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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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감염병 시대. 비대면적 관계의 일상화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외부활동이 줄어들고, 가계 수입이 감소하고, 학습권이 위축되고, 친밀감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흔쾌히 불편과 고통을 감수한다. 그 어떤 것도 생명 자체보다 우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 사태 이전의 삶으로 온전히 되돌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자본과 정치권력의 핵심들은 비용과 효율성의 차원에서 이미 시민들의 삶을 새롭게 기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교육과 경제, 문화 영역의 상당 부분이 온라인 혹은 비대면적 방식으로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학습중이다. 특정한 기술과 지식이 주목받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동안, 어떤 일자리는 사라지고 어떤 공간은 폐쇄되고. 사회의 가장 위험한 모서리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소리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디스토피아의 상상력.  하지만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와 피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되는 동안, 작은 기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숨죽여 있던 비인간-생명들의 조용한 활기. 베네치아 수로의 물색이 투명해지자 사라졌던 백조들이 돌아왔고, 누렇고 탁하던 서울의 봄 하늘이 몇 해만에 쨍한 푸른빛으로 선명해졌다. 차량의 통행이 끊긴 로키산맥 근방의 고속도로는 순한 야생동물들의 산책로가 되었고, 사라졌던 곤충과 식물들이 다투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로소 지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성에서 본 베네치아 모습.  2020년 4월13일(위)과 2019년 4월19일(아래). 흰점들이 크고 작은 배들이다. 유럽우주국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  돌아보면, 코로나19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전에도 지구는 끊임없이 위험의 징후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상고온현상이 지속되면서 빙하가 녹아내리고, 크고 작은 지진이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생태계의 교란으로 특정 생물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고, 거처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인간들의 생활권역 안으로 드물지 않게 끼어들곤 했다. 보다 쾌적하고 풍요로운 문명의 삶을 향한 욕망이 가속화되면서 생명계 전반의 안정성은 급격히 와해되어갔고, 서식지를 잃고 방황하던 어떤 동물들은 바이러스의 매개체 혹은 숙주가 되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개발과 발전, 이윤과 축적, 과시와 폭력을 둘러싼 욕망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지금보다 더 진화된 형태로 우리 앞에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말해야 할 것은 유연한 사회적 거리두기 혹은 거리두기의 해제 이상의 그 무엇이어야만 하는 건 아닐까. 바이러스의 확산과 감염을 막기 위한 방역,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 사회 경제적 활기를 기대하는 국가적 차원의 기금 분배는 오히려 사태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숙고해야 할 것은 오히려 거리두기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인간-생명들과 거리두기. 그것들이 본래 자신들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기. 훼손되고 위축된 지구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  이런 점에서 나는 지난 4월 15일의 국회의원 선거가 제법 아쉬웠다. 수구파 정치 세력의 축소는 그 자체로 반길 만한 것이었지만, 거대 여당과 불가피함을 핑계로 출현한 위성정당의 협업은 한동안 국회 안에서 ‘다양한 소수의 목소리’를 독점하거나 은폐할 테니까. 만약, 창당준비에서 멈춰버린 동물당이 실제로 정당 등록을 마치고 선거운동 판에 뛰어들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래서 유럽의 어떤 나라들처럼 의회에 좌석을 차지한다면, 그들이 동물인지감수성을 주장하고 동물인지정책을 만들고 동물권을 입법화한다면, 나아가 동물들에게도 시민권을 주자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치에 관한 조금은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을 시작하게 되지 않았을까. 저 유명한 68혁명의 구호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근본을 재기획할 수 있는 ‘상상력에 권력을’ 부여하는 데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점에서 정치란 무한히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법의 언어로 갈무리하는 능력, 보다 많은 그리고 충분히 다양한 삶들을 함께 살릴 수 있는 상상력의 현행화와 관련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2020-04-29 | hrights | 조회: 876 | 추천: 0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고희(古稀)를 보낸 지 어언 10년, 올해가 내 팔순(八旬)의 해다. 세월은 참으로 잘도 간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지나간 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짧기만 하다. 유종(有終)의 미(美)가 있는 삶을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자주 반문하곤 한다.  지나온 삶을 과연 후회 없이 살아왔는가? 자문해 보면 후회도 많은 삶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격동의 시대였기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순간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기쁘고 즐거움보다, 질곡의 순간들이 더 많았다.  허나 한편으로 궤변도 늘어놓았다. 시대와 조상을 잘못 만나서, 아니 운이 없어서라고 해 보았다.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며, 노력도 부족했는데 운 탓이라면, 이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에게도 기회와 변화도 있었다. 결국 노력한 만큼 작은 결실을 얻기도 했었다.  해방공간과 6․25 전쟁전후에서, 철부지였던 어린 내가, 맏형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였었다. 그때 각인되었던 아픔이, 성년이 되어서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조국분단과 과도기에 스물두 살의 장형이 죽임을 당했다. 그 후 60년 만에야 진상규명되고 명예도 회복되었다. 참으로 오랜 슬픔에서 기쁨의 순간이었다.  나는 반백년 전, 가면 죽는다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다.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나도 모른다. 그때 1965년 2월 해외 최초파병은 두려움에 도전이었다. 참전 13개월 동안 생과 사의 기로에서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했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분단국의 평화와 통일을 더욱 갈망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나는 부역자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신원 조회에 좌절했었고, 둘째 형이 의용군과 국군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상이 제대를 했다. 그 후 형은 세 번의 선거로 인해 집안이 기울어져, 내 진학의 꿈도 접어야만 했었다. 허나 ‘배우고 아는 게 힘이다’에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계속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할 뻔도 했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내 삶에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한편 열일곱 살에 청상과부가 되신 양할머니가, 우리 8남매 손 자녀를 마치 산모처럼 척척 받아내고 양육하셨다. 이런 연유로 양할머니는 열녀로, 부모님이 효자효부로, 나는 3남이면서 50년이나 조부모님을 모셔 효열 3대가로 이어졌다. 8남매 중에서 내가 기준과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 집안은 어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끔찍한 생각이었다. 아마 풍비박산 집안이 되었을지도 모를 처지였다.  이런 사실이 자화자찬으로 비춰질까, 송구한 마음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자성하고 자책하면서 다짐하였다. 과연 남은 생을 어떻게 마무리를 잘해서 온전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까! 또한 과오를 뉘우칠 수 있었을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믿음으로 살아왔던 길이 유일한 방법이 된 것이다.  첫 번째가 부족한 글쓰기다. 초등학교에서 글짓기에 흥미가 있었고, 성년에도 더욱 정진하면서 만학의 꿈을 이어갔다. 가방끈이 짧다는 자괴감도 있었지만, 열심히 노력해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부족하기만 했기에 욕심도 부렸다. 진력하여 여러 권의 책도 펴냈지만, 역시 부족하기만 하다.  나는 다방면의 글을 쓰고 있다. 다양한 문학의 장르 외에 칼럼도 쓰고, 또한 서예도 연마했다. 여러 작품도 있지만 역시 부족하기만 했다. 글쓰기는 끝없는 퇴고와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데, 게으름과 노력부족으로 미진한 작품을 내고 만다. 그러기에 작품이 완성되면 바로 후회를 하곤 하였다.  내 평생 나에게 제일 크게 다가왔던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느냐? 하는 무거운 과제였다.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말로만 노래만 하지 말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실천운동에 적극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보다 큰 노력과 실행들이 부족하기만 했다.  