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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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우 한 달 남짓 살고 이곳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한 것도 있고 이상한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은 메모를 해두었는데, 피차 거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중 서너 가지 소개합니다.  *9유로(euro) 티켓 : 올해 6월~8월 사이에 9유로(13,000원) 티켓 하나로 일반 대중교통인 버스, 기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연방의회에서 시행했다. 석 달 동안 교통비가 9유로라는 말이다. 시내버스 2.9유로(한 달권 55유로), 튀빙엔에서 근처 도시로 전철을 타면 20유로는 기본이기 때문에, 9유로 티켓 있을 때 가고 싶은 데 가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8월 16일에 도착한 우리는 보름 남짓 혜택을 누렸는데, 그 위력을 실감하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기한을 늘이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가스, 전기값 인상에 따른 재원 준비가 우선이라 더 연장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코로나 상황에서도 중산층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버스와 전철이 공영이라 가능한 제도라고 한다. 역사를 보아도 공공재의 사유화, 이걸 두고 선진화, 효율화라고 하는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9유로 티켓 : 이 티켓이 준 안정감이 과연 싸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될까.] * 숲 : 근대 조림(造林)의 선구였던 나라답게 숲이 많다. 숙소 근처의 쇤부흐(schönbuch)를 자주 간다. ‘너도밤나무 숲’이란다. 멀리서 보면 스멀스멀 귀신이라도 나올 듯하다. 저녁 무렵이나 안개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영락없이 미녀와야수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날 그런 모습이다.  귀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춘추좌씨전》에는 옛날 하(夏)나라 우 임금이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한 뒤 거기에 숲이나 강에 사는 각종 귀신의 모습을 새긴 뒤 백성들에게 알려 그들을 피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이 얘기는 뒤집힌 걸로 보인다. 이미 숲이나 강을 이용하며 그 속에 살던 인민들은 숲과 강에 익숙했을 것이다. 정작 숲의 귀신을 몰랐던 것은 우 임금이 아니었을까? 우 임금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몰랐을 것이다. 로빈훗이 노팅엄 셔우드 숲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잡겠다고 왔던 국왕의 군대는 숲속에서 지리멸렬했을 뿐이다. 국가 행정이 주민들이 사는 동네나 그 언저리까지 미친 것은 불과 2세기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런 추측이 거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숲은 사람들이 사과나 딸기 같은 열매, 집이나 외양간 지을 목재, 빵을 구울 땔감,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꿩, 사슴, 멧돼지 등을 공급받는 공유지였다. 강과 함께 숲은 사람들의 생계에 유력한 후원자였다. 잉글랜드 〈마그나 카르타〉나 조선의 《경국대전》에서는 이곳들을 ‘사사로이 점유할 수 없는 공유지’로 못박아놓고 있다. 흥미롭게도 튀빙엔 여행안내소에서 얻은 자료가 16세기 〈튀빙엔 협약(Tübinger Vertrag)〉 사진과 번역문이었는데, 여기에도 농민들의 공유지 이용권에 관한 조항이 명시되어있다. [쇤부흐 숲 : 로빈 훗이 나올 듯한 숲인데, 곳곳에 길이 나 있어 사람들이 걷고 뛴다.] * 걸림돌 : Stolperstein. 걸려넘어진다는 stolpern + 돌 Stein의 합성어이다. 재질은 돌이 아니라 구리이다. 튀빙엔 대학 한국학과에서 본관으로 걸어가다가 이 슈톨퍼슈타인에 발이 걸렸다. 알고 보니 정말 발에 걸리게 0.5cm 정도 도드라지게 설치한다고 한다. 유대인, 집시, 기독교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차별받고 처분된 인간’을 기억하기 위한 조각품이다. 인권연대의 ‘5월 걸상’과 가까운 기억 프로젝트이다. 1940년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보면서 그의 리얼리즘에 놀란 적이 있다. 이후 조금 더 사실을 알고부터는 놀라기보다, [당황(betroffenheit)]이라는 《나치시대 일상사》를 썼던 포이케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놀라서 설마,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뒷머리를 당기는 듯해서 외면할 수 없고 왜 그런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뒤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야 내가 인간일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소피 벨, 여기 살다. 1852년 생. 1942년 추방. 그해 12월 8일 사망.] * 비자 신청 : 석 달 전에 9월 13일 비자 신청을 예약했다. 그 며칠 전에 날짜를 상기시켜주는 메일이 왔다. 고마웠다. 13일 3시에 시청 대기실에 도착하여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지나도 예약번호가 뜨지 않았다. 이상해서 외사과에 가보니 담당자가 결근했다. 그런데 그가 결근한 지 동료 직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무단결근.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이 사람이 어디 사고를 당했던지 아픈가보다, 싶었다.  내가 메일을 보낸 지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내 주민등록이 검색이 안 된다고. 첫째, 주민등록은 이미 했다. 또 서류는 비자 신청 때 접수하면 되는 것이지, 검색 여부와 상관이 없다. 무단결근으로 못 지킨 비자 예약날짜를 다시 잡아주면 되는 거다. 그래도 나는 일단 주민등록 서류까지 메일로 보내주었다. 또 소식이 없다. 내가 다시 메일을 보냈다. 영국도 가야하고 해서 비자가 필요하다, 다시 예약을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혹시나 했던 걱정은 이제 무책임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 27일 2시 반에 오라고 메일이 왔다. 나와 예약 일시를 상의한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오란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형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일시를 나와 상의해서 조정하자는 메일을 쓰려는데, 동료가 말린다. 더 번거로워질 수 있다고. 그날따라 기분도 좋고 다른 약속이 없었던 나는 ‘남의 나라니까’ 하고 참기로 했다.  신청하는 날. 주한 독일대사관 서식에 신청서를 미리 작성해갔는데, 그 서식이 아니라며 튀빙엔 시청의 신청서를 준다. 외무부 서식 다르고, 시청 서식이 다르다? 웃긴다. 기재 내용? 다 같다. 칸과 종이 색깔만 다른 거다. 게다가 혼인증명서가 필요하단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배우자증명서와 외무부의 아포스티유까지 첨부했거늘. 안 된다고 했다가, 나는 이 외에 다른 혼인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다고 항의(?)하니 그럼 알겠다고 한다. 그럴 걸 왜…….  숙소계약서, 대학계약서를 추가로 보내달란다. 숙소계약서가 없으면 주민등록(Anmeldung)이 안 되니, 주민등록 서류를 제출했다는 말은 숙소계약서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숙소계약은 대학 웰컴센터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학과의 초청장과 대학의 협약서가 없으면 숙소계약서는 애당초 발급받을 수가 없다. 쉽게 말해 추가로 요구한 둘은 비자 신청에 전혀 불필요한 서류인 것이다. 지금도 그 직원이 이 일의 담당자가 맞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동료는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한다. 그럴까? 그럴 리 없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무책임이라면 처음일 리가 없다. 어떤 동료의 말로는 독일 공무원은 처우나 사회적 인정이 낮고, 그래서 책임감이나 뭐 이런 거 기대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럴까? “인간은 스스로를 우습게 여긴 다음에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법이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 더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중에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은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더 문제이다. 책임감은 공무원의 덕목에 관계되지만,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은 인간다움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 [튀빙엔의 시위와 장날. 인구 9만의 도시가 갖는 자립성과 안정감이 부럽다. 대도시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에 분산되어 살 수 있는 힘일 텐데, 이걸 잘 들여다보아야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05 | hrights | 조회: 692 | 추천: 8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자유인가  신자유주의는 자유경쟁에 입각한 시장만능주의다.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담긴 고전적 경제 자유주의를 보내고, 자본의 방임적 자유를 통제하면서 자본과 고용을 확대시킨다는 수정자본주의(일명 케인스주의)를 거친 뒤, 동구권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 속에서 20세기 후반에 힘을 얻어온 시장 경제의 흐름이다. 1970년대 후반에 영국과 미국에서 펼쳤던 자유 시장 정책 이후에 급격히 세계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정부의 개입이 경제의 원리를 훼손시킬 수 있으니, 정부는 개인 및 기업의 권리와 사적 재산권을 보호하되 개입은 최소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이에크는 자유를 경제 최고의 가치로 꼽았다.  