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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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윤/ 경찰관  1993년 개봉한 영화 ‘도망자’에서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주인공은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유죄판결을 받아 호송되던 중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도주하였다. 나는 이 영화에서 끝까지 탈주자를 검거하려 뒤쫓는 역할을 한 토미 리 존스가 경찰이 아니고 마샬(U. S. Marshals)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 마샬은 탈주자가 진범인지 여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검거라는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할 뿐인 현대판 자베르 같은 사람이었다.  미국의 마샬은 무려 1789년에 설립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법집행기관으로, 미국 법무부 소속이며 미 연방법원 집행부서로서 종사한다. 마샬의 임무는 탈주자 및 수배자 검거, 연방 죄수 호송, 범죄 취득 자산 관리, 연방 증인 보호 프로그램 수행 등이다(위키피디아 참조).  한국도 마샬 같은 조직이 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호송 중이거나 수감 중인 사람이 도주할 경우 검거는 경찰이 해 왔다. 그런데 재판을 마친 사람에 대한 형집행은 원래 법무부와 검사의 업무다. 따라서 형집행 중 도주하여 집행이 완료되지 못했다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실효성있는 집행이 되도록 하는 것도 법무부와 검사의 일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물론 경찰이 이 일에 손을 대지 않을 수는 없다. 탈주범이 도주 중에 국민들에게 가할 위해를 방지해야 하고, 전국적 조직망을 활용하여 검거 지원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책임의 주된 주체는 경찰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탈주범이 발생했을 때 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검거 시까지 비상근무를 하는 것은 주로 경찰이었다. 그리고 도주 후 며칠이 지나도 잡지 못하면 ‘얼빠진’, ‘넋 나간’과 같은 모멸적인 수식어로 비난을 받는 것도 경찰이었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하더라도 기자들이 도주 행적을 파헤치며 더 빨리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쳤다면서 칭찬은 고사하고 수사력을 의심받는 것도 경찰이었다. 놓친 사람과 검거 책임자는 숨죽이고 앉아있고, 실컷 고생하고도 빨리 검거하지 못한다고 욕먹는 사람은 따로 있다면, 이건 불공정하고 억울해서 속 터질 일이다. 게다가 경찰은 공안직보다 봉급도 덜 받는데 말이다.  1999년 어느 날 밤 시골 경찰서에서 당직을 하던 중이었는데, 형집행장 발부자가 검거되어 상황실에서 대기시켰다. 지방검찰청은 전주에 있었는데, 경찰관들이 전주까지 호송하여 데려다주거나, 검거자로 하여금 벌금을 납부하도록 한 후 석방해야 했다. 검찰 직원들은 자신들이 수배한 사람임에도 데리러 오지도 않았다. 아마 경찰관이 호송하여 데려다주어도 그 저녁에는 데리고 있을 데가 없어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은 늦은 밤에 가족이 벌금을 납부하였고, 경찰서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귀가 조처하였다. 이 사례에서 형집행장은 벌금형 선고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벌금을 납부하도록 협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경찰은 검사 대신 협박을 실행하는 악역을 맡았던 것이다.  형집행 업무는 수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형집행 사무는 피고인 구속업무 조항을 준용한다는 형사소송법 조문을 근거로 경찰에게 형집행을 위한 검거와 호송업무까지 지휘하여 시켰었다. 만일 위 사례의 사람이 벌금을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몰래 도주하였다면 그 비난과 책임은 또 오롯이 경찰에게 쏟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검찰의 벌금형 선고자에 대한 형집행장 발부는 적법하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검찰징수사무규칙에 의하면 벌과금 징수절차는 ①징수금의 조정→②납부명령→③납부독촉→④강제집행→⑤노역장유치집행 순으로 진행된다. 노역장유치를 위한 형집행장 발부를 위해서는 소환불능/도망·도망 염려/소재불명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형집행장 발부는 강제집행 등 다른 수단을 모두 사용하였지만 벌금을 징수하지 못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검찰은 독촉, 소환, 강제집행 절차를 생략·무시하고 형집행장을 발부하는 규칙위반 관행을 계속하고 있다(내일신문 참조). 전형적인 행정편의주의로 볼 수 있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벌과금징수절차를 위반하여 형집행장을 발부한 것이 헌법 제12조의 적법절차 원칙을 위반하여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면서 재발방지를 주문했다. 그러나 검찰은 10년 넘게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에서 벌금형 집행률은 노역장유치가 57%, 현금납부 14% 수준이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 중 반 이상이 실제로는 징역형과 같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30% 정도는 제대로 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 역시 공평의 문제다.  누군가에겐 얼마 되지도 않는 벌금인데, 그것을 납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역장에 가야 하는 현대판 장발장을 줄이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지키는 벌과금 징수업무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소위 재산비례 벌금제를 시행하게 되면 소득과 자산 규모에 따라 벌금이 수억, 수십억 원에 이르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형벌 효과를 위해서 벌금형은 제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세금도 집에 숨기고 내지 않는 요즘 누가 그 벌금을 찾아내고 징수할 것인가? 지금까지처럼 형집행장을 발부하여 경찰에 검거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형벌 실효성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더 이상 경찰이 벌금 징수를 위한 위협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  이제는 한국판 마샬 도입을 고려할 때가 되었다. 경찰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려 하지 말고, 중요 수배자 및 탈주자 검거와 호송, 벌금형 징수 및 형집행장 집행, 범죄수익 몰수 및 추징, 증인 보호 프로그램 등을 시행할 전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형집행장 발부를 남발하지 말고 규정대로 절차를 지켜서 벌금을 징수하도록 해야 한다.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은 업무가 폭증하는데 검사들은 야근이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업무는 조정되었는데 아직도 남아도는 검찰 인력과 예산은 경찰에 이관되지 않았다. 만약 검찰의 잉여인력을 경찰에 전환시키지 않을 것이라면 그 인력을 활용하여 한국형 마샬을 검찰이나 법무부에 설치하길 바란다. 자기 일 남 시키는 것도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2021-06-08 | hrights | 조회: 1883 | 추천: 18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올해 전국 지자체 발행 규모가 15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의 부정유통행위가 전국 일제단속을 통해 최근 112건이 적발됐다.  지난 5월 13일 행정안전부는 지역사랑상품권 부정유통 일제 단속 결과를 발표했다. 소위 ‘깡’ 행위를 저지른 개인과 지역화폐 가맹점을 적발하고 조치한 것이다.  지역화폐 발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인 부정유통행위는 크게 물품의 판매 또는 용역의 제공 없이 상품권을 수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너무 어려우니 쉽게 풀자면,  10% 선할인 혜택을 받아 9만 원을 내고 10만 원의 지역화폐를 구매(교환)한 지역화폐 가맹점의 점주, 점주의 가족, 점주의 지인들이 해당 점주의 가게에서 물건을 실제 구매하지 않고, 점주는 이를 그대로 현금으로 환금할 경우 1만 원의 부당 차익을 남기는 것이 기본형이다.  여기서 아예 물건을 팔지도 않는 유령가맹점을 지역화폐 가맹점으로 등록한 후 음성적인 자금으로 지역화폐를 대량 구매하거나 구매대행을 시킨 후 그대로 환금하는 기업형 부정유통도 최근 발생했다. 심지어 폭력조직이 고교생을 모아 구매대행을 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밖에 실제 매출금액 이상의 거래를 통하여 상품권을 수취하는 행위, 개별가맹점이 부정적으로 수취한 상품권의 환전을 대행하는 행위, 상품권 결제 거부 또는 상품권 소지자를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등도 포함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행정안전부의 이번 조치는 지난해 7월 시행된 지역사랑상품권 활성화 법률에서 부정유통행위 적발 시 최고 2천만 원의 과태료 규정이 포함되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지역화폐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악재를 강력하게 차단하겠다는 의지였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번 일제 단속 이후 부정유통을 근절하기 위한 후속 조치이다. 무엇보다 예방적 조치가 가장 필요하다.  지역화폐는 지류, 모바일, 카드형 결제수단이 있다. 하나의 결제수단만 도입한 지자체는 별로 없고 대부분 중복으로 사용한다. 이들 결제수단 중 모바일 또는 카드형은 발행위탁업체에서 부정사용방지시스템(FDS(Fraud Detection System)을 운영하거나 업그레이드를 진행 중이다. 발행위탁업체 중에서는 지류-모바일-카드 모두 관리가 가능한 통합시스템을 갖춘 곳도 있다.  부정사용방지시스템은 부정유통이 의심되는 사용자와 가맹점의 이상거래패턴을 감지하고 이를 분석하여 관리자에게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이를 발행위탁업체가 지자체 담당자에게 실시간 오픈하고 지자체 담당자들은 항상 스크린하며 의심 대상자들에게 ‘이상거래패턴이 감지되니 주의하시기 바람’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면 부정유통행위는 크게 줄어들 것으로 확신한다. 지역화폐 ‘깡’을 해볼 요량을 피자마자 즉각 경고 메시지가 온다면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서야 또 다른 엄두가 안날 노릇일 것이다.  부정유통행위 중 가장 고약한 유령가맹점을 통한 조직적인 깡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현장 실사가 필요하다. 