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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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매년 9월 10일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세계자살예방의 날’이다. 그런 연유로 작년 가을에는 특히 그즈음해서 자살관련 언론 보도가 유난히 많았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2005년 자살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26.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이며, 특히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증가세를 보여, 최근 20년간 자살률 증가속도와 노년층 자살률 분야에서도 한국이 각각 1위를 차지했고, 또 회원국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여성 자살률이 증가추세라고 한다. 한국인의 주요 사망원인 가운데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에 이어) 자살이 최근까지 4위를 차지하며, 자살 사망률 증가속도는 최근에 올수록 급증한다. 자살자가 1995년에 4,840명, 2000년에 6,460명이던 것이 2005년에는 12,047명, 즉 5년에 2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반면, 교통사고 사망자는 2000년에 11,844명에서 2005년엔 7,776명으로 34.3% 줄었다. 즉, 2005년 현재, 자살 사망자가 교통사고 사망자의 1.5배인 것이다. 연령별로 보면, 1993년과 비교해서 2005년의 경우, 10대부터 30대까지는 자살 증가율이 2배 미만이다가, 40대와 50대는 2배 내지 2.5배 증가했고, 노년층인 60대 이상의 자살률은 3배 이상 증가, 특히 85세 이상의 자살률이 5.3배로 가장 크게 증가하였다. 아울러, 생산 활동이 가장 왕성한 20대, 30대의 사망원인 1위를 자살이 차지하며, 60세 이상 노인들의 자살률이 전체의 30.3%로, 중년 남성의 자살사망률 23.8%를 크게 웃돌고 있다. 노년층의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으로 노인부양이 거의 전적으로 가족에게 맡겨져 오다가 가족 통합이 약화되면서 그 충격을 노인들이 가장 크게 받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염세비관, 빈곤, 낙망 등의 신변 비관이 2002년엔 전체의 49.4%를 차지했던 것이 2003년 55.6%, 2004년 55.5%로 꾸준히 상승했다(신변 비관, 병고, 치정과 실연, 가정불화 순). 남녀별로는 남자의 자살사망률이 여자의 자살사망률보다 약 2배 정도 높았고, 연령별 자살 사망자수는 한창 일할 중견인 40대가 가장 많았다. 직업별로는, 2003년-2006년의 경우, 일반봉급자 자살이 전체 직업군의 7.3%로 가장 많았고, 농업 종사자가 전체의 6.7%, 노동자가 전체의 6.6%를 차지했다. 자살 사망자 중에서 무직자가 거의 60%에 육박한다. 이러한 자살은 개인 탓이라기보다는 외환위기 이후 악화된 불평등구조 탓이 크다. 염세비관에 의한 자살은 2005년의 연령별 자살 원인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20세 이하의 경우가 57.9%로 염세비관으로 자살하는 생애주기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냈고, 그 다음이 21세-30세(52.8%)였으며,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었다. 반면, 20세 이하 염세비관 자살은 2002년 41.9%, 2003년 53.8%, 2004년 56.6%, 2005년 57.9%로 매년 증가했다. 20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무엇에 대해 그리도 비관하는지 우리 모두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세계자살예방의 날인 지난해 9월 10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경남대 앞에서 경남자살예방협회 관계자 및 학생들이 생명존중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어, 자살방지 대책으로는 (1) 자살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정신질환 조기발견과 치료, 재활체계 등의 정신건강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과 사회적 지원 프로그램 강화, (2) 건강한 경제 기반 구축, 사회의 불안정성 감소, 도박과 범죄 등 사회병리 감소를 통한 이기적 자살 방지, (3)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자아 형성을 위한 가정과 학교의 노력, (4)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의 극단적 표현으로서의 자살을 대신할 수 있는 종교 및 문화의 역할 회복 등이 제시되며, 아울러, 남겨진 가족에 대한 정신·심리상담 및 사회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된다. 자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 역시도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종합적인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자살 시도자가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저소득층이라는 점을 고려해, 자살을 시도했다가 다친 사람의 치료비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해주는 방안,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이 함께 참여하는 ‘생명존중 인식개선 캠페인’ 실시, 자살방지 긴급 상담전화 요원 확충, 자살관련 유해사이트 감독 강화, 농약 농도 하향조정, 건물·다리 등에 자살방지 펜스 설치 의무화, 초·중·고에서의 자살예방교육 확대 등을 포함한 종합대책을 고민 중이다. 미국은 정부 산하 자살예방센터에 매년 100억 원 가량의 예산을 배정하고 있고 일본도 후생노동성이 자살방지를 위한 종합대책을 모색하여 2006년 6월 21일에 자살대책기본법을 제정했다. “자살대책은 자살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이 있음을 감안하여” “국가, 지방 공공단체, 의료기관, 사업주, 학교, 자살의 방지 등에 관한 활동을 실시하는 민간단체, 기타, 관계하는 자의 상호 밀접한 제휴 하에 실시되어야 한다”며 국가의 책무, 지방 공공단체의 책무, 사업주의 책무, 국민의 책무 등을 규정하고 있고, 의료 제공 체제의 정비, 자살발생 회피를 위한 체제의 정비, 자살 미수자에 대한 지원, 자살자의 친족 등에 대한 지원, 민간단체의 활동에 대한 지원 등을 강구하도록 했다. 이런 사례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경우에도 안명옥, 황우여 등의 국회의원 10인이 자살예방법안을 안명옥 의원 대표발의로 2006년 9월 19일에 발의한 바 있었다. 2008년 현재도 아직 의안계류 중인데 올해 4월 안에 통과되지 않으면 다시 발의해야 한다. 한국자살예방협회 등이 수정안을 준비하여 다시 발의를 위해 노력할 예정이며, 정부 차원에서도 일본의 사례처럼 이젠 정부가 나서서 자살예방법을 입법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한다. 자살예방을 위한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인권단체들도 힘을 보태주어야 할 것이다. 자살예방은 이젠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할 사안이다. 보건복지부가 ‘자살예방 5개년 종합대책’을 수립해 몇 년째 추진하고는 있지만 역부족 아닌가? 인권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생명권을 지키는 일에 인권단체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정부 및 국회에 압력을 가하고 시민사회 내에 생명권 의식을 확산시킨다면, 주위의 안타까운 자살이 줄어들고 자살예방법이 제대로 입법화되고 제도화되는데 꼭 필요한 원동력 내지 추진력을 보태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5분에 1명씩 자살 시도가 이루어지는 등, 그야말로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자살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방치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급한 ‘인권 문제’가 또 있을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6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이란 게 제정된 1968년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어느 날인가 수업이 끝난 후 담임 선생은 국민교육헌장을 큰 소리로 다 외운 학생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먼저 할 사람부터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세 번째로 손을 들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시선을 뒤로 하며 자랑스럽게 교실 밖으로 나왔다. 