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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받기 힘든 세상 (송채경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15
조회
331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친구에게 들은 얘기다. 그는 몇 년 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끼어든 택시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택시의 잘못으로 인한 사고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친구는 택시 기사와의 대화 과정에서 “저도 조금 더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했다. 이 사고로 앞니가 빠지고 양쪽 팔에 금이 가는 피해를 입은 친구는 병원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지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조언을 들었다. 첫째는 “꼭 입원을 하라”는 것과 둘째는 “절대 사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입원을 하지 않으면 보험금이 나오지 않으며, 사과를 하는 순간 잘못이 인정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보험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보험사 직원은 친구에게 “혹시 사고 현장에서 기사에게 사과를 했었느냐”고 물었고, 친구는 자신은 사과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어느새 함부로 사과조차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손해를 보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따져보기 이전에 무조건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우겨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산다. 사과는 잘못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에 하는 사과에 과연 진심이 담겨 있을까. 그런 사과는 기껏해야 자신의 잘못에 대해 조금이나마 선처를 바라는 생각에서 하는 하나의 ‘쇼잉’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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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을 접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사진기자단


사과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이들의 주된 논리는 ‘잘못을 인정하면 법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가 쓴 책 <쿨하게 사과하라>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 2008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의사인 굽타 박사는 환자의 아홉 번째 갈비뼈에서 떼어내야할 조직을 여덟번째 갈비뼈에서 떼어내는 의료실수를 저질렀다. 굽타 박사는 법적 소송으로 가기 전 환자에게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사건 초기 변호사를 고용했던 피해자는 결국 의사를 고소하지 않고 8천만원의 배상금을 받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한다. 정식으로 고소했을 경우 수억, 수십억의 배상금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피해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 이야기는 당시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책은 이것이 단순히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수년간 조사한 결과 병원 측이 의료사고에서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한 사례가 37건이었는데 그중 환자가 소송을 진행한 것은 딱 한 건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 병원뿐 아니라 하버드, 스탠퍼드, 미시간, 버지니아 등 미국 주요 대학 병원들은 의료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잘못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환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전하는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해외의 이런 움직임과 달리 우리나라는 어떤가.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수 신해철씨 사망 사건에서 해당 병원은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아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사과를 하지 말라는 조언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은 정치권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좀체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과에 인색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세월호 참사 때도 뒤늦은 사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더니, 지난해 말에 터진 ‘비선 실세 파동’에 대해서도 “‘국민 여러분께 허탈함을 드린데 대해’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다”며 그 뜻이 모호한 사과를 내밀었다. 최근에 터진 ‘성완종 게이트’에 대해서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완종 게이트’에 연루된 정치인 명단이 가리키는 것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지만 그가 과연 이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각종 파문에 지친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