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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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1.  큰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의 일이다. 아이가 어디서 작은 토끼를 데려왔다. 내내 토끼와 같이 놀던 아이는 학교에 가면서 애비에게 잘 돌보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는 감나무와 화초가 조금 있는 마당에 토끼를 풀어놓았다. 집안에 있었으니 답답했으리라 생각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토끼를 찾았다. 그때야 나는 생각나서 찾아보았으나, 토끼는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것이다. 순간 몇 년 전, 마당에서 병아리를 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범인은 고양이였다. 아차! 하지만 차마 나는 아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점점 토끼를 찾을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아이 눈에서 뚝뚝 눈물을 떨어졌다. 그때의 미안함이란……. 그러면서 마음 한 켠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저렇게 아파할 줄 알면 사람 노릇은 하겠구나.” 출처 - 직접 촬영 (전주대, 우석대, 원광대 학생들이 함께 플래카드를 걸어두었다. 위는 한 역사동아리의 플래카드이다.)  1.  “8년이면 충분하다, 진실을 밝혀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모든 국민의 의무입니다.” 최근 학교 정문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 길을 가던 사람이 말했다. “아직도 세월호 얘기야?” 순간 내 속에서는 두 가지 마음이 오갔다. 하나는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안다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반감. 다른 하나는 사건 이후 만 8년이 지났는데 사회의 상례(喪禮)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역사를 공부하는 나도 조선의 예학(禮學), 예송(禮訟)에 대해 허례허식이라고 단죄하는 관점을 먼저 배웠다. 귀찮고 쓸데없는 절차라고 말이다. 같이 살던 사람과 영원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들이, 그 헤어지는 아픔을 연착륙시키는 장치가 상례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거기에 고인과 가까웠던 정도를 구분해서 부모는 3년, 8촌은 석달, 하는 식의 5복(五服)이 있었다. 아무렴 살았을 때 맺은 관계가 엄연한데 뭔가 마음이든 생활이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이런 절차를 허례라고 가르치는 교과서도 있다. 우리 사회의 경박한 애도, 심지어는 애도에 대한 모독이 발견된다면 이런 교과서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경험,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입이라도 다물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경황없는 와중에 병원 장례식장에서 00상조회가 하라는 대로 어머님 상을 치렀다. 대도시에 살고 있던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친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으니 상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삼년상의 절차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삼일장이나마 잘 치르는 게 다행이었다.  개인의 경우든, 세월호 같은 사회의 경우든, 상례에 준하는 연착륙 과정이 있어야 한다. 왜?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자식이 죽자 슬픈 나머지 눈이 멀어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고사를 남겼던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조차도 자식을 잃은 뒤의 여생을 살아야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에서 빠져나와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고인(故人)과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아내, 자식, 친구, 동료, 그리고 이 사회 사람들과도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과 다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조회의 도움으로 사흘만에 가까스로 상례를 마치는 것은 바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는 3년씩 부모님 무덤을 지키는 여묘살이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삼우제, 상식, 졸곡을 챙기기에도 어림없다. 부모님도 그럴진대 하물며 친척, 친구, 스승과 제자, 동료의 관계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마음속에 풀지 못한 응어리로 생기는 정신질환이 있다면, 현대사회의 상례가 허겁지겁 치러지면서 너무도 많은 관계에서 영원한 이별이 어설펐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가정하고 있다.  정문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며 다시 사회의 상례를 생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원인 규명이 늦을 수도 있고, 규명한다 해도 미흡할 수 있다. 