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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을 배우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25 15:20
조회
463

이운희/ 인권연대 간사



지난 12월 15일부터 20일까지 여성재단이 마련한 ‘쉼프로젝트’를 통해서 여성 활동가(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활동가) 5명과 함께 일본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이 연수의 목적은 오랜 동안 평화적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평화운동을 진행해온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벌여오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을 만나고 단체들을 방문하여 오키나와의 전반적인 평화운동을 경험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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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
비행기로 2시간 10여분 밖에 안 걸리는 곳…….오키나와는 외국이라고 해도 꽤 가까운 곳이다. 인구 130여만 명, 제주도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의 남단에 위치한 탓에 한겨울에도 따뜻한 남풍이 부는 지역이다.‘95년 미군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은 곳…….


  그 곳은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이길 원했다.
원래는 ‘류큐(琉球)’라는 독립왕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왕성한 대외 무역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키나와에 신하의 예를 바칠 것을 강요했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였던 17세기에는 사츠마 번(가고시마 현)의 침략을 받고 합병 당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때 일본에 정식으로 합병된 오키나와는 거의 식민지 수준의 대우를 받았으며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났던 ‘오키나와 전쟁’의 참극으로 인해 미국에 점령당하여 군사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72년에 일본 본토로 복귀되었지만 점령 당시의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 영토의 20%를 차지하며 여전히 ‘동아시아 최대의 미군기지’로 존속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들의 인권을 보호받고 미군으로부터 해방되고자하는 열망이 컸기 때문에 72년 본토로의 복귀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군기지는 그대로 두고 시정권만 일본 정부에게 주는 일미 양정부의 형식적인 합의 내용에 대해 주민들은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본토의 미군은 축소되고 오히려 오키나와에 미 해병대가 옮겨 오는 등 미군의 규모가 복귀 전 보다 오히려 확대되면서 과거 기지 건설로 인해 몰수 되었던 땅을 되찾을 수도 없게 되었고 미군에 의한 범죄와 군사훈련에 따른 각종 사고들과 소음 공해, 기지 건설로 인한 환경 파괴 등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의 피해는 증가하였다. 주민들은 미군기지 존재 자체를 반발하기 시작하였고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주일 미군의 75%가 오키나와 영토를 차지하면서 복귀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오키나와의 현실과 일본 본토와의 여전한 차별에 대해 주민들은 과거 류큐왕국 시절인 국가로 독립하길 원하는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고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불리길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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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 ‘후텐마 비행장’
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면서 전쟁의 승자로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살고 있던 주민들을 쫓아내며 가장 좋은 위치에 기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일본 영토의 전체 면적 가운데 0.6%에 불과한 오키나와를 ‘군사기지의 섬’ 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의 최대 군사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반환 운동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95년에 있었던 ‘미군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일 미군기지 축소, 철수에 대한 여론이 일기 시작하여  미군 기지를 반대하는 대규모 운동이 일어났고 8만 5천명의 주민이 참여하여 미군을 항의하는 대회가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미 양 정부는 96년에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점진적 반환·축소계획을 담은 미일 특별행동위원회(SACO)의 보고를 통해 5~7년 내 후텐마기지를 일본에 반환한다는 내용을 합의하였다. 합의안에는 11곳의 시설을 반환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으며 10곳 정도의 시설은 다른 곳에 땅을 제공하라는 ‘대체시설’ 조건이 붙어있는 내용이었다.
후텐마기지 이전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일본 정부는 대체 시설 후보지로 헤노코 지역을 해상기지화 하기 위하여 정부의 뜻에 맞는 현지사를 후보로 입후보 시키거나 헤노코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10년 동안 1,000억을 투자하겠다는 지능책을 펼치고 있지만 주민들의 강한 반대 여론에 부딪혀 해상기지화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해상기지의 형태만 아닐 뿐 헤노코 지역의 육지와 바다를 걸치는 형태의 기지 건설 계획을 가지고 진행 중이다.
기노완 시에 위치한 미 해병대 비행장인 후텐마기지는 한국의 용산 기지처럼 도심의 중앙에 위치하여 일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로 불리고 있다. 2003년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후텐마기지를 방문하여 ‘사고가 안나는 것이 신기하다’고 지적하며 ‘폐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던 곳이다.
기지 주변이 대부분 학교와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200회 가량의 헬기 이착륙과 각종 훈련이 실시되고 있어서 주민들은 심각한 소음 피해를 입고 있다. 물론 ‘소음방지협약’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미군은 이를 지키지 않는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항상 사고가 예견되었고 작년 8월에는 후텐마기지 소속 헬기가 기노완시의 국제 대학 구내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방학 기간이어서 사상자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3만 명의 주민이 모여 미군을 규탄하고 기지 반환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등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미 감정이 다시금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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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텐마기지 반환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시장에 당선된 이하 요이치 기노완 시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가 기지 반환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시장에 당선되기 전에도 적극적으로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였고 지금도 시민단체들과 협력하여 지역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국 본토를 방문하는 등기지 반환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는 모든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떠나야 할 것이라며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기지 반환에 대한 연대를 주장하였다.
기노완 시장과의 면담후 후텐마기지를 보기 위해 올라간 시청 옥상 바닥에는 “DON'T FLY OVER OUR CITY!  U.S HELOs OUT NOW!' 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다. 시청 직원의 안내에 의하면 기노완 시장은 후텐마기지가 폐쇄될 때까지 이 문장을 지우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문구를 뒤로한 채 드넓게 펼쳐진 후텐마기지의 비행장에서 떠오른 비행기는 시청 앞을 유유히 날아갔다.