그간 실천을 위해 평화통일에 다가가는 여러 단체의 일원이 되고, 간부가 되기도 했다. 분단의 현실, 여기에는 일제에 36년을 지배당하고도 진정 해방이 아닌 분단이, 외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에 우리 8천만 동포들이 분단을 외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32세 안중근 의사와 24세 윤봉길 의사가 처자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정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윤 의사는 나의 집안 윤문의 형제항렬이기도 하다. 8․15 광복이 분단으로 이어져, 75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분단국, 언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룰지 난망하기만 하다. 허나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을 이겨내야 하는 우리의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소원인 평화통일조국을 기필코 이뤄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일보다 절박하다. 나는 그간 통일교육위원으로, 평화연대의 회원간부로, 평화만들기, 희망연대, 통준사의 공동대표로 매진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기만 하다. 아무리 통일을 원하지 않는 동포나 주변 외세가 존재한다 해도, 이를 극복해 내야만 하지 않을까.  지구상에 너무도 오랜 분단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존경하는 안중근 윤봉길 두 의사와 선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다짐한다. 사실 오래전 나는 최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남루한 후회를 했었다. 분단 조국의 통일도 이루지 못하면서, 남의 나라 통일을 방해하는 용병군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없는 자괴감을 갖게 되었다.  그 베트남 인민들은 17도선을 평정하여 세계최강대국인 미국을 이겨내고, 당당히 남북베트남 통일을 이뤄냈었다. 진실로 베트남 통일을 부러워하고, 우리가 용병으로 참전해 지은 잘못을 다시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베트남은 이미 남북이 통일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당당히 이겨낸,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어, 한편으로 부럽기만 하다.  나는 통일된 베트남을 몇 차례 다녀오면서, 그들에게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지나간 원한을 모두 용서한다고 했다. 그들은 당당히 외세인 강대국을 물리치고 세계 만방에 통일된 나라로 발전에 진력하고 자부심도 강했다. 나는 과거 용병으로 참전해 그들에게 아픔과 슬픔을 안겨준 사실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였다. 그들은 지난 우리의 잘못을 용서를 하고 수교도 이루어졌다. 사진 출처 - tvn "디어마이프렌즈"  필자는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면서, 지난 파란만장한 삶을 돌아보았다. 내 스스로는 지난 삶을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허나 부족하고 미진한 일들도 많기만 하다. 그러기에 언제나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면서 살아왔다. 비록 나이는 들어가지만,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행하고 스스로 반성을 하곤 한다.  나는 먼저 가신 안중근, 윤봉길 의사(義士)들처럼 비록 젊지 않은 팔순의 나이에 들었지만, 두 분의 삶을 본받아 살아왔고, 살아가려 다짐해 본다. 앞으로 생애를 ‘마무리 잘하는 삶’으로 정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길을 가고자 더욱 진력하련다.  그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왔는가? 자문하며 그간 나와 맺은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한다. 한반도에 평화통일은, 우리 8천만 동포들의 꿈이요, 소원이다.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자 재삼 다짐해 본다. *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회원. 한국문인협회원. 산영수필문학회장. 서예초대작가. 소설집(못다 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고희기념문집” ‘희수 유감’ 등 다수 산영수필문학회 회장역임 근묵회, 구암서문예원장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2020-04-22 | hrights | 조회: 961 | 추천: 2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불길한 사태들이 줄을 잇고 있다. 죽음의 불안과 공포로 유례없는 경제적 재앙을 몰고 온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위성 정당들의 등장으로 조삼모사 국민적 사기행각이 되고 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총선, 첨단 뉴미디어를 악용한 대대적인 성 착취 동영상 n번방 사건 등이 국민 모두의 심정을 한껏 짓밟는다. 일련의 사건들이, 주어진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적 감정의 방어선을 여지없이 뚫고 들어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신천지 운운하는 30만 명에 달하는 반사회적 · 비상식적인 거대한 종교 집단의 존재가 드러나고, 실제의 성 착취 동영상을 즐기면서 26만 명에 이르는 가학적 정신병적 증상의 이른바 ‘n번방 회원들’의 존재가 드러났다. 이들과 함께 묶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아울러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알 수 없는 국회의원 선거와 후보 공천을 둘러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랬다저랬다 원칙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전투구의 양상이 특히 제1야당을 중심으로 격화되어 국민의 신성한 정치 참여권인 투표권을 농락하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련의 사태들이 엎친 데 덮치는 식으로 연발한 것이다. 게다가 현직 검찰총장의 장모라는 인물이 수백억의 은행 잔액 증명서를 위조한 행위로 공소시효를 겨우 며칠 앞두고 뒤늦게 기소되었다. 고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 동안 전혀 미동도 하지 않다가 검찰은 언론의 강인한 보도에 밀려 뒤늦게 소환 조사하고 울며 겨자 먹듯이 공소시효 만기를 앞두고 막판에 기소했다. 이러한 검찰의 모습은 불과 몇 개월 전 검찰의 수사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해서 강제 압수수색과 조사로 전국을 들끓게 한 ‘조국 사태’에서의 검찰의 모습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중첩됨으로써 비극적인 희극이 되었다. 만약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검찰총장 장모 사태’는 공권력 행사의 자의성과 정당성을 둘러싸고서 사회정치적인 담론을 들끓게 했을 것이다.  그나마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의료인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모범 운운할 정도로 국민 공동성을 발휘해 대처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조차 여전히 준동하는 바이러스에 대처하느라 전 국민의 일상적인 삶이 전면 중단되다시피해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위안 수준에 그치고 있다.  불안과 공포, 허탈감과 무력감, 원한과 분노, 자탄과 자괴감 등이 뒤범벅되어 집단 전체로 확산하면서 각자의 개성적인 삶을 유지하는 감정의 인격적 방어선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 사회의 하부가 어떤 괴이한 욕망으로 어떻게 조성되어 흘러가고 있었는가, 흔히 하는 말로 그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영생 운운하는 생명욕이 종교라는 왜곡된 탈을 쓰고 하부의 집단적 무의식을 파시즘적인 방식으로 암암리에 분출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미성년의 여자아이들을 오히려 선호하면서 악마적으로 돌변한 성욕을 채우기 위한 집단적인 범죄가 자행되고 있었다. 최첨단의 복합동영상 기술 매체가 주는 편의를 십분 활용하여 공갈과 협박의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성 착취를 수십 만의 ‘멀쩡한’ 인간들이 경쟁하듯 흥분의 먹이로 삼았던 게다. 이러한 사회 하부의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집단 무의식의 발호를 거울삼아 사회의 최상부를 점하고 있는 정치 권력자들의 집단 무의식의 모습이 무슨 유령처럼 비치기조차 한다면, 사회 전체가 비극적인 운명을 실현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2.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하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지만, 그런 인간들이 수십 만에 이른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의 근본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하고, 나 자신 역시 그런 근본에서 출발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력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저 인간은 혹시 코로나 감염자가 아닐까?’, ‘저 인간은 혹시 신천지 교도가 아닐까?’, ‘저 인간은 혹시 n번방을 드나드는 자가 아닐까?’, ‘저 인간은 혹시 인간이 아닌 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역병 바이러스처럼 암암리에 퍼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마침내 ‘나 역시 얼마든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도 저 인간일 수 있다.’ 하는 생각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저들과 다르다고 분명하게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나도 얼마든지 악하거나, 악한 쪽으로 욕망을 몰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숨겨져 있고 노골적으로 드러나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미스럽기 짝이 없는 악의 폭력이 집단을 통해 대대적으로 실현되면, 그 기화로 숨겨져 있던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예감에 불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저들, 아니 저것들을 불길하기 짝이 없는 놈들로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아울러 저놈들, 저것들의 불길함이 나에게 옮겨붙으면 나 역시 아예 불길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바이러스에 빗대게 된다. 