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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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언 대지가 열어준 틈 사이를 비집고, 수줍게 돋아나는 새싹처럼 봄날의 아지랑이는 겨울을 이리저리 돌아 다시 나의 운동장에 내립니다. 섬진강변에 사는 시인으로부터 매화꽃 영그는 소식이며 동백 몽우리 맺히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지난 겨울초입부터 봄이 그리웠음을 알게 됩니다. 3월이 되면 개강(開講)과 동시에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상징하는 조건반사처럼 축구화 끈을 동여매게 되는데 그 기쁨을 나는 다시 맞는 새봄이 갖는 최대의 의미라 여깁니다. 우수(雨水), 경칩(驚蟄)이 지나면 대동강물만 풀리거나 개구리 말문만 트이는 것이 아닙니다.   섬진강을 뒤로한채 매화꽃이 피어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겨우내 한동안 뛰지 못해 굳은 허벅지도 풀고 분출구를 잃어버려 어디로 흘러야 할지도 모를 것 같은 이마의 땀샘도 트이게 합니다. 봄 햇살 화사하게 출렁이는 운동장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름들을 큰소리로 부르며 누비는 상쾌함은 남녘의 꽃 소식을 산책하는 어느 시인의 노래보다 더 익숙한 기쁨 입니다. 나는 한 대학의 교수 축구 팀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우리나라 국가 대표팀의 초라한 성적표를 보며, 가슴 졸여 응원하느니 우리가 뛰는 게 낫겠다는 다소 거만한(^^) 동기를 가지고 만든 팀입니다. 짐작컨대 축구공을 처음 만져보는 교수들이 반쯤 되고 젊은 날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교수(경제학자, 철학자, 서예가)가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으니 그 수준을 얘기할 바는 못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아트사커”나 네덜란드의 “토틀사커”에 빗댄 “모럴사커”라는 신 장르를 만들고 실천하고 있으니 아주 막된 팀은 아닙니다. “모럴사커-덕(德)의 축구”는 상대방이나 함께 뛰는 동료를 최대한 배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위해 골을 넣은 이는 반드시 골키퍼를 해야 하고 킥오프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 먼저 공을 차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무안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편의 잘못을 힐난하지도 않습니다. 골을 넣는 기쁨도 있지만 골을 먹는 기쁨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공을 빼앗는 성취감도 있지만 공을 넘겨주는 여유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모럴사커”는 승부와는 별개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회대 교수 축구회 회원들 모습 사진출처 - 경향신문  승부의 관점에서 최고의 선은 상대방보다 골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람은 적재적소에 배치가 되어야 하고 거기에 맞는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승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승리자를 위해 많은 다수가 희생당해야하는 숙명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리”라는 목표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 경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승리자가 됩니다. 가끔은 외부에서 온 팀과 경기를 하게 됩니다. 서로 교분을 나눈 사이가 아니니 적당한 반칙 정도는 예사이고 공을 거칠게 다투는 과정에서 순간적 상황에 몹시 기분이 언짢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나는 단 몇 푼이라도 깎아야 물건을 산 것 같은 포만감을 얻거나 지하철의 빈자리를 먼저 잡기위해 습관적으로 눈치를 굴릴 만큼 생활의 경쟁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승부의 틀에서 승리를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굴러가는 공을 넓은 골대 안으로 차 넣기만 하면 되는 축구 같은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는 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와는 달리 “힘 있는 자가 상대방을 다치게 한다”는 운동장의 격언(?)을 되새기면 다시 평화(平和)란 서로에게 욕심이 없는 가장 평안한 상태라는 자각으로 돌아가게 되고 기꺼이 상대방의 득점에도 환한 웃음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승리인 “모럴사커-덕(德)의 축구-”의 미각(味覺)에 중독된 사람들은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축구모임을 무척이나 그리워합니다. 사실 지난겨울엔 내가 관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회의일정을 주로 수요일, 그것도 축구를 해야 할 시간에 잡는 바람에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릅니다. 벌써 한 몇 년 “모럴사커-덕(德)의 축구”와 함께 지내면서 축구가 내겐 가장 즐거운 놀이일 뿐만 아니라 교실이 가르쳐 주지 않는 실천적 사고의 장(場)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올봄 황사먼지를 뒤집어쓰고서라도 다시 축구화 끈을 묶습니다. 땀으로 엉기어 등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는 유니폼 위로 봄바람이 스칩니다. 참 시원 합니다. 참으로 시원 합니다. 이 글은 월간 축구가족 3월호에도 실립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84 | 추천: 0
2월중에 중학교 신입생 배정 업무로 학교에 나갔었다. 그때 언론에서는 한창 ‘교복값 거품’ 문제가 거론되고 있을 때여서 학생과 학부모들과의 만남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주변의 교복전문점에서는 교복을 13만원에서 18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때문에 학부모회에서는 별도로 공동구매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고, 입학식에도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으로 전달되었다. 학부모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다. 학부모회의 결정을 그냥 수긍하는 학부모, 공동구매를 해야 한다는 학부모, 나아가 교복을 꼭 입어야 하느냐는 학부모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한 학부모가 공동구매를 하더라도 교복값이 너무 비싸서 부담스럽다며 달리 구입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어느 누구도 마땅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보통 학교에서는 졸업식날 학생들의 교복을 기증 받는다. 새로 전입한 학생들,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중간에 교복 교체가 필요한 학생, 경제적 형편이 너무 어려워 교복 구입이 어려운 학생에게 몇 천 원 정도를 받거나 혹은 무상으로 주곤 한다. 그런데 이런 교복 기증은 많지 않아서 필요한 학생들에게 모두 제공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입찰을 통해 공동구매를 해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교복을 공급한다고 해도 교복구매 자체가 부담스러운 가정은 여전히 존재하는 등 교복에 대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마당에 차라리 복장을 자율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생이라고 해서 꼭 교복을 입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사실 교복의 역사는 식민지시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에서도 복종 이데올로기의 수법으로 이용되어 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공동구매 교복과 대기업 제품의 가격을 비교한 전시회 모습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물론 군사정권 시절이던 1982년에 식민지잔재청산 차원에서 머리 모양이 자유화되었고, 이듬해에 교복자율화가 시행된 바 있다. 그렇지만 1986년 2학기부터는 다시 ‘학교장 재량에 따라 교복착용 여부 및 교복의 형태를 결정’하도록 방향이 수정되었고, 문민정권이 들어서고 민주화를 이룩한 현재에도 대부분의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옷을 강제로 입게 한다든지 두발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민주적이 반인권적이다. 