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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흡연자, 커밍아웃! (송채경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4:27
조회
3125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나는 흡연자다. 원래는 술을 마실 때만 남에게 빌려 피우는 ‘비상시적’ 흡연자였지만 지난해 정치부로 옮긴 뒤부터는 ‘상시적’ 흡연자가 됐다. 여성으로서 ‘나 흡연자요’라고 선언하는 것은 놀랍게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대수로운 일이다.


물론 화장실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암울했던 여성 흡연자의 시대는 진작에 갔다. 이제는 여자든 남자든 웬만한 화장실은 모두 금연이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이 흡연자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나처럼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아직도 따가운 시선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워낙 눈에 보이는 여성 흡연자들이 많고 금연구역과 흡연구역이 비교적 잘 구분돼 있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다. 실외 흡연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면 흘끗 쳐다보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역에만 내려가면 여전히 담배 피우는 여성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지난 총선 때 취재차 부산에 내려갔는데 엄연히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음에도 주민들로부터 손가락질과 혀차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지난달 김두관 경남도지사를 인터뷰하러 경남도청을 방문했을 때는 도청 공무원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최근 한 여기자가 경남도청에 왔었는데, 밖에서 담배를 피우더라. 우리 도청에서 담배를 피운 최초의 여자가 됐다. 대단하다.” 도청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운 것이 신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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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흡연모습은 각인된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더구나 최근 들어 혐연권이 강조되면서 남녀를 떠나 일반 흡연자에 대한 인식이 자체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방송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게 되어 버렸다. 버스나 기차에서 담배를 피웠던 시절에는 흡연에 자체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남성주의 문화가 강했기 때문에 여성 흡연이 백안시됐었다면, 지금은 혐연권이 강조되면서 동시에 여성 흡연에 대한 거부감은 바뀌지 않아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거부감에는 임신과 출산 등 건강에 대한 우려를 동반한 과도한 ‘여성 보호’가 포함돼 있어서 여성 흡연 자체가 ‘악’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다.

흡연으로 인한 가장 난감한 상황은 내가 출입하는 국회에서 상시적으로 일어난다. 국회 기자실 출입구 옆에 흡연구역이 마련돼 있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국회에 견학온 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다. 봄이 되면서부터 하루에도 몇번씩 전국에서 올라온 초·중·고등학생, 심지어 유치원생들이 두줄로 길게 늘어서 걸어다.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열맞춰 걸어가는 수십명의 학생들 가운데 나를 쳐다보지 않는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들 가운데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매우 충격적인 장면을 본 듯이 놀라거나, “저거 봐. 저 여자 담배 피운다”라고 큰소리로 떠드는 아이들도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어른들로부터의 손가락질이야 별 일 아닌듯 넘어가면 되지만, 아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참 난감한 기분이 든다.

흡연은 무조건 나쁘고 건강에 해로우니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보다는, 흡연도 개인의 기호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존중받아야 마땅한 권리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여성 흡연 ‘커밍아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길 기원하며, 나도 이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