바이러스는 비록 자연이긴 하나 나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악의 폭력을 나에게 행사한다. 정말이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옮겨붙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불길한 존재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 수단인 나도 덩달아 불길한 존재가 된다. 우연의 주사위가 짝을 맞추게 되면 나도 자칫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 나도 언제든지 남에게 불길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 속에 불길함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소질이 있음을 뜻한다. 더군다나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도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도 나 자신도 내가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기침과 발열과 숨 가쁨의 증상을 보이면, 내 속에 숨겨져 있고 드러나서는 안 되는 바이러스가 노골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함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자연적인 폭력에 전염되면 안 되듯이, 사회적인 악의 인위적인 폭력에 전염되면 안 된다.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전염된 자를 나로부터 격리해야 한다. 그래서 ‘저 사람이 전염된 자다. 저 사람을 격리해야 한다.’라고 크게 외쳐야 한다. 그리하여 전염된 사람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고 최대한 힘을 모아 치료해야 한다.  중앙사고수습본부와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어느 곳에 한 명이라도 확진자가 발생하면 그곳을 폐쇄하고 확진자의 이동 경로를 최대한 샅샅이 뒤져 접촉자들을 검진하고, 결과에 따라 격리조치와 치료를 해 나간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선두에 서서 총지휘를 하다시피 하면서 말 그대로 발본색원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어쨌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단 한 명에게라도 들러붙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국민 대부분은 이러한 국가의 노력에 최대한 협조함으로써 바이러스가 가하는 자연적인 악의 폭력을 근절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이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방역 및 의료 체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재기 등이 전혀 없는 합리적인 국민으로 칭송을 얻고 있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n번방 성 착취 사건이 드러났다. 그러자 청와대 민원 게시판에 이른바 ‘박사방’의 운영자와 참여자에 대한 엄정한 수사와 신상 공개를 요청하는 500만 명에 달하는 민원이 순식간에 쇄도했다. 성인에 속한 약 1/6의 사람들이 청원을 했으니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주모자뿐만 아니라 26만 명에 달하는 유료 이용자들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청원이 2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많은 국민이 이번 성 착취 동영상의 불법적인 촬영과 유포의 범죄 유형이 악질적이고 유료 가입자들의 의사가 적극적이라고 판단했고 그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런 국민의 뜻을 받들어 대통령, 주무장관, 국회의원들, 여성단체들, 관련 범죄 분석 전문가들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관용의 엄정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했고, 경찰과 검찰은 이에 즉각 호응하고 나섰다. ‘조주빈’이라는 주모자의 이름과 얼굴 및 신상이 공개되었고, 검찰에 의해 12,000쪽에 달하는 수사기록물이 즉각적인 분석에 들어갔다. 사진 출처 - freepik 3.  성 문제에 이렇게 ‘폭넓게, 아주 민감하게, 모두가’ 반응한 적은 없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반응 자체가 나로서는 충격이다. 충격적이라고 해서 잘못된 측면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현상에 뭔가 독특한 원리와 그에 따른 실제가 작동하는 것 아닐까, 하는 묘한 불안을 수반한 궁금함이 크게 앞선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한 자연의 폭력 사태와 n번방 성 착취 동영상 촬영과 유포에 의한 인위적인 폭력 사태는 뉴스의 머리를 앞다투다시피 하면서 심지어 며칠 남지 않은 총선에 관련한 소식들을 뒤로 밀어내고 있다. 앞의 사태는 생명에 대한 자연의 폭력이고, 뒤의 사태는 성에 대한 인위의 폭력이다. 생명과 성은 워낙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이 생겨날 수 없고, 생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이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에 대한 반응은 성의 위협에 대한 반응과 연결된다. 생명을 천시하면 성도 천시된다. 전쟁이 일어나 생명을 한갓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성 역시 한갓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생명이 고급스럽게 한껏 발휘되면, 그에 따라 성도 고급스럽다 못해 신성해진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마침 생명이 절대적으로 소중하다는 인식이 전국적인 수준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확산하는 와중에, 공갈과 협박 및 회유를 통해 강압적으로 성을 험악하게 노출하도록 하는 자들과 그러한 노출이 폭력적인 착취에 의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폭력적인 착취에 의한 것이기에 오히려 탐닉하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성을 천박한 수준으로 끌어내려 파괴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명과 성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능적일 정도로 암암리에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누구 할 것 없이 생명이 절대적으로 소중하다는 인식을 실감하는 상황에서 성을 크게 집단으로 전락시킨 자들을 적발하게 된 것이다. 이에 그들이 자행한 성폭력의 악행이 상대적으로 더욱 심중하게 다가와 견딜 수 없는 분노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생명에 빗댄 성 착취의 폭력 사태에 대한 이러한 대대적인 반응을 보면서 왠지 불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전락해버린 성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불안한 절망 때문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또 그런 불가능성이 첨단의 자본주의적인 기술 문명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차피 자본주의 문명을 벗어나 살 수 없는 나로서 그러한 공모에 미필적으로 이미 가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범죄자들을 인지하여 조사하고 재판에 넘겨 처벌을 책임진 공권력을 담당한 자들을 믿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일거하여 직접 범죄자들을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까지 처벌하자고 하는 것이,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에 의해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 감염된 자들을 철저히 격리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그들뿐만 아니라 바이러스와 무관한 자임을 스스로 확신하고자 하듯이, 그들 자신에게 숨겨져 있고 드러나서는 안 되는 뭔가가 현실화되지 못하도록 하려는 무의식적인 심사가 강화되면서 분노한 나머지 그렇게 대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은 아닐까?
2020-04-01 | hrights | 조회: 976 | 추천: 1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처음엔 몰랐다. 그것이 내 삶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발 보도로 접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그때만 해도 ‘우한 폐렴’으로 통하던 이 바이러스성 질환이 우한을 넘어 중국 전체로, 중국을 넘어 세계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2020년 2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편견을 유도할 수 있는 특정 지명이나 동물 이름을 피하도록 한 원칙에 따라 'Corona Virus Disease 2019'를 줄인 'COVID-19', 즉 ‘코로나19’로 이름을 바꾼 후 부쩍 그것이 내게 가까이 왔다. 어쩌면 선후가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러스 확산이 그 이름을 불러왔는지, 그 이름을 달고 바이러스가 더 퍼졌는지 말이다.  시작은 베트남 평화기행 참가자의 문의부터였다.  내가 일하는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각종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해마다 평화교육 프로그램으로 베트남 호치민시와 한국군 주둔지였던 다낭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평화기행을 진행하고 있는데, 2월 말에 출발예정이던 평화기행 참가자가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하며 베트남은 안전한 지 전화를 해 온 것이다. 비상이 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업과 코로나19를 연결하지 못했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서 배포하는 일일공지를 체크하고, 베트남 언론사 기자와 베트남 당국의 정보를 입수하여 코로나19에 대한 베트남의 대응을 매일 살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 당국의 강력한 통제 아래 1월 24일 중국 우한과 베트남 간 항공기 운항을 전면 중단하고, 이어 28일엔 중국 내 감염 지역에서 입국하는 중국인 여행객의 비자발급을 중단했다. 