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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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정지혜/ 청년 칼럼니스트   “저, 알바 구한다고 해서 왔는데요.” 3월 27일. 첫 출근이었다. 나는 학교식당에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2시간씩 일한다. 아르바이를 하게 된 것은 최근에 자취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왕복 4시간에 이르는 통학에서 벗어나 월 45만 원짜리 자취방에서 산다. 월세가 비싼 만큼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여러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학교 구내식당까지 오게 됐다. 무엇보다 학교식당에서 일하면 삼시세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자취생에게 가장 큰 이점이었다. 배식은 시간당 4500원이고, 설거지는 시간당 6000원이다. 월급은 15만 원 정도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이모라고 불러.”라고 말했다. 졸지에 열 명이 넘는 이모가 생긴 나는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런 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이 너무 고되었기 때문이다. 반찬을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두 손으로 동시에 다른 반찬을 식판에 놓아야 했다. 그것도 깔끔하게, 딱 적정량의 반찬만을! 내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식당 이모가 다른 일을 시켰다. 잔뜩 움츠러든 채 정신없이 심부름만 했다. 무거운 반찬통을 나르고, 계속 서 있느라 다리는 퉁퉁 부었다. 2시간이 이렇게 길던가. 4월 3일 일주일 만에 배식 실력이 꽤 늘어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던 차에 식당 이모들이 서로 임금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다. “그래서 시간 계산이 어떻게 된다는 거야?” 학교는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매월 10일 월급을 준다. 시간 얘길 하는 걸 보니 일주일 뒤면 받게 될 임금을 계산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 많이 받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식당 이모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5500원이지. 한 달에 200시간이니까…….” 5,500원. 내가 받는 시급과 1000원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월 노동시간 200시간. 주 5일씩 4주로 계산할 때, 하루에 10시간 일한다. 한 달 임금은 110만원. 맙소사, 10시간 내내 쉬지 않고 매 끼 몇 백 명분의 밥과 반찬을 짓고 설거지를 해야 월 110만원을 받을 수 있다. 110만원. 그것은 내가 다니는 서울시립대의 한 학기 등록금이고, 주요 사립대의 등록금을 받으려면 한 푼도 안 쓰고 서너 달을 꼬박 일해야 한다. 100만원 벌기가 이렇게 힘든데, 등록금을 생각하니 100만원이 참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밥도, 반찬도, 식당 이모들도 다 돈으로 보였다. ▲ ‘따뜻한 밥 한 끼를 드립시다’라는 캠페인으로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성공회대 청소노동자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4월 8일 우연히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 김순자씨 소개 영상을 봤다.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항상 시선 밖에 놓인 청소노동자, 식당노동자, 경비노동자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여운이 깊은 영상이었다. 나는 어느 빌딩에서 계단 청소를 하던 노동자가 멀리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멈춰서더니 고개도 못 든 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되기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청소하는 기계, 밥하는 기계, 경비서는 기계. 인사까지 잘 하면 더 좋은, 그런 기계를 말이다. 4월 26일 중간고사가 끝났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책을 빌리기 위해 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그 친구는 자기가 도서관에서 본 청소노동자 이야기를 해주었다. “도서관 귀퉁이에 서서 주무시고 있더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도서관에 쉴만한 휴게실도 없어?” 친구 얘기를 듣고 나서 도서관 층별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청소노동자를 위한 휴게실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를 마주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청소노동자들은 변변한 휴게실도 없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눈에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도 청소노동자는 어딘가에 서서 쪽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4월 30일 점심을 먹으러 학교식당에 갔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알바 증명서’만 보여주면 공짜로 먹을 수 있다. 아침을 못 먹은 터라 푸짐하고 반찬수가 많은 2,800원 짜리 코너로 갔다. 증명서를 보여주었는데 이모는 여기서 밥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2,000원 짜리 코너로 가든지 1,500원어치 라면을 파는 분식 코너로 가라는 것이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했지만 이모는 단호했다. 결국 2,800원 식권을 끊어서 밥을 먹었다. 식당 이모가 매정하다고 푸념하며 밥을 먹다가 갑자기 홍익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월 75만원에 식비 300원을 받고 일해야 했던 그들. 2,000원 짜리 급식이라도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만 같았다. 우리 학교 청소-경비 노동자들은 끼니를 어떻게 때우는지도 궁금해졌다. 2,800원 코너에선 먹을 수 없다고 말한 그 식당 이모도 결국 남들 밥 먹을 시간에 일해야 하는 노동자다. 제대로 못 먹고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돈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5월 3일 된장국을 푸고 돈가스 소스를 뿌리는 손놀림이 확실히 몸에 익었다. 갑자기 날이 더워져서 식당 내부는 찜통이었는데 이모 한 분이 시원한 콜라 한 잔을 건넸다. 이제 어엿한 식당 일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5월 7일 사회학 수업에서 비정규직에 대해 배웠다. 교수님은 정규직의 요건에서 하나만 빠져도 비정규직이라고 했다. 그렇게 따져보니 식당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고, 청소노동자와 경비노동자도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은 매우 가까이에 있었다. 지난주 하루 빠져서 혹여나 잘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나도 비정규직이고 용돈벌이, 등록금벌이, 월세벌이를 하겠다고 알바에 뛰어든 친구들도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오늘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이제 대부분의 식당 노동자들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 돈가스 튀김 냄새를 폴폴 풍기며 허겁지겁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됐다. 물론 여전히 식당에 사람이 많이 몰려오면 힘들다. ‘급식 맛이 없었으면….’ 할 때도 있다. 20년 가까이 나는 누군가의 자녀, 학생으로의 역할만 했지 노동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그 직장은 필시 정규직이다)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부터 실업률은 3~4% 사이를 오갔고, 청년 실업률은 8% 내외에서 줄어들 기미가 없다. 한국의 비정규직의 비율은 OECD 평균의 2배인 34.1%, 3명 중 1명은 반드시 비정규직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비정규직을 일상의 중심으로 다루지 않는다. ‘열심히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겠지. 나만 아니면 돼.’라고 주문을 외우며 우리는 스펙을 쌓아 간다. 우리들의 외면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을 더 불안한 사회로 내모는 부정의에 대해 눈감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노동자이고, 학생들 또한 예비 노동자이다. (예비)노동자로서 당연히 소외된 비정규직 노동자를 지지하고 연대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이다. 