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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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변호사가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검찰은 피고인이 유죄라는 어떠한 증거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의심’에 입각해 판단해 주십시오.” 잠시 후 판사가 물었다. “배심원단은 일치된 의견에 도달했습니까?” 배심원은 신중하게 하이라이트로 달려간다. “매사추세츠 검찰 대 ㅇㅇㅇ사건은 … 유죄가 아닙니다(Not Guilty).” ‘보스턴 리걸’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 ‘미드’에 완전히 푹 빠졌다. 2004년 처음 시작해 2008년 시즌5까지 이어진 이 길고 긴 드라마는 보스턴에서 최고로 꼽히는 ‘크레인, 풀 & 슈미트’라는 로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모은 법정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백미는 형사사건에 나선 변호사들이 배심원단 앞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며 토해내는 최종변론 장면이다. 특히 주인공 앨런 쇼어 변호사가 피고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달변을 뽐내는 모습에 나도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다. (앨런 쇼어 역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1989년 깐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제임스 스패이더가 열연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앨런 쇼어 변호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항상 강조하는 게 있다. ‘합리적 의심’이다. 시즌3 마지막 회에 보면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형제가 나온다. 앨런 쇼어와 그의 절친한 친구 데니 크레인이 한 명씩 변호를 맡았다. 두 변호사는 서로 상대방이 맡은 피고인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배심원단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결국 검찰이 ‘두 형제’를 공범으로 기소했지만 공범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두 형제는 석방된다. 드라마 한글자막은 언제나 배심원단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번역하지만 실제 배심원단은 결코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Not Guilty” 즉, ‘유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유죄가 아니니 피고인을 잡아가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고인을 피고인으로 삼은 경찰과 검찰에 내리는 준엄한 항의다. 결국 피고인이 유죄임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된다. ‘보스턴 리걸’을 보면서 내가 정말 부러워하는 점은 유죄 여부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는 점이다. 만약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거나 ‘합리적 의심’을 풀어주지 못하면? 피고인은 풀려난다. 심지어 기소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면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재판에서 배격한다는 원칙에 따라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 한 변호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피고인이 검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면 이를 입증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한국에선 검찰이 고문하지 않았단 사실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고문을 당했다는 걸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한 소비자운동가가 내게 말해줬다.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정부가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안전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면 위험”이다. 한국에선 “위험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니 안전”이다. 결국 “그거 먹고 죽은 사람 봤냐?”는 거다. 지난 3월18일 법원은 한미FTA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법정 구속된 정창수 전 보좌관에 대해 항소를 기각했다. 그는 2007년 한미FTA와 관련 정부가 중요한 협상 목표로 제시하던 미국의 반덤핑제도 완화 등 무역구제안이 물 건너갔다는 정부문건을 유출했다. 국회 진상조사도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고 법원은 2007년 말 구속영장청구을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9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 조용준 부장판사는 비밀누설에 대해서는 뚜렷한 영향이 없다고 했는데도 항소기각으로 결과가 나왔다.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복역 중인 정창수씨. 사진 출처 - 시사인 나는 검찰에 묻고 싶다. 자신들이 주장한 ‘사전에 협상전략을 노출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는 기소사실을 입증했는가. 설마 협상전략을 노출하는 바람에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나는 법원에 묻고 싶다. 검찰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는가. ‘보스턴 리걸’이 보여준 세계는 “유죄가 아니니 당신은 석방입니다.”라고 외친다. 내 주위에선 지금도 “당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했으니 감옥에 가시오.”라고 소리친다. “닥치고 법질서 지키는 게 좋‘읍’니다.”란 속삭임과 함께.
2017-07-11 | hrights | 조회: 356 | 추천: 0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이거 참 야단인걸...”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음이 괜스레 찜찜하고 부산스럽다. 갓난아기의 살결 같은 봄이 왔다. 미처 환영할 시간도 없이, 봄을 살아야 할 준비도 안했는데 이렇게 봄은 내 앞에 와있다. 지난주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망울들을 볼 때는 환한 기쁨이었다. “반갑고 고맙다.” 겨울이라는 깊은 고요를 견디어 내고 다시 살아낸 생명들에 대한 경이로움에 감동하면서 눈인사를 나누었더랬다. 그렇게 천천히 봄을 음미하며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춘분이 지난 며칠 사이 꽃들은 활짝 피었다. 천천히 다가올 줄 알았는데 왈칵하고 달려든 봄이 못내 야속하다.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낸 온난화의 영향이 자연 조차도 숨 가쁘게 돌아가게 하고 있다. 일찍 서두르느라 얼마나 힘들까. 꽃들 역시 준비 없이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영 어색할 것 같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화작용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재앙을 동반한다. 인간에게는 재앙이지만 자연에게는 생명의 순환이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계절의 변화를 보며 두려움이 드는 까닭이다. 이렇듯 마음이 번잡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한숨이 나왔다. 함께 일하고 있는 아저씨가 묻는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무슨 걱정이 있어?” “아니요... 난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는데 봄이 벌써 왔잖아요. 