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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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전국완/ 중학교 교사     엊그제 동료선생님들과 함께 모처럼 짬을 내 인근의 ‘진달래 동산’엘 다녀왔다. 3월 개학이후 줄곧 담당업무와 교재연구로 정신이 없었고, 휴일에까지 출근해야 할 정도로 바빴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지내는 동안 아쉽게도 벌써 진달래가 끝물이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봄이 금세 떠나버릴 것 같은 아쉬움에 업무 핑계대면서 짬을 못 냈던 나의 게으름을 탓해 본다. 겨울 빛이 아직 가시지 않은 산에서 가끔씩 진달래의 연한 분홍빛을 만나는 마음이 애틋함이라면, 진달래가 뒤덮은 동산 속을 거닐어 보는 기분이란 벅찰 정도의 설렘과 행복이라 할만하다. 화사한 봄기운이 내 몸 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랄까……. 내가 동산에서 진달래 향기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우리 학교의 많은 아이들은 아직도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방과 후 수업을 듣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방과후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올해 들어 교육청의 지속적인 채근에 각 단위학교들이 실적 올리기에 나서면서 비교과만이 아닌 교과수업반을 대폭 신설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내신반’. 또는 ‘선행학습반’. 주요과목이라 일컬어지는 영어, 수학, 국어, 과학, 사회 등을 학교 교사들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신 성적을 내는 학교 정규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교사들이 지도한다는 점이 눈치 빠른 학부모들에게 먹힌 것이다. 인근의 어느 학교는 학생들이 너무 몰려 쉬는 토요일까지 방과후수업을 운영하는 등의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이에 그 학교의 교감 선생님께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녁식사까지 제공해 가며 9시까지 수업을 하는 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몇 몇 열악한 지역, 또는 결손가정이나 맞벌이 부모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가정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버블쎄븐’으로 손꼽히는 서울의 어느 부자동네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들 중 몇 %의 아이들은 학원에서 방과후수업으로 옮긴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두고 교육당국에서는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 방과후수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자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은 학원에 매일 다니고 있으며, 방과후수업과 학원을 동시에 다니는 아이들도 매우 많다. 결국 방과후수업이 성황을 이룬다는 것이 사교육의 축소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똑똑한’ 엄마들은 학원에서 실력을 다지고, 학교 방과후수업으로 시험과 관련한 내신을 관리하려는, 즉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요량인 것이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새벽 1시, 2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교과공부를 하느라고 10시간 이상을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학교로 뺑뺑이를 돌고 있는 것이다. 10시간 공부하면 10시간만큼의 효과가 나고, 20시간 공부하면 20시간만큼의 성과가 날 거라는 산술적 계산을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투입하면 투입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기계라도 된다는 것인가? 새 학기 들어 맡게 된 ‘부진아 지도’ 때문에 지난 달 치렀던 진단평가 결과를 토대로 국어점수가 하위 10%에 드는 아이들의 명단을 뽑아 보충수업 일정을 짜고자 아이들을 만나 보았다. 그런데 웬걸 국어점수가 30점 안팎인 이 아이들이 나보다 더 바쁜 것이다. 학원은 매일 가고, 거기다가 몇 명은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수업까지 듣는다는 것이다. 우리글을 제대로 읽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들에게 이런 처방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어이없음은 잠시, 이 아이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답답했다. 국어점수가 30점이 안 나온다는 것은 교과서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교사의 지도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런 아이들에게 학교 수업 6시간도 모자라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혀 놓는 것은 혹사를 넘어 폭력에 가까우리라 생각된다. 이 정부 들어서 사교육비 줄이기의 차원으로 강화되고 있는 방과후수업. 높으신 분의 말 한마디에 각 지역교육청마다 소속 학교를 채근하여 참여 학생 늘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학교에 따라서는 막대한 교육청 예산까지 들여 방과후수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단위 학교들도 교사들을 달래가며 과목 당 2개 이상의 교과내신반을 운영하면서 실적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일단은 일부나마 사교육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또 정말 어려운 여건 속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에게는 교육적으로 필요한 부분일지 모른다. 방과후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의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하지만 이것이 본질이 아니지 않은가. 학원 대신 방과후수업을 듣는 학생이 아무리 많아진다고 해도 이것은 공교육의 정상화라고 볼 수 없다. 단지 학교 안에 학원이 들어온 격으로, 또 다른 성격의 사교육일 뿐이다. 또한 학교에서 교과수업을 제대로 못 가르쳐서 학원에 다닌다기보다는 다른 아이들을 뛰어 넘는 경쟁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보내는 것이다. 공교육의 목적이 교과공부를 열심히 시켜서 특목고 많이 보내고 대학 많이 보내는 데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본질은 사교육 없이도 공교육만으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찾아내고 계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일 것이다. 더 나아가 학력이 아니라 다양한 소질과 능력에 따라 자기실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10시간, 20시간을 공부해도 변하지 않는 등수에 절망하고 주눅들어가며, 오로지 성적을 향해 한 줄 서기를 해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교육적으로 덜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진정 공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말 그대로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동산을 도는 동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겨울의 끝자락인 2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뒷동산에 함께 오르던 삼촌이 물었다. “지금 이렇게 바람이 불어대는 이유가 뭐게?” “ …… ” “겨우내 잠자고 있던 나무를 깨우는 거야. 봄이 오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라고….” 어린 맘에도 삼촌의 그 말에 왠지 모를 신비스러움을 느꼈고, 나도 나무처럼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 시늉을 해 보이던 기억이 난다. 