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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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작년, 이명박 정부는 출범초기부터 무척이나 법과 원칙을 강조해왔다. 집권 2년차인 올해도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촛불을 들었던, 인터넷에 글을 남겼던, 생존권을 주장하는 많은 이들을 법과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꾸준하게 탄압하고 있으니 말이다. 말이 탄압이지 올해 초에는 생존권을 요청하는 철거민들과 경찰 포함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정부는 법과 원칙만을 되풀이했다. 지난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던 유엔인권이사회 주거권 특별보고관 발표 시에 한국의 엔지오들이 용산참사를 언급하며 문제제기를 하였을 때에도 한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반론권을 사용하며 용산참사에 관하여 시위자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경찰의 법집행은 적법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작년에 타올랐던 촛불집회와 관련된 검찰의 약식기소와 불구속 기소가 (현재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만) 이미 600건 가까이 접수되어 진행되고 있고, 10개월 전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고등학생을 경찰이 최근까지 3차례나 경찰서로 불러 조사 하고 있는 모습도 모든 것이 법과 원칙하의 행동이라 한다. 여기에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법과 원칙이라는 옐로카드 앞에선 별다른 저항 없이 수긍하고 그 무게감을 동의하고 있다. 어찌 보면 어릴 때부터 준법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도덕적 중요 덕목으로 여기고 생각해 왔던 우리들에겐 어쩔 수 없는 한계이자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그토록 그들이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적용되고 있을까? 한참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촛불을 탄압할 때 경찰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경찰직무집행법을 준수하였나?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체포하고 연행했을 때 미란다원칙 고지나 현행 형사소송법을 준수하였나?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여 적어도 600명이상의 사람들을 사법처리하면서 집회시의 경찰 폭력에 대해서 피해 받은 다수의 시민들이 제기한 고소고발에 대해서는 사법처리를 진행하고 있는가? 이후에 인터넷상에 글을 써서 유명세를 받은 사람이 정부정책에 반한다하여 사법처리하는 것은 적법하였는가?(최근의 판결로 인하여 미네르바는 무죄를 받았다.) 재미있는 예가 또 있다. 지난 3월 신문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부동산 경기를 회복하기 위해서 다주택자에게 양도소득세 중과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 채 세금을 깎아 주는 행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 하면 여러 채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집을 사고팔 때 내야 하는 세금을 행정부에서 일부러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세금 징수여부는 철저히 법에 의해서 이뤄져야 하는데 부동산 활성화라는 정부정책에서는 법도 그리 중요치 않는가 보다. 사진 출처 - 필자 또 있다. 현재 용산참사 관련하여 재판이 진행 중인데, 변호인단 측에서 검찰의 수사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재판부에 신청을 하였고 재판부는 검찰수사기록 열람 결정을 하였는데도 검찰 측은 열람을 거부하였다. 거부하였을 때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법의 사각을 이용한 것이다. 변호인단 측에서 아무리 주장을 하여도 심지어 재판부의 결정이 있어도 검찰은 그냥 무시한다.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정부와 경찰, 검찰이 무원칙하고, 법률을 어긴 부분은 대단히 많다. 도대체 뭐가 법과 원칙이란 말인지?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다. 약자들에게는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과 가진 자들에게는 탈법과 무원칙을 적용하는 경우는 도대체 어느 나라 법과 원칙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인권의 관점으로 정부가 법 집행을 할 것은 애당초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법과 원칙을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한 바람이지 싶다. 권력의 유지도구로써 사용되는 법과 원칙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53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대통령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홀트 일산요양원에서였다.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19일 요양원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장애아로 구성된 합창단 ‘영혼의 소리로’의 노래를 듣던 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공연이 끝나자 “여러분 노래가 가슴속, 영혼에서 나오는 소리같이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며 “위로하러 왔는데 우리가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애인의 날이었던 20일 우리는 언론에서 ‘이 대통령의 눈물’을 만날 수 있었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거의 대다수의 언론이 일제히 이 대통령의 눈물 사진 또는 영상을 큼지막하게 보여주었다. 이날 눈물에 대한 사연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다. 그 논조도 대부분 ‘감성이 풍부한 이 대통령’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눈물이 반갑지 않은 건 왜일까? 장애아들의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장애인의 날이라는 적절한 시기를 이용해 “쑈”를 한 것에 대해서도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눈물에 감춰진 진실은 좀 따지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장애인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이 정말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 한 보수언론과 낙태에 관한 인터뷰에서 “가령 아이가 세상에 불구로서 태어난다든지, 이런 불가피한 낙태는 용납이 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라고 말한바 있다. 즉, 장애인을 ‘낙태할 수도 있는’ ‘죽여도 되는’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장애를 가진 것은 비정상이기 때문에 제거해도 된다는 천박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이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장애아들의 공연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니 어찌 그 눈물이 진정성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이 대통령의 눈물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들은 ‘악어의 눈물’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은 슬픔이나 참회 때문이 아니다. 종종 자기 입보다 훨씬 큰 덩이를 삼키기도 하는데 그러고 나서 숨을 급하게 들이 쉬면서 눈물샘이 눌리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먹이를 먹을 때 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것’처럼 위선적인 눈물이고 이 대통령의 눈물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19일 홀트일산요양원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장애아로 구성된 합창단 ‘영혼의 소리로’의 노래를 듣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이 대통령은 20일 장애인의 날 행사장에 영상메세지를 보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이 대통령에게 먼저 묻고 싶다. 