보세요, 온갖 꽃들이 너무 일찍들 피어나고 있어요. 쟤들도 즐겨야 할 시간이 있을 텐데 너무 일찍 피는 게 안쓰럽고 그래서요.” 아저씨는 웃는다. “이 사람아 준비는 벌써 했어야지. 암튼 날씨도 미친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끝을 흐리시며 아저씨는 한 말씀 더 얹어놓으신다. “일찌감치 준비해둬. 조금 있으면 여름이야 허허허.” 땅을 밟고 앉아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내린 비로 복수화와 미선나무의 꽃잎들이 꽤 저물어 있었다. 촘촘히 빗물을 머금고 있는 풀들과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순환하는데 인간의 탐욕은 변함이 없다.”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물러앉았다.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너의 신발을 벗어라. 그래야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겠다.” 미선나무의 곷잎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러고 보니 나는 흙을 밟고 있었다. 막 피어나고 있는 풀들로 가득한 흙. “아 이것이 생명이구나. 어느 것 하나 생명 아닌 게 없는 세상이구나.” 뭇 생명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흙 한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 텐데 나는 종종 잊고는 한다. 편리함과 무지의 탈을 쓴 이기심 따위들로 인해 말이다. 신발을 벗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신세라니... “그렇구나! 봄을 맞이할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구나.” 봄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왔지만 나는 생명의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 마음은 겨울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파헤치고 덧씌우고 짓누르고 불태우는 건설과 파괴의 시절이다. 건설과 파괴는 자본이 아니라 자연의 몫이어야 한다. 피의자의 얼굴로 권력의 실체를 가리는 파렴치한 시절. 권력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전토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은 노상강도와 같다. 청와대 비서관과 대법관이 전자우편으로 헌법과 법을 유린하는 대한민국이다. 이 웃지 못 할 상황에서 나는 매우 똑똑한 총리에게 영어 단어를 배웠다. 전자우편은 e-mail이다. 젠장! 생명들이 스러지고 유린당하는 곳에서 내 마음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시시각각 꽃들은 피어나고 나무는 푸르러질 터인데 말이다. 잠시 눈을 감는다. 세상근심에 마음을 빼앗긴 내가 스승과 함께 걷고 있음이다. 순간 스승이 뒤돌아 가시며 처음 머물렀던 자리로 향한다. 나는 놀라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흐르는 곳이 네가 머물러야 할 자리이다” “흐르는 곳에 머무름은 무엇입니까?” “지금 있는 그 자리가 흐름이며 머무름이야. 들꽃들과 나무들의 변화는 있는 그 자리에서의 흐름이며 또한 머무름이다. 그럴 때에 꽃들은 피어나고 열매는 맺어지는 것이지.” “아...” “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네 자리에서 흐르며 또한 머물러라. 깨어 있는 꽃들은 제아무리 혹독한 겨울을 겪어도 피어낼 줄 안다.” 눈을 떠보니 여린 풀잎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머무는 자리에서 바람과 함께 흐르고 있음이다. “그래 그렇지.” 고개 주억거리며 마음이 스르르 눈 뜨는 순간이다. 그렇다 봄이다. 이제야 온전히 봄을 환영한다. 꽃은 피어야 한다. 아직 피지 않은 나는 다만 깨어있기를 바랄뿐이다. 피어라 꽃이여 피어라 생명이여!
2017-07-11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3월, 개강이다. 이번 학기 일탈과 범죄와 관련된 수업을 하나 듣게 됐다. 첫 시간, 교수님은 수업 이해를 위해 영상물 하나를 보여 주셨다. 청소년 범죄에 관한 내용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원인 분석이나 조사를 잘 해서 상당히 잘 만든 보도물이라고. 처음엔 어린 아이들이 절도와 폭행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걸 보고 청소년들을 그냥 저렇게 방치해도 되나 싶었다. 최근 여중생이 친구를 사정없이 폭행하는 영상이 떴을 때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충격적이었다. 국가의 미래, 희망이라 일컬어지는 청소년이라는 사회 내 특수한 위치가 있는지라, 청소년 범죄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다뤄진다. 나 역시 그렇게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사례를 보여주고는 그 원인은 가정환경이라며 파고 들어가는 패턴을 느끼면서부터였다. 모든 건 가정환경의 탓이었다. 물론 사례로 나오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은 다 불우했다. 가난하고 부모님이 이혼했다든가 자주 싸웠다든가. 어쨌든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마치 그게 사실의 전부인 양, 가정만 화목하면 청소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의심할 만하다. 영상을 보면, 아이에게 열린 질문은 하진 않는다. 질문은 이미 '가정문제'로 앞서 나가 있고 카메라는 벌써 그 아이의 가정사를 훑고 있다. 이때 정부의 역할은 그저 부모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상담하거나 교육하기를 요구받는 데 그칠 뿐이다. 비단 청소년 범죄의 원인에만 가정환경을 헤집고 들어가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사회적 범죄가 일어나도, 늘 그 사람의 가정환경부터 파헤치기 일쑤다. 오히려 사람들은 범죄자에게 불우한 가정환경이 있어야지만 안심하지 않는가.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회 전체에 폭력이 난무하는데 가정 내에서 폭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 폭력에 노출돼 있다면 꼭 청소년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정신이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정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자꾸만 폭력과 가난에 노출되는 가정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특히 청소년 문제를 곧바로 가정불화와 연관 짓는 문제의식의 틀이 그토록 불편한 걸까. 나는 더듬더듬 내 불편함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개인의 불행한 원인을 가족에서 줄곧 찾는다. 외부에서도 그렇게 규정하고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가족은 잘 보호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힘을 받는다. 가족의 임무는 막강해진다. 재생산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지면서 말이다. 과연 가족이 작동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가족은 이러해야 한다는 환상은 계속 주입되고, 그 환상은 현실과 이상과의 틈을 자꾸 벌여서 개인의 행불행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정상적인 가족의 모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성원 역시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만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1순위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짐처럼 여겨지는 걸까. 솔직 하자. 나는 그렇다. 사회의 모든 질서와 도덕의 결정체인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늘 싸워야 한다. 수긍하지 않기 위해서. 물론 개개인과의 애정은 별도다. 그것과 별개로 '가족'이라는 것은 내게 짐이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때의 그 행복의 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구호만으로 어떻게 가족 구성원의 행복이 가능할까.