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꿈을 가진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춤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그 아이는 춤으로 세상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기에 언론의 관심도 유별났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소위 말하는 ‘특수목적고’에 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최고의 무용수가 되겠다는 꿈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삐거덕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삐거덕거림은 ‘선생’을 잘못 만난 것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담임교사는 첫 면담부터 노골적인 ‘촌지’를 요구했고 그렇게 가져다 바친 돈만 2년간 28회에 걸쳐 모두 480만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교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특정 학원에 다닐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교사라기보다는 일종의 브로커였던 셈이지요. 물론 처음부터 이 아이가 교사에게 불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가졌다 하더라도 별 수가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아이의 집안 사정이 갑자기 나빠져 학부모가 교사를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때부터 불거졌습니다. 아이가 마침 어떤 대회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학교에 한 번 오라는 교사의 호출을 받았지만 학부모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정상 ‘봉투’를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때부터 교사는 브로커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학부모에 대한 언어폭력은 기본이고, 상습적인 폭행과 잦은 반성문 강요가 반복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이 또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급기야 2009년 3월에는 반성문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목 부분을 맞아 3개월째 병원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장기간 입원으로 학교에서는 유급처리가 되었고, 아이는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꿈이 와르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광주드림 이런 일이 있고 나서야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참교육학부모회 등 광주지역에 있는 인권단체들이 사건의 부당함과 해당 교사의 처벌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청와대에 접수한 민원이 광주시교육청에 이관되어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육청의 태도는 상식 밖이었습니다.(어쩌면 상식일지도 모릅니다.) 1차 조사에서는 피해학생과 학부모는 만나지도 않은 채 해당 교사의 진술만을 토대로 ‘증거자료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차 조사에서는 담당 장학사가 피해학생의 심리상태가 심각함을 인정해놓고도 심리상담 프로그램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3차 조사에는 3자 대면이 무산되면서 사실상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청이 내린 결론은 광주시 교육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이유를 들어 ‘엄중경고’에 그쳤습니다. 한 아이의 꿈을 무너뜨린 반교육적인 교사에게 교육청은 ‘너 정말 조심해’라고 얘기한 것이지요. 조사 과정에서 보여준 교사의 태도는 더 가관이었습니다. 3자 대면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요구에 대해 ‘다시 한 번 오라 가라 하면 당신들 앞에서 확 죽어버리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억울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믿는 무엇인가가 있어서였을까요? 한 아이의 꿈을 ‘자살’이라는 협박으로 무마하려는 그 사람을 어찌 ‘교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미 교육자의 자격을 잃은 사람에게 기껏 ‘경고’밖에 할 수 없는 교육청의 안이함은 딱 ‘그 나물에 그 밥’이 제격입니다. 광주는 교육열이 꽤 높은 곳입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3년간 수능시험 전국 1위라는 결과는 어느 정도 짐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1위가 아닙니다. 2009년 현재까지 광주전남에서 자살한 아이들이 모두 13명에 이릅니다. 대부분 광주지역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성적도 1위지만 아이들의 자살도 부끄러운 1위인 셈이지요. 상황이 이런데도 교육청은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비위 사실이 명백한 교사는 감싸고, 정작 보살펴야할 아이는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꽃다운 아이들이 죽음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교육청은 뻔뻔하기만 합니다. 결국 또 성적으로 덮을 속셈인 게지요. 무용수의 꿈을 키우던 아이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오늘은 발로 찼다.…진짜 죽고 싶다. 정말 살기가 싫다. 엄마가 아픈데 이런 말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이 책이 내 유언장이 될 수도….” 춤으로 승승장구하던 아이가 이제는 죽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5층 난간에 서기도 했다고 합니다. 13명의 죽음도 모자란 걸까요? 또 한 번의 죽음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또 어떤 변명을 해야 하는 걸까요? 교육청이, 아니 교육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53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일요일(23일)인 오늘 국회에서 국장(國葬)이 치러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또 한 분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달리 하셨다. 태어난 곳만 서울이고 어렸을 때부터 대학시절을 대부분 호남지역에서 보낸 나는 호남지역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오죽하면 호남에서의 ‘김대중 정서’가 타 지역의 ‘반 김대중 정서’를 불러 일으켜 대선 낙방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을까. 어쨌든 나 역시 그에 대한 정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대학원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고, 운동을 지속하고 있던 나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현안 이슈들로 인하여 당시 정권과 각을 세우며 심심찮게 “김대중 정권 퇴진하라” 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다른 정책들보다도 이라크 한국군 파병으로 인하여 당시 이라크에 있었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칼날을 세우며 노무현 정부를 비난했었다. 봉하마을 정토원에 안치된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영정사진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게 운명을 달리 하신 직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고 그 슬픔에 적지 않은 당황까지 하였다. 아마도 당시 흘렸던 눈물은 정치를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구조적으로만 본 점과,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로만 사로잡혀 있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과 반성 그리고 감성의 것인 듯싶다. 