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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이란: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정한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6-20 11:12
조회
366

정한별 사회복지사



 

네이버 국어사전: 자립(自立).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섬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중 정말 자신 혼자만으로 자신의 삶을 이뤄내고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퇴근하는 길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집 옥상에 균열이 있으니 균열을 메워달란다. 철물점에 가서 외부용 실리콘을 사 놓으라고 말한 뒤 엄마에게 갔다. 실리콘 총을 들고 옥상에 균열이 난 곳들을 메웠다. 엄마는 고생 많았다며, 검정색 비닐 봉투에 상추를 잔뜩 넣어줬다. 옥상에서 키운 무농약 상추라며, 씻어서 먹으란다.



집으로 돌아오자,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린 아내는 그제서야 숨을 돌린다. 코로나에서 일상으로 복귀한 뒤 아이들은 더욱 자주 감기에 걸렸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병원에 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은 아내는 장모님을 소환했다고 했다. 하루종일 보채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아내는 진이 다 빠졌고, 아이들은 겨우 방금 잠이 들었단다. 아빠는 언제 오냐고 묻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고생 많았다며 등을 쓸어주는 것 외에 특별히 해 줄 수 없는 미안함을 뒤로 하고 땀에 젖은 옷을 벗었다. 적당히 따뜻한 물에 땀을 씻어내고 나니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제육볶음에 상추쌈 그리고 시원한 맥주로 저녁 일과가 시작된다. 저녁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내는 몇 시간 뒤 다시 전쟁통이 될 집을 치웠다. 집을 치우는 일은 집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들이 다시 지저분하게 어지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하는 일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니, 빨래 건조대에 있던 빨래들이 거실 바닥으로 내려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빨래를 개면서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묻고 대답하기. OTT로 드라마 보기.


 

12시가 조금 넘었다. 빨리 침대에 누워야 한다. 두 시간 후면 잠에서 깰 아이가 엄마를 찾아올 수 있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일상 중 그 어떤 날도 혼자서 이뤄지는 날이 없다. 성인이 된 아들의 삶의 궤적에 여전히 엄마가 있었으며, 엄마가 된 딸의 옆에도 든든한 조력자인 친정엄마가 있었다. 부모가 된 두 남녀는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때론 삐걱대는 바퀴에 맥주를 붓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소속이 필요하다. 가족, 친구, 연인, 학교, 직장, 동네, 국가.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에 엮여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다는 뜻이다. 관계란 도저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바닷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붙잡아 주는 생명줄이다. 관계가 다양하고 깊을수록 사람은 안전하다. 타인에 대한 의존, 의지, 예속에서의 탈출이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자립의 진정한 의미이다.


자립은 국어사전의 개념, 한자어의 뜻풀이처럼 고정적으로 해석해선 안된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자립의 개념은 100가지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유일한 개인이 타인에 의존하고 관계에 의지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자립을 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특히 발달장애인(지적장애인+자폐성장애인)이 장애인거주시설이 아닌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과 걱정이 크다. 발달장애인이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냐 묻고는 한다. 혼자서 요리를 할 수 있냐고, 혼자서 공과금을 납부할 수 있냐고, 혼자서 여행을 갈 수 있냐고 걱정을 하고, 혼자 살다가 화재를 내는 게 아니냐며 두려워 한다. 이 모두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


요리를 못하면 음식을 사 먹는 방법을 배워도 된다. 공과금 납부와 세금 납부를 어려워 하는 어른들은 의외로 많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고 동네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면 안된다고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다. 혼자서 여행 가는 일을 어려워 하는 사람 역시 의외로 많다. 가스렌지 사용으로 인한 화재를 걱정하는 것 역시, 요즘 세상엔 기우이다. 가스렌지 대신, 인덕션을 사용하면 될 일이며, IOT의 발전으로 가정 내의 모든 사물을 관리하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발달장애인이 자립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발달장애인은 자립할 수 없다는 합리적 근거가 빈약한 편견, 자립의 개념을 지극히 사전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는 편협한 인식 때문이다.


출처 - 국민도서관


 

“인간은 의존적이다. 태어난 후, 고령으로 죽음을 맞기 전, 장애가 있을 때, 아플 때,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의존적이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생을 이어왔고, 붙여왔으며,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했었다. 따라서 의존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돌봄:사랑의노동」, 2021, Eva Feder Kittay 저, 김희강, 나상원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