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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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20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당에게는 ‘졌잘싸’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보정당들은 사실상 괴멸된 선거다. 심상정(정의당), 김재연(진보당), 오준호(기본소득당), 이백윤(노동당) 후보의 지지율을 모두 합치면 2.55%로, 2007년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혼자 얻었던 3.01%보다도 낮다. 표로 계산하면 86만3356표, 100만이 채 안된다. 졌잘싸가 아니라 괴멸이다  득표율만 최악이 아니다. 진보적 의제도 사라졌다. 국립대 통폐합 같은 교육개혁 이슈는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기본소득을 꺼냈다가 수습하기 바빴다. 기본소득은 로봇의 인간 대체와 정보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처럼)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수요진작(임금이 없으면 소비도 없다!) 차원에서 거론되는 우파적 정책이지만, ‘이념의 갈라파고스’ 대한민국에선 나라를 거덜낼 포퓰리즘으로 매도당한다. 기본소득 도입을 앞장서 주창하는 마크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 같은 미국의 기업인들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철없는 좌파라고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나라마다 상대적인 개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어젠다에 메아리가 생기지 않는다.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콘서트홀 수준의 방음벽에 대고 외치는 느낌이다. 진보란 역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므로, 비록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결국 우리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룰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그 신념마저 흔들리는 듯하다.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었던 5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퇴행이다. 무엇이 진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진보가 화석화되어 보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지금, 더욱 집요하게 던져야할 질문이다. 정치적 허무주의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자 역사 앞에 무책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데칼코마니와 허리케인 효과  한국의 진보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쪼그라든 것은 한국사회 전반의 우경화 결과다. 그 원인은 주체의 역량 부족과 객관적 조건의 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체의 역량 부족에 대해 말하자면, 어설픈 개혁으로 실패를 초래한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다. 특히 검찰개혁과 부동산에서 참여정부의 데칼코마니 같은 문재인 정부의 두번째 실패는 앞으로 이 분야의 개혁 시도가 불가능할 것 같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박근혜 탄핵이 보수세력에 남겼던 ‘허리케인 효과’처럼 문재인 정부도 진보의 10년치 잠재력을 한꺼번에 휩쓸고간 느낌이다. (집권 초반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으나 트럼프의 변덕으로 실패했고, 후반에는 코로나 대응에 여념이 없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에 대한 기민하고도 원칙적인 대처나 주52시간제처럼 박수받지 못하고 우리 삶을 크게 바꾼 업적도 많지만 주제와 관련 없으니 생략한다.)  정체성 정치에 매몰돼 대중정당으로서의 전망을 상실한 정의당, 북한 문제에 대한 도그마적 태도로 소수 지지자들만의 정당으로 전락한 진보당 등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보 내부의 성찰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중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하고 주눅들어 있으나 스스로는 근거없는 내적 포만감에 취하여,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웅장한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대남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  실패의 두번째 측면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다. ‘가치 전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이대남이 주도하는 온라인 여론은 강자를 숭상하고 약자를 비난하며, 약자를 옹호하는 연민까지 위선이라고 공격한다.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던 미국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들처럼 성난 얼굴이 되어 여성과 장애인, 중국과 비정규직을 비난한다. 이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분석하는 일은 진보의 성찰에 필수적인 작업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세대 개념이 계급의 차이를 지우는 부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나도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압축성장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화가 특징인 한국사회에서 세대별 역사적 경험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특히 온라인에서 전투적인 보수주의 여론을 대변하는 20대 남성들에 대해서는 계급적 측면뿐 아니라 세대적 접근을 병행해야 정확한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대적 접근 가운데 가장 손쉬운 해석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한 갈등 이론일 것이다. 20대 남성들이 아버지 세대인 86세대의 이념과 정서에 반감을 갖는 건 본능적으로 자연스럽다는 해석이다. 86세대가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의 6·25 타령을 지겨워했던 것만큼이나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86세대의 민주화 타령을 지겨워한다. 어느 이대남이 말하기를, 민주화 세대는 눈 앞에 존재하는 꼰대고, 산업화 세대는 교과서에 나오는 할아버지 같다고 했는데, 눈 앞에서 잔소리하는 꼰대가 더 싫은 건 인지상정이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졌는데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기준에 맞춰 잔소리를 하는 것은 어느 기성세대나 마찬가지고, 젊은세대의 반발 또한 늘 있어왔던 일이다. 이대남이 홍준표를 좋아하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약자를 위하는 척하는 이율배반보다는 자기 욕망에 당당하고 거침없는 상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계급의식에 투철한 중산층 이대남들  오이디푸스 이론은 다분히 정서적인 접근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계급 이론에 기반한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86세대가 대학생이던 8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서 당시 유행했던 신식민지 종속이론 적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서 아류제국주의 이상의 독자적 위상을 갖고 있다. 그만큼 잉여자본이 커졌고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피착취계급의 해방을 위해 공장과 농촌으로 뛰어들었던 86세대의 브나로드 운동을 이대남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 진학률과 직업 구성으로도 86세대와 2030세대는 정확히 반대다. 86세대의 대학 진학률이 30%에 불과했다면 2030세대는 70%에 이른다. 86세대는 블루칼라가 많고 2030세대는 화이트칼라가 많다. 86세대 엘리트들이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 계급을 배반했다면, 2030세대의 다수는 화이트칼라로서 계급의식에 충실하다. 2030세대의 여론 주도층이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를 당연시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은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지금 인터넷 여론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블루칼라의 계급배반(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정당을 지지하는)이 주요 논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부차적인 모순에 불과한 수준이다. 젠더와 일자리, 기표와 기의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상대적 결핍이 풍요와 성장의 시대에는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대남의 정치적 공격성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내재해 있다. 이들이 주창하는 반페미니즘의 근저에도 먹고사니즘과 각자도생의 초조감이 배어 있다. 이전 세대에 견줘 일자리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여성을 견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대남의 성평등 의식이 30대 여성보다도 더 높은 것으로 나온다는 조사는 젠더 갈등이 기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들이 특별히 성차별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측면이 훨씬 크다. 