그래서 상례가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까이는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와 선생님들, 친구들부터,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시민들까지 어정쩡한 상례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삶이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이 지루할 수 있는 상례를 인간답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진상을 알고 어디까지 알지 못하는지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갖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위정자가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시민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과연 이게 정당에 따라, 지지 세력에 따라 다를 일인가.  1.  그러나 나는 어떤 정치인들에게는 이런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정치인들이 사회를 타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시민들끼리만이라도 타락을 늦추거나 막아서, 우리가 사람답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싶다.  세월호뿐 아니라 산업재해 등 사람의 사상(死傷) 사건 끝에는 보상 문제가 나오고, 그 보상 과정을 두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들이 나오기도 한다. ‘자식 팔아 운운’하며 그 보상 논의를 모욕하거나, 자식 잃고 단식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하는 망동이 대표적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멀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조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인간 집단들은 사람 목숨에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나 양으로 자식이나 형제의 죽음을 대체하려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 목숨은 목숨으로만 대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보상 또한 공통으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이때의 보상은 “그 목숨과 죽음을 재화로 잴 수도 보상할 수도 없지만, 이 재물을 받아주셔서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의미이다. 즉 보상은 목숨값이 아니라, 반대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지만 참회하니 용서해달라는 간청의 뜻이다. 기념비를 세우든, 글을 지어 추모하든, 재물로 보상하든, 거기에는 측정할 수 없는 인간 자체의 가치에 대한 경외와, 상심하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예의가 있었다. 가족들의 상심이 너무 커서 보상에 만족하지 못하면 친지들이 나서서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보상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런 마음들이 오고가면서 사회는 살만한 곳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는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조심스럽고 품격 있는 방법을 찾아왔다. 노자(老子)는 3천 년 전에 이미 승전(勝戰) 행사는 상례로 한다고 천명했다. 전쟁조차 이러할진대 안전사고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는 ‘자식팔이’, ‘먹고 떨어져라’ 같은 비루하기 그지없는 이 사회 일각의 타락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인류의 경험을 보여준다. 타락이 만연하면 그곳이 곧 지옥이다. 다행인 것은 많은 역사의 경험은 우리가 다른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2-07-12 | hrights | 조회: 792 | 추천: 12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생각해 보니 두어 달쯤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뉴스와 소식들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분노와 역겨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안 보고 안 듣고자 애썼던 결과, 마음이 좀 편해지는 듯했습니다. 결국 특별히 관심이 있는 일도, 굳이 하고 싶은 일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스갯소리 그대로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경지에 이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찾아온 무기력감이 점점 심해질 즈음, 책 한 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삶>(권기석 양민철 방극렬 권민지 지음, 2022년 북콤마 발행)은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는, 적어도 밥을 굶는 사람들을 현실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민낯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국민일보 편집국 이슈&탐사2팀이 2021년 9월 중순에서 10월 초까지 연재한 시리즈 기사 ‘빈자의 식탁-선진국 한국의 저소득층은 무엇을 먹고 사나’를 엮어내면서 기사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생생하게, 더 깊고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덜 먹고 못 먹고 살겠지’라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 이른바 빈자(貧者)들의 실제 식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식사 빈곤 문제는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넘어 선택권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고전적 의미의 아사는 사라졌다. 다만 밥은 먹지만 피자는 못 먹는다. 밥은 먹지만 치킨은 못 먹는다. 