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윤 / 경찰관 범죄신고는 112, 화재신고는 119, 간첩신고는 111, 학교폭력신고는 117, 기타 등등... 출처 - 전자신문 112는 범죄피해자 또는 범죄를 인지한 사람이 신속한 경찰력 발동을 요청할 때 사용하는 범죄신고 전화번호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범죄를 중단시키고, 가해자를 검거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목격자 진술을 듣고, CCTV 영상을 확보하는 등 초동조치를 한다.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범죄와 관련 없는 불편이나 위험을 겪는 사람도 주로 112로 신고한다. 일단 신고받은 경찰은 우리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못 본 척할 수가 없다. 혹시 그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면 못 본 척한 이유로 비난받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 민원 중 상당수가 경찰과 소방에 집중되며, 24시간 근무체계와 빠른 출동이 목표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가장 말단의 민원처리 부서가 된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경찰의 역할이고 임무인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경찰 역할은 역사적으로 점점 축소되어왔다. 대학 시절 ‘경찰학개론’을 수강하면서 경찰 역사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까지 올라간다고 들었다. 동음이의어를 너무 막 갖다 붙이는 억지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도시국가가 주민을 위해 담당하던 국방, 외교, 재정, 치안, 사법 등 모든 사무를 폴리스라고 했단다. 그 후 중세와 근대로 넘어오며 전문성이 요구되는 국방, 독립성이 필요한 사법과 입법이 분리되었다. 절대군주 시대 행정, 재정, 외교, 왕실 수입 관리를 하는 관방이 치안까지 담당하였으니 관방도 경찰조직의 변화과정 중 하나란다. 점점 전문화・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외교, 재정 등이 별도의 조직으로 분리되고, 마지막으로 1980년대의 한국은 국민 안전을 담당하는 내무부가 치안사무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하였다.   출처 - 서울경제   36년 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흐름이었던 것 같다. 즉 경찰은 원래 굉장히 많은 국가 사무를 담당하였는데, 점점 국가 조직이 전문화, 분업화하면서 80년대 경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결론이다. 그때부터 36년이 더 지난 지금은 세상 변화의 가속화와 다양화를 고려할 때 역할이 훨씬 축소되고 집중되었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역할 아니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아마도 역사가 정반합 과정을 거치기 때문인 듯하다. 내무부 치안본부 시절 경찰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폭력적이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었다. 1991년 경찰청으로 독립하고 나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음을 보여주려다 보니 친절과 봉사를 강조했다. 파출소 앞에 우산을 비치하여 빌려주거나, 대학생 등교버스를 제공해 주거나, 소포 심부름을 하거나, 전의경들이 관내 불우한 학생 과외를 해 주는 것이 우수한 특수시책이 되었고, 승진 사유가 되었다. 정작 국민이 원하는 것은 경찰이 필요한 곳에서 공정하고 성의있게 제대로 일해 주는 것이었을 텐데, 그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이벤트가 더 우선하였고, 그 방면에 집중한 경찰관이 승진도 잘했다. 경찰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 30년간 이런 정→반 방향으로 흘러왔다. 게다가 경찰관직무집행법상 경찰의 직무 1호는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 보호’라고 되어 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지는 규정에 없다. 경찰이 지금의 인력과 장비, 권한만으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특히 기후변화로 자연재해가 증가하는 요즘, 112신고를 받고 가장 먼저 위험한 현장에 출동하고는 있으나 자치단체만큼의 인력과 예산이 없어서 모든 곳을 조치할 수 없고, 소방이 가진 구조장비도 없으며, 경고, 억류, 피난 외에 다른 강제할 수 있는 권한도 없어서 교통 통제 및 주민 대피마저 쉽지 않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거나, 물건이 없어졌다거나, 술 취한 사람이 난동을 부린다거나, 친구가 자살하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연락이 안 되어 경찰이 필요하다는 112신고는 계속된다.   출처 - 연합뉴스   이제는 반→합으로 흐름이 변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경찰의 과학화, 전문화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정할 때가 되기도 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은 1953년 제정된 이후 큰 틀의 변화 없이 약간씩만 보완적으로 개정되었다. 이제는 경찰의 직무 범위에 대해 다시 고민할 때다. 112가 범죄신고이니 경찰의 제1호 임무를 「‘범죄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재산 보호」로 구체화하여 법을 개정하면 좋겠다.(예: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1조에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한다고 구체화) 경찰의 직무를 ‘범죄로부터’라고 한정해야 경찰력을 정치적으로 사용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한다. 특히 국민 안전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책임을 규정해야 책임 기관이 집중적으로 성의를 다하여 위험 예방과 대응조치를 하게 된다.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한 후에야 책임질 누군가를 찾아 처벌하는 것으로만 마무리되면 앞으로도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2023년에도 안전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한숨이 나온다.  
2023-08-16 | hrights | 조회: 715 | 추천: 7
박록삼 /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폭염의 무서움만큼이나 바늘로 찌르는 듯 콕콕 쏘아대는 햇볕이 매섭다. 집 밖을 걷다가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보이면 어떻게든 신세 지며 걸어보려 애쓰기 일쑤다. 이 날씨에 산책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한 주일이 복판인 수요일의 산책이라니…. 여전히 텁텁하나마 조금은 누그러진 여름밤 저물녘 터벅거리는 산책이라면 그나마 낫겠다. 분주한 거리이건, 한강길이건, 북한살 둘레길이건 남다른 시원함이 있다. 왠지 한 걸음 떨어져 사람과 세상 생각할 수 있어 좋고, 부질없는 고민으로 가득한 머리를 조금씩 비워낼 수 있어 나쁘지 않다. 처음으로 수요산책을 서성거리는 이의 쓸데없는 서설이다. 새만금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잼버리 대회를 둘러싼 논란이 무성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속 4만 5000명의 청소년들이 허허벌판에서 야영을 하며 지내기에 턱없이 열악한 설비, 급식 시설, 위생시설 등 준비 부족에 대한 지적들이다. 온열환자가 수백 명 속출했고, 코로나19 감염자들마저 발생한데다 성범죄 이슈까지 나왔다. 핵심 참가국인 영국, 미국의 참가자들이 연신 대회장을 떠나니 다른 국가의 참가자들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언론을 통제하려 한다는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출처 - 민중의 소리   스카우트 자녀를 둔 전세계 학부모들의 걱정거리로 떠오르면서 ‘대한민국 국격 추락 행사’ 등 비난과 불만이 폭주했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실에서는 “지금은 책임 문제를 거론하기보다 행사를 잘 끝내야 한다”면서도 “전임 정부에서 5년 동안 준비한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어쨌든 윤석열 대통령이 “현장의 문제점을 모든 정부가 총력을 다해 즉각 해결하라”고 지시하며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체부 장관 등 국무위원들이 현장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새만금 젬버리 대회 주관방송사인 KBS는 대회 시작 하루 전 6000억원 경제 효과 등을 소개하는 보도를 했고, 이튿날에는 스카우트 출신의 세계적인 생존전문가 베어 그릴스 참가 소식을 전하며 화제성 보도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운영상 문제점 등에 대해 시설 준비 등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자 비판 보도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출처 - youtube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가 국가적 거대 행사에 그 의미, 정당성, 향후 과제를 꼼꼼히 분석해서 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게다. 이는 당대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국정홍보를 하는 것과 궤를 달리하는 일이다. ‘김비서(KBS의 별칭)가 알아서 정부에 긴다’는 식의 비난은 억울할 일이다. 물론 이와 더불어 국가와 관련된 이슈에 문제가 드러났을 때, 혹은 구조적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에 대한 지적 및 개선 보완을 위한 취재 보도를 하는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하다. 공영언론이라 함은 언론사 소유 구조 또는 경영 방식에 대한 개념만은 아니다. 언론이 공공성, 시민 책임성, 정치 독립성 등등의 가치와 원칙 속에 국가적 아젠다, 시민적 아젠다를 다룰 때 상업적 이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보장하는 대원칙의 구현 형식인 것이다. 출처 - SBS뉴스   월 2500원 수신료의 법적 의미 또한 그 위에서 존재한다. 영화 티켓 값 혹은 넷플릭스 컨텐츠 이용요금 등과 달리 KBS를 봤기 때문에 내는 시청료가 아님은 자명하다. 