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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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2015년 7월, 일본 평화박물관 탐방을 다녀왔다. 피스 오사카, 교토 리츠메이칸대학교 국제평화박물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오카마사하루기념 평화자료관을 돌아보며 일본사회가 어떻게 역사를 취사선택하고 있는지 보았고, 또 그러한 역사인식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도 만났다.  어느 날은 나가사키항에서 배를 타고 하시마섬에 들어갔다. 일명 ‘군함도’라 불리는 그곳은 한때 일본 최초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근대 도시였다. 폐허가 되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지만, 수영장, 학교 등의 시설이 보였고, 고층 아파트에 사는 일본인들은 꽤 부유한 생활을 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여전히 회색 콘크리트 도시의 위용을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 한쪽은 조선인이 반대쪽은 중국인이 탄광 노동자로 징용을 살았다. 그들이 사는 곳은 지하 공간이라 파도가 들이치는 곳이었다. 탄광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면 몸을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다. 고작 세 개의 통에 순서대로 몸을 담가 검댕을 씻고 매일 갱도로 들어가야 했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곳, 그들이 ‘근대’라 일컫는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야만’이고 ‘지옥’이었다. 쓸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TV를 켜니 일본 사회가 기쁨에 술렁이고 있었다. 그날은 7월 5일, 하시마섬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날이었다.  최근 일본 정부가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산업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시킬 때 강제노동의 역사를 함께 알리고,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 메이지 시대 산업화 성과 위주의 전시만 있고 징용 피해와 관련된 내용은 없다는 것, 오히려 군함도의 탄광을 소개하면서 징용 피해 자체를 부정하는 증언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 논란의 발단이었다. 일본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 권고를 받아들여 약속한 조치를 성실히 이행해 왔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국 언론은 유네스코의 ‘유감’ ‘경고’ 입장을 연일 보도하고, 일본의 태도와 역사 왜곡에 대해 앞 다투어 강경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군함도 사진 출처 - 필자  하시마섬에서 쓸쓸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돌아선 그때를 생각하면 일본 정부의 태도에 분노가 일어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한국 언론에 대한 분노가 더 앞선다. 유독 일본과의 역사문제에 있어 ‘민족’과 ‘피해’라는 편협한 역사 인식 아래 묻지 마 보도를 일삼는 언론의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비단 ‘군함도’ 뿐만이 아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중심으로 강제동원 피해 문제, 독도 영유권 다툼 등 일본과 엮여 있는 모든 문제들은 대부분 그렇다.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못지않게 한국 사회에 ‘헤이트 재팬’을 조장하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다. 단지 ‘갈등’을 조장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취사선택하지 않고 올바른 역사관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지난달, 한베평화재단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베트남전쟁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국내 평화기행을 진행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 주둔지역과 피해 마을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평화기행’과 달리 국내 평화기행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만날 수 있는 곳을 탐방하고 우리 기억의 현주소를 찾아가 보고자 한 기획이었다. 우리가 찾아본 베트남전쟁의 흔적들, 용산 전쟁기념관, 현충원, 화천 월남파병용사만남의 장, 전국 방방곡곡 서 있는 월남참전기념탑은 6.25전쟁과 더불어 한국 사회 ‘안보’ ‘애국’ ‘이념’ ‘발전’이데올로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회적 성찰과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전쟁 기억은 국가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논리 속에 현재의 전쟁과 해외파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이 불러온 수많은 ‘피해’와 ‘희생’을 외면하는 사이 고통은 잊히고 ‘발전’과 ‘기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18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이 열렸다. 이 법정은 대한민국이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과 명예회복, 진실규명 노력을 할 것과 더불어 용산 전쟁기념관을 포함해 베트남전쟁 한국군 참전을 전시하는 모든 공공시설에 대한민국 군대의 불법행위를 함께 전시할 것을 주문하였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미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2019년 영국 런던에 라이따이한과 어머니를 상징하는 모자상이 세워졌다. 모자상과 같이 한국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점점 커져가는데 한국 언론에는 관심 밖이다. 몇 군데 국내 언론의 단순 보도만이 있었을 뿐이다. 68년 일어난 퐁니·퐁녓 사건에 대한 한국 참전군인의 양심선언도 크게 관심 받지 못했다. 성미산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 전쟁기념관 탐방 사진 출처 - 필자  굳이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인용해본다면, 가해의 기억을 지우기보다 치열하게 접근한 사회는 성찰이라는 윤리성을 통해 보다 시민의식이 강해지고 다른 나라와 믿음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익히 보아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어떠한가. 일본의 태도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들의 모습을 보며 반면교사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유독 일본과의 역사문제에만 뜨거운 한국 언론을 보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다.
2021-07-21 | hrights | 조회: 1005 | 추천: 7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요즘 주변에서 자주 들리는 단어들이 있다. 주민자치, 마을돌봄, 돌봄공동체 등이 그것이다. 하고 있는 일과 위치가 그렇다보니 원하지 않아도 부르기도 하고 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귀가 자꾸 향하는 듯도 하다. 예전에는(물론 아직도 그렇지만) 정부-광역시. 도-지방자치단체-읍면동사무소-마을로 내려오는 일관된 하향식 정책과 제도, 사업들이 정보로 전해져오고 할지 말지 선택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았다. 체계화하고 조직화해야 효율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대로 실현된다고 생각한 행정 중심의, 중앙중심의 시스템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정부나 행정이 어렵거나 부족한 부분을 위탁이나 공모방식으로 기관, 단체 또는 국민들이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복지’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구조화된 현실을 보게 되었다. 보건복지부에서 내리면 현장에서는 읍면동 복지팀이나 복지관, 자생 봉사단체가 그 일을 수행하는 시스템이다. 최근 몇 년간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은 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복지전달체계 개편’이라는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심심찮게 가게 되었다. 복지의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모든 복지대상자를 위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다 감당하기 힘들어서인지 현 정부 들어서서 생활권 단위(마을)를 중심으로 주민 스스로 돌보는 커뮤니티 케어, 마을돌봄체계 구축 등 새로운 복지정책을 모색해보는 듯하다. 이 얼마나 괜찮고 좋은 소식인가. 