이때 자유는 경쟁이라는 외피를 입는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국가는 시장이 자유롭게 경쟁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능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가 시장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경쟁이 가능한 한 효과적일 수 있도록 조건을 창출하는 일, 경쟁이 효과적이지 못하면 보완해주는 일” 정도이다. 그에게 자유경쟁은 시장중심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동력이자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까지 한국 사회에서도 대단히 익숙한 주장들이다. ‘루저’를 양산하는 사회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성과를 생산하도록 충동하는 체제를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심신이 피곤해져도 피곤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모든 경제 행위를 자유의 이름으로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자유경쟁의 원리로 넘쳐나며, 자본의 힘으로 돌아가는 시장은 성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인간을 찬양한다. 바빠서 피곤할수록 능력자로 평가받는다.  이런 자유경쟁에는 자의든 타의든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기존의 차별적이고 위계적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든다. 서로를 내몰면서 자유가 만들어놓은 경쟁적 성과 문화가 폭력으로 작동한다. 자유가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는 나름 긍정적인 의도로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인간을 구속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대통령의 자유와 평화  윤석열 대통령은 유난히 ‘자유’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난 2022년 5월 취임사에서는 ‘자유’라는 말을 35번, 8.15경축사에서는 33번, 9월 유엔연설에서는 21번이나 했다. 자유가 위협받고 있으니 자유의 이름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때의 자유란 무엇인가. 누구로부터 어떤 위협을 받고 있으며 연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일까. 9월 유엔연설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자유론은 원론적으로는 무난했다: “진정한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아를 인간답게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고, 평화는 인류 공동 번영의 발목을 잡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가 공동으로 더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입니다.” ‘자아를 인간답게 실현할 수 있을 때 평화의 토대가 갖추어진다’는 의미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일견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좀 더 보면, 어떤 이의 자아가 어떻게 실현된다는 것인지, 정말 온 인류가 그런 기회를 공평하게 갖는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평화가 인류 공동 번영의 토대를 갖추는 ‘계기’인지, 아니면 공동 번영의 ‘과정’과 ‘상태’인지도 불분명하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평화는 일체의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 혹은 실제로 폭력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윤대통령의 유엔연설문에서는 ‘평화가 인류 번영의 토대를 갖추는 것’이라는 애매한 말로 끝내고 만다. 평화는 인류 공동 번영의 과정이자 상태이고 결과이자 목적이지만, 연설문에서는 평화를 번영의 원인인 것처럼만 말한다. 뭔가 논리와 범주가 맞지 않는다. 윤대통령은 평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앞선 문장에서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말을 서너 번 이상 사용했을 때 그의 자유와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위협인지 예측은 되었지만, 그때까지도 분명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진영논리인가  그러다가 연설문 말미에 윤대통령은 유엔의 의미를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유엔이 창립된 직후 세계 평화를 위한 첫 번째 의미 있는 미션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이 진영논리에 입각한 대단히 이념적인 발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자유경쟁에 입각한 경제 규모의 확장을 자유의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자유가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어서 인간을 다시 속박으로 몰아넣고, 특히 온갖 ‘루저들’을 양산할 수 있는 모순적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인류 공동 번영의 발목을 잡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가 더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이라는 앞선 말을 뒤집는 모순적인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윤대통령에게 자유와 평화는 정말 인류 공동의 것인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누군가 어떤 세력은 배제하는 차별적인 것인가. 냉전과 대립의 언어를 넘어서야  현재 전 세계 193개국이 유엔 회원국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정치적 이념, 권력의 의도와 상관없이 유엔에 가입해 있다. 그런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을 “유엔 창립 이후 첫 번째의 미션이었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한국전의 당사자였던 북한과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 등 이른바 사회주의국가와 사실상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언어를 써야 했을까.  유엔은 대한민국만 합법적인 정부로 여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유엔 성립 초기에 미국적 질서에 따라 그렇게 했던 역사도 있고,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파병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유엔은 원칙적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것이다. 유엔의 논리 안에서 한국과 북한은 대등한 한 표를 지닌 별개의 나라이다. 이런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80여년전 언어를 구사했어야 했을까. 윤대통령이 자유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급기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운운하는 옛말을 꺼냈을 때, 그의 자유가 인류와 한반도의 특정 세력에게만 유리한 자기중심적 자유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출처- pixabay 자유인가 이기성과 불안감인가  자유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이다. 자유는 ‘준비된 자신[自]으로부터 나온다[由]’. 나아가 자신의 자유가 타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도록 할 때 진짜 자유가 된다. 자기중심성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자유를 다시 억압하는 힘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남발하다시피 하는 그 심층에는 이기성과 불안감이 있다는 뜻이다. 남발하는 자유에 편승하는 대중의 언행도 불안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증거이다.  자기중심적 자유는 타자에 대해 도전하고 타자를 속박한다. 당연히 그 타자도 자유의 이름으로 나에게 도전해온다. 이런 식으로 ‘자유들’의 경쟁이 서로를 속박으로 몰아넣는다. 자유의 이름으로 북한에 대립하면 북한도 더 대립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 뿐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종종 북한을 이용하는 중국도 한국을 다시 압박하는 전략으로 이어가지 않겠는가.  북한은 선동과 구호의 나라이다. 동네와 거리 곳곳에 각종 구호가 담긴 현수막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각종 하향식 축제도 인민의 일치단결을 위한 구호로 넘쳐난다. 그러나 그런 선동적 구호는 선동과 구호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북한 사회의 속내에 대한 역설적 증거이다. 이것이 남한에 대한 대립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이다. 윤대통령이 반복하는 자유의 심층에는 특정 세력, 가령 이른바 ‘사회주의’에 대한 대립과 적대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런 대립적 자유는 다시 스스로를 억압과 속박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억압을 더 공고하게 만든다. 자유는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해체시켜 나갈 때 얻어지기 시작한다. 자유라는 말을 유통시키면서 특정 세력을 억압하는 모순적 구조를 안으로부터 뒤집어 그 속박을 풀어나갈 때, 속박이 느슨해지는 그만큼만 자유는 서서히 모양을 드러낸다. 자유가 자신을 위한 일시적 달콤함에 취해 남도 죽이고 결국 자신마저 죽이는 마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9-27 | hrights | 조회: 567 | 추천: 10