하지만 늘 여야간 공수 교대되는 정치적 공격에 의해 이 근본적 개념과 원칙은 헷갈려지기 일쑤며 정서적 반감에 부닥치곤 한다. 41년 동안 제자리 걸음인 수신료 인상은 KBS의 숙원 과제였지만 번번이 좌절됐던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오히려 거꾸로 이번 정부에서는 전기요금과 합산 고지되던 수신료를 아예 분리 징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담은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여당 고위관계자는 마치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출처 - MBC뉴스 youtube   정부 입장에서 일방적이고 졸속적으로 추진하는 배경은 분명하다. 입 안의 혀처럼 굴어야 할 KBS의 보도가 영 시원치 않거나 못마땅한 탓이다. KBS 내부의 원인도 명확할 것이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으로서 수행해온 역할과 과제에 대한 성찰 부족 및 평가와 혁신이 부족한 탓일 테다. 언론의 공공성을 제대로 충실히 수행하고 있느냐는 존재 필요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 앞에 국민들을 이해시킬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해온 탓이다. 다시 폭염 속 젬버리. 어떻게든 12일까지 명맥은 이어가겠지만, 파행 자체는 막을 수 없게 됐다. 더 이상의 실질적 피해가 없길,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후진국가의 모습으로 남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KBS 수신료 분리 징수 역시 국무위원회를 통과한 만큼 현실이 됐고, 향후 수신료 수입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며 현실적 파장이 KBS를 덮치게 됐다. 공영방송의 존립 근거 및 수단이 사실상 없어지는 일임에도, 그래서 공영방송의 공적 책임이 형해화할 위기임에도 졸솔적인 준비로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젬버리 대회가 그랬던 것처럼 공영방송의 망가짐 역시 책임과 탓을 논하기 전에 공영방송의 필요성과 역할, 그리고 운영 근거와 방법에 대한 차분한 사회적 논의를 진행해야 할 때다. 엎질러진 물이라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주워 담아야 한다.  
2023-08-10 | hrights | 조회: 666 | 추천: 5
황문규 /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그에 의한 1년여의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을 넘어 검사의 나라, 검찰국가, 검찰독재정권 등으로 불리우는 처지에 내몰렸다. 지난 정부의 검찰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도 딱히 반론도, 관심도 없다. 필자는 경찰개혁에 이어 이번에는 검찰개혁에 대해 복기하는 내용의 칼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문득  무소불위의 검찰은 엄밀히 말해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게 다 검찰 때문이라는 생각은 현 상황에 대한 희생양을 만들어 위안을 줄지는 몰라도 과연 정확한 진단일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혹시나 싶어 간단히 검색했는데 역시나 비슷한 생각이 있다(이재성, 이게 다 검찰과 언론 때문이라는 생각, 인권연대 세상읽기의 발자국 통신). 그래서 후속 칼럼이라는 생각으로 제목을 정하였다.   출처 - YTN뉴스 검찰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첫째, 지금껏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던 검찰의 특수활동비 등 예산집행 내역이 공개되고 있다. 이를 이끈 하승수 변호사는 이번 공개가 “검찰을 '특권적 권력 집단'에서 ‘보통의 행정기관’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한다(시사IN, “검찰 특수활동비, 폐지하거나 줄여야”). 예산의 투명한 집행 여부가 본격적인 감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특권적 권력 집단이라는 견고한 둑에 구멍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공감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그들만의 둑을 얼마나 견고하게 구축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이 명백하다.   출처 - 국민일보 둘째, 2020년 2월 4일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요건이 달라져 2022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즉, 피고인이 법정에서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내가 진술한 대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진실과 다르다’는 취지의 의견을 표시하면, 판사는 그 피의자신문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그 내용이 진실과 다르다고 부인해도,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피고인이 진술하는대로 기재되어 있는지 등의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증거능력이 인정되었다. 검사가 조서를 어떻게 작성하느냐가 재판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약 14시간의 검찰 조사 후 ‘7시간’ 넘게 피의자신문조서를 열람한 이유다. 이제부터는 검찰에서의 진술이 아니라 그 진술이 진실인지 여부에 대한 피고인의 법정 진술에 따라 증거능력이 결정된다. 검찰이 조서로 재판의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이다.   출처 - 코람데코닷컴 셋째, 경찰수사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물론 형사소송법은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경찰수사에 대한 검사의 보완수사요구권·시정조치요구권 및 재수사요청권 등으로 대체하여, 경찰수사에 대한 검사의 개입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경찰의 수사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수사지휘권을 매개로 경찰이 검사의 연장된 팔로서 검사의 수사를 대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제한적이나마 경찰에게 수사종결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제 검사의 수사와 구별되는 경찰의 독자적 수사가 존재하고, 그만큼 경찰수사에 대한 검찰의 영향력이 제한된 것이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에 대한 당시 경찰의 독자적 수사는 2011년 제1차 검경수사권조정 이후였기에 가능했다. 또한 경찰수사에 대해 검찰이 합리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때 남는 후폭풍은 결코 간단치 않음을 시사한다. 최근 법무부에서 수사준칙 개정을 통해 경찰수사에 대한 검찰의 직접보완수사의 가능성을 높이는 등 검찰 직접수사의 범위와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는 현행 법률을 실무적으로 보완한 정도에 불과하다. 필자가 보기에 2020년 제2차 검경수사권조정으로 낮아진 검사의 낮아진 책임감을 제고하는 차원에 불과할 뿐 본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제2차 검경수사권조정 이후 검찰실무에서는 직접수사 개시 사건의 축소, 경찰수사에 대한 직접보완수사의 축소 등으로 ‘업무적으로 좀 편해진’ 반면, 수사에 ‘책임을 질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는 자조섞인 목소리가 있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른바 시행령 통치의 한계다.   출처-한국기자협회 넷째, 그간 검찰의 수사권과 소추권이 검사의 헌법상 권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검찰 입장에서는 검찰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심리적 둑으로 작용했던 ‘검사의 헌법상 권리’가 2023년 3월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전면 부정되었다. 헌법에 검사의 영장 신청이 명시되었다는 점만을 근거로 검사의 수사권은 물론 소추권까지도 헌법적 권리라는 (억지) 해석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형사사법체계를 개편하여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느냐, 그래서 형사사법선진화로 나아가느냐의 문제는 국회 입법에 달렸다. 그럼에도 검찰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검찰의 힘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는 별개로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검찰에는 여전히 제한된 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 등이 있다. 게다가 견제장치는 불충분하다. 검찰의 수사·기소에 정치편향성이 더해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있고, 그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설사 지난 정부에서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개혁까지 나아갔다고 해도, 수사권과 기소권은 누군가 또는 어느 조직에 의해 오남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펼쳐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은 더더욱 검찰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작금의 문제는 미국 예일대 후안 린츠(Juan Linz) 교수가 30여년 전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자체로 이미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대통령제의 위험성(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이 절제없이 표출되고 있는데서 찾아야 한다. 대통령제의 문제는 정치(학)의 영역에서 적극 다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인권연대 주최 검찰개혁 형사사법선진화 토론회 모습 다시 검찰개혁의 문제로 돌아오면, 우선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을 다시 점진적으로 축소·폐지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되, 경찰의 수사역량을 제고하는 정도를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 축소·폐지는 검찰의 직접수사 인력과 조직, 그리고 예산의 축소·폐지를 수반함과 동시에 검찰의 직접수사를 대신하는 조직(경찰, 공수처 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업무적으로 좀 편해진’ 최근의 검찰과 달리, 누적된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수사부서를 기피하는 수사경찰로 대한민국 전체 수사역량의 저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수사-기소를 배분하는 법률의 개정은 최근 급격한 제도변화에 따른 미세문제를 조정·보완하는 선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바를 고려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수사-기소의 완전 분리이어야 하는가는 재고되어야 한다. 오히려 공수처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우선이다. 조직과 인력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제대로 된 공수처장이 임명되어야 한다. 검사 출신을 굳이 배제할 이유가 없다. 한편 검찰개혁은 경찰의 수사역량 제고, 비대해진 경찰권의 실질적 분산 등 경찰개혁과 맞물려 추진되어야 한다. 경찰이 ‘또다른 검찰’이 되지 않으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파쇼보다 경찰파쇼를 더 우려해야 했던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와 달리, 지금은 검찰 파쇼를 더 우려하여 수사-기소 분리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역사는 정반합으로 변증된다고 한 헤겔의 주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2023-08-01 | hrights | 조회: 888 | 추천: 8