첫 번째 두 번째 손을 들었던 학생들이 중간에 틀려 다시 해야 했으니 틀리지 않고 제대로 외운 건 내가 처음이었다. ‘민족중흥’이니 ‘인류 공영’이니 ‘상부상조’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단어들을 앵무새처럼 외워댄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울 게 있을까마는 초등학교 3학년 꼬마에게야 남보다 빠른 암기력을 과시하고 남보다 먼저 집에 가는 게 일단 기분 좋은 일이었을 터다. 게다가 하나가 더 있었다.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했을 때 담임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잘 했어. 넌 애국자다.” 애국자라니... 드디어 나도 안중근 의사나 이순신 장군 같은 애국자 반열에 오른 거다.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었을까. 국민교육헌장이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던 일제의 교육칙어를 본뜬 것이고 군국주의의 잔재이며 온 나라를 병영사회로 만들고자 했던 박정희 통치 이념의 산물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이나 지나 대학생이 된 후다. 적어도 그 이전까지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남보다 빨리 외운 애국자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다. 자긍심을 가지고 뭘 했냐고? 이를테면 이런 거다. 그 시절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 애국가가 울려나왔고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다. 그럴 때 나는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아서 개긴 적이 없다. 늘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 일어나 다소곳이 가슴에 손을 얹곤 했다. 속으로 딴 생각을 할지언정 그 경건한 애국 의식을 거부한 적은 없다. 또 있다. 매일 저녁 여섯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이란 게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국기를 보며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을 때 난 한 번도 이를 무시하고 그냥 간 적이 없다. 내 눈길이야 앞에 있는 아가씨 뒤태에 머물지언정 손은 늘 가슴에 가 있었다. 그 뿐인가. 뻑 하면 열렸던 반공궐기대회에 전교생이 동원될 때도 몸이 아프다든가 바쁘다든가 핑계를 대며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뒷줄에 서서 친구들하고 장난질을 칠망정 나는 늘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의’ 현장에 함께 했다. 그런 대회에는 늘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던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 아저씨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쓰는 글씨가 무슨 내용인지 저 공설운동장 뒤편에 서 있던 나로서야 알 수가 없었지만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을 감수하는 그 아저씨들의 절절한 애국심이야 모를 리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애국자들이야.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다니...” 나는 마치 내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기라도 하듯 슬그머니 감싸 쥐며 그 아저씨들처럼 애국적이지 못한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곤 했다.   1978년 국기하강식에 맞쳐 발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시민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 시절에는 또한 애국애족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제재가 가해지곤 했다. 온 나라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싸우는 마당에 서양 사람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기타를 퉁겨대고 춤이나 추는 젊은이들도 당연히 제재 대상이 됐다. 역시 퇴폐적인 서양 풍조에 물들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도 즉심에 걸려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맹세하건대 그 시절 나는 길 가던 청년의 장발을 자르고 아가씨들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던 국가 권력에 대해 단 한 번도 불만을 표한 적이 없다. 그런 게 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믿을 만큼 애국자였던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의 애국심을 일깨우는 노래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방송을 타곤 했다. 아침마다 들리는 ‘새마을노래’, 6월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던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하는 6.25 노래, ‘싸우며 일하고 일하며 싸우는’ ‘향토예비군의 노래’, 그리고 ‘백두산의 푸른 정기’가 ‘이 땅을 수호하’던 ‘나의 조국’ 같은 노래들은 달리 배운 적도 없건만 어느 틈엔가 내 입에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늘 하루에 몇 번씩은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극장에서 애국가가 사라지고 국민교육헌장도 잊혀가고 국기하강식도 없어졌고 그 흔하던 궐기대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새마을노래나 ‘나의 조국’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경우도 없다. 툭 하면 사람들을 불러내 애국자로 만들어내던 강제 사항들이 사라졌으니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애국자 노릇할 기회도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애국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난리를 치는 모양이다. 월드컵 때가 되면 매일 원수처럼 싸우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함께 어깨를 걸고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고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 너나없이 독도를 사수하는 애국자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가. 한때 담임선생이 인정한 애국자였던 나지만 언제부터인가 애국이란 말이 조금도 나를 감동시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 애국이라 믿었던 게 애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까닭도 있고, 그 시절부터 누구보다 앞장서서 애국을 설파하고 국가관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자식 군대 빼내고 이중 국적 얻기 위해 원정출산하고 부동산투기로 돈을 벌어온, 누구보다 반애국적 반국가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 때문이기도 하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이제 국가라는 존재보다 나라는 존재, 혹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란 걸 깨닫게 된 까닭이다. 권정생 선생의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에 깊이 감동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405 | 추천: 0