이전의 교복이나 두발단속이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면 민주화의 흐름에 맞게 당연히 자율화되어야 한다. 혹 교복이 사복착용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빈부격차에 의한 소외감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교복값 자체가 부담스러워진 요즘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다수 부모들과 교사들은 ‘학생들은 교복을 입어야 학생답다’며 교복착용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예컨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복이 ‘학생들 몸에 알맞은 단정한 차림’으로 작용하고 있거나,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딱딱한 책걸상에 앉아 버티는데 편한 옷이라는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요즘의 교복은 여학생의 경우 상의의 길이를 줄이거나 허리선을 살리기 위해 품을 줄이는 2차 가공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심지어 허리를 구부릴 때 허리춤이 다 드러나 눈길을 주기가 민망할 정도인 것이 현실이다. 일부 남학생의 경우도 바지의 폭을 줄이는 게 유행이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생활을 하는데 사복보다 오히려 불편해졌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창조적인 사고나 개성이 무엇보다 강조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획일적인 교복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한다. 오히려 개성을 드러내고 자기표현을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복장을 자율화라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바람직해 보인다. ‘학생답다’는 기성세대들의 가치관에 따라 학생들의 인권이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750 | 추천: 1
얼마 전 3·1절이었습니다.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항거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 올리려는 하나의 의식이겠지요. 태극기는 한민족 독립(의 열망)을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모닝 스타(Morning Star)’를 아시나요? ‘모닝 스타’는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입니다. ‘웨스트 파푸아’라는 이름조차 낯설다고요? ‘웨스트 파푸아’라고 말을 하면 보통은 파푸아 뉴기니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파푸아 뉴기니’라는 나라가 있는 섬(뉴기니아 섬)의 왼쪽(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지도를 보면 뉴기니아 섬의 절반을 자로 그은 듯 반듯하게 나누어 오른쪽(동쪽)은 파푸아 뉴기니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섬의 왼쪽(서쪽)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관찰력이 뛰어나신 분은 아마도 인도네시아와 같은 색깔로 칠해져 있으므로 섬의 서쪽은 인도네시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섬의 동쪽 부분인 ‘파푸아 뉴기니’는 유럽 열강(영국,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75년 독립하였지만, 섬의 서쪽 부분인 웨스트 파푸아 지역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가 끝나갈 무렵인 1950 ~ 1960년대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인도네시아가 군대를 동원하여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복속시킨 곳입니다. 뉴기니아 섬 서쪽 지역의 인민은 1961년 12월 1일 나라 이름을 ‘웨스트 파푸아’라 명명하고, 그 상징인 국기를 ‘모닝 스타’로 정하여 의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즉,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국기인 것처럼 ‘모닝 스타’는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서 태극기가 대한민국 독립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지금 ‘모닝 스타’는 ‘웨스트 파푸아’ 독립의 상징인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는 나라가 있는 섬(뉴기니아 섬)의 왼쪽(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이 '웨스트 파푸아'이다. 사진 출처 - BBC 인구의 10분의 1이 살해당한 곳, 웨스트 파푸아 ‘동티모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국제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면 누구나 알고 계시지요. 동티모르는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02년에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을 이룬 국가이니까요. 인도네시아는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을 이루려는 동티모르 지역의 지하 자원에 욕심을 내었고, 군대를 동원하여 동티모르를 침공한 뒤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티모르가 독립에 이르는 순간까지 인도네시아는 군대와 민병대를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인권침해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자국민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동티모르에 대한 관심과 독립 지지를 바탕으로 동티모르인들은 끝끝내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 또한 독립 이전의 동티모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어쩌면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구수 100만명 정도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밀림 속으로 쫓겨 들어가고 있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불태워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웨스트 파푸아’와 관련된 서적 출간을 금지시키고 있으며, 많은 인도네시아 인들을 ‘웨스트 파푸아’ 지역으로 이주시켜 ‘웨스트 파푸아’를 인도네시아화 시키고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의 폐 기능을 하던 원시림은 벌목되고 있고, 금과 구리 등의 자원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묵인 아래 인도네시아가 위임 통치했던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여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현재도 고의적인 살해와 의문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의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것처럼, 그들은 ‘모닝 스타’를 흔들며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외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웨스트 파푸아’ 어느 곳에서도 ‘모닝 스타’를 들고 나올 수 없습니다.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독립기념일로 지정한 12월 1일에 ‘모닝 스타’를 게양 했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필립 카르마, 유삭 파카쥐)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15년,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될 정도입니다.   ‘모닝 스타’가 자유롭게 게양되는 날을 그리며... 세계의 평화를 열망하는 이들이 동티모르에 이어 ‘웨스트 파푸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영국의 상원에서는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주제로 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웨스트 파푸아’ 독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 독립운동가분은, 한국 시민사회가 지난 해 ‘웨스트 파푸아’ 독립기념일에 맞춰 위 두 명의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웨스트 파푸아’ 독립을 지지하기 위한 행사를 조직한데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독립의 순간에 반드시 한국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 우리는 세계에 대한민국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작은 손길 하나가 절실했습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는 과거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모닝 스타(Morning Star)’ 사진 출처 - BBC  ‘모닝 스타’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기념일에 각 가정 마다 지금 이 순간을 기리며 자유롭게 게양되는 날을 그려봅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66 | 추천: 0