만시지탄, 영아살해죄 폐지 서보학 /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주 국회에서 형법의 영아살해죄를 폐지하는 형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최근 줄을 잇고 있는 영아살해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형법에서 영아살해죄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앞으로 영아살해죄를 일반 살인죄로 취급하겠다는 의미이다(새로운 법의 시행은 공포 6개월 후이다. 또한 이번에 영아유기죄도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영아유기도 일반유기죄로 처벌된다). 그동안 형법은 영아의 목숨을 일반인의 목숨과는 달리 취급하고 있었다. 생명은 형법의 모든 법익 중 최상위의 법익이다. 사람 각자의 생명은 고유한 존재가치가 있어서 상하귀천이 있을 수 없고 타인의 생명과 비교교량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생명의 가치는 그 자체로 귀하고 독보적이기 때문에 인종, 국적, 나이, 성별, 빈부, 사회적 지위나 역할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의 생명에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영아와 성인의 생명에도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형법은 일반 살인죄의 경우 5년 이상의 유기형, 무기, 사형으로 처벌함에 반하여 영아살해죄의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훨씬 가볍게 처벌하고 있었다.   출처 - 모두서치뉴스  영아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생명의 가치는 똑같은데 왜 이렇게 달리 취급하였던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형법이 제정된 1953년부터 영아살해죄 규정이 존재하였다. 외국에서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영아살해죄 감경규정을 두고 있었으나 90년대 들어 폐지하였고, 마비키라는 영아살해의 풍습이 있었던 일본 형법도 영아살해에 대해 별도의 감경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반면 오스트리아 및 스위스 형법은 여전히 영아살해를 일반 살인에 비해 경하게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영아살해를 일반 살인에 비해 가볍게 처벌하는 이유는 산모를 포함한 직계 존속이 처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 및 영아의 개인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즉 영아살해죄는 사생아, 혼외자,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질환·장애를 가진 생명, 극심한 경제적 곤란 등의 사유 때문에 영아의 정상적인 양육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출산 직후 어린 생명을 살해하는 경우에는 성립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시간 유지되었던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여아를 살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러한 사유 때문에 영아를 살해하는 경우에는 산모와 직계존속에게 특별히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아 가볍게 처벌할 수 있는 별도의 감경규정을 입법자가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영아를 독립된 객체가 아닌 부모의 부속물로 보았던 권위주의 사회의 시각이 입법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노컷뉴스  생각해 보자. 영아는 부모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스스로는 반대의사나 저항의 몸짓 한번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런 영아를 보호자가 살해하는 것은 비난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중하게 처벌되어야 마땅하다. 직계존속에 대한 범죄를 패륜범죄로 보아 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성인의 보호 없이는 일순간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영아를 살해하는 것 역시 패륜범죄로 보아 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형법은 영아의 생명가치를 낮게 보고 영아살해를 가볍게 처벌하여 왔던 것이다. 순전히 성인의 사정 때문에 영아의 목숨을 뺏는 것을 일정 부분 정당화 시키는 것이 과연 용납할 수 있는 일인가?  이렇듯 지난 70년간 존치되어 왔던 영아살해죄 규정이 우리 사회에서 영아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성인의 곤란한 형편에 따라서는 빼앗아도 된다는 왜곡된 법의식과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하여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 최근 5년 법원의 재판에서도 영아살해ㆍ살해미수 사건에서 가해자의 절반이 집행유예로 풀렸났고 유기형도 대부분 3년 이하의 가벼운 형이 선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살인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관대한 처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아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면 이는 필연적으로 영아유기 및 아동 학대의 증가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매년 로스쿨에서 형법각론의 영아살해죄를 강의할 때마다 학자로서, 성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생명에 대한 침해를 가볍게 여기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인간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생명 존중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시지탄이지만 영아살해죄의 폐지에 백번 찬성한다.  다만 영아살해죄의 폐지는 현시점에서 국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비용이 들지 않는 저렴한 조치에 불과하다. 예상컨대 국회는 이것으로 자기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영아살해죄의 폐지는 영아들의 생명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다. 후속조치가 계속 이뤄져야 한다. 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국회의 심각한 직무해태,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이다. 출처 - 의협신문  우선 국회에서 낙태죄에 대한 후속 입법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기존의 낙태죄 규정이 태아 보호에만 치우쳐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까지 낙태죄 규정을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국회는 현재까지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 미국의 낙태죄 논쟁에서 보듯이 새로운 낙태죄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우 격렬한 사회적 논쟁이 예상되기 때문에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낙태죄 규정은 효력을 상실하였고 낙태는 불법도 합법도 아닌 상황에 놓여 있다. 낙태는 처벌도 받지 않지만 합법적인 의료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임부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많은 사비를 들여 낙태하거나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임부들을 비의료적인 방법으로 위험한 낙태를 시도하고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낙태를 포기하여 영아를 출산한 뒤에 살해 및 유기로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임부들을 위험한 낙태, 원치 않는 영아 출산과 영아살해ㆍ유기로 내몰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국회는 하루빨리 공론화 과정을 거쳐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균형 있게 보호할 수 있는 낙태죄 규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정부와 국회는 임부들이 가능한 한 태아의 생명을 지키고 영아를 출산해 건강하게 키울 수 있도록 사회적ㆍ문화적ㆍ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임부들이 태아ㆍ영아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출산과 양육에 따른 부담을 사회가 함께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출생통보제ㆍ보호출산제의 도입 논의도 장단점을 고려해 적정한 방법으로 도입을 서둘러야 하고 위탁가정제도의 활성화 방안 등도 마련되어야 한다. 강한 처벌만으로는 영아의 생명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사회 전체,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서야 한다. 영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것은 하늘이 우리 어른들에게 내린 신성한 의무이다. 이번 형법 개정이 그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끝.  