그 바람 덕에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혼신을 다해 양분을 끌어올려서는 갖가지 향기를 뿜어내며 다양한 빛깔과 모양으로 꽃잎과 여린 새순을 피워내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에 새삼 뭉클해진다. 이 나무들만큼이나, 아니 더 소중하고 귀한 생명을 지닌 우리의 아이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언제까지 그들의 소중한 오늘을 저당 잡힌 채 시들어가게 할 것인가.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생명을 잉태하고, 또 다른 생명을 깃들이며 하늘을 향해 당당히 팔 벌린 채 살아가는 나무들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싱싱하게 자라게 할 순 없을까? 누군가 가져온 친환경방울토마토 한 팩. 뚜껑을 열고 보니 색깔도 크기도 가지각색인 놈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들어앉아 있었다. 이게 자연의 원래 모습이지 않을까. 원래부터 다른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 한 가지 모양과 크기를 강요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서로 ‘다름’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어른들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336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일주일 전 작업하던 다큐의 촬영이 끝났다. 아니 더 이상 찍을 수 없게 됐다. 이미 다 결정돼 있던 결말이었다. 그가 감옥에 가는 것. 내가 카메라에 담은 인물은 병역거부자다. 병역거부자라, 사실 ‘병역거부자’라는 수식어를 쉽게 붙이기가 고민된다. 그 인물을 어떤 틀에 딱 가둬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라는 게 낙인 같은 말이긴 하지만 반면에 더없는 의지의 증거가 되기도 하다. 어떤 대의를 가지고 무엇에 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의 이미지다. 하지만 내 카메라에 담긴 그 인물은 기존의 병역거부자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 인물에게서 매력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병역거부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비난받는 일이긴 하지만 또 어떤 집단에서는 영웅으로 인정받는다. 엄청나게 큰 것에 저항하는 투사의 이미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내 욕심이기도 했다. 병역거부자 기자회견에서 보는,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국가에 저항한다거나, 그런 몇 줄의 기자회견문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병역거부 하는 일이 엄청나게 비장하고 슬픈 일이 되어버리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는 기자회견 대신 열장짜리 소견문을 써서 파티 형식의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줬다. 대학신입생 때, 오태양 씨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고민은 시작된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총을 들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군대 가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나는 왜 군대를 갈 수 없는지 8년간을 끙끙대며 고민했다. 결국 그는 군복을 입는 것보다는 차라리 죄수복을 입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었다. 공부를 했고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언어로 나름 풀어낼 수 있게도 됐다. 이런 나의 문제가 단순히 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엄청 용기 있고 강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처럼 찌질 하고 약한 사람도 병역거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들로 병역거부를 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4주간의 군사훈련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누군가는 총을 만졌을 때 손의 떨림, 그 탄약 냄새를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들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도저히 들 수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그가 솔직하다며 지지를 했고 또 누군가는 결국은 가기 싫다고 쓰면 될 말을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느냐고도 했다. 명확하지 않은 이유에 오히려 답답해했다. 나는 그의 훌륭한 점만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끝까지 뭐든 물고 늘어져야 했다. 그의 진짜 속마음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를 통해 드러났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의 모호한 대답들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유도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모순이었던 거다. 결국 그에게 명확한 대답을 원했던 거니까. 하지만 애초 그에게 명확한 답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그는 그의 길을 간 것일 테고. 재판엘 따라갔다. 1차 재판에서였다. 형사재판이었다. 그때 그는 죄수복을 입고 있진 않았지만 재판장 안의 죄수복 입은 ‘피고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갑갑해졌다. 따지고 보면 그는 죄를 지은 게 아니다. 판사는 양심의 자유보다 국방의 의무가 더 상위에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의 한계인가. 자유가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논리들. 최후진술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면서, 수십수백일을 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전 날아온 공소사실에는 단 두 문장이 적혀있을 뿐입니다. 허망했습니다. 법이 이토록 사람의 삶에 무감각하고 잔인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물어보고는, 병역법을 위반했다는 한마디 그리고 훅 하고 읽어내려 가버린 최후진술, 짧았던 순식간. 그곳엔 오직 선고만 있을 뿐이었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앞두고  대기중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서른 인생 가깝게 끙끙댄 자신의 고민이 단지 두 문장으로 기소장에 적히는 구나, “몇 월 며칠 입영날짜를 보고도 이행하지 않았고, 이로써 병역법을 위반했다”는 두 문장으로 설명되는 거였구나 싶어서 속상했다고 했다. 그는 법원에 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생겼다. 사건번호의 피의자로만 호명되는 게 싫었지만 형사재판이라는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지막 재판 때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제출한 자료들을 다 읽어봤다고, 그런데 당신이 주장하는 게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고. 사실 나는 판사의 그런 발언이 정말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게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주장하는 바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고 한 거면, 거꾸로 판사가 조사내용이나 내가 제출한 소견서를 꼼꼼히 봤을 것이라고. 내가 무슨 평화주의자라고 쓴 소견서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사례가 판사입장에서는 별로 관심가질 만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표현한 그런 말이, 결국은 법률적인 틀로써 잘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고. 이제 그는 감옥에 있다. 죄수복을 입었고 이름이 아닌 번호로 호명된다. 더하다면 군대보다 더할 감옥으로 그는 갔다. 모두 다 똑같은 삶을 살 순 없다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짐이었던 군대라는 문제에, 어쨌든 그는 한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했던 말처럼, 병역거부가 인생의 한 지점에서 점을 찍는 행위라면 그러고서 앞으로도 자기를 배신하지 않고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법률적이고 획일적인 어떤 체에 걸리지 않고 더 잘 도망치면서 말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01 | 추천: 0
