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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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아내와 나는 연애시절부터 이런 저런 영화보기를 좋아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조용하고, 내용이 풍부하고, 감미롭고, 때론 감정의 역류를 억제할 수 없는 것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때리고, 부수고, 웃기는 것들이다.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다.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내가 좋아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아내가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감성이 허리우드 영화에 잠식된 결과겠다. 어제 밤 아내와 ‘브로크백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아내는 친절하게 내게 말한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있데.” 아내의 설명은 여기까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부류를 알고 있는 아내는 내가 영화를 보며 지루해하거나 중간에 영화보기를 그만둘까봐 사전포석을 한 셈이다. 끝까지 보라고. 아니나 다를까. 지루하다. 대자연의 풍부한 영상, 한 컷을 잡기도 어려울 아름다운 화면 이것만으로 나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두 사내가 나온다. 두 사내가 같이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한다. 양치기 청년들. “늑대가 나타났어요.”라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든 두 사내. 도입부를 보며 나는 “저 많은 양들을 어떻게 다 관리한데. 늑대가 나타나 한 마리 물고 가도 모르겠구먼.”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조금 지났다. 한 사내가 식량을 가지고 오다 곰을 만나고, 놀란 말에서 떨어지고, 짐 싣고 오던 노새 2마리를 잃어버리고, 노새를 찾으러 뛰어가고, 밤이 되어서야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노새와 함께 캠프로 돌아온다. 나머지 한 사내가 피 흘리고 있는 사내에게 얼굴을 닦으라고 수건을 준다. 말없던 한 사내가 조금 말이 많아졌다. 술을 같이 마신다. 둘에게 양은 이미 관심 밖이고 술 마시고 놀다 그만 캠프에서 나동그라진다. 한 사내는 텐트 안에서, 한 사내는 불 옆에서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흐른다. 나는 잘 그려 놓은 서부극정도로만 상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난데없는 이야기가 눈앞에 시작되고 있다. 거친 사내 둘이 텐트 안에서 서로의 욕구를 드러내고, 웃통을 벗고 풀밭에서 뒹군다. 그리고 양들의 방목이 끝나자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양치기도 끝나고 둘은 헤어진다. 더 거칠어 보이던 사내가 다른 사내를 보내고 나서 헛구역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울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엔딩...   답답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남는 느낌이다.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는 느낌. ‘우리의 히어로가 지구를 구하는 걸로 끝내면 더 이상 잔상도 없고, 깔끔하고, 얼마나 좋아.’라는 푸념도 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들리지 않게... 인간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관심사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일 것.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그려도, 예컨대 그것이 그림이건, 소설이건, 영화이건 일단 비판과 비난을 받을지언정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 한. 최근 개봉되었던 한국 영화 중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란 영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7가지의 사랑 얘기가 있다. 그런데 유독 관객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던 사랑 얘기가 하나 있다. 극중 천호진이 분한 조 사장의 사랑 얘기가 그것이다. 왜?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한 장면  동성애. 동성애의 역사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 종족번식을 위한 목적 외의 목적으로 사랑행위를 하는 동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행위가 동물의 사랑행위와 그 목적에서부터 다른 마당에, 자신의 사랑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물과 비교하며 자연의 섭리 운운하는 것은 비정상이고 몰상식이다. 이미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존엄한 존재임을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그 존엄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 형식을 스스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도 자신이 가진 자연스런 감정에 따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하는 두 사내의 만남을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가로 막고 있던 장벽은 무엇일까.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비로소 만남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한 장벽은 무엇일까. 14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두고서만 사랑을 가능하도록 한 장벽은 무엇일까. 기껏해야 1년에 한번 아니면 2년에 한번 만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장벽은 무엇일까. 가족과 헤어져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도록 만드는 장벽은 무엇일까. 이렇게 만나지만 두 사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만드는 장벽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죽음으로 서로를 갈라놓는 장벽은 무엇일까. 만년설 뒤덮인 와이오밍 주의 수려한 자연 경관 보다 아름다운 두 사내의 사랑. 이런 두 사내의 사랑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과연 당신은 두 사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해본 적은 있느냐고.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607 | 추천: 0
어제 교회구역모임에서 술을 좀 마셨다고, 일요일 아침에 아내가 서더리탕을 끓였습니다. 체중을 줄이고 싶어서 아침밥은 반 그릇만 먹으려고 했는데, 얼큰한 국물 맛이 혀에 착 감겨듭니다. 기름이 우러난 생선 국물을 연거푸 떠먹으면서, 남겨 두었던 밥 반 그릇을 마저 먹기로 합니다. 오늘은 예배 후 점심밥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아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서더리탕 국물을 연신 입으로 퍼 나릅니다. * 서더리탕       - 원래 말은 "서덜", 서덜은 생선의 살을 발라낸 나머지(알, 뼈 등)를 말한다.         서더리탕은 살을 발라내고 알, 뼈, 내장, 아가미 등으로 끊인 탕을 일컫는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을 떠올립니다. 회를 먹고 남아서 싸가지고 온 서더리탕이랑 밥 한 그릇이 이렇게 근사한 한 끼 식사가 되는구나! 이틀 전 부모님께 식사대접을 하려고 찾은 회집에서는 참 많은 요리가 차려져 나왔습니다. 소위 ‘스끼다시’라는 요리들이.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닌데, 그 식당 음식은 입에도 잘 맞았습니다. 덕분에 부모님과 아이들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었지요. 다들 식사를 잘 하셔서, 맨 나중에 나오는 서더리탕은 재료를 포장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 여름엔 오이 하나로도 된장 찍어서 밥 먹을 수 있어야 돼.” 이렇게 말하는 예쁜 아내의 말에 나도 찬성합니다. 우리는 될수록 단순하고 좀 느린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관습에 길들여진 부분도 많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은 제법 그럴싸하기를 기대하지요. 우리가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드셔야 하는 음식이니까요. 