그러나 솔직히 감성 그 이상을 넘어선 내 스스로 완벽히 인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종합적인 지점에서의 반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3달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신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며 당혹감과 아쉬움과 슬픔이 또 한 번 가슴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 두 전직 대통령 시절에도 운동을 하며 집권자들에게 비판과 비난의 목소릴 냈으며, 지금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현재의 대통령에게도 내용과 정도만 다를 뿐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가슴속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당혹스럽다. 정말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에야 스스로에게 명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지금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이다. 아마도 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지금 최소한 나에게 두 분의 전직 대통령과 현재의 대통령이 같은 반열에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스스로 원치는 않지만 요 며칠 방송과 신문에서는 드라마틱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개인사를 내비치면서 계속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민주주의’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는 ‘민주주의’는 현재 2009년을 지나면서 극적으로 그 의미와 정의가 재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사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뜻을 누가 모르겠냐 싶지만 이토록 익숙했던 단어가 요즘처럼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평소에는 몰랐다가 희박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정리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해서 원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이것마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만이라도 없는 이 사회가 얼마나 억울한지 느끼고 있다. 이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느낄 수 있는 이것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전진되었던 민주주의였다.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 할 수 있었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없어서 쩔쩔매지 않았던 그것은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동의하지 않고 문제가 많다고 믿었던 그 정부정책들도 어느 정도 민의(民意)를 두려워했고 여론을 참고했던 이유는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민주주의였다. 아마도 백가지 이상이나 있을법한 대통령에 대한 평가기준들 중 현재 내가 두 분의 전직대통령이 사망한 사실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는 이 ‘민주주의’가 뒤로 돌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민주주의’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도 힘든 이 험난한 시기에. 이 글을 빌어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부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1 | 추천: 0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며칠 전 선거법 관련 전교조 교사들의 공판소식을 전해 들었다. 20명 전원에게 징역 6월에서 2년 2월의 실형이 구형되었단다. 피의자들의 절절한 최후진술을 읽어 내려가면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특히 소환당시 암선고를 받고 힘겹게 투병했던 우리 지회장 선생님의 최후진술을 대하면서, 치료하느라 앙상하게 뼈만 남았던 선생님의 야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법정에 다녀 온 친구와 긴 통화를 했다. ‘뭐, 이런 놈의 세상이 다 있냐!’ 는 울분을 서로 토해내며……. 업무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급식업체와 학원장들에게 수십억 원을 지원받고, 교육청 실, 국장과 교장, 교감들을 동원해 선거를 치른’ 서울시교육감에게 징역 6월을 구형한 검찰이 개인의 이익과 상관없이 다만 교육적 충정의 발로로 주후보를 지원했던 이 힘없는 교사들에게는 교육감보다 훨씬 무거운 형을 내린 것이다. ‘교육의 공공성을 해치는 일’이라는 이유로. 이 정권과 검찰의 후안무치에 또 다시 기가 막혀 온다. 이중 잣대라고 지적하기에도 이제 신물이 난다. 차라리 그냥 딱 까놓고 말해라. 그렇지 않아도 위에서 전교조 때려잡으라고 난리였는데, 기회가 좋아서 낚아챈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긴 촛불집회 때 안전한 먹거리를 주장하며 거리에 나온 유모차부대의 엄마들에게 ‘아동학대’죄를 들이댄 이 정부의 검찰인데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만, 교육의 공공성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따져 봐야 할 것 같다. 기사를 다시 읽어 보았다.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상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이를 조직적으로 위반함으로써 교육 공공성을 해친 것이 인정되어…’ 라며 검사는 중형 구형의 변을 늘어놓았다. 교육의 공공성이라고 했는가? 검사는 그 뜻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그 말을 갖다 붙인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최소한 ‘교육의 公共性’이라 함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도 침해받지 않을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보장해야 하며, 나아가 그 방향성에 있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를 보다 정의롭고 건강하게 발전시켜가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교육의 최전선에서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과 매일 호흡하며 생활하는 우리 교사들이 보기에 작금의 교육현실이 그런 대원칙에서 심각할 정도로 벗어나고 있다고 판단되기에 그 위기의식에서 우리 교사들이 나선 것 아닌가. 교육의 균등성 면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특목고, 국제중, 자립형 사립고의 난립, 고교등급제 등 일련의 교육정책들이 결국은 소수의 엘리트학생들에게는 유리한 정책일 수 있다. 하지만 엄존하는 학력위주의 사회현실 속에서 교육열이 남다른 우리나라 모든 학부모에게 자녀들을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게 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또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누가 더 많은 양질의 사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종착지는 결국 달라지게 돼 있다. 각기 다른 출발선에서 균등하지 못한 릴레이를 펼친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공공성에 대한 침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성적이 곧 실력은 아니다. 또 성적향상이 교육의 다가 아니다. 또한 모든 아이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도 없다. 진정한 교육은 성적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알며, 각기 다른 다양한 실력과 소질을 키워 나름의 꿈을 키우고, 또 펼치면서 당당히 사회구성원으로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진짜 중요한 건 다 생략하고 모든 아이들이 성적향상만을 향해 질주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성적 향상과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되는 분위기다. 언젠가 모 학원에서 어느 특목고의 입시문제를 아이들에게 학원차 안에서 나눠주는 사건이 있었다. 뒤늦게 합격이 취소되고 학원도 문을 닫는 듯 했으나, 결국 학부모들의 소송으로 학생들은 다시 합격 조치되고 학원도 슬그머니 다시 문을 열었으며, 지금 성업 중이다. 학교는 또 어떤가. 