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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실패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6-07 09:45
조회
181

신종환 / 공무원



물이 마를 때, 잉어들은 서로의 침을 묻혀 서로 습기를 나눈다. 그러나 큰 호수에서는 서로를 잊고 사는 것이 나으리라. 나는 서경식 선생의 책 ‘시의 힘’에서 이 말을 처음 읽고, 그 말이 루쉰이 했음직하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루쉰의 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글을 쓰며 확인차 찾아보니 장자가 도의 큰 덕을 비유한 상유이말이란 사자성어의 뜻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루신과 그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동한다. 루쉰의 길에 대한 비유와 강철로된 방에 대한 비유,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유언조차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삶. 루쉰은 자신의 죽음을 소박하게 마무리달라고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루쉰 기념관이 세워졌다. 낙관한 현실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무이자로 끌어오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던 나카노 히게하루에 대한 조문 등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부분의 루쉰의 글에서 읽히는 낮은 온도의 전망은 그가 거의 미래에서 낙관을 끌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어두운 전망을 직시하며 걷기로 마음먹을 때 그는 어떤 마응이었을까.



출처 - 저자


큰 기관이나 단체부터 작은 모임까지 배움이 걸쳐 있다면 그게 최종목적이든 활성화를 위한 수단이든 내부에 의견이 교차하는 장을 만들고 활성화하고자 한다. 의견이 교차하며 타인의 의견과 의중을 숙고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이 입체화되고 깊어지면서 행동이 변화하거나 같은 행동이라도 의미가 달라질 계기의 장이 만들어지곤 한다.



과거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그런 장을 많이 제공했고 거기서 많은 생각이 활발히 오갔다.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의 특색과는 무관하게... 하지만 일간베스트나 워마드 등의 타자에 대해 누가 더욱 원색적이고 새로운 언어로 적의를 드러내는지가 자랑인 커뮤니티들이 한때 많은 이용자를 보유하고 또 그들의 언어가 사회에서 유통되는 시점과 맞물려 사유 교차의 장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동진 평론가의 ‘직조’라는 말이 굳이 그런 말을 써야 하느냐는 논란을 일으킬만큼 지적활동이나 그 교류를 굳이 해야하느냐는 넘어 까닭없이 적대하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비논리적인 비난이 가깝고 쉽고 즐겁다는 걸 많이들 느끼면 이를 부정하는 이들도 결국 단편적인 조롱과 비난만을 교차하게 된다.



그럼 어렵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런 장을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고 느껴져서 우리 노조의 영화모임에서도 그런 장의 역할을 했으면 해서 매 모임마다 개발과별로 쓴 발제문을 들고 간다. 최근 시내 극장 하나가 문을 닫아버려서 이번 모임에서는 영화 ‘다음 소희’를 각자 보고 주민센터 근처의 족발집에서 모였다. 발제문을 돌리고 몇마디는 떠들고 시작하려는데 우선 참석한 일곱명 중 세명은 영화를 보지 않았고 두명은 유튜브 축약본을 봤다고 기습고백을 했다. ‘음 그럴 수 있지. 예상범위 안이야.’ 라고 생각하며 발제문 내용을 떠들어대려는데 노조 청년부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아 이런거 써오지마 그냥 술이나 먹는 게 좋은 모임이야.’ 음... 맞는 말이다, 두드려 맞는 말. 속으로 이제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웃는 스스로의 인내심의 증진에 감탄하며 술을 따라가며 축약본이라고 보고 온 친구들과 말을 이어간다. 예전에는 농담으로 ‘좋은 내용입니다.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농담조로 쓰이곤 했지만 이제는 ‘좋은 말을 읽어야 하나요? 당신의 이게 좋은 말이라고 어떻게 단정하나요?’로 따지는 태도들이 여기저기서 복병처럼 등장한다. 노조가 지원하는 무료 알콜의 힘에 기대어 어찌어찌 화기애애하게 다음달을 기약하고 돌아오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모임의 내일을 생각한다. 대단히 모임에 호의적인 친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글을 쓰게 하면 모임이 활성화되지 않겠냐고 고마운 의견을 주었지만 그렇게 되면 술집에서 나혼자 등신대 거울을 보며 ‘그대의 망한 모임에 치어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사람 괜찮다 싶으면 도청 발령으로 도망가는 일의 반복이라 큰 기대도 비관도 없이 모임을 꾸리는 데 익숙하다. 다만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룰 가능성은 다소 요원하다면 모임의 의미와 까닭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루쉰처럼 올지도 모를 낙관적 상화이 나를 볼 수 있게 지표처럼 있자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오장완의 ‘프란츠 카프카’에서 제자를 ‘미친’이라고 표현하는 조소로 임할지 모르겠다. 가기는 가는 이길,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