한국의 ‘카이사르’와 ‘키케로’들에게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키케로다 ‘카이사르’들이 퇴장하고 있다. 민중의 환호 속에 등장했던 카이사르는 전제정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독재는 공화정을 신봉하는 측근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지금 사회 곳곳에서 그런 카이사르들을 보고 있다. 카이사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일정 시점까지는 ‘개혁’을 표상한다. 기성 집단의 무능 부패 반민주성에 대항하는 개혁이다. 이 때문에 기성 지배층에 염증을 느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독주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제 삼는 지지세력 일부 또는 다수가 이탈하기 시작한다. 카이사르의 비극은 그 다음부터다. 이후 카이사르들은 독재를 내장한 고립주의 노선을 걷는다. 이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독선에 빠진 카이사르들은 지지기반의 붕괴를 감지하지 못하고, 끝내 조기 퇴장당하거나 실패한 리더십으로 귀결된다. 특히 과거의 지지자들이 반대자로 돌아선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지지했던 똑같은 이유로 그를 멀리하려는 ‘민주파’에게 위협받고 있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소통의 능력을 잃어 버렸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도 비슷한 형국에서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애초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재편에 저항하는 교내 세력의 지지를 받았었다. 임기 1년을 앞두고 얼마 전 사임한 정태기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도 이 경우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기자협회보>는 사설에서 “최고경영자의 독단적인 행태와 돌출적인 행동이 조직을 얼마나 큰 위기로 내모는지 생생히 보여” 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카이사르’들 각각의 그 복잡한 내부 사정을 시시콜콜 밝히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았다는 것으로 대체적인 설명을 대신하려 한다. 내가 오히려 관심을 두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카이사르와 항상 대립했던 공화주의자 ‘키케로’의 삶이다. 키케로는 흔히 카이사르의 개혁에 맞선 ‘보수파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결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키케로는 일찍부터 카이사르의 독재성향을 간파하고 이에 시종일관 반대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민중 위에 군림하는 특권집단으로 평가했지만, 키케로가 보기에는 카이사르야말로 토론과 합의 위에 군림하려는 독재자였다. 키케로가 지키려 했던 ‘공화주의’적 가치가 근대 유럽의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뢰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 못지않게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카이사르의 암살을 지지했지만, 그 뒤에 닥쳐온 혼란의 와중에 그 스스로도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제군주정의 뿌리를 뽑지는 못했다. 키케로의 죽음 이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전제정 아래에 놓이게 됐다.     민중의 환호 속에 등장했던 카이사르는 전제정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독재는 공화정을 신봉하는 측근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했던 공화파가 오히려 내전을 자초했고, 극심한 혼란에 지친 민중들이 오히려 강력한 전제정의 출현을 수용했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찌됐건 키케로는 무덤 속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키케로’의 비극 무엇보다 역사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기억할 뿐, 키케로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독재자’인 카이사르가 지녔던 창조의 힘이 ‘민주주의자’였던 키케로가 품었던 비판의 힘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후세는 키케로가 아니라 카이사르로부터 로마를 이야기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생각보다 더 자주 반복된다. 카이사르를 반대한 키케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 강력한 카이사르가 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공화주의의 이상은 곧잘 포퓰리즘과 독재에 의해 대체된다. 때로 그 독재는 과거의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 아이러니를 알고 있는 ‘키케로들’은 고민에 빠진다. 카이사르를 향한 나의 비판이 결국 다음의 전제군주에게 역이용되는 것이 아닐까. 혹시 카이사르의 창조를 위해 키케로의 비판을 유보해야 되는 건 아닐까. 역사가 기억하는 것이 결국 카이사르라면 아예 카이사르를 돕는 게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어찌 보면 키케로의 공화주의적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공화주의는 합리적 이성을 지닌 다수의 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하는 가운데서 온전히 구현되는 것이다. 현실은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아들들이 판치는 곳이며, 이들을 손쉽게 우러를 준비가 돼 있는 필부들이 신음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공화주의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독재의 반대말로서 공화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참여, 권리와 의무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제한된 자원과 한정된 시간 아래서,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지니고 있는 집단일수록 독재가 아닌 공화주의의 길을 택해야 한다. 탁월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함께 지혜를 짜내 힘을 모으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토론은 공화정의 연료이므로, 다소간의 혼란과 논쟁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좁은 땅덩어리에 태어난 이상 그 길을 피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조선조 이래 한반도의 정치는 대부분 이 ‘공화’의 이상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목숨을 건 논쟁은 한반도 정치의 숙명이었다. 그 와중에 간혹 “내가 고민을 대신해줄테니 넌 신경 쓰지 말아”라고 속삭이는 독재자들이 등장해 혹세무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반도에 사는 이들이 택할 것은 공화주의다.     키케로는 흔히 카이사르의 개혁에 맞선 ‘보수파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고 산물이 풍부하여 제 마음대로 살아도 별 상관없는 곳이라면, ‘엘리트’끼리 모여 정치하는 일이 민중 개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지만, 한국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정치적 결정은 모두 나의 일상과 직결된다. 그러니 나는 토론과 참여의 기회를 전혀 양도할 뜻이 없다.   결국 ‘키케로’의 승리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한국은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하고, 고려대학교는 총장을 새로 뽑아야 하고, 한겨레신문사는 대표이사를 새로 뽑아야 한다. 키케로는 이럴 때 카이사르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공화주의의 원칙을 되새길 뿐이다. 다만 그 자신에게는 서글픈 운명이 닥칠 것을 비감하면서…. 권력의 요지경을 지켜보는 2007년, 한국 시민들의 마음이 매양 그러할 것이다. 이 시대의 키케로들에게 바칠 위안거리가 한 가지 있다. 키케로는 고대 로마가 전제정의 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2천 여 년 뒤에 인류가 공화정의 길로 나아가는 초석을 세웠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노사모’가 아니라 ‘키케로’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426 | 추천: 0