안전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평화기행을 강행할 순 없었다. 허가, 수속, 일정 조율을 마치고 출발을 기다리던 2월 평화기행 두 건이 취소됐다.  그때만 해도 바이러스의 파장은 거기까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2월말 대구지역 신천지 집회로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제 통제 대상은 ‘중국’이 아닌 ‘한국’이 되었다. 2월 25일 베트남은 대구·경북지역 거주자 또는 14일 이내 이 지역을 다녀온 자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를 내놨다. 곧이어 증상을 불문하고 대구·경북 지역 체류가 확인된 입국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시설격리에 들어갔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이 시기 국내 코로나19 확진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세계 곳곳이 한국인에 대한 입국절차를 강화하거나 금지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학교들이 휴교에 들어갔다. 베트남 대학생들이 참여해 중부 한국군 피해 마을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선물하는 ‘V프로젝트’ 개장식이 무기한 연기됐다. 평화 활동가 양성을 위해 지난해 3월 베트남으로 갔던 한베평화재단 장학생은 코로나19로 학교가 휴업에 들어가자 1년의 장학기간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 일정을 앞당겼다. 미리 비행기 표를 예매해두었으나 그마저 취소되고, 한국행 비행기를 간신히 잡아타고 부랴부랴 들어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함께했던 친구들에게 제대로 작별인사조차 못 나누고, 상상했던 귀국길과는 다른 정신없는 야반도주였다나. 1년의 마무리가 코로나19로 엉망이 되었다. 원래는 베트남에서 진행해야할 인턴 활동은 기약 없이 한국에서 시작됐다. 지난 2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에서 영국 런던에서 여객기를 타고 입국한 승객들이 진단 검사를 받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장학생이 전한 베트남의 분위기는 또 다른 국면이었다.  베트남이 대구·경북 입국자에 대해 강화된 조치를 시행한 시기, YTN은 ‘다낭에서 격리된 우리 국민들’(2월 25일자)이라는 제목으로 현지 상황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현지 교민의 감정적 주장을 여과없이 담아 베트남 문화를 비하하고 현지 상황을 과장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재단의 장학생은 한국인에 대해 달라진 베트남 분위기와 이 기사로 폭발한 베트남 사람들의 분노를 전했다. 그에 따르면 “기사가 나오고 며칠 동안 한국과 베트남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혐오하는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다. 검증되지 않은 악의적인 뉴스와 글들이 빠르게 퍼졌다. 나는 한국과 베트남 양쪽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베트남 친구들의 SNS에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향해 단 악플이 하나씩 베트남어로 번역되어 올라왔다”고 한다. 이것이 앞으로 재단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 감조차 잡을 수 없다.  19일 0시부터 해외입국자에 대한 특별입국절차가 시작됐다. 앞으로 해외입국자에 대해 자가격리 의무화 등 강화된 조치를 취한다고 한다. 현재 브라질에 있는 가족이 조만간 입국을 앞두고 있어 이 조치를 따르게 될 텐데, 그렇다면 나도 함께 자가격리 대상이 될 것이다. 이번 코로나19의 교훈은 한마디로 코로‘나’라는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역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했다. 바이러스의 역설이다.
2020-03-25 | hrights | 조회: 1016 | 추천: 4
이 윤/ 경찰관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연합군 항공기가 격추당했다. 격추를 모면하고 간신히 기지로 귀환한 항공기들은 총격에 의해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돌아온 항공기들에서 총구멍이 많은 부분을 확인하여 그곳이 취약한 부분이라고 결론지었고, 그 부분을 보강한 항공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생환율은 높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환한 항공기들의 총 맞은 부분은 총을 맞더라도 격추될 가능성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총격에 치명적인 곳을 맞은 항공기들은 이미 격추되어 보강이 필요한 곳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눈에 보이는 특징과 사례에 편향되어, 보이지 않는 곳을 간과한 오류로 인해 정작 필요한 곳에 대한 정확한 보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특징에만 주목하고, 보이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간과함으로써 진실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는 인지 오류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특징 존재 효과(feature positive effect)’라고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힘겨운 요즘, 특징 존재 효과 때문에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인지 오류를 바로 잡아 정확한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은 중국, 이탈리아 다음으로 확진자 수가 많다. 확진자 수가 많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 한국의 방역체계가 허술하여 초기 중국으로부터 감염자 입국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거나, 정부의 대처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비난하기 쉽다. 눈에 보이는 확진자 수에만 주목한 인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특징에 현혹되지 않도록 한꺼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정부가 촘촘한 방역망과 진단체계를 잘 활용하여 확진자 및 감염우려자들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관리 가능한 감염자들을 모두 찾아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일부 확진자 수가 적은 나라들은 검사 역량이 부족하거나, 검사를 의도적으로 적게 하거나, 허술한 역학조사로 인해 확진자 수가 과소평가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국가들의 방역체계가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국가들 때문에 통제되지 않은 세계적 감염확산이 우려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미 많은 외신과 일부 국내 언론들도 한국에서 공식 발표된 확진자 수가 많은 것이 한국의 개방성과 민주성, 그리고 높은 수준의 방역체계 덕분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한 달 이상 미세먼지용 마스크를 빨아 쓰면서 조심은 하고 있지만, 감염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다.  여기에 비유하는 것이 다소 억지스러울지 모르겠으나, 99년 이후 여러 차례 경찰과 검찰 간 수사권조정 논의가 있을 때마다 경찰관의 비리나 잘못을 비난한 기사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런 기사들을 볼 때에도 특징 존재 효과를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난기사를 접하면 언뜻 상당히 많은 경찰관들이 비위를 저지르고 있어 수사 주체로서의 권한을 맡기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경찰은 내‧외부에 감시와 통제의 눈이 많고, 조직 정화 기제가 잘 작동하기 때문에 비리나 잘못이 있으면 밖으로 자주 노출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사례들이 오히려 조직 내 민주화와 투명성, 개방성이 과거보다 많이 개선된 반증이라고 한다면 너무 낙관적인 해석일까? 어쨌거나 잘못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꽁꽁 싸매고 가두어 눈에 보이지만 않게 하는, 그리고 견제와 감시의 수단이 없는 조직보다는 경찰이 더 건전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2020-03-17 | hrights | 조회: 1221 | 추천: 12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신종 감염병 코로나19의 여파가 길어지고 있다. 역병이 창궐하니 민심도 흉흉하다. 타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생활 속 깊이 스며들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소상공·자영업자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크다. 거리는 한산하고 골목가게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시흥시의 지역화폐 ‘시루’ 가맹점 중 가장 결제 건수가 떨어진 업종은 숙박업과 스포츠 및 여가관련서비스업이다. 음식점업이 그 뒤를 따르고 소매업은 큰 변화가 없다. 여행은 안가고 헬스장도 잠시 쉬며 외식은 없되 라면은 쌓아두는 소비패턴이다.  급기야 정부는 경기활성화대책을 세우고 대규모 추경을 편성했다. 얼어붙은 소비를 되살리겠다는 목표로 11조 7천억 원에 달하는 추경안을 제출하며 그 중 2조 4천억 원을 ‘중소기업·소상공인 회복지원’, 8천억 원을 ‘침체된 지역경제 회복지원’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건물주 임대료 인하 보상처럼 도대체 누가 제안했는지 궁금해지거나 신차 구매 시 소비세 감면처럼 왜 굳이 지금 하는지 도통 모를 방안도 포함되어 있지만 어쨌건 재난에 준하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골목경제를 살리는 적극적인 재정투입정책을 펼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니 환영할만하다.  한발 더 나아가 보다 도전적인 재정투입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약탈적 플랫폼 경제 전도사’ 또는 ‘한국적 공유경제의 개척자’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이재웅 쏘카 대표가 쏘아올린 ‘국민들에게 재난 기본소득으로 50만원씩 지급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것이다.