2023-07-24 | hrights | 조회: 1036 | 추천: 11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대표     출처 - 뉴스핌 1. 과학적 사실의 정치적인 오염 일본 핵 오염수 해양 방출 문제를 놓고서 ‘과학적’이라는 용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가만히 그 담론을 살펴보면, 방출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도 방출에 관한 판단과 실행이 진정으로 과학에 근거한다면, 방출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논쟁의 핵심은 (1) ALPS 즉 다핵종제거장치가 과연 핵 오염수의 모든 독성을 제대로 정화할 수 있는가? (2) 그 여부를 과연 과학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가? (3) 그 여부의 과학적인 확증을 과연 IAEA 즉 국제원자력기구가 수행할 수 있는가? 등이다. 해양 방출을 강행하려는 일본을 위시한 IAEA의 입장은 이러한 논쟁점들에 관해 모두 긍정적이다. 말하자면, 이 논쟁점들에 대해 과학적인 사실로써 ‘그렇다’라고 입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해양 방출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 논쟁점들에 관해 모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말하자면, 과학적인 검증을 위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절차가 객관적으로 공개된 바가 없고, 결과의 보고 과정에 의문점들이 많아 위 논쟁점들에 대해 ‘그렇다’라고 확언할 수 있는 ‘과학적인 사실’이 확보된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 ‘과학적 사실’이 지닌 실천적인 위력을 인정하고 있다. 즉, 진정 과학적으로 사실이 그러하다면, 핵 오염수가 충분히 정화되었으니 해양에 방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고 할지라도 해양에 방출하지 않고 국제적으로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육지에서 처리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 않으냐, 하는 반대하는 쪽의 대안 제시는 해양에 방출하고자 하는 일본의 입장을 배척하지 못한다. 만약 위 논쟁점들에 대해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로써 충분히 긍정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해양 방출은 일본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위 논쟁점들에 대해 과연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결정적으로 의혹을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적 사실이 순수하게 성립하려면 정치적인 개입이 아예 충분히 배제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 하는 것이다. 만약 일본이 핵 오염수 해양 방출을 결정한 바가 정치적인 의도에 따른 것이라면, 그 정치적인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과학자 집단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혹을 잠재우기는 결단코 쉽지 않다. 하필이면 핵 오염수 해양 방출이 실행되면 가장 피해를 많이 보리라 예상되는 한국의 대통령과 여당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반대하는데도 일본의 결정이 충분히 순수한 과학적 사실에 따른 것이니 허용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방출에 반대하는 한국민의 80% 이상의 국민이 비과학적인 이른바 ‘괴담’에 잘못 휩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한국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과학적 사실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바 자기 공격적 · 자가당착이다. 최고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와 여당이 미리 위 논쟁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정치적인 선전과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서는 힘없는 전문 과학자들이 학문적인 양심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고, 그래서 심지어 국내의 과학자들이 긍정의 의견을 주장하더라도 그 주장이 갖는 학문적 실효성이 현저히 저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IAEA를 대표하는 사무총장이 검증 보고서를 조용하게 일본 당국에 보내야만 할 것인데, 특별히 일본을 방문하여 보란 듯이 보고서를 일본 총리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건넸다. 그리고 여러 언론을 통해 보란 듯이 대서특필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으로 건너오기까지 하여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행보를 보였다. 이 모든 행위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따라서 과학적 사실을 충분히 오염시킨다. 결과적으로, 과학에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들조차 대다수가 IAEA 검증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순수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핵 오염수가 충분히 정화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셔도 해가 없고 그 물에서 수영해도 괜찮다고 역설하는 IAEA 사무총장이 힘주어 강변할수록 그 강변 자체가 아예 정치적이기 때문에, 그 발언 역시 자기 공격적 · 자가당착이다.   출처 - 환경운동연합 2. 과학의 한계와 불완전성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과학 내지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맹신이다. 이는 ‘순수한 과학적 사실’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과학은 과연 본래부터 진리 내지는 진실을 제대로 산출하는 역량을 갖춘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과학이 갖는 한계를 무시하는 과학자는 얼마나 될까?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과학이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많이 갖추게 될 거라고 믿는 과학자들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궁극적으로 진실을 완전히 규명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은 없다. 본래부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반 대중에게 필요한 진실 정도는 과학이 만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할 뿐이다. 예를 들어, 기상학의 발달로 인해 기상 예보의 정확성이 이전보다 상당히 높아지긴 했지만, 전혀 어긋남이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의학의 발달로 인해 많은 질병에 관해 그 원인을 상당 정도 파악하긴 하지만 그 원인의 전모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학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핵 과학의 영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핵 과학은 근본적으로 극미한 소립자의 세계를 다룬다. 당연히 상대성 이론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을 통해 그 세계를 탐색하여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극미한 사건들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한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방사능물질의 종류 즉 핵종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의 특성과 위력을 나름대로 파악했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내용을 완전하게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바 관련한 순수한 과학적 사실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모르긴 해도 양자역학의 기초인 불확정성의 원리, 양자 중첩과 양자 얽힘의 원리 등은 원자핵의 구성과 운동에 직접 적용된다. 이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확률적인 진실일 뿐 완전한 진실은 결코 아니다. 어떠한 돌발변수가 발생해서 지금까지 알지 못한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비록 분자생물학이나 유전과학 그리고 두뇌 과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생명체를 관통하는 생명의 원리는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못한 상태다. 다만, 유전인자가 생물체의 세포들의 짜임과 배치를 반복적으로 안정되게 결정하는 과정이 분자 이하의 수준에서 특히 미세 물질의 화학 작용과 각종 미세한 전자적인 이온화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여기에 원자핵의 분열에 의한 소립자 물질들이 극미량이라도 결합해 작동하면 돌연변이가 일어나 세포들의 짜임과 배치가 생물체의 항상성을 유지함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일어남으로써 각종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요한 사실은 원자 이하 수준의 극미한 세계가 생명체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아직 대처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개발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출처 - 동아일보   3. ‘순수한 과학적 사실’의 허구성 요컨대 과학이 전능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건 과학적인 상식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접근해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하나는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주장이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세계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생활세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문화로 이루어진다. 이는 문화에 따라 과학이 다른 방식으로 체계화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태를 철저하게 양화(量化)하기 때문에, 생활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질적인 내용들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는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1996)의 ‘패러다임’ 이론이다. 과학은 각 시대의 과학적인 환경에 따라 이른바 한 시대를 지배하는 정상과학을 규정하는 체계 자체 즉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중 어느 쪽이 더 옳은가를 본래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과학학자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다. 라투르는 순수한 과학적 사실은 허구라고 말한다. 과학적 사실의 확립에는 반드시 정치적인 측면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논거로 제시한다. 그는 과학 역사를 보면, 어느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사실로 정착하는 데는 논문 발표를 둘러싼 제도, 실험실의 구성과 운영 방식, 과학자 집단 내의 동맹관계, 이해관계의 그룹의 정치 경제적인 영향, 환경의 시급성에 따른 비인간적인 대상들의 동맹 등이 긴요하게 작동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순수한 과학적 사실은 원리상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수한 과학적 사실의 존재를 맹신하는 태도를 과학주의라고 부른다. 과학주의는 우리 인간들의 구체적인 생활세계를 오히려 착각에 의한 허구 ― 요즘 유행하는 ‘괴담’ ― 라고 몰아붙인다. 그리하여 건전한 합리적인 상식조차 무시하면서 진실 싸움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오늘날 첨단 고도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더 크게 동력을 얻고 있다. 과학주의는 과학은 전능하고, 과학에 따라 만든 기술은 완전하고, 이를 부정하면서 인간 고유의 영역을 주장하는 자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과학기술로 대처할 수 없는 대재앙의 도래를 목도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핵 과학기술의 오남용으로 인한 파국이고, 그 파국의 예가 원자탄의 투하, 체르노빌 원자로의 폭발, 그리고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이다. 그 부작용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은, 그나마 노골적으로 정치적으로 오염된 과학적 사실을 순수한 과학적 사실로 내세워 그야말로 일부 집단의 정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핵 오염수 해양 방출을 결정해 강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결국은 정치적인 투쟁으로 귀결된다. 과학주의로 무장한 일부 정치 세력과 건전한 합리적인 과학과 상식으로 무장한 다수의 정치 세력 간의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을 마치 과학과 괴담의 투쟁인 양 프레임을 만들어 그 속에 건전한 상식을 가두려고 하는 정치적인 술책이야말로 무지와 이익이 결탁하여 만들어낸 괴담임에 틀림이 없다.  