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늘 구분해서 나누는 것도 내겐 늘 목에 가시와 같다. 청소년은 늘 보호의 대상이다. 청소년은 판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성숙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많은 정책들이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앞세운다. 영화 심의등급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 존재 이유는 청소년 관람불가와 전체 이용가를 나누기 위함이다. 청소년이 봐도 되는가 보면 안 되는가를 말이다. 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친다고 해도 청소년에게 의사를 물어보진 않는다. 그나마 부모님께 동의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임무가 청소년들을 더 나약하게 만든다. 청소년이라는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보호가 명분이 되어 청소년이 가족에 의존하고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에 그저 따르는 것이 과연 당연한 걸까? 청소년을 무조건 가정 안에 밀어 넣고 그 안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요하는 게 뭐 그리 범죄 예방에 효과 있을까.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저 범죄를 막기 위한 범죄 예방이 얼마나 대단하게 청소년들을 '희망'으로 꽃피울 수 있을까. 나는 기차에 내려 서울역 밖으로 나설 때마다 ‘청소년은 한국의 미래입니다’ 라는 커다란 글귀를 본다. 갸우뚱해진다. 이걸 추구하는 사회의 방식에 대해. 비단 청소년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늘 어떤 희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할 뿐 행복의 구성을 고민하는 일은 늘 뒷전이다. 누군가의 진짜 희망이고 진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을 사유해야 하지만, 늘 쫓기듯 오늘도 고단해 하며 달릴 뿐이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범죄 예방.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섣불리 책임전가하지 않고 차근차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는 건 다들 비슷할 테니 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59 | 추천: 1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이명박 정부 집권 후 1년이 지났다. 축하하는 자리보다 성토하는 자리가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1년이 꼭 100년 같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정부가 지난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고, 모든 것을 바꿔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 양상을 살펴보니, 대통령이 항상 서두에 말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갖고 있는 자, 더 많은 땅과 돈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바로 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불행은 권력, 땅, 돈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복지, 교육, 노동, 인권, 환경 등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민주적 권리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짓밟혔고, 무참히 꺾였다. 현재진행형이다.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럽다. 이제는 ‘대의적 권력집중주의’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최근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는 우리를 초대하기는커녕 발로 걷어차고 있는 현실이다. 정책을 집행하다보면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계획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그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여 정책을 새로 짜고, 집행하면 된다. 왜냐하면 정부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는 오히려 잘못으로 드러난 정책을 강화시키려고, 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입과 생각을 막고, 죽음으로 내몰고, 실제로 죽이고 있다. 교육 정책만 봐도 그렇다. 대학입시 자율화, 일제고사, 영어몰입교육 등으로부터 나온 1년 동안의 결과는 처절하다. 사교육비 절반, 반값 등록금 정책과는 다르게 2008년도에 사교육비가 무려 23%가 뛰어 올랐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가계 지출이 줄었음에도 사교육비 만큼은 폭등했다. 여기에 정부 학자금대출 연체율은 점점 더 올라가고만 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불도저 밀어붙이기식으로 정책 고수, 강화만을 부르짖고 있다. 정책 결과에 대한 반성이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은 지난 2월 25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부근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청소년단체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모임 세이노(Say-no)'가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의 일제고사 부활과 무한경쟁교육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1년 만에 20여 년간 쌓아왔던 남북 간 신뢰가 다 무너졌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유신정권 때보다도 못하게 모든 교류가 다 끊겼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까지도 운운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는 교육정책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대북정책으로 인한 결과다. 6.15 및 10.4 선언 불이행, 비핵개방3000, 통일부 수장에 냉전적 사고방식을 지닌 외교안보전문가 등장,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엄격한 상호주의 등의 정책이 지금의 불행을 가져왔다. 입으로는 ‘상생과 공영’을 얘기하지만, 결국 지금의 한반도는 ‘상극과 공멸’로 가고 있다. 여전히 반성이 없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념 없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군대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어떠한 일을 잘못 처리하고, 잘못 생각할 때 사용하곤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일반적인 지식 및 보편적인 관념이 부족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009년 계획을 세울 때 전년도인 2008년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린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새로운 계획을 짠다. 바로 이것이 ‘기본적인 개념’일 것이다. 하물며 정부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는 만큼 더욱 냉정하고 면밀하게 지난 성과와 과오를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집단에게 탄압을 가하고 있다. 정부가 한 개인보다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기본적인 개념’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잘못된 정책으로 드러난 2008년 정책을 2009년도에도 들이밀고 있다. 여전히 ‘존경하는 국민’과는 소통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아예 언론을 시작으로 해서 미리미리 다 틀어막으려고 한다. 