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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항하는 폭력도 폭력인가? (허창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17
조회
1925

허창영/ 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


 

세월호 참사 1주기는 참혹했다. 수많은 생명을 수장시키고 일부는 아직 시신도 찾지 못한 무능력한 국가, 그리고 그 국가가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 놔둔 또 다른 가해자인 시민들이 ‘집단기억상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발악했지만, 국가는 그마저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선장이 탈출한 배에서 선원들은 앞 다퉈 빠져나갔고, 남겨진 사람들은 출구를 찾지 못했다. 수장이 자리를 비운 대한민국에서 공권력은 광기를 부렸고, 슬퍼하고 애도할 자유마저 뺏긴 시민들은 집단패닉상태다. 대한민국의 2015년 4월은 2014년 4월 세월호의 재현이다.

목소리 없는 자들이 목소리를 찾기 위해 광장을 찾았지만 거기에서 보여준 경찰의 대응은 공권력이 아닌 폭력이었다. 유족들과 만나 함께 슬퍼하고 애도하려는 시민들을 향해 경찰은 차벽과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 캡사이신, 방패로 대응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기본권, 아니 대한민국 헌법에 버젓이 규정되어 있는 정당한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해 국가는 불법 차벽과 폭력으로 무력화시켰다. 그래놓고 그 공권력은 말한다. “끝까지 추적해 전원 처벌할” 것이라고.

경찰의 대응은 이미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공권력이라고 해서 언제든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당한 공권력의 행사여야만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라고 결정한 차벽을 법적 근거도 없이 둘러쳤고, 시위대를 토끼 몰듯이 유인했다. 시위대는 헌법이 보장한 정당한 권리를 광장의 시민으로서 행사했을 뿐이다. 공권력이 이미 불법을 자행했고, 중무장한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맞서 그깟 몸싸움 좀 했다고, 물병 몇 개, 혹은 돌멩이 몇 개 던졌다고 폭력 운운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학생인권이 강조된 이후 교권침해 문제가 단골로 등장한다.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주장도 말이 되지 않지만, 더 황당한 주장도 간혹 나온다. 교사의 정당한 교육이나 지도에 대해 합리적 근거 없이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것은 교권침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생이 수업시간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교사가 학생의 뺨을 때렸고 화가 난 학생이 ‘왜 그러느냐?’며 대들었다고 치자, 이 학생의 행위는 교권침해일까? 학생이 혹시 규정을 위반했다고 해도 이를 지도하는 내용과 방식은 역시 규정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정당하다. 그렇지 않고 부당한 방식으로 학생을 지도했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나 일부 불손한 반응을 교권침해라고 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얘기다. 부당한 지도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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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앞에서 세월호 참사 범국민 대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물대포와 최루액을 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지금 경찰의 모습이 딱 이 모양이다. 경찰장비 사용기준 12조 1항에는 “최루액 발사는 1m 이상 먼 거리에서 해야 하고 얼굴에 쏘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13조 3항에는 “물대포를 사람에게 직접 직선으로 쏘면 안 된다”고 명시했다. 헌법재판소는 “경찰차벽으로 시위를 가리고 시민들을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세월호 1주기 집회현장에서 경찰은 이를 적나라하게 위반했다. 이날 보여준 경찰의 모습은 그저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였을 뿐이다. 그리고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였으므로 그 자체가 폭력과 광기일 뿐이다. 그런데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에게 법치 운운하며 ‘폭력시위’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폭력에는 눈 감은 채 대항하는 폭력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고민이 생긴다.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도 과연 폭력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어떤 종류의 폭력에도 반대한다는 논리는 어쩌면 부당한 폭력, 진짜 나쁜 폭력을 물타기하는 것일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말은 오히려 지배집단의 폭력을 상대적으로 희석하는 억압의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인 셈이다. 간디로 대변되는 비폭력 평화주의가 갖는 주장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 또는 권력의 부당한 폭력, 정당성을 결여한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폭력까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에 ‘폭력은 안 된다’고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반폭력’ 또는 ‘대항폭력’ 개념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이 갖는 위험성조차 묵인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상대적인 것이니 결국 모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힘을 행사했다고 해서 모두 폭력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1주기 집회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행위는 폭력이 아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진 공권력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항하는 일종의 자기방어이자 저항이었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를 두고 폭력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정당한 공권력이라면 광장에 선 유족과 시위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