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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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신혜연/ 청년 칼럼니스트 “플린트에서 벌어진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죠. 자유 사회에서 자본주의 민주사회에서는 뭐든 변할 수 있어요. GM이 일부러 직원들을 해고한 건 아니잖아요? 좋은 면을 보세요.” <로저와 나> <로저와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데뷔작이다. 1986년 GM은 공장 11곳을 폐쇄하고, 3만 명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무어의 고향인 ‘플린트’는 이 구조조정의 직격탄을 맞았다. 플린트 주민들의 삶은 급변했다. 범죄율은 급증했고 마을은 황폐화됐다. 플린트는 세수 부족에 시달렸고, 치안, 위생 등 공공 서비스를 하지 못해 ‘전국에서 가장 살기 힘든 도시’로 뽑혔다. 이사 트럭이 모자랄 만큼 많은 이들이 이사를 갔다. 집세가 없어 강제 퇴거를 당하는 일도 흔했다. 플린트에 생기는 새 건물은 교도소뿐이었다. 상황은 암울했지만 플린트 주민들을 뺀 모두가 긍정적이었다. 지방정부는 해고자들을 위로한다며 퍼레이드 행진을 열었다. 행사에 불려온 유명인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건넸다. “날마다 새로운 기회인걸요. 우울해 하지 말고 일어나서 뭐라도 해보세요.” 다큐멘터리 속 GM의 로비스트는 “GM이 망하면 끝”이라고 했다. 무어가 물었다. “일자리가 10만개, 아니 만약에 전부 사라져도요?” 로비스트는 “그렇다”고 답했다. 주민들의 실업보다는 기업의 이윤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상황이 겹쳐 보였다. 따뜻한 봄바람이 올 들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진다. 4학년이 돼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새 학기를 맞는 대학가 분위기는 꽤나 결연하다. 상반기 공채를 앞둔 탓이다. 취업준비생들은 구직시장에서 매력적인 상품이 되기 위해 학력을 높이고 스펙을 쌓는다. 주변 선배, 동기들을 보면, 뭐 하나 능력이 빠지지 않는데도 채용에선 서류전형도 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기업의 취업문은 갈수록 좁아진다. 국내 30대 그룹은 올해 신규 채용을 지난해보다 8천 명 줄였다. 55%에 불과한 대졸자 취업률이 올해는 더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졸업예정자를 선호하는 기업 ‘덕분에’ 대학은 5학년, 6학년들로 북적인다. 지난해 4년제 대학 166개에서 9학기 이상 재학 중인 학생은 무려 12만 5천여 명에 달했다. 지난 2월 집계된 청년실업률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때보다 높은 11%다. 체감으로는 청년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참담한 청년 실업의 원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있다. 기업은 이익을 아무리 많이 내도 이윤에 도움이 안되면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다. 기업의 목적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게 아니다. 취업준비생들이 뼛속까지 상품화되고도 기업에 팔리지 않는 이유다. 권력자본론적 관점에서는 이를 기업의 ‘전략적 사보타주’로 본다. 우리는 이윤을 얻은 기업이 투자를 하고, 채용을 늘릴 거라 기대한다. 소위 낙수효과다. 하지만 기업은 사내 유보금을 축적할 뿐 고용도, 투자도 하지 않는다. 이로써 얻는 이득은 크다. 구직시장이 어려울수록 구직자들의 스펙은 좋아진다. 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고용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갑’의 위치를 갖는다. 이 권력을 기반으로 소수 독점 자본은 더 큰 부를 축적한다. 청년들에게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물었더니 ‘지속가능한 성장’ 보다는 ‘붕괴, 다시 시작’이라는 선택지를 택했더라는 충격적인 설문조사 결과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극심해진 빈부격차와 사회적 자산의 독점화는 젊은 세대가 희망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일자리가 없다는 건 단지 취업을 못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미래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서도 한국 사회에선 고용을 줄이고 이윤을 나누지 않는 기업을 탓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열심히만 하면 잘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플린트 지방정부가 해고당한 주민들에게 ‘희망의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기성세대는 “왜 눈을 낮추지 않느냐”고 청년들을 을러대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에 나온 ‘사토리세대’가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연애도 결혼도 취업도 포기한 채 현재만을 즐기며 사는 ‘득도’한 청년들에 대한 조롱을 담은 단어다. 한국에서는 조선일보에서 우리 세대를 ‘달관세대’로 번역해내기도 했다. 50대 이상의 조선일보 주 독자층은 이 기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젊은 세대가 야망도 없고 일을 안 해서 한국 경제가 이 모양”이라고 혀를 차지 않았을까. 비유를 다시하자면, 더없이 긍정적인 한국 사회에서 날마다 지기만 하는 청년들은 ‘행복의 나라의 절망한 젊은이들’이다. 청년들은 오늘도 이익을 독점한 소수의 기업에 맞춰 스스로를 가다듬는다. 하지만 한정된 자리를 두고 싸우는 잔인한 의자놀이다. 의자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미래는 없다. 평생을 박봉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달려야 한다. 청년들이 결코 눈을 낮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결책은 함께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실업 문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풀 수 없다. 토익책을 외우고, 자격증을 따고, 고시 공부를 시작한다고 해도 내게 안정적인 일자리가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회 전체적으로 좋은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일자리는 권리다. 우리 세대의 권리를 스스로 되찾는 것이 독점자본으로부터 한국 사회의 미래를 되찾는 일이다. 신혜연씨는 노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55 | 추천: 0
정재호/ 청년 칼럼니스트 북한의 속담 중에는 지위가 높을수록 뜻을 낮추라는 말이 있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욕심을 부리거나 야심을 가지지 말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필연 정치가와 국회의원 그리고 법관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 지위를 이용한다면 한 국민의 인생 전체를 망치고 나아가 국가를 망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위에 따른 책임감을 느끼고 청렴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헌데 우리나라의 정부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건강보험공단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맡은 일에 소홀한 것 같다. 지난 3월 10일 대한의원협회가 발표한 ‘건강보험 재정누수 분석보고서’는 정부와 관련 기관의 무책임한 의무 방기가 복지 혜택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대한의원협회에서 지난 1년간 복지부,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공개자료와 정보공개요청을 통한 수집자료, 국정감사자료를 통합한 것으로서 공신력 있는 것이었다.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은 지금까지 건강보험 재정누수의 주요 원인은 요양기관의 허위부당청구 때문이라고 밝혀왔다. 분석결과 정부가 주장한 요양기관의 허위부당청구에 의한 재정 누수액은 총 누수금액 21조 2,268억 원 중 1,632억 원으로 전체 누수액의 0.8% 밖에 해당되지 않았다.   