화, 수면, 운전, 공부, 사색, 운동, 일로부터 끊임없이 주의가 분산되는 것이다. 이래서는 친밀감, 건강, 안전, 지식, 창의성, 전문성, 사회적으로 구성된 몰입 상태를 달성하거나 유지하기가 어렵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집에서 아이들의 디지털 사용량을 제한하며 가족 식사 때 자녀들이 책과 역사에 관해 토론하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아울러 전한다.
2020-11-11 | hrights | 조회: 641 | 추천: 4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언제부턴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주말에 발표하는 방역 단계가 그 주의 생활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번엔 단계가 완화 되려나, 더 격상되는 건 아닐까, 신규 확진자 추세를 보고 혼자 단계를 점 쳐보기도 한다. 모여앉아 밥을 먹고, 사우나를 가고, 예정된 친구 결혼식과 돌잔치에 가고, 실내운동과 주말 나들이는 괜찮을 지 한 주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중대본 브리핑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던 중 이번 주말 발표한 방역 단계 조정안은 코로나의 ‘종식’이 아닌 ‘공존’을 대비한 지속가능한 방역으로의 전환을 담고 있어 더욱 눈여겨보았다. 변화하는 정책은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와 공존하며, 또 다른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것이리라. 정부, 기업, 학교, 방송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다.  그 고민이 가장 큰 현장 중 하나가 바로 시민사회영역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일하는 곳도 마찬가지다. ‘소통’과 ‘참여’가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시민사회 현장에서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방식은 단체의 활동에 큰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도저히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단체도 가장 먼저 해외교류활동과 다수가 모이는 사업이 멈췄다. 여러 사람이 하는 회의는 연기되었고, 회원 행사와 소통에도 어려움이 생겼다. 하지만 혼란 속에서 차차 비대면의 세상이 대안이 되어갔고, 오히려 장소의 한계를 벗어난 원격 프로그램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 한베평화재단  사실상 우리 단체는 해외에 파견된 활동가와 정기적인 회의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온라인 회의가 보편화 되고, 한국에서 열리는 여러 사업이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베트남과 미국, 중국 등을 원격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지난 9월 16일 우리 재단이 주최한 전쟁 트라우마 관련 웹토크 <어느 군인의 심장, 전쟁의 흔적>은 원격으로 미국 참전군인의 발표와 여러 국가에 거주하는 참가자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물론 비대면 방식만으론 회원확대와 모금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어려움도 존재한다. 코로나 시대, 시민운동은 어떻게 지속가능해질 수 있는가. ‘대면’과 ‘비대면’ 사이에서 실험과 탐색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10월말 온라인으로 진행된 NPO 파트너 페어 국제컨퍼런스는 코로나 시대에 대한 이러한 시민사회의 고민을 담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몰고 온 전 세계적 위기 앞에 우리의 삶, 인권, 기후위기와 경제를 돌아보고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조명했다. 그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세 번째 세션은 ‘공존을 위한 연결’이라는 큰 주제 아래 이어졌다. ‘우리는 대면하지 않고도 연결될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전치형 교수(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가 제시한 방향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주었다.  “테크놀로지가 대면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어떤 비율로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삶의 다양한 문제에 있어 모든 것을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핸드폰이 없어서 광장에 모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연대를 배달할 수는 없다. 광장은 시민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곳이다. 그렇게 자리를 같이 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하는 소통의 방식은 고도화 된 테크놀로지로만 가능한가. 코로나 환자를 치료하는 음압병실의 의료 인력은 그들 사이에 놓인 유리에 글씨를 써서 소통한다. 연결을 위한 장치가 반드시 새로운 테크놀로지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찾아 연결해야 한다.”  목적하고자 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대면’과 ‘비대면’의 비율, 그리고 연결을 위한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제시는 “코로나=비대면”이라는 등식을 무너뜨렸다. 비대면의 기술을 찾는 것, 비대면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라도 연결하고 만나기 위한 소통의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코로나 시대와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시민사회의 과제임을 깨닫는다.
2020-11-03 | hrights | 조회: 795 | 추천: 6
: 이스라엘/이집트, 요르단, UAE, 바레인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편이 아니다: 고립되는 팔레스타인인들  2020년 10월 12일 프랑스 잡지, 르 포인트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주재 팔레스타인대사 살만 엘 허피는 이스라엘과 관계정상화 협정,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한 UAE와 바레인을 비난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협정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UAE는 이미 오래전에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포기했다. UAE, 미국 및 이스라엘은 이미 군사, 안보 및 경제면에서 긴밀한 협력이 있었다. 이스라엘 항구 하이파로 가면, 수년간 왕복해온 모든 UAE 컨테이너 선박들을 볼 수 있다. 유일하게 새로운 것은 UAE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공식화했다는 것이다. UAE가 팔레스타인 편에 선 역사는 절대로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다.”고 밝혔다.  2020년 이스라엘은 점령지 서안에 총 12,000채 이상의 국제법상 불법적인 유대인 정착촌 주택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최근 10년 동안 최대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 붐을 일으키고 있다. 9월 15일 ‘아브라함 협정’ 체결 이후, 이스라엘은 10월에만 점령지 서안 지역에 3,000채가 넘는 유대인 정착촌 주택 건설을 승인하였다. 특히 10월에 승인된 정착촌 건설은 팔레스타인의 주요한 대도시들, 라말라와 나블루스 사이에서 진행됨으로써, 팔레스타인 도시간의 연결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하는 것이다.  1978년 9월부터 2020년 9월까지 40여 년 동안 미국이 중재하여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협정들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들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영토주권 문제, 통상문제들에 대한 내용들이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 문제는 명시되지 않았다. 