예전 마을공동체가 살아있던 시절 이웃을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선한 마을생활을 다시 복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계획은 그럴싸하고 취지도 좋고 기관, 단체들도 모이고 하는데 뭔가 삐그덕대는 모습이 보이고 원래 목적대로 현장에 잘 실현되는지는 의문이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초보 농군 딱지를 떼고 마을 이장이 되었을 무렵인 2010년 어느 날로 기억된다. 이장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면이나 농협 등에서 마을주민들에게 공지해야 할 일을 마을방송을 통해 알리는 일이었다. 감자 종자 신청하신 분들에게 몇월 며칠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가져가시라는 방송을 막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이른 아침 마을 할머니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도로에 나와 손짓을 하시며 내 트럭을 세우셨다. 할머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 불이 나간지 일주일이 넘었고 배달시켜야 하는 가스도 끊어진 지 열흘이 넘었다 하신다. 가스는 보통 두 통이 있는데 한 통을 열어보니 가스가 공급되었고, 전기는 누전차단기가 고장나 시내에 나가 사다가 교체해 드렸다. 내게는 이 간단한 일이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는 도시에 사는 아들내미에게 전화를 해 놓고 이제나 저제나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마을에 들어와 산지 5년이나 지났는데 마을의 이런 사정을 미처 몰랐던 내가 한심스럽고 안타까웠다. 젊은 사람들이 없는 농촌에서, 이런 간단한 생활의 어려움을 이웃에게 부탁하고 서로 도우며 살았던 마을공동체는 옛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고민이 되었고 마을 젊은 작목반, 별빛 교육센터 선생님들과 이런 문제를 얘기했고 해결할 고민 끝에 나온 것이 ‘긴급출동! 우리마을 119’다. 전기, 가스, 보일러, 수도 등 기본적인 생활의 불편함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요청할 수 있는 구조를 마을에 만들자는 것이었다. 일단은 별빛 사회적 협동조합에 젊은 친구들이 일하고 있으니 스티커를 만들어 마을 어르신들 댁에 전화기 옆, 냉장고, TV 등 눈에 잘 띄는 곳에 일일이 방문하여 붙여드렸다. 그렇게 마을 스스로 돌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복지관이나 행정 읍면동사무소에서는 할 수 없거나 어려운 일을 마을은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기어이 2018년 별빛 사회적 협동조합에 ‘나이 들기 좋은 마을 팀’(노인복지팀)도 만들고 마을 119 활동을 기본으로 어르신들과 함께 나누고 살아가는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우리마을 119 두 번째 센터는 우리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에 생겼으면 하는 바램과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흘러 정부의 정책방향도 bottom up(아래로부터) 방식으로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멀기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색하고 낯설다. 더디고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하는 주장도 일면 타당성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마을일은 마을스스로 특히 우선적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도움은 우리사회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춘천시는 ‘우리마을 119 설치 및 지원조례’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마을에는 곳곳에 지역사회보장협의체와 각 종 봉사단체, 주민자치회 그리고 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주민들이 있다. 정부는 자치단체는 행정은 이 주민들이, 시민들이 스스로 서로 돌봄을 잘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환경과 제도와 예산을 지원해주면 된다. 그렇게 될 때 마을돌봄은 곳곳에 풀뿌리처럼 정착할 것이고 공동체가 회복되는 ‘마을’로 진화될 것이다.
2021-07-06 | hrights | 조회: 1086 | 추천: 7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제미 버튼(Jemmy Button)이란 아이가 있었다. 남미 파타고니아의 티에라 델 푸에고 섬 사람이다. 스페인어로 ‘불의 땅’이란 뜻인 티에라 델 푸에고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마젤란 해협 남쪽 섬으로 남미대륙의 땅끝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선이 이 섬을 절반으로 가르고 있다. 중심도시 우수아이아는 남극 여행 크루즈가 출발하는 곳이다. 제미 버튼의 본명은 오룬델리코. 푸에고 원주민 야마나(Yamana)인이다. 황량한 남극지방의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푸에고인들은 불을 피우고, 물개 가죽과 과나코 털을 몸에 걸쳤다. 오룬델리코가 태어난 19세기 초반은 이곳에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였다. 스페인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등 유럽인들이 계속 탐험을 왔지만, 어느 세력도 확고한 지배권을 갖지는 못했다.  오룬델리코는 어떻게 제미 버튼이 되었을까? 그는 진주 단추 하나와 교환되어 제미 버튼이란 이름을 얻었고 영국으로 끌려가 3년간 머물렀다. 제미 버튼의 여행은 자기 의지로 떠난 길이 아니라 납치로 인한 것이었다. 그를 데려간 사람은 비글호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였다. 비글호는 영국 해군 함정으로 1826년부터 1830년까지 남미 해안선 조사와 경도 확정, 그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젤란 해협 일대 탐사를 목적으로 항해를 했다. 티에라 델 푸에고 섬에서 몇 명의 푸에고인이 비글호의 고래잡이 보트를 훔쳐 달아나자 피츠로이 선장은 보트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야마나인 세 명을 인질로 잡고, 또 다른 한 아이를 납치해 비글호에 태워 영국으로 데려갔다. 진주 단추와 맞바꾼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제미 버튼이었다.  피츠로이가 이들을 영국으로 데려온 명분은 ‘야만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통역자로 양성한다는 실용적 목적도 있었다. 일종의 ‘문명화 실험’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1830년 10월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한 달 후 한 명은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고, 나머지 셋은 초등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찬송가를 배웠다. 영국식 복장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사교계에 불려 나가 국왕 윌리엄 4세와 애들레이드 왕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야만인’ 푸에고인을 문명사회로 데려와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영어를 가르치고, 상류사회의 예의범절을 몸에 익혀 신사숙녀로 만드는 실험, 이것이 제미 버튼 일행이 강요당한 이상한 여행의 실체였다. 피츠로이 선장이 그린 푸에고인 사진 출처 - Jemmy Button in 1833 from 'Fuegians' in The narrative of the voyages of H.M. Ships Adventure and Beagle. Vol. 2. by FitzRoy (1839).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신기한 사물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사물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사람도 수집 대상이 되었다. 식물은 표본을 채집하거나 씨앗을 가져와 식물원에서 재배했다. 동물은 박제로 만족하지 못하고 산 채로 포획해 동물원에서 사육했다. 유물을 원산지에서 분리하고, 동식물을 원서식지에서 이식하는 이 거대한 흐름의 속에서 식물원, 동물원, 자연사박물관,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 런던에는 다양한 인간 전시가 넘쳐나고 있었다. 사르키 바트만의 ‘호텐토트 비너스’ 쇼가 인기를 끌었고, 이누이트인, 아즈텍인, 산족, 줄루족이 출연하는 인간 전시가 흥행몰이를 했다. 인간을 수집과 전시의 대상으로 삼는 일, 이른바 ‘인간동물원’은 현대의 인권 감수성으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물관 발달의 합리적 귀결이었다. 피츠로이 선장이 그린 푸에고인(확대) 사진 출처 - Jemmy Button in 1833 from 'Fuegians' in The narrative of the voyages of H.M. Ships Adventure and Beagle. Vol. 2. by FitzRoy (1839).  물론 제미 버튼이 쇼 무대나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건 아니다. 다윈의 관찰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멋 부리기를 즐기고 거울 속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다윈은 이 불쌍한 푸에고인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미개인’에서 ‘문명인’이 되었다며 감탄했다. 하지만 피츠로이 선장의 비글호 두 번째 항해 때 귀국한 그는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원래 생활방식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보여준 놀라운 적응은 생존전략에 불과했던 것인가? 런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개방형’ 전시물이 되었을지언정, 피츠로이의 문명화 실험은 대실패였다. 제미 버튼이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문명을 동경하고 영국 생활을 즐겼는지, 아니면 단지 견뎌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남은 기록이라고는 피츠로이 선장의 보고서와 다윈의 비글호 여행기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 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시선으로 오염된 텍스트다. 제미 버튼의 이야기는 접촉지대에서 발생하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만남이 얼마나 비대칭적인지, 나아가 ‘우리’와 ‘그들’ 사이의 평등한 만남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2021-06-23 | hrights | 조회: 1582 | 추천: 8
