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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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 마당은 쓸지언정 동네 골목길은 쓸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골목길의 쓰레기가 금방 자기 집 대문 앞도 더럽힐 게 자명한데도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이 근시안과 이기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 자기 딸의 안전을 위해 정거장까지 마중을 나가는 부모가 성폭력의 방지와 예방을 위해 운동하는 단체에는 냉담하다. 자신의 딸과 아내, 여동생을 위해 평생 그렇게 따라다니며 보호해 줄 작정인가.” 시민운동은 어떤가? “회원이 없고 회비가 없는데 시민단체가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하다. 그러다가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목소리를 높여 비판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슬을 먹고 살란 말인가.”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성금을 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들에게 성명을 내고 문을 닫는 이런 상상은 어떤가. “국민여러분, 저희들은 최선을 다해 이 땅에 부패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힘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침묵과 무관심에 저희들은 절망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문을 닫습니다. 국민여러분,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박원순,『한국의 시민운동--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중에서). 위의 글에 깊이 공감하면서 필자는 수많은 무심한 국민들, 수많은 무임 승차자들, 인권운동을 자기의 이상한 잣대로 재단하는 많은 이들,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고,  ‘그만 문 닫는 일’이 현실이 되면 어쩔 것인가라는 걱정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사회엔 공동체에 대해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울 지역 초등학생의 절반 가까이가 시력이 나쁘고 또 요즘은 책걸상의 높이가 안 맞아 자세가 나빠지면서 걸리게 되는 척추측만증이 많다고 한다. 자기 아이의 시력이상, 척추 이상엔 관심을 가져도 전교생 대상의 척추검사를 교장선생님께 건의하거나 교실의 조명도가 적절한지 테스트를 의뢰하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권이 무엇이며, 인권운동이 왜 필요한지라도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인권운동에 대해 그들이 갖다 대는 잣대는 어떤 것일까? 옛날 그리스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는 밤길을 지나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잠자리를 제공했는데, 그 딱딱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쇠 침대에 나그네를 강제로 묶어놓고는 몸길이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길이를 늘여서 죽였고, 몸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그 긴만큼을 잘라 죽였다한다. 그 침대와 몸길이가 똑같은 사람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다. 인권운동의 경우, 그것은 ‘좌파’들이나 하는 것, 반정부 세력들이나 하던 것, 또는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그리고, 매년 장애인주일 미사 때에 성당에 특별헌금 내는 것은 신자들이 할 몫이고 장애인이동권연대에 후원금을 내는 것은 신자 아닌 일반 시민들의 몫이라는 생각 등은 어떤 잣대에서 나올까? 과거 독재시대에 비해 현재 인권상황이 훨씬 나아지게 된 이유조차 인권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혹은 “으쌰! 으쌰! 좀 그만들 하라!”면서, 인권운동이 지금도 꼭 필요한 것이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권운동가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일하면서도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 민생고 문제 때문에 일을 그만 두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긴다. 인권운동가는 어쩔 수 없이 혹은 기쁘게 ‘이슬’을 먹고 살더라도, 그 가족까지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무심이 절망적인 수준이라면, 이제, 그만 문을 닫아버리면 어떨까?   가시 돋친 줄기 위로 피어나는 장미  1987년 6월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 내의 인권의식에 대한 실망이 ‘장미꽃을 보고 감격하다가 줄기의 가시를 보면서 갖는 실망’이라면, ‘가시 돋친 줄기 위에도 장미가 핀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 이들은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가득 참여하는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장미 줄기의 가시를 세는 것보다 장미 봉오리를 꿈꾸며 움트고 있는 싹을 센다.  필자의 경우, 인권연대 운영위원회에 나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매달 회계보고를 접하면 몇 달 밀렸다가 내곤 하는 사무실 임대료 까지 감안하면 늘 적자, 인권강좌 열어서 보람 많이 느꼈지만 또 적자, 민생고 문제로 활동가 결원이 생기는 안타까운 상황과 이어지는 새로운 충원도 쉽지 않은 상황, 그리고 숱하게 터지는 인권침해 사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 이 모든 것은 장미 줄기의 가시들에 해당된다. 허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줄기 위로 장미가 피고 있다는 사실이며, 믿음이다. 이렇듯, 줄기에 싹들이 움트고 있다는 소식도 많이 접한다. 인권강좌를 수료한 이들이 새로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매번 소식지의 활동일지를 꽉 메울 만큼 인권연대는 활동하는 것이 많고 의욕도 아직 충만하다는 사실, 순수하게 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다는 평판, ‘인권교육’을 꾸준히 정규적으로 하고 있고 늘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인권단체로서 인권연대가 거의 유일하다는 사실, 동시에 인권운동의 영역도 넓혀가고 있으며 매년 초엔 하고자 하는 사업계획이 너무 많아 한참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 작은 단체인 인권연대를 시민사회 곳곳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순수하게 인권운동만을 해왔고 늘 그럴 거라는 믿음과 약속, 이런 것들을 열거해 보면, 우리는 장미 줄기에 난 가시의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봉오리를 꿈꾸며 움트고 있는 싹들을 세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많지는 않아도, 매번 인권강좌에 참석하는 시민들을 보며,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인권에 대한 호기심과 목마름을 보며, 우리는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 가득한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을 하자.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00 | 추천: 0