2023-07-18 | hrights | 조회: 666 | 추천: 5
이재환 /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요사이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에 대한 문의와 함께 전통시장상품권인 온누리상품권에 대한 질문도 늘고 있다. 지역화폐의 효능감을 인지한 소비자와 소상공인 가맹점들이 온누리상품권 이용 방법이나 가맹점 신청 방법을 묻는 것이다. 지역화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에는 지역화폐를 설명하며 온누리상품권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지역화폐와 온누리상품권은 한 때 경쟁관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온누리상품권의 주요 사용처인 전통시장에서 지역화폐 도입을 크게 반발하였다. 온누리상품권 사용자들이 지역화폐로 갈아타 전통시장이 아닌 곳에서 소비하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였다. 지역화폐와 온누리상품권   그럴 법한 우려였지만 반전이 벌어졌다. 포항시가 지난 2019년 연구용역을 통해 포항사랑상품권 유통 대비 온누리상품권 발행량을 조사해 보니 온누리상품권 사용량도 크게 늘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막상 뚜껑을 열자 우려는 사라지고 지금은 지역화폐가 온누리상품권 활성화의 걸림돌이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지역화폐와 전통시장상품권은 각각 지역경제 활성화와 전통시장 및 골목상권 살리기라는 목적에서 교집합을 이루며 서로 번영할 수 있다는 실증을 거친 상태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해부터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지원은 전액 삭감을, 온누리상품권에 대한 지원은 대폭 확대하고 있다. 지역화폐는 지자체 고유사무이며 경제 활성화에 대한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반면 온누리상품권은 골목상권 활성화란 목적으로 지원 규모를 대폭 늘렸다. 지역화폐는 안되고 온누리상품권은 도움이 된다? 정부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근거는 제각각이다. 이를테면 모 국책기관에서는 지역화폐가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한 광역지자체 연구용역에서는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서로 상반된 결과를 내놀고 있다. 온누리상품권은 구체적인 성과분석 자료가 잘 안 보인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현장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7월 9일자 경기일보 기사 <예산 줄자 지역화폐 인기 '시들'… 정부가 밀어준 온누리상품권은 실적 저조>에 따르면, 지역화폐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인센티브율이 줄자 올 1~5월 경기지역 31개 시군의 지역화폐 발행액이 전년 동기 대비 평균 13.7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정부가 예산을 늘려 활성화를 시도한 온누리상품권은 판매 실적이 저조해 정책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실정이며 지역화폐·온누리상품권의 사용처인 전통시장 상인들의 볼멘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는 “많이 쓰이는 지역화폐는 예산을 줄여 주춤해지고, 반대로 예산을 늘린 온누리상품권은 소비 진작 효과가 적어 상인들을 중심으로 볼멘소리가 나온다. 고물가·공공요금 인상 등으로 운영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실효성 없는 정책을 내놨다는 게 주된 이유다. 더군다나 정부가 내년도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상인들의 불만은 이어질 전망이다”라고 설명했다. 온누리상품권이 생각만큼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용처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온누리상품권은 전국의 전통시장 및 등록 상점가 중 온누리상품권 가맹점으로 신청·등록된 곳이 사용처이다. 현재 전국 전통시장 가게 중 절반 정도는 온누리상품권 가맹점이 아니다. 지역화폐가 전국적인 활성화 움직임에 힘입어 전통시장은 물론 골목상권 곳곳에서 가맹점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는 과연 온누리상품권이 지역화폐를 대신해 골목상권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까? 비슷한 목적을 가졌지만 지역화폐는 안되고 온누리상품권은 된다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굳이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동시에 온누리상품권 지원은 대대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큰 의문이다. 지역화폐 지원 중단을 ‘정치적 목적의 무용론 전파’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그런데 재밌는 현상은 정부의 시그널이 지역화폐 활성화와는 반대의 지점에 있음에도 지자체 차원에서 반대의 길을 걷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예산이 줄어든 만큼 자체예산을 투입하거나 더 많은 예산을 들어 인센티브를 늘리는 지자체가 속속 나오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들 상당수가 여당 소속 단체장이 재임 중인 지자체란 점이다. 지자체의 입장에선 민생 현장의 이해와 요구를 정책과제라고 그냥 외면하기 힘들다. 사용자야 말할 것도 없고 정책의 최우선 대상인 소상공인들이 입을 모아 지역화폐 활성화 요구를 쏟아내는 현실에서 정부의 방침은 속 답답한 이야기일 수 있다. 당장 내년에는 총선도 맞아야 한다. 현장에 답이 있다. 지역화폐든 온누리상품권이든 골목상권 활성화라는 목적은 같다. 때로는 적절히 혼합하고 때로는 집중하면서 그 쓰임에 맞게 활용하면 된다. 지금처럼 중구난방의 지역화폐 효과분석을 넘어 객관적인 연구결과를 도출하여 적절한 정책 지원을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화폐를 정치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재단하는 어떤 시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지역화폐가 현장의 신뢰를 받으며 묵묵하게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2023-07-11 | hrights | 조회: 540 | 추천: 1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출처 - 대학뉴스 1. 우연한 기회에 운 좋게도 친구들과 사진전을 연 적이 있다. 아마추어 사진가 네 사람이 어울려 벌인 이 작업은, 나의 미숙한 사진을 확인하는 두려운 작업이었지만 무언가를 성취한 것 같은 기대감이 섞인 설레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그때 우리는 각자의 사진을 고르면서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 아주 낯선 모습과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이기도 했고 머나먼 낯선 이국땅에서 맞닥뜨린 우리와 같은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낯설거나 익숙한 이 풍경들은 그대로 우리 사진전의 주제가 되었다.   출처 - 프라임경제 2. 어릴 적에는 들판을 가로질러 저 너머 세상은 어떤 걸까를 궁금해했다. 좀 더 커서는 저 산을 넘어가면 무엇이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고, 어른이 되면 저 너머 세상을 갈 수 있는 건가, 어떤 세상인지 알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였다. 어른이 되어 환상에 머물던 세계에 들고 나니 무엇인가 시시해졌다. 좀 더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세상이 있을 것만 같은데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에는 나이만 먹어간다는 공허감으로 몸살을 앓던 즈음, 그냥 막연히 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다. 창공을 차오르는 새의 그 거대한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간이 지나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고 파아란 하늘 위로 내 몸을 띄웠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그렇게 날아오르니 땅이 발아래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슴 뻐근한 벅찬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러다 나무꼭대기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내기도 했지만. 당황한 교관들이 뛰어오고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그러는 동안에도 흥미진진한 모험 가득한 세상에 있는 희열 같은 것을 느꼈다. 물론 무사히 나무꼭대기에서 내려왔다.   3. “화장실 변기 물은 어떻게 내리나요?” “발로 내리죠.” “에, 왜 발로~?” 당황한 진행자가 말문을 잇지 못하면서 되물었다. “더러워서요!” “그럼 다음 사람은 어떻게 하죠?” “다들 발로 내리지 않나요?” 뉴스 대신 보고 있는 팟빵 시사 프로그램에서 본 대화이다. 며칠 뒤에 모임이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한테 물어봤다. “화장실 변기 물은 어떻게 내리나요? 첫째, 손으로 그냥 내린다. 둘째 손에 휴지를 쥐고 내린다. 셋째, 발로 내린다.” 사람들은 “발로 내린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손으로 내리고 나와서 물로 닦거나, 손에 휴지를 쥐고 내린다고 대답하였다. “어떻게 발로 내리지?