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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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5월 1일부터 대한민국은 사실상 경찰 계엄 상태다. 5월 1일과 2일, 촛불집회 때 241명이 연행된데 이어 5월 16일 대전 노동자대회에서 457명이 연행되었다. 여기다 한 술 더 떠 정부는 어제(20일)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갖고 ‘폭력시위가 우려되는 도심 대규모 집회를 원칙적으로 불허 하겠다’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생민주국민회의, 전교조, 아고라, 촛불시민 연석회의 등 20여개 시민, 네티즌 단체를 “불법좌파 단체”로 규정하고 “상습 시위꾼” 2500여명을 검거하기로 했다는 경찰의 비밀문건도 공개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간 통일운동을 해왔던 단체 인사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잇달아 구속되고 있고 평택 미군기지 반대투쟁, 뉴코아-이랜드 투쟁 등 이미 사법처리가 마무리된 사건들을 다시 끄집어 내 체포하고 구속시킨다. 하기야 술기운에 어떤 시민이 경찰에게 말을 걸면서 대통령 흉을 좀 봤다 해서 잡아가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요즈음엔 경찰이든 교도소든 정부기관을 찾아가 인권이 어떻고 이야기하면 들으려고도 않는다. 저들은 늘 저들 나름대로의 고정된 관점과 논리가 있다. 사실관계만이라도 왜곡하지 않으면 다행일 뿐이다. 그러고 나서 명령한다. 마치 국민에겐 정부의 명령을 따를 의무만 있지 요구할 권리는 없는 것처럼. 지난 5월 4일, 나는 경찰청 앞에서 ‘메이데이 촛불집회’ 강제연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이틀 동안 유치장 신세를 졌다. 내가 왜 그 고생을 해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한 거라곤 기자회견 장소를 내주지 않기에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냐고 경찰 간부에게 따진 것, 그들이 지정해 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도 “정치적 발언” 한다면서 “불법집회”라고 해산을 명령 하기에 “기자회견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친 것뿐이다. 그런데 돌아온 건 “현행범” 긴급체포다. 경찰은 이제 의사 표현의 구체적인 방법, 내용까지도 통제하고 있다. “정치적 발언”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오로지 경찰만이 알 수 있다.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내 주장이 어디까지가 “정치적”인지 따져가며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 정치로부터 소외된 서민들이 기자회견(기자도 별로 오지 않지만)을 하는 것 자체가 정부나 정치인들에게 국민의 준엄한 목소리를 알리고자 함인데, 그런 발언을 하지 말라니? 차라리 옥외에선 ‘절대 기자회견 금지’라고 밀어 붙이는 게 더 솔직하겠다. 그건 그렇고 집회가 뭐 범죄행위라도 되나? 현행 집시법 아래서, 경찰이 집회 ‘허가권’을 쥐고 흔드는 한 언제든 범죄행위로 치부될 수 있다. 이것은 누누이 지적돼 왔지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헌법 21조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나 경찰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집회는 최대한 보호하겠지만 불법폭력 집회는 엄단 하겠다’며 입버릇처럼 떠든다. 경찰이 보호(?)해주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집회, 어떤 것일까?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 경찰버스 차벽과 전경들로 삥 둘러쳐진 고립된 공간에서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노래도 불러보지만 집회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언론을 타기라도 하면 다행일 텐데 쉽지가 않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여론을 형성해 보자는 게 집회·시위의 목적인데 이렇게 하고나면 별 효과도 없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맥이 빠져 버린다. 물론 관제 행사나 보수 우익 단체들의 집회는 예외가 된다. 5월 16일 대전에서 노동자들이 죽봉을 들고 시위 좀 한 거 가지고 난리다. 나도 그날 현장에 있었지만 이명박 정권의 광기가 어떤 것인지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집회는 대한통운 택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다 산화해간 故 박종태 열사를 추모하고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3권 보장을 촉구하는, 숙연한 분위기의 집회였다. 게다가 비까지 내렸다. 대전 정부청사 앞 광장에 모인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파업을 결의했고 연대하러 왔던 많은 노동자, 시민들이 뜨거운 박수로 지지를 보냈다. 물론 합법적인 집회였다. 그런데 경찰이 허용한 행진 코스는 정말 이상했다. 보통 행진은 어느 목적지를 정해놓고 집회현장에서부터 걸어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 날은 그게 아니었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차량을 타고 이동해서 대전 도심에서 벗어난 중리 사거리(신탄진 방면)에 내려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대전 중앙병원까지 약 1.7km 정도만 행진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경찰은 표면적으로는 “도심교통방해”를 우려해서 그렇게 했다지만 비도 내리는데다가 이동 차량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일대 교통은 더 혼잡스러워졌다.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지난 16일 대전 서구 둔산동 정부청사남문광장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친 뒤 대나무 깃대에 꽂은 만장을 든 채 대한통운 대전지사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날 병원 앞에서 대한통운 물류기지까지 1.7km 더 가는 게 문제 해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도 그랬고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죽어라고 부려먹기만 하다가 운송료 30원 더 올려 달랬다 해서 문자 메시지로 78명의 택배 노동자들을 해고해 버리고 열사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한통운 앞에 가서 고함이라도 한 번 질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한통운은 아직도 이명박 정권의 빽을 믿고 뻔뻔스럽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경찰이 행진을 더 이상 막을 명분도 없었다. 그곳은 비교적 한적한 곳인데다가 먼저 신고 된 집회는 열리지 않았으니까 만약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의 이런 요구를 허용했다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4차선 도로에 차벽을 쌓아 놓고 색소와 최루액을 섞어 물대포를 쏘아댔다. 초장부터 부상자가 속출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 사진기자는 전경의 방패에 코뼈가 부러져 들려나왔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경찰 저지선이 뚫렸고 우리는 대한통운 앞에까지 갈 수 있었다. 집회 대열이 전경들의 수보다 더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들뜬 기분도 잠시, 날이 어둑해질 무렵, 방송차에 올라간 사회자가 집회 종료를 선언하자마자, 경찰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최루액을 발사했다. 쫓겨 가다 넘어지면 압사까지 우려되는 상황, 뒤처진 사람들은 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히며 난타를 당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들어 사람을 팼다. 150여명의 부상자가 그렇게 해서 발생했다. 나와 함께 갔던 한 여성 활동가는 인도에서 토끼몰이를 당한 후 방패에 어깨를 맞고 쓰러졌는데, 전경이 죽봉으로 배를 찌르면서 확인 사살(?)까지 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악귀들이 따로 없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죽창을 든 폭도’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1980년 5월, 광주를 그렇게 매도하고 고립시키면서 학살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집회의 자유는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 등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척도이고,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지금 민주주의를 절단 내고 있다. 왜? 9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되고 있고 실질 실업자가 340만 명이 넘어가는 상황임에도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가 “한 치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며 밀어붙이고 있는 저들의 정책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인권을 위해 필요한 법 절차는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저들과 ‘죽창이냐, 죽봉이냐’ 따위의 논쟁을 벌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 사이 죽어가고 있는 서민들의 숫자는 늘어만 간다. 이제는 당장 살기 위해서, 뭐든지 들어야 할 때다. 대규모 집회와 강력한 파업 그리고 필요하다면 죽창까지도!
2017-07-11 | hrights | 조회: 489 | 추천: -1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봄비가 내려 땅바닥에 파헤쳐진 웅덩이를 자연스레 메워 버리듯 이명박 정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질과 눈가림으로 용산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태를 뒤덮으려 한다. 지난 3월11일 용산 상가 재개발 5구역에 일단의 용역직원들과 포크레인이 다시 나타났다. 참사가 일어난 지 두 달여가 지났지만 아무 것도 해결된 게 없어 장례조차 치루지 못한 유족과 철거민들은 분노하며 서럽게 울부짖었지만 무정한 철거 굉음에 묻혀 버렸다. 국가폭력에 의한 명백한 살인사건은 서서히 잊혀져가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법을 우습게 아는 전문 시위꾼들’의 폭력이 더 큰 문제인양 도마에 오르고 있다. 경찰은 지난 9일 ‘용산 참사 추모집회’ 때 ‘경찰관 10여명을 폭행하고 무전기를 탈취했다’며 연행한 8명의 시민 가운데 2명을 구속시켰다. 조선일보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을 밟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한줌밖에 안 되는 시위 전문가들에게 농락당하는 후진적 상황”을 개탄하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경찰 지갑 탈취 등)을 가지고 마구 소설을 써댄다.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상습 시위꾼들은 200여명 정도로 그간의 채증 자료 등을 바탕으로 전원 검거 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이 분석하고 있는 “도심 상습 시위대” 200여명은 어떤 사람들인가? 140여명은 학원 강사, 자영업, 종교인, 화가 등 직업을 가진 사람, 나머지 60여명은 무직자나 자퇴생이라고 한다. 이들은 지난 해 촛불 시위가 잠잠해진 이후에도 다음 ‘아고라’나 인터넷 카페를 통해 활동해 왔고 대부분 집시법 위반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경찰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가운데 무직자나 자퇴 학생들이 “폭력 시위의 주동자‘들일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구속된 사람들 모두 무직이거나 일용직 노동자다. 그동안 경찰은 파업 또는 시위 과정에서 연행, 구속된 민주노총 조합원, 사회단체 회원 들을 이런 식으로 불러왔다. 그런데 이제는 ‘아고라’를 통해 활동하는 “상습 시위꾼”이라니......‘아고라’가 뭐 ‘불법폭력시위 단체’라도 된단 말인가? 머지않아 ‘아고라’를 “불법폭력시위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회원들을 대량 검거하는 사태를 예상해야 할 지 모르겠다. '용산참사’' 벌어진 서울 용산재개발 4구역에서 재개발조합 측이 지난 3월 11일 중장비를 동원, 철거작업을 재개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먼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잘못을 규탄하는 국민의 정당한 목소리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전문 시위꾼”의 돌출 행동으로 폄하하면서 인권을 유린한 것 자체가 문제다. 