이들이 보기엔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자신들보다 공부를 잘했고 직업도 좋으니 사회적으로 우대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거의 아무런 보상 없이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 그런데도 86세대와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여성우대 정책을 펴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대남의 인식에는 사실과 오해가 뒤섞여 있다. 86세대에 대한 오해는 주로 시차에서 발생한다. 86세대의 경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압도적으로 적었고, 그 결과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직자 등의 경우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메이저로서 남성 사회의 편견과 유교적 인습도 작용했다. 이를 교정하기 위한 방책으로 여성할당제 등의 보완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대남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불공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이대남이 오십대가 된다면 여성할당제 등의 우대정책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남성 우대정책을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2030 남녀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생겨난 감정을 다른 곳으로 전이하는 데서 비롯한다. 남성들의 경우 군복무 등에서 생기는 피해의식에 기반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여성들은 페미사이드를 비롯한 데이트폭력의 문제나 귀갓길 안전, 디지털 성범죄 등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위험조차 남성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2030 여성과 남성 사이의 의사소통 실패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군복무에 대해서는 모병제 전환이나 월급 현실화 등의 사회적 보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적 처벌이 미약했고, 심지어 관대했다는 점에 대해 20대 남성들의 사실 인정이 필요하다. 음탕하고 추잡한 목차요 야릇한 서문  이렇게 내재적 접근을 해보지만, 이대남의 모순 투성이 신념들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벌들의 혈연에 따른 세습은 쿨하게 인정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정확히 말하면 중규직화)는 공정에 위배된다며 반대하는 건 ‘을들의 전쟁’을 자초하는 전형적인 노예근성이다.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못 사는 중국과 북한을 혐오하는 천박한 물신주의 또한 용인하기 어렵다.(홍콩 민주화 운동 탄압 같은 독재적 행태에 대한 비판은 별개다.) 법앞의 평등이 아니라 성적 앞의 평등이 모토가 되어버린 능력(학력)주의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실질적 평등 대신 절차적 공정을 절대화하고, 정의와 상식으로 포장하는 언어도단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나 이준석 같은 정치인들이 앞장서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은 더욱 위험천만한 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삼팔선 이남을 동서로 갈라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던 자들이 이제 남녀를 이간질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싸우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과 <오셀로>의 악당 에드먼드와 이아고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 선동과 분열을 획책했다. 이들이 갈등을 증폭시켜 정권을 잡은 방식은, 세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음탕하고 추잡한 목차요 야릇한 서문”이다. 공동체의 붕괴를 앞당기는 역사적 범죄이자 매국노적 행태로서 <리어왕>과 <오셀로>에서처럼 인과응보가 뒤따를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잃어버린 시대정신을 찾아서  20대 대학생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안부인사에 세대를 초월한 공감이 넘쳐 흘렀던 게 불과 9년 전이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 나온 것도 같은 해인 2013년이다. 약자와 연대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과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동시에 존재한다. 비는 골고루 내리지만 골짜기마다 다른 모양으로 흐르고, 개천이 되고 하천이 되어 커다란 강으로 합쳐진다. 시대의 저류에 흐르는 수많은 의식 가운데 호출하고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쪽이 시대정신이 된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섰던 불평등 논의가 지금은 철지난 깃발처럼 지친 표정으로 구석에서 외롭게 나부끼고 있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뀐 탓도 있지만 우리가 게을렀던 탓이기도 하다.  혐오는 쉽고 연대는 어렵다. 진보와 좌파는 주류가 되기 위해 보수와 우파보다 열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억울하지만 그게 역사의 불문율이다. 정치적 허무주의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가 2030세대와 만나자. 잃어버린 시대정신을 찾자. 진보가 살고 우리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4-13 | hrights | 조회: 1442 | 추천: 23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남북경협사업가를 향한 국가보안법의 칼날이 서슬 퍼렇다.  2018년 8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2019년 2월 보석으로 석방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지만, 지난 1월 25일 1심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4년의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수용번호 55번)에 수감 중인 김호 대표.  그는 2003년경부터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절차를 이행하며 남북교류협력사업을 해왔다. 2007년부터는 중국을 통하여 북 IT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개발하청 사업을 해왔다. 이 사업을 위해 대출까지 받아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하였을 정도로 전력을 기울였다. 선구적인 IT 남북경제협력 사업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제재조치로 인하여 남북경제협력법에서 정한 신고 또는 승인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5.24 조치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중국 국적의 재외동포를 중개인으로 한 남북경제협력사업이었기에 다행히 사업은 중단되지 않고 중국을 통해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대북 IT정보수집 부서 소속 국가정보원 직원의 요청에 따라 그는 2011. 12. 7.부터 2013. 10. 24.까지 국가정보원 대북정보 협조자로 활동하였다.  2007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남북경제협력사업을 진행해 오던 그에게 국가보안법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북 IT 개발조직에 개발비를 송금할 경우 위 자금이 대남공작사업 등의 통치자금으로 사용되거나 북 IT 개발조직에서 개발하는 프로그램이 국내 주요 보안시설 등에 설치·납품될 경우, 그 프로그램을 통하여 보안시설 네트워크 해킹, 악성코드 유포, 디도스 공격 등 사이버테러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국내업체들의 내부 보안정보가 북으로 유출되거나 북의 대남공작조직에서 관련 정보 또는 데이터 등을 수집하여 대남침투공작 등에 활용하는 등 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였다.  북 악마화에 기초한 허구의 논리다. 거짓의 기세가 등등하다. 사이버테러 북 소행은 탈북자 및 사이버 보안업체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이용하는 국내외 정보기관의 북 악마화 정보조작과 이에 편승하는 서방 매체의 왜곡보도가 낳은 근거 없는 날조품이다. 불공정한 국제질서에서 유엔조차 미국의 하수인으로 북 사이버 테러 소동에 부화뇌동하고 있다.  북 악마화가 온 세상에 아무런 거리낌조차 없이 저질러지고 있기에 그에게 닥친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국가보안법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 사진출처 -  정보통신신문  1심 판결은 북의 적화통일노선을 전제하고 북의 대남공작조직이 지속적으로 그가 중국을 통해 진행한 북 IT 프로그램 개발·유통에 관여하였다고 자의적으로 단정한 후 상황에 따라 사이버테러에 악용될 가능성이 상존하였다고 일방적으로 가정하였다. 그를 처벌하기 위해 북과 중국의 상대방인 IT 시스템 및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북의 과학기술자도, 중개 역할을 한 중국 국적의 재외동포도 공작원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사법부마저 그 앞에서는 주눅 들게 하여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인권의 최후보루로서 책임과 사명을 망각하고 회피케 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지녔다. 1심 판결이 북의 사이버테러를 사실로 인정하며 신주단지 모시듯 안전판 증거로 기껏 내세운 것이 탈북자의 증언이다. 그 탈북자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씨에 대한 간첩신고로 국가보안유공자 상금을 받은 자이다. 