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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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코로나 팬데믹 동안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반려식물, 식물집사라는 말도 이제 낯설지 않다. 한국인 4명 중의 1명이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통계도 나와 있지만, 자그만 식물 화분 하나라도 집에 두고 있는 경우를 센다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외로움을 달래줄 비인간 존재로 동물보다는 식물이 선택하기 쉬운 탓도 있을 것이다. 식물은 돌아다니며 집안을 어질러 놓지도 않고, 놀아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에 내가 필요할 때만 위로를 구할 수 있다는 게 식물 반려의 장점이라고들 말한다. 식물 반려도 반려이기에 물과 거름주기, 햇빛 보이기, 벌레 잡아주기, 통풍과 환기 등 집사로서의 노동이 따르는 건 물론이지만.  우리 집 베란다에서 해마다 3월이면 선명한 오렌지색 꽃을 피우는 군자란은 원산지가 남아프리카다. 군자란은 8월의 시드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곁에 있는 많은 식물이 외래종이다. 외래식물이라도 이미 적응을 거쳤기에 원산지가 어딘지 따지는 건 이제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발이 달리지 않은 식물이 먼 거리를 이동하고 새로운 생태를 만드는 일은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다. 이동성이 없는 식물에 이동성을 부여하는 건 우리 인간이다. 특정 식물의 분포와 식생에는 인간이 자연에 개입한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자연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인공 자연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식물의 이동에는 다양한 욕망과 정치가 개입해 있다. 근대 초 유럽인들의 이국식물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식물수집과 식물사냥을 부추겼다. 이국식물 열풍은 튤립에서 양치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식물을 거쳐 불었다. 몇몇 식물은 씨앗이나 꺽꽂이로 들여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식물표본으로 수집됐다.  식물의 이동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발명이 바로 워디안 케이스(Wardian Case)다. 워디안 케이스는 영국인 나다니엘 백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 1791~1868)​가 만든 일종의 휴대용 테라리움 장치를 말한다. 이 덕분에 전 세계 식물 종을 수집해 ‘살아있는 채로’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워디안 케이스는 한편으로는 ‘집안의 수정궁’이라 불리며 중산층 가정의 거실을 장식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와 고무 같은 상업작물의 지리적 독점을 돌파하는 역할을 했다.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이자 식물사냥꾼인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은 1849년 중국 상하이에서 차를 워디안 케이스에 넣어 영국령 인도로 운송해 아삼지방에 차 플랜테이션의 길을 열었다. 브라질에서 수입된 고무나무 씨앗은 큐가든(Kew Gardens)이라 불리는 런던 왕립식물원(Royal Botanical Gardens)에서 발아한 다음 워디안 케이스에 담겨 말라야와 실론으로 운송되어 고무 농장에서 대량 재배되었다. 더비셔에서 개발된 캐번디시 바나나를 소모사로 옮겨 심을 때도 워디안 케이스가 쓰였다. 그림1. Portrait of Nathaniel Bagshaw Ward, 1859. Lithograph by R. J. Lane after the portrait by J. P. Knight. Courtesy Wellcome Collection, CC BY.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Plants and Changed the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p. 16. 그림2. Traveling-style Wardian case, as described by Nathaniel Ward. From N. B. Ward, On the Growth of Plants in Closely Glazed Cases (London: John Van Voorst, 1852).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Plants and Changed the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p. 22.  워드는 어떻게 이 대단한 상자를 만들 수 있었을까? 워드는 이스트엔드라고 불리는 런던 동쪽의 화이트채플의 내과 개업의였다. 이스트엔드는 19세기 산업화 시대 불결한 도시의 대명사였던 지역이다.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계승한 의사 워드는 아마추어 식물학자이자 원예가였다. 어릴 때부터 식물을 좋아해 열세 살 때 자메이카로 식물 탐험을 다녀오기도 했다. 워드는 당시 대기오염이 인간과 원예에 끼치는 악영향을 개탄했다. 템즈 강변의 공장에서 나오는 시커먼 재가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고 말라 죽게 하는 일이 반복되자 워드는 얼마 전의 우연한 발견을 떠올리고, 뚜껑 달린 유리병에 고사리를 심었다. 1829년 어느 날, 워드는 스핑크스 나방 번데기를 흙에 묻어 밀폐된 유리 용기에 넣었다. 원래 목적은 스핑크스 나방 번데기의 변태를 관찰하는 것이었는데 예상 밖의 발견을 하게 됐다. 흙 속에서 양치류 식물의 싹이 올라오더니 잎사귀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고 물을 주지 않았는데도 계속 자라났던 것이다. 사실 비슷한 생각을 했던 동시대인은 워드 말고도 여럿 있었지만, 워드의 혁신에서 핵심은 밀폐 시스템이었다. 식물이 호흡할 때 내는 증기가 일정 기간 식물에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기 때문에 워드가 실험한 식물은 밀폐된 공간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풀은 꽃을 피웠고, 고사리는 잎을 피웠다. 워디안 케이스는 밀봉된 미니어처 정원인 셈이었다. 1) 의사로서 워드는 식물 가꾸기 취미를 노동계급에까지 널리 전파하고 싶어했으나 값이 싸졌다고는 하지만 유리는 사치품이었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워디안 케이스를 사기보다는 집세를 내야 했다. 워드의 이상은 모두에게 공유되지 못하고, 중간계급 거실 장식품으로 안착했다.2)  또 한편으로 워디안 케이스는 영국과 외부 세계 사이의 식물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워드는 1833년 밀폐 유리 상자에 고사리, 이끼, 풀을 넣어 배에 실어 런던에서 시드니로 보냈다. 몇 달 후인 1833년 11월 23일에 워드는 선장 찰스 말라드(Charles Mallard)로부터 실험이 성공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20개의 상자 중에서 19개 상자의 식물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말라드 선장의 배는 1834년 2월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물을 싣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항해는 시드니에서 케이프혼, 리우데자네이로를 거치는 항로였는데, 식물들은 영상 30~40도까지 오르고, 영하 7도까지 내려가는 극심한 온도 차를 무사히 견뎌냈다. 그 결과 워드와 친구들은 영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스트레일리아산 풀고사리(coral fern. 학명 Gleichenia microphylla)를 관찰할 수 있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에도 장식용 양치류 식물을 키우는 워디안 케이스와 18년 동안 물을 주지 않은 밀폐 유리병이 출품되었다. 3)  휴대용으로 개량을 거듭한 워디안 케이스는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물원들이 식민지와 식물을 주고받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활용되었다. 영국에서는 큐가든이 중심이었고, 독일에서는 베를린식물원(Berlin Botanical Gardens), 프랑스에서는 열대농경식물원(Jardin d'agronomie tropicale),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식물원(Amsterdam Botanical Gardens)과 라이덴식물원(Leiden Gardens)이 워디안 케이스로 식물을 운반했다. 제국주의 중심국가들의 식물원과 식민지 식물원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에서 워디안 케이스는 핵심적 매듭으로서 식물의 이식과 정착에 관여했다. 전지구적 식물 이동을 가져온 제국주의 팽창과 식민지 정복, 노예제와 플랜테이션을 성립시킨 이음새로서 현재의 생태계를 만드는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그림3. Specially crafted Wardian cases made by local Indonesian workers were used to send plants from the Buitenzorg Botanic Gardens, Java, in 1904.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the Plant Kingdom,” Arnoldia 74/4(May 2017), p. 12 그림4. Wardian cases preparing to leave the Royal Botanic Gardens, Kew, ca. 1940. © The Board of Trustees of the Royal Botanic Gardens, Kew.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Plants and Changed the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p. 9. 1) Margaret Flanders Darby, “Unnatural History: Ward’s Glass Cases,” Victorian Literature and Culture, 35(2007), pp. 635-636. 2) Ibid., p. 639. 3)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the Plant Kingdom,” Arnoldia 74/4(May 2017), pp. 6-7.