오부자 이야기-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로 살아가기 돈 많은 부자(富者)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네 아들을 키우고 있어 나까지 합쳐 오부자(父子)이니 곧 내 얘기, 우리 가족 얘기를 하려는 참이다. (이런 나를 두고 富者라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긴 하다) 부끄럽지만 모든 아이들은 천사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끼고 체득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네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런 부끄러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때때로, 아니 자주 아이들이 축복이라기보다는 짐으로만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로서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버릇 고쳐준다’는 명분으로 혼도 많이 내고 ‘엄한 아버지’가 당연한 내 몫인 양 생각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지 않으셨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품을 때도 없지 않았다. 아마 환경적 요인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조그만 일이 커져,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적인 일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기도 했던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나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 무척이나 조심하는 편이다. 나로 인해 어떠한 피해도 상대에게 끼쳐선 안 된다는 의식이 오랜 동안 내면에 자리 잡아 왔다. 이런 의식은 깨닫지 못한 사이 종종 결벽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삶을 스스로가 만든 족쇄로 받아들이고 ‘강박’을 조금씩 허물어내기 시작한 것 또한 네 아이들 덕이니 나는 아이들에게 감사해야 될 게 우선 하나다. 한번은 아내가 “어쩌면 아무개가 당신을 꼭 빼닮았냐?”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아내가 말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그 까닭이 내가 평소 그 녀석에게서 답답해하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허허 참, 어이없어.’ 겉으론 웃고 말았지만 아내의 조그만 관찰(아니, 이것도 돌이켜보면 나와 아들에 대한 애정 어린 눈길과 오랜 관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이 가져온 변화는 적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녀석이 하는 태를 유심히 지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의 어떤 부분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조그만 단점마저 내가 물려준, 나의 한 부분이며 그 녀석은 아직 그것을 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간 녀석에게 품었던 생각에 미안해지기도 했다. 이 일이 전기가 돼 나는 가끔씩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녀석들의 어떤 점이 내가 물려준 것인지 찾는 재미도 적지 않다.   필화(筆禍) 또는 설화(舌禍) 기억의 내면화 한번은 우리 집에 놀러온 동서가 “녀석들 아빠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네”하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내가 거실에 있으면 안방에 가서 놀고 안방에 들어가면 거실이나 작은방으로 쪼르륵 달려가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잔소리꾼’ ‘폭군’이었던 셈이다. 우리 역사에는 몇 줄의 글이나 몇 마디 말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표현의 자유가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됨으로써 일어났던 피비린내 풍기는 역사는 그리 멀지 않은 우리 현대사에도 아픔을 새겨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이들과 놀면서 가끔씩 이런 역사를 떠올린다면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나 행동거지에서 거슬리는 것이 있을 때 나는 대놓고 야단을 치는 편이다. 가끔씩 내 성에 못 이겨 화를 내기도 한다. 엄한 심판자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아내는 “애들이 다 그렇지”하는 말로 눙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빠였다. 아마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필화와 설화로 공권력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던 우리 역사나 가깝게는 집안의 내력이 부지불식간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림 출처 - 동아일보 우리 아이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식은 아이들에게 아이들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셈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이 어떻게 놀든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다. 순간순간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아이들에게서 ‘나’ 찾기 우리 집에서 네 아이의 교육은 거의 아내의 손에 맡겨져 있다. 별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는 아내의 교육철학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금껏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아이들을 이러저런 학원으로 내몬 적이 없다. (물론 네 녀석 학원 보내려면 등골 빠질지 모를 일이다) 자기들이 꼭 배워보고 싶다는 수영이나 바둑, 미술 학원에 얼마간 보내본 적이 있지만 그것도 식상해 하면 억지로 보내지 않는다. 전에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하는 식으로 밀어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육적 효과가 별로여서 이내 생각을 접었다. 한 녀석 한 녀석 재능이 다 달라서 누구는 바둑에 재미를 들여 자기가 다니는 학원에서 1등을 하는가 하면 어떤 녀석은 창작만화 그리기로 생각지 않은 상을 타오기도 한다. 손재주가 좋은 둘째는 종이접기 카페를 운영하며 손수 만든 종이 작품을 올리기도 한다.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부모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는 모습들을 볼 때면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란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적지 않다. 수많은 피해의식과 자격지심들이 뒤섞인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남자로, 아버지로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살며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나 또한 행복해진다. 부족하기만 한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여기는 아이들, 나는 그래서 아이들과 더 친해져야 하고 그들에게서 더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신이 아이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는 축복의 메시지가 아닐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0