사진 출처 - 스토리가 있는 뉴스 라포르시안   그렇다면 건강보험공단의 재정누수는 어디서부터 발생한 것일까? 대한의원협회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건강보험공단 재정누수의 총 93.6%에 달하는 건강보험 재정누수 발생의 주요 원인은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에 있었다. 정부에 의하여 발생한 건강보험 재정누수는 12조 5,952억 원으로 전체의 59.3%를 차지했다. 그 이유로는 누수액이 큰 순으로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금 미납, 차상위 건보재정 부담액, 공무원 직급보조비 복지 포인트 보험료 미납액 등 이었다. 한편, 전체 누수액의 34.3%를 차지하는 건강보험공단은 급여제한자의 보험급여 혜택, 보험료 체납액, 지역가입자 보험료 사후정산 미실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 대부분이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에서 재정관리에 필요한 일을 소홀하게 한 탓에 생긴 일이다. 건강보험공단의 재정누수액 중 충격적인 부분은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임직원들이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민간보험에 단체가입하는데 78억 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임직원들의 배우자까지 단체보험에 가입시켰다. 국민이 낸 피같은 혈세를 사적으로 오용하는 부도덕한 공무원들의 행태는 그들을 믿고 세금을 내왔던 것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그 78억이라는 돈으로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좀 더 국민의 건강을 보장할 수 있을까 고민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릇된 행정으로 안에서 새는 바가지를 막지 못하니 정부가 대외적으로 내놓는 정책이란 것은 국민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맞춤형 급여체계가 부정수급을 막기위한 제도적 장치로 인하여 그 실효성이 미약했던 것처럼 올해 7월부터 시행되는 부양의무제 완화 정책도 같은 이유로 빈곤 사각지대에 있던 117만 명 중 고작 10%정도만 그 대상이 된다. 부정수급을 막기위한 정부의 제도적 장치가 사회적 안전망의 범위를 좁혀서 정말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빈곤층이 당연히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생존권적 기본권을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모든 국민은 건강할 권리을 가지고 있고 이는 헌법 35조에도 명시되어 있다.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은 국민의 건강할 권리를 위해 힘써야할 지위에 있다. 그들이 자신의 지위에 따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어디서 자신을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올바르고 정직한 행정을 통하여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쓰여질 수 있는 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재호씨는 법과 제도로 인권 보호를 실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법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68 | 추천: 0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2월 23일, 대전 산내면에서는 중장비가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 현장 발굴이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이남으로 도망을 가면서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 및 보도연맹 명단을 토대로 국민 4천여 명을 3차례에 걸쳐 죽였다. 두개골 근처에서 발굴된 소총의 탄두와 탄피의 흔적 등,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는 뼈가 없었다는 사실이 당시의 참혹함을 말해준다. 이어, 오는 4월 제주 4.3 추념식 행사와 대통령 참석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이 모든 사건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이 굴곡진 현대사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한반도를 맴돌며 살아 숨 쉬는 분단의 망령을 본다. 무엇보다도, 법을 지켜야 할 국가의 공권력이 오히려 민간인을 수없이 살상해버린 아픈 역사를 본다. 그 아픈 역사는 제대로 아물지 못한 채 곪아가고 있을 뿐이다. 4월에는 우리의 가슴을 할퀴고 간 세월호 사건도 그렇거니와, 강요된 금기와 침묵으로 더욱 상처 받아야 했던 4.3도 있다. 세월호는 제주로 향하던 배였다. 또,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 가장 눈에 띄는 우경화 현상은 ‘서북청년단 재건’ 사건이다. ‘섬’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내부 식민지로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 제주는 냉전의 최대 피해 지역이었다. 제주도 인구의 9분의 1이 학살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예비검속이라는 이유로 학살은 또 계속되었다. 이렇게 분단의 한복판에서 제주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한 것이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가 투표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제주도는 이남에서 유일하게 선거를 보이콧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이후 제주도에 대한 강도 높은 진압이 시작되었다. ‘빨갱이 사냥’이 실제 작전의 이름이었다. 제주에서 단독선거 투표 기권자는 ‘빨갱이’로 몰려 총살되었다. 군경은 학살의 현장을 주민들이 지켜보게 만들기도 했고 가족구성원이 집에 불을 지르게도 했다. 그 결과, 4.3이 남긴 피해로 공동체가 무너지고, 마을과 가족 내에 불신과 반목이 팽배하게 되었다. 4.3은 세계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과 한반도 내 분단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또, 제주도 내부적으로는 제주도민이 갖고 있던 자치지향적인 성격과 중앙정부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거를 보이콧했다는 이유로 제주는 반란의 섬으로 인식되었고, 한라산의 허리는 피로 물들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삼진정책이 실시되었다. “자수하면 살려주겠다”고 속이고는 죽여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4.3은 말 그대로 ‘초토화작전’이었다. 잠잠해지는 듯한 피바람은 한국전쟁과 함께 다시 불어 닥친다. 상당수의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희생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기도 했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제주 출신 재소자들도 마구잡이로 학살되었다. 4.3 이후 완전히 사라져버린 마을도 많았으며, 특히 중산간 지방 마을의 95%가 없어졌다. 4.3은 해방 이후 집약된 모순이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다. 마치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대한민국 사회의 모순을 한데 끌어안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광복 70주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는 이 해, 우리는 4.3을 통해 민간인 학살이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위치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4.3 사건으로 인해 생명을 잃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인권보호가 절실하다. 지난 3월 2일, 제주 4.3 평화재단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4.3 추념식의 참석을 건의했다. 