오늘도 식당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땀을 흘리며 국을 푸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속에 있다. 나도 비정규직이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18 | 추천: 0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한 달에 한 번,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수십여 명의 학생들이 학내 청소노동자들의 노고를 같은 처지에서 느껴보기 위해서 새벽5시에 학교 건물 곳곳을 청소한다. ‘단 한번만이라도’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활동이 ‘상쾌한 아침’으로 이어져 오기 벌써 몇 해, 이제는 함께 일하고 밥도 지어먹으면서 청소노동자들과 서로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인연이 ‘상쾌한 아침’으로만 맺어진 것은 아니다. 청소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생활 가능한 임금, 그리고 원청인 학교의 사용자성 인정을 요구하며 싸웠던 2009년 말과 2011년 초에 많은 학생들이 힘을 보탰다. 등록금 인하 운동에서 받은 서명의 몇 배에 달하는 ‘청소노동자 투쟁지지’ 서명의 수는 대학생인 나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다. 게다가 차가운 아침이슬을 맞으면서 굳이 새벽 청소를 하고 청소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그 마음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등록금 1000만원 시대’,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 등의 담론에 둘러싸인 채 ‘불안’과 ‘경쟁’의 20대를 보내는 오늘의 대학생들이 과연 무슨 마음으로 그 노동자들에게 ‘연대’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저 열위에 있는 약자에게 보내는 연민일까. 선배의 선배들에게서 전해지는 구전 설화 같은 이야기지만, 한때 대학생이 ‘사회발전의 선도세력’이자 ‘민주주의의 선봉대’로 수용되던 시기가 있었다. 선진적인 지식을 획득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대학생들이 이 나라의 선두에서 사회의 개조를 이야기하고, 불우한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연대’해야 한다는 담론은 바로 그 시기의 좌표였으리라. 언제 대학생이 우리 사회의 주도권을 쥔 적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 자원을 가지지는 못했더라도, 정신적 풍요를 누리며 신념에 찬 길을 걸어가던 한국사회의 길잡이들이 있었다. 그러한 우리의 대학생 선배들이 있었다. 고통으로 피워낸 전태일의 불꽃이 어두운 한국현대사의 오밤중을, 아니 그 밤중을 헤매고 있던 장삼이사들의 깜깜한 가슴 속을 밝힐 때, 그들이 절실하게 원했던 ‘대학생 친구’들이 분명히 한국현대사의 현장에 살아 있었다. ▲ 사진 출처 - 시사IN 민주광장, 불안의 메아리에 잠기다 그렇다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사회민주화의 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정치적 연대를 도모한 것이었나? 솔직히 말하면, 그야말로 서로 위안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대학생은 더 이상 힘차게 사회의 진보를 외치는 선봉장이 아니다. 직선으로 뻗어있는 투명한 진보의 전망을 맨 앞에서 가리키는 존재가 되기에, 너무 불우하다. 높은 등록금과 만성적인 청년실업, 무엇보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불안’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다. ‘생존’에 대한 갈망에 1분 1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접속해 있다. 이제 민주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열망의 언어’가 아니라 불안의 메아리이다. 대학생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정치적 약자이며, 경제적 불안 위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경제적 약자이다. 뿐인가. 종로에선 ‘경쟁력’의 논리에 뺨맞고, 한강에선 화풀이도 못한 채 ‘정치적 무뇌아’로 무시 받는 사회적 약자가 되어 버렸다. 만약 오늘의 대학생들이 타인의 아픔에 ‘연대’하고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은 대안에 대한 확신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소박한 공감과 연민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을 패배적 논리의 좁은 방에 가두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젊다는 이유만으로도 대학생은 여전히 가능성의 존재이며, 자신을 둘러싼 거센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잠재력의 주인공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설령 ‘연민’에 불과할지라도, 이들은 연민을 ‘연대’로 제련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할 일로 꽉 찬 다이어리를 비집고 겨우 맞이하는 ‘상쾌한 아침’은 비록 그것이 사소한 연민과 미완성의 공감에 불과할지라도, 세찬 강물을 예비하는 가느다란 시냇물이 될 수 있다. 작은 마음에서 출발한 자기회의와 성찰의 진통이 더 큰 공감으로, 세상을 바꾸는 단단한 ‘연대’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경쟁에 내몰리는 자신의 삶에 물음표를 가질 때 이들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시야를 넓힐 수 있다. ‘성공’의 수사들이 무책임하게 건네는 격려에도 불구하고 척박하고 건조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연민할 만큼 더욱 질척거리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살아가는 청소노동자들의 하루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지친 하루를 그들의 고된 노동이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희망은 가까운 터전에서부터 다만 희망의 물 한 동이를 가까운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멀리 있는 고통을 함께 아파하기는 쉽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자기 손톱 아래의 가시만큼 절박하게 아파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청소노동자의 노고에 감사하고, 직접 듣는 고된 현장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는 훨씬 쉽다. 쉬울 뿐 아니라 절실하고 그 절실함이 클수록 생활의 단단한 관성을 파고드는 더 날카로운 반성이 가능하다. ‘88만원 세대’의 이름표를 달고 ‘1000만원 등록금’에 사로잡힌 젊음들에겐 그 의심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자’라거나 ‘권력을 교체하자’라는 드높은 외침은 손쉽지만 공허하고, 그만큼 위험하다. 그 외침을 처음 낳은 인간적 감수성과 작은 염치의 마음을 압도해버리기도 하는 까닭이다. 맨 처음 우리가 출발한 작은 터전을 잊게 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대안을 강변하는 완강한 주장은 너무나 먼 휘발성의 구호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것은 바삐 도서관으로 향하는 대학생들의 범속한 욕망을 세워 돌릴 수 없고, 이들의 두려운 마음을 설득할 수 없다. 배가 고파서였는지 꿈이 고파서였는지 굶어죽은 젊은 작가의 비운을 온전히 아파할 수 없다. 150원 오른 교통비에 한 달 생활비를 다시 계산하는 복학생의 고민을 가까이서 나눌 수 없다. 의심 없는 눈빛보다는 친절하게 서로 위안할 수 있는 관심이 마침내 가공할 자기검열의 틈을 비집고 죽비처럼 자신을 내리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적 감수성마저 지그시 밟아버린 채로 20대를 옥죄는 거친 포위망을 격파하고, 우리 시대의 젊음을 낙인찍는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의 비굴한 명찰을 떼어버리는 세찬 강물의 수원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젊은 5월을 위하여 다시 5월이다. 이 땅의 4월은 혁명의 기억으로 경건하고, 유월엔 항쟁의 긍지로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그리고 5월은 ‘광주’의 상처로 아프고, 아픈 만큼 날카로운 신념을 단련해내기도 하였다. 그것이 우리 현대사를 만들어온 젊은 5월이었다. 젊은 5월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어온 청춘들은, 이제 새로운 세기의 숨 막히는 도시에서 무엇을 모색해야 하는 걸까. 부도덕한 권력을 바꾸겠다고 나선 진보정당이 ‘비민주’의 주홍글씨를 새긴 채 속절없이 상처입고 있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모든 꿈이 어디서 잉태된 것인지를 기억하자. 정의로운 권력과 올바른 정치에 대한 열망 그것은, 실상 자신과 주변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피로한 20대들이 같은 처지의 누군가와 주고받는 한 마디의 위로와, 어린 새처럼 연약한 자기 회의가 마침내 젊음을 젊음답게 하는 한 발자국이 될 거라 믿는다. 그 작은 우물에서 시작한 물이 흐르고 흘러 현실을 바꾸는 강물로 나아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날은 정말이지 아주 ‘상쾌한 아침’이었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294 | 추천: 0
