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서약이란 게 맹세도 하고 거기에 약속까지 더한다는 말이니 하늘이 두 쪽 나도 지킬 건 지키겠다는 뜻이겠다.  어느 단체의 모임에 가거나 길거리라도 지나치다보면 내 이름석자 적어 넣을 용지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나는 비교적 자발적으로 서명에 참여하는 축에 속한다. 굳이 부연하지 않더라도 생명, 평화, 나눔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일렬횡대로 정돈되어있는 사고구조를 가진 세대라 이 비슷한 주제를 가진 서명운동이라면 내 이름을 일부러 뺀 적은 없다. 별것도 아닌 이름과 주소가 무슨 힘이 될까마는 사람 없는 집회에 머릿수라도 채우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심정으로 쓴다. 도룡뇽 살리자는 데도 썼고 새만금, 장항 갯벌 살리자는 데도 썼다. 구속 노동자 석방하자는 데도 쓰고 국가보안법 폐지하자는 데도 쓴다. 나는 살리는 게 좋다. 다 살리자는 서명용지에만 내 이름을 썼다. 딱히 내가 가진 게 없으니 더 가질 것도 없고 세상에 큰 이익이라는 게 뵈질 않으니 눈 부라려 싸울 일도 별로 없다. 그러니 실천이 어려워서 서명을 못할 이유도 없다. 딱 하나 맘에 걸리는 게 “빈 그릇 운동”, 그거 서명해놓고는 거의 실천 못하고 있다.     FTA 반대 서명운동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십 수 년 전 나는 결혼 서약을 했다. “나는 그대의 또 하나의 몸 그대는 나의 또 다른 영혼”이라는 사랑의 거대한 약속을 마음으로 확인하는 일이므로 가끔 만나는 서명용지의 날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서약을 하면서 가슴 한구석엔 묵직한 책임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일종의 환희와 같은 것 이었다. 덕분에 나는 궁할 때 소리 없이 지갑을 채워주는 후원자를 얻었고 매일같이 세상 잔일까지 얘기 할 수 있는 술친구를 얻었고 배고플 때 맛난 밥상을 올려주는 요리사도 얻었다. 또 가끔씩 착한 일 했다고 선물 사달라는 딸아이의 투정도 들을 수 있으니, 지금까지 수천 번의 약속을 했으나 그중 가장 잘한 약속이 결혼서약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머리에 담는 게 마음에 품는 이만 못하고 마음에 품는 게 발 가는 이만 못하다. 서명은 마음으로 품는 일이지만 서약은 발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게 있다. 1911년 조선 교육령에 의해 예비 황국신민들을 훈육했던 “교육칙어”의 정신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의 등장으로 새 빛을 발한다. 그 정도의 충성도 모자라는지, 어떤 놈이 또 말을 안 들었는지 우리의 나랏님들께서는 국기에 대해서까지 몸과 마음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급회의라는 게 생기고 나서부터 이후 내리 8년을 쉬지 않고 반공부장만 맡았었던 나는 매일 오후 5시면 울리는 국기 강하식 음악에 가던 길 멈추고 가슴에 손을 올렸고 나처럼 하지 않는 어른들에게는 국기를 존중하라고 따지고 들었었다. 물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잘 외우자는 실천사항은 삐라를 잘 줍자는 말과 함께 나의 학급회의 단골 메뉴였고.   “이날은 대성전기념일도 축제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받은 깃대에 국기를 한번 꽂아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땀까지 흘려가며 벽장 속에서 국기를 꺼내어 그 깃대에 매었다. 탄탄한 깃대에 비해서는 벌써 장만한지 해가 겹친 국기의 깃폭은 낡아 보였다.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뒷집에서 깃대를 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거기에 맞추어야 할 새로운 깃폭을 준비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나는 깃대에 꽂힌 국기를 방 아랫목에 세워두고 한참동안 합장을 하고 있었다.” - 일장기 앞에서 전문 - 미당 서정주.   따지고 보면 나는 경건한 서약을 매일같이 했던 것인데, 문장은 아니로되 국기에 대한 정성만큼은 서정주 시인의 일장기와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를 그때 알았더라면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어서 암송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가가 개인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참 난감하고 불경스런 질문을 나는 아직도 달고 다닌다. 군대 가서 나라 밥, 나라 옷 입고 각종 작업 기술 익혔으니, 의무교육으로 보낸 학교에서 나의 딸아이는 열심히 경쟁을 배우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노동의 권리는 없는 나라에서 그나마 의무라도 있으니, 버는 만큼 쓰는 만큼 내는 세금의 혜택은 없어도 늙으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에 감사해야하나. 가장 최근에 나의 의지로 서명한 것이 한미 FTA반대였다. 그전에 비정규직 보호법 반대였고 사립학교법 재개정 반대였다. 불행하게도 국가는 나의 의지를 모두 다 꺾어 버렸다. 아직도 국가는 내게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보다 내가 국가에 무엇을 바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바쳤는데 뭘 또 바치라고.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가 바뀐단다. 내용을 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국가는 나에게 서민경제 활성화도 약속했었고 비정규직 보호, 고용시장의 안정, 일자리 창출. 별거 별거 다 약속 했었다. 또 2년 전 국가는 자국민인 교토 우토로 마을의 할머니들에게 국가예산으로 부지매입을 돕겠다고도 약속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인권·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6월 11일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없애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002년 월드컵 경기장에서 내 마음은 무척 뜨거웠다.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붉은악마 응원석으로 대형태극기가 펼쳐질 땐 저절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외쳐 불렀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한국 축구팀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지나보니 나의 생활과 아무 상관없는 그 기억이 국가가 나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었다. 약속은 상대적인 것이다.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맹세할 국민은 없다. 무엇하나 나올 것 없는 국가에 대해 서약과 같은 맹세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국가는 국민의 의식위에 군림하는 신이어야 한다. 나는 그런 신을 섬길 이유가 없다. 고작 문구 몇 개 바꾼 “국기에 대한 맹세” 따위로 국민에게 거짓 충성을 강요할 순 없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66 | 추천: 0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이다. 바쁘던 1학기가 지나고 어느새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다. 이때쯤 교실의 풍경은 나른함과 무기력함으로 가득하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늦은 밤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밤새 컴퓨터에 집중하다가 학교에서는 점심도 거르고 잠에 빠져드는 아이들, 무더위에 지친 아이들 등. 교사들 사이에서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난 철수(가명)가 자면 못 깨우겠어! 수업을 하라고, 또는 시험범위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있으니 들으라고 깨우면 거친 몸짓과 목소리로 항의를 하는데 너무 힘들어! 철수와 실랭이를 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게 되고.... 그리고 솔직히 철수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고 수업을 하기도 해.” 힘겨운 날씨만큼이나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때쯤 교실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한계상황이다. “지난해 말 충남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수업시간인데도 한 학생은 엎드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H교사는 이름을 불러도, 야단을 쳐도 반응이 없자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등을 한 대 쳤다. 