사법부까지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반성도 안 한다. 엄마한테 회초리를 맞는 아이보다도 못하게, 국민의 회초리를 꺾어버리고 있다. 현 정부에게는 냉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2008년의 잘못을 세계 경기 불황 탓으로만 돌리는 짓은 멈춰야 한다. 그리고 2009년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게, 남북이 직접 만나서 얘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초리를 휘두를 권리가 있는 국민들과 소통을 해야만 한다. 따끔한 회초리도 맞아야 한다. 바로 이 시작이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위한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개념’이 바로 서는 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41 | 추천: 0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눈물을 흘리며 준법을 외치던 경찰청장 내정자와 성폭력 사건으로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슷한 날 사임했다. 이번 사안을 대리했던 인권단체는 지난 주 민주노총의 간부였던 사건 당사자에 대해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한 상태이다. 일반 언론들이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사건이 될 수 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잊어도 시민사회단체에 일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왜 자꾸 재발되느냐와 대안은 무엇인지다. 원인과 해결방법을 알아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핵심이 대의와 명분, 그리고 사명과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근거를 갖고 계속 활동할 수 있다. 노동단체에서 일하는 한 분은 이번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 사퇴한 것으로 '성폭력 사건'이 잊히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런 바람은 인권의 기준, 성찰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경찰청장 내정자는 눈물을 흘리는데, 민주노총 간부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곡소리를 내고 운다고 해서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정부나 공공기관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내부에 대한 칼날도 무디지 않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티끌하나 없는 사람이나 조직이 있겠는가? 그러나 조직 내부에서 자정 노력을 하고, 이런 노력에 진정성을 담으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일반 회원이나 평조합원에게도 이런 자세는 필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일하는 사람들부터 책임있게 활동하겠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책임있는 자세 다음에는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평가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민주노총이란 조직과 가해자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과연 민주노총 뿐일까. 반복되는 시민사회 내부의 성폭력 사건들이 돌장승처럼 우리 앞에 서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같은 잘못이 반복될 위험 요소가 우리 주변에 그대로 맴돌고 있다. 몇 해 전 <시민의신문> 이 모 사장의 성희롱 사건을 접하면서 시민사회의 '성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와 지금의 민주노총 사건은 엄연히 다른 사건이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함께 돌아봐야 할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사건이다. <시민의신문> 사건 진행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저명한 지도자 한분이 공개적으로 이 모 사장을 옹호하고, 이 모 사장에 대한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항변을 하기도 했다. 사실 책임있거나 유명한 단체의 중견 활동가들 대부분도 이 문제를 외면했다. 그들은 침묵했지만, 침묵이 묵인이나 방조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본의와 상관없이 침묵이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시민사회 내부의 인권의식은 어떤 수준인지,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아픈 숙제가 주어진 것 같다. 솔직히 나 자신도 다른 할 일도 많고, 더 중요한 일도 많은데 성폭력 사건 같은 '사소한' 일은 그냥 사과를 잘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바람을 가지기도 했었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등 피해정도에 따라 단계론적 접근만 생각하고 성폭력이 아닌 성희롱과 성추행은 아직 위법이 아니거나 범죄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시민의신문> 이 모 사장의 성희롱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사회의 젊은 운동가들의 모습. 그러나 이제는 세상도 바뀌었고, 관련 법률도 바뀌었다. 시대의 흐름에 쫓아가지 못하거나, 피해자와 연대하려는 상식도 갖추지 못한 게 잘못이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머물러 있던 것이 잘못이었다. 세상은 민주노총이나 시민사회단체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에서 일반 직장에서도 하는 성희롱예방교육을 하는 단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30명 이상의 모든 직장에서 의무적으로 받는 기본적인 프로그램조차 운용하지 않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성폭력 같은 것은 그저 여성인권관련 단체의 사업으로만 여기는 태도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다. 구성원들의 인권의식을 높이고 내부에서부터 착실한 성찰이 진행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시민사회단체가 보다 빨리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육활동도 강화되어야 한다. 아예 교육이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하고, 아주 조금 형식적인 교육만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활성화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가 속한 조직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명상교육도 필요하고, '자정 진단 기준' 도 마련되어야 한다. 한 때 분노의 마음, 복수의 마음만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각팍하기도 했지만, 싸움이 동인이 분노만일 수는 없다. 공안통치, 철권독재에게 분노를 느끼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 분노의 첫마음만으로 운동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분노라는 첫번째 문제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를 맑게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성희롱 예방교육이나 성찰을 위한 교육, 또는 인권교육이 그저 맛 보기식 또는 '우리도 이런 일을 한다'며 면피용으로 진행되어선 안된다. 지도부가 총사퇴해야 할만큼 중요한 문제이고, 아니 그 이전에 20년 역사의 민주노조운동의 뿌리 자체가 흔들리는 중대한 사태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태를 무겁게 인식한다면, 그만큼의 무게로 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경찰관도 군인도 인권교육을 받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이라면 훨씬 더 많이 철저하고도 심도깊은 교육이 필요하다. 