(글을 보내기 직전 경남도지사도 100만 원 재난 기본소득을 공식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 홍콩 정부도 코로나19 대책으로 모든 영주권자들에게 1만 홍콩달러(약 156만 원)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내 보수야당 대표가 4월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정치이벤트를 앞두고 냅다 ‘그 정도로 과감성 있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한발 얹은 것도 재밌는 관전 포인트이다.  재난 기본소득 찬반을 묻는 설문조사도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 미터가 오마이뉴스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조사 결과 찬성 42.6%, 반대 47.3%로 오차범위 내에서 비슷한 응답률이 나왔다. 무응답/모름은 10.1%였다.  세부결과를 살펴보면, 보수층의 59.0%가 반대, 진보층은 35.0%가 반대 의견을 보였다. 찬성은 광주·전라(반대 30.1% vs 찬성 65.3%)와 경기·인천(38.9% vs 47.5%), 40대(43.0%, vs 49.6%)와 진보층(35.0% vs 57.8%)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층(33.8% vs 57.4%)에서 많았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다음의 사례들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의 자료를 가져왔다.)  16세기 초엽에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구빈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빈민에게 최소 소득을 지급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몽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에서 “국가는 모든 시민에게 안전한 생활수단, 음식, 적당한 옷과 건강을 해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콩도르세는 1795년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에서 기본소득이란 사회 전체에 걸쳐 확장한 보험이라는 발상을 꺼냈다.  18세기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토지가 공공재이므로 지대수입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자고 주장했다. 샤를 푸리에는 1836년 ‘잘못된 산업’에서 “기본이 되는 자연권을 누리지 못하는 탓에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기본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은 조지프 샤를리에의 1848년 ‘사회 문제의 해법 혹은 인도적 헌법’과 존 스튜어트 밀의 1849년 ‘정치경제학의 원리’ 제2판에서 구체화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분배에서 특정한 최소치는 노동을 할 수 있거나 없거나 간에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생존을 위해 먼저 할당된다. 생산물의 나머지는 노동, 자본 그리고 재능이라는 세 요소 사이에 사전에 결정되는 특정한 비율로 분배된다”라고 서술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1918년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생계에 충분한 소득을 모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 다양한 사상가와 정치인들이 국가배당, 사회배당, 사회크레디트, 사회배당, 기본소득(Basic income) 등의 개념이 제시됐다.  재밌는 것은 시장경제의 수호성인과도 같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음의 소득세’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음의 소득세는 고소득자에게는 세금을 징수하고 저소득자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소득세 또는 그 제도를 말한다  제도의 실행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지역은 알래스카와 핀란드이다. 1976년 알래스카주 당국은 주 헌법을 개정해 알래스카 영구 기금을 설치했다. 1982년 알래스카주 당국은 6개월 이상 알래스카에 거주한 모든 사람에게 나이와 거주 기간에 무관하게 영구 기금에서 매년 균일한 배당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2017년 핀란드 사회보장국(KELA)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장기 실업수당을 받는 시민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발해 기본소득 월 560유로(70만 원)를 지급했다.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국가가 주도해 시행한 세계 최초의 사례이다.  2019년 KELA는 기본소득 실험의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기본소득 수령 여부와 취업률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기본소득 대상자들의 삶의 질은 향상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핀란드 정부는 좀 더 면밀히 기본 소득의 결과를 분석해 2020년에 최종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만약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면 핀란드는 국가 주도로 기본소득을 입법화하는 첫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기본소득연합이 발족되고 같은 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기본소득 의제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국내 기본소득 논의를 이끌며 시민사회와 정치권 일각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녹색당에서 활발한 내부 논의가 있어왔고 이와 별도로 2019년 9월에는 기본소득당이 창당됐다. 변종으로는 허경영 씨의 국가혁명배당금당이 있다.  점차 확산되던 기본소득 화두가 코로나19 창궐 국면에서 또 한발 나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코로나19 추경 세부안에 기존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정부는 한시적으로 아동수당 지급 대상자에게 월 10만 원, 기초생계수급자들에게 최대 22만 원, 노인일자리사업 참여자 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되 현금(법정화폐)이 아닌 온누리상품권 또는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으로 전달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 방안은 국가재난 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써왔기 때문에 큰 틀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현금이 아니라 지역화폐 등으로 전달하겠다는 점은 새롭다. 이럴 경우 현금 지금에 따른 퍼주기 논란과 소비가 아닌 저축으로 이어져 기대한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전례를 극복할 수 있다. 지역화폐는 애당초 저축이 불가능하고 해당 지역 골목상권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어 골목상권에 온기를 불어넣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소비처가 한정되어 있어 경기부양 효과가 낮을 것이란 지적도 있지만 시흥시만 하더라도 가맹점이 6천 곳이 넘고, 온라인쇼핑몰과 대형마트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대신 대부분 가맹점이 생활밀착형 소비처라 사용에 큰 불편함이 없다. 무엇보다 지역화폐의 가맹점은 골목상권이란 점에서 재난 상황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계층과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입 효과를 볼 수 있다.  기존의 기본소득 논의에서도 지급수단을 지역화폐로 하는 방안이 있어왔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경기도이다. 사진 출처 - 구글  경기도는 2019년부터 경기도 거주 3년 이상 만24세 청년에게 분기에 25만 원씩 1년 동안 100만 원의 청년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지급수단은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각각 시행하는 지역화폐이다. 경기도 시흥시에 사는 A씨는 시흥화폐 시루로, 안산시에 사는 B씨는 안산화폐 다온으로 받는 식이다. 이 돈은 소비의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주요 통로인 온라인쇼핑몰, 백화점, 대형마트, SSM 등에서는 쓸 수 없고 지역에서만 순환된다. 산후조리지원비 50만 원도 동일한 방식으로 지급된다.  만일 청년기본소득을 현금으로 지급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포퓰리즘의 극치, 퍼주기의 끝판왕 또는 빨갱이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다.(유럽 쪽 좌파에서는 지역화폐를 우파 정책이라고 본다) OECD 국가 중 GDP 대비 복지비 최하위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청년기본소득이라는 도전적 정책이 건재한 것은 ‘복지+지역화폐 지급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패키지 때문이었다.  경기도는 지난해 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역화폐 활성화 방안 토론회’에서 지역화폐와 복지정책을 연계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65세 이상 노인에게 주는 기초연금의 30%를 지역화폐로 전달하면 생산유발효과가 연간 13.3% 증가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지역화폐 연계를 통한 복지전달체계와 지역경제 활성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이 완전한 형태의 기본소득은 아니다. 기본소득은 보편성을 가져야 하지만 청년 기본소득은 24세 청년에게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기본소득임은 틀림없다.  핵심은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전달한다는 점이다. 경기도의 시도는 전 세계 3,000여개의 지역화폐 중에서도 전례가 없던 실험이다.  물론 보편적 기본소득 적용이 현실화된다면 그 모두를 지역화폐로 전달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지역화폐는 말 그대로 지역 내 소비의 순환을 목적으로 하므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소비에 모두 대응할 수 없다. 기본소득 전체 비중에서 일부를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19는 꿈틀거리던 기본소득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미래 사회는 근로소득자와 기본소득자로 나뉠 것이라는,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를 전망도 나온다. 기본소득 그리고 지역화폐와 결합한 기본소득 논의가 향후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주목된다.