그 학생은 “학교 때려 치면 될 것 아니냐”며 의자를 들어 칠판 쪽으로 향하던 H교사 등 뒤로 의자를 던졌다. 여교사인 H씨는 의자에 맞아 쓰러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해럴드 경제신문 2007.6.1)라는 뉴스는 교사들을 더욱 위축시킨다. 심리학자들은,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요인에 후천적인 환경(사회문화적) 요인이 합쳐져서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 중 어느 부분에 더 가중치를 두느냐는 연구결과를 접하는 연구자 개인에 따라 다르다. 어떤 연구들에서는 비행과 불륜을 저지르는 유전인자 등을 거론하며 선천적인 요소가 삶을 지배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게 교사들에게 유용한 변명 - 더군다나 학술적으로 근사하게 정리된 것이 아닌가! - 이 될 때가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안 될 때에는 “정말 유전인자의 문제인가 보다”라며 그만 포기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교사들의 푸념이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이전 교육 방식이나 환경에 익숙하신 분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부 학생들은 자기가 공부하는 교실 바닥에 서슴없이 가래침을 뱉거나, 먹고 난 과자 껍질을 교실이든 복도든 길거리든 간에 하등의 망설임 없이 마구잡이로 버리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함부로 하는 경우도 있고, 도저히 교육을 받는 학생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욕설이나 비속어를 예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이런 경우를 접하면 혼란스러워진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공동생활을 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 싶지만, 이를 통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학생들을 보게 되면 그 정도 혼란은 기본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교육이 무엇을 담당해야 하는가 ! 질문에 질문을 더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긴 어려워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교사의 몫이 아닐까, 라는. 교사를 그만두면 모르되, 그런 걸 못 보아내는 사람들이 결국 교사라는 것이며, 교육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면서 아무리 요령피우고 대충대충 현실과 타협하고 넘어가도 “아직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다”라는 게 교사들이 겪는 혼란스러움의 마침표가 되곤 한다. 사실 그렇다. 학업이나 올바른 가치판단을 위한 도덕성 기르기, 인격형성을 위한 일들은 굳은 의지와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지와 부단한 노력을 전문적으로 떠 맡는 것이 바로 교육이며, 교사다. 학교는 가만히 두어도 너무나 잘 따라하는 그런 분야 말고 무심코 두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해 버릴 그런 일에 문제를 제기하고, 올바른 의미를 가르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는 얘기다. 어려운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여잡고 함께 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의 몫이다. 무더운 더위와 갖가지 스트레스에 지쳐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의 뒷모습에서 교사가 서 있을 자리를 본다. 그곳에 또한 우리 사회 교육이 나가야 할 나침반이 놓여 있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53 | 추천: 0
6월의 뜨거운 함성 소리가 아직도 귀에는 쟁쟁하게 들리는데 벌써 20년이 지났고, 국가는 6월 항쟁을 기념일로 정했다. 87년 6월의 그 시기에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신림동의 한 고시원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공부를 할 때였다. 2차 사법시험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과의 절박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여서 무척이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시위에 참가하다가 혹여나 붙잡히기라도 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절박함은 공포와 무서움으로 다가 오기도 하였다. 끙끙대면서 그대로 방안에 눌러 앉아 있어도 책의 내용들이 머리에 제대로 들어올 리 만무했다. 고민 끝에 정갈하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서울의 거리로 나갔다. 주위에는 수많은 학생∙시민들이 운집하고 있었고, 나도 그들 인파에 섞여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목 놓아 부르짖다가 고시원 방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고시원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나를 아끼던 동료들은 나에게 ‘지금 제정신이냐?’고 훈계를 하며, ‘시험마치고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 되지 않느냐’고도 하였다. 그런데 시위에 참가하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오히려 공부에 집중이 더 잘 되었다. 마침내 6월의 함성은 호헌철폐를 성공시켰고, 나 역시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하였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그 뜨거운 6월의 함성 소리와 두근거리던 심장의 고동은 대통령의 탄핵 사건으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였다고 판단되자 다시금 국민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다. 그 때 나는 사랑스런 딸과 아들의 손을 붙잡고 다시금 광화문의 차가운 길에 앉아서 민주주의를 노래하면서 자식 세대에는 이런 일이 없는 민주주의를 만끽하며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세상은 그처럼 만만하게 우리 곁에 올 수 없었나 보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아름다운 세상은 보이지 않고 이제는 곳곳에서 들리는 카나리아의 슬픈 경고음만이 어지럽게 귀를 때리고 있다.  6월 항쟁의 정신과 계승, 그 공과를 두고 언론에서는 여러 토론과 특집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87년 6월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대학생·시민들의 농성투쟁 모습 사진 출처 - 88보도사진연감  대체적인 평가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룩하였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는 아직 이루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라고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민주화는 진전되었으나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악화되어 민중의 삶의 질은 나빠졌다는 평가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과연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우리 사회가 아직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도 제대로 쟁취하지 못한 사회라고 판단한다. 다시금 군인들이 총칼과 탱크를 몰고 거리로 몰려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하지만 그 경우를 완전히 부정할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직도 극단적인 망언을 서슴지 않는 일단의 극우주의자들의 호기로운 발언들을 보노라면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법과 제도가 민주화 되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이후 우리 국민은 법과 제도를 명실상부하게 민주화시킬 절호의 기회를 여당에게 부여하였으나 무능하고 저급하며 지리멸렬한 정치인들은 이를 현실화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사망진단서가 발급되지 않은 악법과 제도 등이 존재한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의 차가운 칼바람에 의해서 그토록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평화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감옥에 뒹굴고 있고, 저주스런 굿판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후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양심을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고 썩혀야만 하는 법률을 고집하는 사회, 그들을 배척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어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개악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개악 시도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등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지 아니한가.   