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되묻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오십대 중후반의 사람들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발로 내린다고 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발로 내리는 걸 목격했다고 하였다. 4. 나는 아이들의 수능을 고민하는 것만큼 아이들이 맘껏 놀 수 있는 교육 정책을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혈기왕성한 시절에 즐길 수 있는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모험과 탐험을 즐기고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을 고민하는 어른들이 아주아주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서 그때 패러글라이딩 교관이 한 말은 지금도 따끔하게 들린다. “우리나라는 아이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패러를 많이 해요. 그래서 외국의 패러하는 사람들과는 아주 달라요. 나이 든 사람들은 아무래도 새로운 걸 한다는 도전 정신보다는 새로운 걸 체험하는 것에 만족하거든요(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도전이라든가 모험심이 덜 하죠. 그런데 패러글라이딩은 비용이 많이 드는 거라 젊은이가 하기가 쉽지 않아요. 외국에서는 학교 동아리라든가 마을 단위의 공동체에서 지원을 해요. 장비를 개인이 마련하기보다는 공동장비로 준비하는 거죠. 그래서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하니까 젊은 사람들도 맘 놓고 즐기는 스포츠가 되는 거죠. 우리와는 다르죠. 우리는 그저 개인적으로 즐기는 고가의 취미라고 생각하니까….” 5. 변기 손잡이를 발로 내리는 것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아주 낯선 풍경이다, 그 명칭이 물 내리는 손잡이라면, 발로 내리는 행위는 손으로 내리는 행위와 다른 게 아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 간의 세대 차이가 아니다. 그건 어느 세대이든 잘못된 행위인 것이다. 변기 물을 발로 내려야 한다면 그 위치를 발로 내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힘겹게 발을 들어서 내릴 것이 아니라 손잡이를 발잡이가 되게 옮겨 달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더러워서 발로 내릴 게 아니라 깨끗하게 쓸 수는 없는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손잡이가 더러워서 발로 내린다면 다른 환경은 더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6. 사진전에서 내가 본 낯설거나 익숙한 세상은 풍경이었다. 이국땅에서 만난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그늘진 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는 할아버지와 손자이거나, 지금은 폐허가 된 어느 마을이거나. 그리고 그 풍경은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그리움 같은 것이다. 오늘 새로운 풍경이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다. 그 풍경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더 낯선 풍경을 만들어내는 삶이 아니기를….
2023-07-11 | hrights | 조회: 513 | 추천: 3
이 윤 / 경찰관   법치주의(法治主義)라는 말은 한자 때문에 그 뜻을 오해하게 되는 대표적 사례다.   법치주의란 ‘국가가 자의적으로 국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법이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통제하게 한다(rule of law)’는 원리다. 법치주의 원리에 의하면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때는 법률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처럼 법률만으로 무조건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형식적 법치주의) 안 된다. 그 법률도 기본권 보장과 실질적 평등 추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적정하고 합법적이며 정의로운 법률이어야(실질적 법치주의) 한다.   출처 - jagran josh   그러나 법치주의라는 한자를 직역하면 ‘법을 도구로 하여 다스린다(rule by law)’로 읽히기 쉽다. 그러다 보니 ‘국민은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 강조의 의미로 법치주의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 다스릴 치자를 좀 다른 한자로 바꿔쓰면 좋겠다. 차라리 ‘법의 지배 원리’라고 풀어서 쓰면 의미가 더 정확하게 전달되겠다. 법치주의를 의미하는 독일어는 ‘Rechtsstaat’인데, 독일어 문맹인 내가 보더라도 ‘법+국가’인 듯하고, ‘治’는 들어갈 구석이 없다. 설마 중간에 s가 治는 아니겠지. 도대체 ‘治’를 누가 어디서 가져다가 붙여 놓았는지 모르겠다. 헌법이나 법철학 공부를 따로 하지 않으신 분들은 한자를 직관적으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딱 오해하기 쉽다. 진나라 상앙의 이목지신(移木之信) 고사도 이런 오해에 한몫했을 것이다.   상앙은 진나라 효공을 도와 여러 법령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행하기 전에 백성들이 법령을 잘 따르게 할 방법을 고심하였다. 하루는 도성 남문 앞에 크고 무거운 나무를 놓고 옆에 방을 붙여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10금을 주겠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다음 날 50금을 주겠다고 고쳐 쓴 방을 붙였다. 누군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 나무를 북문까지 옮기자 정말 50금을 주었고, 그 후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이 조정을 믿고 잘 따랐다고 한다.   나는 법치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이 고사가 먼저 떠오른다. 아마 어릴 적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심리적 오류 중 ‘가용성 휴리스틱’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 걱정스러운 것은 많은 정치인과 법조인이 나처럼 이 고사를 먼저 떠올리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터넷상 많은 글이 ‘상앙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책을 써서 진나라가 천하통일 할 수 있는 기틀을 닦은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니 헷갈리는 것도 당연하다. 춘추전국시대의 법치주의는 백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부 권력자가 통치 수단으로 법을 만들어 활용한다는 것이어서 현대 민주국가의 법치주의와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런데 아직도 2,400년전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건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국민을 대표하여 법 만들고 행정부 감시하라고 뽑아 놓은 국회의원을 지역 영주나 높은 벼슬아치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러 언론 기사에 나타나는 ‘법치주의’의 용례는 상앙의 법치주의에 가깝다.   출처 - 경향신문   「경제계가 노조원의 손해배상 책임 정도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민법의 기본 원칙을 부정하고 산업현장의 법치주의 근간을 무너트렸다”고 주장」(강원도민일보, 23. 6. 20.)   「TV 토론에서 경제학 전공자인 한 논객이 '법치주의'를 말했다. 그러자 판사 출신인 상대방 토론자가 "동의한다. 성숙한 시민사회로 가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화답하는 것을 보고 경악...」(대전일보, 23. 6. 12.)   「법무부가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서에서 ...(중략)... 이 법이 법치주의의 원칙을 위배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후략)」(프레시안, 23. 6. 20.)   여러 대신들과 설전을 벌이는 상앙(출처 - 네이버블로그 세상사는 이야기)   어릴 적 상앙의 고사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지점은 그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였다.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 상앙에게 형벌을 받고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이 일제히 ‘상앙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상앙은 급히 도망쳐 함곡관에서 여관에 묵으려 했다. 여관 주인은 “상앙의 법에 의하면 증명서 없는 사람을 재워주어도 벌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상앙은 “아, 내가 만든 법이 나를 옭아매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결국 상앙은 진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되어 시체마저 거열형으로 찢어지고, 가족들까지 처형되었다.    