제주의 소리가 지난 2월 27일 보도한 기사에서 4.3 유족회는 “우리의 마지막 소원은 대통령이 제6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바라건대 박 대통령이 역사의 굳은살을 슬슬 문질러 푸는 이 소중한 작업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아직 미처 다 치러지지 못한 이 제의에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럼으로써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독재 시절 연좌제로 인해 말할 수 없이 고통 받았던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살이 낀’ 이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장엄한 씻김굿에 동참해야 한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1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1. “학생, 안 돼요.” “교수님이 들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학생 4학년이죠? 이거 1학년 수업이에요. 우리 과 학생들도 자리 없어요. 다른 과 학생 안 받아요.” 4학년 1학기, 철학 수업을 듣고 싶었던 내 희망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몇 번을 찾아가서 부탁했지만 조교 선생님은 단호했다. 전공수업을 다 들어도 졸업 학점이 채워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타과 전공을 들어야 하는 나. 하지만 수강신청은 험난했다. 4학년 2학기, 노동 수업이 듣고 싶어 사회학과 사무실을 방문했지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타과생 수강신청 안 받습니다. 전산으로 하세요.’ 수강 신청을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수강신청 정정 기간 동안 학과 사무실 문 앞엔 종이가 붙어있다. ‘타과생 수강신청 안 받습니다’ ‘전화 후 방문 바람.’ 듣고 싶은 수업을 들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학교일까, #2. “회식 자리에서 지도교수가 허벅지에 손을 올려 깜짝 놀랐다.” “노래방에서 지도교수가 어깨에 팔을 올렸다.” “개강 회식 후 노래방에서 옆자리로 불러서 손을 잡으려 했다.” “지도교수가 손을 당기면서 얼굴을 숙여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작년 여름 방학, 학교가 뉴스에 나왔다. A 교수가 외국인 대학원생을 성희롱했다. 그것도 모자라 선물 강요, 시험문제 유출은 물론 부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학생들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계좌로 시간강사에게 4,000만 원의 돈을 지금껏 받아왔다. 그런데 개강 후, 학교는 조용했다. 학생들은 이런 사건이 있는지도, A 교수가 누군지도 몰랐다. A 교수는 올해 1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이 났다. 학교 내에서도 성폭력 심의 위원회가 열렸다. 아무 제제 없이 회의를 종결했다. 회의에는 교직원, 교수, 학생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고 학칙에 나와 있다. “회의에 참여한 학생이 누군가요?” “대학원생은 학부생이 아닐뿐더러 학생대표가 없어서 참여 안 했습니다” 성희롱 뿐이 아니었다. 차명계좌, 아내 가게 아르바이트 문제도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A 교수는 이번학기 수업이 개설 되었다. 이에 학과 교수들이 건의서를 제출하고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뒤늦게 학교 측에서도 공문서 변조,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A 교수 다시 고발 하고 수업을 삭제 했다. ’경찰의 학내사찰 규탄 기자회견’을 마친 서강대 학생들이 경찰청장에게 항의성명을 전달하려다 제지하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3. 학교 게시판에 세월호 참사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며칠 뒤, 자보는 보이지 않았다. 대학본부 측에서 철거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담당 부서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폭행 시비가 일어났다. “교직원이 민원인의 얼굴에 뜨거운 녹차를 끼얹고, 팔 등 신체 부위를 물리적으로 폭행하여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혔다.” 학생들은 경찰에 신고했고, 담당 교직원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교직원은 학생들을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맞고소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다. 학교 안에 공간이 부족해 카페에서 모임을 하고, 한 학기 기숙사비가 300만 원인 곳도 생겼다. 학교 안에 영화관이 들어왔고, 학내 중국집은 프랜차이즈 업체가 들어와 짬뽕 한 그릇이 만 천 원이다. ‘글로벌 인문대’가 탄생하기도 하고, 군대 갔다 오니 학과가 없어지는 건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세월호 관련 행사를 개최한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지 못하고, 학교 안에는 경찰이 들어온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걸까.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5 | 추천: 0
신혜연/ 청년 칼럼니스트 청년들은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30분을 견뎠다. 백화점 주차요원 아르바이트인 그들에게 ‘VIP’ 손님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최근 벌어진 소위 ‘백화점 모녀 사건’이 우리 사회 청년들의 인권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하면 과장일까. 차디찬 주차장 바닥에 나란히 꿇어앉은 CCTV 속 청년들의 모습은 분명 상징적이었다. 인권에 대한 도전은 이제 청년들에게 일상이 됐다. 임금을 지급한 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까지 샀다고 착각하는, 한국 사회 전반의 천박한 노동권 개념도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 사회 안에서 청년 노동의 위상을 이해하지 않고 이런 현실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청년 논객’으로 유명한 한윤형 씨는 2013년 저작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했고, 약해진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중산층 자신들의 자녀조차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이 세계는 청년에 대한 착취를 자양분으로 돌아간다. 지난 기간 한국 사회가 방조해온 ‘폭탄 돌리기’식(거품은 언젠가 꺼진다) 부동산 부양 정책과 허술한 복지제도, 불안정한 노동시장 덕분에 갓 사회로 나온 청년들은 가장 만만한 ‘을’이 됐다. 높은 주거비와 빚이 된 등록금을 지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서성이는 모습은 오늘날 청년들의 자화상이다. 이 세계에서 청년들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 ‘갑질’ 논란이 된 모녀는 VIP(Very Important Person)가 아니었노라고 백화점 측에서 해명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손님은 아르바이트 청년보다 ‘중요한 사람’이다. 누구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기에 스스로 무릎을 꿇기로 한 이들의 선택은 자발적이라기보다 강압적이었다. 백화점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 청년이 무릎을 꿇고 있다. 사진 출처 - 중부일보 많은 이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혀를 찼다. ‘청년들의 무릎 꿇음’이 꽤나 보기 싫었던지,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계속됐다. 일부는 백화점 모녀에 대한 인신공격을 가했고, 한 교수는 ‘청년들의 기백 없음’을 탓했다. 청년이라면 으레 부당한 인권 침해에 항거하기 위해 하루치 일당쯤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이 사건은 모녀에 대한 삿대질로 끝낼 일도, 청년들의 ‘의식 개혁’으로 해결할 일도 아니다. 제아무리 용감한 청년이더라도 청년 착취를 원동력으로 하는 구조에서는 주어진 역할대로 묵묵히 착취를 당하는 수밖에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청년값’을 높여 청년들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외국 청년들이 그리 당당하게 굴 수 있는 이유는 매달 국가에서 통장에 넣어주는 용돈과 주거보조금, 수업료 감면, 실업수당 등 청년들을 배려한 사회안전망 덕분이다. 바닥에 떨어진 ‘청년값’은 정부, 기업은 물론 사회가 나서서 회복해야 한다. ‘갑질’ 모녀와 ‘패기 없는 청년’에 대한 비난의 삿대질은 현 구조를 영속시킨 이들에게 먼저 향해야 한다. ‘갑질’이 보기 싫으면 먼저 청년들의 몸값을 높여라. 신혜연씨는 노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4 | 추천: 0