경찰서 유감- 돌연사 유족 수사에 존중과 배려 있어야 지난 토요일(21일) 오전, 함께 일하는 직원이 갑자기 모친상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 중한 병을 앓는다거나 연세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는 터라 깜짝 놀랐다. 서둘러 빈소를 마련했다는 병원에 가 보니, 황망한 일을 당한 우리 직원은 역시 넋을 자주 놓곤 해서 몹시 안타까웠다. 아직 빈소에 시신을 모시지도 못하고 일가친척 몇 명만이 분향소를 마련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경찰이 왔다. 지병이나 노환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돌연사이기 때문에 일단 ‘사고사’로 보고 사체 검안 등, 절차에 따라 수사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현장을 처음 발견한 가족인 우리 직원과 부친더러 조서를 작성해야 하니 경찰서로 와 달라고 했다.   기가 막혔던 경찰의 첫 질문 경황없는 두 사람만 경찰서에 보내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동행하기로 했다. 같이 경찰서에 가서, 두 시간이 넘도록 심문을 받고 마지막으로 지문 날인하고 나오는 부녀의 모습을 옆에서 보자니 몹시 안쓰러웠다. 경찰이 제일 처음 물은 질문은 기가 막히게도 망자가 생명보험에 가입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것부터 시작해 여러 정황에 대한 심문을 ‘폭력팀’ 담당 형사가 ‘관례’에 따라 해 나갔다. 그러고 나서 부친과 우리 직원을 한 사람씩 따로 심문했는데, 그때는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한 사람당 20분 정도만 심문하면 된다고 했는데 우리 직원은 한 시간이 넘도록 심문이 끝나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오후 세 시 반에 경찰서에 도착했는데, 끝난 시간은 여섯 시가 다 된 무렵이었다. 두 시간 반여 동안 지켜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우선은, 유족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졸지에 가족을 잃어 말할 수 없이 큰 상실감과 슬픔에 빠져 있을 식구들에게는 폭력 사건을 주로 담당하는 강력계 형사보다는 전문적인 심리 상담 능력이 있는 수사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 직원은 어머니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마저 드는 듯 처음에는 말도 조리 있게 하지 못했다. 유족에게는 마치 피의자처럼 정황을 되풀이 설명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것 같다. 물론 사고 경위를 정확하게 조사해야 하겠지만, 같은 질문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자칫 사고를 겪은 가족이 한 번 더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당사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일선 형사에게는 그런 요구가 무리일 수 있을 테니 더욱 심리 상담 전문 수사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로, 여성을 남성 형사가 심문하는 상황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 경찰이 폭력을 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경찰서라는 낯선 곳에 와서 무뚝뚝한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냉정한 질문을 듣고 대답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그렇게 느껴졌다. 경찰서에는 피의자만이 아니라 피해자나 참고인으로도 많은 여성이 방문할 텐데 왜 여성 경찰관은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이는 걸까.    존중과 배려가 인권의 기본 남성이라고 무조건 폭력적이거나 여성과 대화를 잘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피의자든 피해자나 참고인이든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상태를 좀 더 세심하게 파악하고 배려하면서 조사한다면 사실 파악도 더 잘 될 것이고 조사받는 당사자도 불쾌한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조사 대상이 여성인 경우 여성 경찰관이 좀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004년 12월 성폭력 피해자를 수사할 때에는 여성 경찰관이 의무 배치되도록 경찰청이 방침을 정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꼭 성폭력 같은 지독한 일을 당해야만 여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나. 그렇게 범위를 한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어떤 고통이든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인권을 지키는 기본일 테니 말이다. 고통의 크기는 남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영화 ‘300’이 말하는 리더십의 교훈-지도자 개인의 능력보다 구성원과의 소통이 중요 ‘300’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본의 아니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보았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죄의식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교회 청년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욕 먹어가면서 본 영화지만 억울하게 재미있는 영화도 좋은 영화도 아니었다. 그저 선정적이고 남성적인 영화일 뿐이었다.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잔인했고 벌거벗은 병사들의 근육은 현실 같지 않았다. 이야기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레오니다스가 의회 원로들의 반대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최정예군 300명을 이끌고 나가 페르시아 군 100만에 맞서 싸우다 전멸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두 인물의 대조(對照)로 전개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인데, 확연하게 대별되는 두 사람의 리더십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헌신적이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구사한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공포와 권위로 조직을 장악하며 군대를 이끌었다. 극중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크세르크세스가 “나는 승리를 위해 내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잔혹성과 능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를 비웃듯이 레오니다스 왕은 “나는 내 부하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 라고 말한다.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드러나는 말이다. 그리고 레오니다스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 “그들을 존경하면 너 또한 그들로부터 존경받을 것이다.” 아무리 영화지만 참 멋진 말이었다. 결국 이 희생으로 인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조직적으로 연합하여 전쟁에 나서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 '300'의 포스터 사진 출처 - 영화 '300' 성과지향적 리더십의 위험스러움 ‘리더십(leadership)’,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인데, 요즘 리더십을 운운하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역시 ‘경영과 관련한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리더십이 상품화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2천 년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예수로부터 CEO가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원형을 찾는다는 ‘최고경영자 예수’라는 책까지 나왔다. 예수가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추구했다고 믿는 나로서는 제목부터가 코미디였다. 