국민의 60% 이상이 검찰의 용산참사 관련 수사결과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고 답변하고 있고 부자들만을 위한 재개발 정책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용산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거리에 나온 시위대의 규모가 기백명 정도로 작다 해도 그들의 목소리는 아직 행동하지 않고 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소수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최소한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그들의 손에는 촛불과 손 피켓 외에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다. 그런데 시위대의 1.5배나 되는 경찰병력을 배치해서 거리 곳곳을 틀어막아 놓고는 “교통흐름을 방해 한다”며 시위와 행진을 ‘불허’하는 현실 때문에 고성과 폭력이 오가는 “무법천지”가 재현되는 것 아닌가? 이명박 정권으로선 그동안 “법과 원칙”을 외치며 더 많은 인력과 첨단 장비를 투입해서 탄압을 지속했건만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습 시위꾼”들의 숫자에 신경이 곤두설 만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돈도 권력도 없고 조직되지도 않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들, 있는 듯 없는 듯 묻혀 지내면서 나날이 생계를 걱정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바로 이명박 정권이 상정했던 “국민 성공시대”의 주역들이고 우리 사회의 다수다. 그런데 지금 세계 경제위기와 잘못된 정부 정책에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고 있다. 이들이 촛불을 내려놓지 못한 채 “명박 퇴진”을 외치며 집회 현장을 찾아다니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투쟁이 거듭될수록 이들은 국가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습 시위꾼’으로 변모해갔다. 이명박 정권이 과연 이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국민과의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고 민의를 표출할 수 있는 정당한 통로마저 막아버린 주제에... 조선일보와 이명박 정권의 말대로 ‘공권력’은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을 죽인 경찰은 물론이고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 풍향계에 따라 제멋대로 형벌을 남발하는 검찰과 법원 또한 마찬가지다. 저들이 자주 쓰는 표현처럼 ‘공권력’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받는 “신뢰의 위기”가 온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에 따르면 근대국가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질서교란자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 한다’는 약속아래 폭력을 독점했고 국민은 그 약속을 믿고 국가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다는 말은 무기를 독점하고 국민의 신체를 독점함으로써 군대나 경찰을 창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 정당한 폭력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권한까지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 똑 같이 ‘타인의 신체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쓴다 해도 군대나 경찰이 사용하면 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 마치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인 것처럼... 하지만 국가의 폭력독점은 근대이래 끊임없이 도전받아 왔다. 생산수단과 부를 독점한 소수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다 보니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국가는 특정 계급의 사익을 정당화해주는 ‘억압기구’에 불과한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다고는 하지만 현대에 와서도 국가기구의 계급 편향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야바위꾼 같은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대표랍시고 의사당에 앉아 졸속으로 만들어 낸 “MB악법” 같은 것들을 ‘지엄한 국법’이니 지키라고 말한다면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는 건 당연할 것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그런 엉터리 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경찰을 동원해 군화 발과 몽둥이로 짓밟아 버린다면, 당하는 국민들은 살기 위해서 국가의 폭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느끼고 있는데도 권력자들이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해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혁명을 통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40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새해 벽두부터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의회 쿠데타”, “MB(이명박)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매일 밤 야당의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촛불 시민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밤을 지새우다 연행까지 당하는 그야말로 비상시국이다. 하지만 일상에 묻혀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민주적 권리에 대한 MB정권의 위협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아직까지는 실감이 안 날 수 있다. 그런 분들에겐 빠르게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는 교도소(구치소)의 인권상황을 주시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감옥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의 햇볕을 가장 뒤늦게 받았지만 가장 빠르게 사그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폐쇄적인데다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이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인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쉽게 묻혀져 버린다. (당국에서는 감옥이란 말은 사라진 용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이 용어를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오늘 아침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민주노총 울산본부 배문석 문화국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구치소에서 지난 12월 23일자 경향신문 사회면 중간을 가위로 난도질해서 들여보냈다는 것이다. 신문을 난도질해서 들여보내는 것은 유신이나 5공 시절에 자행됐던 악랄한 인권침해다. 감옥에 갇힌 수많은 양심수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면서 이런 야만적인 관행들이 사라졌는데 MB정권이후 몇 달 사이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정된 행형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금지된 서신 검열도 버젓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비단 부산구치소 만의 문제가 아닐 터. 안동교도소에 4년째 수감 중인 전국철거민연합 회원 정창윤 씨는 한 달 가까이 단식을 계속하고 있다. 난방도 변변치 않은 감방에서 그나마 지급되던 부실한 식사마저 끊어 버렸으니 그의 체력은 지금 고갈 될 대로 고갈된 상태다. 출소를 불과 몇 개월 앞 둔 그가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걸까? 안동교도소는 지난 12월 8일, 정창윤 씨의 전화통화 신청을 불허했다. 12월 19일에는 지인이 정창윤 씨 앞으로 보낸 전자서신을 본인에게 통보조차 해주지 않은 채 폐기시켰다. 전화, 서신, 접견 이 세 가지는 자유를 박탈당한 구금시설 재소자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다. 만일 이것들이 금지되거나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면 재소자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감옥 안에서 심각한 가혹행위를 당해도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UN의 “피구금자 처우에 관한 최저기준규칙” 같은 국제인권규범에서는 최대한 완벽하게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기본적인 인권 사항이다. 지난 해 12월 22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개정 행형법도 서신검열을 원칙적으로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화사용의 권리 또한 확대했다. 그런데도 안동교도소는 버젓이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관례에 따라 함부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를 들어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전화통화를 불허한 이유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법령 어디에도 가족이 아닌 사람과 통화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교도소(구치소)들은 툭하면 “가족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답변하는 경우가 많다. 걸음마 단계의 어린 아이도 아니고 가족들하고만 소통하라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된 전자 서신은 “단식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본인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폐기 시켰다. 본인의 동의 없이 발송된 서신을 폐기하는 건 명백한 불법이다. 교도소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더니, 교화과장은 전자서신은 웹상에서 한 달 동안 자동 보관되기 때문에 폐기한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본인에게 전자서신이 온 것을 알리지도 않았으니 정 씨가 계속 모른 채 한 달을 넘겼다면 자동 폐기되었을 것이다. 교도소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개정 행형법에 서신내용을 검열하지 못하게 한 조항(43조 4항)이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수많은 단서조항들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예를 들면 “수형자의 교화 또는 건전한 사회복귀를 해칠 우려가 있을 경우”, “시설의 안전 또는 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을 경우” 불허하도록 돼있다. 상당히 애매모호한 규정이다. 그러다보니 법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이럴 경우 재소자들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정립된 판례의 입장이나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라 과잉금지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단서조항이 규정하고 있는 “우려”들이 발생할 개연성이 명백한 경우에만 제한은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법을 적용하는 공무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좌우된다. 정창윤 씨가 단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안동교도소의 열악한 처우 때문이었다. 안동교도소가 “교정·교화”에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재소자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먼저다. 