2020-03-11 | hrights | 조회: 1042 | 추천: 1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카타르 외교적 고립과 알 바시르 정권의 위기  2020년 1월 13일, 수단을 방문한 UAE 외무장관 안와르 가르가쉬는 과도 정부인 수단 통치위원회(2019.08.20-현재) 부의장 무함마드 함단 다갈로 장군 및 관리들을 만난 자리에서 수단 개발 프로젝트를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수단 방문을 마친 후에, 가르가쉬 외무장관은 “무슬림형제단이 2019년 4월 11일 군부 쿠데타로 축출당한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 통치를 후원함으로써 수단이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불안정해졌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수단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무슬림형제단의 탓으로 돌렸다.  사실, 1989년 6월 30일 알 바시르는 이슬람주의자 장교들을 앞세운 무혈 쿠데타를 주도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고, 2019년 4월 11일 축출당할 때까지 30년간 수단을 통치하였다. 알 바시르는 정당을 금지하고, 국가 차원에서 이슬람법을 도입해 실행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이슬람주의자들의 지배가 강화되었고, 수단은 독재, 가난, 무장 세력들의 근거지로 변했다. 게다가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인 이슬람전선이 국가기구들을 통제했다. 이 때 알 바시르는 15명의 이슬람주의자 지휘관들로 구성된 군사통치위원회를 설립하고, 수단의 이슬람화에 착수하여 세속주의자들을 공무원에서 몰아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통치하에서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주의자들이 힘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2017년 6월 5일, 사우디, UAE, 이집트는 테러단체로 규정한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카타르와 외교관계를 끊었다. 이 상황에서, 알 바시르는 무슬림형제단 및 카타르와 대립각을 세우는 사우디, UAE, 이집트와 연대를 거부했다. 수단 이슬람주의자 정치인들이 카타르 편을 들도록 사실상 알 바시르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알 바시르에게 카타르는 사우디나 UAE를 능가하는 핵심적인 재정적, 정치적 후원자였다. 수단 이슬람주의자들 대부분은 카타르가 후원하는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타르의 역내 고립이 수단 무슬림형제단의 세력 약화와 알 바시르 정권의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 알 바시르 축출과 신군부 정권 수립  2018년 12월 민주화시위 발발 이후, 통치위원회가 구성된 2019년 8월까지 시위과정에서 250명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하였다. 수단 전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면서 2019년 4월 11일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같은 날 과도군사위원회(2019.04.11-2019.08.20)를 구성하였다. 10명으로 구성된 과도군사위원회는 4월 12일 의장에 압델 파타 압델라흐만 부르한 장군, 4월 13일 부의장에 무함마드 함단 다갈로 장군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과도군사위원회 설립 이후에도, 군부정권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과도군사위원회 세력은 다갈로 장군이 이끄는 민병대 신속지원군(2013년 창설, 일명: 잔자위드)을 동원해 민주화요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특히 2019년 6월 3일 신속지원군은 군부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공격해 100명 이상 사망한 하르툼 대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위대 주검들 40구가 나일 강에서 건져 올려졌다. 이 6월 5일 학살 사건에 대하여, 과도군사위원회 의장 부르한이 사과하고, 과도군사위원회와 시위를 주도한 시민단체 연합이 양자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7월 17일 정치 합의안이 나왔다.  이 합의에 따라 2019년 8월 20일 과도정부 성격을 띤 통치위원회가 창설되었고, 과도군사위원회는 이 통치위원회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39개월 동안 활동하기로 기획된 통치위원회는 최고 권력기관으로, 과도군사위원회가 선정한 5명, 시민단체 연합이 선정한 5명과 양 측이 합의한 민간인 1명 등 총 11명의 군부와 시민단체 연합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이 합의안은 과도군사위원회 구성원이 21개월, 시민단체 대표가 나머지 18개월 동안 통치위원회 의장을 맡기로 규정하였다.  사실 시민단체 연합이 한 축을 담당한 이 양자 합의는 격렬한 시위를 무력화시키고, 군부통치를 합법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합의에 따라, 통치위원회 의장은 과도군사위원회 의장이었던 부르한 장군, 부의장은 다갈로 장군이 맡았다. 따라서 통치위원회는 과도군사위원회 권력구도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신군부정권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다갈로 장군은 악명 높은 신속지원군의 지휘관으로, 부르한 장군을 넘어서는 최고 실권자로 평가되며, 북부 다르프르 지역 소재 금광을 소유한 갑부다. 그는 2003년 시작된 다르푸르 내전에서 알 바시르 대통령을 위해 싸우면서, 신속지원군 전신인 잔자위드 민병대를 지휘하여 민간인 살해, 강간, 집 불태우기 등 전쟁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다. 게다가 그는 2019년 4월 11일 쿠데타에서도 신속지원군을 동원하여 알 바시르 대통령을 축출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최근 신속지원군은 예멘 내전에 파견되어 후티와 싸우고 있으며, 리비아 내전에 파견되어 동부의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과 협력하면서 서부의 통합정부와 싸우고 있다. 사우디와 UAE는 예멘과 리비아에 파견된 신속지원군에 대하여 현금으로 보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신속지원군은 예멘과 리비아 내전에서 사우디와 UAE 용병으로 참가하고 있다. 수단군이 2019년 6월 3일(현지시간) 수도 하르툼 군사령부 주변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AFP연합뉴스 □ 사우디, UAE 및 이스라엘의 지원과 신군부 영향력 강화  2019년 4월 21일, 사우디와 UAE는 2020년 말까지 30억 달러를 쿠데타 세력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하였고, 이 중 15억 달러는 2019년 10월에 이미 집행되었다. 이는 수단에서 카타르와 이슬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사우디와 UAE 및 신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9년 5월 과도군사위원회 의장 부르한 장군과 부의장 다갈로 장군은 이집트, 사우디, UAE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상호간의 우의를 다졌다. 이에 맞서 시민단체들은 이집트, 사우디, UAE의 수단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 상황에서 2019년 6월 3일 신속지원군이 저지른 하르툼 참극이 발생하였다. 사우디와 UAE는 예멘과 리비아 내전에 수단 용병들을 활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르툼 시위대 학살을 저지른 신속지원군에게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다갈로 장군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갈로 장군은 2019년 5월 사우디를 방문하여,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을 만난 자리에서 “수단은 이란과 후티 민병대의 모든 위협과 공격에 맞서 사우디 왕국과 함께 서 있다”고 밝혔다. 그는 쿠데타 성공 이후 첫 해외 순방으로 사우디를 방문함으로써, 왕세자 빈 살만과 굳건한 연대를 표시하였다. 44세의 비교적 젊고 야심찬 다갈로 장군을, 사우디 실권자인 빈 살만 왕세자와 닮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2020년 2월, UAE가 중재한 것으로 알려진 수단 통치위원회 의장 부르한과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가 우간다에서 만나 국교 정상화를 논의하였다. 이 때 네타냐후는 수단을 미국의 블랙리스트에서 빼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사우디와 UAE,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수단의 새로운 군사정권이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민주화를 성취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며,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도 매우 불투명하다. 특히 사우디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실상 최고 실권자로 인정받는 통치위원회 부의장 다갈로 장군은 정규군을 능가하는 신속지원군을 사용한 무자비한 시민 탄압과 학살 전력이 있고, 통치위원회 의장 부르한 장군과의 권력투쟁 가능성도 열려있다. 게다가 많은 수단의 엘리트들은 다갈로 장군의 초등학교 3학년 중퇴 학력 때문에 최고 통치권자로서 내세우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또 예멘과 리비아에 수단의 젊은이들을 용병으로 파견한다든지,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는 부르한 장군과 다갈로 장군의 행위들은 시민 사회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수단의 앞날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다.