장애인에 대한 당신의 편견은 정말로 없어진 것입니까? 눈물이 감동적이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눈물이라는 감성으로 접근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장애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들의 피눈물 나는 싸움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전히 장애인은 이동할 자유조차 제약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교육에 있어서의 차별과 배제는 뿌리 깊다. 민간영역에서의 장애인 고용은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다. 방송에서 장애인을 빗댄 개그와 코미디가 아직도 먹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건 그저 비장애인들의 시각일 뿐이다. 정부의 정책은 훨씬 걸음마다. 장애관련 예산을 보자. 이 대통령은 선거 공약에서 장애인 예산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은 OECD 평균 2.5%의 1/9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또 올해 장애인 예산은 3.6% 상승했지만 이는 물가상승에도 미치지 못해 실제로는 준 것이라고 한다. 장애인 고용은 어떤가. 2008년 공공부문 장애인 의무고용률도 1.76%에 불과해 법적 규정조차 공공연히 어기고 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장애인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축제여야 할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 당사자들은 거리에서 ‘투쟁’을 외치고 길바닥에서 노숙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화려하게 진행된 장애인의 날 행사장에 가지 않고 마로니에 공원에 모여 ‘장애인차별철폐의날’ 행사를 가진 이들이 주장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탈시설-주거권 전면 보장 △장애인차별금지법 무력화 시도 중단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 개악안 철회 △발달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실질적 정책수립 △장애인연금제도 즉각 도입 △활동보조권리 보장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 △장애인교육법 실효성 제고 정책 시행 △장애인 의료보험 및 의료정책제도 개선. 이른바 장애인 생존권 9대 요구안이다. 이런 일들이 어찌 손수건으로 훔칠 정도의 눈물로 해결될 수 있겠는가. 이 대통령이 정말로 장애인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립서비스’나 ‘쑈’가 아니라 정부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져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이 아니라 ‘위로 받을 수 있는 정책’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49 | 추천: 1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올해에는 새로 신입생 1학년을 맡게 되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볼을 하고 아직은 어색한 교복을 입고 부산하게 수업준비를 하고 교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는 것 자체가 교사로서 큰 행복이다. 이 눈망울을 마주대하면서 교사들은 수업이나 교육활동에 대한 최선을 새삼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1학년 신입생들을 지도하는 데에는 어려움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처음’ 이라는 것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넘쳐나는 의욕으로 반짝거리고, 그 모습에 교사들은 힘들지 않게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마다 조금씩 그 느낌이 달라지고 있다. 싱싱하고 보송보송해야 할 우리 새내기 1학년 아이들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모든 선생님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배추 고갱이와도 같은 싱싱함을 지니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아침부터 늘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사들끼리 올해 신입생 아이들에게 ‘절여진 배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수업시간마다 절여진 배추 헹구느라 힘들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많다. 이 지역의 많은 아이들은 입학 전에 이미 엄청난 선행학습을 하고 온다. 수학과목의 경우, 이미 1학년 과정, 또는 2학년과정까지 마치고 고교과정인 ‘수학정석’을 풀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아이들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상 영어사교육 또한 엄청나다. 대학교수준에 해당하는 ‘TEPS’를 공부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며, 더 나아가 아침 7시에 영어 학원 수업을 1시간 듣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다. 학력수준이 제각각인 이런 아이들 40여 명이 앉아 있는 교실에서의 학교수업이 학생들 개개인에게 새롭고 흥미롭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쳐 늘어져 있는 이 아이들과 하루하루 씨름을 하고 있는 우리 교사들도 수업이 끝난 후 뒤통수 개운하게 교실문을 나서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난 달 KBS 추적60분에서 방송한 ‘이래서 사교육이다!’라는 프로그램은 현장교사로서 정말 착잡하다 못해 참담한 기분을 떨칠 수 없게 했다. 일명 ‘스타강사’로 불리우는 대치동 학원가의 강사들과 학부모들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학교현장에서는 열심히 하려는 교사가 왕따 당한다.” “교사들이 다시 열정을 가지고 교육활동을 하면 공교육은 살아날 것이다.” “우리도 공교육이 잘 되길 바란다.” “성과급을 주면 뭐하냐? 1/n로 나눠 갖는데...” “학교에서는 인성교육도 학력신장도 다 제대로 못하고 있다.” 등등. 그리고 한 해 20조원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사교육시장, 거기다 600억 원을 재투자하는 명문학원들, 카이스트졸업생들을 연구원과 비서진으로 10여 명 씩 두고 있는 연봉 수십억의 스타강사들의 모습, 월 평균 한 아이 당 300만 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쓴다는 강남 학부모들의 이야기, 족집게 강의를 받은 서울 강남구, 서초구, 양천구 학생들의 서울대 입학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자료들.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앵커의 클로징 멘트는 학교가 달라져야 한다는 거였다. “입시제도나 정책만 탓할 것이 아니라, 교사들이 스스로 변화해야 공교육이 살아날 수 있을 것” 이라고. 그 방송을 보면서 정말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스타강사나 학부모들의 인터뷰내용에 진정성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웬만한 가정의 한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사교육에 쏟아 부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저지른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10여 명의 연구진을 거느리고 오로지 성적향상만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몇 몇 스타강사의 일상과 하루에도 몇 건 씩 보고해야 하는 공문처리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겸하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학교교사의 일상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어느 교육학자의 말처럼 학력신장을 학교교육의 목표로 삼는다면 공교육이 이미 골리앗이 돼버린 사교육을 이긴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앵커의 주장을 존중해 교사가 현장에서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변화한다고 해도 학원을 따라잡을 순 없다. 