임아연/ 한밭대 학생     어느 고대생이 자퇴했다. 아니 대학을 “거부했다.” 남들은 못가서 안달 내는 그 ‘명문’ 대학을 스스로 포기하는 ‘배부른 짓’을 저질렀다. 요샛말로 그는 ‘용자’다. 대학 졸업장 없이는 사회적 불구자로 취급받는 세상에서 꽤나 매끈하게 잘빠진 한 쪽 다리를 스스로 부러뜨린 셈이다. 그의 생각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홍세화 선생의 표현처럼, 대학 졸업장은 더 이상 학사 학위가 아니라 4년 동안 그 비싼 등록금을 착실하게 잘 냈다는 증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교육제도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따위에 관심 없는 대학생들도 ‘빛나는 졸업장’이 큰 배움(大學)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용기내지 못했을 뿐.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은 좌절했다. 그 용자의 이름은 ‘고대 자퇴녀’였기 때문에. 만약 한밭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많은 대학생들이 여전히 학력과 학벌로부터 자유롭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대학생들은 마음으로 이미 자퇴했고, 그들 중 일부는 조용히 교문을 나서기도 한다. 더 이상 이는 낯선 얘기가 아니다. 이렇게 명문대 학생도, 비 명문대 학생도 진정으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사회는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난 11일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던 중 그가 용기를 냈다. 그러나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한국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 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가 주는 메시지는 강렬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했다. ‘고대를 관둘 정도면…’이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과 빈곤한 교육철학으로 점철된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고대는 놓치고 싶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고대가 포기하기 힘든 이름인 만큼 한국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설령 2년제 지방대학일지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대한민국 교육현실에 대한 성찰과 대학생들의 방황에 대한 고민이지, 고대냐 아니냐가 아니란 말이다. 고대 자퇴녀로 인해 끊임없이 경쟁만 부추기는 한국의 교육현실과 불안함을 조장하는 사회에 큰 울림이 일었다. 그러나 나 같은 어느 지방대생의 이야기는 열등감 따위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런 사회가 명문대생도 아니고, 용기 내지도 못한 대부분의 ‘우리’를 더 외롭게 하고 소외시킨다. ‘SKY’, ‘in 서울’, ‘지잡대(지방의 잡다한 대학)’ 등의 천박한 용어들이 스스럼없이 통용되는 한 여전히 나의 고함은 한낱 발악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건, 고대 자퇴녀에 대한 나의 ‘열등감’을 아닌 척,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이 내가 지방대생이라는 것보다 더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서울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의 반응과 지방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 반응이 어떻게 다를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혹성B612를 발견한 터키의 천문학자의 주장이 옷차림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몇 년 뒤 양복을 차려입고 다시 발표하자 사람들이 그 주장을 인정하게 됐다는 ‘어린 왕자’ 속 이야기와 묘하게 겹치는 이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42 | 추천: 0
“신은 용서했으나 인간은 용서하지 않는다.” 사형 집행의 정치적 물타기를 멈춰라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참 해괴망측한 발언을 했다. 10년 간 좌파정권의 편향된 교육 때문에 흉악범죄들, 아동 성폭력 범죄들까지 생겨난다고 말이다. 정부 여당 원내대표가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물론 이에 대한 반응은 꽤 매섭다. “제정신인가.. 교육이 문제였다면 그 정권은 오히려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였다.. 도저히 할 말이 없다.” 등등 뜨겁다. 안상수 대표가 왜 이리 좌파정권과 아동 성폭력 범죄를 연결지어 물어뜯고 있을까. 바로 ‘물타기 전략’이다. 그들이 노무현을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비난하고, 지금의 무상급식 문제를 포퓰리즘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포퓰리즘적 물타기에 혈안이 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한나라당은 아주 발 빠르게 사형제도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신속한 사형 집행에 연일 기염을 토하고 있다. 여기에 이귀남 법무부장관 또한 사형집행설치와 이미 폐지된 보호감호제 부활 발언 등 나란히 보조를 맞춰가고 있다. 덕분에(?) 불법 4대강 사업, MB의 독도 발언, 한명숙 전 총리의 유리한 공판 등이 스르르 묻혀버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여론 조종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난 사형제를 반대한다. 물론 아동성폭력, 연쇄살인 등 끔찍한 범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지만, 국가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끊을 권한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범죄에 따른 예방과 법집행을 사형제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로 접근되는 사형제는 이미 그 정당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지난 16일 아동 성폭행범 등 흉악범들이 수용된 청송교도소를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이 장관은 이날 "청송교도소에 사형집행시설 설치를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 부산 여중생 살해사건으로 사형집행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이러한 가운데 어제 저녁, 7명이 모여 다카노 가즈아키가 쓴 「13계단」에 대한 독서모임을 가졌다. 먼저,「13계단」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로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등장인물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상해치사죄로 수감되었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준이치와 사형집행을 또 하나의 살인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던 교도관 난고가 살인죄로 곧 사형에 처할 사형 대기수의 누명을 벗기고자 하는 줄거리다. 20대에서 40대까지, 자녀를 둔 부모로서 부산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사형제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아이를 둔 부모로서 이번 부산 사건은 정말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법제도로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사형 집행 직전 고백성사 장면에서 ‘신은 용서했으나 인간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이 꽤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사형 대기수와 사형 집행자의 고뇌가 너무 잘 나타나 있어 사형 집행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살해하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국가나 거대자본으로 인한 폭력 또한 구조적 살인이며, 이러한 것들에는 국익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등등의 대화를 나누었다. 