다른 것은 아름답다. * 어느 책에선가 읽고 가슴에 남은 구절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고등학교 1학년 오동구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학생이다. 일본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을 연모하면서, 당당한 한 사람의 여자로서 선생님 앞에 서서 사랑을 고백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상금 오백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진짜 여자가 되는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죽도록 연습을 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별다른 무엇이 억지로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대로 살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먼저 나와 다른 성(gender)을 가진 사람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중에 황홀한 눈빛을 이끈 사람과는 결혼이라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쳐서라도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나와 성이 같은 사람과는 이런 관계를 맺는 일이 거의 없다. 성이 다르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은? 불교나 원불교, 천주교 신자들은 대개 그렇지 않은데, 유독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악에 빠져 있어서 구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 하지만 요즘에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종교의 다름이 전혀 나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서로 다른 영성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개신교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동안 그런 생각을 억눌러 오다가 이제 조금씩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아름답다.   사진 출처 -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한국 사회는 아직도 지역감정에 휘둘리고 있다. 올해는 대선이 있는데, 지역감정이 또 어떤 영향을 정치에 미칠지 염려가 된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리면 사투리가 달라도 재미있는데, 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적대시할까. 이런 상태로 점차 증가하는 북한주민들과의 교류를 한국사회가 어떻게 소화해낼지 걱정이 앞선다. 한국은 단일 민족 국가라고 입이 닳도록 홍보한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서 한국 경제의 요소요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맡은 일들은, 국내 노동자들이 극히 꺼려하는 힘들고 보수가 적은 일들이다. 이제는 그들과 결혼한 한국인들도,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 한국사회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백인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뒤떨어진 나라의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아도 한국이 살만한 곳이어야 한국 사람들도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름다울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성에 끌리지 않고 같은 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름답지 않은가. 또는 태어날 때 가진 성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고 다른 성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아니 그보다는 오동구처럼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이고 추접스러운가. “다른 것은 아름답다”는 말은 어쩌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마음먹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몇 가지 예에서 보듯이, 다른 것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좀 어색하고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들도 있다. 눈을 자연스럽게 뜨고 보면, 그런 것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더구나,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들이, 그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들이라고 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영화에서 주인공 오동구는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라고 말한다. 사진 출처 -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남자들만, 여자들만 모여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은 함께 살 수가 없을까. 종교가 다른 사람들도, 지역이 다른 사람들도, 국적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들도, 장애인들도, 이념적인 지향이 다른 사람들도 이미 함께 살고 있다. 우리(어떤 항목에서든 주류인 사람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지, 아니면 “다른 것은 추하고 번거롭다”며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면서 살아갈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억눌린 소수는 억압받는 자들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보다 사려깊은 태도를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채 주류에 속한 다수는, 의도하지 않은 억압으로 같은 값의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대하게 되기도 한다. 오동구가 닮고 싶어 안달인 가수 마돈나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오동구의 취향이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런 오동구와 내가 가까워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를 비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배척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당당한 표현에 응원을 보낸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90 | 추천: 0