차라리 이 정부가 좋아하는 ‘효율’을 따진다면 학부모에게 이중과세하지 말고 차라리 공교육기관인 학교를 모두 없애고, 이 정부가 진리로 믿는 ‘시장의 원리’에 교육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알아서 학부모의 경제력에 맞게 능력껏 학원에서 ‘실력’을 향상시키면 될 일이다. 이 해괴한 우리의 교육현실이 빚어진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경쟁제일주의’라고 봐야 한다. ‘초등학교부터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감이 승인한 국제중을 비롯한 자립형사립고들이 늘어나고, 대학들이 고교를 등급화 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일이 중단되지 않는 한 모든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1등과 꼴찌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수학도 아닌 산수로 풀어도 되는 쉬운 문제 아닌가? 이렇게 쉬운 답을 애써 외면하고 공교육 부실의 원인을 교사들의 탓으로 슬쩍 넘겨버리는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에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추진할 교사평가를 위한 초석을 다지려는 의도는 아닌지 말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차분히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 공교육기관인 학교의 교육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민주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게 한다.’로 기억하고 있다. 이게 잘못된 것이라면 지금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학교교육의 목표를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교사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싶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아이들과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타성에 젖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점검하는 일도 우리 교사들의 몫임은 인정한다. 며칠 전 또 100여 명의 교사들이 ‘진단평가’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일제고사에 ‘불복종선언’을 한 바 있다. 공교육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이 진정이라면, 학교현장에서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교사들의 주장을 ‘불법집단행동’으로만 매도하는 것을 당장 중단하기 바란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42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변호사가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검찰은 피고인이 유죄라는 어떠한 증거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의심’에 입각해 판단해 주십시오.” 잠시 후 판사가 물었다. “배심원단은 일치된 의견에 도달했습니까?” 배심원은 신중하게 하이라이트로 달려간다. “매사추세츠 검찰 대 ㅇㅇㅇ사건은 … 유죄가 아닙니다(Not Guilty).” ‘보스턴 리걸’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 ‘미드’에 완전히 푹 빠졌다. 2004년 처음 시작해 2008년 시즌5까지 이어진 이 길고 긴 드라마는 보스턴에서 최고로 꼽히는 ‘크레인, 풀 & 슈미트’라는 로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모은 법정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백미는 형사사건에 나선 변호사들이 배심원단 앞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며 토해내는 최종변론 장면이다. 특히 주인공 앨런 쇼어 변호사가 피고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달변을 뽐내는 모습에 나도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다. (앨런 쇼어 역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1989년 깐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제임스 스패이더가 열연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앨런 쇼어 변호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항상 강조하는 게 있다. ‘합리적 의심’이다. 시즌3 마지막 회에 보면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형제가 나온다. 앨런 쇼어와 그의 절친한 친구 데니 크레인이 한 명씩 변호를 맡았다. 두 변호사는 서로 상대방이 맡은 피고인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배심원단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결국 검찰이 ‘두 형제’를 공범으로 기소했지만 공범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두 형제는 석방된다. 드라마 한글자막은 언제나 배심원단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번역하지만 실제 배심원단은 결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Not Guilty” 즉, ‘유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유죄가 아니니 피고인을 잡아가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고인을 피고인으로 삼은 경찰과 검찰에 내리는 준엄한 항의다. 결국 피고인이 유죄임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된다. ‘보스턴 리걸’을 보면서 내가 정말 부러워하는 점은 유죄 여부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는 점이다. 만약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거나 ‘합리적 의심’을 풀어주지 못하면? 피고인은 풀려난다. 심지어 기소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면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재판에서 배격한다는 원칙에 따라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 한 변호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피고인이 검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면 이를 입증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한국에선 검찰이 고문하지 않았단 사실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고문을 당했다는 걸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한 소비자운동가가 내게 말해줬다.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정부가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안전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면 위험”이다. 한국에선 “위험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니 안전”이다. 결국 “그거 먹고 죽은 사람 봤냐?”는 거다. 지난 3월18일 법원은 한미FTA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법정 구속된 정창수 전 보좌관에 대해 항소를 기각했다. 그는 2007년 한미FTA와 관련 정부가 중요한 협상 목표로 제시하던 미국의 반덤핑제도 완화 등 무역구제안이 물 건너갔다는 정부문건을 유출했다. 국회 진상조사도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고 법원은 2007년 말 구속영장청구을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9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 조용준 부장판사는 비밀누설에 대해서는 뚜렷한 영향이 없다고 했는데도 항소기각으로 결과가 나왔다.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복역 중인 정창수씨. 사진 출처 - 시사인 나는 검찰에 묻고 싶다. 자신들이 주장한 ‘사전에 협상전략을 노출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는 기소사실을 입증했는가. 설마 협상전략을 노출하는 바람에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나는 법원에 묻고 싶다. 검찰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는가. ‘보스턴 리걸’이 보여준 세계는 “유죄가 아니니 당신은 석방입니다.”라고 외친다. 내 주위에선 지금도 “당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했으니 감옥에 가시오.”라고 소리친다. “닥치고 법질서 지키는 게 좋‘읍’니다.”란 속삭임과 함께.