책「13계단」에서도 사형집행 허가가 결국 정치적인 논리로 작동되고 있다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떠한가. 부산 사건에 대한 개인과 사회적 폭력성의 진실과 반성, 그리고 체계적인 대안 마련보다는 다른 어떠한 매카니즘이 작동하지 않는가 싶다. 그러한 사고의 마비 위에서 신속한 사형 집행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책의 본문으로 글을 맺어볼까 한다. “형법이 그 강제력으로 지키려는 정의는 어쩌면 불공정한 것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을 정의라는 이름하에 심판하려 할 때 그 정의에는 보편적인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의 책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에서는 유독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여러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인신매매에 가까운 국제결혼 광고, 주민등록번호, 무소불위의 ‘검새’, 무노조를 고집하는 기업, 네온사인 십자가 등 그야말로 한국사회에만 있을 법한 얘기들을 위트 있게 꼬집고 있다.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여러 풍경들 중에 ‘길거리를 뒤덮은 현수막 문화’에 대한 것도 있다. 오 국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히 한국은 현수막이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 광고에서부터 소상인들의 호객행위, 행정당국의 정책홍보와 행사안내, 정당의 의견표출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도 다양하다. 이제 곧 지방선거 국면이니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새긴 선거용 현수막들도 가세할 것이다. 불법 게시물 철거와 과태료 부과 등 행정당국의 엄포는 떼고 나면 곧바로 다시 붙는 현수막에 의해 간단히 무시된다. 현수막 하나 만나지 않고 길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사실 현수막이 뒤덮은 거리의 모습은 문화라기보다는 공해라는 표현이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각의 어지러움은 물론이고 떨어져 너덜거리는 현수막의 위험성, 문구의 선정성 등은 다른 공해에 못지않다. 현수막을 없앤다면 조금 불편함이야 있겠지만 별 이로운 구석도 없는 현수막이 꼭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의 어지러운 간판문화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요악이라기보다 그저 익숙해진 생활습관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현수막은 봐줄만하다. 어지럽고 볼썽사납기는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외감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시기에 각 고등학교 정문에 붙어 있는 현수막은 좀 다르다. 혹 눈여겨보았을지 모르지만, 요즘 고등학교 정문에는 대게 이런 종류의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대 ○○명 합격, 수도권 ○○명 합격 등 대학 합격을 축하하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합격생 이름을 나열해놓은 학교들도 있다. 물론 그동안 대학진학이라는 목표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대다수일 테니 합격을 축하할 만도 하다. 하지만 합격 축하 현수막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선 현수막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의 졸업생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명문대 위주로 진학한 소수만을 위한 축하는 소위 ‘마이너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나 재수생들,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은 아예 설자리조차 없다. 어쩌면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학교당국에게 그들은 단지 패배자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학률이 높은 것이 곧 명문이라는 천박한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현실, 교육당국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합격 현수막이 담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 나와 주목된다.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이 합격 현수막이 가진 반인권성을 지적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들 단체는 합격 현수막이 학교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입시학원화를 조장하고, 진학만을 고집하는 학력차별, 특정 대학만을 지향하는 학벌차별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현수막이 주는 패배감과 좌절감 때문에 심지어는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학생들의 피해도 양산하고 있다고 한다. 합격 현수막 철거를 위한 운동은 이미 2006년부터 광주지역에서 제기되었다. 처음에 각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일부 학교가 시정을 하기도 했지만 매년 게시와 시정이 반복될 뿐 근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지난해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조사 과정에서 각 학교들이 지양하기로 함에 따라 “조치가 필요하지 아니한 경우”라며 기각되었던 사안이다. 그렇지만 올해도 여전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또 다시 진정을 하게 된 것이다. 2010년 3월 8일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이 국가인권위원회에 합격 현수막의 반인권성을 지적하는 진정서를 접수하기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출처 - 시민의소리 합격 현수막의 문제는 비단 고등학교 문제만은 아니다. 대학 현수막도 다르지 않다. 과거 대학의 현수막은 주로 대학생들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를 취업 관련 광고나 교내 행사 안내가 차지한지 이미 오래다. 대학의 현실도 상아탑을 버리고 취업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니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이름까지 버젓이 공개하며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 합격을 축하하거나 대기업 취업을 축하하기에 급급한 현수막은 도가 지나쳤다. 합격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행복하다. 더구나 동네에 자랑할 것도 아니고 교내에 내건 현수막이 ‘자위’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의미 없는 행동이 도서관에서, 각종 취업준비 학원에서, 고시촌에서 시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소외를 줄 수 있다. 청년실업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부의 성공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성공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극도 필요하겠지만 상처를 주는 자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대학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가 반드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입시경쟁을 부추기고 서열과 학벌을 조장하는 풍토는 반드시 차별과 연결된다. 