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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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연일 계속 되다 최절정에 이른 지난 2008년 6월 28일 오후, 정부는 “심야 불법·폭력 시위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고 저녁엔 서울시청 앞 광장을 경찰병력으로 에워쌌다. 그리고 6월 29일 새벽 서울 한복판 태평로에서는 “착검한 총만 없을 뿐 1980년 ‘5·18’의 광주 모습 그대로”가 재현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6·29’선언과 함께 항복한지 정확히 21년 후였다. ‘두 달 가까이 광화문을 무법천지로 만든 시위대’를 비난하는 정부와 ‘두 달 가까이 외쳤는데도 귀 기울이지 않는 정부의 오만함’에 분노한 시민들의 싸움, “청와대 앞까지 진출하려는 군중을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관용도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입장과 “오죽하면 청와대까지 가려하겠는가? 대통령과 대화를 원한다”는 입장은 서로 정면으로 대립한다. 4·19때 경무대로 달려가던 시민들이 지금은 청와대로 달려가려 한다, 혁명보다 소통을 요구하면서. 그러한 정면충돌은 기독교계 안에서도 그대로 재생된다. 한편에서는 사탄을 들먹이며 이명박 대통령을 지켜달라는 기도가, 다른 한편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국미사 강론이 낭독되었다. 둘 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들인데 어찌 그리 서로 정반대일까? 촛불집회가 날로 격화되던 지난 2008년 6월 5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청와대 비서관과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은 촛불집회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주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기도회 축사에서 “사탄의 무리들이 이 땅에 판을 치지 못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린다”며, “마치 모든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에 걸린 것처럼 순수한 학생에게 촛불을 주고, 마치 이 나라 정부가 미국인이 버리는 것을 국민에게 먹이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세력은 거짓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고 이 나라를 흔들고 있다”고 했다. 또 김홍도 목사(금란교회)는 “경찰, 검찰, 기무사, 국정원을 동원해 빨갱이들을 잡아들이라!” “그러면 (촛불집회 하는) 그 사람들이 쑥 들어가고 국민들 지지율이 다시 올라간다”고 주장했으며, “지금 이 촛불은 이명박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이라며 “이 대통령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고, 좌파 노릇을 하는 엠비시(MBC), 케이비에스(KBS)를 척결해 달라”고 기도했다 한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지난 6월 30일 저녁 ‘국민존엄 선언·국가권력 회개 촉구 비상시국 미사’를 집전하려고 십자가를 앞세운 채 서울시청 앞 광장 한복판으로 줄을 지어 들어서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반면에, 사제단은 지난 2005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반대 때 이후 3년 만에 다시 시국미사에 나섰다. 사제단 주최로 ‘국민존엄과 국가권력 회개를 촉구하는 시국미사’가 열린 2008년 6월 30일 저녁 7시 30분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신부와 수녀, 평신도 및 일반시민 1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시국미사가 끝난 후 사제단 200여 명과 시민 8천여 명(경찰 추산, 주최 측 추산 12만여 명)은 오후 9시 시청 앞 광장을 출발해 시내 거리를 행진하여 약 1시간여 만에 다시 서울 광장으로 돌아왔다. 십자가를 앞세우며 “촛불을 지키는 힘은 비폭력이다. 오늘 비폭력 원칙이 만약 깨지면 촛불은 영영 꺼지는 것”이라며 비폭력 원칙을 강조하며 평화행진을 주도한 사제단은 “국민에게 힘이 되는 시점까지 우리 사제단은 단식을 계속 하겠다”며 천막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오늘 신부들이 외치는 비폭력 구호에 많이 공감했다” “비폭력일 때 더 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일 수 있다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러한 사제단의 등장으로 그동안 정부와 경찰의 ‘불법시위 엄단’ 방침과 일부 시위대의 과격 폭력이 충돌했던 최근의 촛불집회 양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촛불집회에 종교계가 가담하면서 집회가 비폭력적으로 순화되는 면은 있지만, 그동안 대열에서 이탈되던 일반 시민들이 가세하며 집회가 다시 장기화될 것 같아 검찰과 경찰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7월 4일에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의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촉구하는 제1차 시국법회,’ 5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1천인 기독교 합창단’ 행사 등 비폭력 평화 기조의 종교계 집회가 잇따라 예정되어 있다. 예상치 않은 복병이 특히 기독교, 더 나아가 범종교계임을 알게 된 개신교 장로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기도를 할까? 하느님께서도 대략 난감해하시지 않을까? 정의구현사제단은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라는 강론에서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개탄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특히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 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이라며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 드는 맹목적 사대주의”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를 강하게 규탄했다. 아울러, 이번 대통령은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뽑혔을 뿐이고 국민의 그 기대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는데, “높이 받들고 깊이 새겨야 할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렇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올바른 통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통치자는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며, 고관들은 “법대로 나랏일을” 본다. 그들은 “바람을 막아 주고 소나기를 긋게 하여 주고 메마른 곳을 적셔 주고 타는 땅에 바위처럼 그늘이 되어 주리라. 민정을 살피는 눈이 어두워지지 아니하고 민원을 듣는 귀가 막히지 않으리라”(이사야, 32). 그 정반대로, 통치자와 고관들의 민정을 살피는 눈이 어둡고 민원을 듣는 귀가 꽉 막힌, 혹은 특유의 오만함이 그 귀를 꽉 막은 현 상황, 즉,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가톨릭교회는 “국민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러한 거부와 저항은 도덕 의무이기도 하다. 양심에 따르는 이 거부권은 법 처벌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곧 통치 행위 또는 공권력의 행사가 실정법에 근거한 것이라도, 그것이 그보다 우위에 있는 자연법의 근본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공권력 행사에 저항하는 것은 정당하다.