4,373,499. 이것은 무슨 숫자일까? 참여정부 들어 대통령님의 은혜로운 사면으로 죄를 용서 받은 사람 숫자다. 참 많기도 하다. 이 숫자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가를 만천하에 공표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치로써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자동차운전 관련 사범 등 사소한 행정법규위반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흉악한 범죄자 집단은 아니다.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의 사소한 과오를 대통령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데 누가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설득되지 않는 대통령의 사면 내용 그런데 이 숫자에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자행한 파렴치한 범죄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통령님께서는 권력자와 재벌 등을 용서한 이유에 대해 ‘국민화합’ 또는 ‘경제 살리기’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왜 그런데 나 같은 시골 대학의 촌뜨기 교수는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을 사면해주기 위해 그동안 사면대상에 선량한 국민을 곁다리로 끼워 놓은 것이라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일까. 진정한 국민화합을 위해서라면, 두산의 박용성, 쌍용의 김석원, 대상의 임창욱 같은 재계 거물들과 박지원, 권노갑, 김현철, 김홍일 같은 퇴물 정치인들은 사면에 포함시키면서 왜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포함이 안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몇 억 원, 몇 십억 원의 뇌물을 두꺼비처럼 넙죽 넙죽 받아먹은 거물급 권력자와 몇 백억 원씩의 회사 돈을 어린아이 사탕 먹듯 횡령하는 등의 부도덕하고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들을 사면시켜주면 국민화합과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고, 힘없는 노동자와 양심범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을 사면하면 국민화합과 경제 살리기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논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면이 군주국가 시대에 군주의 특권적 자비로 베풀어지면서 악용되는 폐해가 발생하자 근대 입헌국가에서는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면제도가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경사나 정치적 상황 변화 등에 따르는 필요성과 합리성을 이유로 대다수의 국가들은 현재 국가 원수의 사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고려할 때 개인적으로는 사면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까지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면권의 행사가 자의(恣意)적으로 반복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운용된다면 사면제도를 둘 이유는 분명 없어 질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번에도 참여정부는 툭하면 나오는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할 것인가.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그 진정성을 담보하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그 진정성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참여정부 들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김대중, 김영삼 정권보다도 더 많은 양심수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주관적 진정성과 정당성만으로 마지막까지 국민을 호도하려고 하는가. 참여정부의 순결한 정신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 등을 더욱 보호 대상으로 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등권을 보장하여 주는 이념이 아니었던가. 재벌과 권력자 같은 집단은 사면권의 보호 대상이요, 노동자들은 이러한 집단과 달리 차별적으로 취급하는 머리 아픈 현실에서 어떻게 객관적 정당성을 믿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인(萬人)이 아니라 만명(萬名)에게만 평등? 우리 헌법 제11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번에 단행된 사면의 내용을 놓고 볼 때 우리 현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정신은 혹시 만 명(萬名)에게만 평등한 법조항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18세기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근대 입헌국가의 지도원리가 되었고, 현대 국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념이지만 우리에게는 박제된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두산 그룹의 박용성 회장이 286억 원을 횡령한 범죄에 대해 검찰은 불구속 기소를 하고, 법원은 경제에 기여한바가 크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대통령님께서는 경제 살리기를 위한다며 사면해주는 현실에서 어느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물론 절대적으로 평등한 세상,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국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국민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듯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겠는가. 사면 대상으로 풀려난 권노갑씨가 교도소를 나오면서 한 말은 더욱 가관이다. ‘정의는 승리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30 | 추천: 0
“UCC는 한마디로 ‘돈’이다”- UCC 열풍 뒤에 숨은 거대 자본의 욕심 뉴 미디어와 관련해서는 웬 신조어가 그리 많은지 일일이 따라잡기가 여간 버겁지 않다. IPTV, DMB, 유비쿼터스니 하는 말들이 귀에 익을 만하니 이번엔 UCC란 말이 대유행이다. 소비자가 직접 만든 콘텐츠(User Created Contents)를 의미하는 이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말이란다. 영어권에서는 UGC(User Generated Contents)라고 한다든가. 아무튼 독자적인 용어까지 사용되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가 이 부문에서 나름 앞서가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용자가 만든 콘텐츠라면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예컨대 공중파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청자 비디오 같은 것도 그렇고 <오마이뉴스> 같은 데 뉴스를 작성해 보내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들도 전문 제작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란 점에서 UCC의 일부였던 셈이다. 수많은 개인 블로그들은 물론 하다못해 인터넷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들도 일종의 UCC인 셈이다.     UCC 동영상 서비스 선두업체인 판도라TV 사진 출처 - 판도라TV UCC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 이른바 정보화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인터넷 시대니 하는 말들이 나오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거론되어 온 것이 ‘쌍방향성’이었다. 일방적으로 주어진 정보를 수용하기만 하던 대중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메시지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고, 이것이야말로 미디어 권력의 일방적인 구조를 엎고 담론 세계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정보화 시대의 특성이라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최근 십여 년의 과정을 돌아보면 그런 주장이 그런대로 맞아 들어간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일부 신문이나 공중파 방송 등 전통적인 미디어 권력이 누리던 절대적 권위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발전 속에서 어느 정도 상대화되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인터넷에서 활발히 벌어지는 대중의 자발적 소통이 반드시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인터넷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른바 네티즌 문화의 뿌리 없음과 경박함, 그리고 무책임함이다. 예컨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악성 댓글(악플)들을 보면 누구나 쉽게 메시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기술적 진보라는 것이 그대로 담론 구조의 진보와 민주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기술에 앞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논리적이고 민주적인 사고의 능력,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인문학적 가치들이란 말이다.     