결식에서 영양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굶지 않는다고 인간으로서 존엄한가, 그것은 다른 질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밥 먹는 데 가장 마지막으로 지갑을 연다’는 것을 짚어내면서 지금 이 땅에는 ‘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삶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과연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20여 명의, 빈자의 식탁을 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어떤 거리에 있어야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끝임없이 합니다. 한편 차마 드러내기 쉽지 않을 자신의 가난한 식탁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공개하기까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 역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밥상을 가운데에 놓고 살펴봐야 하는 사람과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 그들이 매일 찍어 보내고 받는 사진 속 그날의 끼니들을 읽어가는 동안 저는 오랜만에 여러 감정들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가려운 것 같은 몸의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은 책에 담긴 내용이나 사람들의 이야기 그 뜻과 의미도 곱씹어볼 만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어느 곳을 어떻게 보고 왜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는가 하는 고민들이 켜켜이 담겨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다시 읽어보게 합니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새롭습니다. 이 책은 두어 달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저에게 ‘어이구, 밥은 먹고 다니냐?’ 하고 말합니다. 밥 잘 먹고 몸 챙기고 정신줄 놓지 말라고, 뭔가 생각을 좀 해보라고 채근합니다.  무더위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7-06 | hrights | 조회: 628 | 추천: 1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의 검찰 특수라인은 21세기의 하나회다. 총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하나회 멤버를 요직에 기용했듯이 수사로 정권을 잡은 윤석열은 검찰 특수라인을 요직에 앉혔다. 검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특권집단이지만 그 안에서도 특수통은 소수의 이너써클이 된 지 오래다. 친한 선후배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대다수 보통 검사들에겐 ‘넘사벽’ 같은 존재가 되었다. 특히 윤석열과의 사적 인연이 있었는지가 요직 임명의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윤석열의 특수라인은 사조직처럼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전두환 정권이 군사정권이자 하나회 정권이었다면 윤석열 정권은 검사정권이자 특수라인 정권이다.  검찰 특수통은 21세기 하나회  신(新)하나회의 황태자 한동훈은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겸 민정수석 겸 인사수석으로 4개의 요직을 겸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 법무부 장관이었던 추미애를 “일개 장관”이라고 폄훼하던 ‘한동훈 맞춤형’ 직제 통폐합이다. 인사이동이 끝난 상태에서 누가 검찰총장이 되든 한동훈의 검찰 직할 통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의 사도처럼 떠들던 검사들은 법무장관의 직할 통치에 대하여 흔한 격문 하나 내지 않는다. 격문은커녕 낯뜨거운 아부성 댓글로 충성경쟁을 벌인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을 사랑한다는 윤석열의 다짐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후배 검사들은, 이제 사람에 대한 충성과 조직에 대한 사랑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며 맨 앞에서 싸워주던 골목대장이 대통령이 되자 (몇몇 예외는 있겠지만) 거의 모든 검사가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부하가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특수라인이 아닌 다수의 검사가 소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조직 내에서의 출세뿐 아니라 퇴직 이후 밥벌이가 걸린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이라는 사람에 대한 충성과 검찰 조직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야쿠자처럼 무릎 꿇고 외쳤던 하나회의 제1호 맹세-하나,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에서 단어 하나만 바꾸면 검찰의 구호가 된다. 검사가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간다는 환상은 전두환 시대 엘리트 군인들의 그것과 판박이다.  이들이 부르짖었던 검찰의 독립과 중립이란 검찰을 개혁하려는 비검찰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중립이었음을 검사들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검사 순혈주의와 조직이기주의, 반개혁적 정념과 엘리트주의의 절정에 윤석열 정권이 있다.  선수가 된 심판  검찰이 보수여당의 ‘히든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여의도에 즐비한 검찰출신 의원들은 사건과 의혹을 프레임대로 키우는 핑퐁게임의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래도 그때는 아닌 척 시치미라도 뗄 수 있었다. 둘 사이 내통의 비밀이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검사 출신 주광덕 국민의힘 의원의 ‘조민 생활기록부 불법 유출 사건’처럼 끝내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망각 속에 묻히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른바 고발사주 사건은 재수가 없어서 밟힌 꼬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검찰은 이제 비공식적 정치집단이 아니다. 