백과사전에는 리더십이 ‘집단의 목표나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하여 성원(成員)이 자발적으로 집단 활동에 참여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즉, 리더십을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한 것, 혹은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한 것, 즉 성과지향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으로는 어떤 리더십이 바람직한 리더십인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목표만 잘 달성하면 폭군이어도 좋고 아무리 민주적인 절차를 중시하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목표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가 ‘리더십’이라는 말을 성과지향적으로만 이해해 왔다. 성과지향적인 리더십은 지도자와 공동체의 구성원을 하나의 자원으로만 치부하게 되면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지도자는 끊임없이 구성원에게 일정한 성과를 요구할 것이고 본인 또한 어떤 성과를 달성하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종류의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타인 혹은 다른 집단과의 경쟁이라는 유령 같은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구성원들에게는 그들의 성과에 따라 보상이 주어질 것을 약속하거나 암시한다. 이런 지도자들은 질보다는 양, 내용보다는 형식, 과정보다는 결과, 아래보다는 위를 중시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당연히 그 행동양태는 권위주의적이기 쉬워서 일방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독점하며, 구성원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은 하향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한 집단에게 성과는 중요하고 계획된 목표는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과정이다. 성과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되어 과정과 관계 등 여타의 요소들이 성과 달성에만 이용당하는 방식은 경계되어야 한다. 이 방식으로 얻어진 성과는 오로지 지도자 개인의 것일 뿐, 구성원은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만다.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소통을 통한 관계를 증진하고 구성원 모두의 자발성을 유도하면서 과제를 처리했을 때의 성과야말로 구성원과 동등하게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나 전두환 때가 좋았다고들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아무리 ‘참여정부’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해도 구호뿐이었음이 드러났다. 사실 이전 대통령들도 모두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하면서 리더십의 원천을 자기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인 국민에게 두려 했던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차별성이 있다는 말인가. 그저 모두들 권력을 잡은 뒤에는 권위주의적이고 성과지향적인 편리한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리더십의 원천은 구성원인 국민 현실이 영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서 대안을 찾는 구조에 문제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게으른 국회의원들을 보며 분통이 터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임이 분명하다. 과연 언제쯤이면 그릇된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자의적이고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정책집행으로 인해 국민들이 상처받는 일이 없을까. 우리에게 국민을 위해서 자신의 욕심과 의지를 포기하고 희생할 줄 아는 포용력과 안목이 있는 참된 리더십은 요원한 일이기만 한 것인가.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98 | 추천: 0
지난주 토요일,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우리학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리다 나왔다. 홋카이도 재일조선인 민족학교의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동포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 한참이나 여운이 남았다. 사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왜 ‘우리학교’를 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을까. 아마도 개, 돼지처럼 강제로 끌려가 일본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재일조선인 1세들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으리라. 영화에서는 일제 치하 망국노의 멍에를 지고 고향을 떠나가 일본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예처럼 살았던, 해방이 되고도 귀향하지 못한 채 탄압과 차별과 멸시 속에 살아간 재일조선일 1세들의 삶이 재일조선인 민족학교의 오늘과 함께 그대로 전해졌다.   노예처럼 살았던 재일조선인 재일조선인 1세들은 일본 땅에서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2세, 3세, 4세들이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제대로 쓰고 배우기를 바라며 민족학교를 세웠다 한다. 그러나 일본 땅에서 민족학교는 법적,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민족학교에 대한 일본 당국의 탄압은 물론 우익단체의 테러가 끊이지 않아 초기 재일조선인 민족학교를 다닌 남학생들의 경우 공부할 틈도 없이 민족학교를 지키고 여학생들을 보호하느라 싸우다 졸업을 했다고 한다. 껍데기뿐인 조국해방을 맞은 재일조선인들에게 조국의 분단은 망국 이상의 새로운 멍에였다. 재일조선인 민족학교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고 민족학교를 지원한 곳은 조국의 북쪽이었다. 남과 북이 한 목소리로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고 규탄하고 민족학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조국의 남쪽은 무관심했다. 조국분단은 일본에 대한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정책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하여 일본의 민족학교에 대한 부당한 탄압과 차별은 북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을 조장하는 가운데 정당화되었다.     사진 출처 -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 홈페이지  그 동안 우리는 ‘우리학교’를 잊고 살아왔다. 더 정확히는 일본의 ‘우리학교’에 대한 탄압과 차별을 방조하였다. 고향은 남쪽이나 조국은 북쪽이라는 민족학교 아이들의 인식은 역사적경위로 보건대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정상적이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비로소 재일조선인 민족학교는 식민과 분단의 모진 세월을 뛰어 넘어 우리의 시야에 조금씩 들어왔다. 마침내 ‘우리학교’라는 숭고한 사명에서 기획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빛을 발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말았다. 식민의 한을 가슴에 받아 안고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핍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겹게 민족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민족학교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자랑스러웠다. 조선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그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던 민족학교 아이들 일본 당국과 일본 우익의 북한에 대한 온갖 모략에도 굴하지 않고 만경봉호를 타고 또 하나의 조국 북을 방문하고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은 생기발랄함과 자신감 그 자체였다. 