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위험과 차별이 없는 우리 집 정지에 사람들을 다시 초대할 수 있을까?(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7-04 11:10
조회
278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정지’는 부엌을 이르는 경상도 지역의 방언이다.


은평구 구산역에 새로이 생긴 가게에서 커피나 먹자 한 것이 우리집에서 오븐을 데우는 동네 친구들 모이는 저녁 준비 자리가 되었다. 돼지 통삽겹살 스테이크는 수육용으로 잘못 주문했고 로봇청소기는 투다닥 혼자 성내며 돌아가지만 청소 하루만에 널브러진 살림살이는 일찍감치 포기했다. 소금 후추 올리브를 한꺼번에 뿌리고 팬을 데워 대충 버터와 마늘 거뭇거뭇 태운 다음 수육살을 숯을 만들만큼 바짝 구워댄다. 그 사이 오븐은 200도로 준비 완료로 계속 삐삑거린다. 어느 때부터 아니 목발로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나는 시골 정지에서 외할머니 제사상을 거들고 부산 단칸방에 딸린 부엌에서 엄마에게 요리를 배우면서 자랐다. 쌀통을 쓰러지지 않고 붙잡고 있는데, 1년 가스불 켜는데 1년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정지에 온갖 사람들은 나를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혼자 새벽 김밥을 마는 어머니 말벗을 시작으로 냄비밥 앞에 사람이 없으면 밥내음을 감시하거나 24시간 조청을 졸여내야 하는 아궁이의 불앞을 불침번으로 지키거나 누군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대학 모꼬지에서 밥짓기에 물만 맞추고, 카레 가루만 잘 부셔 내어도 내 주위에는 친구들이 모여서 내가 무언가 완성하길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다.


출처 - 밀알공동체


그래서 나는 늘 외롭거나 무기력하면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들을 위해 요리를 했다. 처음엔 응하는 이가 없었지만 점차 아무 이유없이 찾아와서 먹을 것을 빨리 내놓아라, 맛이 있다, 없다, 편하게 마음껏 구박하며 너무나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우리집에 모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출처 - freepik


대학 근처 연남동에 살 때에는 버스와 지하철이 끊긴 후배들이 쳐들어와 냉장고를 싹싹 비워주는 것을 시작으로 이제 은평구로 이사 와서는 완벽한 나혼자 산다를 완성하니 은평구에서 새롭게 연 장애인 복지관 관장부터 동네 사람들, 멀리 사는 친구들, 심지어 얼굴 한번 본적 없은 SNS 에서 만난 뜬금없는 외국인까지 신나게 식탁을 차려주고 배터지게 같이 먹었다.



혼자 사는 내 집에 너무 힘든 7kg 수박을 깍둑설기 해주고, 한달 먹고도 남을 맥주 한짝을 들고 와서 헤어질 때는 산같은 온갖 쓰레기를 몽땅 가져가는 밥식구 손님들이었다. 손쉽게 외출하여 서로를 살피기에도 힘들기에, 고독사하지 않기 위하여,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 집에서 밥을 차릴 때 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있고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한 나만의 고육지책일지 모른다.


출처 - 연합뉴스


2020년 장애인실태조사'에서 전체 장애인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27.2%로 71만3000명으로 추정된다. 나도 이제 그들 중에 한 명으로서 장애와 더불어 50대에 임박한 혼자 사는 남성으로 고독사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그래도 최근까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해도 SNS에서 불쑥 말을 걸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안심되고 반가웠다 혼자 사는 시각장애인 분이 홀로 화재 속에 돌아가시는 비극에도 견딜만 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홀로 사는 어르신 분들과 여성들, 장애인들이 방문한 불특정 개인이 저지르는 범죄에 희생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니, 우리 집 정지의 오븐을 데우는 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을 한다. 사람들을 나혼자 사는 이 큰 아파트 저녁 식사 시간에 초대하는 것을 중단해야 할까?


출처 - 연합뉴스


같이 불광천을 산책하자는 동네 주민의 제안도 한층 경계하고 괜시리 나랑 친하고 싶다는 메시지도 불안하기만 하다. 새 아파트의 그 두꺼운 출입문도 올가미로 열어 제낄 것 같고 힘센 이가 우리집에 밀고와서 겁박하고 감금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이 공포와 불안은 실제 사건이 없어도 공기처럼 전염된다. 약자들을 향한 범죄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연대감을 약화시켜 개개인을 모두 고립시킨다. 인권이라는 기본 개념을 좀먹는 좀비와도 같다.


출처 - freepik


우리는 그럴수록 우리 부엌에 우리 혼자 식사하면 안된다. 모두 용기를 갖고 서로를 신뢰하며 각자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인권의 식탁으로 초대하여 함께 요리를 나누어야 한다. 나는 늘 우리집 오븐 스위치를 함부로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인권 스위치를 끄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