현재 등록제인 지역화폐 가맹점들을 등록 후 반드시 한차례 이상 방문하여 실제 영업을 하고 있는지, 등록신청서와 동일한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확인하여 의심업체는 조사에 들어가야 한다. 지역화폐가 원활히 이뤄지는 지자체의 경우 현장지원 서포터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서포터즈들의 업무에 유령가맹점 여부확인을 포함시키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상인조직들과의 예방 노력도 필요하다. 부정유통 방지 현수막 게시 등 정기적인 계도활동을 상인회 등과 함께 한다면 이해당사자들의 책무성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부정유통행위인지 잘 모를 수 있는 가맹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공지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렇게 예방보다 더 좋은 조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다. 지역화폐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기대했던 인센티브 제공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지역화폐는 깡 행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코로나19 시국에서 골목상권에 지역화폐가 더 많이 돌게끔 정부가 파격적인 구매 할인액을 보전해주고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적절한 규모를 넘어선 높은 재정투입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변죽만 울리는 진단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도입비율도 비교하지 않고 결제수단이나 할인제공 형태별로 부정유통행위가 높거나 낮다는 분석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강조하건대 결제수단이나 할인제공 형태가 아무리 달라져도 할인 차익을 취하기 위해(그 규모가 매력적이면 매력적일수록)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제약이 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부정유통 현장단속을 다니며 진이 빠져버렸다. 지역화폐라는 어쩌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소상공인들은 물론 중앙·지방정부 모두.
2021-05-26 | hrights | 조회: 834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정치는 정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흔히 사실과 당위를 구분한다. 둘 다 순수하게 사적인 차원에서 성립해서 작동하지 않고 공공적인 차원에서 성립 · 작동한다.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제시하기도 했던 대표적인 당위의 언명이다. 평등으로 균등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과 당위를 구분한다고 해서 둘이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위 취임사의 당위는 ‘기회가 균등하지 않고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결과가 정의롭지 않다’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구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에 이미 당위가 함축되어 있다.  시제로 보자면, 사실은 현재에 이른 과거 즉 현재완료에 해당한다. 당위는 현재에서 미래로 향한 미래완료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했다’라는 과거의 당위는 독특한 사실이다. 이 진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라는 사실이 덧붙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은 당위가 아니고 필연이다. 필연은 사실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필연은 행위 주체를 수동적으로 규정한다. 행위 주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때, 행위 주체의 능동성에는 암암리에 당위가 작동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판단한 뒤, 그렇게 행위하고 그 행위에 따라 사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수는 기존의 사실을 지속하고자 하고, 진보는 새로운 당위를 현실화하고자 한다.  행위 주체의 능동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인 행위를 수행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정치적인 행위야말로 가장 강한 능동성을 띨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만약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그러지 않아야 했고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그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무능함을 나타낸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판단해서 능동적으로 행위를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때도 역시 그때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무능함에 따른 것이다.  기회가 균등하다는 것도 정의에 해당하고,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도 정의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결과만 정의롭다고 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도 과정도 끝도 정의로와야 한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해 온갖 복잡한 논의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보편적인 원칙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현실이 각자의 삶을 규정한다고 할 때, 그 규정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가치에 대한 자신의 몫이 어떻게 배분되는가로 귀착된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각자의 몫의 배분이야말로 정의의 근본 내용이다. 노예가 생산한 것을 주인이 다 가져간 뒤, 노예에게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몫을 나누어주는 것도 정의의 한 방식이고, 농노가 생산한 것에서 지주인 영주가 상대적으로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도 정의의 한 방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행의 법에 따라 자유롭게 시장 행위를 하여 이윤을 올린 뒤 상응하는 세금을 내고 남은 이익을 온통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 축적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아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를 소유하는 것 역시 정의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현실에서 통용되는 정의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통용되는 정의를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은 현실의 정의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고 급기야 견디다 못해 단합하여 노예 반란, 농민 반란, 부르주아 혁명 및 노동자 대투쟁 등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반란과 혁명을 둘러싼 세력 투쟁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정치적 활동이다. 이에 정치는 곧 정의를 둘러싼 투쟁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현행의 법적 정의의 실현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세워야 할 정의로운 법을 향한 투쟁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다. 2. 문 대통령과 검찰개혁  사회적인 정의를 책임지는 주체는 국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중심제에서는 국정을 총괄해서 권한을 행사하고 책무를 다하는 자는 대통령이다. 즉 대통령은 국가를 대신해서 사회적인 정의를 책임진 대리자다.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적인 정의에서 기초는 국가 공동체 자체의 안정된 유지다. 이는 기본적으로 형법을 통해 명문화된다. 크건 작건 국가 공동체의 안위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정의는 형법 중심의 법적 정의로 현실화된다. 그동안 국가의 법적 정의를 배타적으로 책임진 조직은 검찰이었고, 이를 위해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검찰은 그 수장인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대통령의 통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관련 조직이나 인물들의 범법 행위를 짐짓 보아 넘기거나 비밀리에 보호하는 등 통치 권력의 수족 노릇을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현행의 법적 정의를 수호하는 척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검찰이 직접 나서서 새로운 정의로운 법을 세우고자 한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치의 몫이고, 검찰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그 시민의 힘으로써 임기를 채우지 않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성과를 올렸고 급기야 현재의 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현 정권을 일컬어 촛불 정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촛불 시민의 힘을 바탕으로 검찰은 마치 새롭게 거듭난 듯 전직 두 대통령의 반국가적인 행위를 적발해 내어 구속 · 기소하여 재판에 넘겼고, 최종심은 아직 아니지만 적어도 수십 년의 징역형이 선고되도록 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를 기회로 삼아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으로 검찰개혁을 제시했다. 조국이라는 교수에게 민정수석을 맡겼고 조국은 검찰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적으로 조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윤석열을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는 “청와대든 여당이든 살아있는 권력에도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의 법적 정의에 따른 원칙주의가 발동한 것이다.  