검찰출신의 정치인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에서 뛰어야 하는 선수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정권과 검찰이 한 몸이 된 검사정권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형용모순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검찰의 중대한 사회적 기능이다. 거의 모든 중요한 쟁점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법과잉(정치결핍)의 나라에서 검찰은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1차적 권한을 독점해 왔다. 특히 언론의 보도가 검찰의 수사와 기소 절차에 집중돼 있어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여론형성 능력을 검찰은 갖고 있다. 유죄 입증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는 조직의 일방적인 정보가 진실처럼 유포되고 언론을 통해 증폭됨으로써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이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다는 점이 현재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치명적 결함이다. 이런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부분의 선진국은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고 있으며, 이것이 검찰개혁의 최종 목표였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검찰개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한국 검찰은 정치권력까지 거머쥔 리바이어던이 되었다.  수사로 사실을 밝혀 기소를 통해 정의를 세우는 사회적 기능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심판의 역할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과 최측근 법무장관이 직할 통치하는 검찰이 공정한 심판이 될 수 있을까. 검찰의 직무를 통한 행위로 인기를 얻은 사람이 휴지기 없이 바로 대통령이 된 사실 자체만으로 검찰은 공정한 심판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부러 검찰총장을 비워놓고 법무장관이 직접 인사를 해버리는데도 조용히 따르는 검찰이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출처 - 한겨레  검찰총장 인선 패싱하는 까닭  윤석열과 한동훈이 검찰총장 인선을 ‘패싱’하고 검찰 인사부터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형적인 인사는 검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시스템 파괴 행위일 뿐 아니라 법치를 인치로 대체하는 후진적인 행태다. 더구나 한동훈이 평소에 입만 열면 강조하는 “what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를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여서 더욱 의구심이 든다. 윤석열 본인처럼 검찰총장이 자기 정치를 할까 두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정권 초기인 데다 그럴만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친검정부에서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검찰총장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총장 인선에 한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는 걸 고려하면 한시가 급하기 때문 아닐까. 정권 핵심부는 짐짓 지지율에 초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황망할 것이다. 사상 초유의 반토막 지지율로 국정을 시작한 초조감이 이들을 무리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손봐줄 “나쁜 놈들”을 고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수사의 속성상 틀을 잡고 타깃을 고르는 일은 초기에 이뤄지므로 이에 직접 관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자기들이 가장 잘 하는 일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것이다. 지지층의 염원에 보답하는 길이요 최악의 지지율을 반등시킬 호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촛불항쟁의 결과로 이어졌던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수사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점을 이들이 알지 모르겠다. 검찰 브라더의 정의사회 구현 의지  “나쁜 놈들 잘 잡으면 된다”는 한동훈의 발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전두환과 민주정의당의 모토였던 ‘정의사회 구현’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세력이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초현실적 살풍경이 검사정권에서도 재연되는 것인가.  한동훈의 ‘나쁜 놈들’ 발언은 윤석열 정권의 ‘정의 독트린’이다. 나쁜 놈을 고르는 기준은 윤석열과 한동훈이 정한다. 검찰은 나쁜 놈을 잡는 게 아니라 나쁜 놈을 고른다. 검찰에 밉보이면 잡고 잘 보이면 봐준다. 같은 편이면 뭉개고 다른 편이면 파헤친다. 따로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례가 수두룩하다. 조국 딸의 표창장은 반부패수사부가 나서야 할 중대범죄이지만, 정호영 보건지부 장관 후보자의 딸과 아들이 정 후보자가 병원장으로 있던 대학에 편입학한 의혹은 수사조차 하지 않는다.  나쁜 놈들의 범주에 한동훈의 ‘카톡 절친’ 김건희와 김건희의 어머니 최은순이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법무부 장관 임명 직전에 채널A 검언유착 사건과 관련한 한동훈 본인의 혐의를 셀프 무혐의 처분했듯이, 김건희와 최은순의 각종 혐의들도 모두 무혐의가 될 것이다. 무혐의 처분은 법원의 판결문처럼 세세히 밝힐 필요도 없어 편리하다. 검찰이 혐의가 없다면 그냥 없는 것이 된다. 검찰의 말이 곧 법인 검찰독재의 나라다.