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도록 강요하거나 인권 침해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법이나 제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것에 복종하는 것만큼이나 도덕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면서.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600 | 추천: 1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며칠간 미국으로 우울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엔 취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의 기러기 아빠로의 ‘변신’을 위한 통과의례 차원의 여행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로 인한 갖가지 상념이 던져주는 우울함은 일정 내내 온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댔다. 이번 미국행은 지금껏 전 세계 수십 개 나라를 돌아다닌 내게도 미국이란 나라가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남아있음을 새삼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란 존재가 내게 던져주는 두려움은 상식선에서 떠올릴 수 있는 어떤 ‘공포스러움’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그 ‘괴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적절할 듯하다. 몇 년 전 취재 차 꽤 오랫동안 미국에 머문 적이 있던 터였지만 이번 경험도 그 때의 체험들, 그리고 그 체험에서 비롯된 느낌과 생각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길지 않은 방문 기간 중에도 나는 미국이란 나라가 만들어내는 괴기함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인류 공동의 문제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와 시각 때문이다. 얼마 전 외신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사이 태평양에 텍사스 주 두 배 넓이의 거대한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다. 한반도 넓이의 6배에 해당하는 크기의 섬이 바다에 떠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쓰레기의 80%가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삶의 자세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대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동시대인으로서 서글프기까지 했다. 미국인의 수는 전 세계 인구의 5%에 못 미치지만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33%를 사용하고 있다. 복된 땅을 타고났기에 사막과 황무지 등 남아도는 땅에 묻던 쓰레기를 언제부터인가 바다에 쏟아 붇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쓰레기 섬이 천천히 바다 위를 움직이면서 해마다 10만종에 가까운 바다 생물을 죽이고 있다. 1950년대부터 10년마다 열배 크기로 늘어나고 있는 이 쓰레기 섬을 치우는 일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럽인들의 몫이라는 게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사진 출처 -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 홈페이지    이런 현실을 확인해준 건 다름 아닌 미국에 사는 친구들이었다.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그들 틈에 살며 보게 된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은 그들이 자랑하는 ‘일류 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보였다. 우선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재활용이나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만 봐도 그렇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소소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자신들의 일상에 생각 외로 무관심한 듯해 보였다. 먹다 남은 음식물이나 음식 쓰레기는 당연한 듯 다른 쓰레기들 틈에 끼어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내 눈으론 충분히 재활용할 만한 것들도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순간 어쩌지 못할 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리곤 자신들이 버린 쓰레기가 어떻게 되는지 까맣게 잊고 만다. 음식물 쓰레기는 집집마다 있는 음식물 분쇄기를 통해 예외 없이 하수구로 흘러들어가 바다로 배출된다. 자신들의 풍요로운 소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다른 존재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별반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러면서도 방송과 신문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미국산 쇠고기 사태’에 대해 이상하다는 몸짓과 함께 입질을 해댄다. “우리도 먹는 건데”라며. 하지만 그들도 안다. 자신들의 땅에서, 세계적인 체인망을 지녔다는 패스트푸드점 ○○킹에서 팔리는 1달러짜리 햄버거에 들어가는 쇠고기가 30개월이 넘은 소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만이 그런 곳을 찾고, 그들 대부분이 나이를 떠나 비만도가 높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사람들로 북적여댈 점심시간임에도 수십 개의 테이블 중 두어 개만, 그것도 벌이가 없을만한 노인들로 채워져 있던 풍경이 생경함을 넘어 괴기스럽게까지 다가왔음을 모를 것이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게 그들만의 방식 ‘아메리칸 웨이(American Way)’다. 손쉽게 “싫으면 관두면 되지. 선택의 문제잖아”라고 말하는 미국인 친구들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들이다. 자신들이 선택의 권리를 누리는 건 당연하고, 자신들이 지닌 선택권이 다른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고 믿는 그들은 선의를 지닌 원칙론자인가, 자신마저도 속이는 경지에 오른 사기꾼인가. 그렇다면 미국은 집단최면에 걸린 거대한 사기꾼 집단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동안 미국인들 틈에 끼어 아메리칸 웨이를 배우며 그들의 삶을 따라갈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것만큼은 몇 번이고 당부하고 돌아왔다.   “누가 뭐래도, 100명 가운데 99명이 따라간다고 해도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일에는 기웃거리지도 말라”고. 그래서 아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부질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열심히 분리수거를 할 것이고 재활용품을 모아 내놓을 것이다. 이게 미국인들이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는 ‘코리안 웨이’다. 아직도 촛불이 타오르고 있는 이유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269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입만 열면 “야 내가 나이 마흔에…”라고 너스레를 떠는 선배가 있었다. 경상도 사람이어서 사투리가 심했는데, 내게는 꽤나 희극적으로 들렸다. 나이 마흔을 한참 넘기고도 한동안 그 말을 애용하던 선배는 어느 날 갑자기 신문사를 그만뒀다. 무슨 개인 사업을 한다는데 만나보질 못해서 잘 되는지는 모르겠다. 불현듯 그 선배가 생각난 건 내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서였다. 