국가정보원과 연계된 탈북자의 증언은 신빙성이 전혀 없건만,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 현실은 국내외 지배세력과 연계된 탈북자들이 언론방송은 물론 한국의 법정과 유엔까지 진출하여 거짓말 경연을 밥 먹듯 하며 생계형 또는 출세형의 반북 망동을 일삼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탄압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김호 대표의 변호인으로 그의 구명을 위해 하소연한다.  1심 판결이 유죄로 인정한 주된 공소사실은 모두 국가정보원의 협조자로서 대북 IT정보수집에 협력하며 남북경제협력사업을 하던 시기와 겹친다. 당시 남북경제협사업은 북의 대남공작조직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정보원의 승인과 개입 하에 있었다. 그런데, 어찌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를 지원할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남북경제협력사업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었다고 한단 말인가?  약 10여년에 걸쳐 중국 국적의 재외동포의 중개를 거쳐 북 과학기술자들과 IT 소프트웨어 개발 하청사업을 진행한 그를 남북교류협력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한다면, 남북 간 경제적 거래를 목적으로 한 남북경제협력사업도 사후적으로 얼마든지 국가보안법위반 범죄로 처벌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남북교류협력사업은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어 남북교류협력의 활성화, 이를 통한 관계개선은 요원해진다.  국내업체들에 납품한 북 IT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없게 되어 심대한 경제적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법적 책임 또한 모두 지게 될 남북경협사업가에게 북 사이버 테러를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다니, 국가보안법 때문에 기막히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10여년의 북 IT 프로그램 납품 과정에서 국내업체 중 단 한 곳의 피해도 없었는데 말이다.  남북경협사업가 김호 대표에 대한 국가보안법 탄압의 현실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지배당한 채로 무기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억울한 옥살이로 고통 받고 있는 김호 대표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에 우리 모두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한다. 그가 겪고 있는 시련의 날들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국가보안법 소멸의 그날을 향해 한국 민중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연대해 싸우며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04-06 | hrights | 조회: 1064 | 추천: 4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20년 넘게 석탄화력발전소로 고통받아온 당진이 뜬금없는 핵발전소 건설 대상지로 언급돼 지역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당진지역에는 현재 한국동서발전(주)에서 운영하는 10기의 대형 석탄화력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1999년 6월부터 500MW 규모의 1호기 가동이 시작된 이후, 같은 해 12월에는 2호기가, 이듬해인 2000년 9월에는 3호기, 그리고 2001년에는 4호기가 차례로 건설됐다. 이렇게 하나씩 늘어난 화력발전소는 2016년, 기존 발전용량의 두 배에 달하는 1020MW 규모의 9·10호기까지 잇따라 건설되면서 현재 총 6040MW를 생산하는 석탄화력 10기가 운영되고 있다. 전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큰 규모다.  대형 석탄화력발전소로 인한 피해는 두말할 나위 없다. 석탄을 떼서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의 원리는 간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받아온 주민들의 일상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외국에서 수입한 석탄 하역 과정에서, 다 태운 석탄재를 야적하는 회처리장에서도 검은 탄가루나 석탄재 등의 물질이 바람을 타고 인근 마을까지 날아와 집과 자동차, 농작물 등에 내려앉는 피해가 종종 발생해왔다. 특히 수확을 앞둔 배추 속 사이사이에 비산먼지나 강하분진이 잔뜩 껴 다 키운 농산물을 팔지 못하는 경우도 잦았다. 사진 출처 - pixabay  석탄을 저장해 놓는 대형 저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길게는 열흘 이상 지속돼 연소 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취와 가스 등으로 주민들이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석탄화력발전소를 가동함으로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등 대기오염물질은 지역의 환경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지역사회의 피해가 커지고 계속해서 민원이 발생하면서 당진화력발전소는 지난 2017년부터 대기오염물질 배출량 감축을 추진하며 과거에 비해 상당한 개선을 이뤘다. 또한, 지자체 차원에서도 발전소 인근에 민간환경감시센터를 운영해 환경피해 조사와 사고 발생 대응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도시로 보내기 위해서는 고압송전탑과 같은 송전설비가 필요하고, 고압송전탑으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는 여전하다. 그리고 당진지역에 마지막 남은 생태환경의 보루라고 불리는 지역에 추가적인 송전선로 건설을 추진하면서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발이익과 피해보상, 각종 이권개입 등 경제적 문제가 얽히면서 발전소 일대 지역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캠프에서 에너지정책 분야를 주도해온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가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충남 당진 등 기존 석탄화력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에 지으면 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지역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주 교수는 지난 18일 경향신문 6면에 실린 「‘탈원전’서 ‘원전강국’으로…원자력, 녹색에너지 전환 주목」 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석탄화력발전소에 이미 전력망이 깔려 있기 때문에, 발전기를 석탄 대신 SMR로만 하면 된다”며 “고용승계의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지역주민들이 온갖 피해를 감내하면서 생산한 전기를 그저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대도시 주민 입장에서는 “기존에 있는 발전소를 활용해 소형핵발전소를 지으면 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지만, 20년 넘는 세월 동안 대규모 발전회사와 싸우면서 살아온 주민들에게는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얘기다. 전기를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어왔는지, 지역주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한다면 이렇게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당진은 전력자립도가 400%가 넘는 지역이다. 지역에서 소비되는 전력보다 4배 이상 전기를 생산해 수도권으로 보내고 있다. 지역주민들은 수도권 시민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윤석열 정부의 정책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들러리도 아니다.  탈석탄·탈원전이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시대를 역행하며 원전 강국으로 나아가겠다는 발상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지역을 배제하고 지역주민을 소외시키는 SMR 추진은 결코 현실화돼서는 안 될 일이다. 조만간 출범할 윤석열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주한규 교수의 발언이 단순한 발언에 그치지 않을까 봐 우려스럽다. 덕분에 지역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지역주민들은 “이제는 정말로 지역을 떠나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2-03-24 | hrights | 조회: 724 | 추천: 2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선거일 직전 ‘국민의당’과 전격 합당한 뒤 ‘국민통합’을 내세우며 간발의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중에는 “국민이 키운 윤석열,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당선 소감으로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오직 국민만 믿고 오직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국립현충원에 참배하면서 “국민과 함께 통합과 번영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그 뒤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당선인 직속으로 ‘국민통합특위’도 꾸렸다. 