그래서 요리가 잘 나오는 그 회집을 찾아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서더리탕 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그날 식사가 좀 과했던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낸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생활을 ‘문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소위 문명화된 세계는 도시화로 표현되는 세련미가 우선 눈에 띕니다. 먹을거리나 주거 형태가 보다 편리하고, 아름다워 보이지요. 외국은 고사하고, 어쩌다 노원구 롯데백화점이나 강남역의 어느 거리를 걸어보아도, 내가 사는 동네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여러 가지 상품들과 또 그런 상황에 어울리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들....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기술이 발달하고 경제가 살아난다고 들 말하지만, 보다 맛있게 먹고 보다 세련되게 살아가려는 가운데 우리는 어떤 만족감에 도달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우리는 욕구를 내세우느라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단순하고 정직한 국물 맛의 만족감 때문에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화려한 요리는 어떤 ‘문명’일까요? 내가 찾고 있는 하느님은 이런 문명 속에서 더 복잡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을 맛으로 비유한다면 깨끗한 물 맛 이나 바람의 맛일 것 같습니다. 반찬 한 가지로 손님을 대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찌개 하나로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익숙해져 있는 관습을 쉽게 덜어내지 못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 걸음씩 천천히 가야겠지요.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725 | 추천: 0
나는 새벽의 상상력이 좋다. 하루의 일과를 곱씹어보거나 그리운 이름을 떠올려 보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잡문을 끄적거릴때 새벽의 고요가 가져다주는 마음속의 풍경은 마치 도화지 같아서 나는 늘 새벽의 풍요위에 상상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간혹 여명(黎明)을 창으로 불러 함께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농익은 살구, 새벽비에 떨어지듯 현관을 “툭” 치고 바삐 돌아서는 신문 배달부의 부지런한 생산력에 감사하거나 우는듯 혹은 웃는듯 새벽 골목을 헤매이는 폐지 줍는 노인들의 리어카 소리를 리듬처럼 듣고 난 후이다. 또한 지금까지 나의 부족한 창작물의 대부분은 새벽의 고요가 부화시킨 어린 생명과 같은 것이므로 새벽은 나에겐 중요한 생산 수단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 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독일 월드컵 16강 경기를 틈틈이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현재 스코어 1:1 ... 대단하다. 토레스와 비아, 라울의 스페인 공격진은 정교한 패스워크와 공 보다 빠를 것 같은 스피드로 프랑스를 압박하고 노쇠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프랑스의 아트사커는 비에이라의 발끝에서 이어진 리베리의 결정력으로 섬세하게 살아난다. 이 정도의 경기라면 나의 중요한 생산수단인 새벽을 통째로 반납해도 괜찮을 만큼 축구의 묘미는 충분하다. 돌이켜 보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재미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3백과 4백이 혼재된 수비라인은 간간이 상대방 포스트 플레이어에게 결정적 기회를 허용했고 조재진의 머리에만 의존하는 듯한 원톱 시스템의 공격진은 때론 단조롭거나 무료하기도 했다. 토고전과 프랑스전에서 얻었던 이천수. 안정환. 박지성의 골에는 잠자는 딸 아이가 울며 나올만큼 환호했고 스위스전 심판의 어설픈 판정(내가 보기에 오심은 아님)에는 육두문자가 절로 나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 새벽에 전국 150만 씩이나 되는 국민들이 잠시 붉은악마가 되어 거리응원을 펼치거나 2006년 한해를 모두 월드컵에 바친 방송 3사의 충성어린 경쟁과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기뻐하는 프랑스 선수들 사진출처 - 네이버 예선전을 포함한 월드컵 기간동안 한국은 세 명의 감독을 맞았었다. 그중 코엘류 감독은 월드컵 예선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그것이 여론이 되어 사임했으며 이어 감독으로 선임된 본프레레도 코엘류와 같은 동병상련을 맛보아야 했다. 코엘류 감독은 떠나면서 국가대표 팀의 총 연습시간이 약 72시간정도라며 투덜거렸고 본 프레레는 자국에서도 한국에 대한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 약 9개월을 남겨두고 부임한 아드보카드 감독에 대한 언론의 애정은 이전의 감독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국가대표팀의 전 경기를 봐 왔던 나는 그가 다른 감독에 비해 월등히 나은 면을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언론은 내가 찾지 못하는 그의 장점들만 일일이 나열해 갔다. 이번 독일 월드컵에 대한 방송사들의 상업적 경쟁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이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화면에 오직 캐스터나 해설자의 상품성에 의존하여 채널을 선택해야 하는 답답함과 월드컵 특집 뉴스나, 그것도 모자라 거의 24시간 월드컵 관련 편성 까지 했던 방송사의 과도한 광고경쟁은 붉은악마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구호와 맞물려 월드컵을 정작 축구는 사라지고 돈벌이와 묘한 애국주의만 남는 공허한 제전으로 만들었다. 명절 대목을 준비하는 재래시장 상인처럼 아마도 방송 언론사들은 아드보카트의 장점만을 부각시켜 여론을 축구에 대한 환각으로 몰아넣고 월드컵한탕 대목을 위한 담합과 경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은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송 3사가 들인 돈이 500억이 조금 넘고 수익도 그 정도라니 그만하면 된 듯 싶다. 한국팀이 16강 8강의 무대에서 2002년 4강팀의 면모를 보여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최대 800억 이상의 수익을 예상했다던 방송사의 기고만장한 상업주의적 행태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고 축구의 재미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붉은 티를 입은 어린 꼬맹이의 “대~한민국”을 더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90년대를 관통하면서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극심한 내부적 갈등에 놓여 있다. 사회적 사안 하나하나마다 첨예하게 갈리는 의견의 대립은 지난해 유행했다던 상화하택(上火下澤)의 형국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올 하반기를 맞이해야 한다. 단 한 치의 관용조차 용인되지 못하는 현재임에도 전 대회 4강팀의 16강 탈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다. 선수들의 투혼에 불타는 헌신과는 별개로 애초에 16강에 못들 전력이었다면 지금처럼 호들갑 떨지 말았어야 했고 16강 전력인데도 탈락했다면 한번쯤 의문을 던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24일 새벽(한국시간) 하노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스위스에 0-2로 패한 태극전사들이 경기가 끝난 후 허탈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아쉽지만 잘 싸웠다”는 의견이 전부인걸 보면 그동안 없었던 관용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역시 지단이다 3:1 프랑스 승 달빛에 기대어 서로의 칼날을 맞세우다가 상대방 호흡의 빈틈을 여지없이 파고들어 승부를 가르는 무인의 단 일초식 처럼 축구는 저렇게 하는 것이다. 저 조각같이 빚어내는 숨막히는 승부의 경연을 보기위해 나는 이 새벽의 생산을 중단할 것이고 여전히 지단을 가진 프랑스는 위대하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655 | 추천: 0
