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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 쉬면서, 그렇게 맞이하는 새해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11:10
조회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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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농부, 예술심리치료사


 어쩜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고요하다는 것은 그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책방에 앉아 생각 없이 있고자 하니, 새 소리가 자꾸 귓가에 날아와 앉는다. 조용하다. 한밤중 빈방에 누워 잠을 청할 때 불쑥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벽시계의 초침소리처럼, 고요하다는 것은 미세한 소리에 민감해질 수 있는 여백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몸이 바쁘면 마음이 따라서 들고 일어나 당장의 필요에 응답할 뿐 가녀린 소리엔 아무런 답변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쉼이 필요하다. 넋 놓고 앉으면 꼭 필요한 소리가 그제야 방문하여 내 마음을 일깨운다.
 얼마 전 설을 쇠러 인천엘 다녀왔다. 장장 3박4일간의 긴 일정동안 고요했던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개의 남자들이란 여자들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누워서 지낸다. 할 일이 없다. 아직도 봉건시대의 유습을 버리지 못한 민주공화국에서 명절이란 여자들에겐 지겨운 시간들이고, 남자에겐 무료한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몸을 뒤적거리며 매일 같이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집에 가면 꼭 칼칼한 김치에 라면부터 먹어보리라 다짐한다. 얼마 전 교육방송에서 설을 앞두고 김민웅 목사가 어느 교수를 초빙하여 전통놀이와 관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들은 적이 있는데, 설날 복조리를 걸어두는 이유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본래 ‘조리’는 살을 씻으며 돌을 골라내는 도구인데, 새해에는 지난해의 못된 습관을 골라내고 반듯하게 살라는 뜻에서 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리질 없이 복만 받자고 하는 것이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이 묵은 자태를 벗지 못하니, 새해는 첫걸음부터 휘청거린다.

 우리가 결혼 후 십 년만에 얻은 딸아이는 그 새해에 세배를 거부했다. 설날 아침에 식구들이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리고, 아이는 큰 아빠와 큰 엄마에게 세배를 드렸다. 그리고 세뱃돈을 받았다. 저녁 무렵에 시댁에 갔던 누이들이 친정으로 몰려오고, 고모부와 고모들은 세뱃돈을 줄 테니 세배를 하라고 여섯살 먹은 우리 딸아이에게 요구하였고, 아이는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세배하면 돈을 준다고 해도, 저도 돈 있다고 싫단다. 아이는 아직 ‘돈’의 위력에 감염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세배를 받아내지 못한 누이들은 ‘허, 그 녀석 참!’하고 끌끌하다가 아이의 세배를 포기하였다. 그런 그 아이가 다음날 처가 집에 가서는 장모님에게 세배를 했다. 세뱃돈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에게 잘 사시라고 인사드리는 거라는 엄마의 설명에 수긍한 것이다. 만사에 조건을 다는 것은 우리들의 오랜 습관이다. 아이에게도 밥 잘 먹으면 사탕 주겠다는 식이다. 은연중에 돈이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 자본주의적이다. 세상의 논리는 가족들에게도 적용되고, 우리 자신에게도 무수히 적용하는 법칙이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다.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래야 사람 구실 할 수 있다고. 그건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에게 사실이지만, 슬픈 현실이다.

 해가 떨어진 저녁에 무주 산골짝으로 돌아와 보니, 춥다. 사나흘 비워둔 방은 얼음장 같았다.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구들방이 데워질 때까지 서너 시간 피신할 곳을 생각하다가, 진안에 사는 영덕이형네 전화를 넣었다. 마침 아랫집 길수네도 불을 때고서 그 집에 가있다는 거였다. 장모님이 챙겨주신 굴을 들고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오랜만에 반갑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아예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안성면의 박상옥 선생 집을 들렀다가 집에 와서 한 숨 더 자고, 저녁엔 다시 준성씨네 가서 또 술을 마셨다. 무주에 오자마자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보니 그리운 사람을 한꺼번에 만난 듯해 행복했다. 그렇게 산골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오늘, 집에서 빈둥거리며 이 책 저 책 들척이면서 아무도 없는 책방에 홀로 앉아 있다. 따끈한 방에서 아내와 아이는 낮잠을 자고 있다. 평화롭다. 새해에는 아마 생활에 변화가 많을 것이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계획도 있고, 새로 취득한 예술심리치료사 자격으로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아침에도 전화가 왔다.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하나원에서 예술치료를 하게 되었는데,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이 모든 게 한꺼번에 시작될 판인데, 지금은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잠자코 앉아서 쉬는 중이다. 내 생애의 새로운 한 흐름이 시작되는 조짐을 미세하게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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