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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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정치인과 종교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받든다 하고, 종교인이 하늘의 뜻에 따른다고 하는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국민과 하늘을 앞세우는 듯 한 모습에서 이들은 참 닮았다. 그러면 그 받들고 따르는 ‘내용’은 어떨까? 국민과 하늘이란 서로 다른 개념일 듯싶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전 국민이 정치 평론가인 마당에 나라고 정치 현실 판단에 한 몫 끼지 못할 이유도 없겠거니와, 나름 종교 전문가이기도 한 내 눈으로 보건대, 국민과 하늘의 그 실질적 내용이 정말 다른지는 크게 의심스럽다. 국민의 뜻과 하늘의 뜻 운운하는 언어는 외견상 다르지만, 정말로 받들고 따르는 것은 사실상 자기의 ‘욕망’일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받든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그 이름을 ‘팔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가 많다면 그것은 억측일까. 행여 ‘욕망’이라는 원초적인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저 자신의 뜻이라고 해도 좋다. 국민/하늘의 뜻이라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자신의 뜻일 때가 태반이다. 흔히 자신의 뜻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뜻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 아닌 것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자신을 자신되게 해준 존재론적인 근거, 정치와 종교의 용어로 하면, 국민과 하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아닐 것이고, 모든 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도 아닐 터이다. 그러나 비록 의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뜻과 하늘의 뜻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받들어져야 할 국민이 이렇게 바닥까지 무시될 수가 있겠고, 다 같이 하늘의 뜻을 따른다면서 종교인들의 아집과 종교간 갈등이 어찌 이리 끝없을 수 있겠는가.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 개정 강행처리 시도에 반발해 파업을 계속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6일 저녁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저지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에서 언론관계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 자기의 뜻과 국민/하늘의 뜻은 구별될 수 있을까. 있다.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인지, 하늘의 이름을 ‘파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과 증거가 있다. 정말 국민의 뜻을 받들려면, 정말 하늘의 뜻을 받들려면, 그렇게 받드는 주체의 뜻은 스스로 발아래 내려놓고, 욕망은 깨끗이 비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놓고 비워진다면, 실제로 손해가 올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설령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기꺼이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국민/하늘의 뜻을 받든다면서, 그 실제 목적과 결과가 자기 이익의 확대 쪽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분명 욕망의 증거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던 권력이 주어질 수도 있고, 뜻밖에 재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의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받든다면서 결국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고, 하늘의 뜻에 따른다면서도 무언가 금력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국민/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듯 분명한 사실이자 원리이다. 물론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실제로 받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국민은 극히 일부이거나, 자신의 뜻/욕망을 정당화하도록 자의적으로 해석된 국민이다. 당연히 국민 전체가 아니다. 종교인이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지만, 그 때의 하늘 역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도록 투사된 하늘일 때가 많다. 하늘 자체가 아닌, 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된 하늘인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맞음직한 일부 국민의 뜻을 전체 국민의 뜻이 되도록 조작하기 위해 정치인이 손대고 싶어 하는 분야가 언론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욕망을 하늘의 뜻이라며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인은 자신의 욕망에 어울리는 경전의 구절을 본래 맥락과 관계없이 뽑아 내세운다. 경전에 그렇게 써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자신 안에 가두고, 결국은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런 식으로 국민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고, 하늘의 이름으로 전쟁까지 벌인다. 이러한 엄청난 착각도 오래 습관이 되다보니, 양심의 가책도 받지 못한다. 가책을 받을 양심조차 실종되었달까, 아니면 두터운 무지로 인해 전혀 볼 수 없게 된 것이랄까. 물론 모든 정치인과 종교인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람과 하늘을 받드는 이들도 도처에 많겠기 때문이다. 