한·미FTA협상 타결을 반대하는 집회 모습 사진 출처 - 국민일보  그토록 참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참여정부로 명명한 정부에서 국민들의 참여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데 절차적 민주주의가 과연 완성되었다는 것인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진정으로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제도와 관행이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집권층 내부에서 건전한 비판의 소리는 사라져 버렸고, 비정규직의 서러움과 배고픔, 아픔의 소리가 집권층에게는 그저 불평불만 하는 소리쯤으로 치부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미 FTA를 두고 절규하는 농민 등의 몸부림은 세계화에 대하여 무식한 농군의 폭력쯤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사회가 진정 민주적∙절차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된 민주주의인가. 참여하여 함께 가면서 고통과 열매도 함께 한다는 이상적인 참여정부에서 참여가 거의 실종되어 버렸는데 절차적 민주화는 진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노대통령님의 업적 중의 하나가 권위주의 철폐라는 점에 나는 공감한다. 그런데 왜 형식적 권위주의는 없애면서 왜 참여를 주장하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유독 권위적으로 대하며 국민들의 아픈 목소리에 손을 내밀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도 이룩하지 못한 6월의 심장을 단지 기념식장의 파티로 끝낼 수는 없지 않는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대다수 6월의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심장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고, 그 타오르지 못한 6월의 심장들이 희망의 연대로 타올라 이제 저 허접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을 선거라는 모래판 밖으로 몰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6월의 심장이 1차적으로 명령하는 명제이며, 우리가 또다시 희망의 연대로 조국 산하에 꿈을 심는 형식적∙실질적 민주주의를 키워내는 씨앗을 뿌리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47 | 추천: 0
나는 요즘 명상, 묵상 따위를 해 볼까 궁리 중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기도나 열심히 하지, 웬 명상 · 묵상이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게는 “하느님 아버지!” 하고 시작하는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기도가 영 어색하다. 그래서 식사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 예배에서도 때론 눈을 감고 손을 맞잡고 있지만, 때론 남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속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찾지는 않고 그저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내 안에 있는, 또 우리 사이에 있는 신적인 존재와 좀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성적으로 이해했던 예수를 보다 가깝게 느끼고 싶다. 기존 교회에서 주장하는 가짜 하느님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어느새 공(空)에 가까워진 근원적 존재를 직접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 미친개처럼 날뛰는 내 욕망을 좀 다독여주고 싶다.   나는 가짜 기독교인일까? 내가 다니는 새길 교회는 다른 종교에 대해 개방적이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마음 편하게 공부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하는 기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근원적 존재를 만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불교의 이론을 더듬어 왔는데, 이제는 불교의 수련 방식을 맛보려고 모색하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살면서 교회에 다니는 나는 가짜 기독교인일까?   강남대 정문 앞에서 이찬수 대책위 회원들이 '강남대의 이찬수 교수 재임용 거부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나처럼 가짜 기독교인 행세를 하다가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이 있다. 개신교계 강남대는 작년에 불상 앞에서 절을 했다는 이유로 이찬수 교수를 해직시켰다. 그가 다른 종교에 대한 조화와 관용의 태도를 보인 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이찬수 교수의 재임용 거부 처분을 부당하다고 결정했지만, 강남대는 불복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이찬수 교수의 해직은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비상식적인 면을 잘 보여준다. 다른 종교에 대한 몰이해와 그에 따른 지극히 배타적인 종교관. 이런 편협한 교리에 충실한데도 아직도 교회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교회가 교활한 것일까, 아니면 신자들이 진지하지 않은 것일까. 아무런 잘못도 없이 대학에서 쫓겨난 이찬수 교수님의 일이 무척 안타깝다. 그런데, 나는 평범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잘 다니면서 새로운 종교체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 새로운 길은 이름이 불교이고, 그중에 명상, 묵상이라는 작은 길이며, 지금 나를 안내해 주는 도반은 베트남 스님 틱낫한이다.  “명상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의 진지한 만남이다.” 틱낫한은 전쟁터에서 일하는 베트남 평화 운동가들에게 말했다. 일주일에서 하루를 떼어 그날을 온전히 명상수련에 바치라고. “평화운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그가 맡은 일이 아무리 긴요한 일이라 해도 그렇게 하루를 보낼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염려와 기계적 움직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우며, 효과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하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날 하루가 일주일동안의 다른 날들에 미치는 영향은 헤아릴 수가 없다.”     2003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틱낫한 스님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런 가르침들 중 어디에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있는가. 오히려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새로운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나는 요즘, 이제야 내게 잘 맞는 제대로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다. 물론 그 길을 어느 정도 걸어보아야 참 맛을 알겠지만. 용인에 있는 강남대 앞에서 열리는 이찬수 교수 복직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 강남대가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에 얽매이지 말고, 몰상식한 처사를 철회하기 바란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가 낡은 전통을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수련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하느님에게 가는 길을 툭 터놓기를 기대한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32 | 추천: -1
