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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모독, 질문, 그리고 사과(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2-12 16:17
조회
727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고등학교 이학년의 봄을 기억하는 것은 수학여행 때문이었다. 3박 4일, 아니 어쩌면 4박 5일이었을 그 여행의 다른 기억은 왠지 모조리 지워졌다. 단체로 찍은 기념사진을 보아야만 저런 곳에 갔었구나 하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붙들 지경이다. 다만, 한 대학교를 찾아갔던 일만은 비교적 또렷하다. 정확하게는, 그 학교 교문을 나서면서부터 꽤 오랫동안 매달려있던 어느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 학교는 누군가가 ‘2호선 대학’이라고 이름 지은 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명문 여자대학교였다. 한 반에 사십 몇 명씩 모두 여덟 개 반이던 우리는 근사한 건물의 꽤 넓은 강당으로 안내되었다. 학생회 간부들 몇이 무대로 나와 학교를 소개했다. 주로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이 어느 단과대 회장이었는지 총학생회장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 생각하면, 일면식도 없고 사는 지역도 다른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에까지 일부러 시간을 내어주는 대학생이라니 요즘도 그런 따순 광경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멀리, 한반도 ‘부속도서’에서 찾아온 ‘여고’생이라는 특수한 계급이 만들어 준 비상한 관대함인지도 몰랐다. 전교에서 1등을 하고 모의고사에서 전국 상위권에 들어도 ‘딸이기 때문에’ 섬에 남아 학비가 저렴한 지방국립대나 교대를 가야하는 경우가 왕왕 있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를 환대해 준 그 언니들은 여러분이 후배가 되면 좋겠다며, 여대에 진학해야 할 이유를 몇 가지 꼽았다.


 내가 꽤 오랜 시간동안 답을 찾기 위해 몰두했던 궁금증은, 그때 마이크를 잡고 있던 언니의 말에서 시작됐다.


 “여대에 오세요. 여기선 여자가 과대표도 할 수 있고 단과대 회장도, 총학생회장도 할 수 있어요.”


 한참동안이나 붙들고 있다가, 얼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하게 될 즈음-그날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몇 년 전에야- 왜 저 말에 ‘버튼이 눌렸는지’, 그리고 저 말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알았다. 너무 맞아서 외려 슬픈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부끄럽게도, 명예남성에 가까웠다. ‘여대에 오면 과대표며 회장이며 여자가 하는 게 당연하지, 당연한 이야기를 왜 저렇게 당당하고 진지하게 하지’ 따위의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 여대라는 곳의 수준을 의심했다. 아무 생각이 없으면 오만해지기 쉬운데 멀리서 그 예를 찾을 것도 없었다.


 여러 이유로 그 언니들의 후배가 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갈 일은 종종 생겼다. 주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예쁘고 저렴한 옷을 사기 위해서, 또는 약속이 있어서, 하는 이유들이었다. 어느 날, 그 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기다리며 학내에 들어갔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 생겼다. 교내 곳곳에 붙어있던 반전 포스터와 대자보들 앞에서였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미군의 폭격을 비난하거나, 유고슬라비아와 콩고, 체첸 같은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들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대자보 너머의 그들은 전시에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드러내는 사진들 앞에서 꽤 오래 얼어붙었다. 그리고 ‘저런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다니’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무거운 궁금증에 다시 붙들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먼 나라의 일에까지 관심을 두고 투쟁하듯 목소리를 내는 언니들의 지적수준이 부러웠고, 한편으론 저 포스터를 만든 사람은 아주 여러 번 끔찍한 사진을 보아야 했을 텐데 지금쯤 맨정신일까를 걱정했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죽어나가는 어린 아이와 노인과 남자 청년과 여자는 목숨의 무게가 다를까, 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로 여자만이 등장하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그 운동, 페미니즘을 오해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그때 그 언니들이 이야기해온 것들을 겪어내면서, 종종 그날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정확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여대에 오면 과대표도, 단과대 회장도, 총학생회장도 할 수 있다는 말을 고깝게 붙들고 이십여 년을 지내보니, 자기 능력을 증명할 기회 얻기가 좀처럼 어려울 미래에 대한 경고가 읽혔다. 앞으로 살아갈 현실은 그럴테지만 그래도 함께 극복해보자는 행간도 읽혔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오조 오억 가지 이유 가운데, 힘센 남자가 주도하는 세상은 절대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들에 집중하자는 전략도 읽혔다. 미 제국주의가 어쩌고 종교전쟁이 어쩌고 경제수탈이 어쩌고는 강자들이 많이 이야기하니,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에 주목해달라는 간절함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갸웃거리던 모든 순간에도 언니들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정의로웠다. 강자와 폭력에 대한 분노 그 옆에, 약자에 대한 연민이 읽혔다. 그건 아무 생각이 없는 나 같은 자라도 그냥 알아지는, 뜨거운 마음이었다. 한동안 오해했으나 그 운동, 페미니즘은 그런 뜨거움과 냉철함 사이에 곧게 선 마음이었다.



사진 출처 - Flickr


 여성으로 살고 싶었고 마침내 성별을 정정한 어떤 젊은이가 여대에 합격하고도 결국 등록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아팠다.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고 깊이 슬펐다. 걸음을 돌리고도 담담한 글로 앞날의 희망을 표현한 그이에게 미안했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이 사태와 관련 없어 보이는 오래전 기억을 주절거린 것은, 뜨거운 마음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서다. 정확히는 따지고 싶어서다.


 오래 괴로웠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성별을 정정한 이를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쫓아내고 환호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합당하지 않은 공포를 핑계로 약자를 몰아내고, 타자의 상처 앞에서 환호하고, 그에 대한 다른 유언비어(이미 명문대에 재학 중이라거나 여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입학을 시도했다는 등의)를 퍼뜨리고, 사건을 바라보며 함께 상처받고 미안해하는 다른 여성들을 향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언어로 모독하는 것이, 어째서, 옳다고 우기는가. 왜 당신들은,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감히, 페미니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가.


 질문은 더 이어진다. 여자대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여성이란 무엇인가, 자궁을 떼어내거나 유방이 없거나 질을 절개한 여성은 여성인가 아닌가, 세상에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과 남성밖에 없다는 건 과학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고작 생물학적 성별 따위가 만든 부조리에는 그토록 분개하면서 당신들은 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가, 약자의 상처와 눈물 위에서 나아지는 세상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쉽게 조롱하고 당당하게 혐오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 바라고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런 ‘짓’에 제발, 운동과 이즘(ism)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페미니즘은 이래서 안 된다는 몰이해와 또 다른 혐오가 퍼지지 않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주인공이 너무 깊이 상처받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고 닿지 않는 응원들,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들을, 간간히 떠올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