특목고준비를 하는 중3학생들의 경우, 학년말엔 아예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다. 학부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많은 학교들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교실 밖 어딘가에서 입시준비를 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성적이 모든 가치보다 위에 자리하면서 진정 중요한 가치가 묵살되는 현실, 각종 불법과 편법이 동원되면서 교육이 교육을 배반하게 하는 이 현실이 또한 교육공공성에 대한 심대한 침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교사는 검사의 말처럼 ‘국민전체의 봉사자’이지, 정권의 봉사자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특정 계층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전체, 더욱이 약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지난 3월 10일 오후 1심 선고공판에서 교육감직 상실형에 해당하는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은 뒤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10년 전 복직에 즈음해 김귀식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교사는 진실을 가르치는 자유인’이라는 책의 제목이 생각난다. 그 때 이후 지금까지 가슴 속에 새겨두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진실을 가르치려면 우리 교사들은 어떤 권력기관이나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름의 양식과 교육관을 지니고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한다. 교사는 죽은 지식을 가르치는 지식소매상이 아니다. 그런 건 다른 곳에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하고 있다. 교사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문학작품을 읽고 작가의 메시지를 찾아 내가며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지나간 역사의 편린들을 단순히 암기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지난 역사의 공과 과를 꼼꼼히 분석하고 앞으로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해 아이들과 함께 반성하고 토론하는 사람인 것이다. 교사들의 이런 교육활동이 가능할 때에 진정 우리의 교육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정권의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파면, 해임, 고소, 고발로 난도질당한 교단엔 어느새 울분과 투쟁의 기류 대신 무기력과 자조 섞인 침묵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내쳐진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그래도 교단에 남아 버텨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자위 사이에서 괴로워하다가 이내 표정을 잃어가는 교사들. 보았으되 보지 않은 듯, 들었으되 듣지 않은 듯, 할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도 꾹 참으면서 쏟아지는 업무에 함몰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너무 우울하다. 학원에서 새벽까지 시달리고 학교에서는 잠을 자는 아이들, 성적을 비관하여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는 아이들을 보아도 교육자로서 어떤 의견이나 주장을 펼 수 없는 우리들이 진정 교육의 주체라 할 수 있는가. 힘들었던 해직기간을 마치고 복직하게 되었을 때의 그 벅찬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도 행복했다. 이제 더 이상 교단이 행복하지 않다. 지난해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학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행복하지 않다’며 사직서를 던지고 표표히 교단을 떠난 후배가 생각난다. 아마도 내가 지금에야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이 질식할 듯 한 분위기를 그는 조금 일찍 감지하고 떠났지 싶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은 데 건강한 교육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 공교육이 바로 설 수 있을까. 교육당국이 툭하면 내세우는 ‘국가경쟁력’ 진정한 실력과 경쟁력은 이 정부가 자행하고 있는 폭압과 획일적인 교육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인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 열려있는 사고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개성과 소질을 지닌 아이들을 조화시켜 내는 교육적 시스템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미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교육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생각에 반하는 다른 어떤 주장이나 견해도 용납하지 않고 마치 점령군인양 국민들을 폭력으로 통치하려는 정부, ‘잃어버린 10년’을 부르짖으며 지난 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는 패륜적인 정부, 그나마 살아 있던 원칙과 상식마저 일시에 엎어버린 정부당국에 마지막으로 바란다. 당신들의 이런 행태가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을 눈곱만큼도 양보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아가 백성들이야 어찌됐든 이를 더욱 부풀려 자손만대 누리려는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만 무식과 어리석음의 소치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나라의 앞날이 조금이라도 걱정된다면, 그리고 ‘국가경쟁력’이 제고되길 바라는 게 진정이라면 ‘전교조 교사들에게 우리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는 그야말로 선정적이고 원한에 사무친 듯 한 구호들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교육현장의 목소리에 제발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생전에 노무현이 ‘웨스트 윙’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즐겨 봤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에 나도 그 드라마를 구해 볼 기회를 갖게 됐다. 감상평을 한 마디만 한다면 ‘왜 노무현이 이 드라마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정도 되겠다. 웨스트 윙이란 백안관 서쪽 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대통령 참모진들이 일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짐작하셨겠지만 백악관 참모들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드라마는 토론으로 시작해 토론으로 끝난다. 백악관 비서실장까지 포함해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론을 벌이고 대화를 나눈다. 거기에는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 토론 속에 정책이 담겨 있고 가치관이 담겨 있다. 물론 재미까지. 드라마를 유심히 보면서 생각해봤다.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내 눈길을 끈 건 대통령 집무실이라는 공간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 문이 여러 개가 있다. 비서실장과 바로 문이 이어진다. 대통령은 언제라도 필요하면 문을 열고 비서실장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비서실장 사무실은 조금만 움직이면 참모진들 사무공간과 곧바로 이어진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또 다른 문은 복도와 연결되는 듯한데, 이 복도도 백악관 참모들 사무공간과 이어져 있다. 대통령이 이 복도를 걷다가 참모와 마주쳐 이런 저런 얘길 하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다. 바깥으로 바로 이어지는 문도 있다. 대통령은 관저에서 회랑을 지나 곧바로 집무실로 들어간다. 대통령이 백악관이라는 공간에서 중심축에 위치한다. 대통령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참모들을 불러 ‘토론’을 할 수 있다. 