세계적 추세 운운하며 이른바 코드가 맞는 거대 미디어 재벌을 탄생시켜서 결국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 및 확대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의 추태, 하늘의 이름으로 이웃을 정죄하고 저주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자리에 오르려는 종교인들의 교만을 곳곳에서 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08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시 교육청 앞 농성장에서 열리는 촛불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유난히도 추운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7명의 부당 해고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모인 선생님들이 냉랭한 바람과 창백해 보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집회하는 모습이 다소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 동안 온기를 제공했던 가스난로에서 정겨운 나무 난로로 바뀌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해고자가 떨고 있는 동지를 난로 가까이에 밀어 넣으면서 촛불을 드느라 언 손을 녹이라고 권합니다. 앞에서 발언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해 지면서 내 머릿속에는 10년도 더 된 지난 과거의 일이 떠오릅니다. 나의 아득했던 해직 시절이. 그 때도 지금의 해고된 선생님들처럼 추운 겨울에 아이들과 헤어졌습니다. 6학년이 아닌 1학년 아이들과. 행여 학년 마무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에 이사장집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현실을 깨닫고 절망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울부짖던 총각선생님의 눈물과 절규! 해마다 내게 주어졌던 아이들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청천벽력 같던 느낌! 세상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충격! 횡령을 한 사람보다 그것을 폭로한 사람에게 더한 징벌을 가하는 이 사회의 비상식적 잣대가 10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에 대하여 절망감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한 젊은 해직 선생님의 반 아이들이 촛불집회에 각자의 엄마와 함께 왔더군요. 그 또랑또랑한 눈망울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부릴 수 있는 철없음이나 치기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못된 일이고 그래서 부르짖었음을 당연히 여기는 당당한 눈빛이었습니다.       해직된 정상용 교사의 서울 구산초등학교 6학년 8반 학생들이 지난 22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상용 교사 (윗줄 중앙)와 역시 해직된 최혜원 교사(아랫줄 오른쪽)와 함께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토사구팽! 현 서울시 교육감이 두려워할만한 사자성어입니다. 지속적으로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분노를 자아내게도 하지만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판단이 가능한 일들을 너무나도 대담하게 비상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는 썩소(썩은 미소를 줄인 말로 비웃는 듯 한 미소를 뜻함)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그들의 운명이 보입니다. 선거를 치른 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승리감에 젖은 오만한 태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삶의 과정 속에 있으므로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하더라도 늘 지나치면 문제가 되더군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깨달음을 주지만 지금의 정부는 일장춘몽과 같은 이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 이 정부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사회는 변화해야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흘러가야 하는 지향점을 향해 도도하면서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요. 생뚱맞을지 몰라도 '진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또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 속에서도 이 사회는 진보되어야하고 진보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무부 홈피에 올라온 임수빈 검사를 응원하는 댓글들이나 엄마와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결연한 눈빛에서 그들은 알아야합니다. 와야 할 미래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온다는 것을요! 아무리 급속 후진을 하고 장기 집권을 위한 포석을 여기저기 깔아놓아도 그 방향성을 되돌릴 수 없음을 그들은 깨달아야합니다. 당신들은 과거를 살고 있지만, 아이들은 미래를 살고 있고 우리 모두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는 것을요. 2008년의 마지막 날에 타종으로써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에서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촛불을 저마다의 손에 들고서. 그래서 누구나 한 살 더 먹어야하는 12월의 마지막 밤 북악의 누군가는 어느 때보다 두려운 새해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음을 지금의 이 정부만 제외하고 모두 다 알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게 하는 촛불을 무서워하는 코미디 같은 현실이 마음 아프지만 한 번 더 힘주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워 눈앞을 볼 수 없어도 수사자처럼 무서워 날카로운 발톱을 고추 세워도 그 밤이 지나면 새벽은 오고, 새날이 밝아 오는 것임을요!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93 | 추천: 0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단지 전체가 종부세 부과대상인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채가 평균 10억 원 이상은 되니 아파트 1동은 1,000억 원, 단지 전체로 보면 1조가 훌쩍 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관리비 경감을 위해 경비 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대신 현관에 카드 인식키를 설치하기로 했다. 카드 인식키 설치 공사를 지켜보는 경비 아저씨들의 모습은 처량했다. 공사가 끝난 후 경비아저씨들 절반이 사라졌다. 주로 평소에 불친절하다고 찍힌 분들이었다. 기존 경비원 감축으로 이 아파트 주민들은 얼마나 이득을 보았을까. 이 아파트는 원래 아파트 두 라인 당 한 명의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 라인이면 총 60세대니까 세대당 한 달에 만 몇 천원 남짓 경비원 급여를 분담해 왔을 것이다. 