: 이스라엘 내 아랍 정당들 통합 강타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교수  2021년 6월 13일, 이스라엘 새 연립정부가 의회 신임 투표에서 전체 120석 중 60 : 59, 1표 차로 승인되었다. 새 정부는 극우파 총리 나프탈리 베네트가 이끌고, 우파와 좌파뿐만 아니라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라암당 등 정치이념이 다른 8개 정당이 합류하였다. 새 총리 베네트는 점령지 팔레스타인에 불법적인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팔레스타인인 살해를 옹호하는 등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바 있다.  네타냐후 정부와 박빙의 대결 구도 속에서, 새 정부 출범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은 의회에서 4석을 확보한 이슬람주의자 라암당을 이끄는 만수르 압바스다. 만수르 압바스(왼쪽)와 나프탈리 베네트 사진 출처 - 구글  압바스는 2020년부터 네타냐후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서, 네타냐후 정부와 새 정부 사이에서 어느 쪽에 합류할 것인가를 저울질해왔다. 2020년 11월 19일 예루살렘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압바스는 “다른 아랍계 의원들과는 달리, 나는 네타냐후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2020년 11월 24일 채널 20과의 인터뷰에서, 압바스는 총리 네타냐후에 대한 지지 및 협력관계를 공개하고, “아랍정당들이 모두 좌파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이슈 및 종교와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우파다. 정치 체제는 이스라엘 사회가 선택한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맞서 공동명부 소속으로 압바스 동료였던 임따니스 샤하다는 “이러한 만수르의 행위는 공동명부를 탈퇴하기 위한 변명이며, 네타냐후의 마우스피스 노릇을 한다.”고 비난하고, 공동명부로부터 압바스 축출을 요구하였다.  결국, 라암당은 2021년 1월 28일 공동명부를 탈퇴하고, 3월 23일 선거에 단독 출마하여 4석을 획득함으로써 의회 내에서 이슬람주의자의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이후, 압바스는 네타냐후 정부와 네타냐후를 축출하기 위하여 결집한 새 정부 구성 추진 세력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압바스가 ‘킹 메이커’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종적으로 그는 네타냐후를 버리고, 새 정부 추진 세력, 베네트를 선택하였다. 사실, 인종차별적인 팔레스타인 정책에 있어 네타냐후와 베네트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다. 압바스는 아랍 통합 세력인 공동명부를 떠나 새로운 이스라엘 정부에 참가함으로써, 이스라엘 내 아랍 정당들 통합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분할통치 전략을 구사하는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다루기에 훨씬 손쉬운 대상이 되었다.  2015년 이후 이스라엘 내 아랍 정당들의 통합으로 공동명부가 창출되어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을 결집시킴으로써, 현실 정치 참여도가 높아졌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2013년 이스라엘 의회 선거에 56%가 참가하였고, 공동명부가 만들어진 2015년에는 63.5%가 참가하였다. 2013년 의회 선거에서 아랍 정당들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투표의 77%(349,000표)를 획득하였다. 2015년 의회 선거에서 공동명부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투표의 82%(444,000표)를 획득하였다. 2015년 아랍 정당들이 단일 공동명부로 출마하기로 합의한 이유는 2014년 3월 11일 제정된 선거법이 선거 문턱을 득표율 2%에서 3.25%로 높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하나의 정당이 최소 4석을 확보해야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5년 공동명부 출범 이후, 이스라엘 내 아랍 정당들은 다음의 투표 결과를 얻었다. 2015-2021년 이스라엘 아랍 정당들의 의석 선거일 정당 대표 의석수(총 120석) 득표 % 정당순위 2015.03.17 공동명부 아이만 오데 13 10.54 3/10 2019.04.09 하다시-타알 아이만 오데 6 4.49 5/11 라암-발라드 만수르 압바스 4 3.33 11/11 2019.09.17 공동명부 아이만 오데 13 10.60 3/9 2020.03.02 공동명부 아이만 오데 15 12.67 3/8 2021.03.23 공동명부 아이만 오데 6 4.82 10/13 라암 만수르 압바스 4 3.79 13/13 공동명부는 2015년 이스라엘 내 아랍계 4개 정당 하다시(사회주의), 타알(아랍민족주의, 중도좌파), 발라드(아랍민족주의, 좌파), 라암(이슬람주의)의 정치연합으로 창립됨. 4개 정당 중에서 라암만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였다. 2021년 1월 28일 라암은 공동명부를 탈퇴함.  위의 표에 따르면, 모든 아랍 정당이 통합하여 공동명부로 단독 출마했을 때, 아랍인들의 투표율뿐만 아니라 득표율도 높아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랍인들의 통합의식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8년 7월 네타냐후가 이끄는 우파가 주도하여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국가라는 인종차별을 제도화하는 ‘유대민족 국가법’을 제정하는 등 각종 반아랍 입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인종차별이 제도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동명부는 이스라엘 내 정당 순위 3위로 부상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다. 특히 2020년 다양한 파벌로 나뉘어 서로 분쟁하는 이스라엘 유대인 정당들은 공동명부를 구성한 아랍인들의 협력을 얻어야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도래한 것 같았다.  그러나 2021년 6월 라암당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추진하는 새 정부에 합류하면서,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통합은 커다란 걸림돌을 만난 듯하다.  압바스는 새 정부 구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내 아랍 사회에 만연한 범죄, 폭력, 실업 문제, 주택 부족 문제 등과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지방의 베두인 마을 허가 및 경제 발전 등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반면 압바스는 이슬람을 내세운 정당을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예루살렘 소재 이슬람 성지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 및 공격, 동예루살렘 거주 팔레스타인인 축출,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정책 등을 새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논의 주제로 내놓지 않았다. 이슬람주의자 압바스는 이슬람 성지나, 성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직면한 긴급한 민족적인 문제를 새 정부에서 해결해야할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압바스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당면한 민족적인 문제에는 눈을 감고, 세부적인 이스라엘 내 아랍 공동체의 사회∙경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적인 민족 문제와 이스라엘 내 아랍 공동체의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이스라엘 정책에서 나온 것이며,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압바스는 단지 이스라엘 정치 체제에 적극 순응하는 기회주의적인 아랍인 이슬람주의자일 뿐이다.