그러지 않고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재소자들을 “문제수”로 찍어놓고 징벌을 가하는 등 더 많은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에 갈수록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창윤 씨가 단식을 하고 있던 지난 12월 19일, 안동교도소에 있던 청년 재소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사동 복도 난간에 목을 맨 것이다. 일부 언론에 나온 쪽 기사를 보니 교도소 관계자는 고인이 여러 차례 자살, 자해 소동을 벌였던 사람이라며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고인과 같은 병 사동에 수감되어 있던 이진강 씨(국가보안법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의 주장은 다르다. “무책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교정행정체제”가 꽃다운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유명을 달리한 故 이정훈(24) 씨는 교도소에 입감되자마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두 달 남짓 전에 대전에서 안동으로 이송되었다. 교도소 측의 주장처럼 그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건 사실인 것 같다. 대전에서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지만 후유증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생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죽기만을 원했던 것 같지는 않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던 이 씨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작곡 공부를 하고 싶다며 음악잡지를 구독하게 해달라고 교도소 측에 간절히 요청했다. 하지만 일고에 거절당했다. 그 때의 좌절감이 너무나 컸던지 죽기 이틀 전까지 “대전에서는 되는데 왜 여기서는 안 된다는 거야. 나보고 죽으라는 얘기야”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교도관들과 상담을 할 때도 여러 차례 “자살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며 구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달리는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은 암보다 치사율이 더 높은 사회적 질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밖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쉽게 걸리는 병인데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재소자들은 오죽하겠는가? 행형법(제39조)에 따르면 “소장은 정신질환이 있다고 의심되는 수용자가 있으면 정신과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법무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치료감호시설로 이송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 씨가 대전에 있을 때부터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는데도 당국은 왜 그를 치료시설이 있는 진주가 아니라 환경이 더 열악한 안동으로 보냈던 것일까? 결국 재소자 인권보다는 행정 편의를 앞세우는 억압적인 교도소 환경이 안타까운 죽음을 불러온 것이다. 평소 우울증 환자들에게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고인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MB 독재’가 심화될수록 인권사각지대가 확대되면서 안타까운 죽음은 늘어만 갈 것이다. 감옥의 높은 장벽 탓에 세상 밖으로는 잘 들려 나오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최소한의 인간다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재소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87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기초 질서만 잘 지켜도 GDP가 1%는 올라 갈거”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언급이 있고나서 지방자치단체, 경찰서, 교도소 할 것 없이 관공서에서 국민을 계도하겠다며 앞다퉈 “기초질서 확립 캠페인”이란 걸 벌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월드컵을 응원하던 시민들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회장소를 깨끗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며 성숙한 시민의식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이명박 정부 들어 “기초 질서”가 안 잡혀서 경제가 어려워졌다 말하니 당황스러울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기초질서” 더 나아가 “법질서 확립”이 교통질서 잘 지키고, 거리에 침 안 뱉고, 담배꽁초 안 버리고... 뭐 이 정도로 가벼운 수준이 아닌 건 분명하다. “떼 법 청산”을 들먹이며 집회·시위의 자유를 짓밟고 있고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옭죄는 조치들을 쏟아내고 있다. 당장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조차 “불법”이라고 꼬투리를 잡고 있다. 최근 감옥에서도 대대적인 “기초 질서 확립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이 전국교정기관장회의에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취지는 “과거 민주화가 와전되면서 수용자들의 기강이 나태해졌으니 기본질서를 바로 잡아 여러 사람이 편안할 수 있는 수용환경을 만들라”는 것이다. 재소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돼 거의 하루 종일 갇혀 지내야 하는데다 행동을 제약하는 수많은 법규들이 있어 이를 어기면 엄한 징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기초질서”라 해서 또 다른 규율을 강제하고 있다. 감옥안의 “기초질서”란 알고 보면 재소자들을 옴짝 달짝 못하게 옭아매 놓고 군대식의 위계질서를 강제하는 걸 의미한다. 최근 안동교도소에서 그 문제점들이 속속 도출되고 있다. 안동교도소는 4월 셋째 주부터 “기초질서 확립기간”으로 돌입했다. “기초 질서”가 잡힐 때까지 무기한으로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안동교도소에는 오산 수청동 철거민 투쟁으로 구속된 정창윤 씨와 소위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된 이진강 씨가 수감돼 있다. 그런데 최근 두 사람은 모두 “기초 질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벌방에 갇히거나 형사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진강 씨는 그동안 양심수로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규율을 다잡으며 생활해왔고 동료 재소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도소 간부들도 그를 “모범수”라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기초질서 확립기간”이 시작되고 나서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진강 씨에게 처음에는 하루에 두 번 있는 점검시간에 정면을 응시한 채 부동자세로 앉아 있지 않는 다고 지적했다. 점검을 하는 목적은 오로지 인원을 파악하고 재소자들의 사고발생유무를 확인하는데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식으로 “군대식 점호”를 강제할 규정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는 이진강 씨는 그동안 점검시간이 되면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독서를 하곤 했다. 이렇게 해도 전에는 문제 삼지 않았다. 지난 4월 21일 저녁 8시경, 교도소의 모든 일과가 끝나고 재소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여러 명의 교도관들이 한꺼번에 이진강 씨가 혼자 생활하는 거실에 들이닥쳐 난폭하게 방문을 열어 젖혔다. “기초질서를 해치기 때문에 계도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이동 감찰반” 이라고 했다. 안동교도소는 교도관들을 퇴근도 못하게 붙잡아 놓고 재소자들이 취침에 들 때까지 사동을 돌면서 “기초 질서”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라고 조를 편성해서 운용하고 있다. 그들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책상위에 노트가 몇 권 놓여 있는 걸 보고 “책상 정리가 안 되었다”며 트집을 잡았다. 티셔츠를 입던 이진강 씨에게 관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는 관복을 입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 규정을 듣도 보도 못한 이진강 씨는 규정을 가져와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감찰반장이란 사람이 대뜸 반말로 “그런게 다 있어!”라고 한마디 하고는 지시명령을 위반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마치 동네 불량배처럼 이진강 씨를 위협했다. 다음 날에도 또 그런 일이 또 반복되었다. 이진강 씨는 교도소장 면담을 신청했다. 감찰반장이 규정에도 없는 명령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건 직권 남용이고 반말과 폭언으로 인격을 침해했으니 징계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장 면담은 신청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이진강 씨는 “기초질서를 세 번 위반했다 해서 징벌조치 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징벌 조사를 받으면서 이진강 씨는 교도소 측이 터무니없이 사실을 조작해서 검찰에 고소까지 했음을 알게되었다. 그가 교도관에게 욕설을 하고 베개를 집어 던지며 감찰반원들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이진강 씨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한 건 자신이라고 했다. 교도소 측의 이런 조치는 이진강 씨의 정당한 항의와 징계요구에 대한 보복이며 양심수들에 대한 “군기 잡기”라고 생각된다. 이진강 씨는 4월 29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법무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법질서 캠페인 그림 출처 - 법무부 정창윤 씨는 지난 4월 22일 또 다시 징벌방에 갇혔다. 한 달 전 교도관의 소내 재소자 구타사건을 알려내기 위해 “부정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10일간의 금치(징벌방 수용) 처분을 받은 지 한 달여 만에 또 다시 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정창윤 씨가 징벌에서 풀려난 후 교도소 측은 정창윤 씨가 “문제수”라도 되는 양 “개별처우”를 한다며 직원 2명과 경교대원 1명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들은 운동이나 목욕, 세탁물 건조할 때라든지 심지어 종교집회를 갈 때조차 따라다니며 캠코더로 채증을 했다. “기초질서 확립”을 핑계로 하루에 한 번 씩 검방(교도관들이 불시에 재소자들의 방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도 실시했다. 검방 도중 정창윤 씨의 방에서 목공용 작업 본드(환각성이 없는 흰색 접착제)와 작업용 비닐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동료 재소자가 출소하면서 본드는 벽지 바를 때, 작업용 비닐은 세탁물 담을 때 쓰라며 건네주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교도소측은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었다며 또 다시 20일간의 금치 명령(징벌방 수용)을 내렸다. 보안상 큰 문제가 없는 이런 물품들까지 광범위하게 금지시키고 있는 규정 자체가 문제다. 교도관들도 이전까지는 이런 물품들이 재소자들의 수형생활에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적발되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정창윤 씨가 수감된 사동에서 검방을 통해 많은 부정물품(?)들이 회수되었는데 유독 그에게만 징벌이 떨어진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비단 안동교도소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초질서 캠페인”은 교도소 당국이 재소자들의 인권을 더 한층 옭죄고 군사적인 위계질서를 강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규정에는 없는 자의적인 명령과 징벌권을 남발하면서 소내 분위기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가려 한다. 이진강, 정창윤 씨에 대한 징벌과 고소는 부당한 인권침해에 저항해온 양심수들의 기를 꺽어 놓기 위한 보복조치라 할 수 있다. 재소자들의 인권을 말살하는 “기초질서 캠페인”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안동교도소는 양심수들에 대한 보복성 징계조치를 즉각 중단하라!