2017-07-11 | hrights | 조회: 371 | 추천: 0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이거 참 야단인걸...”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음이 괜스레 찜찜하고 부산스럽다. 갓난아기의 살결 같은 봄이 왔다. 미처 환영할 시간도 없이, 봄을 살아야 할 준비도 안했는데 이렇게 봄은 내 앞에 와있다. 지난주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망울들을 볼 때는 환한 기쁨이었다. “반갑고 고맙다.” 겨울이라는 깊은 고요를 견디어 내고 다시 살아낸 생명들에 대한 경이로움에 감동하면서 눈인사를 나누었더랬다. 그렇게 천천히 봄을 음미하며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춘분이 지난 며칠 사이 꽃들은 활짝 피었다. 천천히 다가올 줄 알았는데 왈칵하고 달려든 봄이 못내 야속하다.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낸 온난화의 영향이 자연 조차도 숨 가쁘게 돌아가게 하고 있다. 일찍 서두르느라 얼마나 힘들까. 꽃들 역시 준비 없이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영 어색할 것 같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화작용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재앙을 동반한다. 인간에게는 재앙이지만 자연에게는 생명의 순환이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계절의 변화를 보며 두려움이 드는 까닭이다. 이렇듯 마음이 번잡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한숨이 나왔다. 함께 일하고 있는 아저씨가 묻는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무슨 걱정이 있어?” “아니요... 난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는데 봄이 벌써 왔잖아요. 보세요, 온갖 꽃들이 너무 일찍들 피어나고 있어요. 쟤들도 즐겨야 할 시간이 있을 텐데 너무 일찍 피는 게 안쓰럽고 그래서요.” 아저씨는 웃는다. “이 사람아 준비는 벌써 했어야지. 암튼 날씨도 미친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끝을 흐리시며 아저씨는 한 말씀 더 얹어놓으신다. “일찌감치 준비해둬. 조금 있으면 여름이야 허허허.” 땅을 밟고 앉아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내린 비로 복수화와 미선나무의 꽃잎들이 꽤 저물어 있었다. 촘촘히 빗물을 머금고 있는 풀들과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순환하는데 인간의 탐욕은 변함이 없다.”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물러앉았다.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너의 신발을 벗어라. 그래야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겠다.” 미선나무의 곷잎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러고 보니 나는 흙을 밟고 있었다. 막 피어나고 있는 풀들로 가득한 흙. “아 이것이 생명이구나. 어느 것 하나 생명 아닌 게 없는 세상이구나.” 뭇 생명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흙 한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 텐데 나는 종종 잊고는 한다. 편리함과 무지의 탈을 쓴 이기심 따위들로 인해 말이다. 신발을 벗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신세라니... “그렇구나! 봄을 맞이할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구나.” 봄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왔지만 나는 생명의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 마음은 겨울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파헤치고 덧씌우고 짓누르고 불태우는 건설과 파괴의 시절이다. 건설과 파괴는 자본이 아니라 자연의 몫이어야 한다. 피의자의 얼굴로 권력의 실체를 가리는 파렴치한 시절. 권력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전토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은 노상강도와 같다. 청와대 비서관과 대법관이 전자우편으로 헌법과 법을 유린하는 대한민국이다. 이 웃지 못 할 상황에서 나는 매우 똑똑한 총리에게 영어 단어를 배웠다. 전자우편은 e-mail이다. 젠장! 생명들이 스러지고 유린당하는 곳에서 내 마음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시시각각 꽃들은 피어나고 나무는 푸르러질 터인데 말이다. 잠시 눈을 감는다. 세상근심에 마음을 빼앗긴 내가 스승과 함께 걷고 있음이다. 순간 스승이 뒤돌아 가시며 처음 머물렀던 자리로 향한다. 나는 놀라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흐르는 곳이 네가 머물러야 할 자리이다” “흐르는 곳에 머무름은 무엇입니까?” “지금 있는 그 자리가 흐름이며 머무름이야. 들꽃들과 나무들의 변화는 있는 그 자리에서의 흐름이며 또한 머무름이다. 그럴 때에 꽃들은 피어나고 열매는 맺어지는 것이지.” “아...” “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네 자리에서 흐르며 또한 머물러라. 깨어 있는 꽃들은 제아무리 혹독한 겨울을 겪어도 피어낼 줄 안다.” 눈을 떠보니 여린 풀잎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머무는 자리에서 바람과 함께 흐르고 있음이다. “그래 그렇지.” 고개 주억거리며 마음이 스르르 눈 뜨는 순간이다. 그렇다 봄이다. 이제야 온전히 봄을 환영한다. 꽃은 피어야 한다. 아직 피지 않은 나는 다만 깨어있기를 바랄뿐이다. 피어라 꽃이여 피어라 생명이여!
2017-07-11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3월, 개강이다. 이번 학기 일탈과 범죄와 관련된 수업을 하나 듣게 됐다. 첫 시간, 교수님은 수업 이해를 위해 영상물 하나를 보여 주셨다. 청소년 범죄에 관한 내용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원인 분석이나 조사를 잘 해서 상당히 잘 만든 보도물이라고. 처음엔 어린 아이들이 절도와 폭행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걸 보고 청소년들을 그냥 저렇게 방치해도 되나 싶었다. 최근 여중생이 친구를 사정없이 폭행하는 영상이 떴을 때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충격적이었다. 국가의 미래, 희망이라 일컬어지는 청소년이라는 사회 내 특수한 위치가 있는지라, 청소년 범죄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다뤄진다. 나 역시 그렇게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사례를 보여주고는 그 원인은 가정환경이라며 파고 들어가는 패턴을 느끼면서부터였다. 모든 건 가정환경의 탓이었다. 물론 사례로 나오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은 다 불우했다. 가난하고 부모님이 이혼했다든가 자주 싸웠다든가. 어쨌든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마치 그게 사실의 전부인 양, 가정만 화목하면 청소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의심할 만하다. 영상을 보면, 아이에게 열린 질문은 하진 않는다. 질문은 이미 '가정문제'로 앞서 나가 있고 카메라는 벌써 그 아이의 가정사를 훑고 있다. 이때 정부의 역할은 그저 부모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상담하거나 교육하기를 요구받는 데 그칠 뿐이다. 비단 청소년 범죄의 원인에만 가정환경을 헤집고 들어가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사회적 범죄가 일어나도, 늘 그 사람의 가정환경부터 파헤치기 일쑤다. 