87년 6월로부터 꼭 20년이 흘렀다. 생각해 보면 긴 세월이다. 그 사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또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일들이 놀랍도록 빨리 잊혀지고 있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 세월의 간격이 새삼 차갑도록 뚜렷이 인식될 때가 있다. 87년에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이들에게 6월 항쟁은 그저 막연한 역사거나 아예 모르는 일일 뿐이다. 내게 마치 육신 어느 부분에 남아 있는 생채기마냥 너무나 생생한 기억들이 그들에게는 낯설 뿐 아니라 별다른 감흥도 느낄 수 없는 그저 먼 이야기라는 사실이 가끔은 일종의 절망적 단절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 단절감은 해가 갈수록 깊어진다. 내 속에 숨어 있는 어쩔 수 없는 ‘꼰대기질’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난 그 단절감이 안타깝고 슬프다. 이 젊은이들이 내가 그만한 나이였던 시절 80년대의 엄혹하고도 치열했던 시간들을 모른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세대간의 차이는 결국 기억의 차이일 수밖에 없다. 역사 교육은 그 기억의 차이를 좁혀주면서 세대간에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너비를 더 넓혀주는 일이다. 그 교육이 그저 교과서 암기식의 교육이 되지 않으려면 역사의 기억을 문화적 코드로 전환시키면서 세대간 차이를 문화적으로 좁혀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지난 5월 25-27일까지 열렸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공연을 보며 노래란 것이 바로 그런 문화적 코드의 가장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월 노찾사는 6월 항쟁 2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사진 출처 - 노찾사 홈페이지 노래는 그것을 낳은 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노래에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 감수성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모든 문화가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노래의 시대성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노래야말로 과거와 현재가 동시대적으로 공존하는 거의 유일한 문화이기 때문이다(예컨대 80년대의 드라마나 영화를 지금 보기는 어렵지만 그 시절의 노래를 지금 찾아 듣거나 부르기는 어렵지 않다). 노찾사가 불렀던 노래들은 대부분 80년대적 상황의 산물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희망, 삶과 정서가 담겨 있다. 노찾사는 이번 공연을 통해 그 시절의 노래를 좀 더 새로운 음악적 그릇에 담아 들려주었다. 그 새로움도 좋았지만 내겐 그들의 노래가 여전히 87년의 함성, 나아가 80년대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감동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80년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 시대는 지나간 역사일 뿐 이제는 달라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예컨대 노찾사의 경우도 80년대의 무게감을 벗고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현 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이런 생각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80년대의 의미를 너무 좁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80년대에 우리가 추구했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어떤 좁은 의미의 정치도 이념도 계급의식도 무슨 무슨 주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80년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 어떤 권력이나 자본보다 바로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그것이었다. 그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심지어 목숨을 바치면서 싸워 지키고자 했던 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뢰의 회복, 좀 더 인간화된 세상에 대한 열망이 아니었을까.   '노찾사' 공연 모습 사진 출처 - 주간한국  지난 20년의 세월이 내게 결코 긍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다. 그 20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가 도달한 지점은 오히려 모든 인간적 가치가 내동댕이쳐진 채 오로지 권력과 자본만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세상이 아닌가. 이른바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그 속에서 오직 나의 승리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삶의 불안정성이 날로 커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새롭게 인간의 가치, 인간의 얼굴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히려 지금 80년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87년 6월 우리가 거리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 속에 담겨 있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지금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절 우리가 함께 했던 희망의 기억을 지금 새로운 세대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94 | 추천: 0
 이른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정부 각 부처의 브리핑룸과 송고실을 통폐합해 합동브리핑룸을 두는 동시에 전자브리핑제도를 도입하고 정보공개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취재의 제한이 심해지고 이로 인해 언론자유와 국민들의 알권리가 침해될 소지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언론보도에 대해 “이번 기자실 개혁조치가 마치 언론탄압인양 주장”하면서 “세계 각국의 객관적 취재실태를 보도하지 않고, 진실을 회피하고 숨기는 비양심적 보도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더 나아가 ‘이런 식으로 특권을 주장한다면 원리원칙대로 대응하겠다’고 말해 바로 방을 빼버릴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집주인과 세입자 싸움도 아닌데 왜 갑자기 ‘방 빼!-못 빼!’ 논쟁이 불붙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착찹하기만 하다. 요즘 나는 국정브리핑 홈페이지를 가끔 들어가 본다. 이른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의 배경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노리는 효과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해 며칠 전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접수했다는 연락조차 없다. 그중에 눈에 띄었던 글의 제목이 <‘황우석 사건’과 출입처 없는 PD들>이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출입처에 죽치고 앉아서 그저 던져주는 보도자료에만 의존하는 ‘출입처 저널리즘’으로는 깊이 있는 기사를 쓸 수도 없고 점점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이렇게 우리 언론의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고 나아가 피디저널리즘을 치켜 세워주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지만 이런 제목의 글을 정부사이트에 버젓이 올리다니 한편으론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제목을 <황우석 사건과 출입처 없는 PD들>이 아니라 <황우석 사건과 청와대> 또는 <황우석 사건과 정부>라고 바꿔놓고 보면 상황은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출입처에 죽치고 앉아있던 기자들이 당시 제 역할을 못했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과연 정부는 당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도 짚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사진 출처 - 노컷뉴스    2005년 당시 MBC <피디수첩>의 방송으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허위의혹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검증요구가 거셌을 때 황우석 교수에게 막대한 연구자금을 제공했던 과기부는 자신들이 검증할 사안은 아니라며 발뺌을 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만했으면 됐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식으로 사태를 덮어두기에만 급급했었다.