기자라는 인간들은 두 종류의 공상에 종종 빠져든다. 하나는 특정 사건이 지금 바로 내 앞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지금 타고 가는 비행기가 ‘공중납치’를 당한다면, 같은 상상이 대표적이다. 그 상상 속에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해피 엔딩’의 결과다. 그 과정에 ‘기자인 나’가 적극 개입한다. 드디어 한국 비행기를 테러 대상으로 지목한 이슬람 과격단체가 하필이면 내가 탄 비행기를 공중 납치했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나 혼자만’ 이 단체의 구성원들과 단독 인터뷰한다. 비행기 교신 등을 빌려 발아래에 있는 신문사 혹은 방송사에 독점 보도한다. 그 보도는 다시 전 세계로 퍼져 간다. ‘세계적 특종’이다. 게다가 ‘기자인 나’는 테러단과 당국을 잘 설득해 공중납치사건을 잘 마무리한다. 지상에 발을 내리자마자 나는 풀 스토리를 쓰기 위해 신문사 또는 방송사로 달려간다. 이 즐거운 상상을 깨트리는 결정적인 훼방꾼이 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기자’다. 그러면 산통 다 깨진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싣고 가는 비행기가 공중납치당해 봐야 아무 쓸모없다. 아마도 대표로 뽑힌 기자가 인터뷰해서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고, 각 언론사가 거의 똑같은 보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납치는 기자들이 싫어한다.     또 다른 상상은 특정 문서가 지금 바로 내 손에 들려져 있는 일이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인데, 예컨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미 중앙정보국의 수사 내용 일체가 담긴 기밀문서를 확보했다고 상상해 보라. 기자라면 이 문서 하나만으로 거의 한달 이상을 이리 쓰고 저리 써가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낼 궁리부터 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상상은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벼락 맞을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특종에 눈이 멀었다 해도 성수대교를 무너뜨리거나 삼풍백화점을 자빠뜨릴 힘이 기자에겐 없다. 천만다행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 사회는 기자 수만큼 많은 대형사건사고를, 뉴스 보도 시간대별로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상상은 종종 현실에서 발생한다. 기자가 보도를 할 때 동원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의 말이고 또 하나는 기록된 문서다. 많은 경우 두 가지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예를 들어 한 거물 정치인이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취재한다고 하자.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돈을 준 사람, 또는 돈을 받은 사람, 또는 돈을 주고받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런 증언은 다른 관련자들이 부인할 가능성이 높다. 공방 속에 사실 여부가 공중에 떠버리는 경우도 많다. 진술에만 의존하는 경우, 실체적 진실은 오리무중에 빠지기 십상이다. ‘황우석 사태’ 초기, 황우석 교수와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장의 엇갈리는 진술 사이에서 진실의 추는 좀체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따라서 기자들은 진술 말고 한 가지 더 찾아내려 한다. 예컨대 돈을 준 사람이 보관하고 있는 영수증, 돈을 받은 사람의 다이어리에 기록된 약속 메모, 돈을 주고받는 현장을 찍은 사진 등 ‘문서화된 증거’다. 대부분의 경우, 취재는 ‘진술’에서 시작해 ‘(문서 등의) 증거’ 확보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미 나의 수중에 해당 정치인이 누구한테 돈을 받았는지 꼼꼼히 기록한 개인 비밀 장부가 있다고 치자. 취재는 이미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장부가 통째로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만한 내부 관련자의 ‘진술’ 정도만 있다면, 흔들림 없는 특종보도를 할 수 있다. 특정 정치인이 한 정당의 내부 회의에서 대단히 폭발성 강한 발언을 했다고 치자. 같이 참석한 다른 정치인의 ‘전언’보다는 그 회의를 기록한 ‘속기록’이 보다 정확한 보도 근거가 된다. 아예 정부가 공인한 문서의 경우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기자들은 이 상상을 종종 실행에 옮긴다. 가장 일반적인 경로는 ‘내부자’로부터 그 문서를 얻는 것이다. 내부자를 잘 구슬리는 경우도 있겠고, 그 내부자가 먼저 언론사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이 정부기밀문서를 특정 목적을 위해 외부에 유출시키는 일에 대해선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특정한 이해를 위한 것인지, 양심적 내부고발자인지 등이 특히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다. 기자들이 직접 그 문서를 ‘구하는’ 일이다. 공공문서, 기밀문서 등을 내부자를 통하지 않고 구하는 방법은 딱 한가지다. 훔치는 것이다.(정보공개청구의 방법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그 ‘실효성’이 적다) 요즘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80년대 및 90년대 초에 취재현장을 누볐던 선배기자들이 가끔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후일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꼭 들어간다. 검사실에 들어갔다가 마침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내사 자료’를 통째로 들고 와, 기사가 궁할 때마다 하나씩 터트렸다는 식의 무용담이 많다. 지금까지 들은 ‘최고의 도둑질’은 다음과 같다. 물론 실제 사례다. 전언이니만큼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것이다. 한 유력 정치인의 뒤를 캐던 기획취재팀이 어느 대목에서 ‘막혀 버렸다.’ 그래서 그 정치인의 비밀개인사무실을 급습하기로 했다. 그 사무실의 소재를 파악은 했는데, 도대체 그 곳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은 ‘검사 사칭’이었다. 사무실에 우르르 몰려가서 신분증 비슷한 것을 제시했다. 압수수색 나왔다고 통보했다. 그 안에서는 대번에 난리가 났다.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관련 문서를 모두 문서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밖에서는 또 문을 두드리면서 문서파기하면 더 큰 죄가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문은 열렸으나 대부분의 문서는 종잇조각이 된 상태였다. 기자들은 (화난 체 하며, 또는 실제로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남은 문서와 휴지통을 들고 나왔다. 파쇄된 문서를 이리저리 꿰맞추느라 아주 힘들었다는 게 그 일화의 마무리다. 공무원 사칭, 무단침입, 절도 등이  맞물린 범죄행위가 이렇게 기자들 사이에선 ‘낭만의 한 때’로 회고되기도 한다.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한 물품을 상자에 담아 나오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검찰이나 경찰의 휴지통을 뒤진 적은 있다. 가장 압권인 것은 대형 휴지통을 통째로 자동차에 싣고 일단 현장을 빠져 나온 뒤에 집이나 사무실에 가서 이를 뒤지는 일이다. 아무 것도 건져지는 게 없다면, 그 냄새며 뒤처리가 더 곤욕스럽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90년대 후반 한 언론사 기자가 검사실에서 문서를 빼오다 걸려서 기소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엔 당연한 일이다. 취재과정이 취재결과를 규정한다.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도 용서되는 종류의 권능은 기자 아니라 누구에게도 없다. 일반적으로 이런 ‘절도’ 및 ‘사칭’ 행각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게 좋은 기자가 되는 첫 번째 덕목이다. 진짜 기자라면 그 정도의 취재윤리는 지켜야 한다. 그런데 진짜 기자가 답해야할 질문은 한 가지 더 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사례에 등장하는 ‘도둑질하는 기자’들은 어떤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와 권력기관이 배타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어떤 정보들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도무지 시민사회에 알려지지 않는다. 민주주의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영역과 공간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무심결에 검사실에 들어가 수사문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손버릇’이지만, 대형권력비리를 저지른 게 확실한 정치인의 사무실에 들어가 문서를 빼내오는 것은 ‘용기’일 수도 있다. 도둑질하지 마라. 국민의 알 권리는 기자들의 나쁜 손버릇을 합리화시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문구가 아니다. 