박용석/ 청년 칼럼니스트 어머니는 광장에 서서 소리쳤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룬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 아들이 끌려가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제 겨우 50줄 나이지만 등이 조금 굽은 어머니다. 모진 고문 탓에 가슴뼈가 주저앉아서다. 어머니는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5.18민주화유공자’다. 그런 어머니가 인터넷 생중계로 막내아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했기 때문이었다. 법 앞에서 2008년 6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사회 단체 농성 천막이 철거될 때 연행된 10명 중 한명이 나였다. 우리는 48시간을 꼬박 채워 유치장에 구금당했다. 풀려난 후엔 2년이 넘도록 십여 차례 재판도 받았다. 당시 우리의 죄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와 ‘도로교통법위반’이었다. 담당 검사는 서울시청 앞 광장이 도로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리곤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우리가 ‘전문시위꾼’이라 선처의 여지없이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며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무죄였다. 어려운 법률 용어가 잘 이해되진 않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서울 시청 광장은 도로가 아니란 것. 무허가 시설이라도 미리 고지하지 않은 채 강제 철거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경찰과 서울시 공무원의 강제 천막 철거는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아 정당한 공무집행이라 볼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이에 저항한 것은 무죄란 것이 판결 요지다. 2년이나 걸려 겨우 받아낸 무죄였다. 그렇지만 후련하진 않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난 되레 상실감을 느꼈다. 이 판결은 불법의 주체가 국가 권력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가두었던 경찰과 공무원, 그리고 억지를 부려가며 나를 기소해 재판에 출석케 한 검찰이 죄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당한 연행과 구금, 재판의 본 목적이 따로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쓸데없이 저항하면 불이익을 받고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말이다. 다시 법 앞에서 물론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연행 사유가 위법하거나 그 과정에서 경찰이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무죄가 된다. 무죄가 확정되면 그에 대한 보상도 한다. 형사보상이란 법 덕분이다. 형사보상은 형사재판에 한해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후, 구금과 재판 출석 일수에 대해 법정최저일급의 최대 5배까지 보상을 하도록 정한 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문제다. 형사보상을 받으려면 연행과 구금, 재판 출석과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증빙하는 자료를 모두 해당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개인이 이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모든 과정을 법률 전문가인 법정대리인, 즉 변호사를 선임하여 처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임비용을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오죽하면 형사보상이란 제도를 알면서도 그 권리를 포기하기도 한다. 2008년에 나와 함께 연행됐던 다른 9명 중 7명이 그랬다. 다른 2명도 생계 때문에, 혹은 다른 재판에 쫓겨 거의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다. 재판 출석 일수 증빙을 위한 재판기록 사본과 ‘무죄판결확정증명’은 본인이나 법정대리인이 직접 방문해야만 발급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사는 곳이 광주나 부산, 심지어 제주도라도 서울에서 연행되고 재판을 받았으면 해당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서울까지 와야 한다.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구금되었다면, 해당 기관에 ‘정보공개청구’를 해 구금 사실과 기간도 입증해야 한다. 인터넷으로도 신청 가능하지만 자신이 연행되어 구금 됐던 일시와 기간, 사건번호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아버지 생일이 기억나지 않아 스마트폰 다이어리에 검색했는데, 되레 스마트폰이 “아버지 생일을 입력하시오”라고 묻는 꼴이다. 결국 직접 방문해야 한다. 기한도 정해져 있다. 구금과 구속에 대해선 '무죄재판의 확정된 사실을 안 날부터 3년' 이내에 청구하지 않으면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마저도 청구기한이 1년이었던 것이 2011년 5월에야 개정됐다. 변호사 선임 비용 등 재판 비용에 대해선 그 기한이 6개월로 더 짧다. 기한이 문제인 것은 이 법을 알지 못해, 혹은 어떤 다른 이유로 청구 기한이 지났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비용에 대해선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이 법을 너무 늦게 알았다. 6개월은 이렇게 너무 짧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물론 구금과 구속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3년은 짧은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죄가, 죄가 아니었음이 입증되기엔 턱없이 짧다. 오랫동안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은 거론하는 것만으로 죄가 됐다. 최근 ‘5.18민주화유공자회’는 독재정권에 의해 구금됐던 이들이 형사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유공자’라곤 하지만 구속 기간을 제외하곤 보상 받지 못했다. 어쩌면 구속 기간보다도 더 가혹했던 구금과 조사 기간은 증빙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구속 기간마저 보상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한국의 잔혹한 역사 속에서 단지 1980년, 광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주에서, 부산과 마산에서, 그리고 광주 이후 지금까지도 권력에 의해 짓밟힌 무수히 많은 권리들이 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들 중 대다수는 여전히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목숨을 건다. 또 다시 법 앞에서 때문에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형사보상을 받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어머니 굽은 등은 못 펴드려도, 세상을 조금은 바꿔냈다는 자긍심마저 굽지 않는 방법이 형사보상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지만, 그조차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내가 당한 고난은 그들 앞에선 겨우 아이들 재롱 수준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몇 번 헛수고를 하고선 관련서류들을 서랍 구석에 처박아 뒀었다. 법원에서 내 재판 기록을 열람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죄평정’ 중이라며, 상급법원에서 해당 재판기록을 대여 중이라며, 그렇게 세 번 헛걸음을 했다. 그리곤 “대여한 재판기록이 언제 반납될지 알 수 없다”는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 내게 ‘쓸데없이 저항하면 불이익을 받고 귀찮아진다’는 것을 일깨워준 이 나라의 법이었다. 형사보상은 ‘쓸데없이 보상을 받으려다간 더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목숨을 걸고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룬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란 어머니의 외침은 내게 점점 진실이 됐다. 내가 깨우친 그 진실은 아직도 법이 만민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 동안 처박아 뒀던 형사보상청구 관련 서류를 다시 꺼내본다. 아주 작은 권리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32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법이 우리의 권리도 지켜주게 하기 위해. 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지 않기 위해. 나아가 법 앞에서 평등하기 위해.