사실상 이 협정들은 땅에 대한 이스라엘 권리를 승인하면서, 그 땅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거부하는 거부주의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협정의 기본 구조는 1978년 협정에서 창출되어 2020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1978년 9월 캠프데이비드 협정, 1979년 3월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국경획정 협정  1978년 9월 17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캠프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였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1967년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한 서안과 가자 관련하여 ‘이스라엘 군대의 재배치, 강력한 지역 경찰 창설, 지역 자치정부 수립, 5년간의 임시 기간 설정’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 협정은 핵심적인 문제들, 즉 서안과 가자의 최종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문제, 이스라엘 정착촌문제, 예루살렘 문제 등을 회피함으로써, 분쟁 해결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게다가 서안과 가자에서 자치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 시민으로 통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자치정부 수립은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유지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 시민권 요구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선제적인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1977년 9월 25일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의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관한 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1977년 베긴의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관한 의회 연설 ▶ 5년의 임시 기간 후에 주권 문제를 결정할 것이고, 우리는 유대아와 사마리아(서안)과 가자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 유대아와 사마리아에서 국민투표는 없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주지 않는다. ▶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팔레스타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유대아, 사마리아, 가자, 골란고원에서 정착촌 건설사업을 강화할 것이다. ▶ 통합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다. ▶ 이스라엘 군대는 유대아, 사마리아(서안)과 가자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결국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은 서안과 가자를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안과 가자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은 채로, 이스라엘 점령통치를 받는 인종차별적인 지역 자치정부 창설을 구상하였다.  이 내용은 40여년 이후, 2020년 1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세기의 협상, '평화를 통한 번영: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비전'에 대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1922-1948)  1979년 3월 26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미국 민주당 정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사이에서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즉 국경획정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와 가자 처리에 관한 것으로 중동 최초의 평화협정으로 불린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반환하는 대신에, 이집트는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1982년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이 협정에서 국경획정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국경획정 협정 ▶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영구적인 경계는 이집트와 이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경이다. ▶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이 경계를 불가침의 경계로 인정한다. 양측은 수자원과 영공을 포함하는 상대방의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  이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위치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는 없고, 오직 이스라엘과 이집트 두 국가만 존재할 뿐이다. 이집트는 이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가자를 이스라엘의 영토로 승인하였다. □ 1994년 10월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 국경획정 협정  1994년 10월 26일, 이스라엘과 요르단 경계에 위치한 아라바에서 미국 민주당 정부의 빌 클린턴 대통령 중재로 후세인 요르단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 국경획정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양국의 수자원 관리・공유와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의 처리에 관한 것이다. 이 협정에서 요르단은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 협정에서 국경획정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 국경획정 협정 ▶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국경은 트랜스 요르단과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영역 사이의 경계선이다. ▶ 1967년 이스라엘 군부통치하에 들어온 모든 영토(서안)의 지위에 대한 편견 없이, 이 경계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영구적이고, 안정되고, 공인된 국경이다. ▶ 이 국경은 요르단 강과 야르묵 강의 중앙, 사해, 와디 아라바, 아까바 만을 지나며,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영구적이고, 안정되고, 승인된 국경이다. ▶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국경과 상대방의 영토, 영해, 영공을 불가침으로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고 준수한다.  이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위치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는 없으며, 서안은 이스라엘 영토로 통합되었다. 결국 이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요르단은 서안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완전히 승인하였다. □ 2020년 9월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 바레인 평화 협정 : 아브라함 협정, 이스라엘의 황금 열쇠  2020년 9월 15일 백악관에서, 공화당 정부 트럼프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아랍에미리트 외무-국제협력부장관 압둘라 빈 자이드 알 나흐얀, 바레인 외무장관 압둘라티프 알 자야니가 서명함으로써 ‘아브라함 협정’으로 알려진 관계정상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 서명식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백악관과 미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상징적인 황금 열쇠를 선물한 반면,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 대표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아브라함 협정’은 2020년 1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세기의 협상’, 즉 '평화를 통한 번영: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비전'의 틀에서 나왔다. 제목과는 달리 ‘세기의 협상’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면서, 1967년 이스라엘이 무력을 점령한 서안을 공식적인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하고, 이스라엘-역내 아랍국가들 사이의 평화 협정 체결을 통한 이스라엘의 번영을 목표로 하였다. ‘세기의 협상’은 이스라엘에게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는 황금 열쇠를 준 셈이다. ‘세기의 협상’과 같은 목표를 설정한 ‘아브라함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 ▶ 중동 지역 내 모든 국가들과 국민들을 위하여 안정적이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중동 지역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열망 ▶ 아랍민족과 유대 민족이 공동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정신에서 영감을 받아 중동에서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과 모든 종교, 종파, 신앙과 민족이 살고 있는 현실을 발전시키고, 공존, 상호이해, 상호 존중 정신을 기름 ▶ 2020년 1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평화안을 상기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정의롭고 포괄적이며 현실적이며 항구적인 해결책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 ▶ 이스라엘/이집트, 이스라엘/요르단 사이의 평화협정을 상기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의 정당한 필요와 염원을 충족시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합의된 해결책과, 광범위한 중동 평화, 안정 및 번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함께 노력 ▶ 합의사항 ◦평화, 외교 관계 및 정상화, ◦양국 관계는 국제 연합 헌장과 국제법의 원칙에 따름. ◦대사관 설립, ◦양국에 대한 테러 행위나 적대 행위에 맞서 협력, ◦금융 및 투자, 민간 항공, 비자 및 영사 서비스-혁신, 무역 및 경제 관계에서 상호 합의, ◦양국은 공동 조상인 아브라함의 정신으로 상호간의 이해, 존중, 공존, 그리고 사회 사이의 평화 문화를 육성, ◦양국은 미국과 협력하여 역내 외교, 무역, 안정성 및 기타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중동을 위한 전략적 어젠다’ 개발  1979년, 1994년에 이스라엘과 국경획정협정을 체결한 이집트나 요르단과는 달리, 아랍에미리트나 바레인은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전쟁을 한 경험도 없다. 