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론>은 ‘정의로움에 대하여(peri tou dikaiou)’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데 국가가 필요하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기술이 정치이며, 정치의 본질은 정의가 무엇인지 밝히는 윤리학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국가의 존립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다.  정의와 관련해 가장 많이 논하는 주제가 불편부당함과 자의의 금지다. 둘 다 한국 검찰이 항상 실패하는 지점이다. 니체는 여기에 하나의 미덕을 추가하는데 그게 바로 객관성이다. 한동훈 스스로 중요하다고 말해놓고 이미 대놓고 위반하고 있는 ‘what it looks’(어떻게 보이는지)와 관련 있는 덕목이다. 검찰의 실패가 검사정권에서도 이어진다면 검사정권의 몰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또한번 혼란과 갈등의 늪으로 빠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의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6-29 | hrights | 조회: 1255 | 추천: 28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장관 후보자 면면이 나왔을 때부터 ‘좌동훈 우상민’ 얘기가 나왔다. 한동훈에게 법무부를 맡겨 검찰을, 이상민에게 행정안전부를 맡겨 경찰을 통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한동훈이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세상이 다 아는 윤석열 측근이고, 이상민은 윤석열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후배로 오랜 친분을 유지해 왔다는 게 근거로 소환됐다. 이상민이 행안부 장관이 되고 나서 첫번째 지시로 경찰에 대한 관리운영을 위한 제도개선방안을 마련하라고 하면서 의심은 확신이 됐다.  21일 행안부가 ‘경찰제도개선 자문위원회’ 권고안을 발표하면서 윤석열 행정부의 검경 통제가 구체화되고 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만 이뤄졌던 행안부와 경찰청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바꾸겠다는 게 핵심인데 일단 명분은 경찰의 민주적 관리·운영과 효율적 업무수행이다. 자문위는 “검사 수사지휘권이 폐지되고 경찰에 독자적인 수사권과 불송치 결정권이 부여되는 등 경찰 수사권의 법적 성격과 범위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걸 강조했다. 검경수사권조정으로 권한이 강해지는 경찰을 통제하는 고삐를 직접 죄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자문위가 내놓은 권고안 자체는 얼핏 온건하게 돼 있다. 행안부에 경찰 관련 조직을 신설하고, 행안부 장관이 경찰청을 지휘하는 규칙을 제정해 행안부에 경찰 고위직 인사를 위한 후보추천위원회 혹은 제청자문위원회를 설치하라고 했다. 경찰 감찰과 징계제도를 개선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처우개선과 인력확충 같은 당근도 빠질 수 없다. 출처 - 금강일보 자문위도 강조했듯이 경찰은 “권력기관”인데도 이렇게 중요한 사항을 듣도 보도 못한 자문위원 몇 명이 한 달 동안 네 차례 만나서 결정해버렸다. 정작 이 모든 사안을 시작한 이상민은 이날 오후 늦게서야 조지아 출장에서 귀국하느라 한국에 있지도 않았다. 원래 자문위 권고안 발표가 지난주 예정이었지만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상민의 해외출장 이후로 연기됐다는 걸 생각하면, 똥 싼 사람 따로 있고 똥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는 말이 나도 모르게 머리를 맴돈다.  자문위는 정부부처와 외청의 관계를 볼 때 행안부와 경찰청만큼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지 않는 사례가 없다는 걸 강조한다. 물론 그 말 자체는 사실이다. 1991년 정부는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1991년 경찰청을 내무부에서 독립시키면서 장관 사무에서 ‘치안’을 삭제하고, 민주적 통제장치로 경찰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그 뒤 행안부와 경찰청은 느슨하다못해 소 닭보듯 하는 관계였다. 자문위원장을 맡은 판사 출신 변호사 황경근은 이게 마치 대단한 직무유기나 되는 듯이 한참을 강의를 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당시 법개정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맥락, 내무부 치안본부 시절의 각종 인권유린에 대한 민주화 요구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왜 행안부여야 하는지 자문위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법규정”만 주절주절 되뇌었을 뿐이다. 하지만 정부조직법 제34조에 규정한 행안부 장관 사무에 치안이 없다는 점에서 행안부에 경찰 관련 부서를 설치하는 건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반론은 외면했다. 하지만, 행안부 현직 고위공무원들조차 사석에서 “국회에서 법을 고쳐야 하는 입법사항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는 게 좀 더 진실에 가까울 듯 하다.  이상민이 경찰에 관심이 많은 건 충분히 알겠다. 그럼 왜 굳이 행안부 장관이 된 것일까. 그냥 국가경찰위원장을 맡아서 경찰의 민주적 통제를 실질적으로 하기 위한 여러가지 개혁 조치를 주도하면 되는 것 아닐까. 경찰위원장은 인사청문회도 굳이 필요없는데 말이다. 순전히 짐작으로만 생각해보면, 이상민은 행안부 장관이 어떤 자리인지, 그 무게를 제대로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전임자들처럼 장관 되자마자 산불이나 지진, 감염병으로 정신없는 신고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행안부 장관이 사무관들과 만난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상민은 이 자리에서 교부세과에서 온 사무관에게 ‘지방세 업무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교부세과는 얼핏 지방세 가운데 하나일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조직 체계 역시 지방세정책관이 아니라 지방재정정책관 소속이다. 특히, 교부세과는 특별교부세를 담당하는데, 특별교부세는 행안부에서도 매우 매우 중요한 업무이다. 