2022-06-08 | hrights | 조회: 1421 | 추천: 2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놀랄 수밖에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윤석열 신출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나온 말이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 후보 경선에서부터 후보 확정 이후 유세 기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에서 ‘지성주의’는 물론이고 ‘지성’이란 말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점술이니 법사니 사이비 스님 등에 현혹되어 지성과 정확하게 대립하는 미신에 의존한다는 소문과 의혹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이 있을 당시 상대 예비 후보인 유승민 씨와 ‘천공 스님’ 운운하면서 크게 대립각을 세운 것이 언론을 통해 공공연히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겨 제왕적 대통령의 통치를 벗어나 국민과의 소통을 한껏 높이는 ‘탈-청와대’ 시대를 열겠다고 하면서 “청와대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다.”라고 말을 했을 때, 그 결과 전혀 이야기된 바 없는 용산 국방부 청사에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는 뜬금없는 결심을 내보였을 때, 청와대 ‘입성’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듯 기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중론이 일었고, 마침내 법사 운운하는 모 배후의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급살당할 수 있다는 점술에 따른 조언을 했고 대통령 당선인이 이를 맹목적으로 믿은 탓이라는 식의 뒷이야기가 무성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질타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지성주의를 합리주의와 연결하면서 그것이 미신을 타파하면서 발전해 온 과학과 그에 따른 진실을 전제로 한 것임을 강조했으니 어찌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선에서 상대 후보인 이재명 씨는 국민의 집단지성을 믿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에 대한 찬동도 반대도 전혀 없었던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마치 지성의 화신이기라도 한 양 기염을 토하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그런데 그 놀라움은 놀라움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십여 년 명색 이성을 바탕으로 한 철학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으로서 그동안의 정황을 떠올리며 심지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는 심경에 더해 국민을 우롱한다는 분노의 감정으로 이어졌다. 2. 다수결의 원칙과 반지성주의  하지만 놀람에서 벗어나고 분노를 자제하며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말을 취임사에 담게 된 것은 그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취임사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준 누군가가 정략적으로 삽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을 신출 대통령인 자신이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감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정략의 대상은 무엇이며 그 저의는 무엇인가?  정치적 판단력이 미숙한 탓일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이 취임사의 대목이 국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민주당이 검찰 정상화를 위해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취임사 작성을 돕는 누군가가 그럴듯한 말로 포장할 수 있는 언어적 장치를 권유하여 관철했으리라 짐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이 충분히 일방적이고 편협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관련한 취임사의 대목을 인용해서 그 앞뒤 문맥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양한 위기가 복합적으로 인류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내적으로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풀이해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다양한 위기가 인류 사회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 (2) 공동체의 결속을 통해서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3)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공동체의 결속을 이룰 수 있다. (4) 민주주의 기능이 상실되고 있다. 그 원인은 반지성주의다. (5)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이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조정과 타협을 이루는 것이 지성주의고, 지성주의를 통해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5)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반지성주의의 대표적인 현상은 (5-1) 집단 이기주의에 따른 외눈으로써 사실을 선택적으로 왜곡하는 것이고, (5-2) 다수의 힘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1)∼(4)는 일반적인 내용으로서 대다수가 인정하는 것들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5)에 담겨있다. 이중 (5-1) 역시 대체로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5-2)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고,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공동생활을 할 때 갈등과 대립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다. 또 여러 이유로 국민이 모두 정치 행위에 일일이 직접 참여할 수 없기에 편의상 채택한 것이 의회민주주의고, 갈등과 대립에 관련하여 민주주의가 채택한 원칙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런데 (5-2)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의회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에 위배 된다. 취임사를 하는 대통령 자신도 1639만 표를 얻어 겨우 전체로 보아 +0.73%의 더 많은 득표율에 그쳤다. –0.73%의 차이의 1614만 명이 그가 대통령직을 맡기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으로 인정되어 그 직을 맡게 되었다. (5-2)에 따르면, 그는 다수의 힘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여 대통령이 된 셈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상대의 의견을 억압했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왜 그는 취임사에서 굳이 (5-2)를 주장한 것일까? 그 주장이 겨냥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국제사회에서 다수의 힘으로써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예를 찾을 수는 없고, 설사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의 실효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그 예를 찾을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라 할지라도 그 구체적인 예를 적시하기는 전혀 쉽지 않다. 가장 적실한 예는 그가 취임하기 직전,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점유한 민주당이 검찰 정상화를 위해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를 굳이 반지성주의적인 정치적인 행위로 지목한 것인가? 취임 전에서부터 기획하여 실행한 정부 고위급 인사들의 임명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통령부터 법무부 장관과 차관, 법제처장, 공직기강비서관, 법률비서관, 인사비서관, 총무비서관까지 검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더욱이 그의 가장 가까운 ‘수족’으로 알려진 한동훈 씨를 ‘많은 상대편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장관으로 밀어붙여 임명했고, 국가 전체의 경영에서 법무부 장관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직책의 인물들마저 검증하는 ‘공직자 인사검증관리단’을 신설하여 법무부 산하에 두는 것을 밀어붙이고 있다. 국가 공직을 맡을 수 있는가에 관한 판단을 위한 모든 정보를 검찰이라는 강압적인 공권력으로써 수시로 비밀스럽게 수집 · 축적 · 관리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공권력에 의한 민간 사찰과 그에 따른 국민 인권 침해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국가 조직의 정책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검찰 출신 대통령이 검찰 권력의 핵심으로 평가되어 온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을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다수 의석의 민주당이 통과시킨 것을 향후 자신의 통치 행위를 요약해 제시하는 취임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지성주의로 몰아붙인 것이라면, 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3. 권력과 반지성주의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말한 “상대편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다수의 힘”이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했었다. 그것은 파시즘적인 독재에 따른 다수의 힘이 국가의 현실을 지배한 것이다.  파시즘은 언론을 비롯해 각종 억압적인 장치를 통해 대다수 국민의 욕망과 그에 따른 감정 그리고 사유를 왜곡하여 집단적인 광기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집단적인 광기를 바탕으로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여지없이 가혹하게 집행하는 데서 파시즘이 작동한다. 다수가 집단적인 광기로 무장하고 통치 권력이 이를 법으로 제정하고 그 법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에 저항하는 소수의 의견을 국가 또는 민족의 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것이 파시즘적인 독재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일본 군사 제국주의의 천황은 물론이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차우셰스쿠, 폴 포트 등의 공산주의 일인 독재 역시 파시즘으로 보아야 한다. 일인 지상의 우상화된 통치로 대다수 국민의 의식과 무의식을 장악하여 조종 관리하는 파시즘이야말로 반지성주의다.  여러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일어난 ‘자발적인’ 대다수 민중의 광기야말로 반지성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1950년대 미국에서 대중적인 광풍을 일으킨 매카시즘 역시 반지성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 군사독재 아래에서 국민 다수에 의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그에 따른 긴급조치니 해서 얼마나 반지성주의에 시달렸는가.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전두환 체제는 또 얼마나 반지성주의였는가.  반지성주의의 핵심 기반은 바로 권력이다. 민주공화국의 이념적인 기반은 국민이 비지배의 자유를 향유 하는 데 있다. 그런데도 민주공화국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장악한 자는 그 권력으로써 국민을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정치 욕망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이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한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정확하게 오인할 때, 그 권력에 의한 개인의 지배 욕망은 저 자신마저 속인다. 그리하여 국민 다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술책을 고안하여 실행하고자 한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거기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권력이라는 게, 우리가 안 시켜도 알아서 경찰들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게 무서운 거지.” 현재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여사라 불리는 인물이 자신의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한참 전에 비밀스레 내뱉은 말이다. 