정재호/ 청년 칼럼니스트 지금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는 작년 이맘때와 다름없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사랑의 온도탑이 설치되어 있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온도탑은 지난 16일 기준, 목표 모금액 90% 이상을 달성했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손길이 이어져 여기저기서 100도를 넘어 펄펄 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첩첩이 쌓인 차가운 빌딩숲 속에서도 아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따뜻한 인심은 살아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다. 하지만 펄펄 끓는 온도탑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악용하는 일부 사회복지 기관과 관계자들 때문이다. 2010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국민들이 낸 성금을 가지고 유흥비로 탕진하고, 직원들 임금을 부당하게 높게 올려주며 서울 한복판의 건물을 인수하는 등 돈 잔치를 벌였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당시 사랑의 온도탑은 ‘분노의 온도탑’이 되어 펄펄 끓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비리사건이 꽤 시간이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회복지기관에서의 비리는 끊이지 않는다. 최근 충북 증평군 의회에서는 복지재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지재단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장애인복지관, 노인복지관, 노인요양원, 청소년수련원 등 사회복지기관을 총괄하는 복지재단이 운영비를 사적으로 사용하고 공금을 횡령하고 인사 비리를 일으키는 등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양주의 한 사회복지기관에서는 이미 퇴직한 재활교사를 계속 근무하는 것처럼 서류를 꾸며 인건비 보조금 3천 400여 만 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성금은 둘째 치고 공금까지 횡령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귀한 돈들이 새나가고 있다. 심지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임금체불행위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의 한 장애인 기관의 원장은 입소장애인들에게 어버이날에 판매할 카네이션을 만들게 하고 카네이션을 팔아 생긴 돈으로 생활비와 자녀의 학원비, 교회 건축비로 사용하였다. 공적 사회복지기관에서도 비리가 일어나고 있는 마당에 정부는 사회복지기관을 민간에 위탁함으로써 사회복지기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리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한 사회복지사는 최근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이 사실상 사회복지기관의 운영권을 민간에게 위탁함으로써 비리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고 말했다. 또한 사회복지기관에서 비리가 생긴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각종 편법이 이루어지는 것을 잡아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정부는 비리가 일어날 수 없도록 사회복지기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통하여 사회복지기관이 비리없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를 위하여 사회복지기관에 대한 수사를 정밀하게 실시하여야 한다. 기관유형별로 표준적인 운영체계를 정립하여 수사에 필요한 잣대를 마련하고 이에 따른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실시하여야 한다. 또한 비리가 일어났을 때에 민형사상 처벌을 강화하여 더 이상 비리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견물생심,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설령 그것이 부당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복지사는 돈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모든 진정한 사회복지사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삶이 좀 더 윤택해지도록 돕는 것이다. 언제나 사회복지 현장에 나가있는 실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은 그들을 위한 복지를 하겠다는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옹호하고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비리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부디 그들이 처음 사회복지란 길에 뛰어들며 마음속에 새겼던 초심을 잃지 않길 바란다. 정재호씨는 법과 제도로 인권 보호를 실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법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73 | 추천: 0
송현주/ 청년 칼럼니스트 ‘보육’, 이 단어가 새해부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어난 원아 폭행 사건이 그 도화선이 됐다.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담당 보육교사가 4살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고, 주변의 아이들은 공포에 떠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으로 품어야 할 보육교사들은 어쩌다 매를 들게 되었나. 보육기관에서의 아동학대 사건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당장이라도 끊어내야 하지만, 현실은 사후 수습과정조차 이전 것을 답습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육교사의 원아 폭행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론은 너나할 것 없이 분노를 분출하고,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로 도리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파다했다. 보육체계를 관리·감독하는 주체인 정부는 가해자 처벌이나 형식적인 사후 조치에 치중한 나머지, 사건이 반복 될 여지를 남겨두곤 했다. 결국 바뀐 것은 없는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우리 아이들만 남게 되는 것이다. 보육기관에서의 아동 학대문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는 이유다. 연이은 논의 끝에 지난 27일, 정부와 여당은 ‘보육기관 내 CCTV 설치 의무화 방안’과 ‘보육교사 자격취득과정의 국가고시 전환’을 주요 골자로 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의구심은 쉬이 거둘 수가 없다. 인천 아동학대사건은 CCTV가 설치된 어린이집에서 발생했음을 감안하면, CCTV를 통해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예방·보호하겠다는 취지는 이미 무색해졌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보육교사를 잠재적인 가해자로 상정한 채 감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맡겨도 불안한 학부모들, 감시받는다는 압박 속에 일해야 하는 보육교사들. 