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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조롱의 차이 (이다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17
조회
614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현지시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12명이 사망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것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말로 옮기기조차 끔찍한 이 사건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프랑스의 문화갈등에 대해 고심해볼 화두를 준다.

어쩌면 이 사건은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것에 대한 종교적 분노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간 프랑스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오며 느낀 집단적 울분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거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을 듯하다. 무함마드는 어쩌면 그 상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니, 달리 말해 종교는 그들의 폭력 행위를 포장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나 종교로만 접근한다면 그 한계가 명확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12명의 더운 목숨을 위로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정한 의미의 '똘레랑스'로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샤를리 엡도의 필진이 그렇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살해당한 사실이 그 작업의 정치적 올바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소 냉혈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읽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마치 풍자와 조롱의 차이처럼 말이다.

이 사건을 해석하는 '자유를 수호하는 언론인 대 야만적인 광기에 빠진 인간'이라는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보면서, 프랑스가 그간 자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며 늘 써왔던 수법을 본다. 만일 억압적인 종교적 전통으로 고통 받는 무슬림 민초들이 모하메트를 풍자했다면 당연히 그들의 편에 서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풍자의 주체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백인이라면 굳이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워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표현할 자유를 넘어 표현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과거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이슬람이 나치와 파시즘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언론 만평을 기념하는 파티를 주최하기도 했다. 당시 샤를리 엡도의 작가와 필진이 이 자리에 초대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슬람이 나치, 파시즘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발상은 프랑스가 가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언론인 피에르 베이로는 "캐리커쳐로 무함마드의 엉덩이를 그리는 것이 언론의 자유를 진보시키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했다. 지금 프랑스에 필요한 '표현의 자유'란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위를 굳이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계속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애도와 추모를 넘어선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를 뒤덮은 추모의 물결은 심상치 않다. 우선, 이번 테러로 희생된 샤를리 엡도의 필진을 애도하는 시위대가 아프리카계 이민자를 폭행했으며,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역시 샤를리 엡도를 표현의 자유를 들어 옹호하고 있다. 그뿐인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초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온 이스라엘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역시 이 추모 시위대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마린 르펜이나 베냐민 네타냐후 같은 극우 세력이 하나 둘씩 추모 시위에 가담한다면 프랑스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반이슬람, 반이민 정서로 불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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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 라스파르는 "프랑스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바꾸려 한다. 프랑스에는 격리 정책이 있을 뿐이다." 라며, 프랑스의 동화주의 노선을 비판했다.


더욱 더 우려되는 것은 이 사건을 틈타 한반도에도 반이슬람 정서가 성공적으로 상륙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무력함, 패배감을 외국인 혐오를 통해 풀어내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체자(불법체류자)'와 '외노자(외국인노동자)'로 인해 '개슬람(이슬람을 폄하하여 부르는 말)'이 확장되었다는 식의 혐오 발언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혐오 발언을 마주하면서 마치 나치의 망령을 보는 듯 한 느낌에 휩싸인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를 옥죄어오는 듯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한국과 프랑스의 이주노동자들은 과연 그 심정이 어떨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가 함께 '이주·인권협의회'를 발족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는 인종차별이 범죄라는 인식이 사회에 정착되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방침이라고 한다. 특히 올해에는 고용 허가 제도와 다문화 정책 개선을 그 중점 사업으로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전한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픔에 공감하는 연초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보다도, 몇몇 이슬람 광신도의 총기 난사라고 생각하기보다도, 이 땅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된 다문화에 대해 재고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고용 허가 제도가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실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누가 소외되고 누가 억압받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관련 일을 하는 단체에 문의하여 작은 활동이라도 함께한다면, 국경을 넘어 인종을 넘어 전지구적 연대를 만들어나가는 환희를 누리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샤를리 엡도가 그간 해온 캐리커쳐 작업의 일부다. 이 그림만 보더라도 샤를리 엡도가 가진 인종과 성에 대한 편견을 엿볼 수 있다. 샤를리 엡도의 희화화가 '풍자'라기보다도 '조롱'에 가깝다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이주민들이 제대로 융합되지 못하는 현상에 프랑스 사회는 과연 책임이 없을까? 그들을 프랑스 땅에 있게 한 건 다름 아닌 프랑스의 제국주의다. 프랑스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국 식민사의 유산에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변해야 할 것은 그들’이라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 어떤 생산적인 결과도 불러일으키기 힘들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사회가 진정한 똘레랑스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앞으로 더 이상 아까운 목숨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방책이 될 것이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