역사적으로 UAE와 바레인의 통치자들은 이스라엘과 비공식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게다가 바레인은 1948년부터 걸프지역 미 해군 사령부의 본거지였고, 1991년부터는 미국과 공식적인 방위협력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92년 미국은 바레인을 주요한 비나토 동맹으로 지정하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바레인은 이스라엘과 특별한 불화가 없었다.  이제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1967년 점령지에서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재앙 수준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아브라함 협정’은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 관계정상화를 이루기 위해 요르단강 서안 점령지에서 철수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10월 15일, 이스라엘 의회는 ‘아브라함 협정’을 80명/120명(13명의 아랍계 이스라엘인 의원들만 반대)이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승인하였다.  결국 ‘아브라함 협정’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정책과 불법 점령 정책을 승인하고, 그동안 비밀스럽게 유지해온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 바레인 간의 비공식적인 협력관계를 공식화하는 것이다. 이 협정의 목표는 적대적 관계 청산이나 국경획정 등 영토관련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관계정상화와 투자 및 통상관계 활성화 등을 통한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과 역내 패권을 보증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20-10-21 | hrights | 조회: 1209 | 추천: 5
이윤/ 경찰관  20. 9. 11. 경찰 수사관들이 ‘수갑반납 퍼포먼스’를 했다. 8. 7. 입법 예고된 개정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대통령령 안에 반발하는 무언의 의사표시다. 속어로 은팔찌라고도 하는 수갑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형사들이 범인을 검거한 후 한 손으로 멋지게 팔목에 채우며 ‘당신은 변호인 선임권이 있고 어쩌구’하는 경찰 장구다. 명절날 어린 조카들이나 중학교 진로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묵직하고 반짝이는 팔찌를 한 번씩 채워주면 참 좋아한다.  수갑은 형사의 상징이다. 수갑을 반납하겠다는 것은 형사를 그만두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가 실제 수사업무를 보이콧하는 것과 연결될 가능성은 없다. 9년 전 형소법 개정 상황에서 수갑반납 퍼포먼스가 있은 후에도 몇몇 수사 부서를 떠난 분들 외에는 수사관들의 대대적인 업무 거부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퍼포먼스에 동참하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수갑 반납하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대통령령 제정안을 접하고 들었던 생각과 연결시키자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는 수사업무를 못하겠으니 그냥 검사들이 수사할 사건 다 가져가서 하라는 심정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대통령령 안을 들여다보면 개정 형소법과 검찰청법의 취지가 무색하게 ①형소법 대통령령 주관기관을 법무부 단독으로 하여 해석과 변경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였고, ②검사 직접수사 범위를 매우 넓게 인정하였으며, ③경찰 불기소 결정 사건에 대해 검사는 재수사 요청 기간인 90일이 지난 후에도 언제든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검찰개혁 중 수사권조정의 핵심은 ‘수사는 경찰이, 기소는 검사가, 재판은 판사가’로 요약할 수 있다. ②와 ③은 검찰개혁의 취지에 반한다. ②는 검사가 앞으로도 계속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모든 사건으로 직접수사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며, ③은 경찰에 대한 검사의 지휘권과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내용 중 일부다. ①은 ②와 ③이 가능하도록 조문을 해석해주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검사는 직접수사 뿐만 아니라 경찰 수사도 지휘해왔다. 그런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휘권만 누렸을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책임지지 않았다. 가령 익산 약촌 오거리 사건이나 이춘재 사건 등에서 초기 수사가 잘못되어 무고한 사람이 옥살이를 한 책임은 수사를 지휘한 검사에게 있다. 법적으로 경찰은 검사가 지휘한 대로 했을 뿐이다. 지휘를 실질적으로는 하지 않았으니 책임이 없다고 변명한다면 직무유기를 인정하는 셈이다. 그런데 항상 경찰만이 ‘얼빠진’, ‘넋 나간’ 등의 모욕적인 비난을 오롯이 받아내며 책임을 진다.  검사들이 앞으로도 계속 경찰 수사를 지휘해야 하는 이유로 경찰 수사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70년간 자신들이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사역량이 향상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제 얼굴에 침 뱉기다. 이제부터는 경찰이 좀 더 제대로 일할 수 있게 독립적인 권한을 주고, 그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는데, 그렇게도 경찰의 손을 놓기 싫은 것일까? 짝사랑이 심하면 스토킹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차라리 경찰에서 수사업무를 떼어 모두 검사에게 주는 것은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고소/고발사건은 모두 검찰청에서 접수받아 수사하면 되니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112신고 사건은 지구대에서 출동한 경찰관이 현장에서 급박한 위험요소만 제거한 후 만일 범죄가 있었거나 진행 중이라고 판단되면 그 사건을 관할 검찰청에 연락하여 인계하면 된다. 늦게 도착한 책임은 고스란히 검찰 몫이다. 지명수배나 검거된 수배자 호송업무도 당연히 검찰 업무다. 시켜먹을 사법경찰관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을 검찰이 하게 되니 인력구조를 변화시켜 13만 경찰 중 수사 인력 정원 2만5천 명을 검찰에 주어 현재 1만 명 정도인 검찰을 3만5천 명의 조직으로 확대시켜 준다. 검찰은 거대 조직이 되어 친히 수사부터 기소까지 담당하는 막강 파워를 유지함으로써 정치인부터 주취자까지 누구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법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정의사회를 구현한다.  평생 경찰에서 수사 쪽 일만 하던 사람이 이런 상상한다면 욕먹을 일이긴 하지만 오죽 답답하면 이럴까. 그렇게까지 수사를 하고 싶으면 차라리 시켜먹을 생각하지 말고 모두 가져가 버리라는 마음을 경찰관들이 수갑 반납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형소법 개정 이후 7개월 이상 법무부와 행정안전부가 협의를 계속하여 대통령령에 반영하였음에도 그 결과가 실망스럽게 나오는 것을 보면 검찰조직의 힘이 역시 대단함을 느낀다. 추미애 장관은 제정안에 깊이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검찰개혁 추진자인 추 장관이지만 자식문제로 야당과 언론에 의해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조국 전 장관과 추 장관의 공통점은 공수처 설치, 수사권 조정, 검찰인사제도 정비, 법무부 탈 검찰화를 내용으로 하는 검찰개혁 추진자라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을 낙마시켜 검찰개혁을 원점으로 되돌리거나,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최대한 개혁을 지연시키려는 사람들이 배후에 있지 않을까 하는 몹쓸 음모론적 상상까지 하게 된다. 상상이 현실화 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마지막으로 수갑 반납하신 분들에게, 마음 부담이 컸을 텐데도 행동으로 옮긴 그 용기에 감사드리고, 동참하지 못한 미안함을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다.  