고시합격을 자랑하고 대기업 취업을 자랑하는 대학의 풍토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873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3월 1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적어도 많은 한국인들에겐 즐거운 시간이었다. 혹자는 김연아가 보여준 환상적인 연기에 찡했다. 경기를 즐기는 진정한 스포츠정신을 보여준 빙상 선수들의 열정에 공감했다. 동계올림픽이라는 잔치를 끝마치자마자 밴쿠버 시민들은 또 다른 잔치를 시작해야 한다. 이번 잔치는 기간도 훨씬 길다. 바로 ‘빚잔치’다. 언제부턴가 엑스포나 아시안게임이 마치 신성장동력이나 되는 듯 난리법석을 떤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4수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죄를 짓고 벌을 받고 있는 재벌까지 사면해줄 정도다. 하지만 제발 냉정하게 되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가 지난달 25일 보도한 밴쿠버 르포기사를 발화점 삼아 대규모 국제행사가 얼마나 뒤끝이 안 좋은지 생각해보자.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밴쿠버시는 올림픽 관련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을 위한 교육, 건강보험, 예술지원 예산까지 삭감했다. 치안유지에 들어가는 비용도 처음엔 1억 6500만 달러를 예상했지만 실제 집행액은 6배나 되는 10억 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2008년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는 재정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번 대회 주요 스폰서인 노르텔 네트워크, 제너럴 모터스 등이 파산지경에 처했다. 알파인 스키경기가 열리는 휘슬러 블랙콤 리조트는 경기가 끝나는 대로 경매 시장에 나올 예정이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우리나라의 올림픽 선수촌과 비슷한 개념인 ‘올림픽 빌리지’ 문제다. 올림픽에 앞서 부동산 개발회사들은 그리거 로버트슨 시장에게 ‘시유지를 제공해 주면 이곳에 선수촌을 만든 뒤 올림픽 이후 호화 아파트로 개조해 분양하자’고 제안했다. 사업이 잘될 경우 밴쿠버는 화려하게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경기가 끝난 뒤에도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 지난 1일 밴쿠버 BC플레이스에서 열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폐막식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금융위기 이후 건설비용이 급증하면서 “장밋빛”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올림픽 유치를 명분으로 당선된 로버트슨 시장은 올림픽 빌리지 완성을 위해 4억 3400만 달러나 되는 특별대출을 받아야 했다. 결국 시 당국이 책임져야 하는 개발비용은 10억 달러에 이르게 됐다. 이 돈은 고스란히 시민들이 갚아야 하는 빚으로 남게 된다. 뉴욕타임스는 로버트슨 시장조차 동계올림픽 이후 부동산 경기가 활성화되지 못할 경우 수억 달러나 되는 빚이 남게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고 전했다. 과연 대규모 국제행사는 넝쿨째 굴러오는 호박일까? 정희준 동아대 체육학부 교수에게 물어봤다. 올림픽을 예로 들면, 적자냐 흑자냐 따지는 건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운영수입만 놓고 보면 흑자 아닌 올림픽이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을 개최한 자치단체의 전체 재정을 고려해서 놓고 보면 모조리 적자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올림픽이 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이다. 우리는 우석훈 박사가 쓴 ‘국제행사, 장밋빛 지역경제 보장 아니다’(신문과 방송 2007년 6월호)라는 글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주요 대회를 유치하면 그 순간부터 중앙정부 지원이 일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지역에 발생할 다른 종류의 지원이 줄게 되고, 해당 지역에서는 문화나 복지 혹은 여성지원 프로그램 같은 곳에 들어갈 돈을 빼서 건설계정으로 전환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특정 지역에만 너무 많은 예산을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지역에는 다른 종류의 지원을 늘리게 된다. 결국 중앙에서 오는 돈은 비슷해진다. … 한 건만 놓고 보면 중앙정부 예산을 따온 것 같이 보이겠지만 10년 정도 긴 눈으로 평균적 시각을 놓고 보면 결국 그게 그거인 셈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 3수를 밑천 삼아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1998년 이후 10년 넘게 도지사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솔직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할까 더 겁난다. 강원도에 사는 진짜 '서민'에게 동계올림픽이 별 도움 안 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알펜시아'가 '올림픽 빌리지'에 자꾸 겹쳐 보이는 건 그냥 기우일 뿐일까? 올해 본예산이 7600억 원이라는 여수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다. 지난달 18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2012년 세계박람회를 준비하는 여수시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박람회장에 이르는 도로를 현재 왕복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하기 위해 소요사업비 388억 원 가운데 230억 원을 지방채 발행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미 “2006년과 지난해에도 405억 원을 지방채 발행을 통해 마련, 지방채 원리금이 1734억 원에 달하고 있다”는 여수시는 “추후 발행분을 합치면 2000억 원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2014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인천도 요즘 재정상황을 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망하려면 무슨 짓을 못할까”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인천시는 지난해 초에 이미 “올해 말 인천시와 인천도시개발공사의 예상 부채액이 10조원에 근접해 인천 시민들이 1인당 358만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는 우려가 나왔다(한겨레, <인천시, 5년 새 채무 2.6배 '껑충'> 2009.2.27). 아마 인천시는 2014년에 성화가 타오르기 전부터 빚잔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4 | 추천: 0
- 중국교포 김학주 씨의 재심을 요구한다!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다고 하면 보통은 진보적인 사회단체 활동가라든지, 정치의식이 뚜렷한 사상범, 정치범을 연상한다. 하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의 국가보안법 탄압사례를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구속돼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구속노동자후원회가 후원하는 구속노동자들 가운데 한 분인 중국동포 김학주 씨는 국가보안법이 겨냥하고 있는 표적에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돼 전주교도소에서 5년째 실형을 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김학주 씨는 중국 길림성 지신향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용정시 삼합진에서 양식창고 화험원(化驗員-양곡 품질등급 책정)으로 일하다 결혼을 해서 평범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국가가 주는 빠듯한 월급으로는 살아가기가 너무 버거워서 이웃 사람들과 함께 북한에서 송이버섯이나 개구리 기름을 사다가 중국에서 되파는 장사에 뛰어들게 되었다. 삼합진은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대였지만 경비가 허술해서 이런 식으로 국경을 제집처럼 넘나들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는 아예 북한을 탈출해 나오는 탈북자들도 끼어있다. 1997년 10월경 김학주 씨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말려들었다. 