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줄기세포가 허위였음이 밝혀진 후에도 당시 과학기술 보좌관을 비롯해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했다는 이야길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으로 물러났던 박기영 전 보좌관이 지난해 말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으로 다시 복귀했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기자실이 없어지고 전자브리핑 제도가 도입돼 취재관행이 바뀌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사건에 있어 실체적 진실이 보다 쉽게 밝혀졌을까? 과기부에 황우석 교수 연구의 실체와 연구자금 지원결정과정, 그리고 사후 검증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관련 정보공개를 요구했다면 솔직히 응답해줬을까? 청와대의 박기영 과학기술보좌관과 김병준씨 등 이른바 ‘황금박쥐’ 멤버들은 이런 사안에 대해 어떤 ‘전자브리핑’을 했을까? ‘황우석 사건’과 ‘청와대’는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황우석 사건’ 뒤에 “출입처 없는 PD"를 붙이든 “출입처 없이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된 기자”를 붙이든 실체적 진실의 접근이란 측면에선 달라지는 부분이 과연 있을까? 이 글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하고 싶지만 왠지 제 논에 물대기처럼 이 사안을 끌어들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이 글에서 황우석 사태의 본질이나 당시 정부의 행태에 대한 반성은 없다. 단지 ‘출입처 없는 피디들도 이 정도 하는데 기자들 니들은 왜 출입처 없앤다고 악악대느냐’는 얘길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건 기자실 폐지문제와 기자들의 정부부처 사무실 무단출입제한이다. 언론은 이 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이고 정부는 언론자유나 국민의 알권리와 기자실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며, 전자브리핑제도와 정보공개의 확대를 통해 언론자유와 국민들의 알권리는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브리핑제도를 실시하면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좀 더 많은 언론에 공평하게 전달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보는 정부부처로부터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될 뿐이다. 좀더 심층적인 질문과 답변 기회는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다. 정보공개제도를 확대한다고 해도 정보공개 여부와 범위를 정부가 결정하는 한 일방향성은 마찬가지다. 언론이 정보공개를 요구해도 정부가 공개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기자실의 폐지는 그만큼 언론과 취재원 사이의 접촉기회가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청와대가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기자들이 좀 더 발품을 팔아야’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의 정보접근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효과를 초래한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지난 22일 '취재지원 선진화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공무원 관료조직은 특성상 정보공개제도가 활성화된다하더라도 정보를 순순히 공개하기 보다는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접근 장치마저 막아버리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난 기자실 폐지논란을 보면서 문득 문득 한미FTA 논란이 떠오른다. 여기엔 비슷한 용어들이 등장한다. ‘선진국’이란 단어도 그렇고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단어도 그렇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인 FTA를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 언론이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려면 ‘선진국’처럼 ‘글로벌 스탠더드’에 발맞춰 취재지원 시스템도 선진화해야 한다는 주장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한미 FTA 협상 때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해 반대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영화배우 이준기 씨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얘길 했다고 한다 “우리 영화인들, 그렇게 자신 없습니까?”라고. 요즘 기자실 폐지논란을 보면 나는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을 향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 기자들,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솔직해 집시다. 기자실 없애고 사무실 출입제한 한다고 해서 기사 못씁니까?”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대통령님,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솔직해 집시다. 기자실 그냥 둔다고 언론개혁이 안됩니까? 언론개혁 하려면 기자실 문제보다는 족벌언론의 문제, 자본에 의한 권력에 의한 언론통제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청와대나 정부가 황우석 사건이나 한미FTA 문제에 대해 솔직한 정보를 제공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피디라서 출입처도 없고 방 빼라고 해도 뺄 방도 없습니다만 대통령께서 이것만 약속해주신다면 저라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라도 기자들보고 당장 방 빼라고 얘기하겠습니다.”라고.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46 | 추천: 0
해외의 한 유명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했을 때다. 세종문화회관 앞 넓은 마당에 검은 세단 자동차가 줄지어 늘어섰다. 운전기사인지, 보디가드인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동차 주위에서 웅성거렸다. “여기도 차를 세울 수 있나?” 처음 보는 광경에 갸웃거리던 내게 옆에 있던 음악평론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죠.” 누구나 거기다 차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방귀깨나 뀌는 분들에게만 특별히 허용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극장 로비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저명인사들로 붐볐다. 유명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고관대작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자 극장 쪽은 보행자들의 공간을 주차장으로 제공했다. 주차는 주차장에 해야 한다, 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은 보기 좋게 깨졌다. 난생 처음 국회의사당에 처음 갔을 때다. 의원회관에 들어가려고 앞문으로 갔다가 무안을 당했다. ‘민간인’은 뒷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국회 건물은 무지하게 커서 앞문에서 뒷문으로 돌아가는데 한참 걸린다. 한 여름 땡볕에 노트북을 매고 걸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회야?” 세월이 10년 가량 흘러 지금은 의원회관의 경우 민간인도 앞문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국회 본관은 여전히 뒷문 신세를 져야 한다. 본관은 의원회관보다도 훨씬 더 커서 돌아가려면 5분은 너끈히 걸린다.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곳 중의 백미는 국제공항이다. 공항에는 이른바 ‘귀빈 코스’가 따로 있다. 전‧현직 대통령이나 3부요인, 외국공관장 등을 위한 것이다. 복잡한 출입국 수속을 공항공단이 대신 해주니까 본인은 귀빈실에서 앉아 있다가 비행기에 타면 된다. 전문용어로 ‘의전’이라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지만, 방귀깨나 뀌는 분들이다. 