왠지 탐탁지 않은 조치인 것만은 분명하다. 국가고시 전환 방안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기존의 사이버대학이나 학점운영제도 위주의 보육교사 양성 체계의 문제점은 분명히 있다. 인천 아동학대 사건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린 것도 보육교사의 인성과 자질 논란이라는 점에서,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국가고시 전환 방안은 나름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보육의 질 문제는 관련 학과를 나와 몇 번의 실습과 빠삭한 이론만으로 결정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보육이 ‘감정노동’이자 ‘돌봄 노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보육교사의 인성과 적성, 직업에 대한 철학, 가치관과 같은 자질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국가고시로 전환하면 이것은 어떻게 평가되고 걸러질 것인가? 행여나 누가 봐도 알만한 문항 일색인 인·적성 시험이나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면접 정도로 대체하려했다면, 정말이지 허술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질 좋은 보육서비스의 공급을 위해서 전문성 강화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일선에서 일하는 보육교사들의 처우 개선문제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보육교사 처우 실태조사에 따르면 보육교사들의 근무시간은 하루 평균 9.6시간, 월급은 평균 112만 원이다. 전체 근로자 근무시간이 평균 8.4시간, 월급이 평균 246만 원인 것에 비하면, 장시간 노동에 임금은 턱없이 낮은 열악한 조건이다. 취업준비를 하는 친구가 이 얘기를 듣고 내뱉은 뼈 있는 한 마디가 인상 깊다. “누가 그 돈 받고 그렇게 일하려고, 힘들게 국가고시 준비하겠어? 나 같으면 안 해.”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실제로 보육교사들의 근무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하루 평균 10~12시간 동안 소통이 쉽지 않은 아이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 시간 내내 한 명의 보육교사는 많게는 스무 명 정도의 아이들을 맡는다. 점심시간은 1시간 남짓이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 식사지도하다보면 녹초가 되어 정작 보육교사들의 점심은 대충 때우기 일쑤다. 단순 돌봄뿐 아니라 다방면의 교육지도까지 겸하는 보육교사들은 업무 중에 끊임없이 육체적·감정적 스트레스를 받지만, 이를 해소할 방법과 시간은 마땅치 않다. 주말이나 1~2주일에 그치는 짧은 방학마저 자격 승급 교육을 받는 데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즘같이 보육기관 아동학대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면, 학부모의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를 묵묵히 감내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은 고작 100만 원 전후의 금전이다. 보육의 질은 보육교사의 질에서 비롯된다. 황폐한 토양에서 기름진 농작물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업무강도를 완화하고 임금을 현실화하여 보육교사의 정서적 안정을 보장한다면, 최소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교사가 우리 아이들에게 매를 들게 하는 비극은 막을 수 있다. 그러자면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물적·인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나마 최근 후속대책 마련에 어린이집 보조교사 증원 논의가 포함된 것은 의미 있는 한 걸음이라고 생각된다. 결국에는 보육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공공’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각에선 인천 아동학대 사건을 계기로 보육료 자율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흐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 보육기관에서의 아동학대 문제는 구조적인 허점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일차적으로 보육교사의 열악한 처우문제뿐 아니라, 이차적으로는 ‘수익’을 내야하는 민간 어린이집의 숙명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세 어린이집이나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은 무리한 임대료로 인해, 더 많은 원아를 모집하고 적은 보육교사를 유지하는 것으로 수익을 내야하는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심지어 민간 어린이집 거래에 권리금 장사가 판을 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아이들을 수익이나 돈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민간 어린이집 운영 시스템이 저질 보육서비스를 양산하고 있진 않은지 신중히 생각해 볼 시점이다. 아프리카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한 아이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의미인 즉,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부모 못지않게 이웃과 사회 전체가 팔 걷고 나서야한다는 뜻이다.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한 명의 아이는 아무개들의 아들이나 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끌어 나갈 그 사회의 ‘동량 棟樑’들이기 때문이다. ‘동량’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바로 ‘보육’이다. ‘보육’을 논함에 있어 공공의 역할과 책임이 회자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의 보육료를 지원하는 방식은 수동적일뿐더러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이젠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송현주씨는 정치와 경제, 복지에 관심이 있는 정치외교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49 | 추천: 0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현지시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12명이 사망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것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말로 옮기기조차 끔찍한 이 사건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프랑스의 문화갈등에 대해 고심해볼 화두를 준다. 어쩌면 이 사건은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것에 대한 종교적 분노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간 프랑스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오며 느낀 집단적 울분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거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을 듯하다. 무함마드는 어쩌면 그 상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니, 달리 말해 종교는 그들의 폭력 행위를 포장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나 종교로만 접근한다면 그 한계가 명확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12명의 더운 목숨을 위로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정한 의미의 '똘레랑스'로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샤를리 엡도의 필진이 그렇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살해당한 사실이 그 작업의 정치적 올바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소 냉혈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읽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마치 풍자와 조롱의 차이처럼 말이다. 