당시 이 말이 폭로되었을 때 긴가민가하면서도 정말 무섭다고들 했다. 결국, ‘내가 정권을 잡고’ 말았다. 경찰이 이렇다면 검찰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다’라는 것인데, 이야말로 권력이 어떻게 쉽게 반지성주의와 결합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이를 위해 국가 공권력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언론을 비롯한 여러 장치를 암암리에 조종하고, 그럼으로써 국민 다수가 국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러한 자의적인 국가 공권력의 발동에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전반적인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리라 믿는 자야말로 파시즘적인 반지성주의를 체화한 자라 해야 한다.  미신이 지성과 전격적으로 대립한다고 하지만, 정작 지성과 전격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집단적인 광기다. 집단적인 광기의 배후에는 일방적인 통치 권력이 작동한다. 이를 근본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고안된 이후의 역사를 보아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달리 말하면, 국민 모두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지성주의적 태도를 익히고 견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국민 모두의 보통 교육은 지성에 바탕을 둔 정치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발달한 자본주의는 교육을 오로지 반지성적인 기능적인 인간을 키우는 쪽으로 왜곡하기 일쑤다.  자본주의를 지성주의와 맞추기는 힘들다. 만약 자본주의와 일치하는 지성주의라면, 그 지성주의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산적인 합리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러한 계산 일변도의 지성주의가 권력과 결합한다면, 기실 그 지성주의의 본질은 반지성주의일 것이다.  참다운 지성주의는 보편적인 가치를 도모하고자 하고, 이를 발견하거나 조성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성찰을 지속할 수 있고, 이성적인 성찰에 따른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존중하여 실행하고, 이를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일체의 관행이나 관습 심지어 법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이로써 참된 공화주의 정신에 입각한 참된 공동체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윤석열 신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사회적 갈등을 넘어선 공동체의 결속을 민주주의 정치의 목표로 내세웠다. 놀랍긴 하나,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반지성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대략 예상한 대로 검찰 공권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 권력의 구도를 짰다. 과연 이 두 가지가 일치할 수 있을까? 전자를 위해서는 분명 제대로 된 지성주의가 관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후자의 정부 조직이 과연 제대로 된 지성주의에 의거한 것일까? 아무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권력은 본성상 반지성주의로 치닫는 경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윤석열 새 정부가 제대로 된 지성주의에 따른 민주주의 정치를 겸허하게 실행해 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2022-06-03 | hrights | 조회: 1049 | 추천: 1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네트워크 젠더고물상  6월 1일은 제8대 동시지방선거일이다. 선거를 앞두고 12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치영역에서의 성별 불균형 해소를 위해 여성 공천할당제를 확대하고 이를 의무화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는 현행 공직선거법이 성별 불균형 해소에 기여하지 못함에 기인한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국회 및 지방의회의원 선거 후보자 추천 시, 비례대표에 대해서는 여성 50% 이상 할당제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지역구 후보 추천 시에는 ‘전국지역구 총수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 조항만 두고 있다. 이로 인해 21대 국회의원 중 여성 비례대표 의원은 59.6%였지만, 지역구 의원은 11.5%에 그쳤다. 전국 지역구 총수의 30% 이상을 여성후보로 추천한 정당에 여성추천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유인책을 두고 있었지만, 이나마 4월 15일 “전국 지역구 총수의 10% 이상”으로 개악하여 사실상 30%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그나마 의원의 경우는 나은 편이다.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의 경우는 후보 공천 시 여성 비율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는 형편이다. 이로 인해 역대 광역자치단체장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고, 기초자치단체장도 7대에서 3.5%에 그치고 말았다.  두 거대정당도 자체 권고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은 기초자치단체장에 50% 이상을 청년과 여성으로 구성하도록 하였는데,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후보 전체에 정치신인과 여성, 청년을 50% 이상 배치하겠다고 하였으나 공천결과를 보면 지역구 광역의원에 정치신인이 33.8%, 여성 12.16%, 청년 10.36%이고, 지역구 기초의원은 정치신인 42.8% 여성 21.44%, 청년이 7.72%로서 실제로는 여성과 청년보다는 정치신인 배치에 주력한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 성이 60%를 넘지 않도록 성별 균형을 맞추라고 권고하였지만, 여성은 정치신인 및 청년에 끼워져 있을 뿐이다. 선관위 후보 등록 현황을 보면 정치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여성 할당제 30% 이상의 권고 조항만 있는 광역의원은 23.6%에 불과하다. 그리고 규정이 아예 없는 광역단체장의 경우, 17개 시도 32명 중 9명(28%)만이 여성 후보이다. 기초자치단체장은 이보다 더 열악하다. 226곳 580명의 후보 중 31명(5.3%)만이 여성으로 후보 100명 중 5명만이 여성이다. 또한,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지방선거 참여 정당의 10대 정책 및 공약 공개’에 따르면 지방선거에 등록한 12개 정당 중 5개 정당만이 성평등 정책이 포함되어 있을 뿐, 나머지 7개 정당(기본소득당, 코리아당, 녹색당, 대한당, 자유통일당, 통일한국당, 한류연합당)은 그 비슷한 정책이나 공약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지방선거 역시 여성의 정치참여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관점과 정치공학으로 인해 진입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1일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남성에 편중된 내각에 대한 질문에 “지금 공직 사회에서 내각의 장관이라고 그러면 그 직전 위치까지 여성이 많이 올라오지를 못했다.” “아마 이게 우리가 각 지역에서 여성의 공정한 기회가 더 적극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기회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할 생각”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현 정부의 19명 국무위원 중 여성은 3명이다. 이 중 1명은 여성가족부의 폐지로 인해 사라질 예정이고, 차관급 41명 중 여성은 2명으로 더욱 열악한데, 차관과 차관급 인사는 대통령의 임명 권한이기 때문에, “직전 위치까지...” 운운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을 ‘여성 인력 풀의 부족’에 전가하는 것이다. 이는 인과관계의 전치이고 후안무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지역에서 중앙까지 촌부에서 대통령까지 여성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 남성에 뒤처지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고, 정치영역에서 정당 보조금을 위한 보험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정치환경은 여성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떠오르도록 하거나 양자택일하도록 만들게 한다. 현실에도 여성 정치인들은 존재하지만,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여성 세력화를 위해서는 정당을 떠나 힘을 모아내고 목소리를 내어야 하건만, 참담한 여성공천결과에 대해 그 과정에 대해 누구도 힘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대통령 후보의 공약에 대해서도 단일한 목소리는커녕 개개인의 입장조차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기존정치인들에 대해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것이 여성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사진 출처 - 청주페미니스트연대   “가진 자의 무기로 가진 자를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 무기는 만들어지고 있다.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에서는 7명의 후보를 내고 ‘무소속 연대’로 선거에 대응하고 있다. 이들은 대선 전후로 여성 혐오정치와 여가부 폐지에 대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예비후보 운동을 해보자고 뭉친 이들로, “누군가의 표심으로만 치부되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는 “우리의 페미니즘 정치를 우리의 손으로 이루”기 위해 선거를 운동으로 펼치고 있다. 7명 중 한 명만이 노동당 소속이고 나머지는 무소속으로서 ‘무소속 연대’로 출범하여 선거구와 공약이 겹치지 않도록 구성하였다. 이들의 문제의식에는 “계속 사람들을 분절시키고, 모든 삶의 책임과 위기를 개인으로 수렴해 버리는 이 시스템에서 필요한 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의 문제야’를 얘기하는 거”가 깔려있고,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다 다다른 곳이 페미니즘이었다고 한다. “노인여성은 노인 플러스 여성이 아니고, 장애여성은 장애 플러스 여성이 아니”라는, “한 주체를 온전히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가진 한계 역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합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문제로 접근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정치뿐이라는 결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페미니즘 정치가 쉽게 성공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 선거운동을 통한 지역 현황에 대한 파악은 정치 운동을 시작하기에 좋은 토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이들에게 선거는 끝이 아니라 진짜 페미니즘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온다. 이들이 힘든 점은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니라 정치진입장벽이 너무 높다는 데 있다고 한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도 유권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에 도전하는 모습을 통해 누구나 다 도전해 보고 싶은, 쉽고 낮은 정치를 꿈꾸고 있다. 이들은 또 성추행 전력이 있는 전 충주시장 공천 규탄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다. 이들에게 정치란 “어렵지만, 여자로 태어나서 한 번쯤 해볼만 한” 것이고, 너무나 잘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베껴 갈 정도의 공약을 만들고 나누는 대범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새로운 도전들이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들이 모여 기존의 낡은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사회적 약자와 평범한 이들이 중심이 되는 그러한 정치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들의 도전에 응원을 보내며, 여성정치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페미니즘 정치의 싹이 형성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이러한 도전과 기대나마 없다면 삶은 얼마나 숨이 막힐까? 정당보조금의 수단으로서의 여성, 남성보다 정치력이 떨어지는 여성이라는 정치판에서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정치를 바라보고 실천하는 새로운 관점과 방식을 통해 조금씩 발전할 것이라 희망해본다.