2023-06-27 | hrights | 조회: 759 | 추천: 14
황문규 /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최근 검찰, 경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정부의 권력기관 개편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렇다고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에서 언급된 “허망한 생각”에 이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성취’가 있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검찰국가의 탄생〉의 저자 이춘재가 제기한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에 진심이었나?’라는 질문에 수긍하는 면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검찰을 넘어 경찰, 국정원 등의 개혁에서도 과연 ‘진심’이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들기 때문이다. 출처 - MBC뉴스   우선 경찰의 경우를 살펴보자. 검경수사권조정에 따라 확대·강화된 경찰권 통제방안으로 수사경찰에 대한 행정경찰의 관여를 차단하고자 국가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개별 사건 수사에 대한 경찰청장의 구체적 지휘·감독권을 제한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수사지휘의 가장 기초가 되는 ‘수사보고’는 원칙적으로 금지 또는 제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찰청장은 수사보고를 통해 간접적인 수사지휘가 가능하고, 인사·조직·예산 등을 통해 국가수사본부를 장악할 수 있다. 게다가 경찰청장 이외 시도경찰청장, 경찰서장 등 행정경찰의 수사관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국가수사본부를 통해 수사경찰에 대한 경찰관서장의 (부당한) 개입을 차단한다는 당초 취지가 퇴색된 반면, 종래 치안감급 수사국장이 치안정감급 국가수사본부장으로 한 단계 격상되는 등 경찰조직이 확대되었다. 상명하복의 원칙이 강하게 작용하는 (수사)경찰조직의 국가수사본부장이 경찰수사권을 특정 정치이념이나 정치집단의 영향력에 따라 편파적으로 행사하는 등 궤도를 일탈할 경우의 폐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검경수사권조정의 반대편에서는 수사-기소분리에 이르지 못한채 ‘적당히 검경을 고려한 타협의 산물’에 머물러 검찰권을 견제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른바 검수완박을 부랴부랴 추진한 배경이다. 법을 집행할 행정부가 공감하지 않는 입법의 결과는 현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대로다.   지역실정에 맞는 치안서비스 제공과 경찰권의 지역적 분산을 도모한 자치경찰제는 국가경찰사무와 구분되는 생활안전・여성보호・교통 등 자치경찰사무만을 구분해놓고 이를 관장하는 자치경찰위원회를 설치해놓았을 뿐이다. 경찰법에서는 자치경찰위원회에 자치경찰사무와 관련하여 시도경찰청장에 대한 지휘·감독권과 자치경찰사무를 담당하는 경찰에 대한 인사권 등을 부여하고 있다. 겉으로는 ‘과도한 권한’을 보유한 기관이어서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이지만, 실상은 ‘대서방’에 불과할 정도로 유명무실하다. 오히려 자치경찰위원회는 부족한 (국가)경찰예산을 지자체에서 확보·조달해주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경찰은 자치경찰제 시행을 계기로 전국 시도경찰청에 17개 경무관급 자치경찰부장을, 자치경찰위원회에 전국적으로 17개 총경 직급을 신설하였다. 자치경찰제가 경찰권을 분산한 것이 아니라 탄탄한 경찰관료권력으로 성장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2022년 1월에는 경찰관직무집행법이 개정되어 살인 또는 상해·폭행의 죄, 아동학대범죄 등으로 타인의 생명·신체에 대한 위해 발생의 우려가 명백하고 긴급한 상황에서 경찰관이 그 위해를 예방·진압하는 등의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가 발생한 경우 일정한 요건 하에 경찰관의 직무수행에 대한 형사책임을 감경하거나 면제해주고 있다. 경찰청 인권위원회에서조차 면책 조항이 신설되면 경찰의 과도한 물리력 사용에 따른 인권침해가 우려된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속도감있게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최근 경찰청장이 캡사이신을 활용한 집회 해산 등 (불법)집회·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 방침과 더불어 진압 과정에서의 문제에 대해 ‘적극 면책’을 자신감있게 약속한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해 행안부 경찰국 설치 논란이 있었을 때, 일선 경찰은 경찰의 중립성 훼손을 우려하면서 국가경찰위원회의 역할 및 위상을 강화하는 실질화를 도모했다. (국가)경찰위원회의 실질화 방안은 이미 2017년 11월에도 제시되었다. 국무총리 소속 경찰위원회가 총경 이상의 승진 인사 및 경무관 이상의 보직 인사에 대해 경찰청장이 제출한 인사안의 심의・의결 및 제청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러한 실질화 방안도 경찰청이 요구한 인사안 등을 경찰위원회가 수동적으로 수용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에 불과하여, 대서방 수준의 자치경찰위원회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와 국회는 이마저도 내팽개치고, ‘국가’라는 글자만 추가하여 ‘국가경찰위원회’로 명칭만을 변경했다. 실질화는 없고 “경찰이 언제부터 중립을 지켰죠?”(2022. 8. 5.자 한겨레)라는 질문만 남겼다. 정작 중립성 훼손 우려를 야기했던 행안부 경찰국은 “그럼 행안부가 아닌 청와대가 통제하면 되느냐”(2022. 7. 1.자 중앙일보)는 반문으로 당당하게 출범하였다.   누구나 알 만한 최근 5년 사이 벌어진 (경찰)개혁을 둘러싼 파노라마적 장면들이다. 경찰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잠깐 개혁에 대한 집권자의 진심 여부를 떠나 과연 경찰 등 권력기관은 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가, 아니 중립적일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들어가보자.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는 선출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권의 철학에 맞춰 법을 집행하면서 행정력을 발휘한다. 그 책임은 (대통령·국회의원 등) 선거로 진다. 대통령의 국정방침에 맞추는 이른바 ‘코드 맞추기’를 한쪽 면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2015년 11월 14일 발생한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의 사인규명 및 책임자 사과에 대해 ‘나 몰라라’하던 당시 경찰은 새 정부가 출범하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또 달라진 새 정부에서는 경찰의 집회 대응에 다시 ‘강경 대응, 캡사이신, 곤봉’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또 달라졌다. 권력에 따라 춤춘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민주적 통제 장치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주창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다음 장면이 말해준다. 2022년 5월 10일 출범한 새 정부는 같은달 24일 차기 경찰청장 후보군 계급인 치안정감 7명 중 5명을 대거 교체하면서 2021년 12월에 승진한 윤희근 치안감을 치안정감으로 승진시켰다. 윤희근 치안정감은 이후 2022년 6월 21일 치안감 인사 번복 논란 및 그에 대한 책임으로 6월 27일 김창룡 경찰청장 사퇴, 그리고 8월 1일 행안부 경찰국 출범의 과정을 거쳐 8월 10일 경찰청장으로 임명됐다. 새 정부에 코드를 맞출 인물을 찾기 위해 한편으론 과격한, 다른 한편으론 과감한 인사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수뇌부의 정치적 중립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현장 경찰에게 (특별)승진의 당근이 이례적으로 과감하게 주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적 통제 장치가 작동하기 어려운 한계를 의미한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역사적 평가 또는 재근대화? 솔직하고 전략적인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2023-06-20 | hrights | 조회: 783 | 추천: 9