이젠 만으로 쳐도 꼼짝없이 넘어버린 그 숫자의 무게는 나를 주눅 들게 한다. 생각해보면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있고,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도 있지만, 나이 마흔을 주제로 뭔가 그럴듯하게 읊은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막 30대에 접어든 이들의 감수성이 막 40대에 접어든 이들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멋대로 추측하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가는 세월이 쏜살같이 느껴진다는 말 속엔, 감수성이 무뎌진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기성세대가 됐나봐.” 휴게실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한 입사 동기가 지나가며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촛불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나이 마흔이면 이제 확실히 기성세대가 됐다는 뜻이지. 이미 만들어진 세대라는 뜻이니까 변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세대라는 함의가 담겨있다. 나이가 들어가면 가진 것이 많아지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지키고 싶어진다. 보수화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많은데도 보수화하지 않는 사람은 몸으로든 머리로든 특별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잘 늙을 수 있을까. 나이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촛불집회의 불을 처음 지핀 것은 10대들의 감수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0교시 수업에 시달리다 겨우 대학에 들어갔지만 취직도 못하고 빌빌거리다 10년 전 학교급식으로 먹은 쇠고기 때문에 광우병에 걸려 대운하에 뿌려질 세대”라며, 이 사회의 하층민으로서 처지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아이들이 시위를 하다니, 좌우 할 것 없이 기성세대들은 모두 놀랐다. 우리의 상식 속에서 그건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유관순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투옥된 것이 17살 때였고, 김구가 동학의 ‘아기접주’가 된 것이 18살 때였다. (픽션이지만) 로미오와 운명적 사랑에 빠진 줄리엣의 나이는 14살이었다. 4·19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중·고생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와 관련이 있다. 10대들을 시장에 내다 팔 상품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완성품이 될 때까지 10대들을 끊임없이 닦달한다. 모든 판단과 행동은 대학 입학 이후로 유예된다. 요즘엔 대학에 입학해서도 상품화 과정이 계속되기 때문에 취직 이후로 유예된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30대가 되도록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하는 캥거루족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10대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육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10대들의 매체인 인터넷 덕분이다. 자기들이 정권을 교체했다고 우쭐했던 조중동은 혼쭐이 났다. 잠깐, 더 이상 옆길로 새지 말고 다시 나이 얘기로 돌아와 보자. 나이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심각한 지체현상과 조기퇴출 현상을 동시에 겪고 있다. 이미 육체적으로 성인인 아이들을 애 취급하며 사회 진출을 막고 있는 반면, 어른들은 40대가 되면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배우로 치면 늦깎이로 어렵사리 데뷔했는데, 조기 은퇴를 강요당하는 꼴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 인간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치를 우려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겠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이 마흔에…”를 입에 달고 다니던 선배도 이 점이 억울했을 것이다. ※아직 어린놈이 웬 나이 타령이냐고 생각하신 분들께는 삼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린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363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제1막 내 방이 밝으니 어머니 방도 밝은 줄 안다 아내의 성화에 결국 수퍼엘 갔다. 베란다의 전구가 망가진 지 한 3년쯤 되었는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은 꼭 갈아 끼워야 겠다는 것이다. 동그란 백열전구를 고르면서는 먼저 몇 촉짜리인가를 확인 한다. 백 촉짜리와 육십 촉짜리 두 종류가 있다. 아쉽다. 나는 제일 전기소비량이 적은 삼십 촉짜리 백열등을 사고 싶었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요즘도 그런거 나와요?”라고 내게 반문한다. 전기 배선이 엉망인 방두칸짜리 초가집에서는 꼭 삼십 촉 백열등을 사용했다. 필라멘트가 너무 잘 끊어지고 때론 터지기까지 해서 전기 소켓트의 스위치를 돌리기도 두려울 정도였지만 어머니는 밝기가 두 배인 육십 촉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당연히 다달이 거두어 가는 전기세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쨌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머니는 그것만으로도 전기세의 반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게 틀림없다. 전구가 금방 소모되는 탓에 나는 아버지의 술심부름보다 더 많이 어머니의 전구 심부름을 한 것 같다. 날 저무는 산길을 넘어 심부름을 다니면서 나는 지금처럼 늘 몇 촉짜리 전구인가를 확인하곤 했다. 전구 한 알을 사려고 들른 슈퍼에서 삼십 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보다 나는 너무 밝은 곳에 산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고향집에서 짧은 형광등 한 알에 밤을 의지하고 계신 어머니의 밤을 생각해 보지만 그 방이 얼마나 어두침침한지는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밝게 살고 있으니 어머니의 방도 필요한 만큼 밝겠지 하는 생각으로 산다.     제2막 제 등이 따시니 백성등도 따신 줄 안다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 중동산 두바이유의 현물 시세가 이미 130달러를 넘어섰고 갖가지 이유 때문에 200달러까지 치솟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화물연대의 파업이 시작 되었고 노선버스의 운행도 줄일 예정이다. 각종 원자재 값의 상승으로 물가는 치솟고 심지어 목욕탕의 온수마저도 데우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이 세계의 거의 전부를 움직이는 에너지인 석유 값의 폭등이 불러온 결과이다. 지난해 오를 대로 오른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적어도 지구가 망하기 전까지 한번 오른 석유 값이 제자리로 환원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국제 유가의 폭등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으니 적절한 대책도 있었어야 마땅하고 앞으로도 한참 치솟을 일을 생각하면 당연히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한 방안도 마련되어야 한다. 근데 지금의 mb정부, 뭐가 없다. 화물연대의 파업이후 물류가 세상을 멈추게 할 조짐을 보이자 긴급하게 대책회의라는 건 하는데 특별한 알맹이는 없다. 