2022-05-25 | hrights | 조회: 813 | 추천: 3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재)춘천시 마을자치지원센터(이하 마자센터) 주민자치팀은 연일 팀 회의가 진행되고 시끌벅적 분주해진다. 여기저기 전화 통화 소리에 시끄러워지고, 출장 결재도 끊임없이 올라오고 센터장의 현장 방문 요청도 계속 들어온다. 바야흐로 각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2023년 마을계획 수립’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각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마을의 문제해결, 행복한 마을 만들기를 위한 활동을 기본으로 하는 주민자치 조직이고 ‘마을 의제발굴-원탁토론(숙의)-주민총회’의 과정을 운영하게 된다. 2021년 12월 현재, 전국의 136개 시군구/1,013개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이런 활동을 통해 마을의 문제를 발견하고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결정해서 내년도 마을 예산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 우리 마자센터 직원인 마을지원관들은 전 과정에서 현장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현장에 가면 행정복지센터 담당 공무원부터 주민자치회 위원들, 간사 등 협력과 협의를 통해 서로의 역할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마을계획 수립이 원활하고 진정성 있게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돌발상황들이 발생되고 갖가지 문제점들이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현장 대응을 해야 함은 물론 사무실로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고 의견을 묻고 나누고 다시 답변해 주는 모습을 매일같이 본다. 비교적 나이가 어리고 상대적으로 직급도 낮다 보니 현장에서는 귀여워해 주고 편안히 대해주는 곳도 있지만, 초기에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무시당하거나 귀찮은 상급기관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어느 날 20대 젊은 마을지원관이 어깨가 축 처지고 얼굴은 우울한 표정으로 들어오길래 마을에서 무슨 일 있었냐 물으니, “센터장님 주민자치가 아닌 것 같아요. 00 지원사업 예산을 무조건 자치회 맘대로 쓰고 싶어 하셔서 지침에 맞게 써야 한다 하니 큰소리로 왜 그래야 하냐며 혼내고 안 한다 하시고 너무 힘이 드네요”했던 적이 있었다. “나랑 같이 가서 차근차근 설명드리자”하고 팀장과 마을지원관을 데리고 행정복지센터로 가서 해결한 적이 있다. 물론 그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00동 마을지원관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치회 분들이 아들처럼 대해주시고 고생한다며 밥도 사주고 잘 대해주신다며 환한 웃음으로 자랑삼아 얘기하는 사례도 있다.  물론 어렵다. 과거 시민들이 마을에서 자치를 얼마나 경험해 봤겠는가. 내 삶터인 마을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얼마나 실천해 봤겠는가. 주로 민원 해결용으로 주민들의 의견이 행정이나 의원들에게 전달되고 잘 보이고 큰 소리 내면 해결해주는 경우가 만연돼 있는 현실이지 않았겠나 생각된다. 정권이 바뀌면서 110대 국정과제를 보니 ‘주민자치’란 단어는 볼 수 없다. 주민자치회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리도 들려온다. 주민자치가 비록 어려운 점도 있고 다툼과 갈등이 존재하기도 하고 생각처럼 완전한 자치를 지금은 실현시키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치의 멋과 맛을 경험하게 되면 시민들은 국민들은 이전과 다른 이 나라의 주권자로서 주인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지방자치, 자치분권의 성패는 바로 국민이 시민으로 주민으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새 정부도 겉모습만 보지말고 좀더 세심하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검토해 보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올해 마자센터 마을지원관들은 주민자치회뿐만 아니라 옆 팀인 마을공동체팀을 통해 발굴된 마을공동체, 아파트공동체, 마을교육공동체(우리봄내 동동)들도 들여다보고 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 또 다른 기관에서 요청하는 협력사업도 고민하며 연결하고 있다. 춘천사회혁신센터와의 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새삶스런 벤치), 춘천문화재단과의 탈락된 마을의제 사업(당근책 사업), 춘천인형극제와 진행하는 환상의 인형놀이터(주민참여 인형극) 등 주민자치회의 활성화를 위한 일에 이름 그대로 ‘마을지원관’으로서의 또 동네 홍반장 역할을 해내야 한다.  주민자치니까 중간지원조직이나 마을지원관은 필요 없다고 주장 하시는 분들도 있다.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거북해하는 분들로 마을지원관들이 상처받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은 중간지원조직이나 지원관이 필요 없어지는 주민자치회가 오기를 고대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권한과 더불어 의무와 책임의 경험과 노력, 공부도 필요하다. 맘대로 하는 것이 자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또 주민자치회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협력하면서 진정한 의미로서 ‘민관협치’를 통해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날까지 함께 길을 가면 좋겠다. 사진 출처 - 필자  춘천은 작년에 이어 올해보다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위한 ‘만만(萬滿)한 의제발굴 엽서’를 제작했다. 엽서는 마을에 대한 생각과 제안을 시민들이 직접 써서 주민 의제로 제안하는 아이디어였고 올해는 앞면을 주민들이 직접 도안해 선정했다. 마을 곳곳에서 자치회 위원분들과 마을지원관들이 땀 흘리며 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작년은 3400여 명, 올해는 만 명의 춘천시민 참여가 목표다. 이 지면을 통해 전국의 마을지원관님들께 응원을 보낸다. “그대들이 가는 길이 대한민국 주민자치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개척하는 역사의 한 걸음 한 걸음임을 잊지 말고 힘내시길”
2022-05-18 | hrights | 조회: 795 | 추천: 6
이윤/ 경찰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개정안이 2022. 5. 3.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공포됐다. 언론에 의하면 이로 인해 경찰 수사 지체 현상이 더 심각해지고, 공직자·선거 범죄에 대한 검찰수사가 제한돼 부패한 공직자 등의 보호막이 될 수 있는 우려가 있다고 한다. 충분히 제기될만한 우려다. 나는 경찰 수사에 인력, 예산, 제도 관련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것도 추가되는 비용 없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력과 예산  2021년 수사권 조정 시행 첫해부터 지금까지 경찰 수사관들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수사경험자들은 수사부서를 떠났고, 거의 강제로 발령받아 온 신임 수사관들은 일이 벅찼다. 남아 있거나 새로 온 수사관 중 많은 이들은 다음 기회에 어떻게든 수사부서를 빠져나가려 한다. 일이 손에 익지 않고, 전과 달리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건처리 시간은 오래 걸렸고, 언론과 변호사협회 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사 기간이 늘어났다고 기사화하는 등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듯했다.  법 시행으로 인한 사건처리 지연은 이미 시행 전부터 명약관화했다. 대통령령인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에 의해 검사는 경찰 송치 사건에 대해서는 보완 수사요구를 할 수 있고, 불송치 사건에 대해서는 재수사요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검사가 직접 보완 수사했었는데, 이제는 경찰에 요구·요청만 하면 되니 검찰 일은 줄어들고, 경찰 일은 늘어났다. 게다가 경찰은 송치와 불송치가 혼재하는 사건의 두꺼운 사건기록 복사본도 만들게 되었다. 전에 없던 불필요한 일이 생긴 것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경찰청에서는 부랴부랴 고성능 복사기와 기록관리 인력을 충원했으나 그나마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으로 충분치도 않았다.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기대했던 것은 범죄혐의를 인정하기 어려운 사건은 경찰이 주체적으로 종결하고, 혐의가 인정되는 사건도 굳이 검사 지휘를 받는 절차가 생략되어 수사기일이 더 짧아지고 간소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예전 수사지휘를 받을 때와 차이가 없으면서 오히려 불필요한 일이 추가되어 인력과 예산이 더 필요한 상태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애초에 대통령령에서 검사의 요구·요청권을 인정할 때, 그리고 직접 수사 범위를 6대 범죄로 한정할 때 그로 인해 여유가 생긴 검찰 인력과 예산을 경찰로 이전하는 것도 동시에 진행했어야 했다. 현재 검찰청 인력은 약 1만 명가량(검사 2,300명, 검찰 수사관 6,000명 정도)인데, 경찰 수사 인력은 약 3만 명 정도다. 전체 범죄사건의 98%를 수사하는 경찰 인력이 검찰청 인력의 3배밖에 되지 않는다.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는 조정해야 한다.  이번 법 개정으로 검사 직접수사 가능 범죄가 부패와 경제로 축소되었고, 그나마도 나중에는 이른바 중대범죄수사청을 만들어 검찰은 명실상부한 기소 및 공소유지 기능을 전담하게 한다고 하니, 일이 줄어든 만큼 검찰 인력과 예산의 절반만 넘겨주더라도 경찰 수사는 지금보다 빠르고 꼼꼼하게 진행되어 언론과 변호사협회를 만족시켜 줄 것이다. 경찰 수사 인력 5,000명이 증원되면 대도시 경찰서에 최소한 25명씩은 추가배치 할 수 있다. 그렇게 해 봐야 수사·형사·여청·교통사고 각 기능 한 팀당 한 명 정도 증원에 그치겠지만,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다. 