그러나 도둑질해서라도 알려야할 진실이 있다는 점도 가슴에서 지워버리지 마라. 그런 근성과 용기가 없다면 기자도 아니다. 다만 그 행위에 대해선 기자 개인이 철저히 책임지고, 그 결과는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돌리는 게 옳다. - 이것이 내가 ‘많은 고민 끝에’ 정리한 윤리강령이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두 가지 문서를 훔쳐내는 상상을 한다. 첫째, 미군 기지의 대추리 이전과 관련한 한미 당국간 양해각서 및 이 토지에 대한 미군의 마스터플랜이다. 둘째, 한미 FTA 협상과 관련한 미국 및 한국 당국의 협상 전략 보고서 일체다. 그거 훔쳐 오면, 나는 ‘희대의 절도범’이 될 것이다. 아마도 한미 양국 모두로부터 기소당할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두 쟁점 모두 순순히 곧이곧대로 취재해선 결코 실체적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과거의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왔겠지만, 현대의 권력은 ‘정보’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관리, 통제하면서 대중을 길들인다. 그걸 막으려고 언론이라는 게 만들어졌다. 그러니 정보를 관리 통제하는 이들의 의도에만 맞춰 이를 ‘전달’한다면, 언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그 별 쓸모없는 언론에 힘을 보태고 있는 듯 하여 송구하다. 도둑질하는 기자가 아직까진 필요하다. 결국 따지고 들자면, 윤리에도 계급성이 있다. 미국 백인 지배층의 윤리에 맞추느라, 한국 서민층의 윤리를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용기’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739 | 추천: 0
무엇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이 설레는 일이다. 조금은 흥분되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것은 기다림에 대한 희망의 꽃망울이 숨 쉬는 소리와 같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런 설렘과 기다림의 흥분된 마음이 아니라, 참으로 답답하고 벽에 갇혀 버린 듯 한 실존적 상황으로 보인다. 가슴이 아리고, 고통스러워 손을 내밀 때, 옆에서 그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도 손잡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참여 정부는 한˚미 FTA를 빠른 시간 내에 체결하겠다고 발표하였고, 협상이 개시되는 시점에 서있다.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점에 서있는 행동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5천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 사회의 기축을 이루어 온 농민들의 가난과 몰락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데, 일부 언론들은 홍콩에서의 시위를 거론하면서 미국에서 우리 농민들의 폭력 과격 시위가 걱정된다고 친절한 금자씨처럼 걱정(?)하고 있다. 농민들은 이 시대의  소수자가 아니고 다수자이다. 비정규직 문제도 소수자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중요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다수자의 문제다. 그런데 이들이 손을 내 밀어도 아무도 그 손을 잡아 주지 않고 있다. 이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이대로 아무것도 없다면, 결국 이들이 ‘친절한 금자씨’처럼 복수를 하지 않을까 과연 어떤 복수가 나올까 다수이면서 사회적 약자인 이들을 구해줄 기다림은 무망한 것인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처절하게 외치고 몸부림 쳐도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는 그 의지와 맹세는 어디로 가고, 지금 무엇을 하자는 것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동북아 문제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어디든지 침략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문제를 놓고서, 국민의 동의도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농민들의 땅을 강제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부치는 형식적 법치국가의 오만이, 나 스스로 법조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와 미래의 문제이다. 땅을 수용당하고 반발하는 농민들의 숫자가 별로 안 되니 그냥 지극히 소수자의 저항이라고 치부하고 말 것인가. 1,400여 년 전 외세를 끌어 들인 신라는 삼국 통일 후, 온 국민과 함께 힘을 모아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몰아내는 역사를 이룩하였고, 내가 이것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배웠던 것은 한낱 꿈속의 자장가였단 말인가 평화와 자주 국가의 기다림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란 말인가.     헌법재판소는 시각 장애인들의 안마사 자격문제가 평등에 어긋난다면서 위헌 결정을 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다. 길이길이 헌정사에 남을 자랑스러운(?) 결정이로다. 한비자는 ‘동냥은 주지 못해도 쪽박은 깨지 말라’고 몇 천 년 전에 말했다. 그래 그렇게도 시각장애인들이 자신의 거의 유일무이한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안마사의 자격이 그렇게도 큰 떡으로 보이던가. 그토록 힘없고, 오고 갈데없는 약자들을 위한 배려의 미덕이, 지고지순한 평등의 원칙으로  승천하니 이 땅에 힘없는 사람은 전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어진다. 시각 장애인들이 한강에 뛰어드는 장면이 무엇을 웅변하고 있는지 우리는 보고 있지 아니한가. 절대적 절망은 거꾸로 희망의 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암울함이 나의 시간과 공간에 절어 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대학 후배들에게 법을 강의하면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힘주어 나 자신에게 스스로 암시하면서 말해보지만 그것도 위선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은 것은 왜 일까 기다림이 이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 거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689 | 추천: 0
안식년을 구실로 한국 사회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한가한 소리 좀 해볼까 한다. 영국에 살면서 내가 요즘 가장 몰두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만화영화 ‘The Simpsons 심슨가족’을 보는 일이다. 한국의 TV에서도 가끔 방송하던 이 만화영화는 의외로 한국에선 그리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적지 않은 마니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거나 대중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마 만화영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직 보편화되어 있는 까닭에 ‘심슨가족’의 재미를 이해할만한 연령층은 이 작품을 그리 즐겨 보지 않았던 것 같고, 디즈니식의 깔끔하게 다듬어진 만화영화나 일본의 자극적인 만화영화에 길들여진 어린이들에게 심슨가족의 투박한 선과 울퉁불퉁한 캐릭터, 그리고 짙은 블랙유머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을 수 있을 게다.     영국의 위성 채널에서는 ‘심슨가족’을 매일 적어도 세편 이상 볼 수 있다. 나로서는 단조로운 외국의 일상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만난 셈이다. 나는 이 만화영화를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꼭 함께 본다. 아들의 영어 듣기 능력이 나보다 훨씬 나은 까닭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대단히 큰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양식있는 세계인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클린턴과 대결했던 선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심슨 가족이 아니라 월튼네 가족이 필요합니다.” 월튼네 가족. 아마 중년 이상의 세대라면 어린 시절 흑백 화면을 통해 보았던 월튼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인자한 부모와 착한 자식들, 훈훈한 이웃들이 등장하는 도덕교과서 같은 드라마 The Waltons의 마지막 장면은 늘 똑 같았다. 