그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니 한 달에 6~7천 원 정도 비용이 줄어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가 1조가 넘는 단지 주민들이 매월 6~7천 원 정도를 아끼기 위해 여러 가장들의 생업을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개별경제주체가 합리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사회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경비원 감축은 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매달 받아보는 관리비 영수증에는 줄어든 액수만 기재되어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을 것이다.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만이 문제가 아니다. 실업은 소비감소를 가져오고 소비감소는 경기침체를 경기침체는 자산가격하락을 수반한다. 조금 과장일 수 있겠지만 아파트에서 경비원을 줄인 행동이 연쇄과정을 거쳐 그 아파트의 가격하락을 가져온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경비원 감축은 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정말 걱정되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한 경비원감축 같은 일을 계속 벌이는 것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최근 60세 이상에 대하여는 최저임금을 낮추고 최저임금 이하를 지급할 수 있는 수습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방안으로 최저임금법을 개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저임금 이하로도 일하겠다고 하는 노령인구가 최저임금법 때문에 제대로 고용될 수 없기 때문에 고용확대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경비원감축 문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저임금수준을 낮추더라도 노인층 고용이 확대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현재 고용되어 있는 60세 이상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역할을 할 공산이 크다. 루즈벨트 대통령 따라 하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정책을 펼쳐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뉴딜정책의 근간을 이룬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의 핵심조항 중 하나가 노동3권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뉴딜을 대규모 토목공사로만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경제위기의 폭과 깊이를 더 넓고 깊게 만들고 말 것이다.   정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77 | 추천: 0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드디어 이마트를 비롯한 전국의 대형 마트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민들의 불안감 및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판매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위험에 둔감한 사람들과 싼 가격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게 구매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식탁을 넘보게 될 미국산 쇠고기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가끔 장례식장에 문상 갈 때면 어떤 국이 나오는 지를 따져보고 먹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앞으로는 식당 뿐 아니라 남의 집에 초대될 때도 식탁 메뉴를 잘 살펴보아야 하게 생겼고 아이들이 친구 집에 놀러갈 때를 대비해 더욱 단도리해야 하게 생겼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처럼 ‘안 먹으면 그만’인 권리만큼은 확실히 지키고 싶다. 대형마트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11월 27일 오후 서울 이마트용산점에서 시민들이 수입육 코너에 진열된 미국산 쇠고기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나 위탁 급식으로 운영되는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군대에서 복무하는 군인들, 그리고 숱한 대형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많은 근로자를 비롯한 국민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과 이명박 대통령의 치욕스러운 조공외교의 문제를 떠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쇠고기 중 20개월 이내의, 믿을 만한 도축장 산 쇠고기가 프리미엄 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에서 근무하는 주한미군들도 20개월 이내의 쇠고기만을 먹는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과연 인간들의 탐욕과 오만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아연했다. 김성이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금까지 30개월이 안 된 소를 먹는 줄 몰랐다"며 "사람들이 너무 잔인해진 것 같다. 소도 엄연한 생명체인데 10년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무지한 발언이 오히려 인간적이기까지 한, 웃지 못 할 현실이다. 소에게 20개월이라면 사람으로 치면 한창 십대의 나이이다. 30개월이라고 해 봐야 20 전후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육우농장에는 사람으로 치면 삶의 지혜와 도리를 가르칠 경륜 있는 어른 소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온통 십대와 20도 되기 전의 혈기 넘치는 젊은 소들이 사람들의 식량이 되기 위해 사육되다가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소도, 짐승도 어엿한 생명체이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가축 사료를 먹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자연이 부여한 수명에서도 아주 짧은 생만 살아야 하는 소가 미국에서만 연간 수천 만 마리나 된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인가 말이다. 