검사 한 분 고용할 비용으로 경찰 수사관 1.5명은 고용할 수 있으니 그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인건비 외의 다른 예산 절반도 검찰에서 경찰로 이전하면 높은 가성비가 기대된다. 제도  2년 안에 소위 중대범죄수사청이 설립될 수도 있다. 아마도 현재의 검찰이나 경찰과는 별개 조직이 될 것인데, ‘중대’범죄를 수사할 것이니 대부분의 고소·고발 사건이나 폭행 등 생활 주변 형사사건은 계속 경찰에서 맡을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범죄사건을 중대범죄수사청이 다 처리하고, 경찰은 신고된 사건에 대해 초동 조치만 한 후 사건을 인계하는 형태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경찰서 경제팀에 접수되는 전체 고소사건 중 기소되는 사건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고소사건 수가 월등히 많다. 그 이유로는 개인 간 분쟁이 있을 때 변호사 등을 활용하는 다른 법적 해결 방법에 대한 접근성이 낮고 비용이 높아서, 비용이 들지 않고 접근성 좋은 경찰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무차별적 고소에 대해서는 경찰이 초기 수사 결과 더 이상 범죄가 인정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면 자체적으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해 줘야 정작 세밀한 수사가 요구되는 사건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재는 경찰 수사력 낭비가 너무 심하다. 제도적으로 수사력을 선택과 집중할 수 있도록 마련해주는 것도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이건 돈도 들지 않는다. 투자 효과  범죄 수사는 ‘불법적 작위·부작위와 그에 동반한 정신 상태를 재구성하는 세부 사항을 합법적으로 탐색하는 활동’으로 정의된다. 많은 국민들은 경찰 수사를 통해 자신들에게 불법적 작위·부작위(범죄)를 한 사람이 처벌받고, 자신이 입은 피해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미국 일부 지역처럼 수사관에게 일 년에 100만원 이상 정장값을 지원해 줄 것까지 원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사건의 무게에 짓눌려 정신적·신체적으로 피폐해지지 않도록 인력, 예산, 제도를 배분하는 투자를 함으로써 경찰이 범죄사건 수사에 진력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 땅에서 사기꾼과 파렴치범, 절도범, 강력범으로부터 받는 피해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2022-05-10 | hrights | 조회: 974 | 추천: 11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별다방만 기프티콘? 이젠 동네가게 기프티콘!’  2022년 5월 15일. 경기 시흥시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바일 플랫폼이 선을 보인다. ‘시루 동네티콘-두구두구’가 그것이다. 시루 동네티콘은 사업명, 두구두구는 서비스명이다. 내용은 위의 슬로건이 간명하게 말해준다. ‘동네가게에서 쓸 수 있는 기프티콘’  기프트+이모티콘의 단어 조합으로 추정되는 신조어 기프티콘의 시작은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K텔레콤의 자회사 에어크로스에서 처음 ‘기프티콘’을 출시했다고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한 달 이용량이 5만여 건에 불과했으나 다음 해인 2007년에는 43만여 건으로 늘면서 범상치 않은 시작을 알렸다.  기프티콘의 성장에 불을 지른 것은 2010년 12월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한 ‘카카오톡 선물하기’의 등장이었다. 기프티콘이란 메시지로 간편하게 주고받는 선물이라는 개념이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기프티콘은 이제 일상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의원이 지난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국감 자료로 제출받은 온라인 선물하기(기프티콘) 시장 규모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프티콘 시장 규모는 2016년 7,736억 원, 2017년 9,685억 원, 2018년 1조4,243억 원, 2019년 2조846억 원, 2020년 2조9,983억 원으로 매년 크게 늘고 있다.  약 3조 원에 달하는 기프티콘 시장은 사실상 독과점 시장이다. 전체 거래액 중 84.5%(2조5,341억 원)를 카카오커머스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 지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선물의 전달 수단으로 기프티콘을 보내는 것은 일종의 문화가 되고 있다. 가장 쉽게 기프티콘을 이용하는 방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전 국민의 소통 채널인 카톡의 추가 메뉴인 선물하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카카오커머스가 기프티콘 시장을 장악하는 이유이다.  2022년 올해 기준 공시대상기업집단 중 재계 15위를 기록하고 있는 대기업인 카카오의 카톡에서 주로 거래되는 기프티콘은 스타벅스, 배스킨라빈스, 파리바게뜨 등 역시 굴지의 대기업 상품이 주를 이룬다. 동네 골목상권 소상공 자영업 카페, 음식점, 빵집 등이 기프티콘 시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지금까지 언감생심이었다.  거대 플랫폼 유통·소비 구조에서 소외되는 소상공 자영업자들이 골목상권 전용 기프티콘에 대한 요구가 없지 않았다. 다만 이를 연결할 플랫폼 사업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기업 플랫폼과 대기업 프랜차이즈 기프티콘과 경쟁할 엄두를 쉽게 내진 못할 터)  그런데 한 업체가 용감하게 골목상권 전용 기프티콘 앱(APP)을 출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동네 단골가게 기프티콘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만든 앱의 이름이 ‘두구두구’이란다. 이를 시흥시가 덥석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지역화폐 결제가 가능한 골목상권 동네가게 전용 기프티콘 플랫폼’이 첫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지난 2월 시흥시와 ㈜동네티콘이 제휴를 맺고 지금까지 200여 개의 골목상권 동네가게가 두구두구 앱에 입점했다. 입점 대상은 시흥시 지역화폐인 시흥화폐 시루 사용처(지역화폐 가맹점)이었다.  사용법은 기존 기프티콘과 거의 동일하다. 두구두구 앱에서 동네와 가게, 상품을 검색하여 시흥시 지역화폐인 모바일시루로 결제한 후 선물을 보내면, 선물 받는 사람은 카카오톡으로 받아 해당 가게에서 사용하면 된다.  소비자는 현재 10% 할인 혜택이 제공되는 모바일시루로 동네 단골가게 선물하기 결제가 가능하고 가맹점은 가게 상품과 서비스를 기프티콘으로 만들어 홍보 효과를 누리고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여 매출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가맹점이 부담하는 기프티콘 결제 수수료는 5%이다. 시흥시와 제휴를 통해 기존 기프티콘 시장의 수수료 10~12%의 절반 가격에 불과하다. 이 정도면 골목가게에서 홍보를 위해 전단지를 돌리는 비용 정도이다.(더 낮추고 싶지만 이 5%의 수수료에도 PG수수료 등 여러 기본 수수료 빨대가 꽂혀있다)  출시 전이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다. 특히 젊은 동네가게 사장들의 환호가 들린다. 매우 다양한 기프티콘 사용처도 확보했다. 예를 들어 동네 헬스장, 네일숍, 공방, 한의원 등 기존에 보지 못한 기프티콘이 선을 보인다. 동네 단위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시흥시만 하더라도 별다방 기프티콘을 쓰려면 동네에 매장이 없어 대처로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천편일률적인 기존 기프티콘에 식상한 소비자도 적지 않다. ‘우리 동네에도 괜찮은 가게와 상품이 있는데 이걸 기프티콘으로 선물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수요가 존재하는 것을 현장에서 듣게 된다. 게다가 지역화폐로 구매한다면 일종의 할인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유인 요소도 만만치 않다.  마침 또 코로나19 시국 동안 열지 못한 지역 맘카페에서 플리마켓을 재개하며 동네티콘 홍보 부스를 마련해 주겠다는 감사한 연락이 왔다. 지역의 관심과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선물 경제(gift economy)란 개념이 있다. 네이버 검색 결과에 따르면, 재화를 선물로 나누어줌으로써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경제를 뜻한다. 이는 개인 또는 일정한 집단들이 재화를 물물교환하거나 시장에서 가격이라는 메커니즘에 따라 상품을 거래하는 교환경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포틀래치 경제라고도 한다.  이 같은 선물 경제의 적용 사례로 협동조합이나 로컬푸드 매장을 지목하기도 한다. 선물 경제에 의한 교환체계가 협동조합의 운영원리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로컬푸드 매장 또한 일정한 지리적 공간에 사는 사람만이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잠재적 조건에서 출발하므로 선물 경제의 개념을 담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가치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으로 선물 경제가 유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지역공동체 강화를 최종 목적으로 두고 있는 지역화폐와 연결하고, 기존 거대 플랫폼의 기프티콘을 차용해 동네단위로 재구성하는 시도가 바로 시루 동네티콘, 두구두구 앱이다.  시루 동네티콘을 준비하다 보니 절로 ‘동네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이야기가 신음처럼 나오게 되지만(세상 쉬운 게 없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공공이 견인하는 새로운 동네기반 소셜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진다는 기대 때문이다.  다음에는 시흥시가 시도하는 또 다른 ‘별난 짓’을 소개한다. ‘시루 동키마켓’이다. ‘동네를 키우는 마켓’의 줄임말이고, 마스코트는 정말 당나귀(donkey)이다. 그 당나귀가 어떻게 동네를 키울지 기대하고 봐주시길.