2021-06-15 | hrights | 조회: 1441 | 추천: 8
이윤/ 경찰관  1993년 개봉한 영화 ‘도망자’에서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주인공은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유죄판결을 받아 호송되던 중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도주하였다. 나는 이 영화에서 끝까지 탈주자를 검거하려 뒤쫓는 역할을 한 토미 리 존스가 경찰이 아니고 마샬(U. S. Marshals)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 마샬은 탈주자가 진범인지 여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검거라는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할 뿐인 현대판 자베르 같은 사람이었다.  미국의 마샬은 무려 1789년에 설립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법집행기관으로, 미국 법무부 소속이며 미 연방법원 집행부서로서 종사한다. 마샬의 임무는 탈주자 및 수배자 검거, 연방 죄수 호송, 범죄 취득 자산 관리, 연방 증인 보호 프로그램 수행 등이다(위키피디아 참조).  한국도 마샬 같은 조직이 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호송 중이거나 수감 중인 사람이 도주할 경우 검거는 경찰이 해 왔다. 그런데 재판을 마친 사람에 대한 형집행은 원래 법무부와 검사의 업무다. 따라서 형집행 중 도주하여 집행이 완료되지 못했다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실효성있는 집행이 되도록 하는 것도 법무부와 검사의 일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물론 경찰이 이 일에 손을 대지 않을 수는 없다. 탈주범이 도주 중에 국민들에게 가할 위해를 방지해야 하고, 전국적 조직망을 활용하여 검거 지원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책임의 주된 주체는 경찰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탈주범이 발생했을 때 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검거 시까지 비상근무를 하는 것은 주로 경찰이었다. 그리고 도주 후 며칠이 지나도 잡지 못하면 ‘얼빠진’, ‘넋 나간’과 같은 모멸적인 수식어로 비난을 받는 것도 경찰이었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하더라도 기자들이 도주 행적을 파헤치며 더 빨리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쳤다면서 칭찬은 고사하고 수사력을 의심받는 것도 경찰이었다. 놓친 사람과 검거 책임자는 숨죽이고 앉아있고, 실컷 고생하고도 빨리 검거하지 못한다고 욕먹는 사람은 따로 있다면, 이건 불공정하고 억울해서 속 터질 일이다. 게다가 경찰은 공안직보다 봉급도 덜 받는데 말이다.  1999년 어느 날 밤 시골 경찰서에서 당직을 하던 중이었는데, 형집행장 발부자가 검거되어 상황실에서 대기시켰다. 지방검찰청은 전주에 있었는데, 경찰관들이 전주까지 호송하여 데려다주거나, 검거자로 하여금 벌금을 납부하도록 한 후 석방해야 했다. 검찰 직원들은 자신들이 수배한 사람임에도 데리러 오지도 않았다. 아마 경찰관이 호송하여 데려다주어도 그 저녁에는 데리고 있을 데가 없어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은 늦은 밤에 가족이 벌금을 납부하였고, 경찰서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귀가 조처하였다. 이 사례에서 형집행장은 벌금형 선고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벌금을 납부하도록 협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경찰은 검사 대신 협박을 실행하는 악역을 맡았던 것이다.  형집행 업무는 수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형집행 사무는 피고인 구속업무 조항을 준용한다는 형사소송법 조문을 근거로 경찰에게 형집행을 위한 검거와 호송업무까지 지휘하여 시켰었다. 만일 위 사례의 사람이 벌금을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몰래 도주하였다면 그 비난과 책임은 또 오롯이 경찰에게 쏟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검찰의 벌금형 선고자에 대한 형집행장 발부는 적법하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검찰징수사무규칙에 의하면 벌과금 징수절차는 ①징수금의 조정→②납부명령→③납부독촉→④강제집행→⑤노역장유치집행 순으로 진행된다. 노역장유치를 위한 형집행장 발부를 위해서는 소환불능/도망·도망 염려/소재불명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형집행장 발부는 강제집행 등 다른 수단을 모두 사용하였지만 벌금을 징수하지 못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검찰은 독촉, 소환, 강제집행 절차를 생략·무시하고 형집행장을 발부하는 규칙위반 관행을 계속하고 있다(내일신문 참조). 전형적인 행정편의주의로 볼 수 있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벌과금징수절차를 위반하여 형집행장을 발부한 것이 헌법 제12조의 적법절차 원칙을 위반하여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면서 재발방지를 주문했다. 그러나 검찰은 10년 넘게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에서 벌금형 집행률은 노역장유치가 57%, 현금납부 14% 수준이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 중 반 이상이 실제로는 징역형과 같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30% 정도는 제대로 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 역시 공평의 문제다.  누군가에겐 얼마 되지도 않는 벌금인데, 그것을 납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역장에 가야 하는 현대판 장발장을 줄이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지키는 벌과금 징수업무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소위 재산비례 벌금제를 시행하게 되면 소득과 자산 규모에 따라 벌금이 수억, 수십억 원에 이르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형벌 효과를 위해서 벌금형은 제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세금도 집에 숨기고 내지 않는 요즘 누가 그 벌금을 찾아내고 징수할 것인가? 지금까지처럼 형집행장을 발부하여 경찰에 검거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형벌 실효성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더 이상 경찰이 벌금 징수를 위한 위협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  이제는 한국판 마샬 도입을 고려할 때가 되었다. 경찰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려 하지 말고, 중요 수배자 및 탈주자 검거와 호송, 벌금형 징수 및 형집행장 집행, 범죄수익 몰수 및 추징, 증인 보호 프로그램 등을 시행할 전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형집행장 발부를 남발하지 말고 규정대로 절차를 지켜서 벌금을 징수하도록 해야 한다.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은 업무가 폭증하는데 검사들은 야근이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업무는 조정되었는데 아직도 남아도는 검찰 인력과 예산은 경찰에 이관되지 않았다. 만약 검찰의 잉여인력을 경찰에 전환시키지 않을 것이라면 그 인력을 활용하여 한국형 마샬을 검찰이나 법무부에 설치하길 바란다. 자기 일 남 시키는 것도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2021-06-08 | hrights | 조회: 2109 | 추천: 18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올해 전국 지자체 발행 규모가 15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의 부정유통행위가 전국 일제단속을 통해 최근 112건이 적발됐다.  지난 5월 13일 행정안전부는 지역사랑상품권 부정유통 일제 단속 결과를 발표했다. 소위 ‘깡’ 행위를 저지른 개인과 지역화폐 가맹점을 적발하고 조치한 것이다.  지역화폐 발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인 부정유통행위는 크게 물품의 판매 또는 용역의 제공 없이 상품권을 수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너무 어려우니 쉽게 풀자면,  10% 선할인 혜택을 받아 9만 원을 내고 10만 원의 지역화폐를 구매(교환)한 지역화폐 가맹점의 점주, 점주의 가족, 점주의 지인들이 해당 점주의 가게에서 물건을 실제 구매하지 않고, 점주는 이를 그대로 현금으로 환금할 경우 1만 원의 부당 차익을 남기는 것이 기본형이다.  여기서 아예 물건을 팔지도 않는 유령가맹점을 지역화폐 가맹점으로 등록한 후 음성적인 자금으로 지역화폐를 대량 구매하거나 구매대행을 시킨 후 그대로 환금하는 기업형 부정유통도 최근 발생했다. 심지어 폭력조직이 고교생을 모아 구매대행을 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밖에 실제 매출금액 이상의 거래를 통하여 상품권을 수취하는 행위, 개별가맹점이 부정적으로 수취한 상품권의 환전을 대행하는 행위, 상품권 결제 거부 또는 상품권 소지자를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등도 포함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행정안전부의 이번 조치는 지난해 7월 시행된 지역사랑상품권 활성화 법률에서 부정유통행위 적발 시 최고 2천만 원의 과태료 규정이 포함되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지역화폐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악재를 강력하게 차단하겠다는 의지였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번 일제 단속 이후 부정유통을 근절하기 위한 후속 조치이다. 