2017-07-11 | hrights | 조회: 404 | 추천: -1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주 정창윤씨를 면회하기 위해 안동교도소에 전화를 걸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서 전화를 받더니 하는 말이 징벌 중이라 3월 13일까지는 면회가 안 된다는 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금치(규율 위반을 이유로 재소자를 0.75평 정도의 좁은 징벌방에 가두고 외부와의 소통을 금지시키는 가혹한 징벌)10일이면 상당히 과중한 징벌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며 따져 물었다. “다른 수형자에게 불법 서신을 보냈습니다. 더 이상은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문득 며칠 전 정창윤씨가 편지와 전화로 다급하게 면회를 와달라며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면서 온 몸에 소름이 느껴졌다. 현재 안동교도소장인 한 모 씨는 부산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관들에게 조사를 받는 모든 재소자들에게 사슬, 수갑 등 ‘계구’ 사용을 적극 독려하는 방침을 내렸고 이로 인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권고까지 받았지만 “직원 사기 및 근무의욕을 위축시키는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오히려 “인권위 진정 등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직원은 위로·격려”한다며 포상까지 내린 문제의 인물이라고 했다.(<한겨레신문> 1월 25일자 참조) 정창윤 씨는 전국철거민연합 회원으로 2005년 6월 ‘오산 수청동 철거반대투쟁’ 때문에 구속 돼 지금까지 옥살이를 하고 있고 앞으로 1년은 더 있어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그는 안동교도소에 2년 가까이 수감되어 있으면서 열악한 재소자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했고 2006년에는 그 때문에 한 달 동안 징벌을 먹기까지 했다. 지난 해 8월 정창윤씨는 같은 사동에 수감되어 있던 포항건설노조 심진보씨와 함께 쥐가 들락날락거리는 ‘푸세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법정 공휴일 재소자 운동시간 보장, 생방송 뉴스 시청을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하며 보름 넘게 단식투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정당했지만, 교도소 측은 예산 핑계를 대며 버티다가 여러 노동, 인권 단체들이 합세해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자, 화장실 개선 등 몇 가지 처우개선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 일이 있고나서 안동교도소는 점차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자마자 정창윤씨로부터 편지가 온 것이다. 서신 검열을 의식해서인지 교도소 상황에 대해 에둘러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어렴풋이 그간의 사정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지난해 3월 사슬이 채워진 부산교도소 수용자 홍아무개씨의 발목에 깊은 상처가 패여 있다. 아래는 한아무개 전 부산교도소장이 재임 때 적극적인 계구 사용을 지시한 문건.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 지난 1월경, 안동교도소에서는 교도관에 의한 재소자 폭행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맞은 재소자는 스스로 ‘민주노동당 당원’이라고 밝힌 원 모씨였다. 인권을 억압하는 잘못된 법과 제도 탓에 억울하게 구속된 양심수들에게 감옥은 또 하나의 투쟁현장이다. 자신의 요구뿐만 아니라 직접적 연관이 없는 다른 재소자들의 개인적 불만이나 인권침해 사례까지 떠안고 교도소 측과 투쟁을 벌이면서 일종의 ‘해결사’ 역할을 떠맡아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나 정창윤 씨처럼 불의를 보면 용납하지 않고 단호하게 투쟁해서 안 될 것 같은 요구들도 쟁취해 내는 ‘투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정창윤씨는 원 씨로부터 구타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 같은 사동에 있는 심진보씨와 함께 ‘투쟁계획’을 짰다. 원 씨에게 우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부터 하라고 했고, 적절한 날을 잡아서 소내에서 함께 단식 등의 방식으로 강력하게 항의를 해보자고 권유했다. 구속노동자후원회에도 서신을 보내 시급히 연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다른 일정 때문에 개입할 시기를 놓쳐 한탄스럽다.) 세 사람이 D-DAY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교도소 측이 낌새를 챘다. 그들은 원 씨에게 먼저 접근해서 모종의 압력을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3월 들어 먼저 싸워보자며 문제를 제기했던 원 씨가 갑작스레 국가인권위원회에 냈던 진정을 취하해 버렸다. 2월말 경 투쟁의 동지였던 포항건설노조 심진보 씨를 갑작스레 포항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예전에 심 씨가 가족들이 있는 포항으로 보내달라고 한 적은 있었으나 그동안은 콧방귀도 뀌지 않다가 왜 하필 이맘 때 이감을 보낸 것인지 석연치가 않았다. 그리고 나서 3월 4일, 정창윤씨에게 “불법서신 수수”라는 올가미를 씌워 징벌을 내렸다. 아직까지도 감옥에서는 다른 사람과 서신을 교환할 때 “소장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는데(행형법 제18조) 정창윤씨가 피해자인 원 모씨에게 허가받지 않은 쪽지 편지-감옥 은어로 “비둘기”-를 보냈다는 게 징벌 사유다. 원 씨는 소 측의 압력에 굴복해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정창윤씨가 전달한 “비둘기”를 교도관들에게 넘겨주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끼리 쪽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사실 같은 교도소내 재소자들끼리 편지를 교환하지 못하게 막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교도관들은 그동안 알아도 모른 체하며 지나칠 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정창윤씨는 이번에 ‘금치 10일’이라는 중한 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간의 과정을 통해 징벌을 내린 교도소 측의 속내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소 측은 문제가 된 ‘재소자 구타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외부로 알려지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또한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인권문제라면 물불 안 가리고 저항하는 정창윤씨 같은 “골치 아픈” 사람들에게 본 떼를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와 유사한 일들이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일어나고 있다. 민주적 통제가 불가능한 감옥이란 폐쇄 시설에서 ‘교정’ 관료들은 재소자들을 그야말로 지배하고 있다. 지배를 받아야 하는 재소자들의 인권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그릇’과도 같다. 그나마 마련되어 있는 공식적인 통제장치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지난 해 8월 28일, 구속노동자후원회는 안동교도소 문제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독거사동의 화장실을 비롯해서 정창윤, 심진보 씨가 제기했던 8가지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무려 7개월만인 지난 2월 15일, ‘사건처리 결과’를 통지해 왔다. 하나같이 “인권침해에 해당하지 않”고 “구제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둥의 무성의한 내용뿐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침해구제 제2위원회가 통보한 사항 중 몇 가지만 훑어봐도 이들이 정말 안동교도소를 갔다 왔는지 의심스럽고, 설사 갔다 왔다 해도 소 측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반영한 듯하다. 안동교도소는 겨울에 난방시설이라고는 사동 복도에 설치된 라지에이터가 전부고 재소자들은 온기 하나 없는 마룻바닥에서 온수를 담은 페트병을 끌어안고 새우잠을 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 “라지에이터를 통하여 난방을 하고 수용 거실 내 온도를 측정하여 난방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조사결과 인권침해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며 기각결정을 내렸다. 거실과 복도는 두터운 벽으로 막혀있는데, 라지에이터를 틀어준다고 해서 실내 온도를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을까? 몇 몇 교도소에서는 온돌을 설치하거나 전기 매트를 깔아주는 방식으로 난방을 하고 있는데, 이런 곳과 비교하면 안동교도소 재소자들은 분명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UN 피구금자 처우에 관한 최저기준규칙(제60조)이 규정한 “유사성의 원칙”(수형생활과 자유생활 사이의 차이를 극소화 할 것)에 비춰보면 어림없는 수준이다. 행형법상 매일 1시간 이내 운동시간을 보장하도록 돼 있는데도 안동교도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주 5일 근무 시행이후 일요일과 공휴일에 재소자들에게 운동을 시키고 있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근무자 인력의 운영상 불가피”하므로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 아래서 재소자 권리 보장을 위해 당장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재소자들이 일요일과 공휴일에 1시간 정도 운동할 권리를 영원히 박탈당할지도 모르는데 태연하게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소수자 종교의 자유 보장과 관련한 진정, 구체적으로는 무슬림들의 종교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국가인권위원회는 동문서답 하듯이 “매월 종교 집회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며 기각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종교집회는 물론 매월 이루어진다. 종교집회는 사회에서는 보통 매주 1회인데 감옥이라고 해서 매월 1회만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의 요구는 이슬람교를 비롯한 상대적 소수 종교인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집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감옥인권 개선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갈수록 현실에 안주해서 정부 관료들과 똑 같이 ‘상황의 불가피성’만을 되된다면 인권 진전에 도움이 안 되거나 걸림돌 밖에 될 게 없다. 만일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재 안동교도소장이 부산교도소에 재직하면서 저지른 “계구”착용 남발 등 명백한 재소자 인권유린과 위원회의 권고마저 이행하지 않는 안하무인식 태도에 분명하게 경종을 울렸다면 안동교도소에서 이와 같은 구타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정창윤씨에게 부당하게 징벌을 가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안동교도소의 최근 상황은 일시적으로 감옥인권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서 안심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더 커다란 투쟁으로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준다. 안동교도소장은 지금 당장 정창윤씨에 대한 부당한 징벌을 철회하고, 재소자 구타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혀라!