오히려 사람들은 범죄자에게 불우한 가정환경이 있어야지만 안심하지 않는가.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회 전체에 폭력이 난무하는데 가정 내에서 폭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 폭력에 노출돼 있다면 꼭 청소년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정신이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정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자꾸만 폭력과 가난에 노출되는 가정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특히 청소년 문제를 곧바로 가정불화와 연관 짓는 문제의식의 틀이 그토록 불편한 걸까. 나는 더듬더듬 내 불편함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개인의 불행한 원인을 가족에서 줄곧 찾는다. 외부에서도 그렇게 규정하고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가족은 잘 보호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힘을 받는다. 가족의 임무는 막강해진다. 재생산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지면서 말이다. 과연 가족이 작동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가족은 이러해야 한다는 환상은 계속 주입되고, 그 환상은 현실과 이상과의 틈을 자꾸 벌여서 개인의 행불행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정상적인 가족의 모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성원 역시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만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1순위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짐처럼 여겨지는 걸까. 솔직 하자. 나는 그렇다. 사회의 모든 질서와 도덕의 결정체인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늘 싸워야 한다. 수긍하지 않기 위해서. 물론 개개인과의 애정은 별도다. 그것과 별개로 '가족'이라는 것은 내게 짐이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때의 그 행복의 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구호만으로 어떻게 가족 구성원의 행복이 가능할까.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늘 구분해서 나누는 것도 내겐 늘 목에 가시와 같다. 청소년은 늘 보호의 대상이다. 청소년은 판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성숙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많은 정책들이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앞세운다. 영화 심의등급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 존재 이유는 청소년 관람불가와 전체 이용가를 나누기 위함이다. 청소년이 봐도 되는가 보면 안 되는가를 말이다. 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친다고 해도 청소년에게 의사를 물어보진 않는다. 그나마 부모님께 동의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임무가 청소년들을 더 나약하게 만든다. 청소년이라는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보호가 명분이 되어 청소년이 가족에 의존하고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에 그저 따르는 것이 과연 당연한 걸까? 청소년을 무조건 가정 안에 밀어 넣고 그 안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요하는 게 뭐 그리 범죄 예방에 효과 있을까.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저 범죄를 막기 위한 범죄 예방이 얼마나 대단하게 청소년들을 '희망'으로 꽃피울 수 있을까. 나는 기차에 내려 서울역 밖으로 나설 때마다 ‘청소년은 한국의 미래입니다’ 라는 커다란 글귀를 본다. 갸우뚱해진다. 이걸 추구하는 사회의 방식에 대해. 비단 청소년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늘 어떤 희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할 뿐 행복의 구성을 고민하는 일은 늘 뒷전이다. 누군가의 진짜 희망이고 진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을 사유해야 하지만, 늘 쫓기듯 오늘도 고단해 하며 달릴 뿐이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범죄 예방.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섣불리 책임전가하지 않고 차근차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는 건 다들 비슷할 테니 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75 | 추천: 1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이명박 정부 집권 후 1년이 지났다. 축하하는 자리보다 성토하는 자리가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1년이 꼭 100년 같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정부가 지난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고, 모든 것을 바꿔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 양상을 살펴보니, 대통령이 항상 서두에 말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갖고 있는 자, 더 많은 땅과 돈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바로 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불행은 권력, 땅, 돈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복지, 교육, 노동, 인권, 환경 등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민주적 권리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짓밟혔고, 무참히 꺾였다. 현재진행형이다.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럽다. 이제는 ‘대의적 권력집중주의’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최근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는 우리를 초대하기는커녕 발로 걷어차고 있는 현실이다. 정책을 집행하다보면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계획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그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여 정책을 새로 짜고, 집행하면 된다. 왜냐하면 정부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는 오히려 잘못으로 드러난 정책을 강화시키려고, 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입과 생각을 막고, 죽음으로 내몰고, 실제로 죽이고 있다. 교육 정책만 봐도 그렇다. 대학입시 자율화, 일제고사, 영어몰입교육 등으로부터 나온 1년 동안의 결과는 처절하다. 사교육비 절반, 반값 등록금 정책과는 다르게 2008년도에 사교육비가 무려 23%가 뛰어 올랐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가계 지출이 줄었음에도 사교육비 만큼은 폭등했다. 여기에 정부 학자금대출 연체율은 점점 더 올라가고만 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불도저 밀어붙이기식으로 정책 고수, 강화만을 부르짖고 있다. 