이 사건을 해석하는 '자유를 수호하는 언론인 대 야만적인 광기에 빠진 인간'이라는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보면서, 프랑스가 그간 자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며 늘 써왔던 수법을 본다. 만일 억압적인 종교적 전통으로 고통 받는 무슬림 민초들이 모하메트를 풍자했다면 당연히 그들의 편에 서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풍자의 주체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백인이라면 굳이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워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표현할 자유를 넘어 표현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과거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이슬람이 나치와 파시즘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언론 만평을 기념하는 파티를 주최하기도 했다. 당시 샤를리 엡도의 작가와 필진이 이 자리에 초대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슬람이 나치, 파시즘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발상은 프랑스가 가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언론인 피에르 베이로는 "캐리커쳐로 무함마드의 엉덩이를 그리는 것이 언론의 자유를 진보시키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했다. 지금 프랑스에 필요한 '표현의 자유'란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위를 굳이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계속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애도와 추모를 넘어선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를 뒤덮은 추모의 물결은 심상치 않다. 우선, 이번 테러로 희생된 샤를리 엡도의 필진을 애도하는 시위대가 아프리카계 이민자를 폭행했으며,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역시 샤를리 엡도를 표현의 자유를 들어 옹호하고 있다. 그뿐인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초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온 이스라엘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역시 이 추모 시위대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마린 르펜이나 베냐민 네타냐후 같은 극우 세력이 하나 둘씩 추모 시위에 가담한다면 프랑스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반이슬람, 반이민 정서로 불타오를 것이다. 아마르 라스파르는 "프랑스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바꾸려 한다. 프랑스에는 격리 정책이 있을 뿐이다." 라며, 프랑스의 동화주의 노선을 비판했다. 더욱 더 우려되는 것은 이 사건을 틈타 한반도에도 반이슬람 정서가 성공적으로 상륙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무력함, 패배감을 외국인 혐오를 통해 풀어내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체자(불법체류자)'와 '외노자(외국인노동자)'로 인해 '개슬람(이슬람을 폄하하여 부르는 말)'이 확장되었다는 식의 혐오 발언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혐오 발언을 마주하면서 마치 나치의 망령을 보는 듯 한 느낌에 휩싸인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를 옥죄어오는 듯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한국과 프랑스의 이주노동자들은 과연 그 심정이 어떨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가 함께 '이주·인권협의회'를 발족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는 인종차별이 범죄라는 인식이 사회에 정착되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방침이라고 한다. 특히 올해에는 고용 허가 제도와 다문화 정책 개선을 그 중점 사업으로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전한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픔에 공감하는 연초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보다도, 몇몇 이슬람 광신도의 총기 난사라고 생각하기보다도, 이 땅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된 다문화에 대해 재고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고용 허가 제도가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실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누가 소외되고 누가 억압받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관련 일을 하는 단체에 문의하여 작은 활동이라도 함께한다면, 국경을 넘어 인종을 넘어 전지구적 연대를 만들어나가는 환희를 누리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샤를리 엡도가 그간 해온 캐리커쳐 작업의 일부다. 이 그림만 보더라도 샤를리 엡도가 가진 인종과 성에 대한 편견을 엿볼 수 있다. 샤를리 엡도의 희화화가 '풍자'라기보다도 '조롱'에 가깝다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이주민들이 제대로 융합되지 못하는 현상에 프랑스 사회는 과연 책임이 없을까? 그들을 프랑스 땅에 있게 한 건 다름 아닌 프랑스의 제국주의다. 프랑스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국 식민사의 유산에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변해야 할 것은 그들’이라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 어떤 생산적인 결과도 불러일으키기 힘들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사회가 진정한 똘레랑스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앞으로 더 이상 아까운 목숨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방책이 될 것이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07 | 추천: 1
송현주/ 청년 칼럼니스트 작년 1월쯤이었던가? 지인의 권유로 난생 처음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것을 했다. 후원 대상은 어떤 영화였다. ‘대형마트에서 근무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측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는 소재에, 적은 금액이나마 선뜻 후원에 임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도움과 지지로 시작했던 그 영화가 2014년 가을 끝물에 드디어 개봉했다. 영화의 제목은 <카트>. 약 100여 분 남짓의 짧은 러닝타임동안 만감이 교차하며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다. 결코 남들의 얘기가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 역시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영화의 주인공은 마트에서 일하는 중년 아주머니들이다. ‘아줌마의 힘’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들이지만, 정작 마트에서 일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수시로 잔업이나 연장근무에 시달리나 수당 받기란 언감생심, 임금은 계약직이란 이유로 턱없이 낮고, 탈의실 겸 휴식 공간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나이가 어린 정규직의 잔소리나 명령이 고까워도 토 달지 못하고, ‘손님이 왕이다’를 권력처럼 여기는 뭇사람들의 진상 짓에도 하릴없이 자존심을 구겨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에 있는 가족들과 생계를 위해, 고단함을 무릅쓰며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연신 외치는 것이다. 