2017-06-27 | hrights | 조회: 303 | 추천: 1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우와! 이겼다!” “설마, 만우절 장난은 아니겠지?” 4월 1일 일요일, 가족과 저녁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텔레비전의 낯선 케이블 채널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날, 4월 1일에 실시된 버마의 보궐선거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압승이 예상된다는 짤막한 보도였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머리 속 퓨즈가 살짝 끊어졌다 이어진 듯, 아찔하게 설레었다. 볼 한쪽으로 씹던 밥을 밀어 넣고 식구들에게 떠들어 댔다. 내가 저 일을 도왔다고. 버마 대사관 앞에서 확성기를 잡았다고. 지난 1년간 열두 번, 비가오나 눈이오나 “프리버마”를 외쳤다고. 그런데 정말 ‘그날’이 왔다고! 그러나 한껏 들뜬 나와는 달리, 식탁은 고요했다. 벌써 밥 한 그릇을 뚝딱 하신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그게 너랑 뭔 상관이냐…… 얼른 밥이나 삼켜” 흥분과 설렘이 ‘일시 정지’됨과 동시에, 밀어놓은 밥 덩어리가 꼴깍 넘어갔다. 정말이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대한민국에 사는 스물네 살의 대학생 ‘나’와 ‘버마의 민주화’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하게 한방 맞고 나서야, 의문이 생겼다. 그제서야 진지한 답변이 절실해졌다. 사실, 아주 진작에 고민했어야 했던 것인데 말이다. 길게는 3년째, NLD한국지부를 도와 그 시위에 함께한 인권연대와 국제민주연대 식구들은 무엇을 바라고 그늘도 바람막이도 하나 없는 그 대사관 앞에서 ‘프리버마’를 외쳐온 것인지 말이다. 프리버마 캠페인은 말 그대로, 버마의 자유를 위한 운동이다. 1948년, 버마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마자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고, 지금까지 그 통치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자유란 즉 민주화를 의미한다. 군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인권침해와 환경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여사는 20년 가까이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갖가지 명목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고, 심지어 강제 노동에 동원되기도 한다. 여행과 통신, 언론 등은 모두 군부에 의해 통제된다. 버마의 천연자원은 군부 정권의 유지를 위해 해외로 팔려나가고 있다. 단편적인 사실만 들여다 보아도, 버마가 오랜 군부독재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돌이켜 보자면, 처음에 나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버마의 평화는 아시아의 평화다”라는 피켓을 들고 그 대사관 앞에 처음 섰을 때, 나는 여느 집회참여자들처럼 비장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단편적인 버마의 실정을 알뿐이었지, 더 깊은 관점이나 심오한 동기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NGO의 인턴이 되고 처음 맡겨진 임무였기에 기꺼이 서있었을 뿐이었다. 한동안은 피켓을 들고 서 있으면서도 앞에 서있는 전경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스스로에게 민망했다.   이번 보궐선거는 아웅산 수치의 첫 국회 입성 기회로 주목을 받았으며, 동시에 버마 정부가 개혁을 통해 서방에 보내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평가받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매번 이곳에 비장한 척 서있는가. 국내 이슈도 다룰 것이 많고 복잡한데, 왜 버마의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왠지 여기 서 있는 것이 싫지는 않다. 뭔가 공감이 되고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금새 1시간으로 정해진 시위 시간이 끝났다. 캠페인을 마치고는 늘 NLD한국지부 회원들, 인권연대 식구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 가서 진한 북엇국을 먹었다. 맛있게 밥을 먹다 보면, 그 한 시간 동안의 얕은 번뇌마저 ‘어쨌든, 나는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잊혀지곤 했다. 반값 등록금 시위가 한창이던 가을 즈음에도 역시 북엇국을 먹고 있었다. 한술 두술 북엇국을 뜨며 식탁위로 두런두런 이야기기가 오가고, 역시나 그 가벼운 번뇌마저 잊혀지던 중이었다. 그때,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님께서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몇 마디 하셨다. “그냥 피켓만 들고 걸었는데, 무기라곤 솜털 보송한 맨주먹 밖에 없는 학생일 뿐인데, 물대포를 왜 쏘니? 그것도 초겨울 날씨에! 추워 죽겠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 “한겨울에 쫓아내면 갈데 없다고, 좀 더 살게 해달라고 했을 뿐인데, 왜 때리니? 아프잖아. 왜 무시무시한 덩치들을 데려다 놓고 위협하니? 무섭잖아!” 그래, 바로 이거다. 왜 복잡하게 생각했을까? 아주 단순한 것인데…… “이건 좀 아니잖아!”에서 오는 당연한 분노, 억울함, 서운함. 그리고 비단 타인에게만 닥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놔두면 언젠가는 우리 그리고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다소 이기적일 수도 있는 생각. 내가 사안을 잘 알지 못해도 어딘지 모르게 공감할 수 있었던 그 정서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무엇을 건드리는 그 ‘좀 아닌’ 사건들은 우리모두가 최소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다. 따라서 이해 관계없는 타자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 그리고 나의 문제로 안아 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해질 수 있다. ‘이건 좀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부터 그것은 곧 당신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이라고 생각한 어떤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하고 화가 나고 서운하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을 보태고 연대하면 된다. “내 알 바 아니야”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인간은 너무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기쁨을 나누는 것 보다는 슬픔과 고통을 먼저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그 슬픔이나 고통이 꼭 ‘너’만의 문제로 끝날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타인의 문제가 어느 순간 나비효과를 일으켜 나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버마의 민주화는 아시아의 평화다”라는 프리버마 캠페인의 표어가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아마도 나와 상관없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이란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더 나은 세상,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꿈꾼다면 말이다. 마지막 프리버마 캠페인을 앞두고서야 제대로 와 닿았다. 버마에는 가본적도 없는 내가 프리버마를 외치는 것이, 그들의 승리 소식에 밥 먹다가 만세를 부를 만큼 기쁨을 느끼는 것이 왜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너의 평화는 우리의 평화이고, 곧 나에게도 평화이다. 바로 당신의 평화이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289 | 추천: 0