그는 삼합진과 회령을 오가며 장사를 해왔는데 어느 날 회령에서 숙소를 제공해 주던 친구의 여동생이 자기 친구들을 중국에 데려다 달라고 사정을 했다. 너무나 간곡한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 중 한 명을 삼합진까지 데려다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북한당국이 이 사실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는 회령에 있는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 지하 유치장에서 55일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이 일이 있고나서 김학주 씨는 장사를 그만두고 양식창고 일만 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회령 감옥에 있을 때 옥바라지를 도와준 조선족 골동품상 전진국 씨가 찾아와 류영화, 김송산 등 같은 조선족 출신 농수산물 장사꾼들을 소개해준다. 1998년 10월경 류영화 일행은 김학주 씨를 찾아와 자기가 알고 있는 북한 보위부 간부가 송이장사가 잘될 수 있도록 뒤를 봐줄 테니 해보지 않겠느냐며 꼬드겼다. 김학주 씨는 송이장사 하다 북한여성의 탈북을 도와준 일로 크게 경을 치르고 난 터라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그들이 하도 찾아와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결국 어느 날 이들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 곡산 보위부 부장 지영수란 사람을 한 차례 만나게 된다. 그 때 지영수는 송이장사를 도와 줄 테니 류영화 일행이 장삿길을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김학주 씨는 변방부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양식창고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중국쪽 변방부대의 위치라든지 군인들의 얼굴까지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종종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게다가 김학주 씨는 가난하게 살긴 했지만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평소 먹고 살기위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북한주민들을 만나면 자기 집에 데려가 잠도 재워주고 장사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어 쌀말이나 돈 몇 푼이라도 쥐어서 보내곤 했다. 그 후 류영화 일행은 김학주 씨를 직접 찾아오지 않고 전화로 몇 번 변방초소에 군인들이 있는지, 없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김학주 씨는 별 의심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북한 공작원이었던 류영화 일행은 당시 용정지역에서 노골적으로 ‘기획탈북’을 시도하던 한국인 목사를 납치, 감금해서 숨지게 한 사건의 주동자들이었다. 김학주 씨는 당시까지만 해도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김학주 씨는 1999년 9월경 그들의 권유대로 송이장사를 다시 시작했지만 손해만 보았다. 이듬해 5월 그는 송이장사에서 손을 떼고 부인과 함께 용정시 조양천진에 작은 식당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북한 장사꾼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9월경 용정시 안전국에서 류영화 일행이 저지른 사건과 관련해 조사할 것이 있다며 소환했다. 김학주 씨는 있는 그대로 진술했고 중국 공안은 죄가 없다고 판단해서 하루 만에 석방시켜 주었다. 김학주 씨 부부는 그 후 돈을 벌기위해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2002년 10월 부인이 먼저 입국했고 김학주 씨는 2년 후에 일산에 있는 브로커에게 1천만 원을 주고 단기비자를 끊어 입국했다. 체류기간을 두 차례 연장해가며 일을 하다가 2004년 5월부터는 미등록 상태에서 이곳저곳을 오가며 형틀목공, 가구조립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2005년 9월부터 그는 성남에 있는 (주)미래환경이라는 조경업체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11월 15일 국정원 요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연행해갔다. 그리고 곧바로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기획탈북 목사 납치사건의 공범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게 되었다. 김학주 씨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그가 구속된 후 그의 가족들(부인과 딸)은 강제 추방되었다. 사법절차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김학주 씨는 국정원과 검찰 조사과정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당했다. 김학주 씨는 수사과정에서 류영화와 함께 이 사건에 가담했다가 귀순한 북한공작원 한태근과 대질조사를 받았는데 한태근의 주장은 오락가락했다. 그는 오전에는 김학주 씨가 자신들이 북한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며 사실대로 진술했다가 오후에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김학주 씨가 모를 리 없다며 거짓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학주 씨에게 유리한 진술은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된 후 김학주 씨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체포된 주범 류영화와의 대질심문을 요구했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과 함께 출석한 류영화는 정신병자처럼 행세하면서 횡설수설하거나 진술을 회피했다. 재판부는 김학주 씨의 사정을 감안해서 국선변호사를 선임해주었지만 처음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검찰 공소는 이길 수 없으니 무조건 시인’하라고만 하면서 제대로 변론을 해주지 않았다. 김학주 씨는 화가 나서 다른 변호사를 선임해달라고 요구해서 새로운 국선변호사 선임되긴 했지만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학주 씨는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5년을 선고받았고 즉시 항소했지만 기각되어 실형을 살게 되었다. 김학주 씨는 구속되고 나서 너무나 억울해 중국대사관에 2차례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수민족(조선족)이라 그런지 회신조차 해주지 않았다. 중국에 살고 있던 그의 형님은 몇 해 전 한국에 살고 있는 ‘새터민’ 여성과 결혼해서 부산에 정착했다. 김학주 씨도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중국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고 마침 형님도 한국에 와 있는 터라 지난 해 2월 2일 법무부 국적난민과에 귀화신청을 했지만 “자격이 안 된다”해서 기각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김학주 씨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국정원과 검찰의 조사과정을 보면 짜맞추기 수사를 통해 김학주 씨에게 실제행위 이상의 과도한 혐의를 뒤집어씌운 흔적이 역력하다. 김학주 씨는 한국의 법절차를 잘 몰랐고 결백을 입증해 줄 유능한 변호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나는 이런 이유로 사법부에 김학주 씨 사건의 재심을 요구한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인생이 파탄난 한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더 이상 김학주 씨와 같은 피해자가 발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사건의 진실은 명백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43 | 추천: 0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호랑이와 관련된 좋은 이야기 말고, 모양새 불편해 듣기 싫은 썩은 동아줄 전래동화이야기가 있다.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오누이까지 어찌해보려 하지만, 하늘도 남매의 간절한 기도에 호응하여 썩은 동아줄을 내려 보냈고, 그 줄을 타고 올라가던 호랑이는 줄이 끊어져 크게 탈이 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해 온 종교계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급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먹어버리려는 호랑이처럼 인정사정없이 치달아온 기성 종교계에서는 내부에서 일어난 잘못된 일들에 대한 반성의 모습이 결여되어 보인다. 