윤석열은 두 전직 대통령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처리함으로써 검찰의 순수성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자신이 몸담고서 충성한 검찰이야말로 국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법적 정의의 화신임을 입증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살아있는 최고 권력’이라 할지라도 법적 정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문 대통령의 당부가 자신이 지휘하는 검찰이야말로 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임을 실감케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은 검찰 스스로 검찰개혁을 수행해 주기를 자신에게 주문한 문 대통령을 어리석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된다.  아무튼, 윤석열에게는 두 개의 상반된 임무가 주어졌다. 살아있는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과 검찰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검찰개혁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정의로운 법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권력을 잡는 것은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 기소함으로써 확보한 검찰의 순수성과 위력을 다시 한번 입증해 기정사실로 만드는 일이다. 윤석열은 후자를 택했다. 검찰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조국 민정수석을 살아있는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택했고 검찰 조직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그와 그의 가족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인과 장모의 탈법 · 위법이 세간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부하 검사들의 행위가 위법가능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 getty image  ‘적폐청산’이란 말은 자신이 그 대상이라 여기는 자들에겐 대단히 폭력적인 낱말이다. 이 낱말을 쓰는 순간, 그동안 일본 강점기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독재정권에 요모조모 빌붙어 현실적인 사회 권력을 확보한 숱한 세력들의 거센 반동의 저항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반동적인 저항을 어떻게 분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치밀한 전략 · 전술을 마련해 놓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략 · 전술의 선봉장이라 여겨 내세운 검찰총장이 아예 반동적인 저항을 마치 총괄적으로 이끄는 야전사령관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부랴부랴 조국을 법무부 ― ministry of justice ― 즉 ‘정의 수호의 내각부 기관’ 의 수장으로 내세워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이는 이미 대안 부재의 무능을 노출했을 뿐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의 감옥행을 실현할 정도로 무서운 시민혁명의 힘에 눌려 있던 반동적인 세력, 특히 수구 언론세력은 이를 기회로 조국을 촛불 정권의 대리 표적으로 삼아 대대적인 공격을 무자비하게 가했다. 자신들의 두 대통령을 마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빼앗겨버린 야당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염을 토했다. 그 와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광훈을 비롯한 태극기 부대가 촛불 혁명으로 다져놓은 민주주의에 따른 집회와 결사 및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심지어 청와대 근처에서 ‘빨갱이 문재인을 찢어 죽이자!’ 하는 구호를 외쳐대기도 했다. 야당의 지도부는 이에 편승하여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탁월한 ‘K-방역’과 같은 호조건이 작동하기도 했지만, 반동 세력의 대대적인 황당한 쇼 덕분에 오히려 21대 총선에서 여당이 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엄청난 의회 권력을 장악한 여당은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다들 알다시피 검경 간의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신설하는 데 성공했다. 묘한 일은 거대 여당이 밀어붙인 검찰개혁의 성과가 과연 무엇인지 실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고 심지어 공수처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그 실효성을 비관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묘한 일은 거대 여당의 검찰개혁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윤석열은 검찰총장직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사퇴하고 그 이후 설문 조사에서 차기 대선 유력 후보 1위를 오르내리는 기이한 정치적 사태가 벌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윤석열과 대립각을 세웠던 조국과 추미애 두 전직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을 키운 마치 미필적 고의를 저지른 인물들인 양 치부되면서 그들이 일군 검찰개혁의 공은 온데간데없는 것처럼 되고 만 것 역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궁금한 인물은 문 대통령이다. 자신이 윤석열에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엄정한 자세로 임할 것을 당부했을 때, 자신의 그 당부가 자신이 민정수석에 이어 법무부 장관직을 맡긴 조국에게 그처럼 황당한 법적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빌미’가 될 줄 알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면서도 민주적인 법적 공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한 치 양보 없는 충돌이 일어났을 때, 문 대통령은 왜 두 사람을 조용히 불러 조율 · 조정하여 검찰개혁을 필두로 한 적폐청산의 방향키를 쥐고자 하지 않았을까?  현행의 법적 정의와 정의로운 법은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일치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법은 미래를 향해 있고, 현행의 법적 정의는 현재에 한정된다. 문 대통령은 현행의 법적 정의가 무너지면 정의로운 법을 세울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의로운 새로운 법을 향한 검찰개혁을 부정하는 윤석열 검찰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온통 짓밟듯이 하는 데도 그것이 현행의 법의 정의에 따른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런 순진무구함이 적폐청산을 내세우면서도 구체적인 전략 · 전술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능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문 대통령이 남북 평화를 위해 큰 걸음을 개척하고자 했던 업적이 대미 관계에서 최대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길을 여는 것으로 연결된다면, 그래서 그 과정에서 하다못해 임기 내에 거대 여당의 위력을 활용하여 국가보안법 폐지를 실현해 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통치는 충분한 의미를 획득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쪼록 남은 임기에 정의로운 법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감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진보에 크게 도움을 주기 바라며 그리하여 내년 대선에서 ‘별은 잡은 것 같다’ 운운 되는 인물에게 ‘죽 쑤어 개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2021-05-21 | hrights | 조회: 857 | 추천: 2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출퇴근길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 한쪽으로 항아리 가게가 있고 앞으로는 고물상이 있다. 그 공터는 대형버스며 택시, 화물차들의 주차장이었다. 공터를 끼고 골목 맞은편에는 ‘시골백반’의 상호를 단 허름한 식당이 있다. 식당 아주머니 음식 솜씨는 모르지만 생명을 키워내는 솜씨만은 탁월했다. 겨울 지나 코끝에 따스한 바람이 묻어나기 시작할 즈음이면 공터를 둘러싼 울타리 아래로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고무다라 화분이 이십여 개가 넘었다. 삐죽삐죽 새싹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피고 지는 꽃들은 봄을 지나 여름이면 무성해졌고, 가을 넘어 겨울 문턱에 다다를 때까지 피고지곤 하였다. 아주머니의 취미생활은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한테 가지각색의 꽃을 보는 재미를 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주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어떻게 생명을 길러내는지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화분이 놓인 울타리에서는 진남보랏빛의 나팔꽃이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 때까지 마치 배경을 이루듯 피고 졌다. 2.  고물상이 있는 도로가로는 오래된 벚나무 여남은 그루가 있었다. 그늘진 곳에서 피는지라 늦게 핀 벚꽃은 색도 진하고 오래갔다. “이곳 벚꽃은 다른 곳보다 색이 진하구나~” 벚꽃 피는 무렵이면 일부러 꽃구경 나간 엄마는 늘 그렇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다 먼저 들어선 고층 빌딩에 벚나무 서너 그루가 먼저 베였다.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지기를 바랐다. 그래도 대여섯 그루 남은 벚나무는 봄이면 꽃비를 날릴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여름이면 너른 가지를 펼쳐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었다. 고물상 주변을 환하게 밝히던 벚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둥치가 크고 우람하였다. 새벽녘으로 그곳을 지나다 보면 고물상 문 열기를 기다리며 밤새 폐지를 모아온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서는 고단한 얼굴마저 환해 보이곤 하였다. 사진 출처 - 경남신문 3.  먼저 항아리 가게가 자리를 옮겨 이사를 갔다. 그래도 공터는 오랜 시간 주차장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고물상이 이사를 갔다. 그러고도 공터는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작년 여름, 식당 아주머니가 울타리 아래 있던 화분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화분을 정리하던 아주머니 딸이 “우리 엄마 저 화분 치우고 우찌 사노~ 이제 어떡하냐! 어떡하냐?”며 친구한테 넋두리를 하였다. 그 말을 듣던 내 가슴 한쪽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서늘해졌다. ‘시골백반’ 식당은 그러고도 또 한동안 장사를 했다. 그리고 울타리 아래 있던 화분 몇 개가 아주머니 가게 앞으로 옮겨와 꽃을 피웠다. 