2020-09-22 | hrights | 조회: 757 | 추천: 3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올 한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지역화폐’의 급속한 확산이 있다. 전국 지자체 중 아직 도입하지 않은 곳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도입 시군이 늘어났다.  불과 2년 전만해도 60여 곳에 불과했던 지역화폐는 지난해부터 골목상권 살리기 차원에서 정부의 지원이 늘며 탄력을 받은 후 코로나19 1차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로 지급하면서 확산의 정점을 찍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장세다.  이렇게 급속히 성장하다보면 항상 논란이 따르게 마련이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역화폐가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소비쿠폰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역화폐의 목적은 먼저 지역 내 소비의 역외유출을 막아 역내소비를 늘리는데 있다. 또 이렇게 늘어난 역내소비가 골목상권에 최대한 골고루 나눠져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여기까지는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번성하고 있는 경제활성화형 지역화폐의 목적이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지역화폐는 현실 화폐경제의 폐해를 극복하며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한 대안화폐를 말한다.  경제 활성화만을 목적으로 한 지역화폐는 공허하다. ‘왜 지역화폐로 경제 활성화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경제가 거기 있으니까’라고 답할 순 없지 않은가. 경제 활성화는 중간목표다. 지역화폐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로 인해 공동체를 강화하고 발전시켜 사회적 자본을 육성하기 위함이라고 정립해야 한다.  다시 경제 활성화 목적의 지역화폐로 돌아와서, 소비의 역외유출을 막고 역내소비의 균등한 배분을 목적에 둔다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지역화폐 사용처(가맹점)의 기준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현재 전국 지자체에서 가장 많이 적용하고 있는 가맹점 기준은 ‘업종 구분’이다. 쉽게 말해 안 되는 업종과 업체를 정하는 것인데 주로 유통산업발전법 상 대규모점포(대형마트 등), 준대규모점포(SSM 등), 이에 준하는 계열사(대기업 프랜차이즈 등)을 기본으로 사행성 업체, 유흥주점 및 지역 특성을 감안한 제한 기준이 적용된다.  두 번째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경기도 다수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매출 구분’이다. 룰은 간단하다. 전년도 카드매출 10억 원 이하면 모두 가맹점이며 사행성 업체, 유흥주점 등은 제외이다.  업종 구분의 장점과 단점은 이렇다. 장점은 우선 대기업 프랜차이즈 등을 통해 발생하는 역외유출을 사전에 차단하고 업종 내 시장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등에서 쓸 수 없다보니 쏠림현상 없이 지역화폐가 골고루 쓰여지게 된다는 점이다. 단점은 지역특성에 맞춰 업종 및 업체를 구분해야 하다 보니 행정력의 손길이 많이 가고 피곤하다는 것이다.  매출 구분의 장점과 단점은 이렇다. 장점은 우선 일일이 대상 업체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단시간에 가맹점을 확보할 수 있어서 행정력의 역량투입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기준 이하이면 대기업 프랜차이즈점 등에서도 쓸 수 있어 같은 업종 내에서 소비의 쏠림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매년 매출 기준을 확인하는 것도 일이다.  두 방식은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 업종 구분 내에서 매출상한 기준을 도입하거나 매출 구분 내에서 업종기준을 디테일하게 정하면 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누이 강조하지만, 지역의 특성에 맞춰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해 지자체의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는 점이다.  가맹점 기준을 일률적으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맞추는 것은 지역화폐라는 이름이 매우 아까운 일이다. 다행히 지난 5월에 제정된 ‘지역사랑상품권 활성화 법률’은 가맹점 등록에 있어 지자체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자체의 자율성이 아무리 강조된다 해도 ‘웬만하면 다 쓸 수 있도록 하지 뭐’라고 한다면 매우 곤란해진다. 웬만하면 다 쓸 수 있는데 정부의 인센티브 지원이 끊어지면 소비자가 ‘웬만하면 그냥 혜택 많은 카드 쓰지’라는 선택지로 선회해도 할 말이 없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지 뭐’라고 치부해도 지역화폐 소비의 쏠림현상, 가맹점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역화폐 운영에 있어 가맹점 기준은 정말 중요하다. 문제의 정의를 잘 내려야 과정과 결과가 모두 좋게 나온다. 이를 잊지 않는다면 지역화폐의 목적에 맞는 가맹점 기준 확립은 어렵지 않다. 항시 그렇지만 ‘성과’가 문제다. 덧붙이자면 과도한 ‘정치’의 개입이 있다. 이 둘은 또한 동전의 앞뒷면 같아서 항상 붙어 다니곤 한다.  하긴 좋게 출발했지만 손이 타면서 흐지부지 사그라지거나 오히려 해악이 되는 정책이 어디 한 두 개이던가. 어쨌건 지역화폐는 소비쿠폰과 다르다.
