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리는 장애를 언제까지 부끄러워 하는가?(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1-08 09:23
조회
86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장애라는 이름이 부끄러운가?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는 잘하지 않는 인사말을 때가 있다.


생각보다 밝으시네요.”


한참 어릴 때는 명절 때마다 나이가 한참 나이가 높은 친척들이 나를 보면, 몸을 어루만지시며병신 자식이 효도한다시며 같이 죽으러가자 말씀하시고는 했다. 40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말들이 소름끼치게 두렵고 무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관용구는 분명 그런 뜻으로 쓰는 말이 아닐진대, 그때 사람들은 장애인이 효도라도 하려면 빨리 죽은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런 슬프고 잔인한 저주를 어린 당사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있었을까? 그런 표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따뜻한 격려와 다정한 걱정처럼 여겨졌을까? 저런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언어와 표현들은 반세기가 지났어도, UN인권 이사국이 되고 아시아 최초 국가 차원의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어도 심각하게 문제제기 되거나 비난받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장애인 인권교육과 통합 교육이 법제화된 선진국이 되었어도 정치인이나 언론들이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장애 때문에 일어난 일을 범죄화 하거나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부터 분리하고 격리하는, 이제 더러운 화장실 벽에 조차 쓰지 않을 장애의 혐오 표현과 차별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마이크를 통해서 기사를 쏟아내어도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강력하게 제지받지 아니한가? 여전히 장애인을 양육하는 부모들은 자녀의 장애를 당사자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지극히 극심한 불행으로, 심지어 구원받을 없는 죄로 여긴다. 그래서 비장애인 자녀였다면 사사로운 개인 대화에서조차 당장 아동 학대로 신고될 자녀살해후 자살 같은 것들을 너무 쉽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인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개인 사사로운 감정 표현들을 주요 언론과 정치인들은 너무라도 거리낌없이 대중들에게 언어로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장애인 당사자 조차도 장애를 드러내고, 알리고, 국가에 알리는 것을 감추고 수치스러워하며 우리 사회는 이를 방조하고 묵인하기까지 한다. 이는 최근 심한 장애가 있던 20 삼형제가 집에 감금 당한 채로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에서 너무도 드러난다. 현실을 매주 특수교사가 직접 목격했음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신고하거나 고발하지 못했다.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혐오 하는 것이 진정한 차별입니다.”라는 표어처럼 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되레 장애혐오 표현을 동원하고 장애에 대한 부정인식을 강화하고 퍼뜨리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형적인 순환 혐오이자 이중 혐오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전파하고 심지어 비판까지도 다시 혐오로 전염 시킨다


장애와 장애인은 사회가 당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사회제도이자 행정임을 이론으로 지식으로 너무나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과 말과 행동은 조선시대가 나았다고 평가할 지경이다. 바로 그것이 언어 대중들의 공개적인 장애와 장애인혐오표현 권력이자 결과이다. 혐오 표현을 부리는 사람은 그것을 듣거나 보거나 느끼는 사람에게 불안과 공포, 죄책감을 안기면서 스스로를 혐오하는 대상보다 우월하고 정상이라는 일종의 안정감과 안심을 받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즐거움까지 얻는다. 그래서 혐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나아가 작금은 소통의 도구로 혐오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많이 사용된다는 뜻은 혐오 표현을 했을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나만 아니면 돼!!”


개인의 욕설로서의 장애혐오와 장애인의 모욕이라도 당사자나 상대방이 직접 듣거나 대면한다면 엄연히 장애인 복지법 8 위반의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이를 제대로 연구하거나 처벌하여 사람들에게범죄라고 분명한 범죄 예방의 메시지를 분명히 적이 없다.       


과거 2000 불결한 성관계가, 장애아를 낳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kBS 방송에서 감행한 개그맨 이창명 씨의 발언과 장애인 낙태는 어쩔 없다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설화와 함께 2000 초부터 게시판을 달궜던 초등학생들의애자라는 놀림말의 사용, 그리고 장애인들을 아무데서나 공개적으로 목욕시킨 정치인들의 행동과 더불어 매주 장애인은 절대 함께 웃을 없는 개그프로그램들과 언론들이 전염시키고 길러낸 사회적 양육의 예견된 결과일 뿐이다. 장애인을 위해 투자하고 지원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한 정책이나 지원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개인의 착한 일로 궃은 일로 해석되고 표현되는 것이라면 이는 역설적으로 언제든 혐오로 오염될 양분이 뿐이다. 언제든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 상황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입장과 자세를 바뀌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올바르고 인권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 에티켓이나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단순히 매너라고 해도 어기면 사회적으로 비난받기도 하는데 장애인 혐오표현은 그런 비난조차 비켜간다. 감정적으로 혐오와 은유를 생산하는 것은 용서되어 버린다. 장애인을 사랑합시다라고 외치는 순간 사랑하지 말아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장애이해교육이나 인식개선 교육이라고 칭할 때도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다른 소수자 교육에서는 쓰지 않으니 인식 개선이나 이해는 혐오의 지식이나 양분이 되기도 한다.


작년에 어느 드라마 때문에 자폐인과 같은 장애인에게 그렇게 관용적이고 통합적인 사람들과 올해 교사들을 둘러싼 뜨거운 이슈에 장애인에 대해 가장 인권적이고 전문적인 특수교사들이 자신의 직업적 어려움을 대중들에게 설득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얼마나 장애인 학생의 장애를 부정적으로, 모멸적으로 강제 아웃팅 했는가를 보면 자명할 뿐이다.


언론 조차도 이런 일을 다루면서 외국의 100 개인 교사로 폭력적으로 특수교육을 했던 설리반을 찬양하는 표현으로 일관하고 장애인 학생들이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에만 머물라는 분명 국제 조약에 위배되는 주장을 마치 정답인 것처럼 진정한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약 사건에서 마약에 취한 모습을 장애에 비유하는 주요 뉴스를 보면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과 언론들이 얼마나 장애인 혐오에 대해 둔감하고 자기 주관적인가를 있다. 그와 같은 밑바탕에는 요즘 각종 매체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있는 말이 깔려 있다. “나만 아니면 말을 공개석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는 결코 해결할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곤란함과 기회박탈과 차별을 공동체의 민주적인 규칙과 여론으로 착각하는 이런 인식표현을 대중들과 매체들이 당연시 하는 것을 이제 멈추어야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각종 집단 칼부림  사건에서 보듯이 한국 사회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전면에 혐오 범죄나 증오 범죄로 등장할 있는 사회 발전 단계의 시간대인 동시에, 우리가 타인의 삶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함께 나은 사람이 있는 기회라고 믿는다.
표현은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도구이자 시간이기도 하니까.


출처: 베이비뉴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장애를 겪고 장애인으로서 삶을 마감하는 인간 수명 시대에 산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장애인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시대에 산다.
이제 우리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낳기라도 하면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져야 공동체가 존속할 있는 시대에 산다. 지금 당장 장애인 혐오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혐오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 이덕무 수양서 <사소절(士小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