창문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면서 가족들이 서로 ‘굿나잇’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늘 포근하고 애틋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아마도 조지 부시는 월튼가족이 보여주는 가족상이 미국 공화당과 보수 세력이 내세우는 보수적인 가족주의와 부합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월튼네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이 항상 똑같았던 것과 달리 ‘심슨가족’의 경우에는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장면이 매일 조금씩 바뀐다. 직장과 학교에서 서둘러 돌아온 심슨 가족 다섯명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장면이 이 타이틀백의 마지막 장면인데 이 마지막 컷에 늘 기상천외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소파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구멍이 뚫리면서 밑으로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목이 뭉텅 잘리면서 가족들의 얼굴과 몸이 바뀌는 엽기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월튼 가족의 교과서적인 가족상을 좋아하는 조지 부시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그 타이틀 장면만 보고도 기절초풍을 하고 채널을 돌려버렸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심슨가족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     ‘심슨가족’은 여러모로 TV만화영화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우선 등장인물들의 생김새, 즉 아이콘에서부터 드러난다. 주인공 심슨 가족을 비롯해 이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도무지 예쁘다거나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왕방울같은 눈과 뾰족한 머리모양, 툭 튀어나온 입 등을 보면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예쁜 공주와 잘생긴 왕자의 유형을 벗어나지 않는 일본의 만화영화나 귀엽고 앙증맞은 디즈니식 만화영화에 익숙한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심슨가족의 아이콘은 차라리 위악적이다. 이는 이들의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심슨가족은 흔히 보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무작정 선하거나 무작정 악하지 않다. 이들은 때로 매우 이기적인 심성을 드러내기도 하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 가족 자신은 물론이고 이들이 사는 스프링필드에는 늘 크고 작은 말썽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건과 말썽에는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이 만화라는 포장 속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코믹함으로 버무려져 있음은 물론이다. 이 만화 속에도 돈 많고 사악한 사장이 등장하고 어리석은 권력자가 등장하지만 이들도 인간적 약점을 드러내고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무엇보다도 심슨가족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관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보여준다. 예컨대 심슨가족은 동성애자들의 인권 보호에 절대적인 찬성 입장을 보여주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이다. 최근에 본 한 에피소드에는 이 만화영화의 정치적 입장을 은근히 드러내는 대목도 등장한다. 심슨가족이 처음 유럽 여행을 떠나는데 심슨의 딸 리사가 자기 짐 가방에 캐나다 국기 표시를 붙인다. 바트가 왜 캐나다 국기를 붙이냐고 묻자 리사는, ‘최근 미국인들이 잘못된 선택을 많이 한 탓에 유럽인들이 미국 사람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심슨가족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도 저런 만화영화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만화영화를 만든다면 우선 소재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심슨가족 식의 위악적인 블랙 유머의 소재가 될 만한 일들이 거의 하루도 안 빼놓고 일어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화가라면 당장 한편의 기막힌 블랙코미디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소재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재벌 회장이 정치인에게 뇌물을 건네고 그 장면은 공안 기관에 의해 도청 테이프에 담긴다. 다시 그 테이프는 정리 해고된 기관원에 의해 거래 대상이 되다가 세상에 폭로된다. 정부와 언론, 기업들까지 나서서 영웅으로 떠받들던 과학자가 하루 아침에 논문을 조작한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그래도 그 과학자를 구국의 영웅으로 믿는 사람들은 시위를 벌이고 강연을 방해하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한다. 별 새로운 내용도 없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단지 자기들이 믿는 신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교회들이 들고 일어나 영화상영 반대운동을 펼치고 그 덕분에 톡톡히 홍보 효과를 본 영화관 앞은 장사진을 이룬다. 그것  뿐일까. 굳이 만화가들의 풍자적 상상력이 아니더라도 사건 자체가 코미디인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게 한국 사회 아닌가 말이다. 하긴 그렇게 현실이 더 코미디이니까 그런 만화영화가 나오기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757 | 추천: 0
지난 2월 말 가족과 함께 1년 예정으로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생활도 이제 석 달이 다 되어갑니다. 낯설고 물선 이국 생활도 이제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생활에서 가장 불편했던 건 영어나 낯선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동차였습니다. 말이 안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어찌해볼 수 있지만, 차가 없으니 장보러 다니는 일이 정말 난감하더군요. 미국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신발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진짜 신발이 없으니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중고차를 샀습니다. 좀 오래된 차입니다만,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으로부터 거저 얻다시피 했습니다. 3000 CC 6기통짜리인데 지금까지 몰았던 차 중에 제일 배기량이 큰 차입니다. 제 발에는 큰, 미국사람 표준 사이즈 신발인 셈이죠. 한국에서였다면 휘발유값이 1천6백 원이 넘는 이 때에 공짜로 준다고 해도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한국의 절반밖에 안되는 기름값 덕분에 그냥 끌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미국 기름값이 싸다고 합니다만 여기도 요즘은 기름값 때문에 난리입니다. 주유소의 가격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있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연일 고유가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솔직히 ‘기름값이 올랐다고 해도 싸기만 한데 왜들 호들갑이지? 도대체 얼마나 더 싸게 쓰겠다는 심보인거야?’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기야 본래 없이 살던 사람들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차 없이 못사는 사람들이고 한 집에 서너 대씩 차를 굴리는 미국사람들에겐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이 정말 충격 내지는 거의 패닉 상황일 것 같습니다. 여기선 3천 씨씨 차는 기본이고 4천 씨씨 5천 씨씨 차들도 숱하게 굴러다닙니다. 오히려 소형차를 찾아보기가 어렵죠. 하여튼 여기 와서 놀란 것 중에 하나는 ‘왜 저렇게 덩치 크고 배기량이 큰 차들이 이리도 많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이들에게 자동차의 연비는 우선적인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연비가 나쁜 차의 대명사가 미군 군용트럭의 민수용 버전인 허머 H1입니다. 