이들도 특별한 대우를 요구한다. 의전을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며 심심찮게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공항은 하나의 작은 정부라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정부부처가 공항에 파견 사무실을 갖고 있다. 여기 근무하는 직원들은 출타하시는 윗분의 의전을 맡는다. 오너가 있는 언론사들의 경우 공항 출입 기자가 본인의 출입증을 이용해 ‘가방 모찌’를 하며 회장님을 모신다.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이던 시절, 어떤 언론사의 경우, 기사는 안 쓰고 가방 심부름만 하는 기자도 있었다.   일반에 완전 개방된 김포공항 귀빈실 입구의 모습 사진 출처 - 세계일보 한국의 특권층은 줄 서는 것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 틈에 섞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일은 아랫것들을 시킨다. 그런데 왜 김승연 한화 회장은 맞고 온 아들의 분풀이를 직접 하려고 했을까? 왜 전문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섰을까? 짜릿한 ‘손맛’을 느끼고 싶었을까? 조폭 영화 흉내를 내고 싶었을까?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진룸살롱 사건의 당사자-말만 들어도 기가 죽을 만한 ‘센 놈’-들을 데리고 가서 북창동 어깨들을 벌벌 떨게 했을 것이고, 경찰 총수 출신의 그룹 고문이 경찰에 전화도 한 통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누군데….”     돈으로 얻은 특권, 금권은 사상 최고의 자유를 누리고 있고 경제인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권력의 특권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청와대의 설명은 부분적으로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돈으로 얻은 특권, 즉 금권은 사상 최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면서 내야할 세금을 안 낸 이건희씨는 여전히 존경받는 경제인 1위에 랭크된다. 존경의 기준이 ‘돈’으로 바뀐 것인가. 김승연 회장이 무모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는 착한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권의 뿌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쉽게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주고, 잊어버리는….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24 | 추천: 0
오늘은 제26회 스승의 날이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이고, 오늘은 학교재량일로 정해졌기 때문에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런 저런 과정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작년에도 재량휴일로 쉬었다. 올해도 2월 학교운영위원회(이하, 학운위)에서 2007년 학사일정을 정할 때 작년과 동일하게 진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휴일이 됐다. 사실 3월 학운위 회의에서는 스승의 날을 25일(올해는 석가탄신일과 노는 토요일 사이의 근무일이 됨)과 바꾸는 것을 안건으로 상정했었으나, 7:5의 결과로 2월 회의에서 정한대로 결정됐다. 사실 어느 날을 쉬건 연간 7일의 재량 휴일은 보장되므로 상관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이 스승의 날에 대한 학부모들의 부담감 때문이라면 곰곰이 생각해 볼 거리가 된다. 나는 학교 측과 학부모 측이 이런 풍토를 함께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측은 학부모들에게 소위 ‘부담’을 주었고, 학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개인적 이해관계로 교육에 대한 소신이나 신념 없이 스승의 날을 활용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이미 깊은 불신이 팽배해있는 것은 사실이다. 골이 너무 깊어 어떻게 메워 나갈지 막막하긴 하지만, 혼란스러울수록 원칙으로부터 접근하면 항상 답이 있었던 것 같다. 스승의 날 전날인 14일 교무회의 시간에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에게서 하나하나 봉투에 담긴 서신(?)을 받았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자율휴업일로 지정해 휴교한 서울 한 초등학교의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리고 저녁에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스승의 날을 축하한다는 최첨단 동영상 카드를 전자우편으로 받았다. 20년 정도의 교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보면 변하기는 많이 변했다. 스승의 날 대통령이나 교육감으로부터 축하를 다 받다니... 그러나 그 축하를 넙죽 받기에는 왠지 무엇인가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마치 목에 잘 넘어가지 않는 무언가를 삼키는 것처럼 말이다. 왜 그런 것일까. 공정택 교육감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념일의 참뜻을 훼손하기보다는 교육부조리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스승 존경 풍토를 훼손하고 교권을 실추시키는 현상이 반복’돼서인가. 아니면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것처럼 ‘학교가 희망이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익힐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에 없고 국제학업성취도 평가 1위가 교사들의 헌신과 노력 때문이라는 글과 본고사와 3불 정책 고수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계층이동의 희망을 살린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인가. 교사로서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봤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고민해 보니, ‘선생님의 행복한 가르침이 제자들의 바르고 건강한 자람을 이끌고 그래야 희망참 미래를 맞이한다’라는 공정택 교육감의 말이나, ‘학교가 살아야 교육이 살고 교육이 살아야 미래가 있다’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다’라는 노 대통령의 말에 진정성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진정성은 반드시 그에 대한 실천이 따라야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이 듣기 좋은 말들은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책이나 현실적 상황들이 실천적이지 못하다.   진정성 빠진 공허한 교육찬가 그토록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교육재정은 형편없다. GDP 대비 공교육비 투자에 있어서 정부부담이 OECD 국가 평균 5.2%보다 0.6% 낮은 4.6% 수준으로 OECD 국가 상위 21개국 중 17위에 불과하다. 교육부도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국제학업성취도는 영역마다 1~4위를 차지하여 상위권에 속하나 학급당 학생수나 교원1인당 학생수 등의 교육여건은 평균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GDP 대비 학교교육비용 민간 부담률은 세계1위로 학부모의 사교육비 지출이 최고수준이고, 교원1인당 학생수는 30.2명(OECD 평균 16.5명), 학급당 학생수도 34.7명(OECD 평균 21.6명)으로 역시 평균이하다.   스승의 날을 맞은 지난 15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학생들이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재정의 뒷받침과 교육여건의 선진화 없이 어떻게 공교육을 강화할 것이며, 빠르게 변화하는 사교육 시장으로부터 학교교육을 어떻게 교육의 중심에 둘 것인가! 또한 교원평가에 대한 여러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만 실제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체는 진정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교원평가의 전주곡과도 같은 성과급이 어떻게 지급되었는가. 성과급 지급 기준이 되는 지침을 방학 중 학교로 보내고 이틀 뒤에 교사의 등수를 매기고, 이를 기준으로 성과급이 지급됐다. 말이 되는가. 학생들의 성적도 연간 계획을 세우고 여러 단계를 거쳐 평가의 내용과 시기, 방법 등에 대해 적합여부를 판단하여 결정한 후 그것에 따라 교사가 평가하는데, 교육이라는 아주 종합적인 행위를 어떤 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사실 교사의 가르침이 인간에 영향을 미쳐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에 대해서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알 수 없다. 