백악관이라는 공간 자체도 시민들에게 열려 있어서 웬만한 집회라도 열리면 집무실에서 구호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런 공간구조를 강원도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에서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겨레하나’가 주최한 답사를 인솔하던 사진작가 이시우씨한테 듣기로는 철원군당 위원장 사무실은 1층에 있다고 한다. 노동당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철원 노동당사 최고 책임자 사무실이 있는 셈이다. 청와대라는 공간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직 대통령이 작년에 몇 번째인가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했던 말이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시민들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었다.” 왜 뒷산에 올라갔을까? 설마 대통령 집무실에선 노랫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닐까?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안 들릴 정도라면 대통령 집무실은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고립된 공간이 아닐까. 그렇게 토론을 좋아했다는 노무현조차도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점점 토론에서 멀어져 갔던 기억이 난다.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실과 참모진 사무실을 아예 다른 건물에 배치했다고 한다. 참모들과도 만나기 쉽지 않으니 국민들 얘기 듣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1일부터 개방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 오전 문화연대, 참여연대, 야4당 서울시당 계자 20여명이 광화문광장조례안을 폐지하라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경찰은 참석자들이 피케팅을 했다는 이유로 미신고 불법집회로 판단해 수차례 해산 요청 후 참석자 10여명을 연행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얼마 전에 광화문 광장이 문을 열었다. 처음엔 순진한 맘에 광화문 광장이 생기면 청와대와 몇 백 미터는 가까워지니까 대통령 집무실에서도 아침이슬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봤다. 하지만 역시나. 광장에서 기자회견도 못한다는 희한한 정부 방침이 나왔다. (도덕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북한에선 수령님 말씀이 헌법보다도 위에 있다고.) 앞으로도, 현직 대통령은 시민들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려면 힘들게 뒷산까지 올라가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말이다. 그럴꺼면 광화문광장에 확성기라도 설치해 주는 게 ‘선진화’로 보나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나 맞는 것 아닐까. @뱀다리(蛇足): 광화문의 명물이 됐다는 게 광장일까? 차도 한가운데 분수대와 화단, “큰 칼 옆에 차고” 있던 충무공을 “큰 칼 옆에 들고” 있는 왼손잡이로 바꿔놓은 이순신 동상, 거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봤던 그 자세 그대로 세종대왕 동상까지 들어설 예정이다. 이것저것 꽉 채워놓아서 풍물패 길놀이 하기도 쉽지 않겠다. 내 눈엔 아무래도 광화문 광장이 아니라 광화문 ‘공원’으로 보이는데.
2017-07-12 | hrights | 조회: 345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지워야 하는데 아직 지우지 못 하는 문자가 있다. 오늘 문득 문자를 뒤지다 지워지지 않은 그 문자를 발견했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그 문자를 받던 순간의 답답함이 떠올라 마음이 콱 메었다. 7월 20일이었다. 그 날 하루는 이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 가지 집회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오전부터 말 그대로 듣보잡인 사람이 인권위원장 취임식을 하겠다고 국가인권위원회로 오고 있었고 순천향병원에서는 용산 사태 추모대회가 있었다. 인권은 모른다는 법학 교수의 말은 정치가 무슨 장난이냐는 생각에 사람들을 어이없게 했다. 또 용산 사태가 반 년째였다. 반년이 되어 잊지 말자는 것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준비한 집회였다. 사람이 죽은 지 반년이 지났고 검찰에서는 수사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 그래도 ‘공권력’과 충돌해서 ‘국민’이란 사람들이 죽었는데 대통령은 단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상태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장례지내지 못 하겠다는 유족들이 시체를 메고 밖으로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래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같은 시각 평택에서는 정리해고 당한 쌍용차 직원들이 싸우고 있었고 그들을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공권력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날렸다. 스스로를 ‘죽은 자’로 칭하는 이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자였다. 더 이상 이들이 국민이 아니라면 공권력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진 못 해야 할진데 법의 바깥에 있는 자로 치부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한 공권력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나는 인권위원장 취임식 저지를 위해 인권위로 향했다. 건물 앞은 이미 경찰들이 빡빡하게 서서 문을 막고 있었다. 인권위원장 자격검증을 위한 공개질의서를 준비한 활동가들은 입구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 하고 있었다. 겁이 많은 인권위원장은 이미 경찰들을 불러 몇 뼘 되지도 않은 인권위 문을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로마저 경찰들은 차단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약자의 편에 서는 가장 힘 센 기구가 인권위였는데, 그 인권위가 인권을 침해하는 사건이었다. 인권위 건물을 들어가지 못 하는 활동가들은 분통이 터졌고 다칠 걸 알면서도 방패로 돌진했다. 국가는 국민을 바보로 알고 기업은 모두 제 덕이라고 착각한다. 국가는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기준으로 국민과 국민 아닌 것을 나누고는, 국민 아닌 자들은 만만하게 생각한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국민 아닌 자’로 취급한다면 아예 공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국가에겐 없는데도 말이다. 기업은 어떤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기업의 덕이고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직원들을 마구잡이로 해고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일터이고 쉽게 나갈 수 없다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불법이라며 최루액을 쏘고 물과 전기를 끊으면서까지 끌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이 너무 절실해진 시대에 그 어떤 때보다 인권이란 말이 많이 들린다. 하지만, 지금 인권이라는 말은 너무 무력하다. 너무나 상식적이기에 인권이 침해된다는 말을 부르짖으면 양심에 찔려할 거라는 건 착각인 셈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 이런 나의 생각이 여전히 이상적인 착각인가. 환상을 깨고 나쁜 것을 직시해야만 이 모든 비상식적인 사태들을 막을 수 있는 걸까.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절실하게 느낀 건 경찰 때문이다. 누군가 경찰의 양심은 따로 있다 했다. 단순히 그들도 또 하나의 희생자들일 뿐인가. 경찰과의 대치 앞에서 이건 진짜 싸움이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을 가엾게만 생각해야 하는가. 난 그 날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경찰을 미워하되 경찰 개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 그들이 경찰이기 전에 경찰 개인이라면 더욱 질타해야 한다. 경찰에게 윗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찰 양심’이 있다면 경찰 개인에게는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이 있을 터이다. 