그렇게 한 철을 보내고 겨울 즈음에 ‘시골백반’ 식당은 문을 닫았다. 같은 건물에 있던 미용실이며 치킨 가게가 문을 닫은 지는 더 오래전이었다. 4.  지난겨울 공터는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쳤다. 39층의 건물이 들어선다는 공지가 나붙었다. 울타리를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자취를 감췄고 공터를 밝히던 벚나무 대여섯 그루도 베어졌다. 봄이면 꽃비를 날리고,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며 도로를 환히 밝혀주던 벚나무는 이제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 40층이 넘는 건물 옆으로 또 다른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울컥, 가슴 한쪽이 또다시 서늘해진다. 5.  어릴 때 세 살던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으로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으로는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아래로는 봉숭아며 맨드라미, 과꽃 들이 피고 졌다. 담벼락 아래로는 해바라기가 피어올랐다. 여름이면 엄마는 마루에 앉아 세 자매의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 줬는데, 그때 손가락을 감싼 것은 커다란 피마자 잎이었다.  우물이 있는 그 집엔 세 가구가 살았다. 안쪽으로 주인집과 그 옆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세 살았고, 대문 앞으로 우리가 살았다. 시골에 일이라도 생기면 엄마는 우리를 주인집 아줌마한테 맡겼다. 아줌마는 엄마가 없는 동안 우리를 먹이고 재워 주곤 하였다. 그런 우리 집 옆으로는 쪽문이 있는데 그 쪽문을 열고 나가면 공터가 있고, 주욱 달려나가면 논밭이 나왔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치운 눈이 공터에 산처럼 쌓였다. 동네 오빠들이 산처럼 쌓인 눈을 다져 굴을 만들었다. 그 굴속에서 노는 게 우리의 겨울 놀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볏짚 낟가리가 올라갔다. 숨바꼭질할 때면 숨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하루종일 뛰어놀다 해거름 녘이면 온통 볏짚을 옷에 묻힌 채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정월 보름에는 깡통에 나뭇가지를 넣어 불을 붙여 휙휙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던 곳도 그 논이었고, 한쪽에 물을 가둬 얼려 썰매를 타던 썰매장도 그 논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씀바귀와 냉이를 캐던 곳도 그 논밭이었다. 6.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부자도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산다.”  벚나무 사라진 곳에서, 나 어릴 적 살던 집이 생각났다. 요즘이야 ‘대문, 마당, 우물, 장독대, 볏짚 낟가리, 쥐불놀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텐데, 그저 넋두리인 것을. 많은 사람이 꽃구경을 가고 단풍놀이를 가고 물놀이를 가는데, 예전에는 그냥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하던 놀이였다는 것을, 아니 그냥 삶이었다는 것을 고층 건물이 들어설 담 아래서 곱씹어 봤다.  부동산 논란, 아니 광풍인지도 모를 이즈음에, 내가 사는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BEST HOME’, ‘元家’라고 표기된 빌라 한 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은 곧 정신이라고도 하고! 우리는 HOUSE가 아닌 HOME이어야 할 집을 그저 자산의 하나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비록 마당은 없더라도 집은 ‘HOUSE’가 아닌 ‘HOME’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집 이름. 내가 사는 집 이름이 그냥 아파트면 남한테 밀리니 캐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이마저도 촌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집[HOME]이기를 바란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다고들 하는 이 시간에 말이다.
2021-05-10 | hrights | 조회: 854 | 추천: 4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지난달 24일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통과되었지만, 그 전날인 23일 온라인게임을 통해 알게 된 여성이 연락을 받지 않고 만남을 거절하자 그와 여동생, 어머니까지 세 모녀를 살해한 김태현은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다만 최대 1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인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처벌받게 될 뿐이다. 스토킹으로 인한 범죄는 최대 징역 5년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나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9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법이 제정된 이후인 4월 18일에도 스토킹 범죄는 발생하였다. 직장동료의 집을 찾아가 귀가하던 직장동료를 잔인하게 공격한 사건이다. 범인은 다음날 바로 잡혔고 현재 구속상태에 있지만, 9월 이전에 판결을 받는다면 이 또한 ‘경범죄’로 끝나고 만다. 이렇듯 스토킹은 벌금 10만 원 이하의 경범죄로 취급받아왔으나 실제 범죄의 내용은 살인 등 중대범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2020년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13년 312건, 2015년 363건, 2018년 544건, 2019년 583건으로 스토킹 범죄는 증가추세에 있다. 또한, 한국여성의전화의 2020년 분석에 따르면 살인, 방화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스토킹 범죄의 경우, 50%가 전/현 배우자(13.5%) 또는 전/현 애인(36.5%)이며, 직장 관계자가 12.3%, 동네 사람 및 지인이 5.9%, 학교 관련자가 3.6%, 의료기관 및 수사기관이 0.9%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홍일 사건은 2012년 울산에서 발생한 것으로 주택에 침입해 자매를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언니를 따라다니고 집착했던 그는 “이별 통보에 분노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대낮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헤어진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도 피해자가 이별을 요구하자 협박과 위협을 일삼다가 끝내는 피해자를 살해한 사건이다. 2019년 윗집에 사는 미성년자를 따라다니며 그 가족에게도 욕설과 위협을 일삼았지만, 경찰은 ‘사소한 시비’라며 돌아갔고 피해자 가족이 협박 증거 영상을 제출한 후에야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신고 후 약 한 달 뒤, 여성 5명을 살해했다. 또한, 2020년 5월에는 식당을 운영해 온 60대 여성이 40대 남자 손님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3개월 동안 100여 통이 넘는 전화와 문자를 발송했고, 사건 전날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는 가해자를 신고했으나 별다른 조치 없이 풀려난 가해자는 피해자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다 미리 준비한 흉기로 피해자를 살해하였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 사건들의 공통성은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라는 점이다. 미리 동선을 파악하고, 협박과 위협을 통해 피해자들을 위축시키고, 범죄 도구를 준비하고, 피해자를 기다렸다가 살해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 위의 사례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경찰의 초동대응이 둔감했다는 점이다. 가정폭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토킹 또한 친밀한 관계의 치정사건쯤으로 치부되어 버리기 쉽고, 이로 인해 막을 수 있었던 강력범죄의 초동대응에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스토킹을 경범죄로만 다스려온 법체계를 통해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폭력에 둔감한지를 알게 하는 지점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여자의 NO는 YES!”라는 왜곡된 남녀관계에 대한 통념 역시 이러한 범죄를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 아니 조장하는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왜곡되고 폭력적인 남녀관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여성의 거부를 불쾌하게 여기는 문화와 정서는 여성이 지각능력과 판단능력이 없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인형이거나 물건으로 대상화하는 관점에서 발현된다. 이들에게 여성은 성적 판타지를 실현할 대상/물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물건은 자신의 소유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모든 범죄나 폭력이 여성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관점에서 비롯되지만, 스토킹 범죄나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해는 여성의 생사여탈권을 남성이 가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와 제도에서 비롯된다. 스토킹법이 처음 발의된 것은 1999년이다. 그러나 22년 만에야 제정이 되었다. 그 22년 동안 앞의 사례처럼 수많은 흉악범죄가 발생했다. 그러나 드러나지 못한 사건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지난해 스토킹 범죄는 4500여 건이지만 이 중에 10%만이 처벌되었고, 약 90%에 해당하는 사건은 현장에서 종료되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경찰 스스로 경미한 사건으로 판단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킹은 피해자의 의사나 경찰의 판단과 무관하게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범죄이다. 그러므로 현행법안에 남아있는 ‘반 의사 불벌죄’ 조항을 폐기하고, 오히려 스토킹 범죄의 초기대응과 처벌을 강력히 할 필요가 있다.  늦었지만 ‘스토킹 범죄 처벌법’의 제정을 환영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법이 제정되었다고 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종류의 범죄의 심각성에 사회구성원들의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만큼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역으로 보여 주고 있다. 