- 대안적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기러기 아빠의 쓸쓸한 죽음….’ ‘기러기 아빠 주검 뒤늦게 발견’ 잊혀질만 하면 신문이나 방송의 사회면을 장식하던 ‘기러기 아빠’ 얘기는 어느 새 우리 사회에서도 진부한 소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조기유학이 늘어나면서 일반적인 현상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주위에서 조기유학을 보내거나 아예 전 가족이 이민을 떠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 부유한 편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우리 동네에서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반 친구들 가운데 1년에 한두 명씩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꼭 유학을 떠난다는 말을 들은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학을 떠난 친구와 두어 달 동안 인터넷으로 이러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어느 날부터 소식이 끊겼다며 아쉬워하던 아이의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낀 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기러기 아빠에서 독수리 아빠와 펭귄 아빠를 거쳐 참새 아빠 등으로 세분화, 다양화(?)되는 이런 현실은 내게 그 실체를 콕 집어 설명하기는 힘들어도 분명 문제성 있는 모습으로 비쳐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에 그리 큰 관심을 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의 삶과는 별개의, 동떨어진 세상의 얘기라는 생각에서였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꿈에도 꿔보지 않았던 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맙소사, 이젠 그게 아니다. 아내가 아이들의 유학 얘기를 꺼낼 때만 하더라도 ‘우리 처지에’ 하는 생각으로 눙치고 지나갔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스스로도 공부할 나이는 지났다며 수없이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던 아내가 대형사고(?)를 치고만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제법 운도 따랐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공부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나설 때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며 얕잡아 본(?)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전직 간호사 경력을 활용해 이러저런 시험을 친다고 준비하더니만 떡하니 생각도 못했던 호구지책에,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나가는 아내의 모습에 예전의 그를 다시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아내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아내의 새로운 변신은 내 삶의 행로도 다시 수정케 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고 있다. 내심 조금씩 삶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마다 대답은 대개 아내의 생각에서 결론을 맺게 된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숨 막히는 곳에서 창의력을 죽이는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 않다. 좀 모자라더라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열어주고 싶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그런 류의 생각이다. 문제는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로 부모의 역량이 평가받는 시대에 아내는 어떤 놀라운 힘으로 그 일을 밀고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국경제 지금도 아내와는 이 문제를 두고 수시로 얘기를 나눈다. 무엇이 아이들을 위하고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인지. 유학의 대상이 꼭 미국일 필요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선택 가능한 곳이 그 곳일 뿐이라는 데는 대체로 공감을 해가고 있는 편이다. (지금의 월급으로는 네 아이의 영어학원비도 댈 수 없는 판이니 경제적으로도 타산이 맞는 일이긴 하다.) 기회가 된다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하자는 데까지 진척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롯한 개인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등 떠밀리듯 한국을 떠나보내는 것 자체가 ‘현실 회피’라는 열패감으로 괴로운 것 또한 사실이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새로운 세상과 부닥쳐야 한다는 점에서 오는 두려움도 적지 않다. 아내의 계획대로라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예의 기러기 아빠, 아니 펭귄 아빠가 되어야 할 판이다. 말 그대로 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나면 비행기 표를 살 돈도 없어 1년에 한두 번 만나기 힘들다는. 이런 마당에 새로이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기러기 아빠를 더 두고 볼 수 없어 영어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며 염장을 지른다. 문제는 영어 교육만이 아닌데도 말이다. “저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아내의 말은 어쨌든 한동안은 ‘펭귄’으로 살아가야 할 내 마음을 더 답답하게 만든다. 수없이 대안을 고민하고 그것을 실현하려 애써왔음에도 결국은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 있어야만 하는 현실에 서글퍼지는 요즘이다. ‘참새 아빠’에서 더 분화돼 또 무슨 아빠가 나타날지 궁금해 하지 않는 그런 세상은 정녕 힘든 일일까. “학부모들의 허리가 휠 정도로 부담되는 사교육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영어 교육만 국가가 책임지고 해 줘도 가슴 펴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더 이상 방송이나 신문에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던져주고 싶다. “문제는 그게 아냐, ○○야!”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56 | 추천: 1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8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KTX를 타고 그의 고향 경남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야~, 기분 좋다”고 외치는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있었고 모처럼 여유가 넘쳐 보였다. 슬리퍼에 셔츠 차림으로 집 앞에 나선 그의 모습은 ‘놈현스러운게’ 아니라 노무현다워 보였다. 이제 시민으로 돌아온 노무현. 그의 5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의 바람대로 제 발로 걸어서 청와대를 나오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만은 일단 이룬 셈이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이룬 여러 성과와 노고를 생각한다면 박수를 쳐드리고 싶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는 않는다. 그가 남겨놓은 숱한 논란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내세운 주요정책 때문에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에 있어 박한 편이다. ‘노명박’, ‘이무현’이란 우스갯소리도 있고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 활동 2개월이 참여정부 5년을 겪은 듯 피곤하다는 얘기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스타일에서 유사점을 찾기도 하고, 개혁과 실용이라는 차이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미FTA가 그렇고 이라크 파병이 그렇다. 아마 많은 국민들이 참여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대표적인 정책들일 것이다.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사이익으로 삼아 새로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실용과 성장주의를 내세우며 차별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을 그대로 승계하는 셈이다. 오히려 더 서두르는 모양새다. 이명박 정부는 4월 미국 방문에 앞서 한미FTA 국회비준동의안을 처리하겠다는 내부방침을 세웠다는 얘기도 들리고, 이라크 쿠르드 지역 석유개발을 따낸 것을 자랑하며 앞으로 자원외교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한다. 