2020-09-16 | hrights | 조회: 838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두 가지 종류의 말이 있다.  참 또는 거짓의 여부가 판명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신이 현존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말은 그 현존하는 신이 전지전능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언제 어디서건 늘 발휘한다는 말로 발전한다. 이런 말은 그 형식상 사실에 관한 말에 속한다. 즉 ‘가 있다’라거나 ‘는 ……이다(하다)’라는 형식을 띤 말이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신이 현존한다.”()라는 말은 “코로나19 사태가 지속해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거나 “해고노동자 복직을 위해 한때 함께 싸웠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한 사람은 삼십여 년에 이어 지금도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거나 “그는 억울한 마음에다 원한이 사무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라는 등의 말과 똑같은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등의 문장은 감각적 경험에 따라 참인지 거짓인지 이성적인 판명이 가능한 데 반해, 문장 는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할 길이 없다. 원리상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가능한 말은 대체로 문장 처럼 자연적인 사실을 지시하거나, 문장 처럼 사회적인 사실을 지시하거나, 또는 문장 처럼 심리적인 사실을 지시한다.  새로운 각종 SNS 미디어가 발달함으로써 흔히 가짜 뉴스라 일컬어지는 말들이 난무한다. 가짜 뉴스라는 것도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할 수 있을 때만 성립한다. 원리상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될 수 없는 말은 진실한 뉴스도 아니고 가짜 뉴스도 아니다. “하나님도 나에게는 꼼짝하지 못해.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말은 저 위 문장 처럼 사실을 나타내는 형식을 띠고 있긴 하나,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수 없다. 즉 경험적인 이성을 적용할 수가 없다. 와 처럼 사실에 관한 말의 형식을 띠고 있긴 하지만, 이같이 경험적 이성에 의해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수 없는 말을 난센스한 말이라고 말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난센스한 말의 한 예로 “장미는 이빨이 없다.”()라는 말을 제시했다.  조만간에 또는 언젠가는 참 또는 거짓이 판명될 수 있는 종류의 말은 원리상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이때 감각적 경험은 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다. 말하자면, 상호 주관적으로 함께 관찰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현실에서의 경험이다. “이번 총선은 완전히 부정선거다.”()라거나 “현 정권에서 우리 교회에 코로나바이러스 퍼붓는 테러를 저질렀다.”()라는 말은 난센스한 말이 아니다. 그 성격상 어떻게든 감각적인 관찰을 통해 참 또는 거짓을 밝힐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이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라고 개념상 모순으로 여겨지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제로 빛이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입자로 관찰되기도 하고 파동으로 관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 난센스한 말이 오히려 무섭다.  흥미로운 점은 , , 와 같은 난센스한 말이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묘하게도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그 현혹의 역사는 너무나 오래되었고, 그 영역과 방식은 다종다양하고, 그 생명력은 뽑아도 뽑아도 곧바로 자라나는 잡초처럼 끈질기다.  경험적인 이성을 통해 참 또는 거짓으로 판명이 날 수 있는 말의 경우, 보통교육을 받은 합리적인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사실의 여부에 관해서는 과학이 밝혀줄 것이고, 사회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객관성을 중시하는 언론이나 사회 관련 학문 또는 사법기관이 밝혀줄 것이고, 심리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나 행동을 바탕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밝혀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따라,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참이면 긍정해서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 거짓이면 부정하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어긋나게 행동해서 대처하면 그만이다. 말하자면, 참 또는 거짓으로 판명이 날 수 있는 말들은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참이건 거짓이건 그에 따라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거나 하다못해 사력을 다해서라도 대처해 보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참 또는 거짓이 밝혀질 수 없는 주장은 그렇지 않다. 우리 인간은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고 여겨지는 관념적인 대상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알 수 없다고 여겨지면 없다고 해버리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상한 소리가 분명히 들리는데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왜 나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 소리는 진정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그 소리를 인격화하여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소리는 완전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 그 소리가 자신의 길흉화복을 전적으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힘을 지녔다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그 알 수 없는 힘을 남들은 느끼지 못하고 나 혼자만 느끼는 데 따른 희열을 느끼기까지 한다. 두려움과 희열이 뒤범벅되면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밤새도록 기도하다가 아침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망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구촌에서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난센스한 세계에 완전히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그 세계가 난센스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의미와 가치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그 세계를 난센스한 것으로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역할을 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오히려 철저히 난센스하다고 여기게 된다. 즉 구체적인 현실의 삶을 무의미하고 허망하다고 확실하게 치부하게 된다. 적반하장의 완전한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자들의 삶이야말로 철저하게 거짓될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 확신을 토대로 이제 사실을 아예 벗어난 순수한 가치의 세계로 향한다. 자신의 사유와 감정과 말과 행동은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하는 척도인 감각적 경험에 따른 관찰과 실험을 완전히 무시한 상태에서 이루어질 때, 바로 그때에만 근본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거짓말을 잘 구사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처럼 거짓을 따르더라도 좋을 수 있고,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죽음을 면치 못했을 때처럼 참을 따르더라도 나쁠 수 있다. 그런데도, 좋은 것은 진리고, 나쁜 것은 거짓이라고 여겨 사실의 세계를 가치의 세계에 복속시킨다. 그리고 좋음을 초월적으로 인격화하여 하나님이나 천사로 여기고 좋음이 온통 지배하는 내세인 천국을 굳건히 설정한다. 그리고 나쁨을 초월적으로 인격화하여 악마로 여기고 악마가 지배하는 내세인 지옥을 굳건히 설정한다. 아울러 그 현존 여부에 관해 참 또는 거짓을 밝힐 수 없는 신이 참 또는 거짓을 분명하게 심판할 뿐만 아니라, 그 심판은 축복과 저주로 나뉜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러면서 이제 참 또는 거짓은 사실에 관한 것에서 순전히 가치에 관한 것 즉 좋음(선)과 나쁨(악)으로 전격적으로 변환된다. 