법은 항상 현실보다 한발 늦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실효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와 사법당국의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2021-04-28 | hrights | 조회: 689 | 추천: 2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옥수동 오름길에는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가 있다. 지하철 3호선 옥수역 4번 출구로 나와 오름길을 따라오면 옥정초등학교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다 보면 왼편 5층짜리 건물 옥상에 미얀마 국기가 보인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그곳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다.  건물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mbassy of 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 office of The Military, Naval and Air Attache 미얀마 대사관 국방 및 해군, 공군 무관부’  미얀마 대사관은 이곳으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한남동에 있다. 왜 대사관과 무관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쿠데타 이후 의문이 해소됐다. 이곳이 쿠데타 세력인 군에서 파견한 이들이 근무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얀나잉툰이 얼마 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무관부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유학생이나 노동자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독재정권 시기 안기부나 기무사가 행했던 사찰업무 아니던가. 세상에나! 미얀마 쿠데타 세력의 한국 본거지와도 같은 이곳은 미얀마 군부의 폭력적 상황과 민주주의를 위한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점차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시민 700여 명 이상이 희생된 미얀마 상황 속에 지난 4월 24일 아세안(ASEAN) 중재로 반쿠데타 진영과 군부가 대화를 하겠다는 깜짝 합의문이 나왔다. 군부가 여전히 폭력을 행사하고 시민의 희생이 이어지고 있어 합의가 성실히 이행될지 여부는 앞으로 지켜봐야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미얀마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꾸준히 이어가야할 것이다.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을 향한 한국 시민들의 연대는 사회 각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 기독교, 원불교, 가톨릭 등 교계에서는 미얀마의 평화를 기원하는 종교행사가 열리고, 언론사는 캠페인과 기획기사를 통해 응원하고 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모금활동, 미얀마 민주주의 지원 사진전도 열렸다. 11개 영화제가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선언을 한 것은 물론 ‘Everything will be OK’라는 곡을 노래한 한국의 힙합 가수는 음원 수익금을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전액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타국의 폭력적 상황에 대해 이렇게 각계각층의 지지와 연대가 두루 이뤄지는 것은 드문 일이다.  우리도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평화연대에 동참하고 있다. 옥수동 오름길 끝에 있는 한베평화재단은 4월부터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 앞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어쩌다 한 동네에 같이 있다는 인연으로 이것만큼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 무관부 앞 말고도 주한미얀마대사관, 미국대사관, 청와대 앞 등 곳곳에서 1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1인 시위에는 한베평화재단 회원과 시민들이 동참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동구 시민, 목사, 학생, 교수, 애니메이션 창작자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로 소식을 보고 동참한 시민 등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어느 때는 우리와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피켓을 가지고 1인 시위를 하러 온 시민을 만나기도 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한국 시민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사진 출처 - 필자  동네 사람들은 몰랐다. 이곳이 미얀마 무관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응원의 손짓을 보내며 지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피켓을 들고 서 있으면 “미얀마 사람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다. 그리곤 “남의 나라 일에 우리가 간섭해서야 되겠느냐”,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느냐”는 질문도 따라온다. 어느 날은 누군가 무관부 건물에 던진 달걀 한 알로 경찰과 정보과 형사가 들이닥쳐 시끌시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시민들의 반응은 지지와 격려가 대부분이었다.  옥수동 오름길에는 한베평화재단이 있다. 평화의 연대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들은 언제든 그 길을 오르시라.
2021-04-27 | hrights | 조회: 823 | 추천: 2
이윤/ 경찰관  나는 간이 콩알만 하다. 그래서 크게 한탕보다는 가늘고 길게 가는 걸 선호한다. ‘고’보다 ‘스톱’을, ‘레이스’보다 ‘콜’을 선택하기에 고스톱이나 포카 판에서는 잘해야 본전이라 웬만하면 끼지 않는다. 10년여 전 친구 권유로 주식을 샀었는데, 가격 등락이 계속 신경 쓰여서 그냥 조금 손해보고 다 팔아버렸다.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3배 이상 올랐을 텐데...  빚을 내기보다는 얼마 안 되는 공무원 봉급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왔다. 그런 이유로 19년째 무주택자다. 평생 무주택자가 아닌 이유는 IMF 경제위기 때 전세 살던 신혼집이 경매에 넘어가 세입자인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경락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 집도 3년 후에 팔았고, 이후 쭉 전세를 살고 있다. 지금 나는 집도 없고 빚도 없는 쌍무자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관점에서 보면 나는 무능력의 표상이다.  나 같은 성격이 공무원에 어울린다고 스스로 위안을 해 왔다. 특히 경찰관은 약소한 금품 유혹이 잦은 직종이다. 겨우 몇십만 원에 퇴직금과 연금을 포기하기엔 내 간에 오는 부담의 크기가 우루사 한 통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지금까지는 가늘고 길게 잘 살아왔다.  그런데 모든 공무원이 나와 같지는 않은가보다. 몇억씩 대출받아 개발 계획이 나오기도 전에 토지, 특히 농지를 사다니. 그건 상위 0.1%에 속하는 그릇의 간을 가지고 있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인생 역전의 통 큰 베팅을 한 사람들을 보면 그 호연지기에 괜스레 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신의 직무와 지위를 이용하여 큰 돈을 도모하는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옛날 공무원들이 뜯어먹은 삥 쯤은 그들의 농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묘목 한 두 뿌리 값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모든 공직자에게 재산등록을 하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의 불만이 많다는 기사들을 보았다. 재산등록 제도가 처음 시행된 1993년부터 무려 28년간 재산을 등록해왔고, 등록할 재산이라야 전셋집과 자동차 한 대, 은행예금뿐인 나로서는 그저 무덤덤하다.  경찰은 처음부터 경사 계급 이상이 재산등록 대상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말정산과 함께 매년 초에 찾아오는 상당히 번거롭고 짜증나는 행사였다. 전세 계약서, 통장, 보험금 납입 영수증 등을 모두 사본을 첨부하여 수기로 신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는데, 할 때마다 나 같은 하위직까지 매번 이렇게 가난을 신고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분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간편하게 클릭 몇 번으로 내 재산변동 사항을 체크할 수 있고 신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쉬워진 만큼 그다지 불만은 없고 1년에 한 번 내 재산변동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있다. 간이 작은 만큼 조직에 순종적이고 적응도 잘 하니 천생 공무원이다. 나에겐 어차피 큰 돈 생길 일은 없지만, 어쩌다 하늘에서 돈벼락 맞는 상상을 하다가도 재산등록 할 때 그 돈의 출처를 뭐라고 적어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이 자동으로 생기는 걸 보면 이 제도가 가진 부패 예방 기능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재산등록 제도가 공무원들의 모든 부패를 걸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벤츠 여검사나 스폰서 검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차명 은닉한 재산이나 친구가 대납해준 오피스텔 임대료 등은 재산등록 시스템이 미리 밝혀내지 못한다. 96만 원짜리 불기소 세트도 당연히 찾아낼 수 없다. 마시고 논 것까지 등록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일반적 수준 이상 재산 증감이 있을 때 그 사유를 소명해야 하는 찝찝함만으로도 수억 원씩 하는 부동산 투기는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인천일보  논어 위정편의 ‘錄在其中’이라는 어구를 나는 다음과 같이 멋대로 해석한다. ‘굳이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를 하지 않더라도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하고 가치 있는 일에 주력하면 재물은 저절로 따라서 온다’라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의해 경쟁과 배금주의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공무원까지 이해충돌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그 즐거움의 노랫소리에 맞춰 원망의 소리도 높아질 것이다(歌聲高處 怨聲高).  나에겐 감히 도로시 데이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줄 용기는 없다. 그래도 그녀의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서 기꺼이 벼락 거지의 길을 가고자 한다.