제안컨대 광우병이니 뭐니 할 것 없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미국산 쇠고기를, 아니 국내 유통시스템도 믿을 게 못 되고 또한 한우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니 아예 이 기회에 쇠고기 소비를 중단하는 것이 그나마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처신이 아닐까 한다. 촛불의 진정한 승리는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국가 권력 및 정책에 대하여 보이콧운동으로 확산되어야 가능하리라 믿는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48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7년 9월부터 약 200일 동안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 측에 정규직으로 자신의 지위를 승격시켜줄 것을 요구하며 여의도에 있는 회사건물 근처에서 농성시위를 벌였다. 자기들 자리가 아웃소싱 직원들로 대체되는 것에 항의하는 농성이었다. 결국 정부는 코스콤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장기 농성장인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앞 천막을 철거함으로써 명백한 노동반대 행위만을 보여주었고, 농성을 벌인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랜드 노조원들은 모두 불법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벌금부과를 받았다.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대기업 노조와 정규직 직원들의 침묵이었다. 겨우 체면치레의 말이 조금 오가고, 몇몇 인권단체들의 피켓동조가 있었을 뿐,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이들의 아픔에 동참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기업 노조들은 자기들의 임금 인상과 혜택 증가에 목을 맨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종종 자기 회사가 가진 취약한 소유권 구조와, 소규모 납품업체 및 그들 회사의 직원들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경영진의 운영방법을 간과하는 것 같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노조 지도자들은 자기 회사의 고용 시스템을 조종하기 위해 종종 경영진과 결탁하여 불법 자금을 챙겨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 대기업체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를 받고 있으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개 보험혜택도 없고 적절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지방 신문 사설에서는 이를 대기업 노조들과 경영진간에 일종의 은밀한 결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이들은 모두 경제 부담을 중소기업 특히 국가 초대형 산업체에 납품하는 회사들의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시스템을 창출해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소규모 회사 노동자들의 희생 결과 대기업의 노사관계가 안정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소규모 납품업체의 불만은, 자기 회사의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올려줄 경우 납품 받는 대기업 측에서 자기들이 추가이윤을 남겼거나 납품 물건의 가격이 인하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부유층의 수는 늘어나는 반면 중산층의 수는 줄어드는 요인일까? 이 현상이 중산층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무금융연맹과 코스콤비정규지부가 코스콤의 성실 교섭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2007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총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8.2%에 불과하다. 또한 주요 회사들에 납품하는 업체들의 직원 평균 임금은 그들 의뢰업체의 정규직 직원들의 60%에 불과하다. 정부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미국 및 유럽의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비율과 비교해볼 때 그 수가 높은 문제에 대해 노동정책에서 거론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한국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아니며, 그들 중 적어도 4분의 1은 저임금을 받고 있다. 또한 정부는 기업 친화적이 되길 원하지만 외국 자본가들을 몰아내는 경향이 있는 노조의 호전성 및 노사 간의 부정직성과 불투명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08년 초기에는 한국 노동 인구의 10%만이 노조에 가입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 귀족”이라 부르는 행위 뿐 아니라 노조 세력의 호전성과 일부 대기업 노조의 정치적 동기를 띤 노동쟁의는 노동계에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스스로 약자라 생각하는 ‘노동 귀족’들이 실질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업체, 소규모 납품업체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이중으로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구조들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불공평한 상태로 인해 고용주들과 직원들 그리고 직원들과 직원들 간에 갭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랜드와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정치적 또는 이념적 동기를 띤 파업으로 보고 완력을 사용하여 해체시키는 정부의 행동은 공정하지 못해 보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생계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동자는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이제는 대기업노조들이 소규모 납품업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을 보태주고,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감싸 안는 배려와 연대가 필요하다. 노동자 스스로 차별과 배제 없이 함께 하는 노동구조를 이루어 내야 한다. 꿈일까?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이기에.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17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89년 동구, 91년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미국 중심의 새로운 신자유주의 세계자본주의로의 질서 재편은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종국적 승리로 보였다. 