이라크 쿠드르 유전개발의 경우 현재 불안정한 이라크나 쿠르드 상황에서 유전개발권 보호를 이유로 자이툰 부대의 파병기간을 또 연장하는 수순으로 가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동안 국정수행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비판문화 형성에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기 보다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있어서 참여정부의 기조와 다르게 갈 경우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분명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는 그의 목소리가 이명박의 목소리와 얼마나 차별성을 가질지 아직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후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환영행사가 끝난 뒤 사저로 향하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친노그룹으로 불리는 한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의 경우 현직 대통령보다 전직 대통령의 임기가 더 길다’고. 분명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직 그의 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책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TV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무실 한 쪽벽에 간직하고 있던 2002년 그를 지지해준 국민들의 편지와 사진들이다. 그 속에 담긴 지지자들의 마음을 아직 잊지 않았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는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12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수위가 영어몰입교육을 제안했었다. 공교육 강화를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영어학원의 설레는 들썩임을 이미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기러기 아빠를 몰아내기 위해서 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더 많은 기러기 가족을 양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교육에 몸담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학교 현장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인수위의 한심함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하려면 해당자들의 의견수렴은 물론 세심하고 정확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져야하고 신중한 계획아래 차분하게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수위는 학교의 영어교육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안다면 그런 정책을 그 여파나 파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토록 쉽게 발설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영어몰입교육을 운운하기 이전에 영어교육의 필요성을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 몰입교육을 하는 나라는 오랫동안 영어권 국가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나 핀란드처럼 다민족 국가로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그러다보니 영어를 통해 소통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비교적 단일민족국가이고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과 과학성을 인정받고 있는 한글이라는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즉 영어를 소통수단으로 삼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능숙한 영어실력의 보유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열쇠인 것처럼 생각하는 인수위의 태도에 굳이 일본과 필리핀의 경우를 비교의 예로 들지 않더라도 영어가 그 기준이 되지 못함을 인지할 것이다. 영어권 국가들이 세계적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지구화시대에 다른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영어가 국제적 소통의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국제적 소통 언어인 영어를 필요로 하는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전 국민이 영어배우기에 목숨 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단지 국가는 필요에 따라 영어 배우기를 원하는 국민이 있다면 어떤 장애도 없이 쉽게 영어를 배우도록 그 여건과 환경을 제공해주면 된다. 그리고 인수위가 영어교육만이 아닌 교육의 목표를 큰 틀에서 제대로 인지하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틀 속에서 영어교육도 자리매김해야하는데 인수위는 현재 행하고 있는 교육의 목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영어교육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의 목표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도록 하겠다는 것은 현재 상황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지만 여타 과목의 수업 내용의 깊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모든 국민을 우매화시키는 것이고 교육의 다양성과 전문성, 창의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물론 여론의 반대로 영어몰입교육이 해프닝이 되었지만 인수위의 영어교육에 대한 인식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영어시간을 주당 1시간 더 늘인다고 영어실력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럴 경우 주당 수업 시간수가 바뀌든가 다른 과목의 시간을 줄여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자의 경우 현재의 많은 주당 수업시간도 문제인데 더 늘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후자의 경우 어느 과목의 시간수를 줄이느냐의 문제가 남게 된다. 여러 과목-특히 국어-을 통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인데 인수위의 생각대로 시행하다가는 영어만 할 줄 아는 국제적 미아를 만드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미국의 속국이니 51번째 주니 하는 비판을 듣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림 출처 - 한겨레21  공교육의 강화가 아닌 영어 사교육의 강화! 기러기 아빠가 아닌 기러기 가족, 펭귄 가족의 확대! 그리고 영어 사교육을 통한 심화되는 교육의 양극화! 그로 인한 부의 대물림 등...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파장을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을 인수위는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체하는 것일까? 진정 공교육의 강화를 원한다면 공교육에 돈을 풀어라! 2, 30년 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학교 환경에서 지구화시대를 논하고 어학을 배우기 위한 Lab실 하나 없는 학교 환경에서 영어몰입교육 운운하는 것은 사상누각이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한 지금의 학교 현장과 기초 없는 건축이 대비되면서 현실성 없고 대책 없는 정책은 정말 사양하고 싶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면서 말만 공교육 강화란다. 이제라도 인수위는 반성해야한다. 그리고 깨달아야한다. 교육은 인간을 만드는 아주 신중하면서도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지난한 일련의 과정이다. 가장 중요한 교육의 중심, 교육의 목표를 잃지 않아야한다. 불도저를 교육에 들이대지 말아야한다. 밀어붙인다고 되지도 않을뿐더러 잘못 밀어붙이고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감내해야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이번 영어몰입교육 사태를 교훈삼아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열린 마음으로 귀담아 듣기를 바란다. 