무엇보다 예방적 조치가 가장 필요하다.  지역화폐는 지류, 모바일, 카드형 결제수단이 있다. 하나의 결제수단만 도입한 지자체는 별로 없고 대부분 중복으로 사용한다. 이들 결제수단 중 모바일 또는 카드형은 발행위탁업체에서 부정사용방지시스템(FDS(Fraud Detection System)을 운영하거나 업그레이드를 진행 중이다. 발행위탁업체 중에서는 지류-모바일-카드 모두 관리가 가능한 통합시스템을 갖춘 곳도 있다.  부정사용방지시스템은 부정유통이 의심되는 사용자와 가맹점의 이상거래패턴을 감지하고 이를 분석하여 관리자에게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이를 발행위탁업체가 지자체 담당자에게 실시간 오픈하고 지자체 담당자들은 항상 스크린하며 의심 대상자들에게 ‘이상거래패턴이 감지되니 주의하시기 바람’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면 부정유통행위는 크게 줄어들 것으로 확신한다. 지역화폐 ‘깡’을 해볼 요량을 피자마자 즉각 경고 메시지가 온다면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서야 또 다른 엄두가 안날 노릇일 것이다.  부정유통행위 중 가장 고약한 유령가맹점을 통한 조직적인 깡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현장 실사가 필요하다. 현재 등록제인 지역화폐 가맹점들을 등록 후 반드시 한차례 이상 방문하여 실제 영업을 하고 있는지, 등록신청서와 동일한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확인하여 의심업체는 조사에 들어가야 한다. 지역화폐가 원활히 이뤄지는 지자체의 경우 현장지원 서포터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서포터즈들의 업무에 유령가맹점 여부확인을 포함시키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상인조직들과의 예방 노력도 필요하다. 부정유통 방지 현수막 게시 등 정기적인 계도활동을 상인회 등과 함께 한다면 이해당사자들의 책무성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부정유통행위인지 잘 모를 수 있는 가맹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공지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렇게 예방보다 더 좋은 조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다. 지역화폐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기대했던 인센티브 제공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지역화폐는 깡 행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코로나19 시국에서 골목상권에 지역화폐가 더 많이 돌게끔 정부가 파격적인 구매 할인액을 보전해주고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적절한 규모를 넘어선 높은 재정투입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변죽만 울리는 진단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도입비율도 비교하지 않고 결제수단이나 할인제공 형태별로 부정유통행위가 높거나 낮다는 분석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강조하건대 결제수단이나 할인제공 형태가 아무리 달라져도 할인 차익을 취하기 위해(그 규모가 매력적이면 매력적일수록)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제약이 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부정유통 현장단속을 다니며 진이 빠져버렸다. 지역화폐라는 어쩌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소상공인들은 물론 중앙·지방정부 모두.
2021-05-26 | hrights | 조회: 971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정치는 정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흔히 사실과 당위를 구분한다. 둘 다 순수하게 사적인 차원에서 성립해서 작동하지 않고 공공적인 차원에서 성립 · 작동한다.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제시하기도 했던 대표적인 당위의 언명이다. 평등으로 균등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과 당위를 구분한다고 해서 둘이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위 취임사의 당위는 ‘기회가 균등하지 않고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결과가 정의롭지 않다’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구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에 이미 당위가 함축되어 있다.  시제로 보자면, 사실은 현재에 이른 과거 즉 현재완료에 해당한다. 당위는 현재에서 미래로 향한 미래완료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했다’라는 과거의 당위는 독특한 사실이다. 이 진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라는 사실이 덧붙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은 당위가 아니고 필연이다. 필연은 사실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필연은 행위 주체를 수동적으로 규정한다. 행위 주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때, 행위 주체의 능동성에는 암암리에 당위가 작동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판단한 뒤, 그렇게 행위하고 그 행위에 따라 사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수는 기존의 사실을 지속하고자 하고, 진보는 새로운 당위를 현실화하고자 한다.  행위 주체의 능동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인 행위를 수행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정치적인 행위야말로 가장 강한 능동성을 띨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만약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그러지 않아야 했고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그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무능함을 나타낸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판단해서 능동적으로 행위를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때도 역시 그때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무능함에 따른 것이다.  기회가 균등하다는 것도 정의에 해당하고,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도 정의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결과만 정의롭다고 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도 과정도 끝도 정의로와야 한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해 온갖 복잡한 논의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보편적인 원칙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현실이 각자의 삶을 규정한다고 할 때, 그 규정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가치에 대한 자신의 몫이 어떻게 배분되는가로 귀착된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각자의 몫의 배분이야말로 정의의 근본 내용이다. 노예가 생산한 것을 주인이 다 가져간 뒤, 노예에게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몫을 나누어주는 것도 정의의 한 방식이고, 농노가 생산한 것에서 지주인 영주가 상대적으로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도 정의의 한 방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행의 법에 따라 자유롭게 시장 행위를 하여 이윤을 올린 뒤 상응하는 세금을 내고 남은 이익을 온통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 축적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아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를 소유하는 것 역시 정의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현실에서 통용되는 정의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통용되는 정의를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은 현실의 정의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고 급기야 견디다 못해 단합하여 노예 반란, 농민 반란, 부르주아 혁명 및 노동자 대투쟁 등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반란과 혁명을 둘러싼 세력 투쟁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정치적 활동이다. 