고통을 분담하자고 화주들을 회유 하거나 불법파업 엄단한다고 노조원을 협박 하는 거 외엔 뾰족한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노선의 감축을 예정한 지역 버스운송조합의 발표에도 역시 은근한 협박으로 일관하고 있으나 어쩌랴 치솟는 물가를 협박과 회유할 대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허긴 정부와 청와대의 구성을 보면 이해할 만은 하다. 자기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 혹은 부동산 재테크를 위해 위장 전입 몇 번쯤은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줄 알 것이다. 자기가 논문 표절을 하거나 농지법 위반을 관행처럼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줄 알 것이다. 자기가 한 30억쯤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쯤은 다 있겠지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야말로 관행처럼 행한 깜도 안 되는 탈법을 저지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초 얘기꺼리도 되지 않는 불쌍한 백성들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리터당 2000원에 육박하는 기름 값에 아우성치는 백성들의 원성에도 고작 몇 십만 원쯤 더 소요되는 그들의 고급승용차는 멈출지를 모를 것이고 인상률 7%에 다다른 서민물가 상승의 원망도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쯤으로 들을 것이다. 4.15 교육대책을 내놓았던 교과부의 수장께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쌈빡하게 아이들 공부 시킬 텐데 왜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서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했다하지 않던가. 오죽하면 그들이 미국 가서 대접받는 쇠고기가 값 싸고 질 좋다고 박수치며 수입협상 해놓고는 어린학생들 촛불 들게 만들까. 누군가의 전언에 의하면 아직도 그분들 촛불의 의미를 전혀 감 잡지 못하셨다고 한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제3막 추기급인 제 마음을 표준삼아 남의 마음을 추측한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눈 내리는 한 겨울 따스한 방안에서 여우 털을 입은 임금이 신하에게 묻는다. “올해날씨는 참 이상하다 사흘 동안이나 눈이 쌓였는데도 날씨는 봄처럼 따뜻하니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신하가 정중하게 직언을 한다. “현명한 군주는 자기가 배부르면 누군가 굶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자기가 따뜻하면 누군가 추위에 떨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자기 몸이 편안하면 누군가는 지쳐 피곤하지 않은가를 걱정 한다”고. 호랑이 담배 한참피고도 남을 2500년 전 중국의 춘추시대의 얘기이다. 그나저나 지금 청와대에는 이런 말을 대통령에게 건네줄 참모나 제대로 있는 것일까?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280 | 추천: 0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3년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오렌지팜 지역을 취재했다. 오렌지 팜은 요하네스버그의 대표적 빈민지역인 소웨토에서도 쫓겨난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다. 황량한 벌판에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여기엔 80만에서 15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당엔 큼직한 플라스틱 박스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빛바랜 집들에 비해 플라스틱 박스들은 설치 한지 얼마 안 된 것들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도 계량기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것보단 좀 더 크고 복잡해보였다. 바로 선불제 수도계량기(Pre-paid Water Meter)였다. 미리 돈을 내고 카드를 사서 그 돈만큼의 물만 공급받을 수 있는 장치다. 가난한 이들에게 수도요금을 받지 못할 것을 대비해 요하네스버그의 수도회사가 도입한 시스템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수도가 민영화 된 것은 2001년부터다. 오랜 백인통치를 끝내고 만델라 정권이 들어섰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은행은 세계화란 이름으로 남아공에 대한 개발을 지원하면서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요구했다. 그 중 하나가 물의 민영화다. 요하네스버그의 상수도사업은 프랑스의 다국적 기업 수에즈의 수중(요하네스버그 워터)에 넘어갔다. 요하네스버그 워터는 상수도 사업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도 깨끗한 물을 공급할 것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은 수도망을 확대하고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동네에 선불제 수도계량기부터 설치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도요금을 떼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더 많은 물을 더 효율적으로 더 깨끗하게 공급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요하네스버그 워터가 진출하기 전 오렌지팜 사람들에게 수도요금은 사실상 공짜였다. 마을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쓰거나, 집에 수도가 있는 경우면 그냥 썼다. 다만 돈을 내지 못했을 뿐이다. 남아공의 상수도가 민영화되면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집단 콜레라 발병이 늘었다는 점이다. 요하네스버그 중심가 근처의 대표적 빈민 밀집지역인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의 판잣집들은 주스케이 강 근처에 몰려있다. 수도공급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더러운 강물을 생활용수로 이용했고 그 결과 콜레라 발생이 증가한 것이다. 이들에게 요하네스버그 워터의 깨끗한 수돗물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 지역엔 선불제 수도계량기 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BLUE GOLD... 세계 다국적 기업들은 앞으로 닥쳐올 물 부족 시대를 대비해 앞 다투어 물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석유보다 더 비싼 물은 더 이상 공공재가 아니라 아주 큰 이윤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상품, 즉 ‘푸른 황금’이다. 물 부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가 지혜를 모아도 모자랄 판에 이를 돈벌이로 삼겠다는 발상은 전문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우리라고 예외일 수 있으랴. 쇠고기 장관고시가 강행되던 지난 달 29일, 이명박 정부는 물 민영화를 본격화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방 상수도 통합 전문기관 관리계획’을 제출하고, 155개 시도지역의 상수도망을 고려, 3~15개 자치단체를 권역별로 광역화해 수자원 공사 등과 같은 전문기관이 관리하고 7개 특별시, 광역시는 경영혁신 후 자율적 판단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사화를 추진한다는 게 뼈대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지난 2003년 물 사유화 문제를 취재할 때 우려했던 것이 이제 우리 눈앞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말대로 ‘값싸고 좋은 쇠고기’는 ‘안 사먹으면 그만’이지만 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비싸면 안마시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실용적인, 너무나도 실용적인 발상 앞에서 왜 난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걸까. ps. 