공교육 강화를 위한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를...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09 | 추천: 0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치를 혐오했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인’, 혹은 정치지향적인 사람도 혐오하곤 했다. 이런 정치포비아는, 나와 같은 세대라면 지금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일종의 암묵적 합의 같은 거였다. 직접적으로는 운동을 출세(정치와 동의어로 인식되는)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부류에 대한 경계가 작동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4‧19 세대의 정치적 행보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으려했던 386 세대의 순교자적 의식의 발로였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자 생활의 핸디캡이 될 것을 알면서도 정치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386 세대 역시 나이가 들어 학생운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또한 학생운동 역시 정치의 일환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을 얼굴로 내세운 386 세대(일부)의 정치 참여는 4‧19 세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끝을 맺고 있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장시켰던, 덕분에 정치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를 불식하는데 도움을 줬던 민주노동당은 지금 심각한 내홍에 휩싸여 있다. 누가 뭐래도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는 ‘진보’가 잡고 있었다. 민주화는 시대의 명령이었고, 민주화 인사라는 칭호는 훈장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그 헤게모니는 안티테제로서의 헤게모니였다. 모든 안티는 대상이 사라질 때 힘을 잃는다. 헤게모니의 꼭지점은 지난 2000년 총선시민연대였다. 부패척결을 내세운 시민단체들의 이 운동은,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이 시들해진 2004년 총선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역사는 강물과 같아서 한번 트인 물꼬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범사회적인 개혁 드라이브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2004년 총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상 최초의 진보정당 원내 진출은 이런 개혁 드라이브의 맥락에서 가능했다. 이렇게 말하면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슬프게도,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국민들을 설득한 결과가 아니었고, 노동자들이 노동자 후보를 찍는 계급 투표의 결과는 더 더욱 아니었다. 부패와 무능으로 표상되는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국민들은 새 얼굴, 새 정당을 선택한 것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 역사상 최대의 물갈이가 이뤄진 것이 바로 이때였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의 최초 원내 진출은 민주노동당의 자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관계법 개정도 시민단체를 비롯한 범진보세력(물론 민주노동당도 포함되지만)의 노력의 결과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굳이 민주노동당의 자력 운운하는 이유는 작금의 민주노동당 상황을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노동당은 ‘분열’돼 있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착잡하다. 그러나 ‘분열’ 자체를 백안시해서는 안된다. 분열이란 내부 토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싸움을 지켜보는 대다수 구경꾼들은 싸움 자체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싸움 자체보다는 싸우는 이유가 더 중요하며, 궁극적으로는 싸움 이후가 더 중요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더욱 강도 높은 내부 토론을 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토론을 외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조승수 전 의원의 발언 같은 민주노동당원들의 공개적인 발언이 진작부터 더 많이 나왔어야 한다. 이른바 진보정당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국민들에게 알렸어야 한다. 그동안 국민들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하는지. 심상정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 대표와 다른 비상대책위원들이 지난 2월 4일 오후 국회에서 총사퇴를 발표한 뒤 “국민과 당원들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진보가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분석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구 혹은 보수는 정확히 그 빈틈을 파고 들었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난리를 쳤다.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흔들어댔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 정리 등에만 매달리는 이념정부라서 그렇다는 각주도 달았다. 결국 21세기판 ‘못살겠다 갈아보자’ 캠페인은 성공했다. 수구세력의 악다구니가 통할만큼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 이념적 체력이 허약하다는 점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통탄할 일은, 진보에게는 이렇게 취약한 논리의 자기 프로그램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사노맹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윤아무개씨가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외쳐 화제가 됐다. 지금 진보진영은 그때보다 얼마나 발전한 걸까? 사회주의라고 선언적으로 말하는 게 용기 있게 보였던 시절보다 얼마나 더 깊이가 생겼을까? 웬 이념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내가 원하는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사민주의인지, 아니면 제3의 길인지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가지로 정리된다면 사회 각 분야별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토론해야 한다. 강령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령에 동의하지 못하면 따로 당을 만드는 게 낫다. 그 과정을 당원 및 국민들과 적절히 공유할 수 있다면, 작금의 위기는 오히려 약이 될 것이다. 정치를 혐오했지만 나는 늘 정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297 | 추천: 0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1980년대 중반 나는 지방 도시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학년 여름방학 내내 전국체전 식전 행사 준비를 위하여 학교 근처 운동장에서 마스 게임 연습을 하였다. 2학기에도 10월 전국체전 때까지 오전 수업을 마친 후에는 그 연습을 해야 했다. 2학년 때부터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3학년 때에는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방과 후 10시 30분까지 야간자습을 했다. 그것이 내가 대학 입시를 위하여 한 준비의 대부분이었다. 그 무렵에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모든 과외가 금지되어 있었다. 언론은 학생들의 ‘학원에서의 학습권’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학부모들도 단지 학교가 학생들을 오래 붙잡고 공부를 시켜 주기를 원했다. 