2021-04-07 | hrights | 조회: 1320 | 추천: 22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지난 2012년에 시작해서 전 세계적인 지역화폐 모범도시로 일컬어지던 영국 브리스톨시의 지역화폐 브리스톨 파운드가 얼마 전부터 유통을 중단했다.  브리스톨 파운드가 미친 영향은 컸다. 특히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지역화폐 도입을 검토할 때 항상 거론되던 사례였다. 기존 법정화폐와 동일한 가치로 환전이 가능하면서도 공동체 경제를 지키기 위한 목표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적지 않았다. 시가 지원을 하되 운영은 민간영역이 담당하는 시스템은 지역화폐의 대안이 될 만했다.  하지만 가맹점 관리 및 운영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코로나19 시국이라는 대외변수도 있었지만, 정책 또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에서 파열음이 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 구글  우리나라도 이미 전국 243개 지자체 중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미도입 지역을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쩌면 예고된 미래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지역화폐의 특징은 지자체가 적극 나서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점이다. 민간의 공동체형 지역화폐와 별도의 트랙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지난 1996년 충북 괴산에서 먼저 시작된 지역사랑상품권은 2018년까지 60여개 남짓한 지자체에서만 운영되고 있었다. 명색만 유지할 뿐 사실상 유통이 안 되는 지역화폐도 많았다.  그러나 2019년 정부가 최저임금제 도입 이후 소상공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이를 타개할 정책을 찾다가 지역화폐 활성화에 눈을 돌리면서 불과 2년여 만에 지역화폐 전성시대란 기사제목이 붙을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지역화폐의 효과에 대한 논란이 불붙기도 했는데, 이와 별개로 이렇게 지역화폐가 활황을 누리는 것은 유통촉진을 위한 ‘인센티브’ 때문이라는 의견에 반론이 없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온라인쇼핑몰에서는 못 쓰고 지역 골목상권에서만 쓸 수 있는 불편한 돈이기 때문에 재정을 들여 소비자에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한 인센티브의 규모가 이제 ‘10% 할인’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것이 폭발적인 성장의 견인차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높이 날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프다.  정부는 2019년 지역화폐 활성화 방침을 세우고 첫해에는 전국 지역화폐 발행액 목표 2조원을 수립했다. 2년 뒤인 2021년엔 15조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10% 인센티브의 8할이 정부재정이다.  정부는 애초 4년간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재정지원을 예고했다. 2022년까지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역화폐가 이미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변수도 크다. 어쨌건 언제까지 인센티브를 정부 재정으로 이어갈 수는 없다.  만일 정부 재정지원이 끊어지게 된다면 각 지자체의 지역화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시흥시청 지역화폐팀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전화내용이 있다. ‘10% 언제까지 해요?’ 어제는 이런 전화도 받았다. ‘10% 안 하면 누가 지역화폐 사용해요.’  ‘원래부터 소비쿠폰이었어’라고 지역화폐의 역할을 규정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으면 할 말이 없다. 지역화폐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지역 내 사회자산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은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마도 10%의 유혹이 없어진다면 많은 지자체에서 지역화폐는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 이제라도 달콤한 인센티브 없이도 굴러가는 지역화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공동체 경제의 선순환을 위한 지역화폐 사용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고 싸운다. 지난 30여 년간 별다른 지원 없이 공동체형 지역화폐를 일구기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 면구스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와중에 공문 하나가 떨어졌다. ‘지역 차원의 4차 산업에 대응하고자 새로운 산업기회 창출, 사회적 취약계층 포용, 지역 현안 효과적 해결 등을 위한 지능 정보화 기술 기반의 지역화폐 활성화 우수사례 평가…’ 읽기도 숨차다.
2021-03-31 | hrights | 조회: 1114 | 추천: 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코로나19 사태에 휘말려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의 외출조차 쉽지 않다. 더군다나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닐 수 있는 법적 노인이 되고 보니 더욱 집에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래도 바람을 쐬지 않을 수는 없다. 동네에 넓고 깔끔한 카페가 생겼다. 거기 평소 좋아하는 에스프레소의 맛이 그럴듯하다.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미루었던 책을 읽기도 하고, 그동안 거의 실행한 적이 없는 육필로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글을 거의 컴퓨터로 썼고 간단한 메모조차 폰의 메모장을 이용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권연대에서 보내오는 수첩을 활용해 쓰다가 빈칸이 채워져 새로운 수첩을 사서 볼펜 등으로 육필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오랜만의 육필 운용은 마치 잃어버린 분신 하나를 찾은 듯 신선했다. 그러던 중 아래의 글을 쓰게 되었다. 자유롭게 마음 이는 대로 쓴 것이니, 주제가 오락가락할 수도 있고, 내용이 그저 직관의 심상에 따른 것일 수밖에 없다. 대략 고쳐서 올린다. 2. <2021년 3월 7일 일요일, Trini에서>  욕망에 관해서는 생명과 소유 또는 향유와 관련해 제법 오랜 세월 생각해 왔으나 뚜렷하게 그 작동의 얼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밥이 하늘이다.” 김지하 선생의 말이다. 일본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는 ‘직경(直耕)’을 주장했다. 누구건 저 자신이 경작한 밥을 먹어야지, 천황이건 쇼군이건 사무라이건 남이 경작한 밥을 빼앗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인터넷을 통해 그가 쓴 『법세 이야기』를 읽고 있다.  욕망에 관한 생각을 ‘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생명에 조건을 걸어 욕망을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밥’은 노동의 목적이고, 노동 및 노동의 결과를 상징 · 은유하기도 한다. 그 직접성에서는 생명을 유지 · 강화 · 재생하는 것을 지시할 것이다.  ‘밥과 일’,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 신약성서의 이야기다. 일은 생산 활동이다. 일의 출발은 생명의 압력을 따르는 수동성을 띠지만, 그 과정은 계획과 효율 그리고 재활성화를 염두에 둔 능동성을 띤다.  일 즉 노동은 여러 관계를 따른다. 일하는 자와 일의 대상과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효율을 위한 타인들과의 관계, 교환관계를 규정하는 법과 제도와의 관계, 소유와 처분의 관계, 몸과 도구의 관계, 도구와 사물 그리고 생산-소비에서 주어지는 과제와의 관계, 지식과 실행의 관계, 궁극적으로 욕망과 그 충족/결핍의 조건과의 관계 등으로 일에 연관된 관계들은 사뭇 복잡 다양하다.  욕망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이러한 뭇 관계들을 망라하면서 그 맥락과 계기에 따라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워낙 많고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욕망의 문제가 활동 즉 실천 또는 실행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앎과 일’로 달리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에 관해서는 특히 사회개혁 또는 사회혁명에 관련한 담론에서 워낙 많은 논의가 있었다. 추상화해서 보면, 앎은 진(眞) 즉 옮음과 짝하고, 일은 선(善) 즉 좋음과 짝한다. 앞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설립되고, 뒤에 따라 윤리와 도덕 및 경영이 설립된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일 즉 실천(praxis)은 혁명이었다. 혁명은 노동과 욕망을 둘러싼 법적 · 정치적인 체제를 위시해 심지어 사회문화적인 구성을 크게 바꾸는 것이다. 혁명과 비슷한 어감을 띤 것으로 전향(轉向), 전회(轉回), 회심(回心) 등이 있다. 