좌파들은 비관적이었고 우파들은 찬연한 자유주의를 설파하였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사라지는 자유 시장을 향한 맹신은 거침이 없었다. 정부의 공공적 역할은 축소되거나 무시되었다. 낙관보다는 비관이, 확신보다는 회의가, 참여보다는 냉소가 지배하는 사상적 전환기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역사변증법은 현실에서 설 자리를 잃고 쇠퇴를 거듭하였다. 97년 IMF 긴급구제금융사태를 맞아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 금융시장의 완전개방과 노동의 유연화(정리해고,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실시하였다.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 벼랑 끝 위기에서 건져 올린 기업과 은행의 경영권은 재벌로 불리는 국내자본이 그대로 유지하거나 외국자본이 독차지하였다. 실업과 비정규직화의 고통은 경제 위기를 헤쳐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더 나은 자본주의 미래를 위해 서민들이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재수 없는 불행으로 치부되었다. 금을 모아 국난의 위기를 넘긴 그 자리에는 지구촌 무한경쟁으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의 일상이 똬리를 틀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긴 바로 그곳에서 국내외 글로벌 자본은 살판이 났고 경쟁과 효율을 추구한다는 구조조정의 미명 아래 노동자 민중의 일상에는 바람 잘 날 없고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생존의 위기가 불어 닥쳤다. 서민경제의 불황과 고통은 커져만 가고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은 세습이 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불황을 탈출하는 희망의 대안으로 소위 신자유주의 좌파 대통령은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 FTA)을 적극 추진해 나섰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대통령을 좌파로 여기는 소위 경제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신자유주의 좌파 대통령의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거의 대부분의 역량을 바쳐온 와중에도 유독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서는 좌파 대통령의 설거지 역할을 자임하며 부자 감세, 공기업의 민영화, 교육의료주택의 시장화 등 공공복리를 축소하고 이를 대체하는 자유 시장 정책을 맹렬히 밀고 나가고 있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는 지난 12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사당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 FTA가 제2의 IMF를 불러올 것'이라며 국회 비준동의안 처리 움직임을 규탄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유행어를 날리는 소위 신자유주의 좌파 대통령, 경제대통령을 연이어 계속 뽑았기에 지금의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과 혼돈의 신자유주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벼랑 끝 위기에 직면하여 서민들은 더 이상은 재수 없는 불행을 맞딱드리거나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고 무탈하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실패를 예정하지 않은 채 파멸의 끝을 드러내지 않았던 신자유주의가 드디어 몰락의 길을 재촉해 나가고 있다. 193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 이후, 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직면한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의 실상을 근본적으로 직시하고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해결해 주는 경제적 대안을 실천하는 나침반이 절실히 요청되어지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 있다. 신자유주의의 낡은 이념과 정책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장벽을 넘어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에 맞는 사상과 정책을 가져올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세상을 움직여 나가야 한다. 전 세계 노동자 민중들이 혼돈과 불행에서 벗어나 자본의 운세보다는 노동의 운세가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민중이 불확실한 위기의 전환기를 맞아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인문사회과학의 전통을 대중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97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예상대로 오바마의 압승으로 끝났다. 오바마의 승리 이후 그에 관해 쏟아지는 환호와 관심은 역대 대통령 선거 당선자 그 누구보다도 폭발적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데다 심각한 경제 위기를 벗어날 계기를 바라는 심리가 크고 무엇보다도 워낙 깽판을 쳐 놓은 전임자 부시에 대한 환멸이 새 시대에 대한 기대를 그만큼 더 크게 한 탓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비교적 일찍부터 예상되던 바다. 변화를 바라는 미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마음도 있었고 심각한 경제 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그의 승리를 일찌감치 예감했던 것은 그에 대해 압도적으로 쏠린 이른바 엔도스먼트(endorsement)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선거에서 언론인, 연예인, 지식인 등 유명 인사들이 특정 후보에 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이 많은데 이를 엔도스먼트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오바마에 대한 유명 인사들의 지지는 매케인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특히 헐리우드의 유명 연예인 다수가 오바마를 적극 지지한 바 있다. 원래 헐리우드가 친 민주당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이번 만큼 그 강도가 컸던 적은 없다. 