그나저나 물 값이 오르면 청계천에 흘려보내는 수돗물은 어떻게 할 건지 그건 좀 궁금하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308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내가 가진 가치나 철학과 너무나도 다른 방식의 가치나 철학을 만나게 되어 종종 놀라게 된다. 얼마 전 학교에서 화장실을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아이들이 사용하는 화장실 사용과 관련하여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다. 내용은 아이들이 강낭콩을 심고 물을 주기 위해 화장실을 이용할 때 흙을 남성 소변기에 아무렇게나 버려 고장문제가 있으니 4학년(강낭콩을 심는 것은 4학년의 학습내용이므로) 아이들의 화장실 사용에 대하여 지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관련 과목의 수업을 진행하다가 화장실에서 강낭콩에 물을 주는 방법과 배관에 대한 설명도 하면서 우리가 잘 사용하면 화장실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힘이 덜 드니 그 분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긍하거나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 하며 웅성거리는데 한 아이가 대뜸 그 아주머니는 돈을 받지 않느냐며 마치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내게 반문을 하였다. 난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11살의 그 아이는 우리 반의 회장이고 나름 학년에서 공부를 잘하는 우수한 아이로 인정받는 아이인데 이 아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아이의 마음에 따뜻한 인간애를 심어줄 수 있을까와 돈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가치화하려는 시각 앞에서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인지에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언행은 어른이나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철학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업적위주의 사회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돈이고 능력뿐인 것이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한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남을 이겨서 공부를 잘 해서 1등을 해야 하고 그래야만 부자로 잘살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가? 그 외에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이라든가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한다든가 약하고 어려운 친구를 도와야 한다든가 나만이 아닌 남들도 모두 함께 잘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가? 사회는 또 어떤가? 대중 매체와 인터넷에서 대 놓고 돈이 최고의 가치임을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1%’나 ‘부자 되세요’라는 문구는 너무나도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아 덕담 정도의 말로 치부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오로지 10%의 잘하는 학생만을 염두에 둔 정책만을 만들고 있다. 사진은 수능시험 성적표가 배부된 뒤 교실에 남은 학생.   사진 출처 - 한겨레    학교는 또 어떤가? 이번 4·15 학교자율화조치의 내용을 보면 경쟁을 심화하는 조치 일색이다. 자율형 자립고의 확대와 대학 입시의 자율화 방안, 그리고 말 많았던 영어공교육화와 ㅇ교시 보충학습 확대, 그리고 심야보충학습 강화와 전국단위 일제고사를 통한 우열반 편성 등 사교육을 강화하고 활성화하는 정책만 양산하며 말로는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인다고 한다. 20년 전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학교환경에서 학급당 인원수와 학교시설에 대한 투자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고 실효성 없는 정책의 남발만을 일삼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체육교과서를 보면 그 학년에서 학습해야할 운동을 필수와 선택으로 구분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필수는 반드시 학습해야하는 것이고 선택은 교사의 선택에 따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 필수에 수영을 하라고 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학교환경에서 어떻게 수영학습을 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알다시피 몇 안 되는 시설 좋은 학교를 제외하고는 수영학습은 진행할 수가 없다.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닌 학교라는 공교육 체계를 통해서 한 인간이 갖추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을 배우게 하고 경험하게하고 느끼도록 해주어야함에도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OECD 국가 중 사교육비 지출 1위와 학교 교육비 가계 부담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오로지 10%의 잘하는 학생만을 염두에 둔 정책만을 만들고 있다. 또 1인이 100만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1% 안에, 우수한 그 1인이 바로 내 아이가 될 수 있다는 확률적 오류를 범하면서 사교육에 목숨을 걸도록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면서 경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적 자본이 가장 큰 자산인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90%의 학생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한번 가보았는가? 소수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제외한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 또 이미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은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 말이다. 지금의 정책은 10%에게나 90%에게나 모두 지는 정책이다. 그런데 정부는 4·15 학교자율화조치를 통해 이를 더 심화시킨다고 하니 도대체 그 끝은 어디란 말인가? 우리는 종종 사회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사건을 접하면 흥분하고 이유가 무엇인지 뜨겁게 논하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그리고 어떤 아이가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했다고 하면 혀를 차며 안쓰럽게 생각하고 남의 일로 치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런 일은 자식을 둔 부모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마다 태어난 환경이 다르고 그에 따라 누릴 수 있는 혜택도 다르며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각자가 지닌 능력도 다르다. 다 알고 있는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다른 사람들이 경중을 따질 수 없이 모두 소중하며 서로 어우러져 살아야 할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다. 