그러니까, 좋음과 나쁨 즉 가치의 여부는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 가능한 사실에 근거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의 현실을 얼마나 더 강하고 뚜렷하게 넘어서고 벗어나 무시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다: “아, 우리 목표가 죽는 거야. 원래. 우리는 갈 곳이 정해져 있어, 하늘나라야.” 사진 출처 - 뉴스1 3. 진정한 가치는 철저히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의 삶에 의미 있는 가치는 본래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가치 즉 좋음과 나쁨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경제학적으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 얼마나 투입되었는가, 하는 사실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원용해서 말하면, 나의 행위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는 그 행위를 할 수 있기 위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했는가에 따라, 그리고 나의 이 행위가 앞으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얼마나 일으키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가치는 새로운 사실들을 얼마나 어떻게 다양하게 일으키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행위가 만약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나의 그 행위가 가치가 있는 것은 그의 생명 자체를 유지하도록 한 데 있긴 하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을 통해 여러모로 많은 새로운 경험적인 사실들이 생겨나도록 했기 때문이다.  더운 한여름에 높은 산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거나 계곡으로 내려가 폭포를 맞아 차갑도록 시원하면, “아이고, 정말 좋구나!” 하고 말한다. 이때 좋다고 말하는 것은 우선 가치 판단이다. 하지만, 이때 가치는 내 몸이나 내 심정의 사실에 근거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덕분에 재생된 활기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할 수 있고 그만큼 새로운 사실들을 엮어낼 수 있음에 근거해서 성립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특강이 끊어져 ‘배고픈’ 프리랜서가 국가로부터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으니 좋다고 할 때 그 좋음은 그저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고 싶었던 책도 살 수 있고 모처럼 외식도 할 수 있고 웹캠과 웹 마이크를 살 수 있고 오랜만에 안심 놓고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즉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욕망을 여러모로 충족함으로써 그에 따른 새로운 사실들을 만들고 그 새로운 사실들을 통해 관련된 새로운 감각들을 느낄 수 있기에 좋음, 즉 가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 즉 가치 또는 반(反)가치는 사실에 앞서 그 자체로 먼저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는 사실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역사적으로 가치의 척도는 변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렇게 변해 온 것이다. 말하자면 감각적인 사실들의 장기간에 걸친 폭넓은 역동적인 교환에 따라 가치가 발생하고 소멸해 온 것이다. 4. 코로나 팬데믹이 기독교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은, 특히 이 땅에서 광신적으로 기독교에 매달린 자들은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참 또는 거짓으로 나뉘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으로써는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할 수 없는 세계야말로 참다운 세계고, 그것이 참다운 이유는 그 세계야말로 진정한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그런 경향을 정확하게 행동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러한 세계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한 것이고 그 결과 그 세계에서 쫓겨나 지옥의 문턱에서 ‘슬피 울게 되리라’라고 주장한다.  그 행동은 마침내,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여기 이 땅에서 행복과 평화를 이루고자 하거나 그 바탕이 되는 평등과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을 적으로 여겨 철저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문재인은 빨갱이다.” 자신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를 적으로 여겨 공격하는 것은 마치 풍차를 적으로 여겨 창을 꼬나 쥐고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을 적으로 여겨 공격하려는 세력을 허상으로라도 만들어내야 하고, 마침내 그 허상이 진상이라고 정확하게 착각하는 데까지 자신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몰고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빨갱이’라는 상징적 코드야말로 그러한 적을 만드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여긴다.  광신은 이성을 적으로 여긴다. 기독교적인 초월 세계에 대한 광신은 감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성에 따라 여기 현실에서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행위를 적으로 여겨 대립한다. 그동안 오랜 역사를 지닌 기독교는, 특히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이른바 세속과의 연결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세속의 현실을 정치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하지 않고서는 현실 사회에서 그 정당성을 획득할 길이 없었다. 그 결과, 언제나 현실에서 사회적인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는 만큼 제대로 된 신앙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자의든 타의든 또는 위장을 통해서건 노골적이건,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부와 명예에 빌붙어 이성을 저버릴 때 그만큼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반대로 이성을 무시하고 가상적인 초월적 세계에 올곧이 빠져들어 자신들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불평등과 그에 따른 인민들의 불행을 백안시하는 것 역시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이었다.  그중 가장 타락한 형태는 광신을 퍼뜨려 활용함으로써 저 자신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기묘한 광신의 열정으로 무장한 특정한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면, 천국을 상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고 유혹하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제정신이 아닌 그들의 힘을 끌어모아 이용하는 것이다: “여신도가 빤스를 벗으라고 할 때 벗으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 말하자면, 광신적 신비주의가 현실의 권력과 결합할 때 가장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타락하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세속인들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의 목숨 역시 대대적으로 위협한다. 이에 신앙인들 역시 경험적 이성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을 판명하고 실천하는 과학의 역량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의 상황에 몰려 있다: “방역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고 과학과 의학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든 종교가 받아들여야만 한다.” 참 또는 거짓의 판명이 불가능한 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딜레마적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떻게든 함께 모여 서로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서 함께 모이면 목숨이 위험하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데 그러면 신앙이 위험한 것이다. 특히 ‘신천지 교단’ 사태와 ‘사랑제일교회’ 사태가 하나님이라는 신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침묵에서 그의 섭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유대인 대량 학살이 계속 이어질 때 거기에 잡혀 있었던 어느 유대인이 외쳤던, “야곱의 하느님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말이 메아리친다.