임아연 /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의 삼촌 또는 아버지 세대만 해도 ‘고향’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서울이나 인천에 사는 사람 중의 절대다수는 서울 이외의 지역이 고향이었다. 경상도에서 온 사람, 전라도에서 온 사람, 충청도에서 온 사람… 저마다 고향이 있어 명절 때면 고향 가는 인파들로 도로 곳곳이 마비됐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고향’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이 제법 많았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와 같이 농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우리 어머니·아버지 세대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시골 어르신들을 찾아가 퀴즈를 풀거나, 자식들에게 영상 메시지를 보내는 예능도 큰 인기를 끌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TV 프로그램에 울고 웃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이 사회 전반에 대중적으로 공유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80년대생들이 부모가 되면서 고향이라는 개념이 무너져가고 있다. 아버지·어머니의 고향은 존재하지만 ‘나’의 고향은 서울이나 인천 등 대도시가 대부분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온 세대에게 시골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과거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고향 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췄다. TV 프로그램에서 시골을 배경으로 방송하는 것은 여행이나 맛 기행 정도가 대부분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10여 년 전부터 정년퇴직을 마친 노년들이 고향에 내려와 사는 귀촌이 늘고 있고,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 소도시에서는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귀농·귀촌인에 대해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마저도 지역의 인구를 늘게 하는 지속 가능한 정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불과 10~20년만 지나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역을 찾을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미지 출처- 해남우리신문 대도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방소멸이 대수냐고 물을 수 있다. 우리나라 전체적인 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력이 없는 지역은 통폐합해 행정을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지역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고유의 문화를 축적하며 지역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지역의 소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투리다.) 인류 문명이 생물의 다양성에 달려 있듯,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 또한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돼왔다. 여러 가치가 공존하고 다양성을 존중받는 사회가 그렇지 못한 획일화된 사회보다 유연한 사고와 건강한 토론이 가능하고, 폭넓은 논의를 통해 사회의 발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지방소멸이라는 지역의 위기를 막는 것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문제로 다가왔다. 불과 한 세대를 지나면서 ‘고향’을 잃었듯, 머지않아 우리는 ‘지역’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지구종말시계가 인류멸망 100초 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데, 지방소멸시계는 1분도 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22-09-21 | hrights | 조회: 417 | 추천: 11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이 좌천되어 대구고검 검사로 있을 때 얘기다. 고검장 주재 회식이 열리면 윤석열이 화제의 70% 이상을 독점했다고 한다. 당시 대구고검장은 윤석열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사법시험은 빨리 된 선배였는데, 윤석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자리를 장악했다고 한다. 위계가 강한 검찰 문화에선 이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고검장은 신이 나서 떠드는 윤석열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 이 사람은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는 사람이구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는 옛말이 아니다. 아는 것의 10배를 떠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틀린 사실이 많고 억측도 많았을 거라는 얘기 아니겠냐고, 이 말을 전해준 사람은 촌평했다. 달변가 아닌 다변가  도리도리와 에……응?…… 아니면 말을 잇지 못하는 윤석열은 달변가가 아닌데도 말하는 걸 좋아하는 다변가로서 어느 자리에서든 화제를 독점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습성이 있다.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것처럼 떠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해서 본인 주장이 허위로 드러나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장삼이사라면 가까운 친구들은 피곤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별문제가 없다. ‘일개’ 검사라면 해악이 있겠지만 해악의 크기는 제한적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검찰총장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누가 봐도 무식한데 정작 본인은 무식한 줄 모르고 경청할 줄도 모르는 오만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가장 큰 권한이 주어졌고, 사회적 해악의 크기도 비례하여 커지고 있다.  얼마 전 강경보수 성향의 <문화일보>는 대통령이 회의에서 70% 이상의 말을 독점해 참모들의 입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석열을 “말의 점령자”라고 표현했다. 참모들의 말을 경청하고 합리적인 논쟁을 하더라도 뒤탈 없는 결론을 내기가 어려운 게 국가의 일인데, 정치도 경제도 정책도 잘 모르는 사람이 모든 게 ‘이 손안에 있소이다’라며 나대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취학연령 하향 정책이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교육부 장관이 준비도 없이 불쑥 꺼냈다가 여론의 대대적인 역풍을 맞았다. 무식한데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대통령과 직언 따위는 사전에 없고 알아서 기는 법만 익힌 무능한 참모가 합동 연출한 촌극이다. 대통령이 일대일 면접 보듯이 각 부처 장관으로부터 독대 보고를 받는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다. 대통령도 초짜, 장관도 초짜인데 업무보고를 독대로 한다는 건, 엊그제 면허를 딴 초보 조종사 둘이 점보 항공기를 조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운이 좋아 큰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승객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내리겠다고 난리가 날 것이다. 정부 시스템의 기본 작동 원리를 무시한 아마추어적 통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 사례가 취학연령 해프닝이다. 윤석열 정부를 관통하는 무의식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듯 보이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가 윤석열 정부의 실패를 관통하는 무의식의 현상(現象)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본인의 무지와 오만, 참모들의 아부 근성이 이 정부 사람들 의식의 밑바닥에 심연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그 도저한 시대착오적 마인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유전자 깊이 새겨진 본능의 흐름이어서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 사태의 근본 원인을 알지 못하니 대증 처방에 그칠 수밖에 없고 그 처방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집권 초기 정부로서는 유례가 없는 처참한 지지율에 당황하여 박순애를 경질하고 대통령 비서진을 개편했지만 유사한 해프닝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을 기념하여 대통령실이 공개한 회의 사진과 반지하 주택 수해 참사 현장을 동물원 구경하듯 내려다보는 사진 역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 사진들의 공통점은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는 것인데, 특히 수해 참사 현장 사진의 경우 참모의 시선이 수해 현장이 아니라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대통령의 옥음을 생생한 표정과 함께 시청각적으로 이해하려는 참모의 순박한 충심이 느껴진다. 사진 출처 - 대통령실  대통령실 소파 회의 사진의 경우 애초 콘셉트부터 에러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이 따라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바마 백악관 사진의 경우, 탈권위라는 명확한 콘셉트 아래 연출 없이 사진을 찍어 대통령이 주인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참모들 속에 파묻혀 있거나 저 멀리서 혼자 전화를 받고 있다. 40대의 젊은 대통령으로서 권위를 내려놓고, 자유분방하게 국정을 운영한다는 집권 철학이 거짓 없이 사진에 드러나 있어서 세계인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실의 회의 사진은 대단히 어색하다. 전하고자 하는 콘셉트가 탈권위인지, 업무에 대한 열정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멋진 모습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 세 가지를 모두 보여주려고 각자의 포지션에 맞게 역할을 지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연출한 티가 너무 강하게 났다. 사진 출처 - 대통령실  나는 연출 여부보다도 이 사진들을 고른 참모들의 권위주의적 멘털리티에 주목한다. 이런 사진은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여러 장 찍게 되므로 최종 단계에서 어떤 사진을 선택하느냐에 공개 주체들의 의지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사진들은 국민 마음이 아니라 대통령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겠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고를 수 없는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국민의 시점이 아니라 대통령의 시점에서 사진을 골랐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윤석열 정부가 국정에 임하는 자세를 폭로한다. 