무엇이 우리학교 아이들을 그토록 변하게 한 것일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우리말과 우리 음식, 우리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조선의 태양은 일본 땅에서 바라보는 태양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정말 조선의 태양은 일본보다 더 붉고 빛나는 것일까. 아이들은 조선 사람의 눈빛 또한 다르다고 하였다. 아이들의 조국 방문을 안내한 ‘아바이’와 ‘누님’을 비롯한 북쪽에서 만난 동포들의 눈빛이 맑고 빛난단다. 정말 그랬을까. 아이들은 북의 동포들과 만남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던 것일까. 우리말보다 일본말로 훨씬 더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는 아이들이 경제대국 일본 땅에서 살며 연일 북조선의 미사일, 핵 위협, 납치, 기아와 인권유린의 실상을 홍보하는 광기의 언론보도에 동화되지 아니한 채 도대체 북쪽으로부터 보고 얻은 것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세습독재의 기아와 비참한 인권유린이 횡행하는 북조선의 실상을 보지 못하였기에 눈감았던 것일까.     사진 출처 -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 홈페이지 2002년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대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당시 함께 대회에 참여한 재일조선인 민족학교 아이들이 문화공연에서 합창을 하였다. 서툰 발음이었지만 아이들이 부른 노래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였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쪽 동포들이 마음을 모은 구호의 하나일 터인데 아마도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땅에서 핍박을 받고 자라나는 민족학교 아이들에게도 큰 공감이 가는 노래였던가 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입장에서도 북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를 푸는 훌륭한 모토로서 지금도 새겨져 들린다. 그런 공감이 아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일 게다. 허구적 인식과 그릇된 편견을 바꾸고 민족적 정체성을 이어가고자 하는 동기 부여가 되는 것이리라.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감을 회복하였을 것 같다.     그들은 우리, 우리는 그들 일본 땅에서 더 잘 살아가기 위한 출세와 경쟁, 이를 위해 민족성을 포기하기보다 차별 속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 문화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이어가는 훌륭한 선생님과 아이들, 재일조선인 동포들의 교육공동체의 모습은 진한 감동이었다. 인간다운 삶,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참교육 공동체의 삶으로 다가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무가 되어 조언을 주고 가르침을 받으며 이끌어 주었다. 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 모두가 ‘우리학교’에서 지낸 지난 생활을 되돌아보며 한결같이 흘린 눈물이야말로 재일조선인으로서 참된 삶을 살아가도록 깨우쳐준 영원한 모교 ‘우리학교’에 아이들의 진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진 고귀한 눈물이었다. ‘우리학교’를 보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은 공감도 공감이거니와 자성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토록 순박하고 아름답고 꿋꿋하게 우리를 지켜나가는 같은 민족의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데 대한 자성이었다. 무엇인가를 가슴 속 깊이 가득 얻을 수 있는 감동의 영화다. 또 볼 작정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18 | 추천: 0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시집오는 외국인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이주노동자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외국인 여성들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이 사회의 한국인으로 정착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웃으로 받아들여짐과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인도적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들이 이루고 살아가는 가정이 안정되지 않으면 장래에 이 사회의 건강함에 장애 요소가 될 것입니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이들이 한국에서 이룬 가정의 안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성들이 한국에서 처한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어적 장벽, 가정폭력, 자녀 양육의 한계, 재정적 불안정 등 많은 어려움들이 산재되어 있어서 이들이 혼자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부간의 나이차가 심하며, 특히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의 여성들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숫자조차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상담을 통해 파악되는 자녀들의 경우 대부분 일상적인 음식의 섭취는 물론이고 교육의 기회에서마저 소외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제결혼은 늘어나고 이러한 부적응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장차 사회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 사회에 잘 적응하며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결혼이민자가족’도 우리의 이웃 이 일을 위해 ‘결혼이민자가족 지원센터’를 여성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개소하게 되었습니다.  이 센터의 가장 큰 목적은 외국인 여성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 사회의 일원으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북돋우는 것입니다. 센터에서는 외국인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 중 가장 큰 고통인 가정폭력 문제를 상담합니다.  가정폭력 문제를 개인의 가정사로만 치부하여 눈을 돌린다면 그 사회가 건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폭력으로부터 몸을 피할 쉼터를 마련하고, 심리 상담을 통해 정서적 치료와 안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스스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축된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일을 찾고, 일을 통해 자신의 성취감을 배양하여 가정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스스로 하고,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한국어 교육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국어 습득은 결혼 이민자 여성이 한국사회에 정착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요소입니다. 