지난 7월 20일, 취임식을 앞두고 경찰이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입구 경사로를 막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난 장애인이 올라가는 경사로를 막고 서는 그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웃으며 영상을 찍는 여경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근거가 전혀 납득되지 않아서일까? 아주 잠시라도 저들이 왜 서 있는지 생각은 하는 걸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모든 경찰이 그렇진 않은 거라며 일말의 이해라도 놓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건 내 타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 개인들도 사정없이 미워해야만 한다는 거다. 내 주위에 경찰이 있다면 그는 그저 내 친구라고 위로하고 말 뿐이 아니라 캐묻고 따질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왜 선이란 건 일상에서만 유효한 건가. 단지 착한 친구, 착한 아버지인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경찰들과 가까이 마주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을 때쯤, 바지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부당해서 화를 냈지만, 내가 지금 그렇게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지가 확실치 않아 인권활동을 하면서도 늘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스스로 감정의 과잉에 속지 않으려고 했는데. 경찰과 대치하는 인권위 현장 앞에서 누군가의 자살했다는 문자를 보는 순간 눈물이 눈동자를 덮었다. 속상하다. 속상하다. 화난다. 화가 난다. 너무도 정직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는 영화를 찍는답시고 한창 준비 중인 상태였고 그 날 저녁엔 배우들과 리허설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 하는 일이 너무 보잘 것 없어지고 내 영화 내용이 뭐가 그리 의미가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내가 또 싫지만, 어쨌든 난 계속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그래 잊지 않으려고 쓰는 글인 것을. 잊지 않고, 나 그저 사소한 선에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을 지키려면.
2017-07-11 | hrights | 조회: 327 | 추천: 0
고은애/ 전남대 법학과 학생 - 이번 글은 허창영씨가 진행했던 글쓰기 공부모임의 글로 대신 합니다.- 얼마 전 지방 모 대학의 시간강사들이 해당 대학을 노동청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대학이 2000년부터 8년 동안 강사료의 일부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그 액수만 해도 수십억에 이른다고 한다. 시간강사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시간강사가 대학 강의의 50%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대학에서 그들에게 보장하는 것은 그러한 노력의 50%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학이 주는 것이라곤 강사료 몇 푼이 고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대학의 냉대는 물론이고 불확실한 미래라는 더 큰 짐은 시간강사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런 시간강사를 대상으로 지성의 요람인 대학이 벌인 일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렵지만 현재 이것이 우리 대학의 사정이다.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그런데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어야 할 대학만 오히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나누어 쓰면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 연구실 공간이지만 시간강사에게는 해당이 없다. 그나마 휴게실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시간강사는 차 안에서 연구한다”는 말이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강의에 대한 연속성도 보장되지 않는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일방적인 통보만 있을 뿐이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대학과 시간강사 사이에는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만이 존재 할 뿐이다. 그런데 이는 시간강사의 처우가 단순하게 개인적 이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대학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인권과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이 시간강사를 냉대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이는 연구실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교양과목을 수강했을 때의 일이다. 성적에 의문이 들어 담당 강사와 면담을 하고 싶었다. 전임교원이라면 연구실로 찾아가면 되지만 시간강사는 그럴 수가 없다. 연락처도 몰랐던 터라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주소가 틀렸는지 ‘확인되지 않음’이라는 메시지만 있고 답도 오지 않았다. 의문만 잔뜩 담긴 성적을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연락처라도 알면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시간강사들은 대부분 교양과목을 담당한다. 때문에 강사의 연락처를 알기 위해서는 교양과목을 개설한 해당 단과대학의 행정실이나 조교실에 문의를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성적에 대한 것이라 여차저차해서 겨우 연락처를 얻기는 했다. 당시에는 연락처만 알면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웬걸. 강사와 통화를 하는데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연구실이 없어 강의 때만 학교에 잠깐 머무르니 당연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학생들이 오고가는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 성적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성적 확인을 위해 기꺼이 와준 강사의 착한 마음씨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렇듯 성적 확인이라는 쉬운 일도 시간강사에게는 그렇지 않다. 면담할 공간도 문제려니와 그 한 명을 위해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은 고스란히 학생의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시간강사에게 개인연구실을 제공하는 것이 재정적인 부담과 공간 부족 등의 어려움이 있다는 대학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렇지만 이는 손가락 뒤에 숨은 달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시간강사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다. 결국 학생을 위한 일인 것이다. 시간강사를 냉대하는 대학, 그것은 결국 학생들의 교육권을 방치하겠다는 반인권적인 태도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69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한국에서의 국제연대활동의 유형은 시기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기위한 고전적 국제연대활동이다. 대규모의 인권침해가 만연했고,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가 부재했던 암울한 독재 정권 시기에는 각 분야별 노동이슈면 노동단체들이, 환경 관련이슈면 환경단체들이, 여성은 여성단체들이 단체 내에 국제연대 부서를 두어서 각 이슈에 대한 상황을 관련 국제단체들에게 알리고, 이에 대한 서명이나 항의 전화나 항의 편지 등의 구체적인 액션을 외부로부터 요청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규모가 큰 단체에서의 국제연대부서의 활동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외국의 사례를 한국에 알리고 이를 이슈화하며, 한국 내에서의 활동을 조직하는 활동인데 이는 아마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1991년도 미국에 의한 걸프전 때 몇몇 여성, 평화단체에서 했던 반전시위가 그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전쟁과 점령, 외국의 정치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침해사례가 발생할 때 한국 내에서 단체들끼리 꾸준한 연대대응모임과 활동이 있어왔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민변이라는 단체에서도 국제연대활동 부서는 단체 창립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쭉 있어왔다. 