사회로의 진입을 위해 각자가 가진 능력을 겨루는 것은 삶의 목적이 아닌 살아가는 수단이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지향하는 삶, 추구해야하는 가치와 철학에 대해서 교육을 중심으로 놓고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럴듯한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인식되는 그런 철학과 가치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의 중심으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후 우리는 몇 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그 중 개인적 경험과 관심도에 비추어 눈에 띄는 것으로는 여성가족부의 보건복지부로의 편입, 기업 친화적 규제 풀기 중 성평등 관련 규정의 완화를 기업들이 우선적으로 요구한 것, 국민의 건강권을 우리의 입장이 아닌 남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는 것과 아이들을 끊임없이 경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바로 그 아이들이 그렇게는 살 수 없노라고 좀 더 인간적으로 살고 싶노라고 촛불집회를 통해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다. 나는 이 모습에서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보았다. 그리고 한사람의 열 걸음이 아닌 열 사람의 한걸음을 중시하는 사회를 꿈꾸어도 될 것 같았다. 이 꿈의 실현은 결국 그 사회가 가진 가치와 철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291 | 추천: 0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온통 소고기에만 관심이 쏠린 요즘, 때늦게 지난 국회의원 선거를 얘기하려고 한다. 선거 결과에 대하여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수도권에 한정한다면 뉴타운과 집값 상승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그런 결과를 불러왔다고 설명하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란 희망이 수도권 전역을 뒤덮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70년대처럼 마을길을 넓히고 집을 없애는 방식을 택하였다. 시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자산 가치를 높이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총선에서 수도권 주민들이 70년대 개발 독재 세력을 지지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멀쩡한 집 없애고 길 넓히는데 그들 보다 더 솜씨 좋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선거가 끝난 후 뉴타운 공약이 문제되자 야당은 마치 그것과는 무관한 것처럼 행세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뉴타운과 관련하여 여야의 구별이 없었다. 찍을만한 야당 후보가 없던 강남과는 달리, 강북에 있던 우리 동네에선 현역 의원이 야당 후보로 나왔고 선거전도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선거 직전에 받은 홍보물에서 여당 후보의 공약과 야당 후보의 공약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집 허물고 큰 길을 내겠다는 내용은 같았다. 단지 현역 의원의 선거 공보물이 좀 더 세련되게 보였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야당 후보를 찍을 이유는 없었다. 양쪽이 똑 같은 일을 한다고 나선 마당에 그 일을 잘할 것 같은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자산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시민들이 자산 가치의 상승을 갈망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하고, 다음 세대의 생계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강남에 집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유 역시 그걸 통해서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90년대를 거치면서 정년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은 사라졌다. 정규직의 평균 근무 기간도 10년을 넘지 못한다. 30대에 취업한 사람은 40대 무렵에 회사에서 나와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자영업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이마저도 어렵다. 60세가 넘어 은퇴를 하더라도,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자산(資産)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 집값이 계속 오르는 지역에 집을 가지게 되면, 그걸 통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집값 상승과 뉴타운 개발을 갈망하는 것을 단지 탐욕스럽다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유럽 사회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황금 등의 자산에 집착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제는 모든 시민들이 이렇게 행동할 경우, 사회 전체적으로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에 있다(집에 대한 이 열풍이 사회에 이롭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의가 떨어지고, 높은 수준의 기술을 배우는데 소홀해지게 된다.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근로자로서는 힘들게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몸은 직장에 있지만, 마음은 자신의 자산을 축적하고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 데에 가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숙련 근로자의 수는 계속 감소하고, 그러한 근로자가 필요한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한 이유는 뉴타운 공약 때문이 아니다. 야당에게 뉴타운 공약 외에 다른 정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당의 실수에 기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먹고 사는 문제에 국한한다면, 지난 10년간 여야의 정책과 지향점은 다르지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고, 그로 인한 피해를 누가 입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시민들은 민주주의나 사회 진보보다는 자신의 자산을 축적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야당이 지지를 받기 위해선 시민들의 아픈 경험을 이해하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근로를 통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설혹 자산이 충분치 않더라도 은퇴 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에만, 집값에 관한 현재와 같은 과도한 집착을 없앨 수 있다. 