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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되고 싶은 지구인(최유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2-11 17:22
조회
53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비명이 귓전을 때린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경직된 몸으로 침만 거듭 삼킬 수밖에 없다. 살인을 미리 계획한 듯 바닥에는 큰 비닐이 깔려있다. 깔린 비닐 위로 붉은 피가 흥건하다. 아직은 숨이 붙어있는지 눈을 깜빡이고 있다. 이내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피와 섞여 붉게 물든다. 그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도움을 요청하는 듯 한 슬픈 눈. 몸에 흐르는 혈관 속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 눈을 감는다. 실눈을 떠서 확인하니 그는 이미 죽고 말았다. 서서히 긴장이 풀려가는 것을 깨닫는다. 손은 팝콘과 콜라를 향한다. 카라멜의 기분 좋은 단맛이 혀끝에 감돈다. 입안 가득 팝콘을 넣고 먹으니 씹는 소리에 비명이 멀어져가고 그 잠깐 공포를 잊는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공포영화로 푼다.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순간에는 온종일 골머리를 앓았던 걱정거리가 ‘걱정 따위’가 되어 생각조차 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공포영화로 푸는 것을 신기해하는 분들도 있다. 나도 공포영화를 끔찍이 싫어하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도 공포영화를 보는 사람을 ‘대체 왜 보지?’라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보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은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죽은 연기를 한 배우가 깨어날 것을 알아서가 아닐까. ‘이건 영화일 뿐이야.’라는 생각으로 ‘공포영화’에 접근해서, 무서워도 즐기게 된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짐작일 뿐 명확하지는 않다.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공포영화가 무서워서 보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전설의 고향’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 전설의 고향이었어!


 동네에서 6살 동갑내기 친구들이 저마다 한 손에 포댓자루 하나씩 들고 와 뒷산 언덕에 모였다. 언덕 아래 들판은 잘 관리한 듯 한 잔디가 깔려있었고 들판 중간중간에 볼록볼록 튀어나와 있는 풀 덮인 흙더미가 썰매 타기를 더욱 재밌게 만들어주었다.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TV를 틀다 우연히 “전설의 고향”을 보게 되었다. 무덤에서 머리가 길고 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나와 무덤을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본 이후 무덤 근처는 가지 못하기도 했었다. 놀이터가 무덤이라는 자각을 이때 한 것이다. 그 뒤로 무덤에서 귀신이 나와 나를 쫓아오는 꿈을 반복해서 꾸기도 했다. 공포는 공포 그 자체였기에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공포영화를 지금처럼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설의 고향을 무서워하던 아이가 지금처럼 공포물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란 부족하다. 더 무언가가 없을까 생각해봤다. 이번엔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떠올랐다. 그래! 장례식장이었어!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나는 이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조문객으로 갈 때와 상주로 있을 때 따라 장례식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조금 차이가 난다. 차이가 나지만 신기하게도 불편한 ‘이질감’을 느끼는 점에서는 두 경우 모두 결론이 같다. 먼저 손님으로 가는 경우다. 검은 옷과 양말을 찾으려고 옷장을 헤집는다. 겨우 찾은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을 찾아간다. 입구에서 흰 봉투를 집어 이름을 적고 ATM기에서 찾은 돈을 넣는다. 호실을 확인하고 들어간다. 상복 입은 상주가 “아이고”를 외치며 곡을 한다. 절을 하고 부조금 함에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넣는다. 그리고 밥을 먹는다. 상 위에 올라오는 육개장(가격이 비싸서 시래기 된장국을 주는 곳이 더 많다), 수육, 동그랑땡, 애호박전, 색색의 떡. 그리고 화룡점정 플라스틱. 음식을 다 먹고는 깨닫는다. 그릇이며 숟가락 모두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플라스틱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이번엔 상주로 있을 때다.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장례식장을 향한다. 눈물 바람이 된 상태로 절을 하고 가족을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운다(물론 슬프지 않은 때도 있다. 그저 가족의 눈물에 동할 뿐). 찾아오는 손님에 정신이 없다. 누군가는 부조금을 받고 누군가는 손님에게 음식을 드린다.(음식을 나르는 일은 여성의 몫이다) “손님은 왕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 말은 장례식장에서도 통한다. 슬픔을 나누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모를 어떤 사람들은 술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었다.(여기 술~!) 준비물이 안 보인다며 등교하기 전 엄마를 부르면 엄마는 “여기 있잖아. 찾아보지도 않고”라는 말과 함께 등짝 스매싱을 날리곤 했는데 술 달라 하는 저들에게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는 말과 함께 등짝 스매싱을 선사하고픈 욕구가 뜨겁게 올라오지만, 몸은 이미 냉장고 문을 열고 있다. 그렇다. 부조금을 낸 손님. “손님은 왕이다.”


 손님들이 먹고 나간 후 상을 정리하면서 생각한다. ‘이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플라스틱을 남기는 것이 분명하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플라스틱을 소비하다 죽어서조차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발생한 플라스틱은 결국 산 자의 몫이 될 텐데 말이다. 죽음이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진 출처 - freepik


 역시나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위기 시대 지구는 뜨거워져 간다. 우리만큼의 플라스틱을 사용해본 적도 없는 투발루는 해수면 상승으로 삶의 터전인 섬이 점점 가라앉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오염으로 바다에는 산호초가 사라져가며 바닷속 다양한 생물들은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해 죽음을 맞고 있다. 플라스틱 사용으로 인한 피해를, 사용하지도 않은 존재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살아 숨 쉬는 인간 세상이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가 맞을 듯하다. 영화는 가상이라 되돌릴 수도 있고 누구도 ‘진짜’로 죽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에서의 공포는 영화에 비할 수 없다. 혐오와 차별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져가는 오늘,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이 사람을 해하려는 것이 ‘진짜’ 죽음의 공포에 비하랴. 전쟁터에 신무기를 판매하는 누군가로 지옥이 된 분쟁지역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다. 영화 장면 속 살인사건이 그에 비하랴.


 역시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에 잠기며 공포영화와 팝콘에 신경을 집중한다. 플라스틱에 담긴 콜라를 마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