대통령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홍보수석을 바꾼다고 달라지겠는가.  대통령 사진 공개와 같은 이미지 홍보의 최종 목적은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대중선전의 기본조차 망각할 정도로 (윤석열의) 자아도취와 (참모들의) 아부 근성은 이 정부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은 본능이 시키는 일이어서 고칠 방법이 없다. 오만과 아첨이 만나 피워낸 무능이라는 곰팡이가 새 정부 출범 반년도 안 되어, 나라 곳곳을 퀴퀴하게 만들고 있다. 검찰에서 갈고닦은 무오류 신화와 유체이탈  윤석열의 무지와 오만은 오랜 검사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질병 같은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모두가 칭송하니 지성을 연마할 필요가 없고, 무슨 잘못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오만에 빠진다. 누구도 우릴 건드릴 수 없고, 제 팔을(동료를) 자를 때도 우리가 필요하면 자른다는 자신감은 검찰을 집단 무오류 신화에 젖게 했다. 박순애는 윤석열의 명령을 이행한 하수인일 뿐인데 박순애를 경질하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는 것은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검찰의 무오류 신화란 이런 것이다.  검찰은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듯 세상을 보는 유체이탈의 화신이다. 법을 집행하는 자신들은 법 위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부인과 장모의 범죄행위에 관대할 수 있는 이유도 검찰에서 갈고닦은 유체이탈 사고방식 덕분이다. 물론 검사 중에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윤석열의 경우, 검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수준의 도덕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독재정권이라며 어퍼컷을 날리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여당을 장악하려 삼권분립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왕처럼 굴면서도 스스로 떳떳하다. 자기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검찰의 유체이탈이란 이런 것이다.  윤석열이 이런 사람인 줄 마치 몰랐다는 듯이 이제 와서 대통령제의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는 논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강준만 교수 같은 사람이 그러한데, 분량의 한계상 이만 줄인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따로 정리하겠다. 윤석열은 항우 같은 혼군  무지하지만 겸손하거나 똑똑하지만 오만한 대통령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무지한데 겸손하면 호가호위 세력이 창궐하여 부패와 협잡이 판칠 개연성이 높아진다. 대통령이 똑똑한데 오만하면 국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국정을 그르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무지와 오만, 두 가지 악덕을 모두 가진 대통령이라니…. 구만리처럼 남은 임기 동안 어떤 희한한 일을 벌일지 나도 모르게 걱정과 한숨이 새어 나온다.  예로부터 혼군(昏君)과 간신은 한 세트였다. 현군(賢君)과 충신이 한 세트인 것과 같다. 혼군 곁에 충신 없고 현군 곁에 간신 없다. 입속의 혀처럼 구는 간신을 좋아하고 바른말 하는 충신을 멀리해서 혼군이다. 혼군에게 간신을 끊으라고 하는 것은 똥개에게 똥을 끊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윤석열 본인이 능력 위주로 인사를 한다고 했고, 자기 기준으로는 능력이 있는 인사들만 모셨다는데 말해 무엇하랴. 참모를 바꾼다 해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혼군에게 국정 쇄신을 촉구하는 것처럼 무망한 일은 세상에 없다.  윤석열 본인이 손바닥에 왕(王)자를 쓸 정도로 왕이 되길 원했으므로 이런 비유도 가능할 것이다.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 가운데 비슷한 유형을 찾으라면 윤석열은 항우 같은 혼군이다. 스스로 무적의 장수라고 으스대면서 현명한 참모를 멀리하고 사리사욕에 가득 찬 간신을 중용한다. 한때 전투력으로는 항우가 유방을 압도했으나 최종적인 승패의 열쇠는 리더 본인의 자질에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지금 형세를 요약하면, 도처에 계견승천(鷄犬升天)이요 성호사서(城狐社鼠)다. 한 사람이 권력을 얻으니 그 집의 닭과 개까지 권세를 누리고, 성벽에 여우가 살며 사당에 쥐가 살아도 잡지를 못한다. 닭과 개와 여우와 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아실 줄 믿는다. 가장 심각한 것은 대통령 자신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고도 스스로 잘못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장자>가 말하는 해군지마(害群之馬, 무리를 해치는 말)가 바로 윤석열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9-07 | hrights | 조회: 1081 | 추천: 41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의당이 듣도 보도 못한 걸 시작했다. 31일부터 닷새 동안 정의당 소속 비례대표 5명에게 총사퇴 권고 여부를 묻는 당원 총투표를 한다고 한다. 물론 가결이 된다고 5명이 자동으로 의원직을 잃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전혀 없다. 다만 총사퇴를 ‘권고’하는 것일 뿐.  이런 황당한 소동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정의당 전 수석대변인 정호진이 7월 5일 비례대표 총사퇴를 요구하는 당원 총투표를 제안했다고 한다. 정의당 의석은 6석이고 그 중 심상정(경기 고양갑)을 뺀 5석이 비례대표인데,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참패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비례대표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자는 것이다. 정호진은 “비례대표 5석을 통해 ‘달라지는 정의당’을 보여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1002명이 당원 총투표 발의 서명부를 제출했고, 당권자 937명의 유효서명을 받아 당원 총투표에 돌입하게 됐다고 한다.(심상정은 왜 사퇴 권고 대상에서 빠진 것인지는 따지지 말자. 아마 총투표 제안한 분도 잘 모를 것 같다.) 출처 - 한겨레  당원 총투표는 대한민국 정당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다만 썩 아름답게 기록될 것 같지는 않다. 가결이 된다면 되는 대로 부결이 된다면 되는 대로 소모적인 갈등과 분열은 불가피해 보인다. 만약 가결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의당 의원 5명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고, 사퇴를 거부할 수도 있다. 반대로 부결이 되면 어떻게 될까? 정의당 의원 5명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고, 사퇴를 거부할 수도 있다. 혼란과 갈등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 게 ‘달라지는 정의당’일까? 임기 시작한 지 2년쯤 지난 초선의원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는 발상도 참 난해하기만 하다. 더구나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에는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동의가 안된다.  물론 정의당 의원 6명에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거야 당연한 노릇이다. (나도 불만 많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정권교체 프로파간다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청년정치’에 부화뇌동해 경험이 일천한 의원들을 발탁한 건 누구였을까. 정의당이 당원의 뜻을 모아 이들 5명을 의원으로 선출해놓고 2년만에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라고 하는 건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이고,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우는 갓난아기 달래려고 할머니가 의자 때리는 시늉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다.  당원 총투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끝내고 돌아온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 자칭 '축구팬'들이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라며 엿을 집어던지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해 정말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엿 뒤에 숨어 버렸고, 선수들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 엿놀음 덕분에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할 가능성은 당연히 0%였겠고, 솔직히 엿 집어던지던 사람들이 K리그 발전을 염원하며 프로축구 경기장 한 번이라도 찾았을지도 의문이다.  당원 총투표가 실망스러운 건 작금의 행태가 ‘숙련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반정치주의, 장기적인 안목을 갖는 전략적인 사고가 아닌 단기실적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두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가치 반대편에 있다. 정치인 하루 이틀 한다고 훌륭한 정치인 되지 않는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우리에겐 정치 입문 2년차인 현직 대통령이 있다. 정치인이란 숙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의당 의원 5명을 숙련노동자로 육성해 정의당과 진보정치의 자산으로 삼는 방향을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이번에 당원 총투표가 가결되고, 압력에 못이겨 5명이 모두 사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새로운 5명이 의원직을 승계할 것이다. 새로운 5명은 당연히 국회의원 경험이 전혀 없는 초짜들일 테고, 준비 기간마저 짧으니 실력도 분명히 떨어질 것이다. 