겉말로가 아니라, 속내까지도 잘못을 지적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면, 뼈저린 각성의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민주노총만이 아니라, 그동안 적당히 지냈던 시민사회단체 모두가 뼈아픈 각성의 바늘을 찾아야 한다. 그런 과정이 모두 운동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22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전임연구원, 전임 간사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집을 중요한 재산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이사라고 하면 보통 좀 더 넓은 집이거나 좋은 조건으로 옮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사실 이는 왜곡된 이미지일 뿐 대다수의 서민은 오른 임대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보통이다. 은평구 응암동에 살다가 서대문구 남가좌동으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한 우리 가족 또한 마찬가지 처지다. 이번에 우리를 받아준 곳은 은평구 수색동이다. 일산으로 가는 서울의 마지막 동네다. 응암동에 살 때는 집이 서울시립병원 옆 비탈이었다. 여름에는 땀이 나고, 겨울에는 눈이라도 오면 종종걸음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남가좌동에서는 집은 낡았지만 그나마 조금 덜 비탈진 곳이었다. 그 때 세 살배기인 아이와 함께였던 우리 부부는 그 작은 차이를 위안으로 삼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를 한 수색동은 응암동처럼 다시 집 바로 뒤에 등산로가 있는 비탈이다. 이사를 하는 날 이 것 저 것 처리를 하느라 비탈을 몇 차례 오르내렸더니 다리가 뻐근 거렸다. 게으른 탓에 운동을 안 한 이유도 있겠지만, 만만치 않은 경사도도 단단히 한 몫 했을 게다. 뭐 아래보다 공기도 좋고, 좋은 산책로도 있으니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 이번 이사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살고 있던 남가좌동은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곳이다. 도시 재개발도 여러 가지 구분이 있는데, 그 중 계획에 따라 진행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뉴타운’ 지역이라고 한다. 남가좌동이 바로 소위 ‘가좌뉴타운’ 지역이다. 2년 전 이사를 들어갈 때부터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재개발조합이 설립조차 되지 않은 상태여서 우리 부부는 ‘떡고물’을 바라보고 이사를 감행했다. 이주가 시작되면 세입자에게도 일정한 이주비가 나오는데 그걸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많지는 않은 돈이지만 워낙 가난한 우리 가족에게는 그 떡고물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주택임대차계약 상 2년 계약을 하면서도 집주인에게 가능하면 이주가 시작될 때까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뒀다. 주인도 그러자고 했다.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재개발조합도 설립되고 1년 안에 이주가 이루어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데 계약만료가 다가오자 집주인이 당황스러운 얘기를 꺼냈다. 시골로 내려가 있던 집주인이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라며 집을 비우던지 세를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올려달라는 세도 턱없는 수준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떡고물도 떡고물이려니와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과연 다른 곳에 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집주인과 협상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도 낡은데다 얘기도 붙이기 싫어 그만두기로 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버틴다고 꼭 유리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서울시 2차 뉴타운 사업 12개 지구 중 하나인 가좌뉴타운 지구 제2구역 재개발 공사 착공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이사를 결심한 우리 가족을 받아줄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부동산값 하락으로 전세비도 내렸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겨우 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별개의 상황인 것이다. 은행이자가 바닥을 치면서 소액임대차의 경우 전세가 없어지고 월세로 전환을 많이 해 오히려 부담만 높아졌다. 많지 않은 수입에 상대적으로 높은 월세는 서민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른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내 발품을 팔아 찾은 곳이 이번에 이사한 수색동이다. 한숨은 돌렸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수색동 역시 ‘재건축’이 예정된 곳이다. 계약 때부터 중개업자는 2년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기상 떡고물도 바라볼 수 없는 집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깨끗한 집이어서 우리 부부는 각오하기로 했다. 다음 이사에는 아예 서울을 떠나리라는 결심도 했다. 현재 우리 가족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우울한 위안도 들려온다. ‘용산참사’ 이후 정부가 재개발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조정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재개발 시장이 주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참사’를 겪고서야 외양간 고치기 바쁜 이 사회가 그저 씁쓸할 뿐이다. 아마 우리 가족과 같은 상황은 대다수의 서민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풍경일 것이다.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안전하고 평화롭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권리’라고 규정한 주거권은 한국에서는 그저 먼 얘기다. 품위는커녕 평화도 찾기 어렵다. 주거가 권리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개발업자나 부동산 투기꾼들의 돈벌이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보금자리’는 허울이다. 주거에 사람은 없고 돈만 남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가족과 같은 ‘이주인생’들의 한숨은 그치기 어렵다. 용산참사와 같은 상황 또한 반복이 뻔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용산참사에 대해 ‘참사’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언론도 그렇고 시민사회의 대응도 MB의 공격적 정책과 경찰의 진압작전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번 참사에 대해 MB와 경찰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검찰의 면죄부는 책임회피의 방어막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도시 개발과 관련한 이런 일들이 어디 MB정부에서만의 일이던가. 돈이 주거를 장악하고 난 이후로 줄곧 계속되어 왔고 예상되던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큰 교훈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주거에서 돈을 떼어내는 일, 개발의 중심에 인간이 설 수 있도록 하는 논의가 시급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을 먹이삼아 성장하는 도시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말이다. 