선거 전후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국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일견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해야 할 무난한 말들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국민’이 무엇인지, ‘그 국민’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향하고 있는지, 그 실질을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국민의 뜻’ 운운하는 말이 워낙 광범위해서 곰곰 따져보면 아무 뜻도 아니거나, 자기에만 유리한 ‘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넘쳐나는 곳에 ‘국민’이 없을 수 있다는 역설을 의식하고 있는지, 그 지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는 말에서 ‘위대한 국민’이 자신의 지지자를 지칭하는 것인지, 국민 자체가 위대하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이 위대하다면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요원한 것일 테고, 국민 자체가 위대하다면 아무 말도 안 한 것이거나 그저 동어반복을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직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지만, 그때 ‘따르겠다는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어떻게 파악하고 구분한다는 것인지도 마찬가지이다. ‘뜻’만 명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따르겠다’는 말도 그 범위와 행위의 정도가 애매하다. ‘국민’, ‘뜻’, ‘따르기’ 모두 확정적인 개념들이 아닌 데다, 너무나 원론적이고 거창해서 사실상 아무 뜻도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이현령 비현령’일 수 있는 말들이다.  “국민과 함께” 통합을 이루겠다지만, 그때의 “함께”가 어느 정도인지도 대단히 추상적이다. “국민통합”도 ‘통합’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국민 전체가 아닌, 일부는 소외시키는 ‘분열’일 수도 있다. 국민을 통합하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며 비판자까지 껴안을 수 있을 심층적 철학과 모범적 실천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까지 국민 전체를 포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해서 미심쩍다. 행여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버리려 들지는 않을지 의구심도 든다. ‘국민’을 둘러싼 이런 문제의식은 “국민의 힘”이나 “국민의당”이라는,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딱히 메시지가 분명치 않은 당명을 정할 때부터 노정된 난제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막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은 일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국민’만이 아니라 어떤 언어를 쓰든 언어 자체가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指月]과 달을 구분하고 있고, 언어학자 소쉬르가 기표(記表)와 기의(記意)를 구분하고 있지 않던가.  ‘국민’이라는 글자와 그 글자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나 개념은 애당초 다르다. 글자와 개념이 구분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 연상하는 이미지와 떠올리는 개념도 다양하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나아가 말하는 이도 자신의 내적 의도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하고, 표현한다 하더라도 듣는 이에게까지 가는 과정은 더욱이나 멀다. 저마다 기대치가 다르고, 심지어 상반되게 이해하기도 한다. 이 마당에 ‘국민’이 아니라 무슨 언어를 쓴들 본래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자기 언어의 한계를, 때로는 무의미함까지 의식하고 있는지, 그저 자의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관건이다. 그런 반성적 의식 속에서야 가능한 한 명확하고 전체를 살릴 수 있을 방향성도 나온다. 거기서 진정성도 나온다. ‘사랑하는’, ‘위대한’과 같은 멋져 보이는 표현도 그 내용까지 멋지려면 말 속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진정성이 있으려면, 어떤 언어든 많은 이가 신뢰할 말을 고민해서 구체적이며 정확하게 써야 한다. 정확하게 쓰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지, 한 번 더 자신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되묻고, 해체하고, 다시 해체해서 가능한 모든 이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  사회학자 김홍중이 발터 벤야민의 사상에 힘입어 ‘파상력’(破像力)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파상력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영상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하는 우상 파괴적 권능을 내포한다... 일체의 가상(Schein)이 가상임을 꿰뚫고 그 가상이 행사하는 환영적 위력을 분쇄함으로써 엄폐되어 있던 진상(眞相)을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사용하는 ‘국민’이라는 말이 그저 ‘기호’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 거기에 허상은 없는지, 가상은 아닌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말에 솔직하고 진지해야 한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국민’이라는 말에 담긴 자기만의 이미지를 분쇄하고 파상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견지해야만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에서 국민이 솔직함과 진정성을 느낀다.  진정성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말이 아니라, 어떤 실천을 어떻게 하는가에서 확보된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그렇게 말하는 이는 국민 앞에서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국민이 위대하다거나 국민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은 낮추고 국민을 높이는 행동으로만 진정성이 입증된다. 자기만의 신민(臣民)이 아닌, 비판적 국민까지 전체를 높이며 살려야 한다. 남한의 국민만이 아닌 한반도 북쪽의 인민도,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심지어 세계의 상황을 읽고 가능한 인류가 상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 세계 안에서 세계와 엮여 존재하며, 결국 남과 북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처지 아니던가.  물론 누구든 전체를, 그것도 자기의 비판자까지 포용하며 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대로 다름과 차이 간에 상생을 도모하며 전체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어마어마한 역할을 담은 한국식 호칭을 붙이고 있지 않은가.  만에 하나 전체를 동시에 살리기 힘들다면, 더 고통받고 더 힘든 이들을 우선 살리고 높여야 한다. 아래로부터 밀어주면서 전체의 평균치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평화에의 길이고 통합의 기초이다. 평화를 지킨다며 무력을 강화시키는 위압적 행위보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지난한 노력을 전 세계와 함께 진정성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라야 인류의 축복 속에서 ‘국민의 뜻’을 반영하며 따르는 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자리는 간단하지 않다. 그의 영향력 안에는 너무나 많은 눈과 귀와 입이 있다. 그 어설픈 한 마디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저와 제 편만 생각하다 행여 통합이라는 이름의 분열로 가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들만의 국민’은 없다.  ‘국민의당’과 합당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국민의힘’ 당선인이 ‘국민’을 어떻게 대할지, 앞으로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어갈지, 그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을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위대한 국민’이 할 일이다. ‘국민’으로 포장된 가상을 깨고 진상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이 진짜 ‘국민의 힘’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3-14 | hrights | 조회: 1087 | 추천: 12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크라이나의 교사이자 엄마인 올레나 쿠릴로. 그녀의 아파트는 러시아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됐다. 유리 파편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녀는 푸틴에게 의미 없는 전쟁을 멈추라고 호소했다. “전쟁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잃게 만들고 노인, 평범한 사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아까운 생명을 잃게 한다.” 그녀는 러시아의 엄마들을 향해 이런 부탁도 했다. “제발 아이들이 전쟁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이 전쟁은 무의미하다. 이 전쟁으로 행복해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이 전쟁으로 부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국민 모두에게 비극이고 고통이다. 경제제재로 금리는 20%나 뛰었고 물가도 치솟고 있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가치는 3분의 1로 떨어졌고 더 떨어질 거라 한다. 구글페이나 애플페이 같은 결재시스템도 러시아중앙은행이 스위프트에서 배제되면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피 흘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 경제 시스템의 붕괴는 러시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이번 전쟁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문명의 시대에 이런 의미 없는 전쟁을 목도하니 참담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말들은 많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신나치즘의 발현을 막겠다.’