당연히 실수도 많을 것이다. 2년만에 의원들을 다 갈아치웠으니 다음 5명은 1년만에 갈아치우지 못할 이유가 뭐겠는가. 그 다음엔 뭐 깔끔하게 6개월짜리,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직으로 의원단을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설마 정의당이 추구하는 목표가 모든 당원에게 국회의원 뱃지 한 번씩 달아주기인 것일까? 계속 갈아치우다 보면 언젠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훌륭한 의원님이 나와서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는 기대라도 하는 건가? 전직 국회의원이 늘어나니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에서 목소리 더 높일 수 있는 효과 하나는 확실하겠다.  정의당이 겪는 혼란은 정의당보단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에게 더 중요한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민주당에선 당원들의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당헌 개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에서 논의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정의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도화했다. 정의당 당헌당규는 당직선거 투표권을 가진 당원(당권자) 5%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당원 총투표’를 발의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같은 일을 겪고 있다. 이게 민주당이 추구해야 할 길일까?  한때 직접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설레곤 했다. 선거를 통해 뽑혔다는 대통령과 국회 하는 짓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던 때였다.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란 허울을 쓴 저들의 민주주의를 이겨낼 대안처럼 보였다. 경험이 쌓이고 보니 순진한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직접민주주의 실험으로 칭송받는 주민참여예산마저도 실제 경험해보면 직접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 더 강하게 느껴진다. 참여민주주의를 그토록 강조했던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지리멸렬했는지 떠올려 보자. 주민투표는 아이들 밥그릇 뺏는 용도로도 악용될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극명히 보여줬다. 노무현-문재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참여'를 강조했고, 그럴수록 청와대는 국회(정치)와 멀어져 버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직접(혹은 참여) 민주주의보다는 오히려 더 책임감 있는 대의민주주의 아닐까?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8-31 | hrights | 조회: 636 | 추천: 5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을지 프리덤 실드(UFS, 을지 자유의 방패)’라는 새로운 이름의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진행 중이다. 소위 연례적, 방어적 성격의 연합방위태세 향상을 통한 대북 억지력 강화가 변함없이 회자된다. 레퍼토리가 어제도, 오늘도 거의 똑같다.  이번에는 레퍼토리가 조금 변하긴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주창한다.  ‘주적론’과 ‘선제타격’을 외치는 대북 적대 정권은 지난 정권에서 북의 눈치를 보느라 축소 시행되어 온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야외 실기동훈련까지 정상화해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보를 지키겠단다. 추락한 정권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큰 치적이라도 되는 양 정권 홍보에 열중이다. 외세의 눈치는 보면서도 동족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를 향한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고 촉진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하여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연기, 축소 시행이 있었을 뿐이다. 노복에게는 축소 시행할 권한이 없기에 그 무슨 눈치 때문에 정할 일이 애당초에 없다. 더더욱 ‘비정상의 정상화’ 권한도 없다. 모두가 그토록 추종하는 상전이 결정할 일이기에.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종북몰이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외세와 그를 추종하는 극우 보수세력밖에 없다. 전임 정권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 허위사실의 유포까지 서슴지 않는다.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친북 정권의 프레임을 갖다 붙인다. 오로지 정권의 안위를 위하여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안보 장사꾼에게 ‘을지 프리덤 실드’는 전 정권에 대한 종북몰이용 공격 소재로 쓰이는 도구가 된다. 을지 프리덤 실드(UFS) 연합연습의 사전 연습인 위기관리연습이 시작된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아파치 헬기가 비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외세 추종의 동족 대결에 앞장서는 정권의 ‘비정상의 정상화’ 구호가 횡행한다. 여기에 의문부호를 달아서는 안 된다.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작전지휘권을 가진 외세에 의존해 외세의 핵 무력을 동원한 참수, 점령, 북 정권 격멸의 전쟁연습을 숙달하기 위한 연합 군사훈련이 도발이 아니라 억지력이라고 믿어버리는데 익숙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핵 항공모함, 전략 핵 폭격기, 핵 잠수함의 한반도와 그 주변 전개는 북의 핵 보유 전에도 대북 억지력으로 포장되었다. 지금은 핵우산을 통한 대북 확장 억지력으로 포장되어 우리 국민 모두가 체감하는 강력하고 공고한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탈바꿈하였다. 국가보안법의 위력에 갇힌 세뇌사회의 처참한 비극이다.  하지만, 외세와 안보 장사꾼이 쌓은 사상누각의 모래성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외세는 전 세계의 패권과 지배력 유지를 위하여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작전지휘권을 틀어쥔 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위한 대화와 협상을 회피하고 거부하며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영구적 시행과 군대의 항구적 주둔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억지력의 모순이 작동한 듯 어느 순간 강대강의 힘의 역관계가 한반도에서 팽팽하게 펼쳐지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의 핵 전략자산의 연례적 수시 전개에 대응한 북의 대미 억지력도 갈수록 강화되었다. 미국의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지목된 북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보유국이 되었다. 대미 억지력으로서 북의 핵 무력은 최근 북 지도자의 연설에서 핵 선제타격 결행의 조건이 언급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북의 전술핵 실전 배치 가능성까지 추정되고 있고 북의 7차 핵 실험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오늘에 이르는 한반도 분쟁의 격화 과정에서 핵전쟁 발발의 심각한 위기로의 질적 변화는 핵보유국 간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지는 위기의 가속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북미 간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정치적, 외교적 해법을 추구하지 않은 결과다.  북미 간 군사적 억지력 강화가 낳은 군비증강의 악순환이 문제의 본질로 뚜렷이 드러났다. 강대강 국면에서 위기를 관리할 방법은 없어지고 있다. 대화와 협상으로 복귀하는 일밖에 없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 해법을 추진해야 한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에 따라 이뤄지거나 추진되었던 북의 핵 실험 중단,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중단, 9.19 남북군사합의, 비무장지대(DMZ) 내 전방초소(GP)의 철거, 대북제재 해제, 정전체제의 종식과 항구적 평화체제의 구축 등이 바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정상화의 정상화다. 북미 간 적대관계의 해소가 문제 해결의 열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북미 간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 종전을 위한 중재자 시늉이라도 하기는커녕 정상과 비정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정권의 역주행이 거침없다.  ‘을지 프리덤 실드’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한 북의 대응은 필연적이다. 우크라이나 문제, 대만해협 문제와 맞물리며 한미연합 군사훈련은 전 세계적 차원의 심각한 군사적, 외교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을지 프리덤 실드’는 세계적 차원의 핵전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천만의 대책 없는 전쟁연습이다. 주권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우리의 경각심이 필요한 때다. 외세와 그를 추종하여 동족 대결을 심화시키는 극우 보수 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08-24 | hrights | 조회: 591 | 추천: 3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졸옹(拙翁) 홍성민의 문집 <졸옹집(拙翁集)>에 실린 글 중에 <촉견폐일설(蜀犬吠日說)>이란 작품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촉견폐일’은 ‘촉(蜀)나라 개(犬)는 해(日)를 보면 짖는다(吠)’라는 뜻인데, 촉나라는 산이 높고 안개가 많아서 해가 보이는 날이 적기 때문에, 개가 해를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촉견폐일설>은 이런 촉나라 개의 행태에서 성인을 헐뜯고 모함하는 소인배의 작태를 유추하여 현실 세태를 비판하는 고전 수필이다. 