특히 대다수의 종교계가 사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호랑이 해’를 맞이해 사학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반성과 자신들의 허물을 고쳐버리는 결단을 내려주었으면 한다. 올 해에도 어김없이 모든 종교계 최고지도자들은 갖가지 덕담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용산문제’해결에 종교계가 기여했다는 이런 메시지에 더해 종교계가 못 고치고 있는 차별사례 하나씩이라도 바꿔준다면 더 존경스러울 것 같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불교계 한 종단의 종립대학에서 조교를 선발할 때 수계증이 없으면 뽑지 않았던 최근 방침을 바꿔준다든지 특정종교 학생동아리가 구성되고 강의실을 빌려 유명한 강사를 초청해 자유로운 집회를 갖도록 했다는 소식 같은 것이다. 또한, 절에 가서 절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한 선생님도 다시 대학 강단에 돌아갔으며, 강남의 한 불교계 설립 중•고교는 불교의식과 교리를 강화하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동아리교회의 담임목사를 종교교사로 초빙하여 국내최초로 학생들이 종교교육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 종교사학들은 학부모가 보내고 싶은 최고의 학교로 뽑혔다고 한 언론사가 밝혔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상상의 날개의 마지막이고 현실은 추운 날씨 같다. 한 고등학생이 2004년 6월 예배 참여를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며 학교방송을 이용해 호소한다. 이 학교 학생회장이었고 공부를 매우 잘했던 이 청소년에게 해당 학교는 한 달이 채 안되어 ‘퇴학’처분을 내렸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교회의 직분을 맡았던 분이었지만, 아들의 인권을 보호해 주지 못해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종교계의 편협한 발전이라는 ‘막 되먹은 호랑이’가 한 학생과 부모들을 잡아먹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 학생은 45일을 단식하고, 또 단식을 했었다. 광대뼈가 보이게 달라진 마른 얼굴은 마음고생의 ‘상징’처럼 많은 부모들에게 각인되기도 했었다. 이 사건을 모두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종교사학에 다녀본 지금의 학부모들은 모두 가슴이 타 들어갔으며, 여전히 불타고 있다. 자신의 자녀가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육되기를 바라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든지 비슷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종교문제, 종교교육문제에 있어서는 이렇게 폐쇄적이고 닫힌 자세로 있는 게 오늘날 종교사학의 현실이다. 학생인권을 지켜달라는 한 고등학생의 법정투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도대체 종교사학의 종교교육이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 지 해결 강의석씨는 지난 2004년 서울 대광고등학교에 재학 중에 예배선택권을 주장하다, 퇴학처분을 받고 종교자유 침해 손해배상 소송 등을 제기하였다. 사진 출처 - 필자 방법은 무엇인지 종교 지도자들은 제시해 주길 요청한다. 종교계 지도자들은 호랑이를 피해 ‘간절한 기도를 하는 이 땅의 오누이’들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탤 것을 호소한다. 한 학생이 제기한 한국사회 종교자유인권의 판단이 대법원에 맡겨져 있고 이 땅의 수많은 못된 호랑이 들은 여전히 썩은 밧줄을 잡고, 오누이들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누이들의 소망과 기도’에 답하는 대법원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327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지난 2009년 11월 초 유엔사회권위원회(이하 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비준 가입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규약(이하 사회권규약)에 따라 한국에서의 사회권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심의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회의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었다. 규약에서의 사회권의 범위는 차별, 노동 3권, 노동조건, 여성, 환경, 교육, 주거, 사회복지, 장애, 문화, 과학, 저작권까지 소위 ‘먹고 살기위한 모든 영역에서의 권리를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심의에서 정부는 위원회 위원들도 놀랄 만큼의 인원인 44명의 대표단을 파견하여 위원회 위원들로부터의 질문에 응답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의 회의가 있기 전에 정부는 종합적인 사회권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심의 회의 때에는 사회권 위원들과 정부관계자와의 질의응답이 약 이틀정도 이어졌다. 이 심의에 대비하여 한국의 사회권 관련 단체들(저자가 활동하는 단체도 포함됨)은 위원회 위원들에게 공정하고 균형 있는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서 정부보고서에 대한 엔지오 대안보고서를 작성, 제출하였고 심의 때에도 위원들과의 사전미팅을 통해서 엔지오의 의견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심의과정에서 정부는 각 행정부서가 추진했거나 진행 중인 정책과 법안에 대한 홍보와 그에 대한 긍정적 측면의 평가만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권 관련 이슈 중 어두운 면이나 불평등한 부분에 대한 설명과 파악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정부가 제출한 사회권보고서에도 이 부분은 엔지오들이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한국정부의 보고서와 심의과정에서 정부의 답변은 한마디로 한국의 사회권은 잘 보장되어 있고 한국정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무척이나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사회권에 대한 최종적 평가와 권고가 담겨있는 위원회 최종견해(Concluding observations)가 11월 24일에 발표되었다.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와 심의과정에서의 정부답변에 대해서 최종견해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한국 사회권의 현실은 갈수록 악화되어가고 있고, 대부분의 사회권 영역에서 규약이 보장하는 권리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정부는 규약의 당사국으로써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그 노력 또한 미비하다고 평가하였고 총 36개 항의 권고항목을 발표하였다. 이는 곧 유엔사회권위원회가 정확하게 현재 한국의 사회권의 현실이 새로운 정부와 연동되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음을 인지하였고, 한국의 높은 경제성장에 걸 맞는 사회권보장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을 권고한 것이다. (한국정부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 최종견해는 아래 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음. http://minbyun.org/?mid=act_02&document_srl=28807&listStyle=&cpage=) 하지만 정부는 위원회의 최종견해가 발표되자마자 성명을 발표하면서, 위원회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을 언급하면서 이는 관례상 어긋난다고 하면서 위원회의 최종견해를 혹평하였다. 그렇게 글로벌 스탠다드 하면서 국제기준을 외치더니만, 국제기관에서 한국의 사회권 현실을 정부와는 다르게 평가하니 이제 그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정부의 눈에는 한국의 사회권 현실은 유엔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판단하고 있나보다. 