더구나 ‘삽질’에 목마른 MB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주거에 대한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점을 찾는 작업은 절실함 이상이다. 지금 서울 곳곳은 재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계획되어 있다. 그 속에서 한숨을 쉬는 서민들 또한 부지기수다. 근본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무작정 ‘MB탓’의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는 한 우리 가족과 같은 이들은 이제 서울과 작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도시가 좋다거나 서울을 떠나기 싫다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도시도 서울도 싫다. 그렇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몰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가족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 또한 개발의 혜택을 누려야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41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시민단체 활동은 8년차, 민변이라는 법률가단체에서 활동한지 3년차, 요즘 일이 거의 폭탄 수준이다. 정말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지경이다.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면 항상 입버릇처럼 “요즘 너무 바쁘다 ...구시렁구시렁... ”하지만 이 입버릇이 무색해 질 정도로 일의 양과 질이 확연히 다르다. 요즘처럼 일자리가 부족하고 청년실업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시대에 바쁜 것을 불평하면 욕먹을 수도 있지만 솔직히 일을 하면서도 흥이 나기보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버틴다는 생각도 드니 일폭탄이 반갑지만은 않다. 모름지기 결과가 있으면 그 원인이 있는 법! 언제부터 왜 이렇게 바빠졌는지 되짚어 보면, 시작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화한다고 하여 추운 겨울에 노숙을 하며 반대활동을 했던 일이었다. 꽃피는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자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한다고 해서 전 국민적 저항을 맞아 촛불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였고, 사실 얼씨구나 축제구나 하면서 촛불을 따라 다니다가(이때는 진짜 재미있었다) 경찰들의 무식, 폭력, 불법 3종 세트 진압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인권침해 감시하러 매일 밤을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보내게 되었다. 촛불이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자 길가에서 촛불 들던 사람, 유모차 어머님들, 광고 중단 전화를 걸었던 네티즌들을 검찰이 상상 불허 불구속·구속기소, 약식명령을 청구하니, 이 역시도 법률가단체에서 책임져야 하기에 비록 거리의 촛불은 사그라졌지만 검찰의 칼날을 막기 위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여전히 촛불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기소, 약식명령, 정식재판 등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국회 쪽에서 국민들의 표현·집회·언론의 자유를 말살하고, 재벌과 소위 1% 부자들을 위한 법률들을 우르르 발의하고선 이를 통과시키려고 하니 이 또한 꼭 막아야 하는 것들인지라 다시 추운 겨울날 여의도와 사무실을 오가며 기자회견과 집회, 농성을 해야 했다. 다행히 한 해는 넘겼지만 여전히 시한폭탄인 상태가 지속되어, 다시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이 덜컥 구속되었고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 관련된 활동을 하던 중, 다시 용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하여 6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이를 위한 진상조사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2월이 되어 국회에서는 다시 무더기 악법들을 통과하려 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청와대 정리하면 중간에 잠깐씩 짬이 있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시작과 함께 일폭탄이 터졌다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한국의 인권은 더욱 후퇴될 것이 자명하고, 이를 원위치 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이 활동하는 상근자들과 밥을 먹으면서 누군가에게서 “이명박 정부와 우리가 업무협약을 맺은게 아닌가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다른 관련단체들도 다 그러하겠지만 법률가단체인 민변의 측면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진행하고 저지른 대부분의 업무가 직접 연관되어 있고, 그 파괴력이 국민모두의 인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임을 잘 알기에 긴급히 활동을 해야 하는 것들이다. 말도 안 되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이 벌여 놓은 일들 정리할 때까지만 조금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비상(非常)이 일상(日常)된 것 같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가졌던 ‘아마도 5년 동안 많이 바빠지겠다.’ 는 막연한 예측이 어떠한 현실이 되었는지 톡톡히 느끼고 있는 요즘, 바쁘다고 투덜댈 수만은 없다. 앞으로도 별로 덜 바빠질 수는 없을 듯하여, 주어진 일폭탄에 맞서기 위해선 개인적 각오도 새롭게 다지면서 일을 좀 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나누어 해야겠다.(이 정부 덕분에 효율적인 일처리 방식을 배우게 되는구나!) 더불어서 같이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함께 작은 힘을 키우기 위한 연대도 좀 더 노력하여야겠다. 지금은 비록 조금 밀리지만 그래도 조만간 이명박 정부에 똥침!!과 멋진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도 재미있는 상상이다. 그게 제 2의 촛불이면 더더욱 좋고.
2017-07-11 | hrights | 조회: 319 | 추천: 0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몇 해 전 가르쳤던 한 아이가 생각난다. 수업시간에 늘 ‘딴 짓’을 하고, 심지어 칼 등으로 손장난을 하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유혈이 낭자하게 피를 쏟아 온 교실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던 그 아이. 수업에 아무 의욕도 없고, 잠시도 가만히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래서 모든 교과목 선생님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아이였다. 학급당 인원이 48명이나 되는 까닭에 그렇지 않아도 힘든 수업을 더욱 버겁게 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 아이가 내 수업시간(국어)에 ‘도덕 선생님’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오늘도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도덕선생님이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나비의 속삭임처럼 물으셨다. “OO야, 너 무슨 일 있니?” 하고……. 순간 내 몸이 풍선처럼 부웅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얀 갈매기가 나는 저 바다에 도덕선생님과 함께 푸른 하늘이 되고 싶다.’ 