김희교 /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윤석렬 대통령이 대만의 문제가 곧 북한의 문제이자 세계의 문제라고 발언하던 날 저녁, 다시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을 틀었다. 정부가 위기의 한 복판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시점에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라도 뭔가 혜안을 찾고 싶었다. 역사는 공시성만큼이나 통시성이 존재한다. 그 때 그 일이 지금 일어날 리는 없지만 이 위기를 우리 힘으로 넘길 수 있을 수 있는 한 올의 실마리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중   지금의 위기는 병자호란 시기와 유사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국면적 위기가 아니라 체제적 위기란 점에서 그렇다. 조선에게 명·청 교체기는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다. 지배계층의 세계관이었던 사대주의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중화의식의 위기이자 중화체제의 위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가 흔들리고 있고, 한국 주류의 반공·친미주의가 근본적으로 도전받는 시기이다.   떠오르는 세력들을 적대화하고 기존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주전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점도 그 때와 유사하다. 그때의 주전파들과 지금의 한미일 삼각 동맹파 들은 공통점이 있다. 저무는 세력의 힘을 신성화하거나 과대평가한다. 그들을 따르는 것이 곧 대의라는 주장도 비슷하다. 대의를 위해서는 국익을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떠오르는 세력과 대화나 타협보다 싸워 이기는 것이 미래를 위하는 길이라는 주장도 매우 유사하다.   지금의 미국의 지위는 그때 명나라의 지위와 유사하다. 미국은 이제 전 세계 GDP의 겨우 25%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패권을 장악하던 시기의 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올해 예상 경제성장율은 1% 대이다. 이미 구매력기준 실질 GDP는 중국에 뒤졌다. 그들의 핵심 동맹국인 G7을 다 합쳐도 44%에 그친다. 세를 불리고 있는 브릭스(BRICS)에게도 뒤진다. 미국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맹국을 동원한다. 그러나 동맹국의 국익을 보전해 줄 여력이 없다. 그러니 핵심동맹국들은 더 이상 미국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다.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중국과 디커플링에 동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독일이 그렇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국의 적국인 이란과 손잡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은 또 있다. 대의니 명분과 같은 가치를 떠드는 자들은 백성들의 생명권이나 민생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남한산성에 살던 대장장이 날쇠에게는 “전하와 사대부들이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아끼는 동생을 살릴 수 있으면 되고,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을 배곯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이면 된다. 미국 편에 서서 일본과 협력하여 중국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외치는 지금 정부의 이념 놀음에는 날쇠의 삶에 대한 걱정이 없다. 지속되는 무역적자에도, 언제 일어나도 이상할 리 없는 전쟁의 위기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의 1970년대 식 이념놀음에 지금 국민들은 남한산성의 갇힌 대장장이 날쇠 꼴이 되어있다.   하기사 이들이 이럴 줄 몰랐던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중국을 적대화하는 신냉전 세력이 단숨에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제도적 민주주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와중에도 반공·친미주의는 본질적으로 해체되지 않은 채 대물림되고 있었다. 1970년대 친미반공국가로 회귀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꽤 오랜 기간 그들의 시대로 회귀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시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추락하는 시대에는 추락한 엘리트들과 몽매한 시민들이 있다. 그것이 독일에서 나치의 등장을 연구한 일상생활사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독일의 평범한 시민들도 나치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침묵하거나 방관했던 결과가 나치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위기를 대통령만 탄핵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대통령을 뽑은 사람들이 건재하고 있다. 그런 대통령이 섬기는 미국이 좋다는 사람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순간에 다시 1970년대로 회귀하는 이유 중에는 그런 회귀의 시대를 준비하지 못한 시민들의 안일함이 숨어있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주전파 김상헌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자결을 택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란 임금과 같은 낡은 것들이 사라지고, 주전파나 주화파가 필요 없는,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다행히 수백 년이 흘러 이 땅에서 임금은 사라졌다. 전제군주제는 무너지고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김상헌이 말한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공화제는 그저 1차 층위의 민주주의를 가져다 준 민주주의의 한 부문일 뿐이다. 2차 층위의 주권의 민주주의, 3차 층위의 국가간 평등이라는 민주주의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 여전히 우리 주권의 절반쯤은 남에게 맡겨져 있다. 남의 전쟁에 뛰어들라고 하면 뛰어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처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식이다. 그런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세력을 쥐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설파한 것처럼 의식은 제도를 초월해서 유전된다. 의식은 의식대로 청산되고 다시 형성되어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근대의 꿈을 상실했다. 온전한 주권국가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근대의 꿈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핵을 느끼기 위해서 미국에게 주권을 가져다 바치는 전근대인들이 우리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평온하다. 수많은 청년들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마치 더 나은 세상은 필요 없다는 듯 살고 있다. 역사상 가장 보수화된 20대가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말을 맞은 것처럼 등장했다. 다수의 노년들은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전쟁이 북한과 중국을 적대화하기만 하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또 다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는가? 병자호란 때도, 조선말에도, 한국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 민중은 한 번도 제대로 그들의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동학 농민들의 꿈은 일제와 썩어빠진 지식인들의 야합에 짓밟혔다.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타율적 역사 속을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 위기만 온 것은 아니다. 다시 기회가 왔다. 지금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 역사를 만들 힘이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냉전 세력에 편승하여 역사를 거꾸로 걷지 않아도 정치경제적 힘이 있다. 세계정세도 우리의 근대의 꿈을 실현하기에 나쁘지 않다. ‘글로벌사우스’가 G7에 버금가는 힘을 가져 나가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있지만 미국의 패권을 대신하여 미국식 패권시대를 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자주의 시대도 열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만들어 구획지어 주는 대로 살아야 했던 그 때와 다르다.   무엇부터 할 것인가. 이미 이 정부가 우리의 근대의 꿈을 이루어주길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 힘으로 날쇠의 시대를 열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일상부터 변혁해야 한다. 지금 여기는 시대의 길을 터야 할 이 땅의 엘리트들마저 일상에 매몰되어 있다. 위기를 말하는 언론인이 없고, 길을 제시하는 교수가 없으며, 새 길을 열고 자 노력하는 정치가가 없다. 중요한 시대마다 나태한 엘리트들에게 길을 열라고 경종을 울려왔던 청년들은 일상에 빠져있다.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진 채 아르바이트에 목 매달고 반지성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큰 싸움이 전개되는 지금, 우리는 남한산성에 갇혀있다.   좀 더 많은 근대의 꿈에 매달리는 시민이 등장하지 않는 한 다시 타율적 역사를 걸을 수 있는 시기이다.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이 울리도록 조아리고 있는 지도자가 두 번 다시는 나와서는 안된다. 윤동주의 시를 빌리면 시대가 살기 어렵다는 데 일상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부터 나부터라도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다시 참회록을 써야겠다.  
2023-06-12 | hrights | 조회: 1534 | 추천: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