한국말을 빨리 익혀 원활히 의사소통을 하고, 한국문화, 특히 생활 풍습을 익혀 제사나 차례 등 명절예법을 익히게 함으로써 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풍습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럴 때 심리적 이방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경제적 가난 속에 자녀양육 및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있어 자녀들이 성장장애, 심리적·지적·육체적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욱이 여성들이 어린 경우 부모로부터 배웠어야할 육아 보육의 기회가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센터가 이 여성의 친정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영·유아들의 건강관리, 인지발달 심리치료, 유치원생들의 학습지도와 또래 형성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하고, 예·체능 교육을 통해 일반 아이들과 뒤쳐지지 않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심리적 ‘이방인’이 되지 않도록 아울러 외국인 여성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외국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 자녀들이 이 사회의 혼혈아로서 소외체험을 받고 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이 한국어와 어머니의 모국어를 배움으로써 2개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한국어 습득이 높아질 때 한국어 습득이 늦은 어머니와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올 수 있고, 이는 자녀 교육에 커다란 장애요소가 됩니다. 외국인 여성의 자존감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이 사회에 흡수 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 대한 원어민 선생님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혼이민자 가정이 안고 있는 어려움들이 이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모는 다르지만, 어찌됐든 우리의 이웃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외국인이 아닌 외모가 외국인을 닮은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너그러운 한국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은 여러 어려움에 힘든 상태이지만, 이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결혼이민자 가족지원센터 개소식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0
사학은 설립자의 재산? 법 공부 좀 하시라-퀴즈로 알아보는 '사학-설립자'의 법적 관계는?   Q1.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갑’은 그가 기르는 고양이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방법은?” 법대를 다녔던 대학시절 2학년 1학기 ‘민법총칙’이라는 과목의 중간고사 문제였다. 민법에 따르면 사람(自然人)과 법인만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고양이는 사람도 법인도 아니므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고양이에게 직접 재산을 물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甲의 재산이 고양이에게 실질적으로 귀속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애묘가(愛猫家)로 유명한 ‘을’에게 재산을 증여하면서 고양이를 부탁하면 될까? 하지만 을의 마음이 변한다면 고양이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비교적 현실성 있는 대안은 갑의 재산을 출연해 고양이를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처럼 재단법인을 설립하면 갑의 재산은 그와 분리되어 별도의 법인격을 부여받게 된다. 이 정도를 쓰면 대체로 맞는 답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신문을 보면서 갑의 고양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무능한 민주화인사’나 ‘퇴물 좌파교수’들이 사학법인을 장악하여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이 사립학교법 재개정과 맞물려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법인의 본질과 기능을 오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2006년 12월 21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개정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총회 총대 비상기도회에서 목회자들이 삭발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법인, 특히 논의의 중심에 서 있는 사학은 법률상 재단법인이다. 재단법인은 설립자가 정관작성과 출연행위 등 법인 설립행위를 마치면 설립자로부터 독립된 별개의 권리의무 주체로 성립하게 되고 설립자와 법인 사이에 어떠한 법률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립자의 의사는 재단법인의 정관에 기재되어 법인의 목적과 활동범위를 규정할 뿐, 설립 이후 법인은 설립자 개인과 분리되어 별도의 법적 주체로서 정관 및 법령에 규율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다. 이처럼 법인이 설립자와 분리되는 이상 법인과 관련해 설립자의 사유재산침해는 문제될 수 없음에도 일부 사학재단 운영자는 사유재산권 침해를 주장한다. 그들은 다음의 예를 들면서 임시이사제도의 폐해를 이야기한다. 현행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기독교사학법인에 임시이사들이 파견되어 불교사학법인으로 학교체제를 바꿀 수도 있다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변경은 정관의 중대한 변경으로서 교육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교육부가 감독권한을 적절히 행사함으로써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끝으로 다음 문제를 풀어보면 여러분들이 법인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Q2. 독실한 A종교의 신자인 ‘병’은 A종교에 바탕을 둔 교육이념을 펼치기 위해 학교법인을 설립하여 운영 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병은 종교적 대각성을 한 후 전격 B종교로 개종하였다. 병은 위 학교법인을 B종교 교육을 위한 학교법인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려고 한다.  법률상 허용되는가?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0
언 대지가 열어준 틈 사이를 비집고, 수줍게 돋아나는 새싹처럼 봄날의 아지랑이는 겨울을 이리저리 돌아 다시 나의 운동장에 내립니다. 섬진강변에 사는 시인으로부터 매화꽃 영그는 소식이며 동백 몽우리 맺히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지난 겨울초입부터 봄이 그리웠음을 알게 됩니다. 3월이 되면 개강(開講)과 동시에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상징하는 조건반사처럼 축구화 끈을 동여매게 되는데 그 기쁨을 나는 다시 맞는 새봄이 갖는 최대의 의미라 여깁니다. 우수(雨水), 경칩(驚蟄)이 지나면 대동강물만 풀리거나 개구리 말문만 트이는 것이 아닙니다.   섬진강을 뒤로한채 매화꽃이 피어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겨우내 한동안 뛰지 못해 굳은 허벅지도 풀고 분출구를 잃어버려 어디로 흘러야 할지도 모를 것 같은 이마의 땀샘도 트이게 합니다. 봄 햇살 화사하게 출렁이는 운동장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름들을 큰소리로 부르며 누비는 상쾌함은 남녘의 꽃 소식을 산책하는 어느 시인의 노래보다 더 익숙한 기쁨 입니다. 나는 한 대학의 교수 축구 팀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우리나라 국가 대표팀의 초라한 성적표를 보며, 가슴 졸여 응원하느니 우리가 뛰는 게 낫겠다는 다소 거만한(^^) 동기를 가지고 만든 팀입니다. 