나는 이 짧은 시를 읽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늘 수업을 방해하고 힘들게 해서 단골로 야단맞던 그 아이가 이렇게 고운 마음결을 지니고 있었을 줄을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완벽한 시는 아니었지만, 읽는 순간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 때 묻지 않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푸른 하늘이 되고 싶다’는 부분에선 이 아이가 일상 속에서 느꼈을 어려움도 짐작하게 되었다. 시 속의 주인공인 젊은 도덕선생님에게도 이 시를 들려주며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데에 얼마나 인색했던 지를 아프게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수업 들어가는 모든 반 아이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며 ‘시인의 탄생’을 요란하게 알렸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그 아이는 늘 나의 특별한 시선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의 ‘딴 짓’에 화가 나지 않았으며, 그 아이도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였다. 급기야 사회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너무나 천진한 모습으로 인사해 주는 그 아이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했다. 문득 돌아보니 내 삶의 여정에도 ‘나를 알아 준, 내 상처를 알아봐 준’, 참 많은 이들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춘기 시절 잦은 전학으로 친한 친구 하나 없이 어둡고 쓸쓸했던 나를 알아봐 주고 내 삶에 환한 빛을 부어주며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을 꾸게 해 주신 중 2때 국어선생님, 한동안 난청으로 힘들어했던 나를 위해 1년간 짝꿍을 자청했던 고 3때 친구, 해직시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 한 우리들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었던 시민단체 여러분들, 그리고 수술 후 복직한 나에게서 ‘우울의 징후’를 감지하고는 의미 있는 강연회니 탁구니 산행이니 하며 쉼 없이 나를 ‘건드려 준’ 동료들……. 그러고 보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그들이었지 싶다. 그렇기에 그들은 내게 ‘타자’가 아니다. 얼마 전 읽은 정화스님의 글이 생각난다. 우리네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이 원래 ‘둘’이 아닌 커다란 ‘하나’이며, 그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조화롭게 관계를 맺으며 지탱해 주고, 성장해 가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를 ‘타자화’ 하고 ‘대상화’하며, 결국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네 삶은 더 이상 소통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를 얻게 되었다. 서로의 처지에 관심도 없고, 아픔을 들여다 봐 줄 생각도 전혀 없는, 그야말로 철저한 ‘타인’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이번 용산 철거민 참사는 이러한 우리네 삶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냉혹한 ‘타자’들에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되었던 그들이 건물 옥상 위에 지어 올린 ‘망루’는 자신들을 ‘철거민’으로 대상화하여 내몬 이 세상을 향한 처절한 절규이며, 생존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그럼에도 못들은 척 외면하다가 급기야는 법을 내세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정말 무섭게 느껴진다. ‘예수불신지옥’이라고? 아니, 이런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이를 무심하게 넘기며 아무렇지 않아하는 ‘타자’들이 숨 쉬는 이 땅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지옥이지 않을까? 겨울바람이 매섭다. 그래도 아침 운동 길에 본 나무들은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매단 채 봄준비가 한창이다. 이 꽃망울이 터질 때 쯤 나는 설렘과 흥분을 안고 새로운 아이들과 또 다시 새 학기를 시작한다. 이들에게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덩어리임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신음하는 이웃들을 옆에 두고 나만 혼자 행복해질 수는 절대 없음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의 ‘나’는 수많은 삶의 고비마다 ‘내 아픔을 알아 준 또 다른 여러 명의 ‘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간증처럼 들려주고 싶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61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대학 시절, 박시형이라는 북한 역사학자가 1979년에 쓴 <발해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89년 서울에서 정식 출간된 그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뭔가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수령님 교시’가 먼저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 ‘교시’라는 것도 대부분 ‘공자 왈 맹자 왈’ 에 다름 아니다. 가령 ‘발해의 문화’를 서술하는 부분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향유한 문화민족이었습니다.”고 밝힌 다음 발해의 문화를 설명한다. ‘발해인의 무예’를 설명할 때는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운동을 잘 했습니다.’는 식이다. 우스갯소리로 “옳은 얘기, 맞는 얘기는 수령님이 다 해버렸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시형은 1946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지낸 북한 역사학계의 원로다. 그런 사람은 뭘 설명하건 ‘위대한 수령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는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럼 만약 위대한 수령님이 잘못 말씀하신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령 수령님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담배를 사랑하는 민족이었습니다.’라고 교시했다면 국민건강을 위한 금연논의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수령님께서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예로부터 현모양처가 많았습니다. 요리도 잘했습니다. 자식농사도 잘 지었습니다.’라고 교시했고 우리가 그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겨야 한다면 양성평등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 비판정신은 빛을 잃어버린다. 심한 경우 자기 머리로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국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입만 열면 ‘위대한 수령님’으로 시작하는 북한은 비판거리이거나 조롱거리다. ‘땡전뉴스’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수령님 뒤에 숨어 비판정신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장에 속 편하고 마음 편하니까 누구도 거역하기 힘든 어떤 권위를 만병통치약처럼 휘두르는 건 아닐까. 비판과 토론이 사라지고 ‘위대한 수령님’만 쳐다본 결과는 뭘까. 병자호란 이후 ‘소중화(小中華)’ 의식과 예학(禮學) 중심의 고루하고 보수적인 학문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적 정체’를 낳았던 조선시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상조류는 대부분 ‘노론’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경우 “송나라 주자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심지어 주자학을 비판한 학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711년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 막부의 거물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에게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라며 면박을 당했다. 