이 차는 미국 환경시민단체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었고 얼마 전 GM은 이 차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 아무리 기름값이 싸기로서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막강한 성능을 자랑하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대명사로 통하던 ‘허머(사진)’의 대표 모델 사진 출처- 세계일보 이렇게 길바닥에 바가지로 기름을 퍼부으면서 달리려고 이라크의 석유가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이렇게 가다간 도대체 어디서 또 석유를 끌어오는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하여간 한국에선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피부로 팍팍 와 닿더군요. 그러다 보니 미국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들도 조금씩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차를 타고 다닐 권리는 있지만 이렇게 기름 많이 먹는 차를 굴릴 권리까지 있는가" 하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동안 석유를 너무 흥청망청 써댔다는 자성의 목소리들 말입니다. 요즘 하이브리드 자동차 광고가 많이 보입니다. 기름값 때문인지 이런 차들의 판매량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차들은 거의가 일제 차입니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덩치만 크고 연비 나쁜 차들만 만들다가 일본차에 밀려나더니 이제는 하이브리드카 시장마저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있다는 비난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자동차 휘발유뿐만 아니라 난방 등 민간부문의 에너지 소비량도 엄청납니다. 시카고, 보스톤, 뉴욕, 워싱턴에 이르는 미국북동부 지역은 미국 전체 난방에너지의 80%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이 지역의 겨울이 길고 추운 탓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단열처리를 하지 않았고 또 가장 값비싸고 비효율적인 전기에 의한 난방방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솟는 기름값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석유가 없어서 미국 주요 인구밀집 지역인 동북부에 난방이 안 된다?? 이건 진짜 국가비상사태죠. 이런 고유가 행진이 계속된다면 - 당연한 수순이지만 - 얼마 안 있어 미국에서도 에너지 절약 운동이 펼쳐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석유를 더 확보하는 문제는 아무리 미국의 패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라크 전쟁처럼- 맘대로 되지도 않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죠. 국내적으론 기름값에 걷는 세금을 깎아 줄거냐 말거냐는 논쟁도 있습니다만 이런 세금정책이 석유를 더 생산해내는 것도 아니죠.   사진 출처- 쿠키뉴스, AFP 오늘 라디오에서 한 전문가는 이런 애길 하더군요. '이제 미국이 석유를 더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석유 없이 살 수도 없다. 문제는 미국인들이 지금까지의 석유 소비행태를 바꾸는 것이다'라구요. 지금까지처럼 흥청망청 쓰지 말고 아껴 쓰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죠. '아껴 쓴다'... 그것도 '석유를' 아껴 쓴다... 미국사람들에겐 참 생소한 단어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에너지 정책은 석유를 싼값에 확보하는데 있지 절약하는데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미국은 전 세계 석유소비량의 4분의 1이나 되는 일일 2천만배럴의 석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에너지는 41%정도(단순하게 계산해도 약 8백만 배럴-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1일 산유량에 버금가는 양이네요. 이 정도면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나요?)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3분의 2가 소비하는 양과 맞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방 재정적자보다 두 배나 되고, 국방예산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더 많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보다 국내에서 에너지 절약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이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거죠. 전쟁을 안 해도 되고 그 돈을 경제에 투자하면 경기도 살리고 환경도 지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아니 이게 당연한 일의 순서죠.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전문가가 방송에 나와서 ‘석유를 아껴쓰자’고 한다면 '하나마나 한 말씀 캄사합니다'하고 흘려버렸을 텐데 여기 미국에선 이런 하나마나한 말씀이 정~말 '지당하신 말씀'으로 들리더군요.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729 | 추천: 0
시인들은 타고난 감수성과 직관으로 세상 만물의 이치를 느끼고 꿰뚫으며 그들이 발견한 것을 우리에게 가슴에 와 닿는 언어로 전해주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담론이나 복잡한 방정식을 빨리 풀어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혹은 세상사 어느 하나도 쉽지 않고 더욱이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일이면 그 취지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꼭 어려움이 동반된다며 푸념하거나 체념하는 우리들에게 시인들은 매우 단순한 것 안에 담겨 있는 자연의 이치를 눈 여겨 보라고 한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에서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권리를 찾자며 배부한 유인물에서 나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 시 안에서 나는 인권운동에 대한 생각, 특히 실천과 연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발견한다. 시의 단락을 편의상 둘로 나누는 우를 범하면서 인용해본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우선, 인권운동은 ‘벽’을 넘는 투쟁이며, 연대를 통한 것이다. 한국에는 꽤 많은 인권단체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종합적인 인권단체(인권실천시민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평화인권연대, 새사회연대 등), 종교권 인권단체(천주교인권위원회, KNCC 인권위(한국교회인권센터), 불교인권위원회, 원불교인권위원회 등), 전문가 인권단체(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등), 피해자 인권단체(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등), 장애인 인권단체(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이동권연대 등), 성소수자 인권단체(동성애자인권연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등), 과거청산 관련 인권단체(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등), 이주노동자 인권단체(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이주노동자인권연대 등), 지역 인권단체(수원 다산인권센터, 안산노동인권센터, 광주인권운동센터, 부산인권센터, 울산인권운동연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등), 사회권 중심 단체(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 정보인권 중심 단체(진보네트워크센터, 지문날인반대연대 등), 기타(국제민주연대, 사회진보연대 등)가 있다. 이 단체명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의 인권운동이 넘어야 할 벽들이 첩첩으로 싸여있음을 금방 알게 된다. 각 인권들이 서로 상호의존적이고 불가분리이듯이, 이러한 운동들도 상호의존적이고 불가분리하다. 이 모든 인권들이 총체적으로 동시에 실현되어야 하듯이, 인권운동단체들의 연대는 전략이자 행동원리이며 존립의 기반이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인권운동은 결국 절망의 벽을 넘는다. 인권운동진영은 그동안 사회보호법 폐지, 준법서약서제도 폐지, 호주제 폐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입법화 등을 성취했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사회복지시설 생활인의 인권 확보 운동, 사법개혁 운동, 장애인 교육권 및 차별금지와 권리구제 운동,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실현 운동, 비정규권리입법 쟁취 투쟁, 이주노동자 인권운동, 다양한 과거청산운동,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정보인권운동, 국가인권위원회 감시운동 등과 국제연대운동, 인권교육운동 등을 하고 있다. 