주로 했던 활동은 앞서 말한 유형 중 첫 번째인 주로 국내의 인권침해 사례 등을 유엔인권메커니즘을 통해서 제기하고 이슈화하고, 외부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행동을 이끌어 내는 활동이었다. 하지만 단체 내에서 서서히 국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필요할 때 연대를 요청하는 이기적(?) 활동보다는 다른 나라의 인권침해상황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나 국제연대단체들끼리 공유하는 메일이나 간간히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해외 인권침해사례와의 접촉 빈도가 높아지면서 앞서 밝힌 두 번째 유형쪽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실제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 내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해외 각 국에서 활동하는 국제단체들과 연대하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통계적으로 최근 2~3년 내의 활동을 살펴보면 필리핀에서의 시민활동가 탄압(말이 탄압이지 실재 도로에서 총기를 사용하여 활동가들이나 성직자를 살해하는 수준)에 연대하는 활동, 버마에서의 민주주의 열망에 대한 버마군정의 탄압에 항의하는 활동, 중국정부의 박해를 받는 티벳인들과 연대하는 활동,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학살에 항의하는 활동 등 다양한 이슈와 영역에 걸친 국제연대 활동들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활동들은 자연스럽게 이전만큼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게 솔직한 상황이다. 단체내의 모습을 보면 다시 국내의 여러 인권침해사례에 대해서 기존에 했던 활동(유엔인권메커니즘 활용)에 더하여 유엔 이외의 국제기구에 한국의 사례를 알리고 이에 대한 연대를 요청하는 활동이 더욱 늘어났다. 그것도 거의 하나의 사안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사안이 터지고, 네버엔딩 사안폭발이라 이러한 사안을 계속 알리다 보면 나중에는 창피하기까지 하다. 요즘처럼 데모한번 할라치면 오만절차를 다 치르더라도 나중에 불허되기 십상이고 광장이 경찰차로 삥 둘러 쳐진 사안을 해외에 보낼 때 “정말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 모양까지 갔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청 앞 광장과 태평로 일대를 둘러싼 전경버스 사진 출처 - 뉴시스 앞서 밝힌 두 가지 유형은 어느 것이 옳다는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어떠한 활동을 보다 집중하고 역량을 투여해야 하는지와 같은 선택의 문제이다. 인권보호에 국경과 민족이 있을 수 없기에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 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활동함에 있어 비현실적이다. 개인적으로 솔직히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외의 인권탄압상황에 눈을 돌려 그에 맞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게을러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현재는 그 쪽의 상황만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활동가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관심을 가지냐가 활동에 중요한 동인이겠지만, 외부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뭔가 발전된다는 느낌보다는 쓸데없는 고민만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다. 가장 좋은 모습은 국제연대 활동의 외연이 넓어져서 국내와 국외, 주제와 주제를 넘어 활동함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경계를 넘는 국제연대활동을 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야!’라고 하며 스스로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양심상 그렇게는 하기에는 너무 민망하다. 가슴 속 켕기는 것도 있고. 나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면밀하고 냉정하게 봐야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은 이러한 고민을 무척이나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이씨~~MB(에구, 이러다 잡혀가는 거 아냐?)
2017-07-11 | hrights | 조회: 340 | 추천: 0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교실 풍경 하나. 모둠수업을 위해 모둠을 짜고 있다. 교사는 모둠별 수학능력의 편차를 되도록 최소화하기위해 모둠원을 모두 짜서 칠판에 판서한다. 모둠별 학생이름이 한 명 한 명 적혀질 때마다 학생들의 격렬한 반응들……. 아이들의 이런 저런 요구사항을 들어주다가는 원활한 모둠구성과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아 교사는 단호하게 밀고 나간다. 결국 한 모둠에 속한 여학생 한 명이 ‘와앙’ 울음을 터뜨린다. 사연의 내막은 그 학급에서 가장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남학생이 그 모둠에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함께 협동해서 수행평가점수를 받아야 하는 모둠활동에서 그 아이는 모든 아이들의 기피대상인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는 그 남학생, 그리고 계속 훌쩍거리는 여학생, 본수업도 아닌 모둠구성에서부터 기운을 빼며 진땀 흘리는 교사. - 수업능력이 떨어지는 친구와 한 모둠이 되기를 거부하는 학생들, 모둠활동에서 중요한 건 우리 아이가 다 했는데, 같은 모둠이라고 같은 점수를 주는 건 부당하다고 또박또박 항의하는 학부모, 그리고 모든 아이들에게 거부당한 아이의 맘 속 생채기는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교실풍경 둘. 중간고사 시험 예비종이 친다. 일사불란하게 시감 교사들은 문제지와 답안지를 챙겨 교실에 들어간다. 교실 뒷벽까지 8~10명 씩 5줄로 늘어서 앉은 아이들에게 교사는 책상 줄을 똑바로 맞추게 한다. 신속하게 문제지와 답지를 배부하고는 ‘모두 머리 위에 손을 올리라’고 엄격하게 말한다. ‘시험지에 표시한 답이 옆에 앉은 친구에게 보이지 않도록 4절 시험지를 반으로 접고 풀어라’, ‘고개만 옆으로 돌려도 부정행위다’고 엄포를 놓는다. 뒷면 중앙에는 시감을 보조하러 온 학부모가 긴장한 채 학생들을 둘러본다. 5분 뒤 본종이 치고 아이들은 마른침을 꼴깍이며 문제를 푼다. 고개를 정면에 박아 둔 채. - 앞, 뒤, 옆에 앉은 친구들이 볼까봐 시험지를 가리고 문제를 푸는 아이들. 우리 애가 뒷자리에 앉아 시험지를 늦게 받아서 문제 푸는 시간이 부족했다며 항의하는 학부모. 이런 살벌한 시험을 겪으며 우리 아이들은 어떤 가치를 가슴에 담아두게 될까? 교과학습 진단평가(일제고사)가 실시된 지난 3월 31일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문제를 풀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교실(교무실) 풍경 셋. 고개를 삐딱하게 외로 꼰 채 연신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빗고 있는 한 여학생. 책상위에는 교과서도 노트도 없다. 수업을 진행하다가 그 여학생에게 몇 번 시선을 주던 교사는 뚜벅뚜벅 걸어와 여학생 앞에 선다. “너 지금 뭐하니?” “머리 빗는데요.” “지금 수업시간이다. 책이랑 노트 펴.” 마지못해 교과서를 펴는 여학생. 여전히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다. 치미는 화를 삼키던 교사, 수업이 종료되자 여학생을 데리고 교무실로 간다. “선생님이 너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모르겠는데요.” “너 요즘 태도가 왜 이래? 통 공부엔 관심이 없어 보이고.” “네, 저 공부에 관심 없어요.” “그럼, 학교는 왜 다니는데? 너 처음엔 안 그랬잖아.” “ …….” “중간고사 점수 보고 선생님 깜짝 놀랐다. 공부를 하긴 한거야?” “열심히 했는데요. 했는데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누구에겐가 잔뜩 화가 난 표정이다. “그래서 이제 공부 관두기로 했어?” “……” 여전히 삐딱한 표정으로 교사를 바라보는 여학생. - 3월 초 정부회장 선출 전 임시회장을 했던 예쁜 아이가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온몸으로 환하게 웃음 짓는 게 매력이었던 그 아이. 