정부가 뭐가 그리 억울해서 이례적으로(사실 조약기구 최종견해 발표이후 당사국이 의견을 내는 것은 거의 드물다) 성명을 발표하나 싶어 정부의 보도 자료를 보았는데, 역시나 정부보고서나 심의 때의 발언과 비슷한 논리로 억지를 불이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작년의 국가인권위 조직축소에 대해서 위원회는 21%의 조직 감축은 심각한 우려사항이고 이에 인권전문가를 포함한 인적, 물적 자원을 배정하기를 권고하였는데, 이에 정부의 항변은 국가인권위원회 임원의 임기는 법으로 보장하고 있고 조직축소도 모든 행정기구의 개편과 연관되어 있기에 인권위의 독립성은 충분히 보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슨 삽질하는 소리도 아니고... 당시 국가인권위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부조직들이 개편 되어 감축 된 것은 사실이나 그 폭은 2%에 불과하였고 인권위는 21%를 감축하였다. 사회권위원회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감축임이 분명하기에 정부가 국가인권위에 인적, 물적 지원을 하여야 한다는 권고인데, 정부는 자꾸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고 하니... 참... 다른 내용도 그 주제가 다를 뿐 수준은 비슷했다. 그래서 엔지오들은 다시 정부의 성명에 대해서 그 반론을 작성하여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관련 자료는 http://minbyun.org/?mid=act_02&document_srl=29319&listStyle=&cpage= 에서 찾을 수 있음.) 유엔 사회권위원회 권고이행 촉구 기자회견 사진 출처 - 필자 엔지오들은 약 2년에 걸쳐 엔지오 대안보고서와 심의참석을 준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태도를 꾸준히 지켜봐온 결과 정부는 참으로 치사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릇 하나의 대상을 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은 판단이 될 텐데, 정부가 보는 한국의 사회권의 현실은 한국의 엔지오와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생각과 너무도 다르다. 사실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을 것이고 그 정도가 어느 정도 비슷해야지 이야기도 통할 텐데, 정부는 한국의 사회권현실을 너무도 좋게만 보고 있으니, 좀 더 노력해야지 하는 위원회의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고 유엔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형국이 되었다. 엔지오의 의견은 시작 때부터 무시했으니 그렇다하더라도 이제 유엔의 권고도 못 받겠다고 저러니 누가 이야기해야 하나? 딱 하는 짓이 미운 7살 아이의 행동인데 매를 들어야 하나?
2017-07-12 | hrights | 조회: 326 | 추천: 0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퇴행하듯 하는 세상일에 신경 쓰다 다시 병이 도질 것 같아서 뉴스고 신문이고 외면하고 산지도 꽤 되었다. 이렇게 눈과 귀를 틀어막고 사느라고 했지만, 너무도 엄청나고 황당한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니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세상 소식이 조금씩 새어들어 왔다.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 동료교사들의 잇단 징계와 구속……. 그럼에도 나는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분노하며 또 적당히 잊어버리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정말 돌아버리지 않고 내 밥벌이를 지키기 위해 ‘불편한 사건’들에 적당히 외면하며 살아왔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스스로를 힘없는 백성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매주 열리는 교직원회의 시간,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일방적인 전달시간도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공문에 대한 처리도 순순히 한다. 매일같이 강조되는 ‘방과 후 수업 강화’ 방침에도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홍보하던 ‘고교선택제’가 교육청의 한 마디 사과발표도 없이 ‘공문’ 한 장으로 하루아침에 ‘사실상 폐기’ 되었음에도 모멸감에 잠시 분개하다가는 그냥 넘어간다. 또 ‘학교의 자율’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포장된 교장의 교사초빙 및 유임권한 확대에도 그저 ‘학교가 무슨 사조직이냐?’고 몇 마디 궁시렁거리고는 끝이다. 얼마 전 ‘학업성취도 평가’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치러진 일제고사에도 별 저항 없이 순순히 응한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가족끼리 체험학습을 신청한 학생에게, 일제고사 당일엔 허가해 주지 말라는 교육청 지시를 전하며 ‘무단결석’임을 경고한다. 뭐라 따져볼라 치면 무슨 금과옥조나 되는 것처럼 ‘공문’을 들이대며 ‘공문=원칙’의 공식을 신봉하는, 그 어떤 고민이나 이견도 허용치 않는 학교 관리자들 앞에서 이제 그냥 손을 들고 싶어진다. 이렇게 살다보니 그동안 나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영혼이 거추장스러워진다. 말로는 교육의 주체라고 하지만, 모든 교육정책의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현장교사로서 의견을 말할라치면 하는 족족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 모가지를 댕강 잘라버리는 이 황당무계한 시대에, 높으신 분들이 짜놓은 교육과정에 주어진 교과서대로 가르쳐서 특목고나 대학에 잘 보내는 것만이 교사가 할 일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에게 무슨 영혼이 필요한가? 초ㆍ중ㆍ고교생들의 학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 수준의 학업성취도 평가가 지난 10월 13일 전국 1만1천496개 초ㆍ중ㆍ고교에서 실시됐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리고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원 평가'를 통해 교사도 본격적으로 경쟁을 시킨단다. 우리 공교육의 왜곡과 실패, 사교육에 잠식당하게 된 원인이 교사들이 경쟁을 거부하고 ‘철밥통’을 차고 앉아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 정부 들어 더욱 가속이 붙어 내년쯤이면 이빨 뿐 아니라 손톱, 발톱 다 빠진 호랑이처럼 영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우리 교사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매년 이루어지는 학교평가에서 각 단위학교가 경쟁적으로 하고 있는 ‘실적 부풀리기’가 교사들 간에도 일어날 게 뻔하지 않을까? 나아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돌진하는 로봇이 되어가지는 않을까? 결국 로봇들이 가르치는 학교가 사교육을 이길 수는 있을까? 사교육을 이긴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로봇들이 가르친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그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까?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 과정이나 방법보다는 결과, 경제적인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천박한 사고방식이 만연해 가고 있는 지금, 그 물길을 더욱 거세게 부추기는 일련의 교육정책들을 보며 내가 교사로서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점점 거추장스러워지는 영혼을 과감히 내던져 버려야 하는 것인지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해 본다. 이런 황당한 고민을 하는 지금, 먼 옛날 흐릿한 기억 속 서부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백인들과 한바탕 추격전을 벌이던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추고 자신이 내달려온 길을 한참동안 돌아보던 장면이 말이다. 그들이 멈춰 선 것은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들의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는데…….
2017-07-12 | hrights | 조회: 34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