이 나라가 인권의 푸른 잎으로 덮일 때까지 인권운동은 결코 고개를 떨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결국은 그 벽을 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인권운동은 어떤 성찰이 필요할까. 인권운동은 큰 목소리로 벌여야하지만 그 운동의 뒷심은 말없이 꾸준히 행하는 실천에서 온다는 점, 담쟁이가 벽을 파랗게 덮을 때까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점, 인권단체들끼리 꼭 여럿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점, 인권단체 안에서 작은 담쟁이 떡잎들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아닐까. 아울러, 우리는 담쟁이 잎들이 넝쿨을 이루면서도 잎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도 탄탄한 잎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각 인권단체의 전문성을 토대로 하여 연대를 맺는 조직적 대응을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분산적인 대응만으로는 총체적으로 요구되는 인권적 과제들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며, 동시에 각 단체들은 저마다의 분명한 전문 영역을 확보하고 의제별로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인권단체들과 시민들과의 연대가 활성화 되어야하고, 시민사회 안에서도 인권의 꿈과 의지를 가진 작은 담쟁이 떡잎들이 계속 자라나야 할 것이다. 사람 다니지 않는 산이라도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 오솔길이 생기듯, 희망을 계속 지니게 되면 언젠가는 현실이 되며,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고 인권의식과 감수성을 터득해가는 시민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인권단체들을 찾고 동참하며 그들의 뒷심이 되어줄 때, 마치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는 말처럼 인권단체 잎 하나하나는 각기 수천 개의 담쟁이 잎들을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꿈꿀 권리』라는 책 이름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권현실 앞에서는 꿈을 꾸는 것이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담 벽 너머의 세상을 꿈꿀 ‘권리’와 함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담 벽을 넘어야 한다는, 기어이 넘고 말아야 한다는 ‘의무’ 아닐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724 | 추천: 0
우울합니다. 평택 대추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하다 못해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순박한 농민들을 상대로 헬기가 뜨고 순식간에 군인들이 철조망을 두릅니다. 그 전의 경찰들과 맞닥뜨렸던 상황과는 또 다릅니다. 그 막강한 위세에 힘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속절없습니다. 일부 지원나간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역부족인 현실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중심부엔 새로운, 드넓은 군사기지가 태동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이 오십여 년 이상 공포와 경원의 대상이었던 ‘북한’을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광분하는 그 숱한 매체들의 은근슬쩍 눈감음을 바탕으로 내부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대로 국론분열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들은 원인 결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오직 ‘제국’ 미국의 이익에 잘 복무할 수 있으면 그만인 듯 합니다. 이 순간 일제시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윤봉길의사나 안중근의사가 별 사람인가요? 자주독립을 희망한 사람 아니던가요? 친일청산 작업이 한창인 이 때에 뜬금없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친일청산 작업보다 더 중요한 게 친미(사대 매국)현상을 발본색원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대로 싸우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런 일은 촛불 하나 밝히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됩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가능성은 싹을 틔운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온통 패배의식에 젖어있을 때 8.15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8.15는 우리에게 온전한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준비한 자에게 상급은 온다고 믿습니다. 온전한 해방, 온전한 평화, 온전한 자유를 위해 우리 모두가 기울여야 할 일은 아직 많습니다. 세상과의 연대를 비롯하여..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만인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855 | 추천: 0
지난 주말 금강산에 다녀왔다. 백두산에는 가 본 적이 있지만 금강산은 처음이었다.(운이 좋아 백두산은 북한 쪽과 중국 쪽 모두를 가봤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금강산은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버스로 이동할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북녘 주민들의 남루한 모습은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만 느껴졌다. 2년 전, 처음 평양에 갔을 때처럼 가슴을 누르는 고통은 없었다. 그때는 음식을 남길 때도 죄스러웠는데…. 일부러 모른 척 한 것인지, 세월이 흘러 심드렁해진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금강산에 간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설악산에 간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관통해-휴전선을 뚫고-북으로 넘어간 것인데, 이리 무덤덤할 수 있다니. 무심해진 것은 나만이 아닌 듯 했다. 마을이든 산이든 어딜 가나 눈을 찌르는 붉은 색 ‘선전문구’에 대해 남쪽 관광객들은 무척 관대했다. 현대아산 소속의 가이드는 잘 보이지 않는 선전문구까지 일부러 가리키며 내용(‘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와 같은)까지 친절히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남쪽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선전문구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 혹은 관광 상품이 된 것 같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바르르 떨던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 것은 2년 전과 다름없었다. 먼저 버스로 이동 중 촬영금지. 북한 당국은 카메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입국 심사 때 카메라는 별도로 꺼내 심사를 받아야 했고, 일정 규모 이상의 줌 기능이 있는 카메라는 갖고 들어갈 수 없다. 관광객이 이동하는 길가에는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는지를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예전엔 200m 간격으로 촘촘히 서있었는데 요즘엔 비교적 헐거워진 것이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선전문구 사진 -  이재성(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벌금’이었다. 입국할 때 나눠주는 방문증(관광증)이 있는데, 이 카드를 구기거나 볼펜 자국을 내거나 하면 10달러의 벌금을 내야했다. 카드에 기재된 이름이 틀려서 고치려다 벌금을 문 사람도 있다고 했다. 찍은 지 6개월이 넘는 사진을 제출했다 걸려도 10달러, 줌 기능이 좋은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다 걸려도 10달러였다. 등산을 할 때도 가이드를 추월해서 앞으로 나가면 벌금감이라고 했다. 일행 중에는 합법적 ‘삥뜯기’라며 기분 나빠하는 이도 있었고, 이 정도면 ‘애교’라며 기부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겠다는 이도 있었다. 