다만 교육적인 소신과 견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단순하게 줄 서라고 하지 말고 교사의 질을 높여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방법을 진정으로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스승의 날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이 충돌하지만 교육이 중요하다는데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아직 본적이 없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교육의 상황들이 아이들이나 교사들, 학부모들 모두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으리라! 이렇게 서로 부담으로 다가오고 그 의미를 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교육의 날’로 정해 보는 것은 어떤가. 우리가 그토록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교육에 대해 정말 희망적으로 돼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공교육 강화를 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지를 점검하고 되돌아보는 날로 하는 것은 어떤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말뿐이 아닌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실천되는지 짚어보는 것은 어떤가! 오늘도 ‘스승의 날’이라며 오래 전 5학년 때 담임이었다던 다 큰 제자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때는 몰랐었다’며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마음에 남는 무엇에 대해 고백하는 어른이 다 된 제자로 인해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 하루였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42 | 추천: 0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 마당은 쓸지언정 동네 골목길은 쓸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골목길의 쓰레기가 금방 자기 집 대문 앞도 더럽힐 게 자명한데도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이 근시안과 이기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 자기 딸의 안전을 위해 정거장까지 마중을 나가는 부모가 성폭력의 방지와 예방을 위해 운동하는 단체에는 냉담하다. 자신의 딸과 아내, 여동생을 위해 평생 그렇게 따라다니며 보호해 줄 작정인가.” 시민운동은 어떤가? “회원이 없고 회비가 없는데 시민단체가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하다. 그러다가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목소리를 높여 비판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슬을 먹고 살란 말인가.”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성금을 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들에게 성명을 내고 문을 닫는 이런 상상은 어떤가. “국민여러분, 저희들은 최선을 다해 이 땅에 부패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힘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침묵과 무관심에 저희들은 절망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문을 닫습니다. 국민여러분,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박원순,『한국의 시민운동--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중에서). 위의 글에 깊이 공감하면서 필자는 수많은 무심한 국민들, 수많은 무임 승차자들, 인권운동을 자기의 이상한 잣대로 재단하는 많은 이들,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고,  ‘그만 문 닫는 일’이 현실이 되면 어쩔 것인가라는 걱정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사회엔 공동체에 대해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울 지역 초등학생의 절반 가까이가 시력이 나쁘고 또 요즘은 책걸상의 높이가 안 맞아 자세가 나빠지면서 걸리게 되는 척추측만증이 많다고 한다. 자기 아이의 시력이상, 척추 이상엔 관심을 가져도 전교생 대상의 척추검사를 교장선생님께 건의하거나 교실의 조명도가 적절한지 테스트를 의뢰하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권이 무엇이며, 인권운동이 왜 필요한지라도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인권운동에 대해 그들이 갖다 대는 잣대는 어떤 것일까? 옛날 그리스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는 밤길을 지나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잠자리를 제공했는데, 그 딱딱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쇠 침대에 나그네를 강제로 묶어놓고는 몸길이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길이를 늘여서 죽였고, 몸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그 긴만큼을 잘라 죽였다한다. 그 침대와 몸길이가 똑같은 사람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다. 인권운동의 경우, 그것은 ‘좌파’들이나 하는 것, 반정부 세력들이나 하던 것, 또는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그리고, 매년 장애인주일 미사 때에 성당에 특별헌금 내는 것은 신자들이 할 몫이고 장애인이동권연대에 후원금을 내는 것은 신자 아닌 일반 시민들의 몫이라는 생각 등은 어떤 잣대에서 나올까? 과거 독재시대에 비해 현재 인권상황이 훨씬 나아지게 된 이유조차 인권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혹은 “으쌰! 으쌰! 좀 그만들 하라!”면서, 인권운동이 지금도 꼭 필요한 것이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권운동가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일하면서도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 민생고 문제 때문에 일을 그만 두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긴다. 인권운동가는 어쩔 수 없이 혹은 기쁘게 ‘이슬’을 먹고 살더라도, 그 가족까지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무심이 절망적인 수준이라면, 이제, 그만 문을 닫아버리면 어떨까?   가시 돋친 줄기 위로 피어나는 장미  1987년 6월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 내의 인권의식에 대한 실망이 ‘장미꽃을 보고 감격하다가 줄기의 가시를 보면서 갖는 실망’이라면, ‘가시 돋친 줄기 위에도 장미가 핀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 이들은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가득 참여하는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장미 줄기의 가시를 세는 것보다 장미 봉오리를 꿈꾸며 움트고 있는 싹을 센다.  필자의 경우, 인권연대 운영위원회에 나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매달 회계보고를 접하면 몇 달 밀렸다가 내곤 하는 사무실 임대료 까지 감안하면 늘 적자, 인권강좌 열어서 보람 많이 느꼈지만 또 적자, 민생고 문제로 활동가 결원이 생기는 안타까운 상황과 이어지는 새로운 충원도 쉽지 않은 상황, 그리고 숱하게 터지는 인권침해 사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 이 모든 것은 장미 줄기의 가시들에 해당된다. 허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줄기 위로 장미가 피고 있다는 사실이며, 믿음이다. 이렇듯, 줄기에 싹들이 움트고 있다는 소식도 많이 접한다. 인권강좌를 수료한 이들이 새로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매번 소식지의 활동일지를 꽉 메울 만큼 인권연대는 활동하는 것이 많고 의욕도 아직 충만하다는 사실, 순수하게 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다는 평판, ‘인권교육’을 꾸준히 정규적으로 하고 있고 늘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인권단체로서 인권연대가 거의 유일하다는 사실, 동시에 인권운동의 영역도 넓혀가고 있으며 매년 초엔 하고자 하는 사업계획이 너무 많아 한참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 작은 단체인 인권연대를 시민사회 곳곳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순수하게 인권운동만을 해왔고 늘 그럴 거라는 믿음과 약속, 이런 것들을 열거해 보면, 우리는 장미 줄기에 난 가시의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봉오리를 꿈꾸며 움트고 있는 싹들을 세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많지는 않아도, 매번 인권강좌에 참석하는 시민들을 보며,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인권에 대한 호기심과 목마름을 보며, 우리는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 가득한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을 하자.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30 | 추천: 0