2020-09-03 | hrights | 조회: 1049 | 추천: 6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단상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입장하는 줄이 길었다. 영화관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마주한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문과 문 사이는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 공간을 무사히 통과해야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사이 공간에서 체온을 측정하고 손을 소독하고 나서야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절차로는 흡사 멸균실로 들어가는 분위기였는데, 정작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한 줄은 거리두기를 하지 못하고 서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웃지 못 할 풍경은 코로나가 바꿔놓은 일상이다. 두 개의 문은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한 극장 측의 눈물겨운 자구책이지 싶다.  극장가가 어려움을 맞고 있는 이때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여기서 파생한 전범기업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일본인들을 조명한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제목부터 무척 비장한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성찰적 시각을 담았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일본사회를 위정자와 여러 다양한 층위의 시민들로 구별해보지 않고, 뭉뚱그려 보고 있는 ‘반일’의 시각에서 보자면 일본사회 내부의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는 큰 충격과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물론 한일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사회의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사회 연대는 있어왔지만, 반성을 촉구하며 결행한 것이 미쓰비시중공업, 미쓰이물산, 대성건설 등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연속폭파사건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1974년부터 75년까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와 ‘대지의 엄니부대’, ‘전갈부대’에 의한 아홉 차례의 연속 폭파사건으로 일본사회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사회에서 ‘늑대’라는 말은 금기어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당시 일본사회가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는지 짐작할 만 하다. 단지 형식적 과격함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제국주의와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 없는 자국민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반일’을 외친 그들의 목소리가 일본 사회를 흔들어 깨웠다. 방식에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지만, 그들의 동기와 용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영화를 만든 김미례 감독도 이들의 이야기를 만들며 수없이 고심한 대목이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예고편 그들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가? - 모른다. 그들의 폭력을 지지하는가? - 모른다.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 모른다. - 김미례 감독,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온 심정이 딱 그랬다. 대의와 명분은 충분했으나 폭력은 지지할 수 없다. 허나 그들의 방식이 이 사건을 주목하도록 만든 이유였으니 이 폭력을 지지해야 하는가, 지지해서는 안 되는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부대원들과 그 지지자들이다. 감독은 부대원의 성찰적 삶의 발원이 된 일본 내부 식민지 홋카이도의 아이누 모시리와 오키나와의 역사를 조명하고, 60년대 베트남전쟁 반전운동과 아시아에 대한 전쟁책임을 지적한 전공투(全共鬪) 세대였던 그들과 거기서 파생된 운동이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잔당으로 오해받아 형을 받고 옥살이까지 했던 무장전선의 지지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공투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일본사회에 던진 폭탄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해의 역사를 성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가해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베트남전쟁을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남기는가. 가해와 피해라는 말의 사용조차 어렵기만 하다.  가해와 피해는 한 사람 안에 존재하고, 한 사회 안에 존재하고, 한 나라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여태껏, ‘가해’와 ‘피해’라는 단순화된 언어 사이에 수없이 존재하는 언어들을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데 있어 쉽사리 ‘가해’와 ‘피해’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다. 영화가 던진 질문에 명징하지 않은 단상을 이어가 본다. 화두는 ‘모른다’이다.
2020-08-26 | hrights | 조회: 775 | 추천: 3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올 해는 유난히 길었던 장마와 폭우로 인해 한반도가 물바다가 되었다. 나와 남편의 고향은 웬만한 비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이번엔 예외였다. 남편 본가 동네에 자리한 커다란 저수지 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동네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대피처라고 마련한 곳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다행히 남편 여동생이 어머님과 함께 있어 어떻게든 무조건 탈출하라 권유하고, 내 남동생과 언니에게 부탁하여 나의 본가로 모셔놓고 바로 내려갔다. 그 지역은 시골이라 홀로 사는 여성노인들의 숫자가 더 많다. 소방차도 못 올라올 정도로 도로가 폭우로 유실된 상황에서, 할머니들이 홀로 걸어 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장마와 폭우에 대처하는 국가안전행동지침 혹은 요령을 보면서 안전에 얼마나 취약한지, 국민 누구나 늑장대처와 책상머리 매뉴얼만 읊어대는 관료들을 보면서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매뉴얼은 현장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항상 사건이 먼저이고 분석이 뒤따르는 것이 이치다. 그러나 이번의 대처는 과거의 분석결과-그것도 가상, 혹은 상상에 따른 지식관료들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더 큰 재난들이 발생한 것이다. 이번 재난은 천재라기보다는 인재에 가깝다는 여론이 이는 이유다.  제대로 된 대피처도 마련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방송을 통해 무조건 집을 나오게 하여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노인여성들을 위험천만한 장소에 모아놓고 마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붙잡아만 두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화가 났다. 소방관들 두 어 명만 올려 보냈다는 말, 그들도 어찌할 도리 없이 맥 놓고 있기만 하다는 말도 들렸다. 위기 상황을 대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노인여성들의 거동을 도와줄 도우미들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도로유실을 이유로, 이 노인여성들을 불안한 장소에 묶어두기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이 상황을 들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안전한 장소로 옮겨왔을 뿐이었다. 결국은 또 다시 모든 재난이나 위기는 가족들의 책임이 된다. 복지가 가족들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처럼.  재난은 여성에게 더욱 더 취약하다. 아주대학교 이국종 교수가 재난과 응급상황에도 계급이 있다고 하듯 재난에도 성별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1991년 방글라데시 사이클론 나르기스에 의한 사망자 14만 명 중 90%가 여성 -2004년 동남아시아 쓰나미 희생자의 67%가 여성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성별 사망자 수는 대부분 연령대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많았고, 고령층의 여성사망자 수는 남성에 비해 압도적 -2014년 한국 세월호사건 당시 남학생은 전체의 27.3%가 생존했지만 여학생은 19%만이 생존 -2018년 제천 화재, 총 29명 사망, 여성 23명 사망 -2018년 종로여관 방화로 6명 사망, 여성 3명 사진 출처 - 뉴시스  여성의 재난 불평등은 여성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더불어 낮은 경제적 지위와 연관이 있다. 여성인권이 높은 나라에서는 재난 시 사망자 비율이 여성과 남성이 비슷하다. 