조지 클루니, 스티븐 스필버그, 우디 앨런, 오프라 윈프리, 스칼렛 요한슨, 톰 행크스, 로버트 드 니로, 숀 펜, 브래드 피트, 멧 데이먼 등 오바마 지지 스타들의 면면은 현재 헐리우드 메인스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에 비해 매케인 지지 스타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실베스타 스탤론, 로버트 듀발, 존 보이트 등이 거론되는데 그 무게감도 그렇거니와 일단 노쇠한 느낌이 역력해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대중매체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인들은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고 역할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의견은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미국에서는 인기 있는 대중 스타들이 선거나 전쟁, 인종 문제 같은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해 온 전통이 매우 뿌리 깊다. 스타들의 사회정치적 활동들은 대중들 마음을 움직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스타들 자신이 단지 가벼운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지성을 가진 존재임을 부각시켜 스스로 이미지를 높이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물론 미국에서 그런 전통이 뿌리내릴 수 있던 데에는 정치적 발언과 행동이 어떤 보복이나 불이익을 낳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몇 년 전 이라크 전 당시 전쟁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일부 스타들이 이런저런 보복과 불이익을 당했던 사례가 있으니 그런 경우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한국 사회에서도 연예 스타 등 유명인들이 선거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런 저런 정치적 발언을 하기도 하고 사회 활동에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민주화가 낳은 새로운 풍속도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하긴 그 때도 이런 저런 사회 활동 속에 스타들이 등장하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던 반공 궐기 대회니 국산품 애용이니 숱한 관제 캠페인에는 으레 눈에 익은 연예인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연예인들은 ‘참여’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동원’되었을 뿐이다. 연예인이 그저 ‘동원’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지성과 영혼을 가진 지식인일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대중가요 검열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가수 정태춘 이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후 분명한 자기 주관으로 사회적 발언을 내놓거나 촛불 집회 같은 데 적극 참여하거나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연예인들을 자주 보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KBS 사장을 필두로 이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줄줄이 쫓겨나고 있다. 온갖 압력 수단을 동원해 자진 사퇴를 강요하고 그 말을 듣지 않으면 갖가지 무리수를 동원해 결국 쫓아내고 마는 일이 되풀이 되더니 최근에는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도 결국 쫓아내고 말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이른바 코드 인사를 그토록 비난해마지 않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오래 동안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을 졸지에 그만두게 된 가수 윤도현이나 방송인 정관용씨와 같은 경우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방송을 그만두게 된 것에 어떤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윤도현이 평소 촛불 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적 발언에 적극적인 연예인이었고(게다가 2002년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를 공개 지지했던 전력이 있고) 정관용 역시 현 정부에 비판적인 인터넷 언론의 이사를 맡고 있는 등 진보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면 인기 스타 등 유명인들의 사회적 발언과 참여가 크게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자리에서 잘리고 프로그램을 뺏기는 등 보복이 빤히 눈에 보이는 길을 쉽게 갈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방송사측의 변명을 들으며, 그래, 설마 그 정도로 치졸하지는 않겠지 싶다가도 이 정부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그런 변명이 곧이들리지 않으니 어쩌란 말인가. 보수적인 거야 그런가보다 참아주겠지만 치졸한 건 정말 참아주기 힘들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75 | 추천: 0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속초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익숙한 미시령 고개 대신 빠른 속도로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편리함 보다 비록 차를 이용해서나마 정상에 올라 잠시 휴게소에 머물며 동해를 내려다보는 감개나 곧게 뻗은 도로에 묻혀버린 구불구불 백담계곡 맑은 물과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이 눈에 밟혔다. 결국 일정에 없던 백담사 방문을 위해 곁길로 빠져나왔다. 십 수년만이었다. 전두환이 이곳에 머문 이후로는 발길조차 주기 싫었던 것이다. 계곡 입구에서 백담사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1990년대 초부터 이곳을 찾는 손님이 많아 마련된 것이라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 중에서도 깊은 오지여서 웬만해선 접근조차 어려웠던 곳이다. 1990년대 초부터 손님이 늘었다니 전두환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흐를 만큼 흘렀기 때문인지 그 사실보다는 한 시간 이상 힘든 발걸음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답던 계곡을 깎아 길을 낸 것과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태가 먼저 안타까웠다. 