오부자 이야기-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로 살아가기 돈 많은 부자(富者)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네 아들을 키우고 있어 나까지 합쳐 오부자(父子)이니 곧 내 얘기, 우리 가족 얘기를 하려는 참이다. (이런 나를 두고 富者라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긴 하다) 부끄럽지만 모든 아이들은 천사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끼고 체득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네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런 부끄러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때때로, 아니 자주 아이들이 축복이라기보다는 짐으로만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로서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버릇 고쳐준다’는 명분으로 혼도 많이 내고 ‘엄한 아버지’가 당연한 내 몫인 양 생각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지 않으셨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품을 때도 없지 않았다. 아마 환경적 요인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조그만 일이 커져,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적인 일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기도 했던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나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 무척이나 조심하는 편이다. 나로 인해 어떠한 피해도 상대에게 끼쳐선 안 된다는 의식이 오랜 동안 내면에 자리 잡아 왔다. 이런 의식은 깨닫지 못한 사이 종종 결벽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삶을 스스로가 만든 족쇄로 받아들이고 ‘강박’을 조금씩 허물어내기 시작한 것 또한 네 아이들 덕이니 나는 아이들에게 감사해야 될 게 우선 하나다. 한번은 아내가 “어쩌면 아무개가 당신을 꼭 빼닮았냐?”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아내가 말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그 까닭이 내가 평소 그 녀석에게서 답답해하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허허 참, 어이없어.’ 겉으론 웃고 말았지만 아내의 조그만 관찰(아니, 이것도 돌이켜보면 나와 아들에 대한 애정 어린 눈길과 오랜 관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이 가져온 변화는 적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녀석이 하는 태를 유심히 지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의 어떤 부분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조그만 단점마저 내가 물려준, 나의 한 부분이며 그 녀석은 아직 그것을 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간 녀석에게 품었던 생각에 미안해지기도 했다. 이 일이 전기가 돼 나는 가끔씩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녀석들의 어떤 점이 내가 물려준 것인지 찾는 재미도 적지 않다.   필화(筆禍) 또는 설화(舌禍) 기억의 내면화 한번은 우리 집에 놀러온 동서가 “녀석들 아빠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네”하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내가 거실에 있으면 안방에 가서 놀고 안방에 들어가면 거실이나 작은방으로 쪼르륵 달려가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잔소리꾼’ ‘폭군’이었던 셈이다. 우리 역사에는 몇 줄의 글이나 몇 마디 말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표현의 자유가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됨으로써 일어났던 피비린내 풍기는 역사는 그리 멀지 않은 우리 현대사에도 아픔을 새겨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이들과 놀면서 가끔씩 이런 역사를 떠올린다면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나 행동거지에서 거슬리는 것이 있을 때 나는 대놓고 야단을 치는 편이다. 가끔씩 내 성에 못 이겨 화를 내기도 한다. 엄한 심판자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아내는 “애들이 다 그렇지”하는 말로 눙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빠였다. 아마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필화와 설화로 공권력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던 우리 역사나 가깝게는 집안의 내력이 부지불식간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림 출처 - 동아일보 우리 아이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식은 아이들에게 아이들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셈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이 어떻게 놀든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다. 순간순간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아이들에게서 ‘나’ 찾기 우리 집에서 네 아이의 교육은 거의 아내의 손에 맡겨져 있다. 별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는 아내의 교육철학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금껏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아이들을 이러저런 학원으로 내몬 적이 없다. (물론 네 녀석 학원 보내려면 등골 빠질지 모를 일이다) 자기들이 꼭 배워보고 싶다는 수영이나 바둑, 미술 학원에 얼마간 보내본 적이 있지만 그것도 식상해 하면 억지로 보내지 않는다. 전에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하는 식으로 밀어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육적 효과가 별로여서 이내 생각을 접었다. 한 녀석 한 녀석 재능이 다 달라서 누구는 바둑에 재미를 들여 자기가 다니는 학원에서 1등을 하는가 하면 어떤 녀석은 창작만화 그리기로 생각지 않은 상을 타오기도 한다. 손재주가 좋은 둘째는 종이접기 카페를 운영하며 손수 만든 종이 작품을 올리기도 한다.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부모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는 모습들을 볼 때면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란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적지 않다. 수많은 피해의식과 자격지심들이 뒤섞인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남자로, 아버지로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살며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나 또한 행복해진다. 부족하기만 한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여기는 아이들, 나는 그래서 아이들과 더 친해져야 하고 그들에게서 더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신이 아이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는 축복의 메시지가 아닐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1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