그런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395 | 추천: 2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ㆍ미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정부측 해명을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정부 스스로, 30개월 이상의 소를 수입하는 전제조건이 된 미국의 강화된 사료조치 내용을 오역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100분 토론에서 문제를 제기한 송기호 변호사에게 그가 오히려 사료조치를 오해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던 정부측 실무자의 기백은 온데간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unless’(~가 아니라면)를 ‘even though’(~에도 불구하고)로 오역했다는 것이니 변명할 염치가 없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인터넷 ‘괴담유포자’들은 영어몰입교육의 당위성을 국민에게 설득하기 위한 이명박 정부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ㆍ건강과 직결되는 사안을 다루는 정부 관계자들의 영어실력이 이 정도이니 영어몰입교육을 당장 실시해야 한다는 우려가 생길 만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영어실력과는 관계가 없다. 협상단에 포함된 사람 중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unless’와 ‘even though’를 착각할 사람은 없다. 협상단 멤버들은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송기호 변호사보다 아마도 영어를 더 잘할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었을 뿐이고, 송기호 변호사는 사안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또 송기호 변호사가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국제통상법 문제에 대하여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온 것이 적절한 문제제기의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오역 사건은 영어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전달할 수 있는 콘텐츠를 키워주는 교육임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오른쪽)가 지난 11일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동물성 사료금지조치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오역 사건에서 더 실망스러운 것은 이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이었다. ‘언론친화적’(press friendly)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여러 사건들을 통해 몸소 설명해 주고 있는 이동관 대변인은 오역과 관련해 “본질과는 관련없는 우리측의 실무적인 실수”라고 해명했다. 실무적인 실수라는 것이 무엇일까.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실무(實務)’란 “실제의 업무나 사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대체 정부가 해야 하는 일 중에서 ‘실무’가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기에 이명박 정부는 내각도 ‘실무형 내각’으로 구성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실수라고 인정할 것이지 거기에 왜 ‘실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가.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실무’ 내지 ‘실무자’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내 실수가 아니고 아랫사람이 실수한 것입니다”라는 문맥에서 주로 쓰였다. 최근의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이영희 노동부장관은 내정자 시절 허위경력을 국회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자 실무자의 실수라고 했고, 창조한국당 이한정 비례대표 당선자도 선거공보에 인쇄된 허위경력은 실무자 착오로 기재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춘호 여성부 장관 내정자가 재산을 축소신고한 것도 실무자 실수였다. 실무자가 실수를 저지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왜 윗사람들은 실수한 것이 없고, 실무자들만 늘 일을 저지를까. 그 답은 2008년 OECD 통계연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6년 우리나라의 연간근로시간은 2005년보다 3시간 늘어나 2357시간을 기록했다. OECD 평균 1777시간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렇게 일을 많이 하니 실무자들이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앞으로는 실무자들 탓으로 돌리지 말고 본인 탓을 하는 높은 분들을 많이 보았으면 한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251 | 추천: 0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취임 70여일을 맞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28%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 임기 초에 이처럼 지지율이 떨어진 전례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의 추세를 보건대 지지율의 하락은 앞으로도 더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처럼 떨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0교시와 심야 자율학습으로 대변되는 ‘교육 자율화’ 정책과 광우병 발생 위험이 높은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미국으로부터 뼈 채로 전면 수입키로 한 정책이 민심을 극도로 자극한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의료보험의 민영화를 비롯하여 대운하 추진 등 이명박 정부가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을 계속 펼쳐가려는 모습에서 불안감을 크게 갖고 있었던 터에 교육자율화며 쇠고기 수입 검역주권 포기 등이 불에 기름을 얹은 격이 되었던 것이겠죠. 그런데 이 성난 민심의 표출 한 가운데에 10대 여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정당이나 단체에서 조직하지 않은 촛불시위에 1만 명에서 2만 명이 모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중에 상당수가 여중고생이라는 사실도 더욱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촛불시위 참여를 놓고 여러 집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고 교육 당국에서는 감시요원까지 파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선 10대들이 이처럼 행동의 전면에 나서게까지 이르게 한 어른 입장에서 너무도 부끄러워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의 정책들이 교육이든 먹거리든 자라나는 아이들의 생활과 건강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인데 아이들의 안전이나 건강 등에 대한 고려가 없는 어른들의 정치적 행위 및 정책들이 너무도 한심한 수준이어서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정말 ‘오죽하면 아이들까지 나서겠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시위에서 발언하는 10대들의 이야기는 예상 외로 야무지고 당찹니다. 그들은 절박하고도 당연한 요구를 어른들과 대통령을 향해 합니다. 너무도 쉽게 대통령을 향해 욕을 하며 탄핵을 요구하는 그들을 보며 대한민국도 이제 대통령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지난 대선 때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학교생활이 더 힘들어져서 안 된다고 학교 친구들이 이야기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거짓말 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상식에 기초한 전제도 당연히 깔면서 말이죠. 