우리의 평화로운 나날을 돌려달라...
갑작스런 한파도 잠시, 따뜻한 가을 햇볕이 느껴지는 날 우리는 헤노코기지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는 농성장을 방문했다.
해변에 위치한 농성장에는 몇몇의 나이 드신 분들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608일째...
오키나와 북부의 나고시에 위치한 헤노코 지역은 사진으로만 보았던 에메랄드빛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곳에서 힘겨운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96년 미일특별행동위원회(SACO)의 보고에 따라 미군기지 대체 시설 후보지로 결정된 이후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8년간 기지 반대운동을 펼쳐오셨고 지금은 뜻을 같이하는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에 의해 일본 정부와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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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기지 설치를 계획한 정부에 대항하여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작년 4월 농성장을 만들었고 해상에서 기지 반대운동을 펼치기 위해 수영과 스쿠버다이빙, 카누를 배워왔으며 심지어 보트를 사고 면허를 취득하여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해상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힘겨운 노력으로 해상에 미군 기지를 설치하는 계획은 무산되었고 지금은 평온함이 감도는 상태였다. 하지만 해상기지의 형태만 아닐 뿐 농성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미군 ‘캠프 슈와브’에 바다와 걸쳐진 기지가 건설될 예정이다. 그래서 이곳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은 끝나지 않고 있다.
헤노코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그린벨트’라고 불리는 미군기지 감시초소 두 곳이 운영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주민들이 미군의 훈련 상황을 감시하는 곳으로 기지 철조망에서 불과 5미터도 채 안되는 곳에 초소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3층 정도 높이의 초소에서 바라본 미군기지에서는 훈련 중인 것으로 파악되는 총소리가 너무나 가깝게 들려왔다. 기지와 가까운 곳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바로 옆에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위험한 군사훈련이 매일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안내를 해준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감시운동을 통해서 기지 내에서 진행됐던 도시게릴라 훈련 건물을 폐쇄하게 되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 생명은 보물...
예부터 오키나와의 주민 대부분은 ‘모든 생명은 보물’ 이라는 가치철학을 가지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 평화의 소중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생겨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알고 있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있어서 평화의 가치는 너무나 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에 전쟁과 군대를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반경 2,000km안에 한반도 전역과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 전체,  중국의 중심 지역, 필리핀의 대부분이 포함되는 동북아의 전량 요충인 오키나와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키나와나 한국에서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빠른 시일 내에 성취되기는 힘들겠지만 기노완시의 경우처럼 지자체의 활발한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를 사랑하며 비폭력운동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의 운동이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로 지속된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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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운 현대사만 살펴보더라도 우리나라와 역사적 경험이 비슷한 오키나와를 보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아픈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던 오키나와 사람들과 오키나와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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