그 아이의 중간고사 성적은 정말 형편없었다. 초등학교시절에 경험하지 못했던 점수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어느새 얼굴도 일그러져 가고 내 수업시간에도 엎드려 있기 일쑤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환하게 웃지 않는다. 교단에 선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매년 새봄에는 새로운 아이들과의 만남에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 오랜만에 맡은 1학년 담임. 지난 3월 2일 입학식이 진행되던 날,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만나 본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아직은 어색한 교복을 입고 멋쩍게 서 있던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시작’과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두려움까지 서려 있었다. 교사로서 이런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고 또 뭉클하다. 그러면서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잘 해 보자’라는 다짐도 하게 되는 것이다. 3월 초 제각기 다른 빛깔과 향취를 지닌 채 너무도 예쁘게 반짝이던 내 반 아이들이 실력이 모자라는 친구를 거부하고, 함께 도와가며 공부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냉정한 아이가 되어가고, 다른 아이에 비해 떨어지는 시험성적 때문에 상처받고 절망하면서 반짝임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자기 아이가 받을지도 모르는 작은 불이익에 건건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급증을 내는 학부모 옆에서 아이들은 또 시들어간다. 공교육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사교육을 요령껏 동원하여 자신의 아이들은 특목고에 보내는 교사들, 이러한 성공사례를 부러워하며 그 비결을 연수(?) 받고자 하는 또 수많은 젊은 학부모교사들. 이 교사들의 이율배반적인 삶의 모습을 우리는 간단히 질책할 수 있을까? 위의 모습들은 일제고사의 확대와 특목고 자사고 난립, 이미 공공연해진 고교 등급제, 학벌위주의 사회구조. ‘경쟁제일주의’를 무슨 금과옥조처럼 섬기는 정부.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며 만들어낸 괴이한 풍경들이다. 이 땅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 택배기사의 처절한 죽음, 벼랑 끝으로 내몰린 비정규직의 생존권 등의 절박한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외면하고도, 가슴에 아스팔트 깐 것처럼 의연할 수 있는 것은 내 옆의 아이를 밟고 올라서야 성공하게 되는 우리교육의 구조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해 왔던 것인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는 불행한 사태들이 단순히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도록 뿌리내려버린 사회전체의 시스템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무겁고 우울하다. 거대한 공룡이 돼버린 이 시스템을 개선하기에 우리 개개인은 너무 힘이 없다.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도 꿋꿋하게 공안정국으로 밀어붙이는 이 정권의 대책 없는 무식함과 뻔뻔스러움에 너무 많이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변명을 해가며 침묵하기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엄중하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너무 암담하다. 우리들의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더 참혹해질 게 뻔 한 현실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그런 마음들끼리 모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우리가 가진 건 ‘머릿수’다. 모여야 한다. 스크럼을 짜고 그들보다 더 견고한 연대를 만들어 야 할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12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1995년 4월 28일 대구에서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다치는 대형 사고가 있었다. 당시 방송에서 야구경기를 생중계하면서 사고 상황은 제대로 다루지 않은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했던 기억이 난다. 5월 18일 즈음 대구 경북대에서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출범식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한총련은 꽤 똑똑하게도 대학생 헌혈운동을 조직했다. 몇 천 장은 모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기꺼이 헌혈했다. 그렇게 모은 헌혈증을 모조리 대구에 갖다 줬다. 지금도 그러겠지만 당시 한총련 출범식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대구에서 데모하다가는 경찰한테 잡혀가기 전에 대구 시민들한테 돌 맞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광주, 전남, 전북에서 모여든 대학생 수천 명도 은근히 그런 게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게다. 그런데 웬걸. 출범식을 마치고 시내행진을 하는데 시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행진을 하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게 아닌가. 가스폭발사고에 대처하는 정부 측의 처리방식에 대한 불만과 헌혈증 수천 장을 기꺼이 보내온 학생들이라는 건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대비되는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그들은 운동권 학생들을 환영한 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시내행진을 하는 동안에도 교통경찰을 빼고는 경찰 구경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찰의 정치 감각이 대단했다. 어차피 한총련에서도 평화시위하기로 명확한 방침을 정했다 대구시민들이 정부를 바라보는 시선도 매우 좋지 않았다. 괜히 충돌이 일어나면 고스란히 정부에 짐이 될 뿐이었고 지지기반인 대구 시민들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때 대구는 아무런 충돌도 없이 모든 행사를 마무리했다. 한총련 출범식은 대구에서 벌어진 한바탕 축제로 끝을 맺었다. 당시 보여줬던 정치 감각을 오늘에 되살릴 수는 없는 노릇일까. 경찰이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던 날 가만히 있었더라면 ‘소요 사태 우려’는 애초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원한 건 추모를 할 수 있게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지난 5월 2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분향소 주변을 여전히 차벽으로 에워싼 경찰의 '조문 방해'가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경찰이 시청 앞 광장을 개방했더라면 적어도 현 정권에 마음이 가고 노 전 대통령에게 부정적인 시민들은 자기편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고 본다. 1주일간 경찰이 시청 앞 광장과 청계광장을 막아서 시민들의 조문행렬을 방해하자 시민들이 너나없이 “이건 좀 심한 거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법주차를 해놓고 검은 옷을 입은 전의경들이(혹은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심지어 대나무 만장이 아니라 PVC 만장을 보여주자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도 자신이 없단 말인가. 이리 소심해서야 남은 3년 반을 어떻게 버티겠다는 걸까.” 이제 우리는 안다. 경찰이 없으면 정권안보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경찰은 더욱더 정권유지에 매진할 꺼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길어도 3년 반이다. 경찰 수뇌부는 10만 경찰들의 자부심과 성실함을 대가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더구나 지금 경찰의 행태가 그 3년 반조차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경찰의 곤봉은 지금 대통령의 목을 겨누고 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69 | 추천: 1