2020-03-04 | hrights | 조회: 1105 | 추천: 1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현미경으로 미생물의 형태를 관찰하고, 이름을 붙이고, 특정한 병원균에 대한 백신을 만들고, 예방과 치료를 위한 지식을 전파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제너와 파스퇴르의 이름에 사람들이 주목하기 전까지 인류는 전염병에 대해 대체로 속수무책이었다.  전염병은 인간의 일상적 활동과 권력의 배치, 전쟁의 승패와 경제구조의 변화에도 일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로마제국의 몰락에는 말라리아가 개입했고, 중세의 암울함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실패의 배후에는 페스트가 있었다. 19세기 들어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콜레라는 20세기 들어서도 완전히 장악되지 않았지만, 그 기간 동안 위생과 공중보건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었고, 도로를 포장하고 하수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과학의 힘은 바이러스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빠르게 그것의 정체를 밝히고, 치료법을 축적해왔으며, 인간의 신체 역시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면역체계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의학은 변종과 진화의 방식으로 여전히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병원체와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생명 자체를 연장하는 데 기여해왔지만, 바이러스의 전염과 확산의 속도에 의도치 않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시대의 바이러스는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프리패스하거나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대도시의 교회, 병원, 식당, 장례식장, 유흥가 주위를 배회한다. 누구도 그것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비가시성의 존재라는 이유로, 그것을 완벽하게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이러스와 그것의 숙주로 지명된 자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최신의 의학 정보와 위생준칙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가장 먼저 빠르게 바이러스의, 바이러스의 감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타깃이 되기도 한다.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들 그리고 국경을 넘어온 이방인들과 가난한 사람들, 돌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되거나 고통 받는다. 자주, 바이러스의 이동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포와 불안과 혐오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교란하고 해체시킨다. 바이러스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숙주의 생명을 치명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대신, 빠른 속도로 무자비하게 이 모든 일을 해나간다.  바이러스는 개별 인간의 신체적인 항상성을 깨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법률과 의료적 체계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관계까지 뒤흔든다. 그것은 변이하고 진화하는 방식으로 매번 다시 되돌아온다. 바이러스는 멈추는 법을 모른다. 인류의 위기는 어쩌면 핵전쟁이나 온난화보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지치지 않고 찾아오는 바이러스의 효과, 그것이 촉발하는 사건들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지금 바이러스와 공생하는 중이다. 사진 출처 - SBS  코로나19가 예상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지속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달라지고 있다.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혐오의 타깃을 찾거나 심리적 위축이 극대화되면서 과도한 보신의 태도를 취한다. 자가 격리가 요구되는 상황이 아님에도 자발적으로 외출을 삼가고 사회적 활동을 정지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감염의 매체로 의심한다. 바이러스의 활동양상은 독감보다 덜 치명적이고 확장성도 떨어지지만, 그것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일상의 비일상화를 수락하고 감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의 위축이 생명의 위축에 다름 아니라면, 병에 걸리기 전에 이미 의사환자의 역할 속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이러스의 창궐이 만들어낸 일종의 예외상태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환경이 더 이상 예외적인 것으로 마감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감한다. 코로나19는 코로나22, 코로나26, 코로나32의 형태로 조금씩 변이, 진화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와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고 자리 잡게 되리라는 걸. 바이러스는 숙주를 절멸시키지도, 스스로가 절멸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우리와 공생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어두운 디스토피아적 전망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시민사회의 풍경은 생각보다 다채롭다. 마스크를 매점매석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사재를 털어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선물하는 누군가도 있고, 공익의 관점에서 바이러스 상황 앱을 만들어 공유하는 누군가도 있으며, 음식이 되지 못한 식재료를 앞에 두고 고심하는 상인들과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을 자청하는 누군가도 있고, 사명감 속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방역의 체계를 세우고 실행하는 누군가들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불편함을 딛고 더 많은 지혜를 모으고 상상하고 실천하고 연대하는 활동들 속에서만 미생물의 진화와는 다른 인간의 진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20-02-26 | hrights | 조회: 862 | 추천: 11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고희(古稀)를 보낸 지 10년, 올해는 내 팔순(八旬)의 해다. 세월은 참으로 잘도 간다. 남은 생을 어찌 살아 갈 수 있을까? 지나간 세월보다 남은 짧은 세월을 최선을 다해 유종(有終)의 미(美)의 삶을 거둘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지나온 삶을 과연 후회 없이 살아왔는가 묻는다면, 후회 많은 삶이었다고 하고 싶다. 그간 살아온 세월들이 격동의 시대였기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순간들이 많았다. 어쩌면 기쁘고 즐거움 보다, 질곡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허나 한편으로 궤변도 늘어놓는다. 시대와 조상을 잘못 만나서, 아니 운이 없어서라고 자위도 해 보았다. 허나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며 노력도 않으면서 남 탓이라고 한다면, 이는 정도(正道)가 아니기에 반성하기도 했다. 한편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기회와 변화도 있었기에, 노력한 만큼 작은 결실을 거두기도 하였다.  해방공간과 6․25 전쟁 전후에서, 철부지였던 어린 내가 맏형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때 각인되었던 아픔이 성년이 되어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조국분단 과도기에 스물두 살의, 장형이 죽임을 당한 후, 육십년 만에야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참으로 슬프고도 기쁜 순간이었다.  반백년 전, 나 또한 ‘가면 죽는다’던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용기는 어디서 났는지 나도 모른다. 그때 1965년 파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도전이었다. 참전 13개월 동안 전쟁에서 생과 사를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했었다. 생명의 중요함에도 분단국의 평화와 통일을 더욱 갈망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부역자로 신원 조회의 대상이 되어 좌절했고, 둘째 형이 의용군과 국군에 참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상이 제대를 했다. 그 후 세 번의 선거로 집안이 기울어져, 진학의 꿈도 접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배우고 아는 게 힘이다’ 생각하며 주경야독으로 학업에 임하였다. 모든 것을 포기할 뻔도 했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았던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기로이기도 했었다.  또한 슬픔은 열일곱 살에 청상과부가 되신, 양할머니가 우리 8남매 손 자녀를 마치 산모처럼 척척 받아내고 양육하신 것이다. 이런 연유로 양할머니가 열녀로, 부모님이 효자효부로, 3남이면서 50년이나 부모님을 모신 효열 3대가로 이어 왔었다. 8남매 중에서 내가, 기준과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 집안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어쩌면 풍비박산의 집안이 되었을지도 모를 처지였었다.  이런 사실이 자화자찬으로 비추어질까 송구한 마음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나 자성하고 자책하면서 다짐했다. 과연 남은 세월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지나온 삶을 잘 마무리하고 과오를 뉘우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 성실히 노력하는 길을 걸어왔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길이, 하나의 방법이 된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부족한 글쓰기다. 초등학교에서 글짓기에 흥미가 있어 성년에 더욱 살아나면서 결국 만학의 꿈을 갖게 되었다. 가방끈이 짧다는 자괴감도 있었지만, 열심히 노력해 배우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언제나 부족하기만 했었기에 욕심도 부렸다. 