짐작컨대 축구공을 처음 만져보는 교수들이 반쯤 되고 젊은 날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교수(경제학자, 철학자, 서예가)가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으니 그 수준을 얘기할 바는 못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아트사커”나 네덜란드의 “토틀사커”에 빗댄 “모럴사커”라는 신 장르를 만들고 실천하고 있으니 아주 막된 팀은 아닙니다. “모럴사커-덕(德)의 축구”는 상대방이나 함께 뛰는 동료를 최대한 배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위해 골을 넣은 이는 반드시 골키퍼를 해야 하고 킥오프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 먼저 공을 차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무안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편의 잘못을 힐난하지도 않습니다. 골을 넣는 기쁨도 있지만 골을 먹는 기쁨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공을 빼앗는 성취감도 있지만 공을 넘겨주는 여유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모럴사커”는 승부와는 별개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회대 교수 축구회 회원들 모습 사진출처 - 경향신문  승부의 관점에서 최고의 선은 상대방보다 골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람은 적재적소에 배치가 되어야 하고 거기에 맞는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승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승리자를 위해 많은 다수가 희생당해야하는 숙명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리”라는 목표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 경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승리자가 됩니다. 가끔은 외부에서 온 팀과 경기를 하게 됩니다. 서로 교분을 나눈 사이가 아니니 적당한 반칙 정도는 예사이고 공을 거칠게 다투는 과정에서 순간적 상황에 몹시 기분이 언짢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나는 단 몇 푼이라도 깎아야 물건을 산 것 같은 포만감을 얻거나 지하철의 빈자리를 먼저 잡기위해 습관적으로 눈치를 굴릴 만큼 생활의 경쟁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승부의 틀에서 승리를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굴러가는 공을 넓은 골대 안으로 차 넣기만 하면 되는 축구 같은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는 건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와는 달리 “힘 있는 자가 상대방을 다치게 한다”는 운동장의 격언(?)을 되새기면 다시 평화(平和)란 서로에게 욕심이 없는 가장 평안한 상태라는 자각으로 돌아가게 되고 기꺼이 상대방의 득점에도 환한 웃음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승리인 “모럴사커-덕(德)의 축구-”의 미각(味覺)에 중독된 사람들은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축구모임을 무척이나 그리워합니다. 사실 지난겨울엔 내가 관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회의일정을 주로 수요일, 그것도 축구를 해야 할 시간에 잡는 바람에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릅니다. 벌써 한 몇 년 “모럴사커-덕(德)의 축구”와 함께 지내면서 축구가 내겐 가장 즐거운 놀이일 뿐만 아니라 교실이 가르쳐 주지 않는 실천적 사고의 장(場)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올봄 황사먼지를 뒤집어쓰고서라도 다시 축구화 끈을 묶습니다. 땀으로 엉기어 등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는 유니폼 위로 봄바람이 스칩니다. 참 시원 합니다. 참으로 시원 합니다. 이 글은 월간 축구가족 3월호에도 실립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80 | 추천: 0
2월중에 중학교 신입생 배정 업무로 학교에 나갔었다. 그때 언론에서는 한창 ‘교복값 거품’ 문제가 거론되고 있을 때여서 학생과 학부모들과의 만남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주변의 교복전문점에서는 교복을 13만원에서 18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때문에 학부모회에서는 별도로 공동구매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고, 입학식에도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으로 전달되었다. 학부모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다. 학부모회의 결정을 그냥 수긍하는 학부모, 공동구매를 해야 한다는 학부모, 나아가 교복을 꼭 입어야 하느냐는 학부모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한 학부모가 공동구매를 하더라도 교복값이 너무 비싸서 부담스럽다며 달리 구입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어느 누구도 마땅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보통 학교에서는 졸업식날 학생들의 교복을 기증 받는다. 새로 전입한 학생들,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중간에 교복 교체가 필요한 학생, 경제적 형편이 너무 어려워 교복 구입이 어려운 학생에게 몇 천 원 정도를 받거나 혹은 무상으로 주곤 한다. 그런데 이런 교복 기증은 많지 않아서 필요한 학생들에게 모두 제공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입찰을 통해 공동구매를 해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교복을 공급한다고 해도 교복구매 자체가 부담스러운 가정은 여전히 존재하는 등 교복에 대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마당에 차라리 복장을 자율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생이라고 해서 꼭 교복을 입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사실 교복의 역사는 식민지시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에서도 복종 이데올로기의 수법으로 이용되어 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공동구매 교복과 대기업 제품의 가격을 비교한 전시회 모습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물론 군사정권 시절이던 1982년에 식민지잔재청산 차원에서 머리 모양이 자유화되었고, 이듬해에 교복자율화가 시행된 바 있다. 그렇지만 1986년 2학기부터는 다시 ‘학교장 재량에 따라 교복착용 여부 및 교복의 형태를 결정’하도록 방향이 수정되었고, 문민정권이 들어서고 민주화를 이룩한 현재에도 대부분의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옷을 강제로 입게 한다든지 두발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민주적이 반인권적이다. 이전의 교복이나 두발단속이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면 민주화의 흐름에 맞게 당연히 자율화되어야 한다. 혹 교복이 사복착용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빈부격차에 의한 소외감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교복값 자체가 부담스러워진 요즘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다수 부모들과 교사들은 ‘학생들은 교복을 입어야 학생답다’며 교복착용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예컨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복이 ‘학생들 몸에 알맞은 단정한 차림’으로 작용하고 있거나,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딱딱한 책걸상에 앉아 버티는데 편한 옷이라는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요즘의 교복은 여학생의 경우 상의의 길이를 줄이거나 허리선을 살리기 위해 품을 줄이는 2차 가공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심지어 허리를 구부릴 때 허리춤이 다 드러나 눈길을 주기가 민망할 정도인 것이 현실이다. 일부 남학생의 경우도 바지의 폭을 줄이는 게 유행이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생활을 하는데 사복보다 오히려 불편해졌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창조적인 사고나 개성이 무엇보다 강조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획일적인 교복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한다. 오히려 개성을 드러내고 자기표현을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복장을 자율화라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바람직해 보인다. ‘학생답다’는 기성세대들의 가치관에 따라 학생들의 인권이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745 | 추천: 1