일본 학자들이 세계를 배우고 있을 때 통신사 일행은 기껏 청나라도 중화문명의 정통인 조선을 존중한다는 얘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50여년이 지난 1764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최신 학술정보 수집에 나서야 할 정도로 학문수준이 역전됐다.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토대 교수에 따르면 “1826년 연행사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신재식이 청나라 학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이 조선 선비는 16세기 이후 근래의 학자는 단 한 사람도 거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미국 발 금융위기 속에서 ‘미국=글로벌 스탠더드’라 확신하는 그 많은 경제학 교수들과 전문가들, 경제 관료들은 제대로 된 설명조차 못하며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위대한 미국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만 되뇌며 규제완화와 금융 중심의 시장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규제강화와 금융통제에 나서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미국 발 금융위기를 규제완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거나, 개방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금융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한국 정부만 자본시장통합법이나 금산분리 완화 법제화, 산업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려 한다. 1997년 외환위기도 ‘오로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한 일이고 그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준 ‘글로벌 스탠더드’의 ‘교시’를 따르고 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기는 순간 비판정신은 사라진다. 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이름으로 미국이라는 위대한 수령님에 의지하는 순간 미국 발 금융위기는 규제완화를 제대로 못해서 생긴 일이 돼 버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수령님 말씀이 아니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비판정신이다. 우리에겐 ‘내 탓이오’가 아니라 ‘따질 건 따지자’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0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눈이 참 많이 내렸습니다. 오후 내내 내린 눈은 성당 뜰을 가득 채웠습니다. 빗자루로 눈을 쓸었습니다. 지나가는 분이 조언을 하십니다. “다 내린 다음에 치우세요.” “네”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잠시 비질을 멈추었습니다. 쓸고 지나 온 길을 돌아보니 새로이 얌전히 내려앉은 눈이 길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쉬었다 쓸고를 반복하였습니다.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것이 욕망이며 허영이 아니겠는가. 그때그때 살피면서 치우고 쓸어야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들어설 새 정부가 무도합니다. 단어만 가지고는 '새정부'라 하니 뭔가 새로운 기운, 좋은 기운의 정부일 듯 한데 영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도하다는 느낌, 그 느낌은 이렇습니다. 허름한 단칸방,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 방에 흙투성이 작업화를 신고 들어와 험하게 세간살이들을 뒤지고 쪽박을 깨고 이불을 내팽개쳐대는 불한당, 그렇지요 불한당 같이 무도하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시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그렇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생각하자니 갈수록 설상가상 일듯해서 제 마음이 번잡스럽습니다.(중략)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다 가지려 하면 반드시 다 잃습니다.” 일 년 전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입니다. 인수위 때였음에도 싹이 노란 정권인 것 ‘같다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당시 ‘설마’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기에 마음이 번잡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일 년, 무도한 ‘느낌’은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무도한 정부입니다. 삽질의 대가들답게 온 산하를 파헤치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 알량한 세치 혀로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날카로운 삽날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분열과 대립, 갈등과 경쟁이 이들의 생존전략입니다. 나는 다만 본 것을 말할 뿐입니다. 나의 숨은 욕망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추하고 더럽고 거기에다 두려움 많은 정치권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는 형국입니다. 안 되면 남 탓, 잘 되면 내 탓이라는 도둑놈 심보로 가득 찬 진짜 도둑놈 세상입니다. 도둑놈을 보고 도둑놈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돈과 권력의 노예로 살라 합니다. 나는 다만 본 것을 말할 뿐입니다. 나의 숨은 욕망이 이와 같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일 오전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첫번째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그렇습니다. 다 가지려고 합니다. 도무지 만족할 줄 모릅니다. 나는 다만 볼 뿐입니다. 나의 숨은 욕망이 꼭 이 무도한 정권을 닮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권은 인간답게 사는 것을 금지된 희망이라며 붉은 부적을 온 천지에 덕지덕지 붙여대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공동체의 소통과 희망, 연대에 넉넉한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인간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가난하고 불편해도 이정도면 됐다 하는 자족감으로 다른 인간을 위해 기꺼이 비껴주고 물러서는 인간이고자 합니다. 밥은 필요하지만 밥보다 중요한 것이 많음을 깨달아 생활하는 인간으로 살고자 합니다. 다행히도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백년을 산들, 천년을 산들 도대체 내 것은 하나도 없음을 수용하는 인간의 나이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새해입니다. 얼이 썩은 정권에게 인간적으로 덕담하나 오롯이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도둑들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도둑은 반드시 쫓겨나고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멸망할 자리를 알아서 파고 기어 들어가는 이 정권이 측은하고 불쌍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단 하나입니다. 인간의 시간을 기다리며 비질을 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