고 했고 다른 한편에선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리한 나토가입 추진이 러시아의 무력 침공을 자초했다는 분석도 있다. 수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해도 누구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무고한 생명의 살상, 인권 유린, 일상의 파괴를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쟁의 원인은 푸틴이다’ 올레나 쿠릴로의 명쾌한 진단이다. 푸틴은 러시아를 다시 소련 시절로 되돌리겠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푸틴의 제국주의 야망의 시발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프랑코 국립대학교 올레흐 오스타퓨크 교수는 ‘푸틴이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시민을 선동해 독재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라고 간파했다. 하지만 이런 푸틴의 야욕은 오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KGB 출신의 푸틴은 2000년 이후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하면서 20년 넘게 장기집권을 해오고 있다. 투표 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60~70%의 득표율을 보여줬다. 정보기관 출신답게 정적을 제거하거나 정치적 반대집단을 탄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비판적인 언론인 살해 의혹 등 언론통제도 일삼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민주화의 바람이 때로는 혁명으로 몰아쳤지만, 러시아만은 무풍지대였다.  그래도 변화의 기미는 보인다. 전 세계 반전여론이 거센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푸틴의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이 50% 정도 된다지만 체포와 처벌을 각오하고 ‘조국이 부끄럽다’며 전쟁반대를 외치는 물결이 번지고 있다. ‘사형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위협에도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러시아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비록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았고 시민사회의 형성도 더디지만 요즘 같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에선 러시아만 외딴 섬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출처 -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 HB가 트위터에 게시한 영상 캡처  쉽게 함락될 것 같았던 우크라이나는 결연한 항전 의지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이 가운데 내 눈길을 끄는 장면 하나. 돌진하는 러시아의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한 시민이 있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장갑차도 그를 피하느라 휘청거렸다. 그의 용기가 철갑전차를 흔든 것이다. 철옹성 같은 권력에 균열을 내는 것은 총과 칼만이 아니라 작은 촛불이었고 가녀린 재스민 꽃잎이었다. 푸틴의 손에 권력을 쥐여준 러시아 국민들의 냉철한 판단과 전 세계 평화세력의 연대만이 이 무의미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3-02 | hrights | 조회: 777 | 추천: 4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양에서는 역사의 시간적 흐름을 흔히 고대-중세-근세-현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는 ‘고전고대’로 일컬어지고,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멸망(1453)까지는 중세사로 여겨진다. 근세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서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의 초기 근세(early modern)와 프랑스혁명에서 2차 세계대전(학자에 따라서는 1차 세계대전)까지의 후기 근세(late modern)로 더 나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문자(大文字)로서의 근대(the Modern)’란 시기적으로 바로 이 후기 근세 혹은 최근세(recent modern)와 겹친다. 따라서 서양사에서의 시기 구분에서 현대는 바로 지금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당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분은 많은 시대구분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우리가 거(居)하는 현재 혹은 현대와 가장 가까운 역사 세계가 근대이다. 알다시피 근대를 빚어낸 주된 힘은 서양에서 나왔다. 근대에 펼쳐진 지리적, 경제적 세계화도 서양이 주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양이 주도한 전 세계의 근대화에 강제로 편입된 쪽이었다. 자주적으로 근대에 진입할 역량이 모자라서 강제적으로 근대세계에 편입된 탓에, 우리에게는 시간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하면서 근대의 전모(全貌)를 찬찬히 체득할 여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부족, 혹은 결여를 메우려 할 때 필요한 게 꿈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충족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은 없다. 누구나 충족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없는 것)을 꿈꾼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찾지 갈증이 해소되면 물을 찾지 않는다. 역사 세계에서도 인간은 현실에 없거나 부족한 것을 꿈꾼다. ‘지금 여기’는 꼭 이래야만 하는가? 과연 눈앞에 펼쳐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게 뭔가 부족해 보일 때, 그래서 객관적 ‘현실’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인식’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그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서양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주로 회상이나 이주의 방식으로 현실과 인식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우선 시간의 차원에서는 회상(recall)의 방식을 취했다. 현실이 빈약하고 초라할수록, 고대의 인간은 풍요롭고 안락했던 과거를 상기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개인의 차원에서 ‘내가 왕년에는~’, ‘이래 봐도 한때는~’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듯이. 요순(堯舜)시절이나 ‘실낙원(實樂園) 이전’의 옛날에 대한 회상에 기대어 현실을 부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실 이전에 존재했다고 회자(膾炙)되는 ‘황금시대’에 대한 관념의 감상화(感傷化)가 시간의 차원에서 진행된 현실 부정이라면, 공간의 차원에서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주(emigration)라는 형식으로 현실의 부족을 메꾸려 했다. 내 머리에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를 지금 이곳에서 현실로 만드는 게 불가능하므로, 이곳을 벗어나서 관념의 현실화가 이루어진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무릉도원(武陵桃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율도국, 기회의 나라로의 이산이 바로 그런 예다.  중세 사회에서 현실과 인식의 차이는 <‘악(惡)’으로, ‘터부 taboo’로 처리되는 방법>과 <종교로 처리되는 방법>이 가능했다. 우선 중세 사회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이미지에 탐닉하는 자는 마귀에 들린 자, 병든 사람(미친 사람)으로 내몰렸고, 그들이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겼을 때는 처벌되었다. 닫힌 사회에서 (현실) 부정의 정신은 터부시되어 박해를 받았다. 공동체의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그로부터의 박해를 면한 게 종교적 방법이다. 종교는 현실의 차원에서의 부정을 단념하고 현실을 스스로 초월하는 ‘초역사적 부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초월(transcendence)은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아예 벗어나려고 한다. 초월은 참되고 복된 삶은 허망하고 찰나적인 세속세계가 아니라 천상(天上)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역사 세계 자체를 뛰어넘음으로써 현실의 초라함을 극복하려는 초역사적인 꿈이 초월이다. 그리스도교는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현실의 차원에서 줄일 수 없다는 세계관의 표현이자 현존하는 현실을 ‘숙명(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실변혁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도 현실(세계) 부정의 계기는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소외-억압되었거나 비합리적으로 처리되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  서양의 근대란, 현실에 대한 이런 식의 종교적 대응방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현실) 초월이 아니라 진보(progress)를 통해 줄이려는 게 근대의 특징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근대인은 좋았던 옛날은 이미 사라졌고,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으며, 아무나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생산력 증대와 (개혁이나 혁명과 같은) 사회변혁 시도를 통해서 현실과 인식의 격차를 ‘현실의 극복’=발전을 통해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에는 변수(變數)조차 못되었던 부정적 현실의 타파라는 계기를 아예 상수(常數)로 놓고 계산하려는 행동 양식이 생겨났다.  