이에 정치는 곧 정의를 둘러싼 투쟁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현행의 법적 정의의 실현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세워야 할 정의로운 법을 향한 투쟁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다. 2. 문 대통령과 검찰개혁  사회적인 정의를 책임지는 주체는 국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중심제에서는 국정을 총괄해서 권한을 행사하고 책무를 다하는 자는 대통령이다. 즉 대통령은 국가를 대신해서 사회적인 정의를 책임진 대리자다.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적인 정의에서 기초는 국가 공동체 자체의 안정된 유지다. 이는 기본적으로 형법을 통해 명문화된다. 크건 작건 국가 공동체의 안위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정의는 형법 중심의 법적 정의로 현실화된다. 그동안 국가의 법적 정의를 배타적으로 책임진 조직은 검찰이었고, 이를 위해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검찰은 그 수장인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대통령의 통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관련 조직이나 인물들의 범법 행위를 짐짓 보아 넘기거나 비밀리에 보호하는 등 통치 권력의 수족 노릇을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현행의 법적 정의를 수호하는 척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검찰이 직접 나서서 새로운 정의로운 법을 세우고자 한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치의 몫이고, 검찰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그 시민의 힘으로써 임기를 채우지 않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성과를 올렸고 급기야 현재의 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현 정권을 일컬어 촛불 정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촛불 시민의 힘을 바탕으로 검찰은 마치 새롭게 거듭난 듯 전직 두 대통령의 반국가적인 행위를 적발해 내어 구속 · 기소하여 재판에 넘겼고, 최종심은 아직 아니지만 적어도 수십 년의 징역형이 선고되도록 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를 기회로 삼아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으로 검찰개혁을 제시했다. 조국이라는 교수에게 민정수석을 맡겼고 조국은 검찰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적으로 조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윤석열을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는 “청와대든 여당이든 살아있는 권력에도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의 법적 정의에 따른 원칙주의가 발동한 것이다.  윤석열은 두 전직 대통령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처리함으로써 검찰의 순수성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자신이 몸담고서 충성한 검찰이야말로 국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법적 정의의 화신임을 입증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살아있는 최고 권력’이라 할지라도 법적 정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문 대통령의 당부가 자신이 지휘하는 검찰이야말로 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임을 실감케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은 검찰 스스로 검찰개혁을 수행해 주기를 자신에게 주문한 문 대통령을 어리석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된다.  아무튼, 윤석열에게는 두 개의 상반된 임무가 주어졌다. 살아있는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과 검찰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검찰개혁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정의로운 법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권력을 잡는 것은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 기소함으로써 확보한 검찰의 순수성과 위력을 다시 한번 입증해 기정사실로 만드는 일이다. 윤석열은 후자를 택했다. 검찰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조국 민정수석을 살아있는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택했고 검찰 조직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그와 그의 가족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인과 장모의 탈법 · 위법이 세간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부하 검사들의 행위가 위법가능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 getty image  ‘적폐청산’이란 말은 자신이 그 대상이라 여기는 자들에겐 대단히 폭력적인 낱말이다. 이 낱말을 쓰는 순간, 그동안 일본 강점기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독재정권에 요모조모 빌붙어 현실적인 사회 권력을 확보한 숱한 세력들의 거센 반동의 저항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반동적인 저항을 어떻게 분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치밀한 전략 · 전술을 마련해 놓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략 · 전술의 선봉장이라 여겨 내세운 검찰총장이 아예 반동적인 저항을 마치 총괄적으로 이끄는 야전사령관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부랴부랴 조국을 법무부 ― ministry of justice ― 즉 ‘정의 수호의 내각부 기관’ 의 수장으로 내세워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이는 이미 대안 부재의 무능을 노출했을 뿐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의 감옥행을 실현할 정도로 무서운 시민혁명의 힘에 눌려 있던 반동적인 세력, 특히 수구 언론세력은 이를 기회로 조국을 촛불 정권의 대리 표적으로 삼아 대대적인 공격을 무자비하게 가했다. 자신들의 두 대통령을 마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빼앗겨버린 야당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염을 토했다. 그 와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광훈을 비롯한 태극기 부대가 촛불 혁명으로 다져놓은 민주주의에 따른 집회와 결사 및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심지어 청와대 근처에서 ‘빨갱이 문재인을 찢어 죽이자!’ 하는 구호를 외쳐대기도 했다. 야당의 지도부는 이에 편승하여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탁월한 ‘K-방역’과 같은 호조건이 작동하기도 했지만, 반동 세력의 대대적인 황당한 쇼 덕분에 오히려 21대 총선에서 여당이 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엄청난 의회 권력을 장악한 여당은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다들 알다시피 검경 간의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신설하는 데 성공했다. 묘한 일은 거대 여당이 밀어붙인 검찰개혁의 성과가 과연 무엇인지 실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고 심지어 공수처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그 실효성을 비관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묘한 일은 거대 여당의 검찰개혁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윤석열은 검찰총장직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사퇴하고 그 이후 설문 조사에서 차기 대선 유력 후보 1위를 오르내리는 기이한 정치적 사태가 벌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윤석열과 대립각을 세웠던 조국과 추미애 두 전직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을 키운 마치 미필적 고의를 저지른 인물들인 양 치부되면서 그들이 일군 검찰개혁의 공은 온데간데없는 것처럼 되고 만 것 역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궁금한 인물은 문 대통령이다. 자신이 윤석열에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엄정한 자세로 임할 것을 당부했을 때, 자신의 그 당부가 자신이 민정수석에 이어 법무부 장관직을 맡긴 조국에게 그처럼 황당한 법적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빌미’가 될 줄 알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면서도 민주적인 법적 공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한 치 양보 없는 충돌이 일어났을 때, 문 대통령은 왜 두 사람을 조용히 불러 조율 · 조정하여 검찰개혁을 필두로 한 적폐청산의 방향키를 쥐고자 하지 않았을까?  