아주머니들, 아니 누군가의 어머니들이 말이다. 억척스러움 속에서도 웃음을 찾으며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회사는 해고 통보를 한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측에, 노동조합의 ‘노’자도 몰랐던 아주머니들이 조합을 만든다. 대놓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사측의 반응에, 아주머니들은 마트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한다. 살갑고 인심 좋던 평범한 아주머니들이 날선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상이 불온해서, 혹은 운동권이어서가 아니었다. 100만 원 돈도 안 되는 고단한 일일지언정, 그 일이 그녀들에게는 생계의 문제이고 그만큼 절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극 중 ‘더 마트’의 계산대 노동자였던 주인공 ‘선희’(염정아 분)는 회사의 무책임한 반응에 이렇게 일갈했다. “반찬값 벌려고 나온 게 아니라 우리도 생활비 벌려고 나와요.” 영화 <카트>의 풍경은 유난히 생생하고 낯설지 않다. 실제로 2007년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기 때문이다. 홈에버를 운영하는 이랜드 그룹은 재정부담을 이유로, 돌연 천 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의도한 우연인지 그들의 대량해고는 ‘비정규직 보호법안’의 시행을 앞둔 시점이었다. 마트 노동자들은 부당해고에 반대하며 마트 점거·농성에 들어갔지만, 그들의 싸움은 혹독했고 외로웠다. 결국 사건은 노조 간부들이 퇴사하는 조건으로 일부 해고자들만 복직되는 반쪽짜리 결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전혀 일단락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마트 직원들이 간접고용으로 저임금에 시달리고 고용불안에 떤다. 그런 맥락은 한국사회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여성 비정규직 노동의 실태와 동떨어 있지 않다. 사진 출처 - 씨네21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이미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4년 10월 28일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4년 8월 기준 비정규직 노동자는 607만 7,000명, 전체 임금 노동자 중 비정규직 노동자 비중은 32.4%에 이른다. 바야흐로 ‘비정규직 600만 명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문제는 ‘수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이다. 비정규직이 벌어들이는 임금은 145만 3,000원에 불과하다. 참고로 임금 근로자 월 평균 임금은 223만 1,000원, 정규직 임금은 260만 4,000원이다. 임금만 무려 1.5배 이상 차이가 난다. 정식 임금 외에 퇴직금이나 시간 외 수당 등 복리후생과 고용보장 측면에서 비정규직이 겪는 차별은 너무나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여성 비정규직 노동은 ‘권리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2014년 3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2013년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 임금 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57.5%다. 남성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인 37.2%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한편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은 약 113만 원 정도로 매우 낮고, 그나마도 여성 비정규직의 28.5%는 최저임금보다도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 일련의 수치들이 말하고 있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의 현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한국에서 일하는 여성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일 정도로, 많은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유입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자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복리후생, 고용보장 전반에서 이중의 차별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비정규직 행은 과연 자발적인 선택일까? 혹시 ‘경단녀’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결혼이나 출산·육아로 인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서 경력이 단절된 여자’라는 의미의 신조어다.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의 여건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여성 인력들이 ‘경단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바늘구멍을 뚫고 취직을 했지만, 출산·육아휴직의 부담으로 회사는 여성 사원에게 사직 압박을 가하기 일쑤다. 행여나 정리해고 조치가 나오면, 해고 1순위는 계약직 기혼여성 혹은 결혼을 앞둔 계약직 미혼여성에게 돌아간다. 기껏해야 정규직 여성은 차 순위로 밀릴 뿐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단녀’들이 양산된다. 기가 막힌 것은 은행 빚과 자녀 양육비로 허덕이는 가계부 때문에 돈은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력이 단절된 기혼 여성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마트일, 식당일, 판촉일, 보험일, 청소일, 간병일, 가사도우미일 등과 같은 저임금 비정규직에 한정될 뿐이다. 동시에 위의 일자리들은 간접고용이라는 덫에서 자유롭지 못해 노동자의 권리 보장은커녕 고용조차 불안한 실정이다. 소외될 대로 소외된 여성 비정규직 노동, 하지만 현행법의 대응은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비정규직 보호법’은, ‘보호’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데에 악용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법을 교묘히 비껴가는 파견근로, 즉 간접고용을 남발한다는 것이다. 통제의 어려움으로 불법파견이 성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재계약을 빌미로 ‘갑’의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특히 여성 비정규직 노동의 대부분이 재생산노동, 감정노동이라는 이유로 간접고용에서 자유롭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현행 ‘비정규직 보호법’은 여러모로 빛 좋은 개살구에 그칠 뿐이다. 비정규직 문제와 현행법의 허점에 대해서는 지난 7년간 수도 없이 회자되어왔다. 그러나 경제 부총리라는 사람이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규직의 해고가 유연해야 한다는 식의 망언이나 일삼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법률도 국민의 대표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막다른 곳에 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구책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필요시 파업을 감행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절박한 외침과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뭇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그 대상들이 ‘여성’일 때 아니꼬운 시선과 지탄은 더욱 심해진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KTX 승무원 투쟁, 홈에버 투쟁,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투쟁,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 등이 발생했던 당시의 여론과 주변의 반응을 새삼 떠올려 본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재생산노동과 감정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지만, 그에 걸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 시장과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꼭 짚고 싶은 부분은 결코 그녀들이 남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가장이자 어머니, 할머니일 수도 있다. 혹은 사랑하는 아내이거나, 애지중지하는 딸일 수도 있다. 당신의 ‘그녀’들이 그렇지 않듯이, 비정규직이 된다는 건 게으르거나 무식해서가 아니다. 누구나 불시에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 여성 비정규직 문제,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새기며, 그들의 눈물을 기억하자. 송현주씨는 정치와 경제, 복지에 관심이 있는 정치외교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5 | 추천: 0