행안부 장관이 교부세가 뭔지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특별활동비를 모르는 국가정보원장 혹은 방아쇠 당기는 방법을 모르는 군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상민에게 진심을 다해 권해주고 싶다. 괜히 번지수 못 찾아 경찰들 흘끔거리지 말고 행안부 업무파악이나 똑바로 하세요. 물론, 주소업무도 행안부 소관입니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6-22 | hrights | 조회: 621 | 추천: 9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때 주적은 북한이라고 목소리를 돋구었다. 새 정부의 국방부는 취임 초부터 군 장병 정신교육 교재에 '북한군과 북한정권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을 명기해 배포했다. 덩달아 육군참모총장은 공개발언을 통해 북한을 우리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2022년 국방백서에도 주적론을 명기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바야흐로 동족에 대한 주적관을 확립해 선제타격을 불사하겠다는 새 정부의 기세가 갈수록 드높아지고 있다. 동족대결정책이 노골화되면 될수록 더하여 외세와의 굳건한 동맹에 기초한 전쟁연습은 대규모 기동훈련으로 확대, 강화되고 외세의 핵 전략자산은 수시로 한반도와 그 주변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주적론은 과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주적론에 입각한 새 정부의 역사적 운명을 예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동족대결에 사활을 걸었던 극우보수정권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주적론은 동족대결과 외세의존정책을 지속시킴으로써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분단냉전체제를 사수하고자 한다. 평화통일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6.15, 10.4, 4.27, 9.19 남북정상의 합의를 전면 부인한다.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오고 우리사회에 종북색깔론의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하게 하는 전조 증상이다. 출처-동포투데이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주적론에 이전투구하면 할수록 당장은 상책인 듯 보일지 몰라도 주적론과 종북 색깔론에 기대어 정권의 수명을 이어가기에는 갈수록 살얼음판 걷는 듯 위기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에는 망조가 든다. 반드시.  한국 민중은 오랜 세월 종북 색깔론에 핍박받고 저항하며 맷집을 키워왔기에 극우보수세력의 낡은 메카시즘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종북몰이에 신명나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유신의 딸이 촛불혁명으로 민심의 버림을 받은 것이 그 예다.  주적론이 지피는 동족대결 정세를 배경으로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탈북자 간첩 조작 등 공안몰이를 하기도 예전과 같지 않다. 국가보안법의 위력과 기세를 키워 종북몰이와 더불어 희생양을 찾는 낡은 레파토리도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더 이상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잘못 시도하다가는 정권 폭망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판이다.  극우보수세력이 국가보안법에 기대어 종북의 광기로 온 사회를 휩쓸며 정권을 재창출하고자 모지름을 쓰던 과거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동족 간 대립과 불신을 걷어내고 민족화해와 종전과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응당한 일이다. 민족분단의 고통과 한국사회의 분란을 가중시키는 주적론, 종북색깔론, 국가보안법 공안몰이는 역사의 낡은 유물로 폐기될 운명이기에 아예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분단냉전체제의 은신처로부터 주적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 민중은 그 어느 때보다 주적론을 불러내며 한국사회에 종북의 덫을 놓고자 마수를 드러내 보이는 작태에 강력하게 맞서 한시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주적론, 종북 색깔론에 손 놓고 당할 우리들이 아니다. 주적론의 망령에 맞서 그 근간이 되는 분단냉전체제를 완전히 허무는 그날까지 중도반단 없는 저항과 투쟁을 단결된 힘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 정부가 주적론의 망령에서 당장 벗어날 것을 조언해 본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06-15 | hrights | 조회: 690 | 추천: 2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6.1지방선거가 끝났다. 민주당이 참패했고, 국민의힘이 압승했다. 4년 전 치러진 지방선거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두 당의 입장이 뒤바뀐 채 당시 결과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결과였다.  전국 광역지자체 17곳 중 12곳에서, 전국 기초자치단체 226곳 중 145곳에서 국민의힘 소속 후보가 지자체장으로 당선됐다. 4년 전 충남에서는 도지사(양승조)와 도의회 의석 대부분(비례대표 포함 총 42석 중 33석, 78.6%)을 민주당이 차지했지만, 올해에는 도지사(김태흠)와 도의회 의석 대부분(비례대표 포함 총 48석 중 36석, 75%)을 국민의힘이 차지했다.  당진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4년 전 당진시장과 충남도의원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던 것에서 이번에는 국민의힘 후보들이 당선됐다. 기초의회 의석을 절반 정도 차지한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도 두 당의 입장만 바뀌었을 뿐 같은 상황이다.  4년 전 지방선거 당시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주년 무렵 한창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높고 민주당 바람이 불던 때였다. 