내가 살던 도시의 모든 고등학생들은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중학교 3학년 때 치른 연합고사 성적 하나로 인문계 고교의 진학 여부가 결정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특별히 공부한 기억은 없다. 그 때도 과외는 할 수 없었다. 인문계 고교 진학이 결정된 이후 학생 자신이 학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당시 나는 동네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었음에도, 버스로 20분 이상 걸리던 곳에 있던, 설립된 지 10년이 채 안된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나는 별 불만 없이 그 고등학교를 다녔고, 부모님 역시 그 것 때문에 나의 장래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에도 과학 고등학교란 것이 있었다. 그 곳은 과학기술대학교와 같은 특성화된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실제 그 학생들의 대부분은 대학에서 이공계통의 전공을 선택하였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합격 여부는 내신 등급, 학력고사 성적, 논술시험 등의 성적으로 결정되었다. 현재 제도와의 차이점은 논술시험 점수 편차가 매우 낮았다는 것, 학력고사의 과목 수가 많고 문제 유형이 비교적 단순했다는 정도였다. 내 기억으로는 논술시험의 점수 편차는 1, 2점이었다. 문제 역시 기초적인 작문 실력을 보는 정도였다. 따라서 대학들은 내신 등급과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해야 했다. 당시에도 서울의 어떤 지역의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한다는 얘기는 있었다. 그러나 대학이나 언론이 학교 간 학력 편차나 대학의 학생 선택권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고교평준화 시행계획이 발표된 1973년 3월 1일자 한국일보  신문  1980년대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나처럼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를 나와 단답식의 학력고사를 치른 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독재 정권이라는 어두운 환경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는 없었음에도, 학생들은 자기 돈으로 인문사회학 책들을 사서 읽고, 당시 막 판매되기 시작한 퍼스널 컴퓨터를 익히고 공부하였다. 대학원에 진학하였던 학생들은 생활비를 벌며 자신의 공부를 해야 했었다. 그렇게 공부했던 평준화 세대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지금 당연한 것처럼 얘기되는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제 등과 같은 기초적인 민주주의 제도, 과거사 청산 등은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그들이 없었더라도 지금 수준의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역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한국 경제가 다시 회복하기는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 때 평준화 세대들은 부패한 정권을 교체하고, 정보통신기술을 도입하여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산업 구조가 바뀔 수 있었던 것 역시 평준화 세대의 공이었다. 평준화 세대들이 젊은 시절에 가졌던 희망과 그들이 익힌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하였다. 요즈음 교육 제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의를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고교 평준화 정책과 대학 입시에 관한 것이다. 그 어지러운 논의를 보면서 나는 궁금해지곤 한다. 평준화 정책 및 획일적인 대학 입시 제도가 철저하게 관철되던 1980년대, 대학에 입학하였던 평준화 세대들이 그렇게 실패작이었던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이 이룩한 발전 중 상당수는 그들의 몫이다. 요즈음 거론되는 평준화 정책의 단점이 나타난 이유는 그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부족하였던 관료와 학자, 언론의 책임이 크다. 그들은 평준화 정책의 올바른 운용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입시 제도를 수차례 바꾸고 특수목적고의 편법적 운용을 방임함으로써 평준화 정책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정책이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문제점이 고교 평준화 제도 때문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사실, 나는 교육에 관하여 문외한이다. 따라서 내가 교육 제도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다만 요즈음 교육에 관한 논의를 보면서, 자신의 품질(?)과 인재로서의 적격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평준화 세대로서 나름대로의 변명을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당신이 중대한 범죄의 피의자로 지목되고 있다. 결백을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기관에서는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아보라고 권유한다. 어차피 죄를 짓지 않았으면 무슨 걱정이냐고 묻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 것일까? 대체로 80~90%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한다. 우리 말의 십중팔구라는 말이 있듯이 거짓말탐지기는 매우 신빙성이 높은 조사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저 80~90% 라는 숫자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의문이 든다.  범죄수사와 관련한 위 통계가 의미가 있으려면 다음 전제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위 통계는 범죄수사와 관련하여 작성된 것이어야 한다. 형사처벌이 전제되지 않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거짓말과 형사절차에서 이루어지는 거짓말은 도저히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다. 부모님께 거짓말하는 것과 수사기관에 거짓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긴장되겠는가.  둘째, 대상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에 관해 객관적인 증거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탐지기 조사가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없거나 매우 부족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말탐지기가 적어도 범죄 입증과 관련해 매우 신뢰성이 높다는 통계는 상당한 정도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법원이 거짓말탐지기 조사결과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입장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처럼 신뢰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조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상당히 신뢰도가 높은 것을 전제로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진술거부권을 사실상 침해하는 등의 문제가 있으므로 가능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검사관이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 피의자 진술의 진위 여부를 살피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수사기관은 거짓말탐지기 조사시 대상자의 동의를 받기 때문에 진술거부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받는 피의자가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를 떠들석하게 했던 BBK 사건의 김경준이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거부했다는 보도를 보고, 내가 처음 했던 생각은 “김경준이 거짓말이 했구나”였다.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거부하는 것은 더 큰 의심을 낳기 때문에 피의자가 이를 거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형사절차의 기본적 원리에도 반한다. 