출처 - 화순군민신문  고사에서는 개가 해를 보면 짖는다고 하지만, 지은이는 사실 촉나라 개는 해를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그것이 일상과 다름을 보고 짖는” 것이라 해석한다. “(개는) 촉나라에서 태어나고, 촉나라에서 자라서 다만 촉나라의 하늘만 보았을 뿐이고, 촉나라 이외의 하늘은 보지 못해서 오직 촉나라의 하늘에는 항상 비가 있다는 것만 알고, 촉나라 밖에는 늘 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촉나라 개가 해를 이상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고 짖는 것은, 촉나라 개의 “천성이 천하의 개에 비해 실제로 다른 게 아니라 그 개가 촉나라에서 태어나 익히고 익숙해져” 그렇게 되었다고 풀이한다.  이런 ‘촉견폐일’의 고사에서 유추하여 지은이는, 본데없는 소인(小人)이나 범인(凡人)이 ‘비=악(惡)’에 젖어 있어서 ‘해=성인(聖人)’을 보게 되면 정상이 아니라고 ‘짖는’ 세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바른말을 하는 올곧은 사람들을 보면 소인배가 가만두지 않고 모함하는 이유를, 일상화된 악에 익숙해진 데서 찾는다. “한 세상의 어둡고 더러움이 촉나라 남쪽의 항상 비가 내리는 것보다 심하며, 세상 사람들이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올바름에 대해 짖음이 촉나라 개가 해를 보고 짖는 것보다 심하다. 이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세상 사람이 다만 사악함에 익숙해져 그 올바름을 모를 뿐이다.”  지은이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촉나라 개가 짖는 것이야 그저 해를 보고 짓기 때문에 “스스로 짖을 뿐이며 해에게는 병이 되지는 않으나 사람이 올바름을 보고 짓는 것은 다만 짖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병”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가 짖는 거야 기실 인간사에 별다른 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권모술수와 거짓에 능한 간사한 무리가 ‘짖어대는’ 것은 단지 ‘개소리’에 그치지 않고, 정정당당한 행실과 바른 생각(과 말)을 역으로 나쁘고 잘못된 언행으로 매도하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만드는 병폐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을 조롱하고 몰상식이 상식을 경멸하며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정도(正道)인 척하는 도착(倒錯)은 조선 중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나랏일 한다는 양반들’이 앞장서서 그런 착란(錯亂)과 전도(轉倒)의 세태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도 매한가지다. 21세기의 20년도 훌쩍 넘어선 지금도 정권 핵심 세력 내부에서 ‘검사회의’는 구국 충정의 발로로 아무 문제가 없고, ‘총경회의’는 ‘하나회의 12․12와 쿠데타’에 준하는 상황이라고 매도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와 16명이나 죽인 흉악범들을 정당하게 추방한 사건을 마치 북한 정권의 비위를 맞추려고 자발적 탈북자들을 강제로 송환한 사건으로 둔갑시키려는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잇따르고 있다.  너무 빈약한 국가관을 지닌 권력 엘리트에게 너무 큰 권한이 위임된 현실도 염려스럽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는 고사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이익만을 꾀하는 정치 모리배가 당치도 않은 억지 궤변과 허튼소리를 남발하는 것은 더욱 우려스럽다.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은 이제 거의 ‘애교 멘트’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 정권 여기저기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난무하고 있다. “너는 빨갱이야!”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 어떤 증거도 사실관계도 통하지 않았던, 냉전 수구 반공주의의 색깔론도 꺼내 들 태세다. 하기는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살아있다.  동양의 옛 성현은 권력자들이 불의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정의라고 강변할 때, 그것을 불의라고 ‘바르게 이름 붙이는 것’, 즉 정명(正名)이야말로 정치의 ABC라고 설파했다. 정치에서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말(명분, 논설)은 정치만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 나아가서는 인륜까지도 오염시킨다. 더욱이 실제에 걸맞은 말을 쓰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므로, 정략적 견강부회나 의도적인 ‘뻥튀기 공약(空約)’은 사회적 신뢰 자체를 파괴하는 악이 된다.  악을 보고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악을 보고도 악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이다. 바보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하는 바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바보짓이다.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이치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정부”인 실제를 직접 보고 있는데, 현 정부가 표방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웬만한 외국인들도 다 아는 사정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인간을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진실, 정의, 올바름을 매도하고 배척하는 짓거리가 빈번해지고, 그것이 일상화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면, 세상은 거짓, 불의, 모략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사고의 착란에서 벗어나 최소한 촉견(蜀犬)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말이 명실상부한 것인지-특히 권력자들의 말이 실제에 부합하는 말인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줄로 안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2-08-03 | hrights | 조회: 853 | 추천: 9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1.  큰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의 일이다. 아이가 어디서 작은 토끼를 데려왔다. 내내 토끼와 같이 놀던 아이는 학교에 가면서 애비에게 잘 돌보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는 감나무와 화초가 조금 있는 마당에 토끼를 풀어놓았다. 집안에 있었으니 답답했으리라 생각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토끼를 찾았다. 그때야 나는 생각나서 찾아보았으나, 토끼는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것이다. 순간 몇 년 전, 마당에서 병아리를 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범인은 고양이였다. 아차! 하지만 차마 나는 아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점점 토끼를 찾을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아이 눈에서 뚝뚝 눈물을 떨어졌다. 그때의 미안함이란……. 그러면서 마음 한 켠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저렇게 아파할 줄 알면 사람 노릇은 하겠구나.” 출처 - 직접 촬영 (전주대, 우석대, 원광대 학생들이 함께 플래카드를 걸어두었다. 위는 한 역사동아리의 플래카드이다.)  1.  “8년이면 충분하다, 진실을 밝혀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모든 국민의 의무입니다.” 최근 학교 정문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 길을 가던 사람이 말했다. “아직도 세월호 얘기야?” 순간 내 속에서는 두 가지 마음이 오갔다. 하나는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안다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반감. 다른 하나는 사건 이후 만 8년이 지났는데 사회의 상례(喪禮)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역사를 공부하는 나도 조선의 예학(禮學), 예송(禮訟)에 대해 허례허식이라고 단죄하는 관점을 먼저 배웠다. 귀찮고 쓸데없는 절차라고 말이다. 같이 살던 사람과 영원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들이, 그 헤어지는 아픔을 연착륙시키는 장치가 상례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거기에 고인과 가까웠던 정도를 구분해서 부모는 3년, 8촌은 석달, 하는 식의 5복(五服)이 있었다. 아무렴 살았을 때 맺은 관계가 엄연한데 뭔가 마음이든 생활이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이런 절차를 허례라고 가르치는 교과서도 있다. 우리 사회의 경박한 애도, 심지어는 애도에 대한 모독이 발견된다면 이런 교과서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경험,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입이라도 다물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경황없는 와중에 병원 장례식장에서 00상조회가 하라는 대로 어머님 상을 치렀다. 대도시에 살고 있던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친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으니 상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삼년상의 절차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삼일장이나마 잘 치르는 게 다행이었다.  개인의 경우든, 세월호 같은 사회의 경우든, 상례에 준하는 연착륙 과정이 있어야 한다. 왜?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자식이 죽자 슬픈 나머지 눈이 멀어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고사를 남겼던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조차도 자식을 잃은 뒤의 여생을 살아야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에서 빠져나와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고인(故人)과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아내, 자식, 친구, 동료, 그리고 이 사회 사람들과도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과 다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조회의 도움으로 사흘만에 가까스로 상례를 마치는 것은 바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는 3년씩 부모님 무덤을 지키는 여묘살이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삼우제, 상식, 졸곡을 챙기기에도 어림없다. 