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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만에 접은 ‘임아연의 노동OTL’ (임아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1:07
조회
191

임아연/한밭대 학생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아는 게 힘’이었을까. 결과적으로 나는 ‘앎’으로 인해서 병이 났고 더는 견디지 못했다.

필자는 얼마 전 고심 끝에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쥐꼬리만 한 돈이었지만 대학 신문사에서 일하는 대가로 원고료와 취재비 명목의 월급을 조금씩 받아왔다.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을 하자 그야말로 ‘학생백수’가 됐다. 두어 달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았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는 부모님께 손 벌리기가 송구스러웠다. 며칠을 알아 본 끝에 학교와 집의 중간 즈음에 있는 수제 삼각김밥집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력서를 만들었다.

처음 써보는 이력서에는 인상 좋게 나온 사진을 붙여야 하는 공간과, 주민등록번호를 써넣어야 할 칸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다운 받은 이력서가 옛날 것이었는지 지금은 폐지되어 있지도 않은 호주와 호주와의 관계 기입란도 있었다. 시작부터가 꺼림칙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을 슬며시 지워버린 이력서를 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게를 찾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이 이력서를 대충 훑어보더니 앞치마부터 입힌다. 손에 비닐장갑을 씌우고는 다짜고짜 삼각김밥 만드는 법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수저는 테이블 당 몇 개씩 놔라” 등등 온갖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하는 탓에 짜증이 날 지경이다. ‘나도 그렇게 일 못하는 사람은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배움과 동시에 삼각김밥을 정신없이 만들어 팔며 한창 바쁜 저녁시간대가 다 지났다. 8시 반쯤 돼서 좀 한가해지자 사장은 대뜸 “네가 할 만하면 하고, 아니면 말고”란다. 당장 일이, 아니 돈벌이가 급했던 나는 엉겁결에 “알겠다”고 하고 다음 날부터 하루 6시간씩 일을 하게 됐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도 반나절을 맡으면 밥맛이 뚝 떨어진다. 더구나 6시간을 사장 눈치 보며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뜨거운 밥과 씨름하다보면 가게 문을 닫을 때 즈음엔 빗자루질도 못할 만큼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살면서 내 허리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중력의 무게를 그렇게 절감해 본 적이 있었던가. 허리 통증을 참고 비닐장갑 안에서 퉁퉁 불은 손을 겨우 꺼내 놓을 수 있는 시간은 9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틈만 나면 의자에 걸터앉아 인터넷을 하던 사장이 손님이 많아질 시간이면 “기계적으로 일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었다. 사람을 보고 ‘기계’처럼 일하라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던지….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그 앞에서 ‘근로계약서’ 따위의 단어를 꺼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취재하고 기사 쓰던 일을 대학생활의 주된 업으로 삼고 지내던 시절, 노동자들이 왜 바보같이 자기 권리도 못 찾냐며 답답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도 가벼운 입놀림이었는지 그땐 몰랐다. ‘사장’ 혹은 ‘고용주’라는 이름 앞에서 일하는 내내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난 한낱 ‘알바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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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최저임금제 등에서 소외되어 있다(위 사진은 특정 업체와 관련 없음)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시급 4200원. 사장은 그 돈을 주고 얼마나 나의 일손을 뽑아 먹을까 궁리하고, 나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돈 벌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 두 가지 생각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내 노동의 양이 결정된다면 좋으련만 역시나 나는 한시도 일거리에서 눈을 떼면 안 될 피고용자였다. 가게엔 하루 종일 라디오가 계속 흘러 나왔는데 DJ가 무슨 사연을 읽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노랠 틀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끔, ‘다음엔 무슨 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할 때만 부분적으로 들렸을 뿐.

결국 허리통증으로 '임아연의 노동OTL'은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적어도 악으로 깡으로 한 달은 버텨보려 했건만 내 연약한 의지력 탓인지, 몰랐으면 ‘약’이었을 노동인권에 대한 불편한 고민 때문이었는지 몸이 쉽게 축나버린 것이다. 그동안 일한 사흘 치 일당은 고사하고 “일찍 고만두게 되어 죄송하다”며 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집에서는 “돈을 벌기는커녕 병원비로 외려 돈이 나갔다”는 꾸중 아닌 꾸중만 들었다.

하지만 나야 아직 등이라도 비벼댈 부모가 있어 이렇게 쉽게 그만 둘 수 있었으나 매일매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또 나의 친구들이 생각나 많이 서글펐다. 이제는 너무도 쉽게 그들을 향해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피고용자’라고 비난하지 못할 것 같다. ‘권리’라는 것이 나 혼자 들기엔 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백 번의 취재와 인터뷰보다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넸던 사흘이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