장윤미/ 국민대 학생   언제부터인지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다. 관심사가 많이 달라져서이기도 하지만 정치, 사회면의 기사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느껴지기 시작해서다. 정치판의 모습은 어느새 장난 같고 사회면의 사건사고를 보는 건 오히려 내 삶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특히 정치에 대한 불신이 더욱 심해졌다. 어쩌다 보게 되는 방송 뉴스에서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나올라치면 울컥 분노가 치밀었고 또 그 분노가 낭비 같아 차라리 신경 끄자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우습다 우습다’ 했어도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사는 이상 ‘정치판’이라는 건 내 일희일비에 큰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더욱 그랬던 것일 게다. 지난 토요일 아침 촬영 때문에 어느 부동산엘 앉아 있었는데, “노무현이 죽었대요.” “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이 자살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그럴만하니까 그랬겠지요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두런두런 논쟁하는 소리는 어느새 희미해지고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무엇이 나를 이토록 충격을 주는 것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이토록 마음이 아픈 건 자꾸 그의 삶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인 노무현으로만 보였는데 자꾸 인간 노무현이 보인다. 나에겐 늘 비판의 대상이었던 그. 정치인이니까 욕먹는 게 당연하다 싶었고 그게 정치인의 운명이라고 믿었으니까. 또 어떤 매개를 통해서만 그를 보았고,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론이 작정하고 몰아세우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면밖에 볼 수 없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나는 노무현 대통령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진 않았다. 그의 임기 중 나는 사회라는 게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연스레 정치판이라는 곳은 의문이 대상이 되었고 그랬기에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부가 하고 있었기에 비난할 수 있는 건 노무현 대통령뿐이었다. 작년 촛불집회 때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선 이명박은 안 돼 노무현 때가 잘했지 그리워 라고 할 때,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감정적으로 과거를 향수하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안의 책임 대상을 찾다가 만난 게 노무현 대통령이었고 나는 늘 그렇게 그와 대면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지난 24일 오후 국화꽃을 들고 분향소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모든 것을 대통령 탓이라고 돌리고 마는 우리네 정서는 문제다. 실제로 그렇지 않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데, 우리는 쉽게 화살을 대통령 탓이라고 돌린다. 마치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해줄 거라고 믿고 잘못된 건 모두 그가 다 책임져야 할 것처럼 말한다. 투표하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대통령제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하는 일이 너무 많지만 그의 탓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탓하는 무게만큼 국민의 탓이, 내 가족의 탓이, 나의 탓도 무거워 져야 할 거다. 화살을 여러 개 만들지 못 한다면 또 그 화살을 나 스스로에게도 날리지 못 한다면 앞으로도 변할 건 별로 없을 거다. 쉽게 노무현 탓이라고 해버리고 말았을 때 그의 잘못 이상으로 너무 많은 짐을 지워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을 바꾸지 않으면서, 점점 더 갑갑한 사회의 모습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비난을 그에게 돌려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그냥 모두 다 이명박 탓이라고, 설령 장난처럼 내뱉더라도 그 말 한마디로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가려버리는 건 아닌가 싶다. 이건 정말 철저히 자기반성, 우리 반성일 수밖에 없다. 참 싫다.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신문에도 실리지 않는 수많은 자살 사건. 잊을 만하면 터지는 연예인 사건. 그래도 대통령은 자살 하면 안 된다고, 그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럴까 하며 이해하면서도 입 밖으론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고 말하는 건,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이렇게 돌아가는 나라가 싫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보도되는 그의 죽음과 관련한 뉴스와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수많은 글과 동영상 앞에서 최면 걸리듯 나라 전체가 우울증에 빠져 버리는 것도 두렵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던지는 문제들에 모두가 다 마주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언론 역시 보도를 위한 보도가 아닌, 슬픔을 강요하는 보도가 아닌 그의 죽음이 남긴 문제들을 더 많이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새삼 인간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어떻게든 죽지 말고 살아야지” 라고 말하면서도 산다는 건 매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문제들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강해보이던 사람을 꺾이게 한 지독한 고뇌를 떠안은 느낌이다.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그가 자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의 양심에 우리가 존경을 표하고 있는 거라면, 그래도 우리는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지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정치판은 더러운 거라며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다시 무관심하거나 모든 건 이 정부의 탓이라고 해버리는 상황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건 다 이명박 탓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를 욕하며 자위거리를 찾아 다시 정치를 외면할 순 없다. 도덕이라는 말, 참 고리타분하고 굴레 같지만 지금 우리에게 도덕적 양심 때문에 죽음을 택한 노무현의 죽음이 이토록 절절한 건 그게 너무 무너져버린 사회에 대한 탄식일 것이다. 다들 깊은 절망에 아예 침잠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혹여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이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야만 하는 물음으로 이내 바뀌었으면 좋겠다. 사회에 만연한 정치 혐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을 떠올리며 정말 정치인들을 사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당위로서 섬김을 받는 주권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건 꼭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거겠지. 어쨌든 우리가 한 국가 안에 국민으로 살아갈 것이라면, 국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국가를 만들고 싶은 거라면 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7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