부모님도 그럴진대 하물며 친척, 친구, 스승과 제자, 동료의 관계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마음속에 풀지 못한 응어리로 생기는 정신질환이 있다면, 현대사회의 상례가 허겁지겁 치러지면서 너무도 많은 관계에서 영원한 이별이 어설펐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가정하고 있다.  정문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며 다시 사회의 상례를 생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원인 규명이 늦을 수도 있고, 규명한다 해도 미흡할 수 있다. 그래서 상례가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까이는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와 선생님들, 친구들부터,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시민들까지 어정쩡한 상례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삶이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이 지루할 수 있는 상례를 인간답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진상을 알고 어디까지 알지 못하는지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갖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위정자가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시민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과연 이게 정당에 따라, 지지 세력에 따라 다를 일인가.  1.  그러나 나는 어떤 정치인들에게는 이런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정치인들이 사회를 타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시민들끼리만이라도 타락을 늦추거나 막아서, 우리가 사람답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싶다.  세월호뿐 아니라 산업재해 등 사람의 사상(死傷) 사건 끝에는 보상 문제가 나오고, 그 보상 과정을 두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들이 나오기도 한다. ‘자식 팔아 운운’하며 그 보상 논의를 모욕하거나, 자식 잃고 단식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하는 망동이 대표적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멀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조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인간 집단들은 사람 목숨에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나 양으로 자식이나 형제의 죽음을 대체하려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 목숨은 목숨으로만 대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보상 또한 공통으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이때의 보상은 “그 목숨과 죽음을 재화로 잴 수도 보상할 수도 없지만, 이 재물을 받아주셔서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의미이다. 즉 보상은 목숨값이 아니라, 반대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지만 참회하니 용서해달라는 간청의 뜻이다. 기념비를 세우든, 글을 지어 추모하든, 재물로 보상하든, 거기에는 측정할 수 없는 인간 자체의 가치에 대한 경외와, 상심하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예의가 있었다. 가족들의 상심이 너무 커서 보상에 만족하지 못하면 친지들이 나서서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보상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런 마음들이 오고가면서 사회는 살만한 곳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는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조심스럽고 품격 있는 방법을 찾아왔다. 노자(老子)는 3천 년 전에 이미 승전(勝戰) 행사는 상례로 한다고 천명했다. 전쟁조차 이러할진대 안전사고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는 ‘자식팔이’, ‘먹고 떨어져라’ 같은 비루하기 그지없는 이 사회 일각의 타락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인류의 경험을 보여준다. 타락이 만연하면 그곳이 곧 지옥이다. 다행인 것은 많은 역사의 경험은 우리가 다른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2-07-12 | hrights | 조회: 773 | 추천: 12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생각해 보니 두어 달쯤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뉴스와 소식들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분노와 역겨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안 보고 안 듣고자 애썼던 결과, 마음이 좀 편해지는 듯했습니다. 결국 특별히 관심이 있는 일도, 굳이 하고 싶은 일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스갯소리 그대로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경지에 이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찾아온 무기력감이 점점 심해질 즈음, 책 한 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삶>(권기석 양민철 방극렬 권민지 지음, 2022년 북콤마 발행)은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는, 적어도 밥을 굶는 사람들을 현실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민낯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국민일보 편집국 이슈&탐사2팀이 2021년 9월 중순에서 10월 초까지 연재한 시리즈 기사 ‘빈자의 식탁-선진국 한국의 저소득층은 무엇을 먹고 사나’를 엮어내면서 기사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생생하게, 더 깊고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덜 먹고 못 먹고 살겠지’라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 이른바 빈자(貧者)들의 실제 식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식사 빈곤 문제는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넘어 선택권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고전적 의미의 아사는 사라졌다. 다만 밥은 먹지만 피자는 못 먹는다. 밥은 먹지만 치킨은 못 먹는다. 결식에서 영양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굶지 않는다고 인간으로서 존엄한가, 그것은 다른 질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밥 먹는 데 가장 마지막으로 지갑을 연다’는 것을 짚어내면서 지금 이 땅에는 ‘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삶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과연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20여 명의, 빈자의 식탁을 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어떤 거리에 있어야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끝임없이 합니다. 한편 차마 드러내기 쉽지 않을 자신의 가난한 식탁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공개하기까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 역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밥상을 가운데에 놓고 살펴봐야 하는 사람과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 그들이 매일 찍어 보내고 받는 사진 속 그날의 끼니들을 읽어가는 동안 저는 오랜만에 여러 감정들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가려운 것 같은 몸의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은 책에 담긴 내용이나 사람들의 이야기 그 뜻과 의미도 곱씹어볼 만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어느 곳을 어떻게 보고 왜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는가 하는 고민들이 켜켜이 담겨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다시 읽어보게 합니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새롭습니다. 이 책은 두어 달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저에게 ‘어이구, 밥은 먹고 다니냐?’ 하고 말합니다. 밥 잘 먹고 몸 챙기고 정신줄 놓지 말라고, 뭔가 생각을 좀 해보라고 채근합니다.  무더위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7-06 | hrights | 조회: 616 | 추천: 1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의 검찰 특수라인은 21세기의 하나회다. 총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하나회 멤버를 요직에 기용했듯이 수사로 정권을 잡은 윤석열은 검찰 특수라인을 요직에 앉혔다. 검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특권집단이지만 그 안에서도 특수통은 소수의 이너써클이 된 지 오래다. 친한 선후배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대다수 보통 검사들에겐 ‘넘사벽’ 같은 존재가 되었다. 특히 윤석열과의 사적 인연이 있었는지가 요직 임명의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윤석열의 특수라인은 사조직처럼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전두환 정권이 군사정권이자 하나회 정권이었다면 윤석열 정권은 검사정권이자 특수라인 정권이다.  