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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을 긍정하는 사회 (장윤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1:08
조회
217

장윤미/ 국민대 학생




요 며칠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도룡마을이란 곳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친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은 그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만들고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엔 한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단편영화로 만든다고 했다. 겨우 며칠 있었을 뿐인데, 밤마다 잠들기 전 친구가 조근조근 해주던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각자 이야기 때문인 건지, 난 금세 그들에게 정이 들었다. 마을에선 60대 노인은 젊은 축에 속한다. 아직 농사를 짓는 분들도 많고 아니면 텃밭을 일구어 먹거리를 장만하신다. 특히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살아가는 7,80대 할머니들이 참 많더라. 할머니들은 버스 정거장이 있는 마을 입구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신다. 매일 그렇게 보는데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으신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도 재밌었다. 작업하다 짬이 좀 나서 막연하게 그들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쓸쓸하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그들의 주름살이 지독해보이면서도 너무나 위대한.

그렇게 바라보다 불현 듯 어떤 이미지가 스쳐갔다. 도시에서 본 노인들의 모습이다. 내 어깨를 세게 부딪치고 악취를 풍기며 지나가는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모자를 눌러 쓴 할아버지가 지하철의 폐휴지를 수거하며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려 앉아 구걸하던 할머니. 사실 도시에선 흔한 풍경들이다. 이곳에 와서야 그동안 내가 노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왜 난 늘 그들을 그렇게 바라보았던가. 아니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구체적인 공간으로서 특히 도시에선 말이다.

도시에서 내게 노인들은 어떤 존재였는가 하고 물어 본다. 그래, 너무 불편한 존재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연민과 불편함이 뒤섞여 찝찝함과 우울함만을 자아냈다. 호화롭게 사는 노인들이야 내 눈에 잘 비칠 리가 없다. 그들은 저마다 풍요로운 삶을, 내가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공간에서 잘 누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거리에서 내 눈에 띄는 노인들은 안타까워 보이고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이내 서글픔으로 변한다. 나 역시 그곳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진리. 노인이 된다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노인으로서의 삶이 두려워지는 거다. 대비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노후대비’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구르고 구르면서 되는대로 늙어가고 싶은데, 늙었을 때 정말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배가 고픈데 돈 벌 데도 없으면 어떡하나 또 그런 내가 싫어지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움이 뒤따른다. 안정적으로 살라는 말의 근거 중에서 가장 나를 약하게 만드는 말은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는 것이다. ‘노후대비’라는 말로 내 삶을 저당 잡히고 싶진 않은데, 살라는 대로 살지 않으면 노후를 대비하기란 어렵다. 아니, 생각해보면 아주 열심히 산다 해도 노후를 대비하긴 어렵지 않은가. 이미 사회는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만큼의 대가를 주는 곳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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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노컷뉴스


나이가 든다는 건 육체가 소멸하면서도 그 안에 경험을 더 많이 축적하는 일이라는 데,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영원한 것을 채워가는 것이라는데, 그동안 내 눈에 보였던 노인의 몸뚱이는 부정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노인’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이리라. 내가 강진의 도룡마을에서 기분이 좋아졌던 건, 열심히 살아온 한 분, 한 분의 삶을 내 나름대로 상상하고 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가진 내 여유 덕분이기도 할 것이고 마을에서는 가능한 자생능력과 이웃 관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도시가 훨씬 비인간적이고 비인권적인 풍경이 많이 드러나는 건 당연하다. 도시 지하철 계단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마른 손을 내밀고 있는 노인을 보고 싶지 않다. 마주할 때 느끼는 찰나의 찝찝함을 재빨리 비껴가고 싶을 뿐이다. 내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다면 돈이라도 바구니에 넣어드리면 될 텐데, 매 순간 줄까 말까 고민하는 나도 싫다. 굽어진 허리로 병이나 폐휴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을 보면 정말이지 나이 드는 게 두렵다. 정말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다 싶어 어서 돈을 모으고 결혼도 해서 자식도 낳아야 하나 싶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왜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무력한 분노가 치민다. 그냥 이 모든 걸 그저 긍정하고 싶다가도 내가 국가와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속상해진다. 내가 이 안에서 당연하게 보장받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심이 생기니까. 또 그게 당연하다고 믿으니까.

가장 나를 절망하게 하는 건, 죽을 때도 돈이 없으면 장례를 치르지 못 한다는 ‘현실’이다. 이 말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저 절망스럽게 말만 할 뿐이다. 이미 당연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죽음의 권리는 나 혼자서 보장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결코 혼자서 가능하지 않다. 취업이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서로 간의 관계성이 기본이 되고, 생활의 토대인 정책이 뒷받침해주어야 할 것이다.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나이 드는 것을.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어야지 하다가도 진짜 현실의 맨얼굴을 떠올리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늙음이 아름다운 사회에서 살고 싶다, 만들고 싶다. 소멸해가는 몸을 긍정하고 싶고, 몸 안에 축적되어갈 삶의 경험을 존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