2017-07-11 | hrights | 조회: 497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보호”라는 단어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니 영어로는 “protection", "잘 돌보아 지킴”, “잘 돌 보아 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 부쩍 한국 사회에서 “보호”라는 말이 권력관계를 상징하며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위선적인 용어로 쓰인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다. 출입국 관리법(제51조)을 보면 “불법 체류 외국인”이라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주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는 경우” “보호명령서를 발부받아 그 외국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출입국관리법은 “불법 체류 외국인”, 주로 이주노동자를 단속할 근거가 되는 모법이고, 실제 법이 운용되는 현실을 볼 때 위에 있는 법조항에서 “보호명령서”는 “체포영장”으로, “외국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외국인을 체포 또는 구금할 수 있다.”로 정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상 외국인의 단속 및 보호는, 불법 체류 외국인 출국이라는 행정목적을 담보할 대체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출국시까지 출국준비를 위한 여권·항공권 마련, 체불 임금 해결 등을 위한 최단기간의 집행보전수단을 의미”하므로 “신체의 자유 제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형사범의 구금과는 그 목적이 달라” “외관만으로...형사사법절차의 인신구속과 동일한 선상에서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한겨레 신문 “왜냐면”/박재완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 사무관] 하지만 전국의 교도소(구치소), 경찰서 유치장 등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외국인 보호소”라고 하는 곳이 적용받는 법규가 다를 뿐 인권침해 정도가 훨씬 더 심하기 때문에 “형사사법절차상 인신구속”과 내용적으로 다르다고 볼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지난 1월 4일 나는 화성 외국인 보호소를 다녀왔다. 슈바슈 부타토키는 네팔출신 이주노동자이고 ‘이주노동자 노조’ 조합원이다. 그는 지난 7월 3일경 수원지역에서 열렸던 “경기지역 차별철폐 대행진”에 참가하려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단속” 자격이 없는 경찰관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그는 구금되자마자, 절차상 하자가 있는 법 집행에 항의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그 결과를 기다리며 7개월째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슈바슈의 경우처럼 ‘강제단속’ 과정에서는 무수히 많은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당연히 자기 방어권 차원에서 이의제기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절차는 지금보다 더 충분히 보완되고 강화될 필요가 있다. ‘강제단속’을 당해 “보호소”에 잡혀 온 이주노동자들은 권리 구제절차(알량한 수준이지만)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문제를 제기해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감옥과 다를 바 없는 “보호소”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분노스럽지만 정부의 강요에 따라 순순히 강제출국을 당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국의 “외국인 보호소”에는 슈바슈를 비롯한 상당수 이주노동자들이 난민신청과 “보호 해제”등 권리를 찾기 위해 고통스런 수감생활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에게 “보호소”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이 아니라 ‘형사범’이 생활하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한다. 설사 그들 대다수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이라 하더라도 출입국관리법에도 규정되어 있듯이 “피보호자의 인권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국적,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한 차별”은 없어야 한다. 지난 해 12월 24일, 슈바슈는 크리스마스이브 종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신청을 했지만 직원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슈바슈가 항의하자, 담당 직원은 “너 죽을래!”라는 말과 함께 옷소매를 끌어당겨 주저앉힌 다음, “여기서 기도해”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화성보호소 측에서는 ‘폭언, 폭행한 사실은 없다.’며 강력 부인했고, 종교행사에 참석 못한 것도 슈바슈가 그 시간에 면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슈바슈는 그날, 면회를 하지 못했다. 누군가 면회를 왔다 그래서 면회실로 달려갔지만 아무도 없어서 곧장 방으로 되돌아 왔다고 했다. 양쪽의 말이 전혀 다르다. 나를 비롯해 “화성보호소”를 항의 방문했던 경기지역 노동, 인권 단체 활동가들은 소장에게 슈바슈를 면담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소장은 대뜸 “내가 어떻게 일개 보호 외국인을 면담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사건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났지만 “보호소” 직원들의 이야기만 들어보고는 우리들에게 “사실 무근”이라며 발뺌을 계속했고, 슈바슈를 “NGO 빽”만 믿고 거만하게 구는 사람쯤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2월,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여수외국인 보호소 화재참사 추모식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화성보호소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보호 외국인” 수용시설이다. 하지만 수감된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는 감옥 수준에도 못 미친다. 감옥에서는 1일 1시간 이내의 운동시간이 주어지는데 화성보호소에서는 1주일에 2~3회, 그것도 30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난방시설도 열악하다. 보일러가 아니라 하루에 세 번 가량 천장에 있는 스팀을 통해 더운 바람이 나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에서도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라고 한다. “보호소” 측에서는 그동안 난방비 예산이 부족해서 그랬는데 최근에는 도시가스를 유입해서 평균 18~20℃의 실내온도를 유지시켜 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따뜻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감안한다면 인색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화성보호소에는 파키스탄 출신인 라나 박타르 칸, 이란 출신인 이라즈, 가나 출신인 마이클 오키네 등 난민신청을 요구하며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여러 명 있다. 이들은 모두 2년 넘게 이곳에서 ‘생 징역’을 살고 있다. 법무부는 ‘경제적 이유’에 따른 난민은 아예 인정되지 않고 ‘정치적 이유’에 따른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간혹 인정해줄 뿐이다. 이들은 모두 개종에 따른 본국의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한국에 난민신청을 해왔는데 법무부가 이들의 난민 신청을 기각시켜서 기나긴 법정소송이 진행하고 있다. 감옥보다 못한 곳에서 2년 넘게 갇혀 있다 보니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게 나빠져 있다. 이라즈는 위염을 앓고 있고, 라나는 눈병과 피부병, 마이클은 눈병과 전립선 비대증의 증상을 보이고 있다. 아플 때마다 의무실에 가지만 의무실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고 적당히 약만 지어준다. 고통을 계속 호소하면 외부 병원에 가라고 하는데 진료비는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하므로 돈이 없으면 갈 수 없다. 2년 넘게 일도 못하고 수감생활만 해온 이들에게 돈이 있을 리 없다. 구속노동자후원회에서는 2~3개월에 한 번씩 영치금을 넣어 주긴 하지만, 비싼 병원비를 충당하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한 번은 마이클의 치료 문제 때문에 화성보호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의무과장에게 이럴 경우 국가에서 보조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의무과장 하는 말,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그게 가능한데 이렇게 오셨으니 한 번 힘써 보지요!’ 며칠 후 “보호소”는 마이클을 가까운 수원지역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가능한 일을 누군가 따지고 항의해야만 마지못해 처리해 주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라나는 말한다. “반장이 매일 와서 ‘난민 안 둬!’, ‘파키스탄으로 가!’라고 말해요! 맞는 것보다 말로 때리는 게 더 아파요!” 수감된 이주노동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 권리 행사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을 우리는 “보호”라고 말할 수 없다. “보호소”의 역할이 진정 보호에 있다면 무엇보다 그들의 인권 보호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위선적인 간판은 그만 내려 버리던가? 이런 문제는 비단 화성보호소만의 문제만도 아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수용하고 있는 전국의 모든 “외국인 보호소”가 안고 있는 문제이며 더 심각한 곳도 많이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오로지 정부의 “강제추방 정책” 때문에 이곳으로 잡혀왔다. 그렇기 때문에 형사범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최대한의 인권보장”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지난 해 2월 11일, 이주노동자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이후 비난 여론이 빗발쳤지만 “외국인 보호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수용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기엔 예산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정부가 “강제추방”을 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잡아들이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김영삼 정권 때부터 시작된 ‘산업연수생 제도’와 노무현 정권이 도입한 ‘고용허가제’에 이르기까지 역대 한국정부가 취해 왔던 이주노동자 정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의 근거는 체류 가능 기간 3년을 넘기고도 계속 체류하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22만여 명(전체 이주노동자의 절반)에 이르고 있고, 국제인권규범마저 무시한 야만적인 수급조절 정책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권 후진성이 만 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고용허가제” 실패의 책임을 이주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며 “노예무역” 시대에나 있을 법한 야만적인 “인간 사냥”을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최근 법무부는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말살하기 위해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극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까지만 위원장 등 이주노조 핵심간부들을 표적연행 한 후 강제추방 시켰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출입국 규제와 강제추방 정책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계속해서 헐값에 착취하고 더 나아가 한국노동자들의 노동조건마저 하향 평준화시키려는 기업주들의 이윤 욕구에서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교활하고 야만적인 규제정책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세계 노동자들의 권리와 욕구를 짓밟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저항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우리들의 친근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18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토요일 오전, 원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원주교도소에서 1년 반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해고노동자 변외성 씨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내다뵈는 야산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은 오래 전에 끝이 났고, 앙상한 나무 가지에 듬성듬성 매달린 마른 잎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쁘신데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예요!” 