검찰 특수통은 21세기 하나회  신(新)하나회의 황태자 한동훈은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겸 민정수석 겸 인사수석으로 4개의 요직을 겸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 법무부 장관이었던 추미애를 “일개 장관”이라고 폄훼하던 ‘한동훈 맞춤형’ 직제 통폐합이다. 인사이동이 끝난 상태에서 누가 검찰총장이 되든 한동훈의 검찰 직할 통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의 사도처럼 떠들던 검사들은 법무장관의 직할 통치에 대하여 흔한 격문 하나 내지 않는다. 격문은커녕 낯뜨거운 아부성 댓글로 충성경쟁을 벌인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을 사랑한다는 윤석열의 다짐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후배 검사들은, 이제 사람에 대한 충성과 조직에 대한 사랑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며 맨 앞에서 싸워주던 골목대장이 대통령이 되자 (몇몇 예외는 있겠지만) 거의 모든 검사가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부하가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특수라인이 아닌 다수의 검사가 소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조직 내에서의 출세뿐 아니라 퇴직 이후 밥벌이가 걸린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이라는 사람에 대한 충성과 검찰 조직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야쿠자처럼 무릎 꿇고 외쳤던 하나회의 제1호 맹세-하나,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에서 단어 하나만 바꾸면 검찰의 구호가 된다. 검사가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간다는 환상은 전두환 시대 엘리트 군인들의 그것과 판박이다.  이들이 부르짖었던 검찰의 독립과 중립이란 검찰을 개혁하려는 비검찰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중립이었음을 검사들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검사 순혈주의와 조직이기주의, 반개혁적 정념과 엘리트주의의 절정에 윤석열 정권이 있다.  선수가 된 심판  검찰이 보수여당의 ‘히든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여의도에 즐비한 검찰출신 의원들은 사건과 의혹을 프레임대로 키우는 핑퐁게임의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래도 그때는 아닌 척 시치미라도 뗄 수 있었다. 둘 사이 내통의 비밀이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검사 출신 주광덕 국민의힘 의원의 ‘조민 생활기록부 불법 유출 사건’처럼 끝내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망각 속에 묻히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른바 고발사주 사건은 재수가 없어서 밟힌 꼬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검찰은 이제 비공식적 정치집단이 아니다. 검찰출신의 정치인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에서 뛰어야 하는 선수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정권과 검찰이 한 몸이 된 검사정권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형용모순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검찰의 중대한 사회적 기능이다. 거의 모든 중요한 쟁점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법과잉(정치결핍)의 나라에서 검찰은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1차적 권한을 독점해 왔다. 특히 언론의 보도가 검찰의 수사와 기소 절차에 집중돼 있어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여론형성 능력을 검찰은 갖고 있다. 유죄 입증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는 조직의 일방적인 정보가 진실처럼 유포되고 언론을 통해 증폭됨으로써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이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다는 점이 현재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치명적 결함이다. 이런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부분의 선진국은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고 있으며, 이것이 검찰개혁의 최종 목표였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검찰개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한국 검찰은 정치권력까지 거머쥔 리바이어던이 되었다.  수사로 사실을 밝혀 기소를 통해 정의를 세우는 사회적 기능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심판의 역할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과 최측근 법무장관이 직할 통치하는 검찰이 공정한 심판이 될 수 있을까. 검찰의 직무를 통한 행위로 인기를 얻은 사람이 휴지기 없이 바로 대통령이 된 사실 자체만으로 검찰은 공정한 심판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부러 검찰총장을 비워놓고 법무장관이 직접 인사를 해버리는데도 조용히 따르는 검찰이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출처 - 한겨레  검찰총장 인선 패싱하는 까닭  윤석열과 한동훈이 검찰총장 인선을 ‘패싱’하고 검찰 인사부터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형적인 인사는 검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시스템 파괴 행위일 뿐 아니라 법치를 인치로 대체하는 후진적인 행태다. 더구나 한동훈이 평소에 입만 열면 강조하는 “what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를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여서 더욱 의구심이 든다. 윤석열 본인처럼 검찰총장이 자기 정치를 할까 두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정권 초기인 데다 그럴만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친검정부에서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검찰총장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총장 인선에 한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는 걸 고려하면 한시가 급하기 때문 아닐까. 정권 핵심부는 짐짓 지지율에 초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황망할 것이다. 사상 초유의 반토막 지지율로 국정을 시작한 초조감이 이들을 무리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손봐줄 “나쁜 놈들”을 고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수사의 속성상 틀을 잡고 타깃을 고르는 일은 초기에 이뤄지므로 이에 직접 관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자기들이 가장 잘 하는 일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것이다. 지지층의 염원에 보답하는 길이요 최악의 지지율을 반등시킬 호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촛불항쟁의 결과로 이어졌던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수사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점을 이들이 알지 모르겠다. 검찰 브라더의 정의사회 구현 의지  “나쁜 놈들 잘 잡으면 된다”는 한동훈의 발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전두환과 민주정의당의 모토였던 ‘정의사회 구현’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세력이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초현실적 살풍경이 검사정권에서도 재연되는 것인가.  한동훈의 ‘나쁜 놈들’ 발언은 윤석열 정권의 ‘정의 독트린’이다. 나쁜 놈을 고르는 기준은 윤석열과 한동훈이 정한다. 검찰은 나쁜 놈을 잡는 게 아니라 나쁜 놈을 고른다. 검찰에 밉보이면 잡고 잘 보이면 봐준다. 같은 편이면 뭉개고 다른 편이면 파헤친다. 따로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례가 수두룩하다. 조국 딸의 표창장은 반부패수사부가 나서야 할 중대범죄이지만, 정호영 보건지부 장관 후보자의 딸과 아들이 정 후보자가 병원장으로 있던 대학에 편입학한 의혹은 수사조차 하지 않는다.  나쁜 놈들의 범주에 한동훈의 ‘카톡 절친’ 김건희와 김건희의 어머니 최은순이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법무부 장관 임명 직전에 채널A 검언유착 사건과 관련한 한동훈 본인의 혐의를 셀프 무혐의 처분했듯이, 김건희와 최은순의 각종 혐의들도 모두 무혐의가 될 것이다. 무혐의 처분은 법원의 판결문처럼 세세히 밝힐 필요도 없어 편리하다. 검찰이 혐의가 없다면 그냥 없는 것이 된다. 검찰의 말이 곧 법인 검찰독재의 나라다.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론>은 ‘정의로움에 대하여(peri tou dikaiou)’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데 국가가 필요하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기술이 정치이며, 정치의 본질은 정의가 무엇인지 밝히는 윤리학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국가의 존립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다.  정의와 관련해 가장 많이 논하는 주제가 불편부당함과 자의의 금지다. 둘 다 한국 검찰이 항상 실패하는 지점이다. 니체는 여기에 하나의 미덕을 추가하는데 그게 바로 객관성이다. 한동훈 스스로 중요하다고 말해놓고 이미 대놓고 위반하고 있는 ‘what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와 관련 있는 덕목이다. 검찰의 실패가 검사정권에서도 이어진다면 검사정권의 몰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또한번 혼란과 갈등의 늪으로 빠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의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6-29 | hrights | 조회: 1236 | 추천: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