얼마 전 3·1절이었습니다.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항거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 올리려는 하나의 의식이겠지요. 태극기는 한민족 독립(의 열망)을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모닝 스타(Morning Star)’를 아시나요? ‘모닝 스타’는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입니다. ‘웨스트 파푸아’라는 이름조차 낯설다고요? ‘웨스트 파푸아’라고 말을 하면 보통은 파푸아 뉴기니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파푸아 뉴기니’라는 나라가 있는 섬(뉴기니아 섬)의 왼쪽(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지도를 보면 뉴기니아 섬의 절반을 자로 그은 듯 반듯하게 나누어 오른쪽(동쪽)은 파푸아 뉴기니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섬의 왼쪽(서쪽)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관찰력이 뛰어나신 분은 아마도 인도네시아와 같은 색깔로 칠해져 있으므로 섬의 서쪽은 인도네시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섬의 동쪽 부분인 ‘파푸아 뉴기니’는 유럽 열강(영국,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75년 독립하였지만, 섬의 서쪽 부분인 웨스트 파푸아 지역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가 끝나갈 무렵인 1950 ~ 1960년대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인도네시아가 군대를 동원하여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복속시킨 곳입니다. 뉴기니아 섬 서쪽 지역의 인민은 1961년 12월 1일 나라 이름을 ‘웨스트 파푸아’라 명명하고, 그 상징인 국기를 ‘모닝 스타’로 정하여 의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즉,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국기인 것처럼 ‘모닝 스타’는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서 태극기가 대한민국 독립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지금 ‘모닝 스타’는 ‘웨스트 파푸아’ 독립의 상징인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는 나라가 있는 섬(뉴기니아 섬)의 왼쪽(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이 '웨스트 파푸아'이다. 사진 출처 - BBC 인구의 10분의 1이 살해당한 곳, 웨스트 파푸아 ‘동티모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국제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면 누구나 알고 계시지요. 동티모르는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02년에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을 이룬 국가이니까요. 인도네시아는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을 이루려는 동티모르 지역의 지하 자원에 욕심을 내었고, 군대를 동원하여 동티모르를 침공한 뒤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티모르가 독립에 이르는 순간까지 인도네시아는 군대와 민병대를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인권침해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자국민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동티모르에 대한 관심과 독립 지지를 바탕으로 동티모르인들은 끝끝내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 또한 독립 이전의 동티모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어쩌면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구수 100만명 정도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밀림 속으로 쫓겨 들어가고 있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불태워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웨스트 파푸아’와 관련된 서적 출간을 금지시키고 있으며, 많은 인도네시아 인들을 ‘웨스트 파푸아’ 지역으로 이주시켜 ‘웨스트 파푸아’를 인도네시아화 시키고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의 폐 기능을 하던 원시림은 벌목되고 있고, 금과 구리 등의 자원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묵인 아래 인도네시아가 위임 통치했던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여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현재도 고의적인 살해와 의문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의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것처럼, 그들은 ‘모닝 스타’를 흔들며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외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웨스트 파푸아’ 어느 곳에서도 ‘모닝 스타’를 들고 나올 수 없습니다.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독립기념일로 지정한 12월 1일에 ‘모닝 스타’를 게양 했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필립 카르마, 유삭 파카쥐)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15년,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될 정도입니다.   ‘모닝 스타’가 자유롭게 게양되는 날을 그리며... 세계의 평화를 열망하는 이들이 동티모르에 이어 ‘웨스트 파푸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영국의 상원에서는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주제로 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웨스트 파푸아’ 독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 독립운동가분은, 한국 시민사회가 지난 해 ‘웨스트 파푸아’ 독립기념일에 맞춰 위 두 명의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웨스트 파푸아’ 독립을 지지하기 위한 행사를 조직한데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독립의 순간에 반드시 한국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 우리는 세계에 대한민국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작은 손길 하나가 절실했습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는 과거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모닝 스타(Morning Star)’ 사진 출처 - BBC  ‘모닝 스타’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기념일에 각 가정 마다 지금 이 순간을 기리며 자유롭게 게양되는 날을 그려봅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36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