신혜연/ 청년 칼럼니스트 ‘성균관대학교 게이 레즈비언 신입생·재학생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작년 봄, 교내에 낯선 현수막이 걸렸다. 현수막의 주인은 우리 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퀴어홀릭’. 낯선 문구에 당황한 학우들 덕인지 현수막은 게시 사흘 만에 자취를 감췄다. 인문사회과학캠퍼스(서울)와 자연과학캠퍼스(수원)에 걸린 현수막 모두 불과 며칠 만에 사라졌다니, 그동안 숨죽여온 성소수자 단체에 대한 학우들의 고약한 신고식이었던 셈이다. ‘존재 자체가 투쟁’이라는 말은 성소수자 동아리들에게 꼭 맞는 표현이다. 흔한 동아리 홍보 자보조차 훼손당하기 일쑤고, 행사를 저지당하거나 동아리방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의 사태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이 학내 활동을 하면서 중앙 동아리 인준을 고집하는 까닭은 뭘까? 그들에게 학내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 그 자체인 탓이다. 대학 내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한 학생은 “공동체(대학) 내에서 인준 받은 단체에 소속돼 있다는 데서 오는 안정감은, 누군가에겐 인생 최초로 느끼는 소속감과 안정감일 수 있다”고 털어놨다. 사회로부터 정체성을 인정받는 행위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하지만, 특히 누군가에겐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문제다. 그러나 한 축에서는 왜곡된 형태의 또 다른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타인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들의 현수막을 찢는 행태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서울 시청에 꾸려진 ‘성소수자차별반대 농성장’. 방명록이 농성장을 방문한 시민들의 지지글로 빼곡이 차있다. 사진 출처 - 필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서울시민 인권헌장’ 폐기 사태 역시 같은 맥락이다.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 선포될 예정이었던 인권헌장은 180여 명의 시민과 전문가가 모여 장작 4개월 동안 6차례의 회의를 거쳐 도출된 결과다. 그러나 인권헌장 내용 중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것인지’를 두고 시민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시민위원들 간 의견조정 끝에, 최종적으로는 이를 명시하기로 했으나 서울시 측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권헌장을 사실상 폐기하겠다고 통보했다. 절차상으로 문제가 없는 데도 서울시에서 인권헌장 선포를 제지한 바탕에는 공청회장에 난입한 기독교 단체들의 존재성 표출이 있다. 인권헌장 선포를 압박하며 시청 점거 농성에 돌입한 성소수자 단체들 바로 옆에서 기독교 단체들은 밤새 곡소리를 냈다. 네 존재성이 억압받아야 내 존재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듯이. 과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 박해받아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만일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자는 인권헌장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들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우리(기독교인)를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써 너희(이슬람인)의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걸 이해한다. 그러니 내 정체성을 포기하겠다.”고 의연히 말할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퀴어홀릭의 중앙동아리 진출은 결국 좌절됐다. 현수막 강제 철거가 보다도 동아리연합회의 강경한 태도가 문제였다. 대학 내 성소수자 중앙동아리는 동아리 구성원들의 아웃팅*과 혹시 모를 테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익명성 보장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회원 명부 제출이나 동아리방 배정 면에서 여타 동아리들과 다른 ‘편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아리연합회는 퀴어홀릭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다른 동아리들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회칙에 명시된 사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차별받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 없이 원칙만을 강조하는 행위 또한 ‘차별에 대한 묵인’이 될 수 있음을 이때 깨달았다. 이번 사태에서 서울시가 보인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기독교 단체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민들이 완성한 인권헌장을 자신의 손으로 폐기했다.   농성장에 붙은 피켓들. ‘지금, 이 순간에도 혐오와 차별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지지와 협의의 문제입니까?’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 출처 - 필자   사실 인권에 있어 더 큰 장애물은 타인에 대한 부정 자체보다도 이에 대한 암묵적 동의다.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를(인권운동가들을) 괴롭히는 것은 사악한 사람들의 완벽한 몰이해가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이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다수의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박 시장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묵인한 채 ‘선량한 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에 편승하는 쪽을 택했다. 대학 내 성소수자 동아리들은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라는 이름으로 뭉쳐 이번 인권헌장 폐기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자연스레 지난봄이 떠올랐다. 어김없이 대자보가 찢기고, 반대 단체들이 난입하는 등 상황조차 비슷하다. ‘비정상’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은 조금씩 태도를 바꾸고 있다. 정치인 박원순의 선택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가 크다. 내가 눈을 감는다고 타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봄으로부터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아웃팅=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타인에 의해 성정체성이 드러나는 것 신혜연씨는 노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