2022-05-04 | hrights | 조회: 931 | 추천: 2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봄, 생명의 시작  봄이다. 긴 겨울의 끝에서 생명이 움트는 소식을 전하는 봄이다. 옥상에 올라 바라보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물들어간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지는 곁에서 조팝나무의 하얀 물결이 눈이 부시다. 산매화며 벚꽃이 피는가 하더니 목련꽃이 진다. 그 자리에 연둣빛 잎이 달린다. 이제 올라온 가녀린 잎새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돌돌 말려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돌돌 말린 잎새는 생명의 기지개를 펴듯 스스로 제 몸 가누어 쭉 펴 올리더니 봄바람에 살랑인다. 신기하다. 여린 잎을 단 나무들이 하나 둘 어린 초록빛으로 물들더니 이제는 좀 더 진한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초록의 향연이다. 눈이 부시다.  봄, 움터오는 생명의 탄생, 문득 아주 오래전 홍도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눈앞에서 지켜본 기억이 났다. 해산일이 가까운 임신부가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미처 뭍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공소회장님 댁이 산파를 자처하였다. 회장님댁은 “아이를 받아본 게 10년도 넘었는디….”하시면서도 차근차근 아이 받을 준비를 하였다. 나도 곁에서 물 끓여 가져와라 하면 물 들여가고, 소독한 가위 가져오라면 방에 들여놓고 안절부절못하면서 잔심부름을 하였다.  그렇게 방 밖에서 숨죽여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찰싹하는 소리에 이어 세상에 첫소리를 내는 갓난아기의 “응애~” 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들이랑게! 산모도 아도 모두 건강허요!” 순간 나는 알 듯 모를 듯한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부서질 것만 같은 연약한 생명에 대해 본능적으로 느낀 두려움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었을까?! 죽은 것만 같던 나뭇가지에 움터 나오는 잎새를 보며 새삼 생명의 시작은 작고 여리고 연약한 것이었다는 걸 생각하는, 봄이다. 나이 듦, 느려지는 시간  “어쩌면 가사가 저리도 곱냐….” 고운 봄볕 길게 드는 마루에서 화투장을 만지던 엄마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한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이다.  울 엄마 올해 여든셋, 행동거지도 기억력도 많이 느려지고 있다.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고, 좀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오늘이 며칠인지 알려면 몇 번씩 달력을 들여다봐야 하고, 전날 만나 인사 나누던 앞집 사는 이가 며칠째 안 보인다며 걱정하고~. “자꾸만 기억이 안 난다! 왜 그러지! 걱정이다!” 철없는 딸내미는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젊을 때하고 같아? 뭔 그런 걸 걱정해!” 하며 타박이나 한다. “그럼, 오늘은 저 웃소사 복숭아꽃 활짝 폈으니 그리로 꽃구경 갑시다!” “싫다! 걷는 것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봄볕도 좋고, 복사꽃이 활짝 펴서 장관이야! 천천히 걸어보지 뭐!”  어린애 달래듯 하여 느릿느릿 산책길에 나서자니, “지팽이는 싫다! 그냥 걸을란다!”며 딸내미한테 손을 내민다. “니 손 잡고 걷는 게 더 좋다!”  그렇게 딸내미 손 붙들고 느릿느릿 걷다 보면 복사꽃 화사하게 핀 저 무릉도원에 도착할진저, 그 그늘 아래서 한숨 졸다 보면 서녘으로 기우는 해를 배웅하는 시간이 올 것을. 굽이굽이 돌아왔을 엄마의 삶의 길을 천천히 동행하자니 “힘들구나!” 하면서 잠시 숨을 고른다. “좀 쉬었다 가자!” 그러지 뭐, 느릿느릿 걸어도 우리는 저 무릉도원에 닿을 것을. 죽음, 기억하는 삶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늘 부고를 들으며 산다. 비록 그 부고가 오늘은 몇 명이라는 통계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만성적으로 들리는 것이지만.  가까운 지인의 부고를 받았다. 육십 초반의 지인의 죽음은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것도,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먼 이국땅에서의 교통사고! 작별의 징조란 것도 없이 그저 황망하였다. 꼭 한 달 전에 “미국 다녀와서 다시 보자고!” 하던 그이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리며 되살아나곤 한다.  생로병사,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리의 의식은 늘 삶에 방점을 찍고 살아간다. 그러다 가까운 그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제야 죽음이란 걸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삶의 종착역이 죽음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죽음에 이르러 끝이 난다.  한 달 뒤, 사십 후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배가 안치된 봉안당을 찾았다. 말기암이던 그니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죽을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하염없이 착한 웃음으로 맞아주던 생전의 그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며칠 뒤, 속절없이 파릇한 생명을 잃은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았다.  칙칙한 옷을 벗은 세상을 화사하고 싱그러운 빛으로 물들이는 봄에, 죽음을 생각한다. 마치 죽은 것 같던 고사목에 움터 오른 잎새들이 넓게 퍼져 그늘을 만드는 걸 보면서 새삼 죽음과 마주한다. 내 친구들은 죽음으로 죽은 걸까? 파릇한 아이들은 죽음으로 끝인 삶인 걸까, 생명이 소생하는 봄에 기억으로 삶이 시작되는 이들, 죽음은 기억 속에 시작하는 삶이 아닐까 싶은데….  마치 우리에 갇힌 것 같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마주한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
2022-04-26 | hrights | 조회: 728 | 추천: 5
석미화/ 평화활동가  내게 4월은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달이다. 해마다 4월이 되면 기자회견을 준비한다. 4월을 위해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4월에 베트남전쟁 한국군 피해자를 만나고, 4월에 피켓을 든다. 언제나 4월은 바빴다. 4월을 중심으로 1년이 돌아왔다.  왜 베트남전쟁을 4월에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야 베트남전쟁이 4월 30일에 끝났으니까. 하지만 왜 베트남전쟁을 기억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그 전쟁을 왜 4월 30일에 기억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난 다시 반문하게 될 것이다. 그럼 언제로 기억하는 게 좋을까요? 이건 절대로 시비를 걸거나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진지하게 우리가 이 전쟁을 기억하는 날을 언제로 하면 좋을지 묻는 것이다.  20세기 한국이 치렀던 두 개의 전쟁,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대개의 나라가 전쟁이 끝난 날을 기억하는데 비해 한국전쟁은 발발일로 기억되고 있다. 또 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은 기억하기 위한 ‘날’이 없다. 이 전쟁을 추념해야 할지 기념해야 할지, 적어도 현재 국가의 기억 안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국가보훈처가 예우하는 보훈 대상 중 참전유공자는 이 두 개의 전쟁 참전자를 대상으로 한다. 유공의 범위에는 포함이 되었지만 6.25전쟁이 각각의 수많은 전투와 참전자에 대한 추도식과 위령제가 열리는 것에 비하면 베트남전쟁 관련된 국가의 공식적인 ‘날’은 없다.  사회와 국가, 그리고 대부분의 무관심 속에서 이 전쟁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가해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시민사회와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기억. 그리고 4월의 현장에서 ‘성찰’과 ‘기념’의 기억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만날 수 없는 각자의 주장 속에 때로는 그들의 소리에 귀를 닫고 행사를 열어야 했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살펴야 했다. 참전군인들은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고발하는 전시장 앞에 천막을 치고 항의 농성을 했고, 분노를 담은 현수막을 달았다. 광주에서는 그들 여러 명과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설득을 해야 했는데, 난 그냥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수차례의 경험 속에서 분노한 그들의 주장과 내 이야기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력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안하기에는 자기변명이라 느껴졌다. 참전군인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점점 고민이 깊어졌다.  운동의 과제와 고민 속에 <참전군인의 평화 활동에 대한 연구>(2021, NPO지원센터, 하단 링크 참조)를 펴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참전군인’과 ‘평화 활동’이라는 말은 썩 어울리거나 관련 있는 단어가 아니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참전군인의 평화 활동과 그들의 생각을 알리고 싶었고, 그 가능성을 통해 참전군인과 평화 활동의 동료로 만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집단이 그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듯 참전 단체로 대표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다양성에 주목하였으며 우리가 참전군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성찰하고자 했다. 그리고 참전군인을 역사적 사건에 대상화된 존재,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고엽제나 PTSD와 같은 치료 대상으로서 ‘비운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사진 출처 - 필자  이 책에는 평화 활동을 하는 네 명의 참전군인 이야기를 담았다. 평화재향군인회 창립자이자 1965년 맹호부대 1진으로 월남에 간 전투소대장 표명렬, 1971년 맹호부대 포병 하사관으로 파병되어 귀국 직전 안케패스 전투에 참전한 김낙영, 1969년과 1971년 남들 한 번 가기도 힘든 월남전을 두 번이나 경험한 백마부대 전투병 양정석, 1967년 청룡부대 전투병으로 참전해 크게 부상당한 뒤 귀국한 상이군인 류진성. 그들이 겪은 참혹한 전장의 경험은 평화에 대한 깊은 성찰과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연구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4월 말에는 웨비나를 준비하고 있다.  ‘참전군인의 평화 활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참전군인의 평화 활동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맺고 있는 연구는 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모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그 실천을 위해 늘 4월이면 해왔던 활동을 올해는 좀 다르게 해보려 한다. 참전군인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촉구하는 활동에 나서는 것, 그들과 평화 활동의 동료가 되어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모여 언젠가 참전군인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서가 나올 날을 기대하며, 그렇게 나의 4월은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며 흐른다. <참전군인의 평화 활동에 대한 연구> https://blog.naver.com/snpo2013/222599870490 (연구보고서 바로가기) http://www.snpo.kr/data//file/npo_aca/1893498642_PR5WyjEL_01_ED999CEBA0A5ED96A5EC97B0_ECB0B8ECA084EA B5B0EC9DB8EC9D98_ED8F89ED9994ED999CEB8F99EC9790_EB8C80ED959C_EC97B0EAB5AC_EBAFB8EBAFB8EC8B9C EC8AA4ED84B0ECA688.pdf