현행의 법적 정의와 정의로운 법은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일치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법은 미래를 향해 있고, 현행의 법적 정의는 현재에 한정된다. 문 대통령은 현행의 법적 정의가 무너지면 정의로운 법을 세울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의로운 새로운 법을 향한 검찰개혁을 부정하는 윤석열 검찰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온통 짓밟듯이 하는 데도 그것이 현행의 법의 정의에 따른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런 순진무구함이 적폐청산을 내세우면서도 구체적인 전략 · 전술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능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문 대통령이 남북 평화를 위해 큰 걸음을 개척하고자 했던 업적이 대미 관계에서 최대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길을 여는 것으로 연결된다면, 그래서 그 과정에서 하다못해 임기 내에 거대 여당의 위력을 활용하여 국가보안법 폐지를 실현해 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통치는 충분한 의미를 획득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쪼록 남은 임기에 정의로운 법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감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진보에 크게 도움을 주기 바라며 그리하여 내년 대선에서 ‘별은 잡은 것 같다’ 운운 되는 인물에게 ‘죽 쑤어 개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2021-05-21 | hrights | 조회: 975 | 추천: 2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출퇴근길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 한쪽으로 항아리 가게가 있고 앞으로는 고물상이 있다. 그 공터는 대형버스며 택시, 화물차들의 주차장이었다. 공터를 끼고 골목 맞은편에는 ‘시골백반’의 상호를 단 허름한 식당이 있다. 식당 아주머니 음식 솜씨는 모르지만 생명을 키워내는 솜씨만은 탁월했다. 겨울 지나 코끝에 따스한 바람이 묻어나기 시작할 즈음이면 공터를 둘러싼 울타리 아래로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고무다라 화분이 이십여 개가 넘었다. 삐죽삐죽 새싹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피고 지는 꽃들은 봄을 지나 여름이면 무성해졌고, 가을 넘어 겨울 문턱에 다다를 때까지 피고지곤 하였다. 아주머니의 취미생활은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한테 가지각색의 꽃을 보는 재미를 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주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어떻게 생명을 길러내는지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화분이 놓인 울타리에서는 진남보랏빛의 나팔꽃이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 때까지 마치 배경을 이루듯 피고 졌다. 2.  고물상이 있는 도로가로는 오래된 벚나무 여남은 그루가 있었다. 그늘진 곳에서 피는지라 늦게 핀 벚꽃은 색도 진하고 오래갔다. “이곳 벚꽃은 다른 곳보다 색이 진하구나~” 벚꽃 피는 무렵이면 일부러 꽃구경 나간 엄마는 늘 그렇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다 먼저 들어선 고층 빌딩에 벚나무 서너 그루가 먼저 베였다.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지기를 바랐다. 그래도 대여섯 그루 남은 벚나무는 봄이면 꽃비를 날릴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여름이면 너른 가지를 펼쳐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었다. 고물상 주변을 환하게 밝히던 벚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둥치가 크고 우람하였다. 새벽녘으로 그곳을 지나다 보면 고물상 문 열기를 기다리며 밤새 폐지를 모아온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서는 고단한 얼굴마저 환해 보이곤 하였다. 사진 출처 - 경남신문 3.  먼저 항아리 가게가 자리를 옮겨 이사를 갔다. 그래도 공터는 오랜 시간 주차장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고물상이 이사를 갔다. 그러고도 공터는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작년 여름, 식당 아주머니가 울타리 아래 있던 화분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화분을 정리하던 아주머니 딸이 “우리 엄마 저 화분 치우고 우찌 사노~ 이제 어떡하냐! 어떡하냐?”며 친구한테 넋두리를 하였다. 그 말을 듣던 내 가슴 한쪽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서늘해졌다. ‘시골백반’ 식당은 그러고도 또 한동안 장사를 했다. 그리고 울타리 아래 있던 화분 몇 개가 아주머니 가게 앞으로 옮겨와 꽃을 피웠다. 그렇게 한 철을 보내고 겨울 즈음에 ‘시골백반’ 식당은 문을 닫았다. 같은 건물에 있던 미용실이며 치킨 가게가 문을 닫은 지는 더 오래전이었다. 4.  지난겨울 공터는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쳤다. 39층의 건물이 들어선다는 공지가 나붙었다. 울타리를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자취를 감췄고 공터를 밝히던 벚나무 대여섯 그루도 베어졌다. 봄이면 꽃비를 날리고,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며 도로를 환히 밝혀주던 벚나무는 이제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 40층이 넘는 건물 옆으로 또 다른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울컥, 가슴 한쪽이 또다시 서늘해진다. 5.  어릴 때 세 살던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으로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으로는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아래로는 봉숭아며 맨드라미, 과꽃 들이 피고 졌다. 담벼락 아래로는 해바라기가 피어올랐다. 여름이면 엄마는 마루에 앉아 세 자매의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 줬는데, 그때 손가락을 감싼 것은 커다란 피마자 잎이었다.  우물이 있는 그 집엔 세 가구가 살았다. 안쪽으로 주인집과 그 옆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세 살았고, 대문 앞으로 우리가 살았다. 시골에 일이라도 생기면 엄마는 우리를 주인집 아줌마한테 맡겼다. 아줌마는 엄마가 없는 동안 우리를 먹이고 재워 주곤 하였다. 그런 우리 집 옆으로는 쪽문이 있는데 그 쪽문을 열고 나가면 공터가 있고, 주욱 달려나가면 논밭이 나왔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치운 눈이 공터에 산처럼 쌓였다. 동네 오빠들이 산처럼 쌓인 눈을 다져 굴을 만들었다. 그 굴속에서 노는 게 우리의 겨울 놀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볏짚 낟가리가 올라갔다. 숨바꼭질할 때면 숨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하루종일 뛰어놀다 해거름 녘이면 온통 볏짚을 옷에 묻힌 채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정월 보름에는 깡통에 나뭇가지를 넣어 불을 붙여 휙휙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던 곳도 그 논이었고, 한쪽에 물을 가둬 얼려 썰매를 타던 썰매장도 그 논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씀바귀와 냉이를 캐던 곳도 그 논밭이었다. 6.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부자도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산다.”  벚나무 사라진 곳에서, 나 어릴 적 살던 집이 생각났다. 요즘이야 ‘대문, 마당, 우물, 장독대, 볏짚 낟가리, 쥐불놀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텐데, 그저 넋두리인 것을. 많은 사람이 꽃구경을 가고 단풍놀이를 가고 물놀이를 가는데, 예전에는 그냥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하던 놀이였다는 것을, 아니 그냥 삶이었다는 것을 고층 건물이 들어설 담 아래서 곱씹어 봤다.  부동산 논란, 아니 광풍인지도 모를 이즈음에, 내가 사는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BEST HOME’, ‘元家’라고 표기된 빌라 한 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은 곧 정신이라고도 하고! 우리는 HOUSE가 아닌 HOME이어야 할 집을 그저 자산의 하나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비록 마당은 없더라도 집은 ‘HOUSE’가 아닌 ‘HOME’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집 이름. 내가 사는 집 이름이 그냥 아파트면 남한테 밀리니 캐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이마저도 촌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집[HOME]이기를 바란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다고들 하는 이 시간에 말이다.