김은성/ 청년 칼럼니스트 세상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럴 듯한 명함을 가져야 한다거나 모든 이가 창작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따위가 아니다. 99번 만에 입사한 회사가 하필이면 대출업체라 아침마다 미입금자 명단을 뒤져 협박 전화를 걸어야 한대도, 여배우의 노출 부분에 정교한 동그라미를 그려 넣으며 매일 7개씩의 ‘정크 기사’를 생산하는 인터넷 기자라 해도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생각하기만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아직 제 이름을 잃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한 가닥 회의를 끝까지 부여잡고 살아간다면, 그 망설임이 자신의 이름표가 돼 주는 게 아닐까. 그러니, 싫은 것을 싫다고 투덜거리고, 옳지 않은 일에 항의하고, 부끄러운 일 앞에서 주저하는 것이 이 이상한 나라에서 ‘닥치고 복종’을 끝내 이겨내는 힘이라 여긴다. “아니오, 네가 틀렸거든요, 그거 정말 이상해요.”라고 큰 소리로 외치진 못해도 결코, 끝까지 입을 닫지는 말기. 그런데 한 번도 각오한 적 없었던, ‘불의와의 타협’에 얼마 전 나는 서명했다. “앞으로 이 책은 오랫동안 너의 거짓말이 될 거야.”라고 쓰인 종이에 내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적어 넣은 셈. 그리고 영원히 비밀 엄수하고 입 닥치겠다는 무언의 약속. 사정은 이러했다. ‘내일이 마감인데 한글2007창은 새하얗게 비어있는 악몽’을 이틀 걸러 꿀 정도로 두 달간 심신을 괴롭혔던 실용서 원고가 겨우 마무리됐다. 오리털 파카를 벗을 때쯤이면 떠나실 줄 알았는데 벚꽃이 휘날려도 절대 안 가시더라. 당연히 몇 안 되는 인간관계도 잠시 끊겼고, 녹초가 돼 귀가하는 날이면 현관문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그랬던 애증의 책이 이제야 디자인을 마쳤는데 최종 PDF에 박힌 건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이름이 아닌가! 서울대 학부와 동대학원 졸업, 몇 권의 실용서 집필이라는 이력과 함께. 득달같이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내지는 못하고 ... 쌩초보 작가답게 조용히 메일을 송고했다.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대필로 결정됐나 보네요. 미리 말씀 좀 주시지.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분 이름 밑에 ‘교정교열 OOO’ 이라고 들어간 제 이름은 빼 주세요. 불쾌합니다. 제 존재 자체를 책에서 지웠으면 하네요.” ‘불쾌합니다’를 지웠다 넣었다 하다가 결국 ‘기분이 썩 좋지 않네요’ 정도로 고쳤다. 당장에 장문의 답신이 왔다. 현 출판시장의 비극적 상황과(2011년 문을 닫은 대형 서점 4개를 차례로 나열), 소규모 1인 출판사 대표로 살아가는 고충 (일이 어려워 결혼도 못했다. 출판사 문을 닫는 악몽을 매일 꾼다. 3포 세대가 바로 나다), 원래 쓴 작가의 프로필로 가려 했으나 주위에서 재고 만들 일 있냐며 만류하더라 (학습실용서는 99%가 서울대학교 출신 프로필을 달고 있다. 대리 프로필을 사 오느라 큰 위험도 감수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양해해 달라.)등의 내용과 그 사정 사이에 서리서리 배인 절절함. 조선시대에 신문고 앞에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대필하는 일을 하셨으면 큰 돈 버셨겠다 싶을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 결국 나는 답문자까지 공손히 보냈다. “네. 이해해요. 힘내셔요.” ‘문도리코’가 따로 있나. ‘문대썽’은 누가 만들어줬나. 실용서와 자서전, 정치인 연설문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자기소개서까지 남이 대신 써 주는, 대한민국 대필무한써클에 발을 담근 이상 이 몸도 죄인이다. 이 세계의 룰은 들어올 때고 나갈 때고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니, 어디 말할 데도 없고 이렇게 염치없이 칼럼란을 빌려 투덜댄다. 욕이라도 하고 싶은데, 딱히 누구를 욕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내 욕밖에 할 것 없어서 대나무 숲 속에 서서 망연자실한 이발사의 심정이랄까. 60일의 밤을 카페인과 레드불로 지새우며, 그래도 최선 다하자며 해맑게 주먹 불끈 쥐었던 때의 내 표정은 나이브한 열정으로 부끄럽게 기억될 것이고 방금 낳은 아들 뺏긴 그 옛날 씨받이 처녀들 심정의 10분의 1정도는 공감할 것도 같다. 시간이 흘러 앙금도 좀 사라지면, 서점에서 마주친 이 책을 제목 안 보이게 뒤집어 꽂거나 인문학 서적 섹션에 꽂아 둘 정도의 소심한 복수나 하겠지만. 아무튼 이 너덜너덜한 기분은 못 마시는 소주를 들이부어도 무섭게 생생하더라. 대필작가로 경제적 안정을 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동료들이 많다. 대기업 CEO나 정치인의 자서전을 대신 써 주면 작은 방 월세 보증금 정도가 나오는 경우도 있단다. 한 대선 후보의 자서전을 써 준 작가는 1년 동안 ‘개고생’을 한 후에 (보통은 두 달이면 쓴다)받은 돈 들고 미국으로 날아가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 하며 산다. ‘어차피 모두가 대리인생이다. 혼을 바쳐 일하나, 대충 일하나 어차피 한몫 챙기는 건 자본 가진 놈이고 부스러기 주워먹는 건 딴 놈들이다.’ 시니컬하게 주억거리며 이름 따위 없이 살아가도 좋으련만, 타인을 대신하여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타인의 이름이 적힌 몇 권의 책을 출판하는 동안 타인의 성공한 인생 속에서 헤매게 될 것만 같아 두렵다. 진짜 유령이 되어 외로워질 것 같아 겁난다. 부끄러움을 무마하려 여행과 좋은 물건 등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사람은 영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다음 번에는 고료 2배로 올려드릴게요. 꼭 다시 작업해요.’란 문자 앞에서 서성대는 이 초라한 마음. 숙취와 함께 기상한 아침, 김순자 후보가 비례대표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순자 이름 세 글자 위에 올라붙은 탈락이란 두 글자. 그런데 내공 깊은 순자 언니는 ‘어머, 나 탈락!’ 정도의 아침 트윗으로 ‘탈락’ 두 글자 따위 빗자루로 쓱 쓸어 버리셨다. “지금 출근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동료들과 부둥켜 안고 커피도 마시고 건물 구석구석을 청소합니다. 세상을 빛나게 하는 청소 노동자 맞지요?(@kimsunja0411)” 아, 이토록 유쾌하고 당당한 실패자의 이름이라니! 가볍고 단순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나는 당장에 기운내고 또 다시 새 한글창을 열었다. 아니, 선거 다음날 신새벽에 출근하시는 분 앞에서 어디 초보인생이 소주병 들고 궁상 떨고 난리니. 성공한 타인의 이야기를 대신 쓰며 밥벌이 하지 말고 좀 덜 먹고 덜 입더라도 내 것 써야지, 이를 앙다물었다. 가짜 성공은 안 부러운데 멋진 실패는 정말 부러우니까. 저 정도 내공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로 속 쓰려보셨을까 싶어, 나는 좀 더 여러 번의 실패를 하기로 했다. 확실한 내 이름으로.