마지막 날, 해금강에 들렀다 삼일포-어떤 왕이 하루만 놀고 가려고 들렀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삼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고 했다-에 갔을 때였다. 앞서가던 동아일보 기자가 내 신분을 말했는지, 북쪽 안내원이 아는 체를 했다. ‘기지’ 바지에 운동화, 점퍼를 입은 전형적인 북쪽 남자였다.    “한겨레신문사에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네다.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우리 수령님(인지 장군님인지 잘 안들렸다)을 칭송하는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잘 안 들린다고 했더니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말해줬다.  “아, 네. 칭송은 아니구요, 북쪽을 바로 보자는 거죠. 그동안 너무 왜곡된 시각으로만 보아왔으니,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대화가 한 번 삐끗했다. 북쪽 안내원이 다시 물었다.  “금강산에는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그럼 금수산기념궁전은 가보셨습니까? 우리 수령님 계시는.”  “아니요, 거긴 못 가봤고, 만경대는 가봤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만경대 고향집에 가보신 소감이 어땠습니까?”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그렇죠.”  안내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을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속에 없는 말은 잘 못하는 성미인지라.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일행들이 북쪽의 여자 안내원을 졸라 노래를 하게 한 것이다. 올망졸망 예쁘게 생겼는데, 두 볼이 발그레해지며 쑥스러워하면서도 노래를 잘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가이드가 “정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안내원에게 노래를 청해서 듣고 오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상에 올라가보니 바로 이 안내원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거기서도 관광객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듣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이 안내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한겨레 기자 선생, 저랑 같이 가지 왜 먼저 갑네까?”  “아 그럴까요?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까?”   농담은 묵살되고 질문이 돌아왔다.  “금강산은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평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네까?”  “넓은 들판이요. 넓어서 거칠 게 없으니 좋더라구요.”  “아니 뭐 가본 데가 있을 거 아닙니까?”  “만경대도 가보고 개선문도 가봤습니다.”  “만경대를 보신 소감이 어땠습네까?”  앞의 대화와 패턴이 비슷해서 살짝 짜증이 났다. 똑같이 대답했다.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뭐 그렇죠.”  “만경대에서 xx(잘 모르는 단어였다)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기억이 안 나네요.”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때 다른 누군가 끼어들어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그 사람이 xx를 안다고 하자, 안내원이 나를 타박했다.  “아니 한겨레신문 기자가 만경대에서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까? 강정구 교수께서 만경대에 가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고 썼다가 구속이 되셨는데, 기자 선생은 그럼 강 교수와 다르다는 겁니까? 진보적인 신문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다르지요. 진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닙니다. 같다 다르다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강정구 교수의 구속에 반대한다. 그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와 생각이 같지는 않다. 대충 그런 요지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대화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졌다. 그는 조선일보가 밉다고 했고,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신뢰감을 표시했다. 나는 중앙일보의 한계에 대해 말했다. 그러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지점에 다다르자 그는 “아까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며 “우리 힘 모아 조국 통일을 위해 힘쓰자”고 말했다. 나는 “다 이해한다”고 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같은 ‘종교’임을 확인하고 위로받고 싶어 했던 것일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해서 (맹신이라는 의미의) 종교가 되었을까? 세계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사회주의를 이처럼 종교로 만든 사례가 있던가.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호치민의 베트남이든 카스트로의 쿠바든 내가 아는 그 어떤 사회주의 국가도 권력을 세습하거나 종교화하지는 않았다. 왜 북한에서는 귤이 탱자가 되었을까? 맹목성은 우리 민족의 특질인가?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벌도 세습하고, 교회도 세습하는 나라. 역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광신적인’, 그리고 격렬한 반공투사로서의 한국의 기독교. 북한의 사회주의와 남한의 기독교는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서북청년단이 남한 기독교의 뿌리라지만, 어쩜 그렇게 극과 극으로 닮을 수 있는지. 몰아의 경지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이성을 잃는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다. 절대주의는 힘이 있지만 배타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조선일보는 탈북자 출신이 만든 <요덕스토리>라는 뮤지컬을 수 십 차례에 걸쳐 대서특필해 억지 흥행을 시킨 바 있다. 그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착잡했다. 뮤지컬을 만든 탈북자들이나 그걸 꼭 봐야한다며 대서특필하는 조선일보의 유아적 비명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북쪽의 인권현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폭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아니, 폭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쪽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안쓰럽지만 남북관계나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당장 쳐들어가서 북쪽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부 극우파들의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며 탈출을 감행한 탈북자들의 절박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해져야 하는 것 아닌지. 금강산이든 개성공단이든, 더디고 어렵지만, 그것이 통일로 가는 유일한 접근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등산할 때 가이드 신경 쓰지 않고 내 속도에 맞춰 가고도 싶고, 북쪽 주민들과 어울려 사진도 마음껏 찍고 싶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으랴.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한 장면 사진 출처- 한겨레  사회주의가 한번 흥했다 망했고,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각종 부작용이 생기고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사이클로 치면 몇 바퀴는 돈 상황인데, 우리의 지적 수준은 60년 전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또다시 불러 죽고 죽이는 칼부림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83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