서양의 근대를, 회상이나 이주, 그리고 초월의 역사적-현실적 한계를 깨닫고 어제와 저곳의 바람직한 것들은 물론이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이상적인 것들까지도 ‘관념의 형식’인 정보나 지식으로 배우고 익혀서 실현하려는 시대라고 규정한다면, ‘성숙한 근대로서의 현대’를 살려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 사유를 긍정적으로 전유하려는 노력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의 핵심적 특징을 탈주술화=합리화라는 말로 요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 남짓 남겨둔 현재, 공동선에 대한 헌신은 고사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개념조차 없는 무속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권을 쥐어보겠다고 버젓이 나대고 다닌다. 역겹기 짝이 없다. 아무쪼록 이번 대선이 사이비 중세가 아니라 ‘성숙한 근대’=현대로의 이정표로 기록되길 희망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2-02-23 | hrights | 조회: 841 | 추천: 4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례 1. 초등학생 세 명이 뚝방 공터에 족구장을 만들기로 했다. 시기가 문제였다. 여름 장마에 쓸려갈지 모르니 9월에 하자는 의견과 지금 만들자는 주장으로 갈렸다.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결과는 당연히 2:1. 하지만 이들은 족구장을 만들지 못했다. 2:1 중, 1이었던 친구가 삐졌기 때문이다.  사례 2. 웃말 아랫말 합쳐 100호 가까이 되는 그런대로 규모가 있는 마을이 있었다. 돌아가며 하던 이장을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투표로 뽑기도 했다. 불과 4표 차이로 A씨가 선출되었다. 떨어진 B씨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시했다. A, B씨를 지지했던 동네 사람들은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같이 술을 마시지도 않고 말을 섞는 것도 조심했다.  사례 3. 언제부턴가 대학 총장도 교수들의 투표로 뽑았다. 대학의 총장 선거 때가 되면 강남의 룸살롱이 들썩인다는 소문이 있었다. 선거가 혼탁 정도를 넘어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요즘은 주로 재단 이사회에서 대학 총장을 선출하며 교수들의 개별 투표는 드물다. 투표의 부작용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대학의 지배 권력이 총장 임면권을 회수한 결과이다.  바야흐로 후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대선 국면이다. 당연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가 중요하다. 향후 5년간 선출된 인물에게 이 나라와 사회의 운명 중 얼마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자질이 있고 훌륭한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투표가 끝나면 향후 대통령 직무 수행에 관한 한 5년간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민주주의’ 하면 미국을 떠올리지만, 미국의 독립선언서나 헌법 어디에도 민주주의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미국 건국자들은 ‘공화제’를 고대 로마에서 들여왔는데, 로마의 원로(元老)는 선출직이 아니었다. 1776년 메릴랜드 신헌법에 의하면 지사(governor)에 입후보하려면 5,000파운드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고 상원의원에 출마하려면 1,000파운드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90%의 주민이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미국의 ‘금권 정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학자 R. 달, 인류학자 D. 그레이버는 미국에 민주주의는 없었다고 말했다.  선거=투표조차도 얼마나 큰 희생과 노력을 통해 얻어졌느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맞다. 1948년 여성참정권이 보장되기까지, 현대 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정치 참여의 방식인 투표권=보통선거권마저도 2백 년이 넘는 지난한 싸움 끝에 손에 쥔 소중한 시민의 무기인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하지만 내가 앞에 세 사례를 제시하면서 품었던 두 가지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이 선거가 나라의 운영책임자를 뽑는 데 적절한가, 계속 이 제도로 가야 하는가? 둘째, 나라의 운영책임자=대통령 외에 다양한 집단과 단체의 리더를 꼭 투표로 뽑아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현행 선거는 인류가 오랫동안 동의한 덕목을 배반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겸손이라는 덕목이다.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갖게 되는 성숙한 인격의 덕목 말이다. 현재 대선에서 입후보자는 단상에 나가 내가 잘났다고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한다. 그에 비례해서 상대를 헐뜯어야 한다. 거기에 언론과 검찰이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면 대선 경쟁은 적나라한 ‘물어뜯기와 물어뜯기기’가 된다. 과연 투표로 대변되는 정치 참여방식이 현실이나 규범의 측면에서 달성해야 할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투표는 공공연한 경쟁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등장한 표결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같이 아무 일이나 가지고도 경쟁했던 사회 말이다. 이런 사회에서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은 대부분 무장을 했거나 무기 사용 훈련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스 투표는 군대 안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에 따르면 그리스 국가의 구성은 그 군대의 주요 무기 분류에 따라 결정되었다. 기병대라면 귀족정을 예상할 수 있다. 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무장 보병이라면 투표권은 중무장할 무기를 구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가벼운 무장의 보병, 궁수부대, 투석부대, 해군이 있다면 민주주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의 군대는 다수결을 통해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했다.  투표는 두 가지 전제를 깔고 결정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첫째, 어찌 되든 소수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당해도 감수하고 다수의 견해에 따라야 한다. 투표는 설득의 단절이다. 상호 수용과 집단 결정에 도달하는 협의의 중단이다. 앞서 세 사례에서처럼 투표가 불화를 낳는 이유이다. 둘째, 투표는 투표의 결과를 강제할 수 있는 폭력을 수반하고 있다. 투표는 불화가 물리적인 반박이나 저항으로 바뀔 경우 진압할 수 있는 폭력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투표는 민주주의와 가장 멀고 허술한 의사결정 수단인지 모른다.  지금 투표에 몰두하고 있다면 돌아볼 일이다. 이 사회가 빈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서, 또 많은 사람이 정치, 경제, 문화에서 배제되고 있어서. 한번 결정되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강제력이 필요하고 그 강제력에 순응해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투표에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닌지 말이다. 이런 사회는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정치체제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다시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 누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적 전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뜻이고, 집단적인 결정은 평등 속에서 유지되어야 하며,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평등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제출했을 때 발휘될 창조성까지 포함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자유로움이어야 한다. 민주화를 기다리고 있는 집안, 동네, 학교, 회사, 작업장 등 곳곳에서. * 계발성에 가득 찬 글을 남긴 고마웠던 학자이자, 순진하고 유쾌한 웃음을 주었던 동료였던, 그러나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ber)의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정호영 옮김, 이책, 2015),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2016), 《관료제 유토피아》(김영배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6) 등에서 많이 베꼈습니다.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빕니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2-02-16 | hrights | 조회: 1050 | 추천: 5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저는 제대로 할 줄 아는 잡기나 스포츠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전혀 없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열심히 하는 걸 재미있게 구경하는 쪽입니다.  재주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저는, 양반은 못 되지만 “뭐 하러 저 힘든 걸 몸소 하누? 아랫것들 시키면 되지!”