어느 것이건 기본은 역(逆)의 역(易)이다. 회귀가 아니라 창조다. ‘dynamis’ 즉 잠재적인 위력을 창조를 위한 본질로 본다면, 혁명은 그 본질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革命’의 ‘革’ 자가 궁금하다. 인터넷을 찾아본다. <周易>에서 ‘革’은 ‘택화(澤化)’ 즉 불이 연못의 물이 끓도록 하여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풀이됨을 알았다. 흥미롭다. ‘革’ 자는 ‘革帶(혁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짐승의 가죽을 일컫는다. 그런데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의 털을 벗기면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니 ‘革’은 크게 바꾸는 것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혁명적 실천을 위한 지혜를 철학으로 본다면, 그 철학은 결국 욕망(欲)과 행동(行)과 즐김(樂)으로 요약될 것이다.  좋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하는 데서 출발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플라톤이 어떤 것에 대해 가장 좋은 것을 이데아(idea)라 한 사상은 이성과 지혜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나로서는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 속에서도 그렇고 남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문제는 욕망들 사이의 충돌이다. 자장면을 먹고 싶고 짬뽕을 먹고 싶다. 선택해야 한다. 지금 먹고 싶다고 모조리 먹어치우면 나중에 배고픔을 견뎌야 한다. 조절해야 한다. ‘선택과 조절’, 욕망과 실행에서의 기본 원리다. 선택은 당면한 현재의 문제이고, 조절은 미래를 향한 문제다. 선택을 위해서는 사물의 특질을 알아야 한다. 조절을 위해서는 욕망의 특질을 알아야 한다.  사물과 욕망의 관계에 일정한 본질적인 내용이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을 점차 추상화 · 일반화 · 순화하다 보면 이데아에 이를 것이다. 이데아를 안다는 그 지혜는 결국 욕망과 사물의 본질을 알아 가장 적절한 선택과 조절을 통해, 이른바 탁월성 즉 덕을 이루는 행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앎과 함’의 일치, 즉 흔히 말하는 ‘지행합일’의 덕목이 설립된다.  사물과 욕망의 관계가 크게 문제로 나서는 경우는 타인이 사물로 등장할 때다. 그 타인 역시 욕망과 행위의 적절함을 위해 선택과 조절을 할 것이고 해야 한다. 나의 선택과 조절이 타인의 선택과 조절과 ‘합(合)’을 맞출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양자가 ‘리(離)’ 또는 ‘충돌’로 나타나면 고약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자장면을 먹을 테니, 너는 짬뽕을 먹어라.” ― “싫어, 나도 자장면을 먹을래.” ― “자장면이 한 그릇밖에 없는데 어쩌지? 나누어 먹으면 어떨까?” ― “싫어, 나누면 내가 배고픈 걸, 아니면 먹어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 때문에 먹는 기분이 나지 않는걸.”  나와 남의 욕망 관계에서 선택에 따른 충돌을 조절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예사로 자존심이 개입된다. 내가 너보다 적게 먹을 이유가 어디 있어? 네가 나보다 잘난 게 뭐 있어? 인정할 수 없어. 네가 뭔데!  욕망을 둘러싼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그저 욕망을 충족할 사물 즉 재화를 향한 것만이 아니다. 그 사물을 매개로 서로의 인격 또는 존재의 높낮이를 가늠하면서, 결국에는 서로를 대상으로 삼는 노릇이다. 동일성이나 유사성보다 차이를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차이를 통해서만 우열의 차별이 가능하고 그 차별을 통해 동물과는 다른 인간 고유의 사회정치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욕망 관계에서 작동하는 차이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라면, 즉 서로 질이 다른 대상을 욕망한다면, 선택도 수월해지고 조절도 쉽다. 특질에서의 종류가 다르니 굳이 비교우위의 결판을 내야 할 까닭도 없다.  그런데 묘한 일은 나도 너처럼 하고 싶다는 욕망의 전이(轉移)다. “네가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하겠어. 네가 누리는 것을 나도 누려야 하겠어.”라는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지는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경향 내지는 습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욕망 전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불안이지 싶다. 귀하다고 여겨지겠지만 남은 가지고 있는 무엇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남이 자신이 소유한 그것으로 나를 무시하고 억압하려 하고 심지어 내가 가진 것마저 빼앗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가 작동하는 데서 ‘욕망 전이’가 생겨나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협책이 등장했다. 내가 가진 것을 줄 테니 네가 가진 것을 나에게 줘! ‘교환’이다. 교환은 선택과 조절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탁월한 기교다. 과연 그럴까? 선택과 조절에서 충돌을 완화하고자 고안한 교환이 오히려 선택과 조절에 영향을 미쳐 큰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렇게나 교환하지 않을뿐더러, 교환의 편리를 추구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기가 막힌 기교를 생각해 발휘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교환관계는 순식간에 확산해 모두와 모두의 교환관계가 되고, 거기에 나와 모두의 관계가 아울러 자리를 잡는다. 모두가 모두를 대상으로 직간접적인 교환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럴 때, 당연히 교환의 보편적인 척도가 요구된다. 교환하고자 서로가 내놓은 재화 사이에 교환 비율을 조절해서 손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손쉽게 선택해서 효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교환의 수단이자 척도로 기능하는 화폐 즉 돈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화폐를 통한 선택과 조절에 따라 시간의 활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교환에서 재화 즉 내가 가진 물건이나 노동력을 주고 화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화폐의 선택은 재화의 선택이 아니다. 돈을 먹고 마시고 입을 수는 없다. 재화를 주고 화폐를 선택한 것은 일단 아무것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뤄지는 교환에서 화폐의 선택은 필수적이다. 지갑 속의 화폐는 당장 어느 재화를 소비하고 향유할 것인가를 미결정으로 미룬 시간의 양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화폐는 알 수 없는 미래에 재화와 교환하리라 작정한다는 증표다. 이에 화폐는 미래의 시간을 늘려 내 삶의 구체적인 시간을 재구성한다. 과거와 결합하지 않은 현재가 없듯이, 미래와 결합하지 않은 현재는 없다. 화폐가 쌓이면 쌓일수록 미래의 시간이 늘어나 현재에 결합한다. 여기에 화폐의 또 하나의 본질이 있다. 화폐가 제공하는 그 미결정의 미래는 현재에서는 순전히 잠재적인 것일 뿐 현행의 충족이 아니다. 화폐는 미래의 시간을 영원하게 만들고, 그 영원성을 현재에 결합함으로써 현재가 마치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많이 소유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착각은 더욱 굳건해진다. 사진 출처 - freepik  이에 화폐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각종 이미지와 상징을 가능케 한다. 기호학적인 용어를 빌어 말하면, 그리하여 기의(記意)가 사라지고 없는 기표(記標)만의 시간과 그에 따른 세계가 대대적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불안은 미래에서 온다. 미래의 시간이 짧을수록 불안의 양은 커진다. 불치병으로 곧 죽을 것 같을 때, 불안은 극대화된다. 돈을 많이 쌓아두고 있으면 불안의 양이 적어지는 것은 돈이 미래를 늘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가상적이기 때문에, 불안의 양이 줄어드는 것 역시 가상적이고, 실질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잠복한다. 거꾸로 보면, 돈을 통해 불안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실제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는 자들의 불안은 강박이라 할 정도로 강하다. “너의 부가 쌓이면 쌓일수록 너의 존재는 빈곤해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이다. 여기에서 ‘존재의 빈곤’은 실질적인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현재의 삶에서 제대로 된 창조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할 수 있다.  화폐가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너도나도 미래의 가상적인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빠져든다. 