UCC는 한마디로 ‘돈’이다 아무려나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사용자 생산 콘텐츠가 새삼 UCC니 뭐니 관심을 모으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술 발전과 함께 인터넷에서 생산 유통되는 주요 정보가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사진과 동영상 정보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미지와 동영상의 생산과 조작이 손쉬워지면서 온갖 다양한 영상 정보들이 인터넷에 넘쳐나기 시작했고 손수 제작한 동영상 등으로 갑자기 스타가 되어버린 경우들이 생겨났다. UCC란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다. 방송통신 융합 추세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채널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를 채울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용자들이 개발한 동영상 콘텐츠들이 그 공백을 메워줄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다. 최근 들어 공중파 방송까지 UCC 공모에 나서는가 하면 대형 포털 업체들이 UCC를 이용한 사업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유튜브(youtube.com)가 구글에 16억 5천만 달러에 팔린 것은 이 난데없는 UCC 열풍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한 마디로 그것은 ‘돈’이다. 요컨대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낸 영상 콘텐츠를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거대 자본의 욕심이 이 새삼스러운 UCC 열풍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인터넷 예절을 다룬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공익광고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돈’이 결합하면 자발성은 퇴색한다 대중의 자유롭고 자생적인 문화적 에너지가 거대 자본 권력의 자장 속으로 흡수되어버리는 사례는 문화사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최근의 UCC 열풍은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문화 공간 속에서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대중의 자생적 창조물들을 자본의 논리 속으로 끌어들여 손쉬운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문화산업 자본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보여준다. 인터넷 공간을 흘러 다니는 수많은 정보와 콘텐츠들은 아직 충분히 민주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양질의 정보 콘텐츠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들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대중의 자발성과 능동성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며 이를 통해 미디어의 공공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진정 민주적인 정보 소통 구조를 위해 의미 있고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거대 자본이 여기에 적극 개입하는 순간 인터넷의 공공성은 훼손되고 UCC의 자발성은 퇴색된다. 최근의 UCC 열풍이 곱게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67 | 추천: 0
필자가 대학에서 인권과목을 강의하며 시청각자료로서 활용하는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인권단편영화 모음 중에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이라는 14분짜리 작품이 있다. 그것은 한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의 일상적인 삶과 감정의 기록을 짧은 장면들로 구성한 영화인데, 특히 세종로 네거리를 홀로 무단 횡단하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장애인들이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며 버스에 자신들의 휠체어를 쇠사슬로 묶고 절규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 미국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임을 우리는 본다. 휠체어 표시가 붙은 버스가 짧은 간격으로 다니며 장애인이 탈 경우엔 버스가 멈추고 기사가 나와 휠체어를 밀어 버스에서 자동으로 내려오는 발판 위로 휠체어를 탑재한 후 안전띠로 동이고 버스가 출발한다. 승객들은 어느 누구도 시간이 걸린다 하여 투덜대기는커녕 기사가 제대로 장애인 승객을 대하는지를 지켜본다. 이 장면을 목격하던 필자는 장애인들이 행복한 나라여야 진정으로 문화선진국이자 선진 민주국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의 일상적인 삶과 감정의 기록을 짧은 장면들로 구성한 '대륙횡단'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영화 '여섯개의 시선'  이에 덧붙여, 필자는 인권연대 주최의 2006년 여름 교사인권강좌 자료집에서 접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박숙경씨의 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해와 인권”에서 귀중한 깨우침을 얻는다. 장애는 사고나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90% 이상이라 한다. 한창 잘 나가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나 사업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고통을 받는 것을 자주 보며 필자는 장애가 참으로 가까이 있는 것임을 절감하곤 한다. 사실, 장애인은 대한민국 인구의 약 10%인 450만명에 근접한다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애인들을 여전히 나와는 ‘다른’ 존재, 더 나아가 나와는 ‘틀린’ 존재로 인식하며, 장애인이 이름을 가진 ‘사람’ 누구누구이며 단지 ‘장애’를 더 가졌을 뿐임을 잊고 그저 ‘장애인’으로만 분류하지는 않나? 말 한마디, 냉랭한 태도, 차갑거나 동정어린 시선 등에 의해 ‘특별한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상처이자 인권침해라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토로한다. 1999년에 발간된 <한국장애인인권백서>를 보면,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공연히 부각시키거나 그들을 비하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언어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애만 없어도 큰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주는 상처, 신문 지상에서 곧잘 접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기,” “절름발이식 국토개발,” “장님 코끼리 만지기” 등의 상투적 표현, 텔레비전에서 접하는 “바보” 등 장애를 빗대어 웃음을 만드는 코미디 프로그램 등이 커다란 상처를 준다고 한다. 장애인은 ‘장애인’이라는 말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 (장)애자, 불구자, 병신, 기형아, 장님, 봉사, 애꾸, 벙어리, 귀머거리 등등의 용어 자체가 곧 인권침해라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는가. 더 나아가, 밥 맛 떨어진다고 못 들어오게 하는 식당, 자필서명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카드 발급을 거절하는 은행, 수화통역사를 대동하고 오라고 면박을 주는 관공서나 경찰서, 방 한 칸을 얻으려 해도 재수 없다고 거절하는 집주인들, 장애인이라고 면접에도 못 오게 항상 서류전형에서부터 낙방시키는 기업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고 하여 혼사가 파혼되는 사례 등, 사례는 참으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반면에, 최근 영어로는 장애인을 “people with different abilities" 혹은 “differently abled”라고 한다. 장애를 “disabled"(능력이 없는)라고 표현하지 않고, (보통 사람은 못하는) “다른 능력을 가진”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physically challenged"(“신체적으로 어려운 도전을 받고 있는,” 그럼에도 잘 극복하고 있는)이라고도 한다. 팔이 없어도 입에 붓을 물어 그림을 그리는 훌륭한 화가들, 휠체어를 타면서도 팔다리 멀쩡한 선수들보다 슛이 정확한 농구선수들을 우리는 본다. 과연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성한 이들의 편견이 곧 ‘장애’ 아닐까? 그런 성한 이들이 ‘비정상’ 아닐까? 이제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부지불식간에 가하는 언어폭력부터 줄여야 하겠다. 