2017-06-27 | hrights | 조회: 386 | 추천: 0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내가 다니고 있는 대구대학교가 올해 장애대학생 교육복지 지원평가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학교 당국은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누구에게나 편리한 장애 없는 캠퍼스”, “장애학생이 행복한 대학.” 분명 자랑스러워야 할 일이지만, 재학생으로서 느끼는 심경은 복잡하다. 얼핏 보면 매스컴을 통해 듣는 화려한 소개가 맞는 말 같다. 초․중․고를 통틀어 제도권 교육 12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장애학생을 대학에 들어온 뒤에는 사귈 수 있었다. 확실히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캠퍼스 밖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장애학생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수화, 맹인안내견, 전동휠체어 같은 일상에선 꽤 낯선 모습도 포함된다. 장애학생 학습지원 시설이나 설비 등을 봐도 겉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학교홍보’가 나는 왜 이리도 민망하고 불편할까. 일전에 수업 공동과제 때문에 조모임이 있었다. 우리 조엔 대여섯 명의 청각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들이 섞여있었다. 나는 고학번이라는 이유로 조장을 맡아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수화통역사가 장시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대화는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청각장애학생과 소통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몸짓, 필담을 동원해가며 어설프게 말을 이어 겨우 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간단한 수화조차 할 줄 모르는 조장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원망을 품고 있었다. 이 날의 경험은 아직도 나에게 서글픈 잔상으로 남아있다. “나는 왜 수화를 모르는 걸까.” 고백하기 머쓱하지만, 나는 수화법이나 구화법, 심지어 전동휠체어의 사용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어설프게 변명해보자면, 그런 교육을 전혀 받을 기회가 없었다. 바로 여기서 장애, 장애학생을 바라보는 학교의 관점이 드러난다. 적어도 ‘장애 없는 캠퍼스’라고 홍보하는 학교라면, ‘영어’보다도,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을 이어주는 ‘언어’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정 ‘장애’ 없는 캠퍼스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는 17일 오전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4년째를 맞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며 장애인 차별 시정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러나 학교는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의 공유’에는 무감각하면서도, 장애학생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를 지상과제로 떠받들고 있다. 그 ‘착한 마음’을 들여다보면 학교가 장애를 보는 시선은 시혜와 동정에 고정돼있고, 장애학생을 복지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있어 장애학생들의 수업권과 이동권은 지원과 서비스의 문제지, 결코 권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언어’에 민감하지 않다면, ‘권리’에는 둔감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장애학생이 행복한 대학’에서 청각장애학생은 수화통역사와 속기사가 부족하단 이유로 온전한 수업권을 침해당하고 있고, ‘장애 없는 캠퍼스’에서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지체장애학생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단과대에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학교구성원으로서 장애학생의 ‘권리’는 ‘예산’과 ‘재정’ 앞에서 한낱 공허하고 초라한 단어 일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학교가 ‘장애학생의 메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학교에 비해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체계가 ‘비교적’ 잘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듯, 복지의 ‘상대성’이 권리의 ‘절대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학교의 온정적, 시혜적인 장애학생 복지 정책은 곧 장애를 '개인의 것'으로 보는 관점을 품고 있다. 위험한 시선이다. 장애가 개인의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살해되고 차별은 정당화 된다. 장애라는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이다. 장애학생은 보호받아야 할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똑같은 학교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학생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들’이 ‘복지 서비스’보다 우선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주. 다가오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학교가 내건 슬로건이다. 일주일 동안 장애학생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야심찬 행사가 준비됐다. 학교 본관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를 비롯한 캠퍼스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말이 나올 법하다. 장애학생들이 원하는 건 일방적인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임을 학교는 진짜 모르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저 불편한 시선은 비단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장애,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의 산물이다. 장애문제를 권리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 학교가 장애대학생 교육복지의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다는 ‘비보’는 그래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이 슬픈 소식 속에 장애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이 그대로 투영된 것만 같아 서글프기만 하다. 곧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다. 아니 ‘장애차별 철폐의 날’이다. 이 날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기에 앞서 나는 행사준비에 분주한 학교당국과 우리사회에 익숙하지만, 낯선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과연 우리는, 장애를 아는가?
2017-06-27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곧 총선이다. 정당들 모두 ‘청년문제’의 대책이 될 법한 공약들을 내걸었다. 새누리당은 맞춤형 복지정책,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MB의 ‘추억의 약속’ 반값등록금 실현, 진보신당은 일자리의 질적 개선을 위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 일자리 수 늘린단 얘기는 당연히 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자. 청년들의 삶이 말도 안 되게 고달파진 건 꽤 오래 묵은 일인데 이제야 ‘청년’이 선거의 화두가 된 것은, 권력을 쥐었던 정당들이 이름표를 슬쩍 바꿔달고 과거를 모른 척해야 할 만한 위기를 맞은 사정 탓이고, 지난 10.26 보궐선거 때 경험한 2030의 의외의(?) 표심 때문이니까. 청년에 대한 이전의 방관, 혹은 단순한 연민에 비하면 반가운 소식이긴 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청년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 문제적 상황이 여러 가지 사회문제 중에서 하나의 ‘부분’을 차지할 뿐인 것처럼, 혹은 청년이라는 존재가 사회적 소수 집단인 것처럼, 그래서 마치 무언가 베풀어 줘야하는 대상처럼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어떤 ‘유행’처럼. 취업, 취업, 일자리, 일자리. 청년문제의 핵심. 대학을 나오고 화려한 스펙과 영어성적을 가져도 도무지 취업이 어려운 것이 문제. 청춘콘서트,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의 ‘청춘류’ 책들이 인기몰이를 한 이유도 이 취업의 곤란함에서 시작됐다. 맞다. 그래서 정당들의 공약에서도 일자리 ‘수’를 늘리겠다는 선언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로, 취업문제만 해결되면 만사형통한 걸까? 이화여대 졸업생과 학생들이 청년실업 해결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취업을 했냐, 안했냐로 한 청춘에 대한 질문이 끝나버리는 요즘. 하지만 취업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자 모든 해결의 열쇠인 듯이 말하는 것도 나는 ‘유포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버거워하는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위로란, “젊은 패기로 다시 도전해서 취업에 성공하라 내지는 창업하라(!)” 정도에 머물면서, 취업 혹은 사회적 성공이, 그 바늘구멍의 통과가, 지금 피폐한 삶의 종지부인 것처럼 기존의 권력과 미디어는 반복해서 알린다. ‘취업만능주의’가 유포된 거짓말이 아니라면 취업에 성공한 청춘들에게서는 “취업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란 반가운 소식이 전해 와야 할 텐데, 내 주위에서 그런 해피엔딩은 흔하지 않았다. 취업한 친구들에게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재미없다” “피곤하다” “그냥 그렇지 뭐” 같은 삶에 대한 무기력한 냉소들이 더 많다. 경쟁의 문을 통과시켜서 승자 패자를 갈라놓았는데, 결국 ‘승자의 스토리’도 실종된 상황. ‘취업여부’보다 이 ‘미스테리’가 바로 우리 청년문제의 핵심이다. 일자리 ‘수’만이 중요한 게 아닌 이유다. 딜레마다. 취업을 못하면 돈을 벌 수 없고, 취업을 하면 돈‘만’ 벌면서 살아야 하는 것. 취업을 하기 전엔 스펙 마련과 학점관리, 영어공부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고, 취업을 하면 대출이자상환, 야근으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면 저임금과 고용불안정에까지 시달려야 한다. 정규직이라 해도 야근과 직장 내 경쟁, 조직생활이라는 ‘감정노동’으로 파김치가 돼서 주말만을 기다린다.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보다 하루를 ‘견뎌내는’ 사람이 더 많다. ‘취업’이 우리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본의 아니게 잊혀진 것이 있다면 그건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취업도 당연히 ‘행복’하려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간 행복할 ‘여유’가 없어져버렸다. 삶이 너무 팍팍하다. 외롭다. 취업 전이나 후나, 마음에 조금의 틈이 없다. 당연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돌봄과 관심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마저도 성실히 접근할 여유가 통 없다. 돈이 문제지만, 돈이 있어도 말이다. “이게 사는 건가?”하는 허무한 질문이 속 깊은 곳에서 툭하고 차오른다. 지금처럼 ‘삶’을 이야기 하는 게, ‘여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유치하거나, 혹은 그저 급진적으로만 보인다는 게 ‘현실’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이제부터의 새로운 요구란, 그리고 새로운 정치란,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 슬로건을 제안해본다. “우리 삶에 시간을 보장하라!”고. 청년문제는 사실 ‘모든 것’의 문제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한 사회의 기획이 아닌가. 지금 우리라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의 여유를 찾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볼 여유, 친구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여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여유, 사랑을 할 여유, 삶을 고민할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에게나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유시간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정책적으로 본다면,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함께, ‘노동시간 단축’이 청년정치의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일자리 수에 그치지 않고,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민이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질’의 평가 기준은 그 동안 임금이나, 고용안정의 차원에서 이야기 돼왔지만, 더불어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의 ‘인권적 차원’의 문제마저도 고려, 소망, 상상하게 되기를 바란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 ‘수’를 늘리는 문제와, 최저임금인상, 나아가서 기본소득실현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맥이 닿을 것이다. 이번 총선에 눈을 부릅뜨고 공약들을 뜯어보자. 어느 정당이 우리의 시간을 보장할지.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서도 계속 생각하고, 요구하자. 68혁명의 그들이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고 했듯, 우리의 모든 것, 빼앗긴 시간을 돌려달라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인 ‘삶’을 원한다고. 도대체가 이게 사는 건가? “우리 삶에 시간을 보장하라!”