2022-04-14 | hrights | 조회: 648 | 추천: 3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일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놀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사치고 일과 싸움과 놀이의 성격을 동시에 갖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 비중이 어떻게 다른가에 따라 중심이 되는 성격과 주변이 되는 성격이 다를 뿐이다. 회사에서의 일도 싸움과 놀이의 성격을 아예 결여할 수 없다. 퇴근한 뒤 이루어지는 회사의 회식은 기본적으로는 놀이지만, 암암리에 일과 싸움의 성격을 수반한다. 정치적인 투쟁의 일환인 대대적인 시위는 한편으로 축제와 같은 놀이의 성격을 지니기 일쑤다.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놀이의 성격은 한껏 줄어들고 싸움의 성격이 전격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일 즉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기초다. 싸움 즉 투쟁은 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 생겨난 가치 생산물을 과연 정당하게 배분하는가를 둘러싸고서 일어난다. 놀이 즉 유희는 노동과 투쟁이 결합하여 일군 최종적인 가치 생산물을 다수건 소수건 함께 소비하면서 살아있음을 즐기고 향유 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드높이는 최종의 행위다.  이를 사회적 삶의 영역에 비추어 보면, 노동은 경제 영역에, 투쟁은 정치 영역에, 유희는 문화 영역에 각각 할당된다. 인간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드높일 수 있는 계기는 문화 영역에서의 유희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은 대상적인 가치를 지닌 재화를 생산해 문화 영역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투쟁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대상적인 가치를 가능하면 최대 다수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그만큼 유희할 수 있는 사회 전체의 가치 생산물의 양이 늘어나고, 정치가 발전하면 그만큼 모두가 함께 유희함으로써 각자가 더 넓고 깊은 환경에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향유 하는 문화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통한 유희의 폭과 깊이가 인간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고, 그래서 유희 즉 놀이는 인간 됨의 출발이자 완성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노동을 통해 경제 활동과 투쟁을 통한 정치 활동은 유희를 통한 문화 활동을 위한 수단이고, 문화 활동은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의 목적이다.  한 사회의 경제력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수준이 낮으면 양극화의 폭이 커지면서 소수의 유희를 위해 다수가 노동에 집중하는 일이 강화된다. 정치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는 모두가 열심히 일해 사회적 가치의 총생산량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회적 가치의 총생산량을 최대 다수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그저 사람들이 협력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각자의 존재 가치가 공동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활동에 얼마나 더 넓게 더 깊게 참여하는가에 따라 각자의 존재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존재에 관련한 이 원칙에서 공동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문화 활동이다. 문화의 향유야말로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를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제반 영역에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 정치가 요구되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자의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이른바 비(非)지배의 자유에 바탕을 둔 공화주의의 원칙에 따른 정치가 요구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다름 아니라 국민의 최대 다수가 참여할수록 더욱 역동적으로 활성화되고, 그럼으로써 모두가 모두를 통해 인간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현하는 것을 나라의 기초로 삼는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이 헌법 조항은 그 실내용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은 문화의 민주공화국이다.”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특히 통치자인 대통령과 국민을 대신해 입법행위를 하는 국회의원 그리고 검찰 일을 하는 검사들과 재판 일을 하는 법원의 판사들 등, 정치 엘리트들이 최대 다수의 동등한 참여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민주 공화의 문화적 가치를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쪽으로 행위 하는 것은 곧 헌법, 그것도 최상의 준엄한 헌법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2.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날 숨죽이고서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충분히 이기겠구나 하는 희망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뿔싸 자정이 넘어서부터 충분하다고 여겼던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이었지 싶다. 이윽고 돌을 삼킨 듯 가슴 어딘가에서 내뱉을 수 없는 먹먹함이 더해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암울함에 이어 절망이었다. 결국은 0.73% 차이의 패배였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시야가 어둠에 휩싸였다.  후보 윤석열 씨가 이른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후보 이재명 씨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텔레비전을 차마 보지 못했다. 그동안 수시로 드나들던 유튜브도 끊었다. 며칠 그냥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베란다 바깥을 하릴없이 내다보곤 했다. 우울이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각오를 억지로라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다시 유튜브를 뒤적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이 마찬가지로 납덩이 같은 심정을 겨우 버티어냈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쏟아냈다. 보기 싫은 그 얼굴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것이 두려워 한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고들 했다. 패배한 자들 간의 격한 공감이었다. 다들 향후 5년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황망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 내면의 진상은 무엇일까?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이다, 남북의 평화와 자주적인 나라의 도래가 물 건너갔다,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양극화의 해소는커녕 더욱 심화할 것이다, 검찰 권력이 강화되어 이른바 ‘검찰 공화국’이 도래하여 죄 없이도 누구나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다, 보수 언론의 권력과 부패한 금융 세력과 재벌 세력들이 불공정한 자의를 휘두르는 검찰 권력과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의 위세가 더욱 등등해질 것이다, 심지어 합리성을 내팽개치고 손바닥에 새긴 ‘王’자가 여실히 말해 주듯 무속이니 신내림이니 하는 영기(靈氣)를 맹신한 가운데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일방통행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통치자의 무식과 무능함에 그의 주변에 호가호위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네들만의 이익을 위해 설쳐댈 것이다, 여러 기준의 갈라치기에 의한 갈등과 대립이 판을 칠 것이다, 첨단고도과학기술에 의한 대전환의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해 정치가 사회경제의 거대한 물결에 휘청대면서 국가의 명운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등등이지 싶다.  소위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대선 경쟁을 하던 중에 주당 120시간까지라도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게 했다. 주 5일을 근무한다면 하루 24시간,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일하기만 하는 인간으로 산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식의 발언이다. 반발이 심해지자, 마치 창조적인 노동을 하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그렇게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일하고자 하니 허용해야 하지 않느냐는 변명으로 바꾸었다. 노동을 최소화하고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아예 어떤 실마리조차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참다운 인간의 삶인가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이 “정치는 종합예술입니다. 정치를 통해 내가 아닌 국민이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래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한 김구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시한 문화인으로서의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지향하는 일종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오로지 기업활동의 자유만을, 잘 먹고 잘사는 강자들의 편에 서서 통치를 할 것이다. 그가 혹시 국민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하겠다고 말하더라도 입에 발린 겉치레에 불과하고, 그는 본능적으로 기득권 카르텔을 중심으로 한 강자들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다. 그러니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의 정치로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의 애민(愛民) 통치의 바람을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그 의의의 실마리조차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검찰 권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임을 믿고 살아온 현재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드디어 그 자신 패거리 권력 투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정치판’에서 가장 유리한 우두머리의 지위를 차지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힘을 정확하게 의식한 탓임에 틀림이 없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의 기이한 첫 행보를 보인다. 무슨 이유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청와대에는 단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다.”라는 발언을 하고, 전혀 들먹이지 않았던 용산 국방부 건물을 접수해 대통령 집무실로 쓰겠다는 고집을 고수하여 관철하는 행보를 계속한다. 그러니,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이 “국민이 역사의 주체이고 대한민국의 주인입니다. 국민이 결정해준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발언을 왜 했는지, 그 배경과 의의 및 취지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알겠으며, 무엇보다도 동학 혁명의 정신을 들먹이면서 국민을 향해 여러분이 ‘역사의 주체’라고 한 이재명의 말에 담긴 처절한 애국의 심정에 어찌 조금이라도 공감하겠는가.  현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대선 후보 때 핵을 탑재한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있을 경우를 가정해 “선제타격 말고는 방법이 없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아울러 북한을 일러 주적임을 명시적으로 내세웠다. 남북 간의 평화 공존을 지향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안보 불안을 부추긴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과 대치 상황을 빌미로 미국이라는 국제적인 예외국가가 어떻게 우리를 강압해 반(半)-종속국으로 만들어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훼손해 왔는가에 대한 의식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러한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다행한가, 하는 내심을 전혀 감추지 않고 강하게 내세운다. 어떻게든 남북의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해 온 문재인 정권을 ‘빨갱이 정권’ 운운하면서 꽉 막힌 반공적 냉전 의식에 사로잡힌 세력에 힘을 싣는다. 그러니 “3.1운동 당시에 만세를 부르던 우리 선조들의 뜻을 이어서 평화로운 나라, 진정 독립되고 자주의 나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이라고 외치는 상대 후보인 이재명의 말에 실린 미래를 향한 긍정적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의사가 전혀 없거니와 심지어 그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볼 한순간의 겨를조차 있겠는가.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나라가 어떤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련해 이처럼 가치가 충돌하는 전격적인 투쟁에서 패배해 버렸으니, 어찌 크나큰 희망에서 더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갱 속에 갇히고 말았다는 심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3.  그러나, 포기할 겨를도 이유도 없다. 대선 패배 직후 등장한 <재명이네 마을>에 몰려든 십 수만의 이른바 MZ 세대의 젊은이들이 벌이고 있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크게 힘을 북돋우고 있다.  이 기회에, 일하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 싸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놀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 모두가 제대로 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군 일의 성과를 제대로 배분하여 양극화를 극복하고 이를 통해 배타적인 소유 의식을 떨쳐버리고 놀이의 기초 조건인 열린 평등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 아울러 놀이의 재료이자 목적이 되는 문화 예술을 비롯해 학문의 성과를 창의적으로 드높여야 한다는 사실,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한 창의적인 기술 개발에 힘써 전 세계적으로 놀이의 다채로운 방식을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전쟁의 가능성과 위협을 미리 방지하고 소멸함으로써 놀이의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평화와 자유가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떠올려 강조하게 된다. * 워낙 중차대한 국가적인 사태를 맞이한 탓에 흥분한 어조로 중언부언 깜냥에 넘치는 원칙적인 이야기들을 뇌까린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양해하시기 바란다.