정책 결과에 대한 반성이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은 지난 2월 25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부근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청소년단체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모임 세이노(Say-no)'가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의 일제고사 부활과 무한경쟁교육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1년 만에 20여 년간 쌓아왔던 남북 간 신뢰가 다 무너졌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유신정권 때보다도 못하게 모든 교류가 다 끊겼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까지도 운운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는 교육정책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인한 결과다. 6.15 및 10.4 선언 불이행, 비핵개방3000, 통일부 수장에 냉전적 사고방식을 지닌 외교안보전문가 등장,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엄격한 상호주의 등의 정책이 지금의 불행을 가져왔다. 입으로는 ‘상생과 공영’을 얘기하지만, 결국 지금의 한반도는 ‘상극과 공멸’로 가고 있다. 여전히 반성이 없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념 없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군대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어떠한 일을 잘못 처리하고, 잘못 생각할 때 사용하곤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일반적인 지식 및 보편적인 관념이 부족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009년 계획을 세울 때 전년도인 2008년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린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새로운 계획을 짠다. 바로 이것이 ‘기본적인 개념’일 것이다. 하물며 정부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는 만큼 더욱 냉정하고 면밀하게 지난 성과와 과오를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집단에게 탄압을 가하고 있다. 정부가 한 개인보다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기본적인 개념’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잘못된 정책으로 드러난 2008년 정책을 2009년도에도 들이밀고 있다. 여전히 ‘존경하는 국민’과는 소통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아예 언론을 시작으로 해서 미리미리 다 틀어막으려고 한다. 사법부까지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반성도 안 한다. 엄마한테 회초리를 맞는 아이보다도 못하게, 국민의 회초리를 꺾어버리고 있다. 현 정부에게는 냉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2008년의 잘못을 세계 경기 불황 탓으로만 돌리는 짓은 멈춰야 한다. 그리고 2009년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게, 남북이 직접 만나서 얘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초리를 휘두를 권리가 있는 국민들과 소통을 해야만 한다. 따끔한 회초리도 맞아야 한다. 바로 이 시작이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한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개념’이 바로 서는 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57 | 추천: 0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눈물을 흘리며 준법을 외치던 경찰청장 내정자와 성폭력 사건으로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슷한 날 사임했다. 이번 사안을 대리했던 인권단체는 지난 주 민주노총의 간부였던 사건 당사자에 대해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한 상태이다. 일반 언론들이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사건이 될 수 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잊어도 시민사회단체에 일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왜 자꾸 재발되느냐와 대안은 무엇인지다. 원인과 해결방법을 알아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핵심이 대의와 명분, 그리고 사명과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근거를 갖고 계속 활동할 수 있다. 노동단체에서 일하는 한 분은 이번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 사퇴한 것으로 '성폭력 사건'이 잊히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런 바람은 인권의 기준, 성찰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경찰청장 내정자는 눈물을 흘리는데, 민주노총 간부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곡소리를 내고 운다고 해서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정부나 공공기관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내부에 대한 칼날도 무디지 않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티끌하나 없는 사람이나 조직이 있겠는가? 그러나 조직 내부에서 자정 노력을 하고, 이런 노력에 진정성을 담으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일반 회원이나 평조합원에게도 이런 자세는 필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일하는 사람들부터 책임있게 활동하겠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책임있는 자세 다음에는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평가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민주노총이란 조직과 가해자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과연 민주노총 뿐일까. 반복되는 시민사회 내부의 성폭력 사건들이 돌장승처럼 우리 앞에 서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같은 잘못이 반복될 위험 요소가 우리 주변에 그대로 맴돌고 있다. 몇 해 전 <시민의신문> 이 모 사장의 성희롱 사건을 접하면서 시민사회의 '성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와 지금의 민주노총 사건은 엄연히 다른 사건이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함께 돌아봐야 할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사건이다. <시민의신문> 사건 진행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저명한 지도자 한분이 공개적으로 이 모 사장을 옹호하고, 이 모 사장에 대한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항변을 하기도 했다. 사실 책임있거나 유명한 단체의 중견 활동가들 대부분도 이 문제를 외면했다. 그들은 침묵했지만, 침묵이 묵인이나 방조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본의와 상관없이 침묵이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시민사회 내부의 인권의식은 어떤 수준인지,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아픈 숙제가 주어진 것 같다. 솔직히 나 자신도 다른 할 일도 많고, 더 중요한 일도 많은데 성폭력 사건 같은 '사소한' 일은 그냥 사과를 잘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바람을 가지기도 했었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등 피해정도에 따라 단계론적 접근만 생각하고 성폭력이 아닌 성희롱과 성추행은 아직 위법이 아니거나 범죄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시민의신문> 이 모 사장의 성희롱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사회의 젊은 운동가들의 모습. 그러나 이제는 세상도 바뀌었고, 관련 법률도 바뀌었다. 시대의 흐름에 쫓아가지 못하거나, 피해자와 연대하려는 상식도 갖추지 못한 게 잘못이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머물러 있던 것이 잘못이었다. 세상은 민주노총이나 시민사회단체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에서 일반 직장에서도 하는 성희롱예방교육을 하는 단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30명 이상의 모든 직장에서 의무적으로 받는 기본적인 프로그램조차 운용하지 않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성폭력 같은 것은 그저 여성인권관련 단체의 사업으로만 여기는 태도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다. 