2017-06-27 | hrights | 조회: 308 | 추천: 0
김한빛/ 청년 칼럼니스트 총학생회 선거가 끝났지만 전남대 학생들은 지금 누가 학생회장인지 모른다. 3월의 법원의 판결 후에나 전남대 학생들은 회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법원의 판결과 학생회가 무슨 관계 일까? 현재 운동권 학생회인 "액션"은 비운동권 학생회인 "전설"에 대하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마쳤다. 그리고 "전설"은 "액션"에 대하여 '총학생회 명의도용죄'로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최소한 3월의 직무집행정지 판결 후에나 양측 중 진정한 총학생회 관련 문제가 일단락된다. 이러한 문제는 기성세대들의 선거에서나 발생될법한 문제들이지만 대학 학생회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자유당 시절의 선거 모습을 보여주는 학생회 선거 양측의 이러한 대립은 2010년 총학생회 선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남대 학생회는 운동권출신의 학생회가 단독 선거로 전남대를 이끌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 학생들은 기존의 운동권 대신 새롭게 전남대를 설계 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전설'이라는 비운동권 출신의 학생회를 새로운 학생회로 선출한다. 이 와중에 '총학 간부 뉴라이트 홍보물 부착 사건', '사회대 선관위 자질 거론 사건', '개표 중단' 등 많은 논란들이 발생했다. 전설측이 당선된 후에도 1년 동안 운동권출신의 단대학생회와 중앙학생회관의 불편한 관계는 지속되었고 크고 작은 많은 잡음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번 학생회 선거도 마찬가지로 여러 번의 선관위의 경고 조치, 서로에 대한 비방, 후보자 자격 박탈, 투표함 분실 사고 등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정치인들에 뒤지지 않는 포퓰리즘 정책 총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정치인들은 표심을 얻기 위해 국민들에게 다양한 공약들을 제시 하고 있다. 표심을 의식하다 보니 아무래도 포퓰리즘적 공약들이 남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포퓰리즘적 정책은 비단 국회에서만이 아니라 대학에서도 남발되고 있다. 전남대학교에 BTL기숙사가 만들어진 이후에 끊임없이 기숙사 의무식사 제도에 대하여 학생들은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후보자들은 매번 의무식을 폐지하겠다고 공약을 제시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2000명이 넘는 기숙사 학생들은 의무식으로 식사를 한다. 사실 기숙사 의무식 문제는 학교에서 미숙한 계약체결로 인해 발생된 문제이기 때문에 학생회역량 밖의 문제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후보자들은 의무식 해결을 가장 큰 공약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이밖에도 학점포기제, 학생이 뽑는 총장 등 실현 가능성이 낮은 공약들을 제시하고 있다. 선거 투표장에서 투표에 참여한 학생에게 학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 사진 출처 - 아시아투데이   중립성을 잃은 선관위원회 매년 학생회 선거가 되면 선관위원회가 만들어 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관위 구성은 중립성을 잃은 선관위다. 선관위원장은 단과대 회장 중에서 뽑지만 결국 그해 총학과 같은 출신이 선관위원장을 맡게 되고 구성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립성을 잃은 선관위는 매번 기준 없는 경고 조치 내지 심한 경우 상대 후보자 자격 박탈이라는 징계 조치를 한다. 결국 이러한 제도상의 결함은 보복적인 악순환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2010년에도 2011년에도 마찬가지로 중립성을 잃은 선관위는 선관위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성장통을 잘 극복했으면 많은 사람들은 총학생회와 국회의원의 역할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회의원은 법 제정을 통하여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실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총학생회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권리가 없기 때문에 역할이 다르다. 총학생회는 학생들을 대표하여 학생들이 겪는 문제를 학교와 사회에 알리고 시정을 요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학생들 개개인으로는 본인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타크로스 같은 공약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본보기가 없기 때문인지 학생회 선거는 많은 부분들이 기성세대의 선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의 선거 참여는 어른들의 선거 투표율만큼이나 매우 낮아 매번 연장 투표를 한다. 또한 토론과 대화보단 운동권, 비운동권식의 이념에 따라 투표를 한다. 더욱이 학생들은 후보자들의 정책과 관련한 토론은커녕 구체적인 공약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 학생들이 공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정선거의 시비를 없애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중립성이 있는 선관위를 구성해야 한다. 선거가 있기 두 달이나 세 달 전부터 선관위를 모집하여 구성하거나 학교 홍보대사 등을 활용한다면 이러한 선관위 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지금 대학 학생회 선거의 문제들은 팔구십년대의 학생회의 모습을 벗어나기 위한 성장통인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와중에서 기성세대의 잘못된 선거 문화를 배우기보단 대학생다운 선거 문화를 형성했으면 한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대학의 선거 문화를 배우는 날이 오고 이를 통해 사회의 여러 곳에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나왔으면 한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72 | 추천: 0
김새봄/ 객원 칼럼니스트 사랑에 무슨 자격이 있겠냐마는 삼포세대인 현 청년들에겐 예외가 있는 법인가보다. 최근 몇 주간 한 사랑의 고백이 내내 가슴을 쳤다. 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백진희가 윤계상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였다. 짝사랑 때문은 아니다. 곧 떠나갈 연정의 대상의 행보 때문만은 아니다. 거절당한 씁쓸한 사랑의 뒷모습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청년 백수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백수의 사랑에 대한 짧은 고찰이다. 하이킥 3의 백진희는 나를 포함한 이 시대의 청춘들의 가슴 아린 친구다. 반년 만에 가게 된 고기집에서 자신의 학교 생활은 온통 알바했던 기억뿐이라며 울먹이다가도 그 와중에 고기 몇 점을 입안에 우겨넣는 친구, 토익 900에 각종 자격증만 서너 개임에도 서류만 200번 면접만 50번 떨어졌다는 친구, 첫 보건소 인턴 월급을 감사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보다 학자금대출 및 이자를 갚는 데 써야하는 친구, 고시원에 쫓겨나 하선네에 얹혀살면서 하이브리드급 절약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 친구다. 그런 백진희에게도 사랑은 찾아온다. 삶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사랑은 온다. 허나 그 사랑, 참으로 서글프다.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이 서글프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로부터 오랫동안 거절당해왔던 백수로서의 경험은 그녀가 누군가와 관계 맺는 방식조차 바꿔버린다. 학교를 졸업한 뒤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 나선다. 사회에서 지위와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손을 청한다. 백수는 그 청을 여러 번 거절당한다. 200번의 서류에서, 50번의 면접에서 거절당한다. 그 실패와 좌절, 위축과 소외감은 사람을 바꿔버린다. 이것은 개인이 나약하여 극복하지 못한 개인의 실패담으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것이다. 