일행을 뒤쫓다 보니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정면의 대웅전이 아니라 오른편의 ‘만해(萬海)기념관’을 먼저 들르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출가와 수행, 3·1운동과 옥중투쟁, 계몽활동, 문학 활동, 신간회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한눈에 만해의 일생을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고뇌에 찬 만해의 초상 앞에 선 순간 앞 관람객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 만해의 모습이 전두환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꾸짖고 말았는데, 주변에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팬들이 많으니 말조심하라는 그들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전(前) 대통령’이라니. 이미 군사반란 및 내란죄가 확정되어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른 예우도 정지된 상태일 뿐 아니라 수천여 명의 국민을 살해한 학살자가 아니던가. 애써 점정을 억누르고 밖으로 나왔다. 깊은 산 숨은 골짝 사찰 한 모퉁이에서 만나는 만해(萬海)와 일해(日海) 전두환,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대비가 아닌가.     사진 출처 - 백담사 홈페이지   복잡한 심경도 잠시 또다시 일행에 이끌려 백담사의 중심불전인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향했다. 실수였다. 아니 예기치 못했다. 극락보전 왼쪽에 자리한 화엄실(華嚴室)의 방 한 칸 문 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곳입니다’라는 글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화엄실은 만해가 ‘님의 침묵’을 집필한 장소이기도 하다. 화엄이란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닦아서 덕과(德果)를 장엄(莊嚴)하게 한다는 뜻이다. 어찌 ‘화엄실’이라는 현판 밑에 ‘전두환’이라는 살인마의 이름을 붙여놓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 많다던 팬들인지 만해기념관보다 화엄실 앞에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인가 전시해놓은 듯했지만 도저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발길을 돌려 나와 버렸다. 황망히 돌아 나오다 들어갈 때는 무심코 건넜으나 오래된 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길고 깔끔한 돌다리가 눈에 띄여 들여다보니 ‘수심교(修心橋)’라 이름 붙여져 있었다. 일행의 설명으로는 전두환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지어져 그가 이름 짓고 쓴 것이라 한다. 극락보전의 현판 역시 전두환이 쓴 것이었단다. 이곳에서 전두환은 여전했던 것이다. 아무런 원망이나 울분의 시선 없이 그를 단지 ‘전직 대통령’으로 보고 있는 현실 앞에 그저 나는 부끄러울 뿐이었다. 한 친구가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도인처럼 들먹이며 날 위로하려 들었다. 모든 현상계가 본질적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감소하는 일도, 증가하는 일도 없다는 뜻을 가진 심오한 구절을 읊으면서 말이다. 종교인으로서 수양이 덜 된 탓인지 오히려 애꿎은 그 친구에게 분풀이를 해대고 말았다. 20여 년간이나 일부러 찾지 않았던 산사를 생각 없이 들어 제 탓이나 할 일이었는데 말이다. 사진 출처 - 백담사 홈페이지   추한 역사는 잊는 순간 되풀이된다고 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기억함으로써 절대 어리석게 강도당하는 역사만큼은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분에 겨운 내 마음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돌아오는 길 내내 이어진 산과 계곡, 북한강 물줄기는 여전히 아름답고 시원했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57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경제성장 7%에 4만 불의 국민소득, 7대 선진강국을 만들어 주신다는 007작전 아닌 거룩한 747 약속에 니나 네나 앞 다퉈 도장 찍어 훌륭한 대장을 뽑았으니 그 얼마나 축복이여. 풍악을 울려라! 고렇게 손가락 걸고 대장 취임 몇 개월 만에 후다닥 올림픽 7개 강국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어찌야 쓴데. 고것이 하나님 거룩한 은혜가 아니것어. 얼쑤! 대장 눈은 단추구멍처럼 작지만, 두 눈 부릅뜨고 온 국민을 상전으로 받들어 모신다고 하나님 앞에 굳은 맹세를 혔으니, 그 어찌 복 많은 국민이 아니더냐. 좋다. 풍악을 울려라! 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의 대장 준비팀을 누가 ‘고소영’이라고 하더냐. 그들은 국민 아닌겨? 강남의 부동산 부자 내각, ‘강부자’ 내각이라꼬. 너희들 왜 그렇게 대장을 못믿는겨?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 얼쑤! 우리가 살아갈 길은 우리의 맹방이요 혈맹인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것어? 친구끼리는 서로 손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것어? 맞어 백번 맞는 말이제. 친구가 어려운디 미친 소 쬐께 수입한다고 뭐시 문제여? 미친 소 먹고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난리는 그 난리여? 맞당께. 친구가 잘돼야 나도 자∼알 되지. 자∼아 풍악을 울려라! 허--허 그려도 그렇게 촛불 앞에 몰려드니 ㅉㅉ. 근게 속도 몰라주니 야속하당께. 아무리 묵어도 배탈 안 난당께. 그려도 힘이 부칠 때는 뒤로 한발 물러서는 것이 일보 전진을 위한 후퇴 전술 아니것어. 뒷동산에 올라서 눈물도 쫴끔 흘리고, 잘못했응께 용서해 주시라우 빌어 보면---. 얼쑤! 우리 대장이 두 번씩이나 잘못도 없이 잘못했다고 했는디, 그래도 멍∼야박하게 구는 놈은 정말로 인정머리도 없고, 의리도 없는 놈 아니여?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거여. 화끈하게 용서하고 새롭게 출발하장깽. 좋지. 조∼아. 풍악을 다시 한 번 울려라! 그려도 의리 없이 배후에서 욕지거리하고 촛불 민심 운운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지라우. 여기가 어디라고 산성을 넘으려고 혀. 애들을 인질 삼고 촛불을 들고 나와.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애나 보지. 법대로 히야지. 그려 법대로 하는 거여. 얼쑤! 갱제를 살리려면 돈 많은 사람들 도움이 필요하지. 안그려. 돈 많은 사람이 돈을 꽁꽁 숨기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이 어쩨 돈을 벌것어. 그렁께 걔들이 쫴가 잘못혔어도 봐주장께. 사면해주면 될 거 아녀. 그려∼그려. 다 같이 시작하지 뭐. 풍악을 한번 울려봐! 어메, 오메. 돈 많은 사람 돈 쓰게 할려면 세금도 파박 깍아줘 버려야 하지 않것어. 요새 그들도 세금 내느라 호주머니에 돈이 말라부럿어. 