구성원들의 인권의식을 높이고 내부에서부터 착실한 성찰이 진행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시민사회단체가 보다 빨리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육활동도 강화되어야 한다. 아예 교육이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하고, 아주 조금 형식적인 교육만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활성화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가 속한 조직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명상교육도 필요하고, '자정 진단 기준' 도 마련되어야 한다. 한 때 분노의 마음, 복수의 마음만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각팍하기도 했지만, 싸움이 동인이 분노만일 수는 없다. 공안통치, 철권독재에게 분노를 느끼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 분노의 첫마음만으로 운동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분노라는 첫번째 문제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를 맑게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성희롱 예방교육이나 성찰을 위한 교육, 또는 인권교육이 그저 맛 보기식 또는 '우리도 이런 일을 한다'며 면피용으로 진행되어선 안된다. 지도부가 총사퇴해야 할만큼 중요한 문제이고, 아니 그 이전에 20년 역사의 민주노조운동의 뿌리 자체가 흔들리는 중대한 사태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태를 무겁게 인식한다면, 그만큼의 무게로 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경찰관도 군인도 인권교육을 받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이라면 훨씬 더 많이 철저하고도 심도깊은 교육이 필요하다. 겉말로가 아니라, 속내까지도 잘못을 지적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면, 뼈저린 각성의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민주노총만이 아니라, 그동안 적당히 지냈던 시민사회단체 모두가 뼈아픈 각성의 바늘을 찾아야 한다. 그런 과정이 모두 운동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32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전임연구원, 전임 간사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집을 중요한 재산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이사라고 하면 보통 좀 더 넓은 집이거나 좋은 조건으로 옮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사실 이는 왜곡된 이미지일 뿐 대다수의 서민은 오른 임대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보통이다. 은평구 응암동에 살다가 서대문구 남가좌동으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한 우리 가족 또한 마찬가지 처지다. 이번에 우리를 받아준 곳은 은평구 수색동이다. 일산으로 가는 서울의 마지막 동네다. 응암동에 살 때는 집이 서울시립병원 옆 비탈이었다. 여름에는 땀이 나고, 겨울에는 눈이라도 오면 종종걸음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남가좌동에서는 집은 낡았지만 그나마 조금 덜 비탈진 곳이었다. 그 때 세 살배기인 아이와 함께였던 우리 부부는 그 작은 차이를 위안으로 삼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를 한 수색동은 응암동처럼 다시 집 바로 뒤에 등산로가 있는 비탈이다. 이사를 하는 날 이 것 저 것 처리를 하느라 비탈을 몇 차례 오르내렸더니 다리가 뻐근 거렸다. 게으른 탓에 운동을 안 한 이유도 있겠지만, 만만치 않은 경사도도 단단히 한 몫 했을 게다. 뭐 아래보다 공기도 좋고, 좋은 산책로도 있으니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 이번 이사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살고 있던 남가좌동은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곳이다. 도시 재개발도 여러 가지 구분이 있는데, 그 중 계획에 따라 진행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뉴타운’ 지역이라고 한다. 남가좌동이 바로 소위 ‘가좌뉴타운’ 지역이다. 2년 전 이사를 들어갈 때부터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재개발조합이 설립조차 되지 않은 상태여서 우리 부부는 ‘떡고물’을 바라보고 이사를 감행했다. 이주가 시작되면 세입자에게도 일정한 이주비가 나오는데 그걸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많지는 않은 돈이지만 워낙 가난한 우리 가족에게는 그 떡고물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주택임대차계약 상 2년 계약을 하면서도 집주인에게 가능하면 이주가 시작될 때까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뒀다. 주인도 그러자고 했다.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재개발조합도 설립되고 1년 안에 이주가 이루어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데 계약만료가 다가오자 집주인이 당황스러운 얘기를 꺼냈다. 시골로 내려가 있던 집주인이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라며 집을 비우던지 세를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올려달라는 세도 턱없는 수준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떡고물도 떡고물이려니와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과연 다른 곳에 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집주인과 협상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도 낡은데다 얘기도 붙이기 싫어 그만두기로 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버틴다고 꼭 유리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서울시 2차 뉴타운 사업 12개 지구 중 하나인 가좌뉴타운 지구 제2구역 재개발 공사 착공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이사를 결심한 우리 가족을 받아줄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부동산값 하락으로 전세비도 내렸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겨우 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별개의 상황인 것이다. 은행이자가 바닥을 치면서 소액임대차의 경우 전세가 없어지고 월세로 전환을 많이 해 오히려 부담만 높아졌다. 많지 않은 수입에 상대적으로 높은 월세는 서민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른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내 발품을 팔아 찾은 곳이 이번에 이사한 수색동이다. 한숨은 돌렸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수색동 역시 ‘재건축’이 예정된 곳이다. 계약 때부터 중개업자는 2년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기상 떡고물도 바라볼 수 없는 집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깨끗한 집이어서 우리 부부는 각오하기로 했다. 다음 이사에는 아예 서울을 떠나리라는 결심도 했다. 현재 우리 가족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우울한 위안도 들려온다. ‘용산참사’ 이후 정부가 재개발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조정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재개발 시장이 주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참사’를 겪고서야 외양간 고치기 바쁜 이 사회가 그저 씁쓸할 뿐이다. 아마 우리 가족과 같은 상황은 대다수의 서민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풍경일 것이다.