먼저 취직한 친구들과의 모임자리에서, 잘 나가는 선배들과의 만남에서, 나보다 앞서나가는 후배들의 소식에서, 내 삶의 새 시작의 요원함이 너무도 아득해질 때, 거대한 사회에서 나 하나 몸 둘 곳 없는 사회의 황량함에 누구든 처량해지기 마련이다.   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88만원 세대 백수 백진희 사진 출처 - 뉴시스   백진희도 그랬다. 갈 곳 없어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먹고싶은 저녁메뉴 하나 말하지 못했고, 집주인과 싸우고 나서도 갈 곳 없어 옷수거함 옆에 밤새 쪼그리고 앉아있으며 자신의 현실을 감당해내지도 못할 자신의 화에 대해서만 분을 삭일 뿐인 그녀였다. 긴 백수생활이 그녀에게 남긴 것은 학자금 대출의 빚뿐 아니라 주눅든 성격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백진희의 사랑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대체 왜, 시작도 하기 전에 감정을 키운 자신을 탓하고, 지금 아픈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도 않은 채 거절한 연정의 대상에게 부담을 덜기 위해 자신의 감정은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거듭 변명해야만 했을까. 대체 왜, 거절하느냐고 화조차 못 냈던 것일까. 르완다로 떠나는 당신을 왜 붙잡지 못했을까. 아니,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일까. 단지 백진희란 개인의 사랑법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긴 백수생활 동안 그녀가 사회로부터 받아왔던 거절의 역사가 사랑에 있어서도 그토록 그녀를 두렵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가슴 아팠다. 시작할 때부터 거절을 두려워한 그녀가 참 아팠다. 백수도 사랑을 한다. 삶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사랑은 온다. 백진희의 사랑을 응원하는 까닭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백진희 그녀가 취업만큼이나 사랑에도 최선을 다하는 당당한 모습을 TV에서 계속 보고싶다는 점이다. 지금 그녀와 같은 처지의 우리가 현실을 살아내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절당할 때 우리도 거절당했고 그녀가 울 때 우리도 운다. 그녀가 웃을 때 우리도 웃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 우리의 손도 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꿈을 위해 살아갈 시간을 더 버는 일이 아닐까.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더 깊어질 사랑의 충만감을 기대할 일이고, 더 높이 비상할 미래의 자신을 꿈꾸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백수들의 도전과 백진희의 사랑을 위하여!
2017-06-27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0
‘우리 심정 누가 알까요’ 벙어리 냉가슴 아파트 경비원 김종천/ 객원 칼럼니스트 40여 년 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개탄하며 근로기준법전을 손에 들고 분신했다. 그가 불타오르며 외쳤던 말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 그의 분신 이후 노동계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분신 이후 40년이 지난 오늘날, 근로기준법이 도리어 노동자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 그 피해자는 바로 ‘감시단속적 노동자’(이하 감단 노동자)들이다. 근로기준법전은 감단 노동자를 ‘감시와 단속업무를 주 업무로 하며 상대적으로 정신적․육체적 피로가 적은 업무에 종사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로 경비원이다. 근로기준법 제61조는 감단노동자들에게 근로시간, 휴가, 휴일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근로시간의 상한규제가 없어짐에 따라 무한정의 장시간 노동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진다. 실제로 아파트 등 건물을 관리하는 경비직의 경우 24시간 맞교대 근무가 일반적이고 교대조가 바뀌는 경우 등은 48시간을 연속해서 근무하기도 한다. 일요일이나 명절도 휴일로 적용되지 않아 1년 내내 격일교대제로 근무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임금도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된다. 야간근로수당 등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하는 근로시간에 대한 모든 시간외 가산근로수당을 받을 수 없고, 휴일 근로에 대한 가산수당도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최저임금법에 의한 최저임금 규정도 감액 적용 된다. 지난해까지 최저 시급액 4320원에서 20%가 감액된 3456원의 시급을 받았다. 이는 노동 당국이 이들의 업무 강도가 낮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임금의 최저 수준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최저임금법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다. 감단 사업자가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주려면 고용노동부로부터 감단 노동 사업장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때 가장 핵심적인 승인 요건이 ‘감시단속 업무 외에 다른 업무가 중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순찰시간 외에는 경비박스에 앉아서 감시만 한다는 조건으로 감단 사업장 승인이 떨어지지만, 이러한 조건이 지켜지는 관리사무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평상시 접하는 거의 모든 경비원은 감시업무 외에도 쓰레기 분리 및 수거, 주차대행 및 주차관리, 건물 및 단지 청소, 택배 대리 수취 등의 여러 가지 잡무에 시달리고 있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의 사각지대. 이른바 감단직 노동자인 아파트 경비원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또한 감단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부당해고의 위협과, 인격적 모멸에 무방비로 방치되고 있다. 그러나 고용불안 우려 때문에 스스로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에서 감단 노동자의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최저시급을 적용하려는 입법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히려 감단 노동자들이 이에 반발했다. 임금을 인상하고 환경을 개선하려다가 비용부담으로 인한 대규모 해고사태가 닥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불안한 고용 때문에 임금 인상마저 스스로 거절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고용노동부는 몇 차례의 토론 이후인 지난해 11월 7일 최저임금 90% 감액적용을 골자로 하는 최저임금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입법예고하였다. 그리고 12월 21일 개정령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2012년 1월부터 2014년 말까지 감시단속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은 90% 감액 적용된다.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노동시간의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갖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와 세계인권선언 제42조의 내용이다. 감단 노동자를 옥죄는 현행 근로기준법은 1948년에 발표된 선언문에 담긴 60년 전의 인권의식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감단 노동자는 대부분 고령이다. 낮과 밤이 바뀌는 근무형태는 다른 어떤 연령보다도 고령자들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또한 휴게와 휴일에 대한 규정의 적용 제외는 인권의 한 범주에 속하는 ‘쉴 권리’를 짓밟고 있다. 자본과 고용주 앞에서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법밖에 기댈 곳이 없다. 그들을 위한 근로기준법 현실화가 시급하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609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