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하는 편입니다. 며칠 전, 오랫동안 학원에서 일해 왔던 친구 A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오후 5시 OO 당구장으로 와라, B와 오늘 결판낸다.’  자영업자인 B 역시 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A의 문자 받았지? OO 당구장에서 보자.’  A와 B의 당구 시합에 저를 부른 것은, 그들이 이미 두 번의 시합을 벌였고 그때마다 제가 참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남들이 벌이는 게임을 옆에서 지켜보며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속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겠지요.  올해 들어 1차전은 A가, 2차전은 B가 이겼으니 2022년, 그들의 통산 전적은 1대1. 삼세판 2선승제라 치면 오늘 시합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셈입니다. 특히 오늘의 승부에 A와 B 매우 특별한 것을 내기로 걸었습니다. 그들의 농반진반에 의하면 오늘의 승패가 ‘한국 정치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었습니다.  A는 닥치고 국민의힘 쪽 지지자이고 B는 무조건 정권교체 지지자여서, 두 사람은 이번 대선에 있어 대부분의 의견이 같지만 조금은 다른 견해 때문에 투닥이곤 했습니다.  대선 승리를 위한 야권 단일화에 공감하면서도 A는 윤석열이, B는 안철수가 대선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당구 시합의 이기는 쪽의 의견을 따르기로 합의가 되었고 제가 보기에 평소와는 다른, 좀 더 바보 같은 승부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정된 시간, OO 당구장에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 모였습니다. A와 B는 어느 쪽이 지더라도 그 결과를 깨끗이 받아들이기로 하고 페어플레이를 약속했습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드디어 삼판양승제, 3구 당구의 첫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너 번의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둘의 게임은 팽팽했습니다. A가 점수를 얻으면 B가 따라붙고 B가 치고 나가면 A가 따라붙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B의 한 수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B가 본 적도 없는 요상한 기술을 구사, 어처구니없이 점수를 땄습니다. 소위 ‘후로쿠(fluke)’에 당해 화가 난 A의 평정심이 무너졌고 결국 첫 번째 게임은 B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어진 두 번째 게임은 허무할 정도로 일방적인 B의 승리. 첫 번째 게임의 분노를 삭이지 못한 A가 거의 자멸해버린 결과였습니다. 2대0으로 승부가 결정되었고 기세등등한 B가 던진 한마디에 A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나의 승리, 단일화는 안철수 인정?”  “무슨... 후로쿠로 이겨놓고!”  “억울하면 룰을 바꿔줄까? 5판 3승제로... 어때?”  A는 계속 B를 놀렸습니다. 그쯤에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밥 먹고 생각합시다!”  득의만면한 B가 밥값을 내겠다며 당구장에서 가까운 곳에 맛있는 국숫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당구장에서 국숫집으로 가는 동안 A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B는 계속 윤석열이 왜 야권 후보가 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국숫집 가까이에 왔을 때 갑자기 B가 깜짝 놀란 듯 소리쳤습니다.  “어? 내 차 어디 갔어?”  당구장 근처 골목에 세워두었던 B의 차가 불법주차로 견인되었습니다. 당구 두 게임에 소요된 시간은 60여 분. B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자리의 노란 스티커 한 장에는 어디로 와서 벌금을 내고, 30분 당 얼마의 벌금이 추가되니 그리 알고 차를 찾아가라는 등등의 친절한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어휴, 씨!”  B에게는 이제 당구의 승패도, 야권 단일화도, 맛있는 국수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풀 죽어 있던 A가 웃지 않으려 애쓰면서 B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빨리 가봐, 시간 늦으면 그만큼 돈 더 내야 한다고 써 있네...”  화가 나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B를 부랴부랴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서 A가 씩 웃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구는 뭐 모르겠고, 오늘 종합적으로는 나의 승리!”  그 말을 들은 제가 A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너의 승리는 결국 현 정권의 시스템에 힘입은 승리!”  A와 저는 국수를 먹고 헤어졌습니다. 물론 국숫값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A가 냈습니다. 우습지요? 하지만 무슨 떠벌이 전문가들에다가 법사니 무속인이니 하는 사람들까지 대선을 점치고 있으니, 비록 저는 아무 관심이 없는 그들의 이야기지만 당구로 점을 쳐보는 것도 우습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당구 시합에서도 그랬지만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자칭 애국자들의 이런저런 말들이 요란합니다. 아무튼 ‘잘 돼야 될 텐데...’ 말입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1-26 | hrights | 조회: 861 | 추천: 6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2022년 대통령 선거가 난데없이 굿판이 돼 버렸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 부인, 그러니까 영부인을 꿈꾼다는 사람이 “도사”니 “무당”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 거기다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극도로 친하다는 무슨 법사니 도사니 하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보니 개판과 굿판 중 어느 게 더 좋은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로선 그 법사들의 신통력을 검증할 방법도 없고, 王이 될 생각도 없으니 손바닥에 낙서할 일도 없겠다. 더구나 똥침이란 함부로 장난치다 큰일난다(그리고 보복당한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법인데 무려 자기한테 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와중에도 매우 걱정되고도 끔찍한 건 따로 있다. 국민의힘이 네트워크본부를 허겁지겁 해산하는 계기가 됐다는 자칭 건진법사가 주변에 만들어준다는 부적에 눈을 의심했다. 한눈에 봐도 ‘천부경(天符經)’ 81글자를 붉은색으로 써놨다. 이것만 봐도 자칭 건진법사가 유사역사학(사이비역사학이라고도 한다)에 깊숙이 치우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겠다. 천부경이란 게 등장한 건 대략 일본 식민지로 떨어졌던 시기였다. 대종교에선 천부경이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이치를 표현한 신성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정치를 위해 역사를 쪼물딱거리는건 언제나 동티가 나게 돼 있다.  천부경은 유사역사학의 최종 보스 같은 이른바 ‘환단고기’에 실려있다. 환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천부경은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암벽에서 찾아내 탁본을 하면서 찾아낸 거란다. 1911년에 편집한 책에 들어있는 걸 어떻게 1916년에 암벽에서 찾아냈다는 것일까. 이미 거기서부터 도대체 앞뒤가 맞질 않는다. (환단고기 신봉자들과 고대사 시각이 가장 유사한 이북 정부가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찾아내 발표하지 않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천부경이란 이미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믿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가 ‘조선사연구초’(1929)에서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때 천부경을 경전으로 떠받드는 대종교에 몸담았던 신채호조차 이 정도였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자칭 건진법사의 천부경 부적이 더 위험한 건 이게 단순히 무당 얘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천부경이, 그리고 천부경이 수록돼 있는 환단고기에 빠진 이들이 선출되지도 않고 감시받지도 않는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박근혜 정부에서 목격했다. 박근혜는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환단고기를 인용해 역사학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린 적이 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올바른 역사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국정교과서 소동이었다.  어떤 분들은 환단고기니 천부경이니 다 ‘논쟁’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다양한 학설 가운데 하나이니 ‘취향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다는 괴문서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어떤 식으로 퍼뜨렸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건 따지고 보면 현실을 조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천부경이나 환단고기는 고대사 연구를 위한 사료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유언비어의 그늘을 연구하는데 유용한 현대사 자료일 뿐이다.