수사를 하더라도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피의자에 대한 수사절차를 종결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말탐지기라는 과학적(?) 수단을 동원하여 피의자의 내심까지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의무가 없다. 속마음이야 말로 양심의 기초이며, 인격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사람의 속마음을 거짓/진실로 임의로 구분하여 버린다. 이러한 점 때문에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그 신뢰성 여부를 떠나 적어도 형사절차에서는 실시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프리카 일부지역에서는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끼리 새알을 주고 받도록 했다고 한다. 진범이 가장 긴장하고 있을 것이므로 새알을 깨뜨리는 사람이 진범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평소 뭐든지 잘 깨뜨리고 부수는 편이기 때문이다. 거짓말탐지기 조사 역시 새알 주고받기의 진화된 버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75 | 추천: 0
한해가 지나고 새날이 밝았다. 어느덧 2008년. 쥐의 해다. 정신없이 한해가 지나가서 도무지 2007년에 개인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해가 마무리될 무렵의 일과 기억은, 앞으로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겠다는 생각에 좀체 머리에서 그 기억이 쉬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런저런 분석과 전망들이 있지만 어쨌거나 별로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제는 그저 그나마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의 기대를 너무 심하게 저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마저 생긴다. 얼마 전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성탄의 의미에 대한 설교 중 ‘금관의 예수’를 목이 메며 부르시는 것을 들었다. 가끔 노래방에서 부르고 싶어 찾아보아도 없던,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였다.   1.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2.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전곡을 다 부르지 않고 설교를 이어갔지만 마음속으로 나머지 가사를 읊어보았다. 70~80년대의 혹독하고도 암울한 상황과는 다른 지금이지만 여전히 상대적 핍박과 빈곤과 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숱한 비정규노동자들과 영세업체의 노동자, 농민, 그리고 이주노동자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한국의 숱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 등에서 소리 높여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지만 마구간 구유에 첫 보금자리를 튼 예수는, 기득권층인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를 공격했고 또 그들로부터 계속 감시와 노림을 당해왔으며, 세리와 창녀들과 가난한 민중을 친구삼아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던 불온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옥죄던 ‘율법’ 대신에 사람을 가장 중심에 놓는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던진 혁명가 예수는 내가 보기에 구약의 이스라엘 부족신인 ‘여호와’와는 많이 거리가 있는 존재로 보인다. 어쨌거나 한국의 개신교를 비롯해 천주교든 성공회든 예수가 아니고는 이스라엘 민족 종교인 유대교 틀 안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예수가 가장 중요한 틀일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 예수가 오늘날의 한국에 온다면 과연 어떠할까? 과히 어렵지 않은 상상이니 독자 여러분의 자유로운 상상에 맡긴다.     2006년 12월 21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개정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총회 총대 비상기도회에서 목회자들이 삭발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난해에는 옷차림도 괜찮고 얼굴에 기름기도 번지르르한 일군의 사람들이 머리를 깎는 진풍경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개신교의 유력한 목사들이었다. 아마도 개신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장로들이 사립학교를 경영하는 통에 그 눈치를 아니 볼 수는 없겠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그들의 행태에 쉽게 동조하다 못해 머리까지 깎은 일은 안쓰럽다 못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이나 이주노동자, 또는 부당해고 노동자 등 절박한 입장에 몰린 약자를 위하는 일이었다면 모르겠으되 이 나라에서 아주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가진 자들을 위해 머리를 깎는 그들은 이미 돈의 위력이 막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들의 ‘개’가 되기로 기꺼이 작심한 것일까? 그 누구보다도 사회적 가치 이상의 가치와 도덕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그들이 아예 발가벗고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나팔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예수를 팔지 말고, 과감하고 솔직하게 이 사회에서 예수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가치는 이제 폐기되었다고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이 사회는 ‘맘몬’이라는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리 알라고 정정당당하게 밝혀야 하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그들이 발 벗고 나서서 지지와 성원을 아낌없이 보냈던, 친기업적 정책과 능력 중심의 입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경제 중심주의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이제 아무 눈치 볼 일 없잖은가? 교회에 아무리 부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이 넘쳐도 “신자유주의여 만세!”라고만 외친다면, “부자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들의 위상과 주머니도 더욱 든든해질 테니 그야말로 ‘지상의 천국’이 당신들에게 보장되지 않겠는가? 물론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하느님과 내세의 부활 및 천국이란 없다고 믿는 불신자들의 전형이니 이생에서라도 맘껏 누리겠다는 생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단지 그들이 믿지 못하는 종교의 이름으로, 강단에서 궤휼로, 온갖 궤변과 감언이설로 숱한 사람들에게 거짓을 늘어놓으며 혹세무민하지 말고 하루빨리 정체를 밝히길 바랄 뿐이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76 | 추천: 0