2021-05-10 | hrights | 조회: 1033 | 추천: 4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지난달 24일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통과되었지만, 그 전날인 23일 온라인게임을 통해 알게 된 여성이 연락을 받지 않고 만남을 거절하자 그와 여동생, 어머니까지 세 모녀를 살해한 김태현은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다만 최대 1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인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처벌받게 될 뿐이다. 스토킹으로 인한 범죄는 최대 징역 5년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나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9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법이 제정된 이후인 4월 18일에도 스토킹 범죄는 발생하였다. 직장동료의 집을 찾아가 귀가하던 직장동료를 잔인하게 공격한 사건이다. 범인은 다음날 바로 잡혔고 현재 구속상태에 있지만, 9월 이전에 판결을 받는다면 이 또한 ‘경범죄’로 끝나고 만다. 이렇듯 스토킹은 벌금 10만 원 이하의 경범죄로 취급받아왔으나 실제 범죄의 내용은 살인 등 중대범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2020년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13년 312건, 2015년 363건, 2018년 544건, 2019년 583건으로 스토킹 범죄는 증가추세에 있다. 또한, 한국여성의전화의 2020년 분석에 따르면 살인, 방화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스토킹 범죄의 경우, 50%가 전/현 배우자(13.5%) 또는 전/현 애인(36.5%)이며, 직장 관계자가 12.3%, 동네 사람 및 지인이 5.9%, 학교 관련자가 3.6%, 의료기관 및 수사기관이 0.9%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홍일 사건은 2012년 울산에서 발생한 것으로 주택에 침입해 자매를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언니를 따라다니고 집착했던 그는 “이별 통보에 분노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대낮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헤어진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도 피해자가 이별을 요구하자 협박과 위협을 일삼다가 끝내는 피해자를 살해한 사건이다. 2019년 윗집에 사는 미성년자를 따라다니며 그 가족에게도 욕설과 위협을 일삼았지만, 경찰은 ‘사소한 시비’라며 돌아갔고 피해자 가족이 협박 증거 영상을 제출한 후에야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신고 후 약 한 달 뒤, 여성 5명을 살해했다. 또한, 2020년 5월에는 식당을 운영해 온 60대 여성이 40대 남자 손님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3개월 동안 100여 통이 넘는 전화와 문자를 발송했고, 사건 전날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는 가해자를 신고했으나 별다른 조치 없이 풀려난 가해자는 피해자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다 미리 준비한 흉기로 피해자를 살해하였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 사건들의 공통성은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라는 점이다. 미리 동선을 파악하고, 협박과 위협을 통해 피해자들을 위축시키고, 범죄 도구를 준비하고, 피해자를 기다렸다가 살해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 위의 사례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경찰의 초동대응이 둔감했다는 점이다. 가정폭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토킹 또한 친밀한 관계의 치정사건쯤으로 치부되어 버리기 쉽고, 이로 인해 막을 수 있었던 강력범죄의 초동대응에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스토킹을 경범죄로만 다스려온 법체계를 통해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폭력에 둔감한지를 알게 하는 지점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여자의 NO는 YES!”라는 왜곡된 남녀관계에 대한 통념 역시 이러한 범죄를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 아니 조장하는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왜곡되고 폭력적인 남녀관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여성의 거부를 불쾌하게 여기는 문화와 정서는 여성이 지각능력과 판단능력이 없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인형이거나 물건으로 대상화하는 관점에서 발현된다. 이들에게 여성은 성적 판타지를 실현할 대상/물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물건은 자신의 소유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모든 범죄나 폭력이 여성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관점에서 비롯되지만, 스토킹 범죄나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해는 여성의 생사여탈권을 남성이 가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와 제도에서 비롯된다. 스토킹법이 처음 발의된 것은 1999년이다. 그러나 22년 만에야 제정이 되었다. 그 22년 동안 앞의 사례처럼 수많은 흉악범죄가 발생했다. 그러나 드러나지 못한 사건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지난해 스토킹 범죄는 4500여 건이지만 이 중에 10%만이 처벌되었고, 약 90%에 해당하는 사건은 현장에서 종료되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경찰 스스로 경미한 사건으로 판단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킹은 피해자의 의사나 경찰의 판단과 무관하게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범죄이다. 그러므로 현행법안에 남아있는 ‘반 의사 불벌죄’ 조항을 폐기하고, 오히려 스토킹 범죄의 초기대응과 처벌을 강력히 할 필요가 있다.  늦었지만 ‘스토킹 범죄 처벌법’의 제정을 환영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법이 제정되었다고 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종류의 범죄의 심각성에 사회구성원들의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만큼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역으로 보여 주고 있다. 법은 항상 현실보다 한발 늦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실효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와 사법당국의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2021-04-28 | hrights | 조회: 786 | 추천: 2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옥수동 오름길에는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가 있다. 지하철 3호선 옥수역 4번 출구로 나와 오름길을 따라오면 옥정초등학교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다 보면 왼편 5층짜리 건물 옥상에 미얀마 국기가 보인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그곳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다.  건물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mbassy of 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 office of The Military, Naval and Air Attache 미얀마 대사관 국방 및 해군, 공군 무관부’  미얀마 대사관은 이곳으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한남동에 있다. 왜 대사관과 무관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쿠데타 이후 의문이 해소됐다. 이곳이 쿠데타 세력인 군에서 파견한 이들이 근무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얀나잉툰이 얼마 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무관부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유학생이나 노동자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독재정권 시기 안기부나 기무사가 행했던 사찰업무 아니던가. 세상에나! 미얀마 쿠데타 세력의 한국 본거지와도 같은 이곳은 미얀마 군부의 폭력적 상황과 민주주의를 위한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점차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시민 700여 명 이상이 희생된 미얀마 상황 속에 지난 4월 24일 아세안(ASEAN) 중재로 반쿠데타 진영과 군부가 대화를 하겠다는 깜짝 합의문이 나왔다. 군부가 여전히 폭력을 행사하고 시민의 희생이 이어지고 있어 합의가 성실히 이행될지 여부는 앞으로 지켜봐야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미얀마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꾸준히 이어가야할 것이다.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을 향한 한국 시민들의 연대는 사회 각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 기독교, 원불교, 가톨릭 등 교계에서는 미얀마의 평화를 기원하는 종교행사가 열리고, 언론사는 캠페인과 기획기사를 통해 응원하고 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모금활동, 미얀마 민주주의 지원 사진전도 열렸다. 11개 영화제가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선언을 한 것은 물론 ‘Everything will be OK’라는 곡을 노래한 한국의 힙합 가수는 음원 수익금을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전액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타국의 폭력적 상황에 대해 이렇게 각계각층의 지지와 연대가 두루 이뤄지는 것은 드문 일이다.  우리도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평화연대에 동참하고 있다. 옥수동 오름길 끝에 있는 한베평화재단은 4월부터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 앞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어쩌다 한 동네에 같이 있다는 인연으로 이것만큼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 무관부 앞 말고도 주한미얀마대사관, 미국대사관, 청와대 앞 등 곳곳에서 1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1인 시위에는 한베평화재단 회원과 시민들이 동참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동구 시민, 목사, 학생, 교수, 애니메이션 창작자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로 소식을 보고 동참한 시민 등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어느 때는 우리와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피켓을 가지고 1인 시위를 하러 온 시민을 만나기도 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한국 시민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사진 출처 - 필자  동네 사람들은 몰랐다. 이곳이 미얀마 무관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응원의 손짓을 보내며 지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피켓을 들고 서 있으면 “미얀마 사람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다. 그리곤 “남의 나라 일에 우리가 간섭해서야 되겠느냐”,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느냐”는 질문도 따라온다. 어느 날은 누군가 무관부 건물에 던진 달걀 한 알로 경찰과 정보과 형사가 들이닥쳐 시끌시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시민들의 반응은 지지와 격려가 대부분이었다.  옥수동 오름길에는 한베평화재단이 있다. 평화의 연대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들은 언제든 그 길을 오르시라.
2021-04-27 | hrights | 조회: 939 | 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