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역사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위험한 건 이들이 단순한 옆길로 새버린 역사매니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지극히 위험하고 퇴행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올바른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다양성과 토론조차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환단고기를 장려했던 게 박정희-전두환처럼 국정교과서를 강요하던 군사독재정부였다.  게다가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부동산에 관심이 너무 많다. 이거 매우 위험하다. 이분들은 헬조선의 근본 원인을 ‘우리나라가 땅이 좁아서’라고 판단한다. 이분들은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 정도 영토는 가져야 호연지기를 갖는 국민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질 못한다.(그러면서도 중국 사대주의를 극렬 규탄한다) 그러다 보니 틈만 나면 드넓은 만주벌판 타령이고 치우천황이니 연개소문이 중국을 박살 내고 중국 땅을 정복했다며 정신승리에 여념이 없다.  이분들의 사고방식은 말 그대로 '지금 우리는 달동네에서 찌질하게 살지만,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는 만석꾼이었다'는 열등감 덩어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 기준을 수천 년 전에 그대로 갖다 붙이는 걸 특기로 하기 때문에 2천 년 전 한사군을 현대의 식민지와 등치시키고, 2천 년 전 한사군이 평양에 있다는 걸 지금 현재 평양이 중국의 잠재적 영토라는 식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러니 2천 년 전 한사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민족반역자나 할 소리라 생각하고, 한민족 영토확장을 위해 한사군이 요서 지방에 있어야 한다고 우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해외 부동산 투기를 청동기시대까지 확장하는 땅따먹기 놀이를 위해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반도 구석에 쳐박힌 달동네도 아니고 찌질한 나라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신승리 사관'과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집 크고 땅 넓었다'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이 천부경이나 환단고기 같은 짝퉁이 없어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는 국민들이다. 물론 선무당이나 똥침도 필요없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1-19 | hrights | 조회: 1612 | 추천: 4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이 억울한 수형 생활을 마치고 뒤늦게 상담을 요청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위 간첩 조작 전문변호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판결문을 읽어보자마자 단번에 단순 탈북자를 간첩으로 조작한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탈북자 간첩 조작의 진상을 규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북 악마화와 북맹을 조장하는 국가보안법의 지배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민중은 국가정보원과 안보경찰 등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날조하고 있는 탈북자 간첩조작을 진실로 믿기 쉽다. 국가보안법의 축적된 세뇌 효과에 기인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피해자 유우성, 유가려 남매) 및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 사건(피해자 홍강철씨)의 국가보안법 무죄 확정판결을 계기로 수많은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진상규명에 유리한 환경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안이한 판단이었다.  재심 무죄를 위해 큰 기대를 갖고 찾아온 탈북자 간첩 조작의 피해자들에게는 신속한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의 길은 갈수록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자고 희망을 설파하고 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쳐버린 피해자 중에는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에 의한 탄압을 이유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분도 있다.  재심 무죄를 위한 유리한 국면이 열리기는커녕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을 앞두고 국가정보원과 안보경찰이 합작하여 조작한 가짜 탈북자 간첩 사건이 생기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왜냐면, 북중 국경에서 북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는 범죄(밀무역, 인신매매, 대북송금, 비법도강, 비법통화 등)를 저지른 상습 범죄자를 보위부 비밀공작원으로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 비법월경이나 비법통화 등 탈북브로커에 종사한 범죄경력자를 북의 경찰이 그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정보원으로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북에서 단속 경찰에게 범죄정보를 제공하는 범죄자 정보원은 ‘보위부 스파이’, ‘보위부 눈깔’로 불린다. 한국에서 조직폭력, 마약 범죄자 등을 단속하기 위해 범죄 전과자들의 편의를 봐주며 범죄정보를 수집하는 ‘망원’으로 관리하는 것과 같다. 사진 출처 - <뉴스타파> 애니매이션 시사 다큐멘터리 ‘자백 이야기’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사건(피해자 홍강철씨)에서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합동신문센터 조사관의 증언이 위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다.  “우리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그렇게 정보원을 하다가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탈북자 조사를 하다 보면 정보원을 하다가 왔다는 사람이 진짜 많습니다.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크게 중하게 생각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사건(피해자 홍강철씨)을 계기로 그동안 수많은 간첩을 조작해왔던 상투적 수법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보위부 스파이’, ‘보위부 눈깔’을 보위부 비밀공작원으로 조작한 사건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어느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재판장과 피고인의 대화가 웃프다.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문 : 북에서 생계를 어떻게 유지했나요. 답 : 탈북브로커 일을 하면서 탈북하겠다는 사람들을 탈북도 시켜주고 돈 송금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생활했습니다. 문 : 피고인이 보위부로부터 그 당시 부여받은 임무가 국경에서 탈북브로커 일을 하는 사람들을 파악해서 보고하는 임무인데, 오히려 피고인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인가요. 답 : 예, 했습니다.”  피고인은 유죄판결을 받고 수형 생활을 마쳤다. 현재 재심 준비 중이다. 재판장과 피고인 사이의 우픈 대화는 어느 법정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악마와 같은 탈북자 간첩 조작의 메커니즘은 굳건하다. 대명천지에 문명국가에서 존재할 수 없는 가짜 탈북자 간첩이 국가보안법 유죄 판결문에 나온다.  “고난의 행군 이후 재정이 부족해 공작원에게 지원할 공작금이 없어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을 중국에 파견해 성매매, 음란 채팅, 유흥업소에 종사시키거나 인신매매로 중국의 농촌에 팔아 공작금을 마련하여 활동케 하였다”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을 통해 중국에서 위조달러와 마약을 유통시키며 외화벌이를 하였고, 중국에서 한국인들과 탈북자들을 납치하여 북송하였다”  “국정원 등의 합동신문을 통과할 목적으로 뇌의 기억을 마비시키는 거짓말 탐지기 회피용 밴드 붙임 약물을 개발하여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을 남파시켜 탈북자 합동신문센터에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 통과 후 한국사회에 정착하여 간첩 활동을 하려고 했다”  한국 민중은 위와 같은 판결문의 뒷배가 되는 파쇼악법 국가보안법의 살기등등한 폭압과 위세에 짓눌려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허위자백을 검증할 의지도, 능력도 상실한 지 오래다.  지금 이 순간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탈북자 위장 간첩을 파견하는 기괴하고 악마화된 북을 인식하도록 한국 민중은 수시로 강요, 세뇌당하고 있다. 한국 민중은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국가보안법 유죄 판결문 보도내용을 진실로 믿어버리며 동족에 대한 공포와 불신감을 키우며 동족을 혐오하고 증오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의 지배력 앞에 저항하지 못하고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탈북자 간첩 조작의 진상규명은커녕 가짜 탈북자 간첩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다.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 노예의 사슬을 끊고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역량을 갖추어 나갈 때 비로소 국가정보원과 안보경찰 등이 날조하는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는 탈북자 간첩 조작은 근절될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12-29 | hrights | 조회: 1354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