2022-04-05 | hrights | 조회: 669 | 추천: 3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유인원(類人猿)은 사람을 닮은 대형 원숭이를 말한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보노보 등이 유인원에 속한다. 전통적 동물원이든 사파리라 불리는 개방형 동물원이든 동물을 서식지로부터 분리해 가두어 사육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갇혀 있는 동물을 구경하러 가는 일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기린 같은 이국 동물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열광했다. 하지만 원숭이 우리 앞에서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쳐다보기 민망하고 불편했다. 유인원이라는 이름처럼, 사람과 닮아도 너무 닮은 비인간 동물이 나를 쳐다본다. 특히 침팬지의 손, 특히 손바닥은 사람 손바닥과 똑 닮았다. 그 응시 앞에서 내 눈은 어디를 응시해야 할지 모르고 흔들렸다.  가둔 자와 갇힌 자의 위치가 역전되는 착시현상은 사람과 닮은 동물일 때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갇힌 쪽이고 갇힌 나를 고릴라가 바라보는 것이라면? 털 없는 원숭이 사람을 고릴라가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라면? 으스스하고 묘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원숭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은 발달이 늦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다. 타잔을 보는 원숭이 엄마 카라의 눈길이 그러했다. 타잔은 미국 소설가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가 창조한 인물이다. 소설 『타잔(Tarzan of the Apes)』이 1914년 출간되고 모두 26권의 시리즈가 나왔고, 수많은 영화와 TV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타잔의 부모는 아프리카 식민지에 부임한 영국 귀족이었다. 부모를 잃은 타잔을 카라는 정성으로 돌보지만 1년이 지나도 제대로 걷지도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털도 나지 않는 하얀 피부라니! 원숭이 형제들과 물을 마시러 간 호수에서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본 타잔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째서 내게는 굳센 입술과 날카로운 송곳니가 없는가, 형제들의 넓적한 코에 비해 내 코는 어딘가 뜯겨나간 것처럼 작았다. … 그들의 코가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고 부러웠다.” 1) 타잔의 독백이다.  으스스한 기분을 억누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이빨을 드러내고 웃기도 하고, 입술을 주욱 내밀고 먼 곳을 보기도 한다. 끽끽 소리를 내고 머리통을 두드리며 항의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따개비, 지렁이, 비둘기, 개는 다윈이 특별히 사랑했던 동물들이다. 다윈은 동물원에 가서 유인원을 관찰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는데, 1872년 출판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서 원숭이의 감정 표현에 대해 썼다. 다윈은 다양한 종과 속의 원숭이들의 감정 표현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의 감정 표현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쁨, 즐거움, 애정을 표현할 때면 인간도 원숭이도 입술을 내밀고, 웃는 소리 내고 눈이 반짝인다. 고통, 슬픔, 고민, 질투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의 표현도 유사하다고 했다. 회색손올빼미원숭이가 슬픔에 빠졌을 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는 주인과 사육사의 증언에 대해서는 자신이 동물원에서 동종의 원숭이를 면밀히 관찰했지만, 비명은 질러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더라도 원숭이도 사람처럼 슬픔을 느끼는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다윈은 “어린 오랑우탄과 침팬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실의에 빠진 모습은 아이들 못지않게 뚜렷하고, 아이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애처롭다. 그들이 이와 같은 심신 상태에 놓여 있음은 그들의 힘없는 동작, 낙담한 표정, 흐린 눈, 그리고 변한 안색 등을 통해 드러난다” 2) 면서 어린 원숭이와 사람 아이의 감정 표현의 공통점을 찾아내 서술했다. 또한 “그림 18은 오렌지를 받았다가 빼앗긴 침팬지가 부루퉁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침팬지와 유사한 입 내밀기 혹은 입술 샐쭉거리기를 부루퉁한 아이들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다” 3) 고 적기도 했다. 오늘날 동물학자들은 인간의 감정을 동물에 곧바로 적용하는 지나친 의인화를 비판할지 모르지만, 다윈의 시대에 동물이 느끼는 감정을 인간과 같은 수준에서 논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시도였다. 다윈은 인간을 동물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동물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끌어 올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림1: 실망해서 부루퉁해진 침팬지, 우드 씨의 그림 출처: Darwin, C. R. 1872.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London: John Murray. First edition. (darwin-online.org.uk)​  유인원은 사람과 유전자가 거의 같다. 사람과 침팬지는 98%, 오랑우탄은 97%의 DNA를 공유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능이 높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자아가 있는 유인원의 동물실험을 2015년부터 금지하고 있다. 유인원의 실험은 금기시되고 있지만, 영장류는 여전히 실험에 쓰이고 있다. 신약 개발에서 쥐나 돼지가 아니라 영장류를 쓰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에 금지법이 없는 중국에서 실험용 영장류의 90% 이상을 사육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1월 6일 전북 정읍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영장류자원지원센터가 준공됐다. 원숭이 3천여 마리를 집단사육할 수 있는 규모로 필리핀원숭이·붉은털원숭이 590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난치병 치료 임상 연구에 활용할 실험용 원숭이 집단 사육시설이다. 준공식 당일 중국 윈난성이 고향인 붉은털원숭이 한 마리가 높이 7m, 상단에 최대 1만2000V의 전류가 1초 간격으로 흐르는 울타리를 넘어 사라졌다. 나이는 4살. 무게 4~5㎏, 키 60~70㎝의 이 원숭이는 탈출 13일 만에 생포됐다. 4)  최근에는 유인원에게 비인간 인격체의 지위를 부여하는 판결이 아르헨티나에서 나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2014년 오랑우탄 산드라에게 비인간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동물원에서 20년간 갇혀 지낸 수마트라 오랑우탄 산드라를 대리해 아르헨티나동물권변호사협회(AFDA)가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했고 승소했다. 두 번째 사례가 멘도사 동물원의 침팬지 세실리아였다. 세실리아는 동물원의 작은 콘크리트 우리에서 브라질의 소로카바 침팬지 보호구역으로 이주했다. 세실리아의 승소에 힘을 실어주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영장류학자 알도 히우디세는 “인간과의 엄청난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그들이 억류돼 있다는 사실은 부조리하다” 5)고 말했다. 그림2: 오랑우탄 산드라 출처: Orangutan Granted Legal Personhood, Moves to Florida, Becomes Florida Woman (newsweek.com) 그림3: 침팬지 세실리아 출처: Cecilia, first chimpanzee released by Habeas Corpus - GAP Project (projetogap.org.br)  동물의 법적 인격성을 인정한 두 판례는 동물은 단지 동물복지법 같은 보호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하게 보통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이런 소송들이 동물이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다양한 종의 생명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물은 비인간 외계 영토의 ‘저쪽’에 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행사가 불가피한 다종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6) 인간은 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다종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동물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동물의 내재적 가치를 존중하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2021년 7월 19일, 동물권에 관한 주목할만한 법 개정안이 발표된 것이다. 민법 98조 물건의 정의를 다룬 조항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명시하는 법 개정안이 발표된 것이다. 민법 98조 개정안이 확정되면, 앞으로 관련 법이 개정될 예정이고 여러 변화가 예상된다. 동물보호법은 30년 전에 제정되었지만 7) , 현재 반려동물은 민법상 물건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상해를 입혀도 주민의 물건에 대한 재물손괴가 되고, 사체는 재활용 불가 폐기물로 취급되어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진다. 법 개정안은 동물을 생명체로 존중하고 공생해야 한다는 사회적 감수성이 어느 정도 높아진 것의 반영이 틀림없지만, 4명 중 1명이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다는 한국의 현실에 비춰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윈 진화론 이후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비해 특별함을 주장할 근거를 상실했다. 진화론은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로서 다른 생명을 활용하도록 신으로부터 허락받았다는 기독교 사상의 오랜 도그마에 균열을 가져왔다.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뒤얽힌 강둑(Entangled Bank)’의 묘사에서 함축적으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다양한 종들이 이루는 생태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연의 요소에 의해 가지치기하듯 생물 종이 변형하고 분화되고, 그렇게 변화한 종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생태계를 다윈은 뒤얽힌 강둑이라고 표현했다. 다윈의 혜안은 인간종(種)중심주의(Anthropocetrism)를 넘어서, 인간-비인간동물이 이루는 다종 공동체를 어떻게 일궈나가야 하는지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1)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 안재진 옮김, 『타잔』 (다우, 2002), 58쪽. 2) 찰스 다윈, 김성한 옮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사이언스북스, 2020), 206쪽. 3) 위의 책, 210~211쪽. 4) 허정원, 「1만2000V 넘어 탈출한 원숭이, 살아 있다는데...일주일째 행방 묘연」, 『중앙일보』, 2018년 11월 13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19015#home ; 송경은, 「실험용원숭이는 왜 고압전류 위험 무릅쓰고 사육장을 탈출했나」, 『동아사이언스』, 2018년 11월 21일.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25212 5) 데이비드 보이드, 이지원 옮김, 『자연의 권리: 세계의 운명이 걸린 법률 혁명』 (교유서가, 2020), 94쪽. 6) 앨러스데어 코르런 지음, 박진영, 오창룡 옮김, 『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 (창비, 2021), 11쪽 7) 시사기획 창, 개는 죄가 없다. https://news.v.daum.net/v/20210829225327190 2021년 8월 29일 방영. ‘시사기획 창’은 동물보호법 제정 30주년을 맞아 학대와 방치의 대상이 된 동물, 특히 그중에서도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 개가 처한 현실을 취재했다.​
2022-03-30 | hrights | 조회: 1095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