진력하여 여러 권의 책을 펴냈지만, 한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나는 다방면의 글을 쓰고 있다. 다양한 문학의 장르 외에 칼럼도 쓰고, 또한 붓글씨도 쓰고 있어 서예로 쓴 작품을 자주 선보이기도 하지만 부족하기만 하다. 글은 수없는 퇴고와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진한 작품을 내고 만다. 결국 미진한 작품이 나오면, 바로 후회를 하곤 했었다.  후회는 스스로 게으름과 여유 없는 시간을 활용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에게 제일 크게 다가온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어찌 치유하느냐 하는 무거운 과제다.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말로만 노래하지 말고, 바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실천운동에 앞장서 펴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실행을 위해 평화통일에 진력하는 여러 단체에 일원이 되고, 간부가 되고 단체에 책임을 맡아야 했다. 분단의 현실, 여기에는 일제에 36년을 지배당하고 해방 아닌 분단이, 분명 외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 8천만 동포들이 모두 분단을 외면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나라 잃은 설움에도 31세 안중근 의사와 24세 윤봉길 의사가 처자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정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 윤문의 형제항렬이기도 하시다. 8․15 광복이 바로 분단으로 이어져, 74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분단국, 언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룰지 난망하기만 하다. 허나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을 이겨내는 우리 정신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 - freepik  우리의 소원은 평화통일 조국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는 그 어떤 일보다 더 절박하기만 하다. 나는 통일교육위원으로, 평화연대회원 간부로, 평화만들기, 희망연대, 통준사 공동대표로 매진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기만 하다. 아무리 통일을 원하지 않는 동포나 주변 외세가 존재해도, 이를 극복해 내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지구상에 너무도 오랜 분단조국에 통일을 위해서는, 존경하는 안중근, 윤봉길 두 의사와 선현들의 뜻을 따라가야 한다고 늘 다짐한다. 사실 오래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남루한 후회를 했었다. 분단 조국의 통일도 이루지 못하면서 남의 나라 통일을 방해하는 용병군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없는 자괴감을 느끼곤 했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17도선을 평정하여 세계최강대국인 미국을 이겨내고, 당당히 남북베트남이 통일을 이뤄냈었다. 진실로 베트남 통일을 축하하고, 우리가 용병으로 참전해 저지른 잘못을 다시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오래전 베트남은 남북통일 평화를 이루어 냈다. 베트남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당당히 이겨낸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했다.  통일된 베트남을 몇 차례 다녀오면서 그들에게 우리가 지은 죄과를 용서해 달라고 했었다. 그들은 지난 원한을 모두 용서한다고 했다. 그들은 당당히 외세 강대국을 물리치고 세계만방에 통일된 베트남의 발전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지난 용병 참전으로 그들 아픔과 슬픔을 안겨준 사실에 진정으로 사죄하였다. 이에 그들은 우리의 지난 잘못을 용서 해주었다.  필자는 올해 팔순을 맞이하면서 지난 파란만장한 삶을 돌아보았다. 스스로 지난 삶을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나 부족하고 미진한 일들도 많기만 하다. 그러기에 항상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비록 늙어간 나이지만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를 재촉하기도 하고 있다.  비록 두 분 안중근, 윤봉길 의사(義士)들처럼 젊지 않은 팔순의 나이지만, 그 분 의사님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다짐하며, 내 생애를 ‘마무리 잘하는 삶’으로 정의·평화·통일의 길을 과감하게 가는 길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나는 생각한다. 그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최선을 다한 삶을 살면서, 나와 맺은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한반도에 평화통일을 이루려는 8천만 동포와 후손들이 꿈이요 소원을 이루는 그날까지 진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수필회원. 서예초대작가
2020-02-19 | hrights | 조회: 1045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2005년 여성조직에서 활동하면서 맡은 분야는 ‘지역여성운동’ 분야였고 그 안에서 지방선거와 관련한 ‘여성정치세력화’ 방안도 함께 모색했다. 여성연합 차원에서 지역의 여성정치 주체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임파워먼트를 통해 당선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선이 최종목표는 아니었다. 지역정치의 한 복판에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여성의 지위와 인권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정치세력화는 정체되었다. 현재 지역차원, 특히 기초단위 차원에서의 여성의원들의 높은 참여율과 비교할 때 한 참 뒤지는 수준이었다. 국회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도 겨우 두 자리(17%)의 참여 비율을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한 자리 비율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그 당시 ‘왜 여성들이 정당을 초월해서 뭉치고 여성정치인을 발굴, 당선시키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여성정치인들이 여성주의적 관점 없이 자신들의 이해득실만 따지는 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정치구조보다는 개인들의 행위만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 및 선거제도 등 한국의 정치제도는 주류 기득권정당을 위한 체계로써, 이로 인해 다양한 정당의 원내진입을 차단함으로써 여성을 비롯한 정치소외집단의 목소리도 함께 차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당체계뿐 아니라, 정당내부 구조도 수직적이고 권위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신입국회의원들이 당대표 및 다선의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치에 진입한 신입국회의원들은 자신이 대표성을 가진 집단보다는 당의 입장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여성정치 활성화의 가장 큰 딜레마였던 것이다. 공천에서 진입까지 수 많은 절벽을 헤치고 나왔지만 그 과정이 반복될 것이란 압박은 여성정치인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할당제는 강제력이 없었고, 17%로 전환점을 만들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좌절과 절망은 결국 여성유권자들의 ‘여성정당 창당’의 요구로 모아지게 하였다. 지난 2월 1일 ‘여성의당’ 창당을 위한 포럼이후 창당주비위원회 기획단을 구성하여 8일 워크숍을 열고 할당제 대신 여성대표성을 높일 방법으로서의 여성정당의 필요성 확인과 여성의제 발굴, 실무단 구성 등을 진행하였다. 오는 15일엔 중앙당 발기인 대회를 진행하고 3월 중 창당대회를 여는 등 차근차근 총선을 대비해나가고 있고 이 과정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세대와 지역을 아우르고자 노력하고 있다. '여성의당' 창당주비위원회 기획단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워크숍을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러한 여성정당의 결성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여성들의 삶, 생존, 생활에 대한 무력감과 무능한 정부 및 정치권에 대한 절망이 존재한다. 할당제로도 해결될 수 없는 여전한 여성 차별적이고 여성외면적인 정책과 정치문화, 여성 혐오적 사회풍토의 확산, 디지털여성범죄의 확산과 강화, 노동시장으로부터 파생된 생존에의 절망 등등. 어쩌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절박함과 분노가 여성정당으로 뭉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정당은 있어왔다. 한국은 1945년 ‘대한여자국민당’이 있었으나 한 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2007년엔 인도와 호주에서, 2015년 이후 노르웨이, 핀란드, 브라질, 영국 등에서 여성당을 만들었지만 원내진출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다만 스웨덴에서는 2005년 FI(Feminist Initiotive)가 창당 된 후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다가 2010년 지방의회와 2014년 유럽의회 진출에 성공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여성의 당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성의 대표성을 인정받고 할당제를 확보하기까지 또한 쉽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상기해 봤을 때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갈 길이 멀 수도, 험난할 수도 있지만 지난 2-3년간 한국의 여성운동 지형은 급진적으로 변화해왔다. 그 속에서 성장하고 단련된 젊은 여성들과, 기성 여성운동 선배들의 결집이 어렵기는 하지만 결국엔 서로의 용기와 지혜를 나누며 성공하리라 기대한다. 여성의당 창당 과정자체가 새로운 정치문화와 정당문화, 정당조직구조를 구성해내고 민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기회, 기성정치 문화와 구조를 전복하는, 과정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20-02-12 | hrights | 조회: 906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