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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일 수 없다 (허창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06
조회
206

허창영/ 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


 

‘박원순 서울시장’과 ‘동성애’ 문제가 일으킨 파장이 아직 식지 않고 있다. 「서울시민인권헌장」 의 차별금지 사유에 ‘성적지향’을 포함할지의 여부가 본질과 다르게 동성애 문제로 번졌다.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성적지향’을 포함하는 것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에 대해 박 시장이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급기야 헌장 제정이 무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헌장 제정이 무산된 것도 아쉽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준 박 시장의 태도는 그야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모임에서 “동성애는 ‘확실히’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이에 대한 ‘합의’ 없이는 헌장 제정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들이 크게 반발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직 서울시장이라는 엄중한 현실, 갈등의 조정자로서 사명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심경을 토로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선, 차별금지 사유에 ‘성적지향’을 포함하는 것이 ‘동성애’ 문제로만 왜곡된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짚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성적지향=동성애’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동성애를 포함하는 성소수자 문제가 지지 또는 반대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한 판단착오가 있었다. 인권의 기준에서 당연하게 인정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를 찬성 또는 반대할 수 있는 문제로 폄하했다. 이런 태도라면 다른 인권문제 역시 언제라도 반대가 많으면 포기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흔히 민주주의적 인권이 아니라 인권적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얘기는 현재의 박 시장에게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갈등’과 ‘야만적 테러’를 구분하지 못했다. 동성애 혐오는 ‘혐오범죄’일 뿐 다른 의견일 수 없다. 이를 갈등으로 이해하는 순간 인권의 진전은 그저 먼 일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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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을 점거한 ‘무지개농성단’은 면담을 거부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사과를 받고 농성을 마쳤다. 그리고 지난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시장이 아닌 시민에 의해 선포됐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많은 이들이 ‘박원순의 변심’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박 시장 개인이 과거와 태도를 달리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박 시장이 과거에 인권변호사, NGO 활동가였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서울시장’이다. 그리고 그는 지방자치단체장 중에서 인권제도화를 열심히 추진했던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서울시는 이미 인권담당부서를 설치하고 인권옴부즈맨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공무원 인권행정 강령을 선포했고, 인권정책기본계획 역시 수립했다. 광주광역시와 함께 광역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선도적으로 인권제도화를 추진해온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민인권헌장’을 포기함으로써 인권제도화에는 일정한 제동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헌장이 없다고 해도 다른 인권제도들은 유지가 되는 것이니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헌장 제정을 포기하는 것이 그저 헌장을 포기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1기 박 시장 체제를 치장했던 ‘인권’이라는 포장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앞선다.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던 1기와 달리 보다 큰 어떤 그림을 위해 이제는 인권을 양보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2기 공약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의구심을 가중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서울시에서 쌓았던 인권제도화가 모래성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자체에서의 인권제도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다수의 지자체가 인권조례를 제정하고 관련 부서나 위원회,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다.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목소리였던 인권이 제도권의 언어가 되면서 마치 인권친화적인 지역사회가 될 것만 같은 착각을 갖게 만들고 있다. 물론 국가의 목적이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데 있는 것이니 행정이 나서서 인권을 얘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영받을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인권의 본질이 행정에 녹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인권이 다른 업무들처럼 양보되거나 합의의 영역으로 전락된다면 그것은 정치일 뿐 인권이 아니다.

인권제도화에 동의하고 있는 여러 지자체의 장들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더구나 시민시장임을 내세우고 있는 모 지자체장은 인권 업무를 전임자의 색깔로 이해하고 이를 희석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본인 스스로를 인권전문가로 자임하면서도 인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선에 성공한 지자체장 중 2기에도 인권제도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인권을 전면화하기 보다는 인권을 내세우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모두들 인권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지지 또는 반대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지금이 중요하다. 하물며 인권변호사였던 박 시장도 흔들렸다. 인권제도화가 추진되고 있는 지역의 인권활동가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 환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에서도 ‘성적지향’을 포함하고 있는 광주인권헌장과 광주학생인권조례를 개정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인권이 정치를 위해 그저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품 정도로 취급되는 저열함에 희롱당할 수 있다. 지금이 지역에서의 인권제도화에 있어 가장 큰 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