우리나라는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7년 9월 30일 현재 국내체류외국인은 1,018,036명이고, 이들 중 합법체류자(등록외국인)는 788,873명이고, 불법체류자(미등록외국인)는 229,163명으로 불법체류율은 22.5%에 달합니다. 또한 결혼이민자는 2002년 34,710명에서 2007년 9월 30일 현재 107,641명으로 불과 5년 사이에 3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100명 중 2명은 외국인으로서, 우리 사회가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급속하게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미등록외국인 단속을 강화하면서 인권침해의 지적도 받았지만, 범칙금 면제 및 입국규제 완화 등을 통해 미등록외국인의 자진출국을 유도함으로써 외국인 체류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인권침해와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었던 산업연수생제도를 폐지하고 고용허가제를 통한 합법적 노동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신매매의 형태라고 할 수 있었던 결혼이민자 여성들의 정상적인 한국내 정착과 올바른 가정확립을 위해 여성가족부를 통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 확대도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산업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치료를 위해 산재보험을 적용하고 외국인 산재환자 전용 치료병원을 설립하는 등 많은 노력과 개선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 바탕에는 국내체류 외국인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인도적 차원에서 애쓴 수많은 NGO단체들과 종교단체들의 노력과 협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외국인체류자들에 대한 배타성보다는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는 사회통합의 의지가 높아진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경제활동에 기여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불어 사는 성숙된 사회가 된 것입니다.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병원의 병실에서 한 환자가 침대에 누워 병마와 싸우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이러한 배려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재해가 아닌 지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2007년 10월 1일부터 국가의 의료비 지원이 중단되자 그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의 무료진료를 담당했던 병원들도 재정적 이유로 치료지원을 중단하였습니다. 특히 중병에 걸린(암, 뇌질환, 심장병 등)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치료를 중단해야 하며, 죽음의 위험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만, 이들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의 병으로 인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위협입니다. 사실 이들이 고국에 돌아간들 경제적 이유로 치료받기는 힘들고, 그 부담을 가난한 가족들이 고스란히 받아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처지입니다. 그렇다고 중병에 걸린 외국인 노동자들을 모두 우리가 치료해 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들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들이 이렇게 중병을 앓는 이유는 한국에서 일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평소 지병이 있었지만 본국에서는 가난 때문에 병원 진료도 한 번 받지 못하고 그럭저럭 견디다가 한국에서 힘든 일을 하다 보니 그 병세가 악화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료1)노동사목위원회 외국인 상담소 통계(2006년 1월 1일-2007년 10월 30일) 위 상담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지원 요청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50%이상이 중병환자이며, 대부분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이들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신분상의 약자로서 떳떳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 D씨는 38세의 베트남인으로서, 2004년 7월 15일 한국에 입국하여 산업연수생으로 일했습니다. 2년 전부터 배가 아팠으나, 베트남에서 가져온 ‘배 아픈데 먹는 약’을 먹고 견뎌왔습니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비 걱정 때문에 쓰러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아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전부터 통증이 심해져 국립의료원(정부에서 의료비를 지원하는 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검사결과 대장암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사실 D씨로부터 도움의 요청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병원진료를 도와주면 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난감했습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해서 급하게 수술은 하였지만, 앞으로 지속적인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총 11번의 항암치료(항암제 주사와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하는데, 매번 230여만 원의 듭니다. 정부의 의료비지원도 중단되었기에 100%로 본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또한 치료 중 체류연장 신청을 하지 않아 현재 미등록외국인(불법체류자)의 신분이 되었고, 의료보험도 없어서 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D씨에게 지금의 상태를 알려주었을 때 ‘살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자신이 죽으면 가족이 죽는다고 어떻게 해서든 치료비를 마련하려 애쓸 테니, 꼭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저희도 이천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D씨의 가족은 아내(38세)와 딸(7살), 아들(2살)이 있는데, 베트남에 살고 있고, 고향에서 D씨를 도와 줄 수 있는 일가친척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의 치료비를 보테기 위해 베트남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녀가 벌 수 있는 금액은 우리 돈 5만 원 정도입니다. 남편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하루도 쉴 수 없는 상태이기에 아픈 남편을 간호하러 오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베다니아의 집(외국인 환자 쉼터-까리따스 수녀회 운영)에서 수녀님들이 D씨를 간호하며 치료 일정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먼 타국에서 죽을병에 걸린 남편의 소식을 접한 아내의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에게는 무엇이라 해야 할지 막막할 것이며, 안타까움 이상으로 공포심으로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픈 외국인 노동자들을 다 치료하며 도와 줄 수는 없겠지만, 단 한명이라도 살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살려 달라 외치는 그들의 부르짖음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의 외침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과 걱정에 목메는 외침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도 6백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이민이든 노동이든 학업이든 다양한 형태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이 모두 건강하게 차별 없이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며 어려움에, 특히 중병에 처한 이들을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을 돌보는 것이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가족들을 돌보는 일과도 같지 않을까요? 이들이 돌아가 고마움의 마음으로 그들 곁에 있는 우리 가족들을 잘 돌보아 줄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사는 지구촌의 모습이 아닐까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3차에 걸친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앞으로 8번 남은 치료비 마련을 위하여 여러 기관과 선의의 뜻을 가진 분들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잘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무조건적인 자비심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3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