늘 그렇듯이 인사는 대강 짧게 몇 마디하고 곧장 ‘용무 확인’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안하면 삼십분도 안 되는 짧은 면회시간에 할 말을 다 못할 수도 있다. 변변한 난방시설 하나 없는 감옥은 지금, 방안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오그라들 판이다. 그런데도 변외성 씨를 비롯한 구속노동자들은 집단 단식 투쟁을 결행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개악법”, “노사관계 로드맵”, “한미 FTA" 등으로 민주주의와 노동자, 서민들의 기본권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이를 반대하던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둘러 지금까지 1,018명(10월 31일 현재)의 노동자를 구속했다.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노조, 2006년 포항건설노조, 2007년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 노무현 정권 내내 탄압을 받아 온 화물, 덤프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쇠창살에 맺혀 마를 날이 없다. 변외성씨는 대경상운이라는 택시회사에 입사해서 성실하게 일을 해왔으나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5년 전에 해고를 당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대중교통의 일익을 담당하는 택시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그래도 웬만한 택시 회사엔 노동조합이 있다. 하지만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사장들과 한 통속이 돼 조합원 등골을 빼먹는 거간꾼들이다. 업체 사장들 또한 정치인들, 큰 부자들 구역질나는 뒤치다꺼리 해주다가 거저 사장자리 꿰찬 위인들이니 ‘인권 마인드’는 커녕 ‘경영 마인드’도 없고, 노동자 알기를 ‘껌’으로 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민주노조인데, 사정이 이러니 여간 힘들지가 않다. 2002년 대경상운에서는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투쟁이 벌어졌고, 사측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한 조합원이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태 앞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변외성 씨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민주노조 깃발, 이 땅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이 한 순간에 고압 전류처럼 그의 뇌뢰에 내리 꽂혔다. 분신한 동료의 치료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그는 마지막까지 투쟁했지만 투쟁은 어정쩡 마무리되고 해고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원직 복직”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투쟁하는 신산한 해고 노동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재판 받으랴, 전국 해고 노동자들의 모임인 전해투(민주노총 전국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랴, 가정을 돌 볼 겨를은 없었다. 모아 두었던 전세금을 까먹기 시작하더니 이곳저곳 빈민촌을 전전하다 결국 ‘뉴타운’ 개발이 예정된 상도동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세입자들을 규합해서 한동안 철거 반대투쟁에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분노스런 사건 하나가 그를 다시 노동자 투쟁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그가 조합원으로 있었던 노조의 상급단체, 한국노총이 정부, 경총을 도와 “복수노조 허용”을 3년 유예시키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후퇴시키는 “노사관계로드맵” 법안에 합의를 해준 것이다. 2006년 9월 19일 그는 다른 해고노동자 7명과 함께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을 찾아갔다가 천만 뜻밖에 구속이 되고 말았다. 분신한 동료의 치료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변외성씨는 마지막까지 투쟁했지만 투쟁은 어정쩡 마무리되고 해고자 신세로 전락했다. 벼랑 끝이 따로 없었다. 아내와 슬하의 세 남매는 보금자리마저 잃고 거리로 내쫓길 판인데 남편은 구속이 돼 까마득한 2년 6개월의 감옥살이를 해야 하니.... 새벽마다 요구르트 배달을 하는 아내는 한 달에 두 번 원주까지 남편을 면회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올해 큰 딸이 수능을 치렀는데, 합격을 해도 고민이다. 사회의식도 있고 참 총명한 아인데, 전에는 대학에 붙기만 하면 어떻게든 입학금은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대화 내내 두 눈에 광채를 번뜩이던 그였지만 가족 이야기를 꺼낼 때면 슬쩍 말꼬리가 흐려진다. 1년 3개월, 적지 않은 감옥살이를 했건만 아직 절반이 더 남았다.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할 때까지 이 가정은 과연 유지 될 수 있을까? 몸은 비록 감옥에 묶여 있어도 투지와 신념만큼은 꺽은 적이 없었다. 투쟁이 필요할 때면 그는 언제라도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동안 옥중 단식투쟁을 무려 6번이나 감행했다. “비정규직 철폐”, “재소자 인권 보장”, “양심수 석방” 등을 촉구하며 굶고 또 굶었다. “교도소 관료들의 경직된 태도를 바꿔내는 것은 수형자들의 몫”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여러 차례 투쟁을 벌인 결과, 텔레비전 생방송 뉴스 시청 등 열악했던 원주교도소 재소자들의 처우를 상당히 개선시켰다. 덕분에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두둑이 신망을 쌓아놓긴 했지만, 소장이나 “윗 대가리”들이 바뀔 때마다 재소자 처우가 오락가락하고 있어 그 때마다 새롭게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고 한다. 행형법 개정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국회에서 잠자고 있으니, 인권단체들이 분발해달라고 한다. 교정 당국은 구속노동자들이 집단 단식 투쟁을 한다고 하자, 마치 ‘범죄 모의’라도 되는 양 기겁하며 구속노동자들 끼리 서신 왕래마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외부 단체나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신 또한 법무부 교정국의 허가 없이는 발송할 수 없도록 차단하고 있다. 원주교도소는 치졸하게도 변외성 씨에게 “자꾸 골치 아프게 하면” 그동안 요구해왔던 수도권 교도소로의 이감은 힘들 거라며 협박까지 한다. 변외성 씨는 그동안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부인이 주말에 면회라도 편히 올 수 있도록 수도권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달라며 간절하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방해도 한 맺힌 구속 노동자들의 결연한 투쟁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11월 19일,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이 “삼성 족벌 해체”, “비리 몸통 이건희 등 구속”, “양심수 전면 석방” 등을 촉구하며 제일 먼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삼성 재벌의 노동자 인권 유린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3년 가까이 실형을 살고 있다. 4년 전 북한을 방문한 것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민주노동당 당원인 전주교도소의 박종기 씨 또한 같은 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11월 26일부터는 변외성씨와 2006년 포항건설노조 투쟁으로 구속된 황우찬 민주노총 포항시협 의장, 이지경 포항건설노조 전 위원장이 “비정규직 철폐, FTA 반대”, “하중근 열사 사망 책임자 처벌”, “포스코의 건설노조 탄압 중단”, “삼성재벌 비리 특별검사 도입”, “한나라당 이명박, 이회창 낙선 운동”, “양심수와 생계형 민생사범을 포함한 대사면”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12월 3일에는 역시 같은 요구를 내걸고 포항건설노조, 전해투 소속 구속노동자 7~8명이 연대 투쟁에 동참한다. 노무현 정권의 황혼은 평온하게 저물어 가고 있지만, 그들의 손에 억울하게 구속된 노동자들은 차가운 감옥 안에서 분노로 치를 떨며 곡기를 끊은 채 항거하고 있다. 이제 “민주 시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구속노동자들의 이 처절한 투쟁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2017-07-11 | hrights | 조회: 526 | 추천: -1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두터운 감옥 장벽 안으로 인권의 햇살이 비춰들기 시작했다고 말하면 반만 맞다. 비록 인권이란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부당하고 참혹한 처우와 규율에 맞서 몸을 내던졌던 수많은 이름 모를 재소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민주화”와 더불어 감옥은 서서히 인권의 사각지대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심수,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차례로 출현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한국의 감옥은 여전히 ‘인권의 무덤’속을 헤매고 있다. 지금도 안동교도소에서는 “닭장보다, 개집보다도 못한” 교도소 환경을 개선하라며 심진보 씨(포항건설노조 파업으로 구속)와 정창윤씨(오산 수청동 철거민 투쟁으로 구속)가 보름 넘게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 건설노동자와 철거민,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서럽게 천대받아 온 일단의 사람들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최소한의 요구를 내걸고 정부와 힘센 자본에 맞서 저항했다. “민주화”된 대한민국 사회는 이들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범법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감옥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1980년에 지어졌다는 안동교도소는 그 연륜 만큼이나 시설 환경이 낙후되어 있다. 두 사람은 별도의 독거 사동에 수감되어 있다. 독거실의 크기는 화장실을 포함해서 0.8평밖에 안 된다. 키가 1m72cm인 심진보씨는, 너무 비좁아 똑바로 누울 수조차 없다고 한다. 화장실 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용변을 보고나서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야 내려가는 반 수세식인데다 낡고 깨진 변기 틈새로 쥐들이 들락날락거린다. 화장실엔 문짝도 없고 55cm 정도 되는 칸막이만 있으니 악취도 심하고, 밖에서 누군가 들여다 볼 때마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더러운 변기 옆에서 매일 같이 식기를 닦고 빨래를 한다. 세탁물 건조대를 자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빨래도 방안에서 말려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쇠창살 간격(4cm×3.2cm/40칸)이 너무 촘촘해서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고 창문 밖으로 빨래를 내걸 수도 없다. 안동교도소에는 이렇게 생긴 독거실이 두 개의 건물(사동)에 몰려 있다. 정창윤씨의 말에 따르면 이곳엔 주로 정신분열증 환자나 ‘요주의 인물’들이 수용된다고 한다. 머지않아 추운 겨울이 다가오지만 이곳에 설치된 난방이라고 해봤자, 복도에 있는 스팀이 고작이다. 더운 바람은 거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마루 바닥은 낡아 움직일 때마다 들썩거리고 벌어진 틈새로 묵은 먼지와 오물들이 스멀스멀 풍겨져 나온다. 벽지라도 있으면 냉기가 덜 할 텐데, 언제부턴가 “보안상의 이유”라며 벽지마저 뜯어버렸다. 사진은 청송교도소의 복도 모습 재소자 인권 보장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2003년도 이후 전국 교도소(구치소)에서 약간의 시설 환경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차로 치면 차체에 있는 근본 결함은 남겨둔 채 간단한 부품 몇 개 교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구속남발로 인한 과밀 수용 문제, 2~3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 구금시설, 외부 감시가 불가능한 폐쇄형 감옥 위주의 행정체계 등 재소자들의 인권을 억누르는 한국 감옥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안동교도소는 이런 작은 변화마저 거치지 않은 채 고장 난 차처럼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시설 뿐 만 아니라 재소자 관리를 총괄하는 소장을 비롯한 안동교도소 관료들의 의식 수준 또한 낙후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어느 날 교육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취사장에서 밥이 설었다는 이유로 점심이 나오지 않았다. 