초등학생들이 장차 겪게 될 교육환경에 대한 불안감을 벌써부터 갖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에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지난 6일 저녁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한 학생이 인터넷 용어 ‘2MB’ 를 이용해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어쨌거나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갖는 아이들은 갈수록 줄어들겠구나 하는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이처럼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을 하는 것을 보며 ‘그런데 대학생들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소위 대학생이 되려면 일정한 경제적 능력이 되는 가정이라야 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이미 상층부이며 정치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겠죠. 대입이라는 관문을 뚫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만 하다 보니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며 또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미처 세상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죠. 더구나 앞으로 본인들의 취업문제에만 골몰하게끔 사회시스템이 만들어 놓았으니 그로부터 옴짝달싹하기 힘든 상황이라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앞으로의 삶의 시간이 지금의 대학생보다는 조금 더 많을 10대들이기에, 그리고 교육환경 및 급식환경이 얼마나 나빠지게 될 것인지를 뼈저리게 몸으로 느낄 그들이기에 본인들의 건강권과 행복추구권을 찾기 위해 구체적 행동으로 나설 수 있게 된 연유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 10대들의 반란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또 앞으로 이들이 유권자가 되었을 때 어떤 투표행태를 보일지가 무척 관심을 끕니다. 본인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이 얼마나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스스로 확인한 마당에 장차 그들이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됩니다. 이들의 등장에서 약 15년 전쯤 서태지의 등장으로 문화적 충격이 생길 무렵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왔던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부제-더 이상 탄원은 없다, 돌파하라)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전복적 상상력을 외치던 그때의 메시지가 약 15년의 세월의 간극을 두고서 갑자기 현실화되어 튀어나왔다는 생각에 약간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물론 지금의 10대 부모가 386세대여서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이들의 정치의식이 이 상태로 발전해 나간다면 20대 투표율이 하향곡선에서 상향하여 V자를 이룰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암울하고 걱정거리가 많은 상황이지만 10대에게서 희망의 싹을 보니 그나마 한 가닥 위안이 됩니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277 | 추천: 0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험설계사로 이직한 분이 있다. 사회복지사들의 박봉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가정에 여러 일이 겹치며 늘어난 가계의 부담을 해결할 길이 없어 고민 끝에 다른 길을 찾은 것이었다.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며 묵묵히 일해 왔던 모범적인 일꾼이었기에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직 이후 그 분을 무엇보다 힘들게 한 것은 보험설계사 교육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가치관이었다.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로 꿈을 잠시 접기는 했지만 인생의 성패를 경제력으로만 설명하려는 것에 꽤나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이 어찌 보험회사 직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성공과 실패만 존재하는 단순한 로또식의 인생, TV만 켜면 나오는 드라마의 진부한 세계관이 아니던가.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국민들이 허망한 욕망의 바벨탑을 쌓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난 4월 9일 총선이라는 한 편의 어이없는 드라마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돈 몇 푼 쥐어주고 표를 구걸하던 소박한(?) 돈 선거는 옛말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표 먼저 주어 당선되면 돈 벌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진보(?)한 뉴타운 공약을 보라.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사람이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가난과 사랑, 그리고 재채기란다. 하나 더하자면 ‘무식’이 아닐까? ‘무식’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지혜의 부족, 철학의 부족을 의미한다. 기술자의 기능, 회계사의 계산능력, 변호사의 법전 암기능력이 탁월하다 해서 지혜롭다 하지 않는다. 단순한 지식을 넘어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철학과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치판단 없이 얻은 평화와 행복은 거짓이다. 젊은이들에게 욕먹을 일이겠지만, 나는 수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보다 우리사회가 좀 더 성숙한 민주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집값이 올라 손에 몇 푼 쥐는 것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넓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굴리는 것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빈민지역에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자활을 지원하는 ‘나눔의 집’이라는 단체가 있다. 최근 그곳에서 20대 실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실무자에게는 성장과정 내내 자신과 비교되었던 사촌형제들이 있는데,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 때마다 곤혹스러웠던 모양이다. 올 해 초 명절에도 친척들은 대학 졸업 뒤 대기업에 취직한 그 사촌형제들을 칭찬하던 끝에 자신에게도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고 한다. 느닷없는 물음이었지만 거침없이 사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은 액수의 연봉을 밝혔고, 어릴 적 내내 자신을 옥죄던 자격지심 같은 것은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었던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지난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에 별 관심이 없다. 정치권의 향방과 무관하게 진보적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소수자들의 신음소리 역시 여전하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며 그 세상을 향해 다른 질서를 외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소중할 뿐이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