또한 여성은 긴급 상황에서 아이와 노약자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피난이 어렵고 적절한 교통수단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한 가구에서 차량소유자는 대체로 남자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영이나 달리기 같은 대피에 적합한 신체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체육시간에는 주로 피구 정도나 하고, 일상적으로도 여자아이에게는 체력훈련을 권하지 않는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치마나 하이힐처럼 대피에 불편한 의복을 착용해야 하는 등 단지 여성다워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조건에서 재난상황에서 탈출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도와줄 남성이 없으면 스스로를 구해내지 못하도록 구조화된 여성들의 억압. 이 억압은 가부장제 남성연대가 만들어낸 여성 인질화의 다른 이름이다. 가부장제를 탈출할 수 없도록 구조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자력의 상실’이다.  자연재해와 재난은 다르다. 또한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재난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부, 지식, 성 등 사회적 불평등의 요소와 일치한다. 슘페터는 재난을 성공적으로 복구하게 되면 재난은 ‘창조적 파괴’가 된다고 했다. 이번 재난의 복구과정에서 기업들의 돈을 불리거나 남성들을 기준으로 한 재난 대피 매뉴얼을 반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사회적 불평등 요소들, 즉 계급, 지식권력, 성, 사회적 소수자들을 더욱 고려하는 복구의 과정과 대처 매뉴얼이 되어야 한다. 복구의 과정과 대처방법이 사회적 불평등 구조에서 권력 없는 자들을 더 고려할 때 그나마 불평등 요소를 극복할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절반의 국민인 여성들의 환경과 상황을 고려한 대처와 극복방안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난 상황에서 여성들의 사망률은 지속적으로 높게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재난상황에서의 성별분리 통계도 체계적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이에 따른 분석을 통한 대처방안 마련도 필요하다. 현재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확진 비율이 높게 나오고 있지만 왜 그런지는 나오지 않는다. 성별이 고려되는 재난정책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2020-08-26 | hrights | 조회: 731 | 추천: 4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다. 감염병에 대한 공포, 마스크 대란, 위생수칙의 학습, 국경을 넘는 외국인에 대한 불편과 방역에 대한 자긍심, 닫힌 교문과 온라인 학습, 활기를 잃어버린 공항과 터미널들, 폐업을 선언하는 작은 가게들,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감염의 공포 속에서도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 이 모든 비일상적인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 벌써 반년도 더 지났다.  2월 졸업식도 3월 입학식도 없이 대학에 들어온 스무 살 청춘들은 집이나 카페에서 온라인으로만 ‘대학의 맛’을 간신히 허락 받았고, 일주일에 두 번 출강하던 그 대학의 단과대학 건물을 나는 학기 내내 한 차례도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의 강좌로 묶여 있었지만, 가상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식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가을학기에도 비대면이 강의의 기본값이 될 것이다.  3월이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대학들은 강의방식을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비대면 온라인 수업 방침이 정해지고 나서는 각 과목 교수자들의 좌충우돌이 시작되었다. 방송장비를 구입하고, 프로그램을 숙지하고,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강의내용을 녹화하고 업로드 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이전에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새로운 교육방식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단기계약직 강의노동자인 강사들은 난데없이 새로운 불안과 의문 또한 가져야만 했다. ‘온라인 강의가 자리잡게 되면, 대학은 비용절감의 차원에서 교과목을 통폐합하는 방식으로 강사 수를 대폭 줄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2년 후, 대학들이 다시 공채시스템을 가동시킬 때까지 코로나 정국이 지속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와 같은.  처음 시도해보는 낯선 강의방식에 준비시간도 몇 배로 늘어났다. 강의 내용에 대한 공부 외에도 프리젠테이션에 쓸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감각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글자체와 색깔 음악과 이미지 자료들까지 꼼꼼히 신경 쓰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반복해서 재녹음하는 자발적인 수고를 하는 동안, 남의 속도 모르고 ‘온라인 강의, 수업의 질 떨어져’ ‘학생들 등록금 환불 주장’과 같은 뉴스들이 넘쳐났다. 대학이 어떤 식으로든 강의에 대한 모니터링을 할 것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았던 강사들은 양질의 온라인 강의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는 걸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는데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삶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관계가 그렇겠지만, 교육의 영역에서도 ‘실감’은 중요하다. 교수자는 자신이 전달하는 교육의 내용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학생들의 기색을 살피고 눈을 맞추며 질의응답과 수행을 검토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확인해 나간다. 반드시 강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특정한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시간의 두께 속에서 관계는 복제 불가능한 고유한 것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학기가 끝난 후 그것은 학점이나 몇 가지 인상적인 크고 작은 사건으로만 잠깐 기억되다 곧 잊혀질지라도.  대면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실감’을 강의의 척도로 잡는다면, 모든 온라인 강의는 ‘질이 떨어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익숙한 관념을 지우기 위해서는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오래전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모든 미디어 중에서 라디오가 가장 ‘내밀한’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비대면의 조건 속에서 미디어 장치를 경유하면서도 감응적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기엔 라디오 방송 컨셉으로 강의를 만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대학 강의실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지루한 교양서적을 설명하는 선생이기를 그치고, 심야라디오방송 교양프로그램의 디제이가 되기로 했다. 적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늦은 밤에 녹화를 했고, ‘애청자사연코너’를 통해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문학’과 관련된 교과목의 특성 덕이기도 했겠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매주 도착하는 정성들인 ‘사연들’(정확히는 사연이라는 이름의 수업내용과 관련된 질문과 의견)을 읽어주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고양이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는 누구, 매일 밤 조금씩 자기 전에 듣고 있다는 누구, 방송을 듣고 책을 다시 찾아 읽었다는 누구, 자료화면의 색감에서부터 어떤 문장들에 대한 취향까지 꼼꼼하게 말해주던 누구, 다른 사람의 사연에 대한 감상을 전해주던 누구,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도 수업에 반영해 달라고 요구하던 누구. 어느 순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 누구들은 강의실의 학생이기를 그치고 프로그램의 애청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온라인 비대면 수업시간을 통해 나는 지금까지 진행했던 어떤 대면강의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학생들과의 따뜻한 ‘교감’을 경험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었다.  9월이 되면 다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겠지만, 큰 이변이 없는 한 코로나와 동거하는 삶의 양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온라인 수업은 계속될 것이고, 대학들은 학생들의 등록금 환불 요청이나 휴학 등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비용의 보존과 절감을 계산할 것이다. 대학이, 대학의 형태가, 교육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달라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지금의 대학구성원 누구라도 고통 받지 않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이 낯설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일자리’와 ‘배움’의 권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더 나은 삶을 기획하는 희망과 상상의 실천들은 멈추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2020-07-29 | hrights | 조회: 964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