밥이 없으면 건빵(대용식량)이라도 지급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항의하자, 교도관들은 규정에 없다며 아무런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정창윤씨는 안동교도소의 이런 사정을 구속노동자후원회를 비롯한 외부의 인권단체에 알리기 위해 긴급하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교도관들이 내용을 검열하고 나서는 ‘안 붙이면 안 되겠느냐?’며 회유를 하더니, 이를 거부하자, 등기우편을 이틀이나 늦게 발송하였다고 한다. 심진보 씨가 부인에게 발송한 등기우편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반 우편으로 둔갑해서 20일 가량이나 늦게 도착된 적도 있다고 한다. 재소자로부터 접수된 편지는 신속하게 발송(늦어도 24시간 이내)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늦게 발송해 놓고도 교도소 측은 사과 한마디 없었다. 교도소장은 심진보 씨가 면담하는 자리에서 시설 개선과 재소자 처우개선을 강력히 요구하자, ‘그걸 바꾸려면 10억, 20억이 들어간다.’며 볼멘소리를 하더니, 10분도 안돼 ‘누가 이런 면담을 주선했느냐?’며 부하직원을 호통 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고 한다. 교도소장의 예산타령은 핑계라는 생각도 든다. 안동교도소는 지금 민원실 등 외부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공간에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다. 건설 노동자인 심진보씨는 화장실 변기를 고치고 콘크리트 칸막이를 높이고 벽지를 바르는 데 그다지 큰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전시 행정에 들이는 노력과 예산의 반에 반만이라도 들인다면 재소자들이 보다 인간적인 환경에서 생활할 수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들의 요구가 교정당국이 들어줄 수 없을 만큼 무리한 것인가? 언젠가 나는 재소자들의 불만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모 교도소의 총무과장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교정학 박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다며 내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대뜸 “한국의 재소자 인권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왜 자꾸 재소자 인권만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며 “무고한 여성들을 성추행하고 연쇄 살해한 범죄자들에게도 인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냐? 그 피해자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전혀 관계없는 두 가지 사실을 연결시켜 주장하는 그의 억지 논리가 황당하게 들렸지만 어쩐지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답변은 똑같다. 끔찍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형벌이 뒤따라야 되겠지만, 자의적인 가혹행위나 인간이 살 수 없는 열악한 곳에 구금해 놓고 부가적인 고통을 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게다가 전국 구금시설에 수감된 4만여 명의 재소자들 가운데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기본권을 억누르는 잘못된 법 때문에 억울하게 구속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외부의 통제가 불가능하고 인권이 숨 쉴 수 없는 감옥을 내버려 두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권력자들에게 “공포정치”의 수단을 남겨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들은 이 수단을 이용해서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알량한 인권마저 통째로 앗아 갈지 모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821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새벽 2시경, 밤을 지새기에는 몸도 피곤하고 내일 할 일도 있고 해서, 없는 돈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쏟아지던 비도 그쳤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도 두 사람이나 들어갔으니 ‘오늘 밤 별 일은 없겠지’ 생각 했다. 그런데 아침 9시경, 피곤한 몸을 부시시 일으켜 사무실로 향하는 나에게 문자가 날라왔다. 홈에버 상암점과 뉴코아 강남점에 경찰이 들어와서 조합원들을 잡아 가고 있으니,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홈에버 매장에 당도해보니, 어제 밤 연대왔던 대열은 보이지도 않고 전경 버스들만 빼곡히 월드컵 경기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닭장차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매장 입구는 방패를 든 전경들에 의해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여성 조합원들이 하나 둘 끌려나오고 있었다. 우악스런 손길이 가녀린 여성 노동자의 사지를 번쩍 들어 닭장차에 밀어 넣자, 그녀는 울부짖으며 빠져 나오려 안간힘을 써 본다. 마치 영화에서 거대한 괴물이 사람을 번쩍 들어 한입에 털어 넣듯이, 경찰은 그렇게 여성 조합원들을 한명씩, 한명씩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일개 시민에 불과한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파업에 공감하면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이 심정적으로나 거리상으로 너무나 가까이 있는 이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나 반찬거리 등을 사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슈퍼마켓, 할인점에서 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서민가정에서는 주부들이 아이들 학비라도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이와 같은 유통 매장 아니면 식당이다. 그동안 노동시장에서 이들의 노동력은 부당하게 저평가 되어왔고, 업주들 또한 싼 맛에 고용해서 적당히 일을 시키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짤라 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매장에 경찰들이 진입해 점거 농성을 펼친 노조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한 때 생활용품 업체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나는 제품을 팔기 위해 이런 매장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 매출 목표를 채우는 게 영업사원의 지상과제다 보니, 매장에서 자신들이 파는 제품이 더 좋은 위치에 진열될 수 있도록 서로들 엄청나게 경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유통 매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영업사원들이 반드시 우군으로 만들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음료수를 사들고 다가가 친한 척 너스레를 떨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가 끝날 때 쯤 “우리 제품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따금씩 그들이 하는 일을 도와줄 때도 있다. 한겨울에도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음료수, 세제 박스를 몇 번씩 날라다가(까대기) 진열하는 일들을 반복하고, 매장 진열 위치를 완전히 뒤 바꾼다든지, 재고조사를 하는 날에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남들 쉬는 법정 휴일 날에 쉬지도 못할 뿐더러 월차, 생리휴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직장생활은 아무런 미래가 없어 보였다. 이런 곳에 정말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쟁에 의해 철저히 개별화되어 있고, 다양한 근무형태로 점포마다 뿔뿔이 찢어져 있는 이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냈다. 그 선봉에 까르푸(홈에버 전신) 노동자들이 있었다. 나는 비록 그 끔찍한 노동현장에서 떠나 있었지만 내 일처럼 기뻐했던 것 같다. 내 경험 속에서 노동조합이 “진짜 있어야 돼”라고 생각했던 곳, 또 하나는 건설현장이었다. 그나마 잘 버티고 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짤리게 되자, 먹고 살기 위해 나는 건설현장 잡부가 되어야 했다. 욕설이 난무하고, 뙤약볕 아래서 온갖 허드렛일을 허리가 휠 정도로 해대도 “너 필요 없으니 내일부터 나 오지 마!” 작업반장의 한마디에 해고가 돼 버리니, 순간순간 눈치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도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아직 광범위하게 조직되진 않았지만 그 시작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걱정을 하지만, 어느 샌가 노동조합은 이렇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까지 다가와 있다. 곳곳에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끈질기게 투쟁해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아니고서야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이들의 권리를 되찾아 준단 말인가? 용접으로 굳게 밀봉된 매장에서 20여일을 버텨낸 뉴코아-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눈물과 대체인력 투입으로 파업을 방해하고 노조까지 파괴하려 했던 악랄한 사용자에 맞서 포스코 본사 사무실을 9일간 점거했던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요즈음 내 마음속에서 오버랩 된다.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강제 진압의 공포와 배고픔을 견뎌내며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내발로 걸어 나오지 않겠다.’고 버텼던 결연한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것은 너무나 많이 빼앗겨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는 사람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질러대는 한이요, 독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정부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점거할 때마다,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경찰력을 동원해서 건물을 포위하고 노동자들을 감금한 채 물과 전기를 끊고, 심지어 음식 반입마저 금지시키는 야만적인 ‘고사작전’을 전개한다. 작년에 포스코 본사를 점거했던 포항건설 노동자들에게는 “국법 질서를 문란”케 만든 “폭도”라는 누명이 씌워졌고, 진압 작전으로 인해 2명의 노동자가 죽고, 70명이 구속되었다. 작년 포항건설 노동자에 대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사진은 하중근 씨의 장례식날 모습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헌법과 법률로 보장하고 있는 나라에서, “생산과정”을 실질적으로 중단시키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몰아세우는 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한다 해도, 공장이나 매장이 예전과 다름없이 가동되고 있다면 기업주는 노조와의 협상에 그다지 적극성을 띄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기업 경영진은 노조가 협상을 요구하면 시간을 질질 끌거나, 협상에도 응하지 않다가, 막상 파업에 들어가면, 불법적으로 대체인력을 투입해서 공장을 가동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동자들은 물리력을 동원해 작업장을 점거할 수밖에 없는데, 정부와 법원이 이것을 “불법”으로 몰아, 형사 처벌한다면 대한민국에서 파업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뉴코아-홈에버 노동자들, KTX 승무지부 노동자들, 포항건설 노동자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는 날, 우리 사회는 보다 인간이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은 그들에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주고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나 같이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정부라면, 더 이상 국민의 꿈과 권리를 짓밟지 말기 바란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73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나는 심신이 너무나 지치고 억울하여 이제는 솔직히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이대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소!” 2006년 3월 10일. 