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안전하고 평화롭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권리’라고 규정한 주거권은 한국에서는 그저 먼 얘기다. 품위는커녕 평화도 찾기 어렵다. 주거가 권리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개발업자나 부동산 투기꾼들의 돈벌이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보금자리’는 허울이다. 주거에 사람은 없고 돈만 남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가족과 같은 ‘이주인생’들의 한숨은 그치기 어렵다. 용산참사와 같은 상황 또한 반복이 뻔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용산참사에 대해 ‘참사’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언론도 그렇고 시민사회의 대응도 MB의 공격적 정책과 경찰의 진압작전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번 참사에 대해 MB와 경찰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검찰의 면죄부는 책임회피의 방어막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도시 개발과 관련한 이런 일들이 어디 MB정부에서만의 일이던가. 돈이 주거를 장악하고 난 이후로 줄곧 계속되어 왔고 예상되던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큰 교훈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주거에서 돈을 떼어내는 일, 개발의 중심에 인간이 설 수 있도록 하는 논의가 시급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을 먹이삼아 성장하는 도시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말이다. 더구나 ‘삽질’에 목마른 MB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주거에 대한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점을 찾는 작업은 절실함 이상이다. 지금 서울 곳곳은 재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계획되어 있다. 그 속에서 한숨을 쉬는 서민들 또한 부지기수다. 근본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무작정 ‘MB탓’의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는 한 우리 가족과 같은 이들은 이제 서울과 작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도시가 좋다거나 서울을 떠나기 싫다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도시도 서울도 싫다. 그렇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몰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가족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 또한 개발의 혜택을 누려야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시민단체 활동은 8년차, 민변이라는 법률가단체에서 활동한지 3년차, 요즘 일이 거의 폭탄 수준이다. 정말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지경이다.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면 항상 입버릇처럼 “요즘 너무 바쁘다 ...구시렁구시렁... ”하지만 이 입버릇이 무색해 질 정도로 일의 양과 질이 확연히 다르다. 요즘처럼 일자리가 부족하고 청년실업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시대에 바쁜 것을 불평하면 욕먹을 수도 있지만 솔직히 일을 하면서도 흥이 나기보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버틴다는 생각도 드니 일폭탄이 반갑지만은 않다. 모름지기 결과가 있으면 그 원인이 있는 법! 언제부터 왜 이렇게 바빠졌는지 되짚어 보면, 시작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화한다고 하여 추운 겨울에 노숙을 하며 반대활동을 했던 일이었다. 꽃피는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자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한다고 해서 전 국민적 저항을 맞아 촛불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였고, 사실 얼씨구나 축제구나 하면서 촛불을 따라 다니다가(이때는 진짜 재미있었다) 경찰들의 무식, 폭력, 불법 3종 세트 진압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인권침해 감시하러 매일 밤을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보내게 되었다. 촛불이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자 길가에서 촛불 들던 사람, 유모차 어머님들, 광고 중단 전화를 걸었던 네티즌들을 검찰이 상상 불허 불구속·구속기소, 약식명령을 청구하니, 이 역시도 법률가단체에서 책임져야 하기에 비록 거리의 촛불은 사그라졌지만 검찰의 칼날을 막기 위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여전히 촛불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기소, 약식명령, 정식재판 등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국회 쪽에서 국민들의 표현·집회·언론의 자유를 말살하고, 재벌과 소위 1% 부자들을 위한 법률들을 우르르 발의하고선 이를 통과시키려고 하니 이 또한 꼭 막아야 하는 것들인지라 다시 추운 겨울날 여의도와 사무실을 오가며 기자회견과 집회, 농성을 해야 했다. 다행히 한 해는 넘겼지만 여전히 시한폭탄인 상태가 지속되어, 다시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이 덜컥 구속되었고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 관련된 활동을 하던 중, 다시 용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하여 6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이를 위한 진상조사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2월이 되어 국회에서는 다시 무더기 악법들을 통과하려 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청와대 정리하면 중간에 잠깐씩 짬이 있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시작과 함께 일폭탄이 터졌다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한국의 인권은 더욱 후퇴될 것이 자명하고, 이를 원위치 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이 활동하는 상근자들과 밥을 먹으면서 누군가에게서 “이명박 정부와 우리가 업무협약을 맺은게 아닌가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다른 관련단체들도 다 그러하겠지만 법률가단체인 민변의 측면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진행하고 저지른 대부분의 업무가 직접 연관되어 있고, 그 파괴력이 국민모두의 인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임을 잘 알기에 긴급히 활동을 해야 하는 것들이다. 말도 안 되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이 벌여 놓은 일들 정리할 때까지만 조금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비상(非常)이 일상(日常)된 것 같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가졌던 ‘아마도 5년 동안 많이 바빠지겠다.’ 는 막연한 예측이 어떠한 현실이 되었는지 톡톡히 느끼고 있는 요즘, 바쁘다고 투덜댈 수만은 없다. 앞으로도 별로 덜 바빠질 수는 없을 듯하여, 주어진 일폭탄에 맞서기 위해선 개인적 각오도 새롭게 다지면서 일을 좀 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나누어 해야겠다.(이 정부 덕분에 효율적인 일처리 방식을 배우게 되는구나!) 더불어서 같이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함께 작은 힘을 키우기 위한 연대도 좀 더 노력하여야겠다. 지금은 비록 조금 밀리지만 그래도 조만간 이명박 정부에 똥침!!과 멋진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도 재미있는 상상이다. 그게 제 2의 촛불이면 더더욱 좋고.
2017-07-11 | hrights | 조회: 33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