예를 들면, 장애인을 명사형으로 고착화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휠체어장애인 OOO씨”라는 말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OOO씨”, ‘장애인’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낫다. 그리고, ESCAP(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가 제시한 바 있는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용어 사용 및 인터뷰 지침인 “장애가 이야기에 있어 중요하지 않다면 부각시키지 말라”는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이다.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건이후 결성된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청역 선로점거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사진 출처- 장애인이동권연대   그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배려는 쉽고도 많다. 지체장애인들과 만날 약속을 할 때엔 그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미리 알아볼 것,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엔 먼저 상대방의 손을 이끌어 잡는 방식으로 악수를 할 것, 청각장애인들과 구화로 대화할 때는 일정하고 약간 느린 속도로 바르고 큰 입 모양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시간, 약품명 등은 꼭 글로 써서 대화할 것, 뇌 병변 장애이어서 손이 불편해 필담을 못하면 휴대폰의 문자로 간단히 소통할 것, 정신지체장애를 가졌다고 무조건 반말을 하거나 어린애 다루듯 하지 말고  “위험하다” 혹은 “귀신들렸다”는 식으로 여기지 않을 것, 등등은 실천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듯,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모두가 함께 사는 일, 곧 ‘분리’가 아닌 ‘통합’으로써 인권과 연대를 실천하는 일이다. 서두에서 언급된 <대륙횡단>이라는 영화에서 장애인 친구는 주인공과 소주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 게 우리의 문제”라고 한다. 그리고는 장애인이동권 쟁취 집회에 나가 구속된다. 그 장면을 우연히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고 주인공은 죽을 위험도 마다않고 세종로를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을 감행한다.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건이후 결성된 장애인이동권연대의 활동사례에서 보듯이, 그 이후 장애인 권리의 주체가 장애인 운동의 주체로 나섰고 장애계가 총체적으로 연대하여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 UN에서는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우리 모두가 함께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한국 사회의 인권수준이, 아직은 휠체어에 의존하는 정도이지만, 여느 나라의 경우처럼 버스 정도는 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83 | 추천: -1
요즘 나는 시사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매일 저녁에 두 시간씩 우리사회의 다양한 현안들을 다룬다.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핵심은, 어떤 사안을 다룰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인터뷰를 해서 이 사안을 전달할 것인가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템을 선정하는 시간보다는 섭외에 매달리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일단 섭외만 되면 그날 방송준비는 거의 다 한 셈이다.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진행자의 역량이 많이 좌우하는 ‘부차적인 문제’다.  시사프로그램을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레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게 있어 그 기준은 그 사람이 보수냐 진보냐, 꼴통이냐 아니냐,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끼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 고상한 것은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인터뷰 해주는 사람=좋은 놈, 인터뷰 안 해주는 사람=나쁜 놈’ 이런 식이다.   이 세상엔 두 가지의 사람만 있다 예를 들어, 거침없는 달변에다가 화끈하게 ‘뉴스거리’까지 만들어 주는 사람은 아주 좋아한다. 반대로 별별 아부 다해가며 어렵게 섭외했는데 막상 방송에선 선문답을 하거나 미꾸라지처럼 요리 빼고 조리 빼는 사람은 그야말로 ‘짜증 지대로’다. 그런데 진짜 싫어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죽어도 인터뷰 안한다는 사람들이다. 섭외를 하다보면 글이나 논문을 통해서 얘기하지 방송인터뷰는 안한다는 분들이 꽤 있다. ‘말재주가 없다면 글로 쓴 거 그냥 읽기라도 하지, 그게 뭐 어렵다고 빼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건 내 사정이고 그 분의 소신이 그렇다니 이해는 하지만 용서가 안 되는 경우다. 왜? 방송에 도움이 안 되니까!(이런 내 기준이 너무 편협하다고 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이게 다 직업병이려니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최근에도 내 직업병을 도지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바로 작년 6월부터 파행을 겪어온  <시사저널> 사태다. 발단은 삼성관련 기사를 인쇄단계에서 발행인인 금창태 사장이 삭제를 지시한 것이다. 편집국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사가 삭제되자 항의차원에서 사표를 냈고 회사는 신속하게 수리했다고 한다. 항의하는 기자들에게는 무더기 징계가 내려졌다. 편집권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대화로 풀리지 않자 노조는 지난 12일부터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사측은 22일 직장폐쇄 결정을 내렸다. 시사저널 사태를 비판한 서명숙 전 편집국장, 고재열 기자 등에 대해 사측은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내가 몸담고 있는 CBS도 지난 2000년 사장퇴진 문제로 9개월간 파업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없었다곤 말 못하지만 나의 개인사정과 별개로 <시사저널> 사태는 언론계의 중요한 이슈이기에 당연히 인터뷰를 해야 할 사안이었다.     <시사저널> 노조원 20여명은 지난 1월 22일 오후 1시 정동 사옥 앞에서 사측의 직장폐쇄 조치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스스로도 놀라는 ‘투철한 직업정신’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인터뷰를 추진함에 있어서 ‘사건의 발단이 된 삼성관련 기사삭제가 발행인의 당연한 권한 행사였는지, 기사내용이 사실 확인이나 증거확보 없이 일부의 주장만 담아 기사 가치가 없어 삭제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장의 지시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징계하는 것이 기강확립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는지, 회사를 비방하는 노조에 대해 직장폐쇄조치를 내린 것이 사용자의 정당한 권한 행사였는지, <시사저널>의 정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중앙일보 출신들을 편집위원으로 새로 채용한 건지 아니면 대체인력으로 투입한 것인지, 노조의 편집권 독립요구가 과연 정당한 건지’ 등의 문제는 괜히 복잡하기만 할뿐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자들 없이 발행된 시사저널이 ‘짝퉁 시사저널’인지 ‘사장저널’인지 구별하는 것도 내 소관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번 사태가 언론에 대한 통제가 권력으로부터 자본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그리하여 한국 언론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가의 문제는 내게는 너무 거창한, 그리하여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건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인터뷰를 해줬는지, 누가 안 해줬는지’의 여부다.(이런 나를 속 좁다고 욕하지 마라. 나도 가끔씩 나의 투철한 직업정신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여튼 이번 사안에 있어서는 당사자의 의견과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니 만큼 우리 제작팀에선 노조와 사측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노조는 응했다. 