욕망은 미래에서 열리는 가상의 폭과 깊이를 향해 힘을 발휘한다. 욕망이 영원한 시간 즉 불멸을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멸에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화폐는 가상적인 불멸을 약속한다. 사탕발림의 이 약속에 모두가 미혹되어 넘어져 자신의 존재를 절뚝거린다.  하지만, 화폐를 둘러싼 욕망의 분출과 실행의 길은 누구건 쉽게 비켜 갈 수 없다. 그것은 앞서 말한바, 모두가 모두를 교환하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차이와 그에 따른 차별, 그 차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화폐를 통해 실현 · 충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화폐를 통한 인정 투쟁이 벌어진다. 말하자면, 화폐가 제공하는 가상적인 불멸의 시간 속에 뭇 인간들이 들끓으면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권력이 생겨난다. 긴 미래의 시간을 확보한 자가 짧은 미래의 시간을 가졌을 뿐인 자를 지배한다. 화폐가 개입한 상태에서 권력은 가상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다. 그런데 그 가상은 이미 모든 사람을 휘어잡고서 오히려 실재로서 다가와 힘을 발휘한다. 권력은 가상적 실재를 놓고서 진정한 실재인 양 착각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비록 기술이라는 말을 예술로 달리 번역하긴 했지만, 어쨌든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돈은 길고 인생은 짧다.” 또는 “권력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했다고 해보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첫눈에 벌써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시간은 돈이다.”라는 항간의 말을 “돈은 시간이다.”라는 말로 바꾸었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맞는 말 같다. “내가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어.”라는 말을 “내가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라고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 그러므로 나는 시간이 풍부해.”라고 말한다면, 제법 맞아들어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돈을 향한 욕망, 즉 불멸을 향한 욕망, 그 가상적인 환상이 마치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것 같다. 씁쓸하다.
2021-03-24 | hrights | 조회: 809 | 추천: 3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올해는 지방자치 3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2020년 12월 9일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1988년 이후 32년 만에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주민주권과 참여확대, 지방의회의 독립성 강화, 중앙과 지방의 협력, 대도시 등의 특례부여 등이 주요 핵심 내용이다. 정부는 주민자치 원리 강화, 주민참여권 신설, 지자체의 주민에 대한 정보공개 의무규정 신설 등 자치분권 확대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자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맹이가 빠졌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지방분권, 자치분권의 핵심은 ‘주민자치’에 있다. 주민자치(住民自治)는 중앙집권적이며 관료적인 지방자치를 배제하고 주민이 지방자치의 주권자가 되어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영국에서 발달한 제도이다. 지방분권이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의회의 권한만 강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지만 실제로는 주민의 참여와 권한을 확대, 강화시킴으로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풀뿌리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것이다. 지난 2013년부터 7년간 행안부는 ‘지방자치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과 지방조례에 근거해 주민자치회 시범사업을 하고 있으며 2020년 6월 현재, 118개 시군구 626개 읍면동에 주민자치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주민자치회’ 관련 조항이 모두 삭제된 채로 통과되었다. 이번에 정부가 제출한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은 ‘주민자치회 운영과 기능 수행에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명확히 하여 현재 시범사업으로 운영 중인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고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서 풀뿌리 주민자치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국민을 아직 미성숙하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주민자치에 대한 부동의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는 마을공동체와 주민자치의 활성화를 위한 중간지원조직으로 2020년 7월 전국 최초로 시 출연재단으로 출범하여 민관거버넌스 체계를 통해 주민과 마을, 행정을 연결하고 협력, 협치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춘천시 민선 7기 시정 철학은 ‘춘천, 시민이 주인입니다’라는 슬로건에서 말해주듯이 시민을, 주민을 주체로 세우고 시민의 권한을 강조하는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민자치회’ 설립과 운영 활성화는 중요 핵심과제 중 하나다. 3월 현재, 춘천시 25개 읍면동 중 13개 읍면동에 주민자치회가 설립되었고 5개 읍면동에서는 주민자치회 전환협의체를 구성하게 된다. 20명에서 50명까지 주민들 누구나가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고 마을의 의제를 공론화, 숙의를 통해 마을계획을 수립하여 실행까지 하는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겠지만 이런 참여와 책임의 민주주의를 풀뿌리에서부터 실천하는 과정을 주민들 스스로 실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매년 마을 의제를 주민들로부터 수렴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각종 자생단체, 모임, 공동체로부터 일반 주민들까지 해결하고픈 문제나 살기 좋은 마을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의제가 읍면동별로 많게는 70~80개씩 쏟아져나온다. 물론 이런 의제들이 다 채택되지는 않지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살피고 생각을 이야기하고 투표와 총회를 통해 총화하는 경험은 시민들이 마을의 정책과정에 참여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신나고 즐거운 일일 것이다.  몇 가지 넘어서야 할 과제들도 보인다. 자칫 소위 명망가 또는 의회진출을 노리는 몇몇 위원이나 자치회장에 의해 휘둘릴 소지도 있고, 또 다른 기득권 단체로 전락해 완장만 채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상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고 지난한 다툼이 있는게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서로의 목소리를 내고 차이와 다름을 숙의와 토론을 통해 마을의 공통의제로 합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한 생활권인 마을에 공존하고 있는 각 종 이해관계자들과 기존의 자생단체, 마을공동체들과의 연계와 네트워킹도 주민자치를 풍부히 하고 성숙시키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작년 마을의제들을 보면 코로나로 인한 아이들과 노인들의 돌봄 문제가 크게 대두되면서 주민들의 관심사로 많이 올라왔다. 또 쓰레기 문제나 환경문제도 주민들이 걱정하는 마을의 숙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주민자치회 단독으로 이러한 의제를 실행하고 의미 있는 결과물로 만들어내기에는 인력도 재원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마을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관심 갖고 활동하고 있던 많은 단체, 공동체들도 있으며 시정부의 행정력과 예산의 뒷받침이 필요함도 느낀다. 주민자치가 스스로 독립적으로 마을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백번 옳지만 고립된 대립 관계가 아닌 민관협력, 민민협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방자치(시군)-주민자치(읍면동)-마을자치(통리 등 마을단위)는 ‘국민(시민, 주민)의 주권이 생활터전인 마을에서 실현’되는 가장 확실한 주권행사이며 강력한 방법일 수 있다. 아직은 주민들의 의식도 교육도 경험도 부족하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임에는 틀림없음을 잊지 말고 골목에서 마을에서 지역에서부터 행복한 꿈을 꾸며 한발 한발 걸어갔으면 좋겠다.
2021-03-23 | hrights | 조회: 803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