이재익 씨는 징역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7일 만에 대구구치소를 나섰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자유의 공기는 매서운 꽃샘추위와 함께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올려붙여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분노와 모멸감으로 무너져 내린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허탈한 한기가 이미 그의 몸을 꽁꽁 얼려 놓았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대구영업소 차장이었던 이재익(51) 씨는 직책이 말해 주듯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기보다 “삼성맨”으로서 살아가는데 긍지와 애착을 느꼈던 평범한 사람이다. 악랄한 삼성생명의 구조조정 1984년 삼성생명에 입사한 그는 꼼꼼하고 우직한 성실성이 빛을 발해 특진 1회, 관리자 대상 3회, 밀레니엄 대상 1회라는 화려한 포상 경력에다 인사고과는 늘 AAA 등급(최우수 등급)을 달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던 그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삼성의 독단적인 ‘황제식 경영’이었다. 1997년 한국 경제 전체에 가해진 거대한 외부 충격(경제위기)으로 삼성그룹은 휘청거리게 되었는데, 그 일등공신은 ‘실패작’으로 판명난 삼성자동차였다. 불똥은 곧 삼성생명으로 옮겨 붙어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삼성생명의 “구조조정”은 3천여 명의 애꿎은 직원들을 차가운 거리로 내몰았다. “무노조 경영”이 체질화 되어 있는 삼성에서 “구조조정” 에 대한 노사 합의나 공개된 논의 절차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겉으로는 “장기승진 누락자,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직급별 고령자, 근무성적 불량자” 등을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밝혔으나 악화가 양화를 밀어 내듯이 칼자루를 쥔 상사들에게 아부할 줄 모르고 바른 말도 서슴없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재익 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6개월 치 임금을 보장해주는 조건에 “명예퇴직”을 요구받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듬해 곧장 전보 명령이 떨어졌다. 연간 평균 실적이 전국 최하위권이면서 폐쇄가 예정된 구미영업소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법인 영업소에 근무해 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이것은 사실상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2000년 상반기 전국 법인 영업소 중 1등, 하반기에는 3등을 차지했다. 덕분에 ‘관리자 대상 금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2001년 5월 중 단행된 3차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그해 10월부터 전국 2백여 개 영업소를 폐쇄시키는 4번째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어렵사리 살려 놓은 구미 영업소도 한두 달 영업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전격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영업소가 폐쇄되는 마당에 영업소장이 서 있을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퇴직 위로금 1억을 줄 테니 나가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이재익 씨는 이번에도 단호히 거부했다. 삼성생명은 이재익 씨에게 나름대로 당근책을 제시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자 혹독한 보복을 가해 왔다. 차장 직급에다 영업소장을 맡았던 20년 고참사원을 대구법인 영업국으로 발령을 내면서 신입사원들이나 맡는 ‘업무담당’이란 직책으로 발령을 냈다. 그마저도 담당자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내려진 중복발령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일감도 주어지지 않는, 사실상 대기발령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삼성에 맞선 이재익 씨의 투쟁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했던가. 회사를 자신의 분신인양 생각하며 20년 가까이 몸 바쳐 일해 왔던 그였기에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모멸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독기어린 투지가 그의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그의 저항은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대기발령 이후 별다른 업무가 없었기에 이전과 달리 회사의 공식 근무시간(오전9시-오후6시)에 맞춰 정시 출퇴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본사 인사팀이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2002년 4월 이재익 씨는 서울로 불려 올라갔다. ‘다른 직원들은 8시 30분까지 출근하는데 왜 9시에 출근 하느냐’며 사표를 쓰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이재익 씨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충분히 대항할 논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각종 공문서, 사내 통신, 노조의 공문서 등 9시~18시가 공식근무시간 임을 입증해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후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7시~16시로 변경한 적이 있었다. 실질적인 근무시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삼성은 슬그머니 근무시간을 원위치 시켰다. 하지만 현장에서 공식근무시간보다 30분 더 일찍 출근해서 일하도록 강요하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삼성생명은 이러한 관행을 이유로 이재익 씨에게 사표를 강요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재익 씨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맞섰다. 회사가 그동안 공식근무시간을 어기고 직원들에게 초과 근무를 시켰으니 “시간외 수당”을 내놓으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던 이 소송은 1년여 만에 패소했다. 하지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공식근무시간 문제가 앞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그의 인생의 발목을 잡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강마저 악화되기 시작했다. 가슴 떨림과 현기증, 불면증에다 속이 더부룩하고 구토와 신물이 넘어오는 증세 때문에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하지만 영업국장은 ‘통근치료’가 가능하다며 그가 제출한 병가원을 여러 차례 반려시켰다. 2003년 3월 10일, 이재익 씨는 몸이 너무나 아파 출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국장은 그의 집 앞까지 차를 몰고 나타나 “무단결근”이라며 “짤리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출근하라”고 협박을 해댔다. 그를 강제로 차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까지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재익 씨는 이튿날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다. 국장은 그를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새파란’ 후배 직원들 앞에서 노골적인 망신을 주었다. 이재익 씨는 자신의 방어를 위해 삼성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더 이상 버티지 말고 결단을 내리라”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런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가 3일째 되던 날, 국장은 그로부터 자신이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하자, “왼팔을 꺾고 목을 조르는” 폭행을 가했다.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112에 신고를 했다. 본사에도 전화를 해 국장의 폭언과 폭행을 중단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검찰과 사법부는 삼성과 한 통속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초동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이 사건을 “폭행에 의한 상해”로 기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지만 검찰은 오히려 이재익 씨가 “상사를 모욕하고 업무를 방해”했다며 벌금 50만원에 약식기소를 해버린 것이다. 재판정에 선 이재익 씨는 판사에게 “검찰의 사실 오인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검사는 ‘정식 공판이 청구된 사건인지 몰랐다’며 징역6개월을 구형하는 상식 밖의 행위를 자행했다. 그 후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으나 벌금 50만원이 확정되었고 회사는 이를 빌미로 징계위원회를 개최해 그에게 6개월의 정직을 때렸다. 하지만 이재익 씨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앓아왔던 병증이 ‘산재’라고 판단한 그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고, 2003년 7월 29일 공단은 그의 병이 “회사와의 갈등상황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한 “불안신경증”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하다가 다쳐도 회사 측의 공작으로 인해 산재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던 삼성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판정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이재익 씨는 “사무실 폭행사건” 재판에서 출근부를 조작하고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한 여직원을 “위증죄”로 고소했다. 하지만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은 이번에도 놀라운 둔갑술을 발휘하며 그를 “무고죄”로 몰아 구속 기소하고 말았다. 재판에서 “위증”여부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고”혐의를 뒤집어 쓴 채 형사처벌을 당해야 하는 위기일발의 상황이 전개됐다. 쟁점은 삼성생명의 공식근무시간은 언제인가, 대구법인 영업국 사무실에서 이재익 씨가 폭행을 당한 것이 사실인가. 그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꼼꼼히 챙겨둔 회사 공문서들을 모아 한 다발이 넘는 증거자료들을 제출했다. 삼성생명은 사문서에 불과한 대표이사의 확인서, 어용노조 위원장의 확인서가 전부였다. 그는 검찰에 위증의 당사자들과 대질심문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6년 10월 25일 출소한 지 7개월여 만에 이재익 씨는 삼성생명으로부터 징계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삼성과 사법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노동자들과 함께 더 커다란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희망사항은 너무나 소박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지만, 삼성생명은 내가 입사하여 결혼을 했고, 자식을 키웠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오! 그러기에 나는 반드시 명예를 회복하고 꼭 돌아가야만 하오!”
2017-07-11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