그런데 사측엔 두 차례의 인터뷰 요청에도 안한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회사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안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어렵게 입수한 금창태 사장 개인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을 때도 “사장님……인터뷰 안 한답니다”라는 답변만 들었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나의 투철한 직업 정신에 비춰볼 때 일단 ‘인터뷰 안 한답니다’라는 말에서부터 감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건 ‘왜 안한다’는 건지 설명이 안 될 때이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합니다’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안 합니다’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니어서 ‘하기 싫어서 안 할래요’도 아니고 그냥 ‘안 한다’라는 답변만 되돌아 올 때 그 막막함이란…. 거듭 말하지만 나의 기준은 단순 명쾌하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87 | 추천: 0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정부는 노동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정부 대책은 비정규직의 직업능력의 향상과 정규직과의 비합리적인 차별을 방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기업 역시 비정규직의 사용이 노무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측면에만 주목하고 있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노력하나, 그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진지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참여 정부가 내세운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을 불신하고, 다음 대통령 선거를 계기 삼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여론을 ‘산업화세력에 대한 지지’라고 단순하게 부르나, 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원인들을 고민해야 한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노무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정규직을 이용하여 천원의 상품을 만들고 있었다면, 이 기업이 기존의 정규직 근로자들을 비정규직을 대체할 경우 절반의 노무비용만을 사용하여 같은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듯 손쉽게 비용을 절감하고 자신의 이윤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어떤 바보 같은 기업이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 역시 이러한 원인을 없애는데 착안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대규모 할인매장이 파트 타이머나 계약직 등에게 낮은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면, 단지 그곳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할인매장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소비자는 적은 비용을 들여 많은 효용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 소비자가 상품의 명목상 가액만을 기준 삼아 상품을 선택한다면, 비정규직이 감소할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규직을 이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도태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즉 합리적인 소비자의 행동으로 인하여 비정규직 근로자의 수가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이는 이 행동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정규직이 증가하면 사회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이는 결국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합리적인 소비자는 슈퍼마켓에서는 싼 가격의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었지만, 세금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는 종전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매할 때, 그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이 어떤 근로자를 고용하는지를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윤 중 일부를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을 칭찬하고, 그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만약 그 기업이 저임금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사용하여 그 이윤을 만들어 내고선 그 중 일부를 기부한 것이라면, 이 기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평균 이하의 생활을 요구하는 기업에 대하여, 단지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했다는 점만으로 이들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기업의 사회 공헌도는 그 기업에 속한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 수준에 좌우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대규모 할인매장이 파트 타이머나 계약직 등에게 낮은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면, 단지 그곳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할인매장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가격에 큰 차이가 없다면, 차라리 동네의 슈퍼마켓에 가서 소량의 물품을 사서 적게 소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소비 활동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 역시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소비 활동을 하여야 한다. 정부 물품에 대한 입찰과 관련하여, 입찰 기업의 비정규직 사용 비율이나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근로조건의 차별 정도를 조사하고 이를 점수화하여 그 구매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구매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라도, 정규직 근로자를 사용하는 기업의 불이익을 감소시키는 역할은 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간접적으로 정부가 부담하는 사회보장비용을 감소하는 효과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계나 사회단체 역시,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고 그 차별을 감소하는 일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나 정부가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각 업종별로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용 비율이 높은 기업과 낮은 기업, 비정규직과 정규직 근로자간의 근로조건 차별 정도가 심한 기업의 명단을 공개하여 시민들이 이런 정보에 터 잡아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올바른 기업을 보호하고 이러한 기업들이 확산되도록 격려할 수 있다. 시민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정규직을 사용하는 기업은 앞으로도 기업들 사이에서 바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은행에 이어 국민은행 노사도 올 2분기에 비정규직 직원   8천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사진은 시중은행 전체직원과 비정규직 현황.     사진 출처 - 한겨레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선의 정책이 없다고 포기하기보다는 가능한 방안을 찾아 계속하여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7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