모든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것인디 세금 좀 깎아주는 것이 뭐 대수것어. 그런 거시여. 법 고치는 것---그러라고 찍어 주엇잔어. ♬♬♬ 얼쑤!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오전 과천정부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하이고메, 친구 집에 불나 부럿어, 친구 집이 불타면 우리 집도 온전허지 못혀. 친구가 아파불면 우리도 죽는 수가 생긴당께. 어찌 해부러야 되것어. 친구랑 같이 살 방도를 찾아야 쓰것당께. s-S-스와프 통화협정 그려 그거면 돼. 아이꾸 살았네. 학실하게 이제 풍악을 울려라! 보랑께 내 뭐라코 했노. 친구가 우릴 도와주잖아! 겁나게 애섰제. 지금이야 말로 주식 투자할 때여. 주식을 투자허라고 대장이 말했당게. 그런디 왜 그런디야. 널뛰기 주식을 알 수 없구먼. 대장이 주식 사라고 하였는디. 뭐가 잘못된거여. 허∼ 친구 집에 불나서 그런당께. 대장 말을 믿어야지. 그려. 그럼 나도 빚내서 주식 한번 사볼까. 주식을 사자꾸나. $∼$ 얼쑤! 바다 건너 친구 집에 불났는디 왜 건축하는 작자들은 저렇게 비틀거리것이여. 끄응 그들도 우리 친구 아니여. 친구는 구해줘야지. 친구 어려운디 모른 척 하는 놈은 진짜 망할 놈이여. 안그려? 그려 맞어∼맞어. 죽을 때 까지 의리를 지켜 보자꾸. 진짜 풍악을 한번 울려봐! 돈을 확 풀어보지 뭐. 돈이란 것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거 아니것어. 내가 묵는 돈도 아닌디. 힘든 친구를 위하여 돈 좀 펑∼팡 한번 써불자. 낸 영원한 의리파로 남것제? 하따 우리 대장은 정말 모르는 것도 없어 부리네. 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 학실하당께. ♨♨♨ 얼∼쑤!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36 | 추천: 0
("일제고死= 일제히 고통스럽게 죽임" (프레시안 기사 내용에서 인용))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에 일제고사가 전국에서 치러졌다. 일제고사는 학업성취 수준 및 변화 추이를 분석하고, 학력격차를 해소하여 학교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업성취도 점수가 공개되어 전국의 학교 성적이 서열화 되고 학교 간 학력 경쟁으로 학교와 학생은 줄 세우기 경쟁으로 내몰리고, 교육과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돼, 사교육비 폭증 등 시행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일제고사가 치러진 지난 14일 서울시교육청 앞에서는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 인터넷카페 모임인 '무한경쟁·일제고사 반대 청소년 모임 Say, No'가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좀 놀자!”며 등교 거부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일제고사 시행은 청소년을 공부하는 기계와 성적의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또한 이날 시험을 치룬 강남의 한 중학교 3학년 학생 수십 명이 일제고사에 반발해 집단으로 백지 답안을 낸 일도 있었다. 내가 있는 학교의 학생들도 “중간고사가 며칠 전 끝났는데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아 또 시험을 보고 또 보름 있다가 기말고사를 보는 게 말이 되냐”며 대다수의 학생들이 10분 안에 답을 적고 잤다고 했다. 이처럼 일제고사에 반발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아이들의 외침에서 일제고사를 막아내지 못한 교사로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정말로 이렇게 우리의 아이들을 일제히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인가!! 일제고사가 진정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분노와 창피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전국적으로 일제고사가 치러진 지난 14일 오전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이 등교와 시험을 거부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모든 학생에게 시험을 보게 해서 학습 부진학생을 최소화하고 학력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것이 일제고사의 목적이지만, 일제고사 결과 후에 나타날 학습부진학생을 위한 대책이 며 지역별, 계층별 교육격차 해소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교육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경쟁 만능의 시험지옥으로 아이들을 내몰게 될 일제고사를 중단하고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중학교 2학년 학생들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별별이야기(2005)”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6편의 애니메이션을 옴니버스 형태로 구성하여 ‘차별’이라는 주제를 유쾌하게 풍자하였다. 그중에 하나인 “사람이 되어라”(학생들은 대학을 가기 전에는 모두 동물이었다가 대학을 가면 비로소 사람이 된다)라는 단편을 보고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난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다. 체육, 음악, 미술을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상상력이 풍부하다거나,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다. 난 나중에 내가 뭐가 될지도 불확실하고, 그냥 대학만 가는 것도 아니고 알아주는 명문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솔직히 좀 무서울 때도 있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키워주고 소외되지 않게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교육을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최근 많은 교사들이 느끼는 학교교육의 궁극적인 귀결점은 일류대학의 입학이다. 대학 입시로 인한 학력 경쟁이 우리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이로 인해 학부모 등쌀에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새벽까지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많이 외우고 문제풀이에 달인이 되어야 결국 점수 경쟁에서 이기고 일류대학이 보장되고 학벌사회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교육이 희망이 되려면, 성적 서열로 줄을 세우는 학벌교육이 아니라 창의적 재능을 일깨우는 교육이어야 한다. 교사로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아이들을 먼저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4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