올해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직후 국민의힘 바람이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은 4년 전 국민의힘 신세가 됐고, 절치부심 했던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상대로 역전에 성공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지만, 지역민의 입장에서는 중앙정치의 영향이 지역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소속 정당을 떠나 아무리 괜찮은 후보가 출마해 열심히 선거운동에 뛰어들어도 중앙정치의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다. 바람이 당락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지방자치는 맥을 못 추고 있다.  후보들은 지역주민들에게 선택받기를 기대하면서도 실상은 정당의 공천에 더 많이 공들인다.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 또는 정치 철학과 상관없이 출마 당시에 바람이 부는, 인기 있는 정당을 기웃거린다.  지난 4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기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하려는 정치신인들이 대거 민주당에 입당해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자유한국당은 인물난 속에서 후보 영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이번 지방선거에 나설 당진시장 후보로 민주당에서는 예닐곱 명이 출마 의사를 밝혔다. 국민의힘의 후보는 세 명이 전부였다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감소하자 국민의힘 후보가 예닐곱명으로 늘어 공천 과정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중에 한 명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정치활동을 전혀 하지 않다가, 상황을 지켜보다 슬그머니 정치 일선에 다시 등장해 결국 당진시장으로 당선됐다. 심지어 민주당 소속으로 당진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낮은 지지율에 스스로 중도포기한 어느 후보는 판세가 뒤집어지자 국민의힘에 입당해 공개적으로 그 당의 당진시장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바람이 좌우하는 선거에서는 정책도 공약도 무의미하다. 순풍을 타고 당선되느냐, 역풍을 타고 낙선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지방선거조차 지역은 없고 당만 남는다. 지방자치가 얼마나 더 오래 묵어야 ‘정당 바람(風)’이 아닌 ‘시민들의 바람(望)’ 대로 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자치와 분권이 제대로 자리 잡을까. 지난해는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은 중앙의 바람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2-06-08 | hrights | 조회: 794 | 추천: 4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간은 내적으로 경험한 것을 외적으로 표현한다. 그 외적 표현이 자신이나 타자의 내적 체험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등 다시 내면에 영향을 준다. 누군가 좋아하는 감정을 “너를 좋아해~” 라는 언어로 표현하든지, 예쁜 꽃 한 다발 선물하는 행동으로 표현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외적으로 표현한다. 가령 상대방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의 내면에 공감하면 둘은 친구나 연인이 된다. 그들만의 삶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종교의 원리도 비슷하다. 누군가 현실의 근원 혹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 표현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이면 집단이 형성된다. 그 집단은 그들만의 약속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간다.  종교학자 부르스 링컨의 정리에 따르면, 그 외적 표현은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① 내적 신앙과 관련한 담론, ② 의례와 관련한 실천 행위, ③ 담론과 행위에 공감하는 이들의 공동체, ④ 공동체를 제어하는 제도. 이들 네 영역이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변화 또는 강화시켜나간다. 이것이 종교현상이다.  어떤 신념이 있다거나, 특정 교리체계에 근거한 인간관계에 매여 있다거나,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의식은 종교적 자기 정체성의 일환이다.  이때 종교 현상의 핵심은 내적 체험의 세계이다. 그 내적 체험은 원천적으로는 언어를 넘어서지만, 굳이 언어로 번역하면 사랑, 헌신, 경외, 기쁨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가치와 태도는 자신을 비워 타자를, 특히 약자를 품는 윤리적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종교적 선각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사랑, 경외, 헌신, 이런 가치 지향의 실천이 종교의 핵심이다.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사실에 동의하며 사람들이 모이면서 종교 공동체는 시작된다. 모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직과 제도도 만들어진다. 본래 이 조직과 제도는 사랑이나 자비와 같은 가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어디까지나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하지만 점차 조직과 제도 자체가 원래의 체험 혹은 진리와 동일시되어간다. 핵심은 사랑과 자비, 기쁨 등으로 번역 가능한 내적 체험의 세계이지만, 그 내적 체험이 언어화하고, 그 언어 자체가 절대시 되면서 본말이 전도되곤 한다. 종교적 정체성도 이런 외적 표현이 내면화되면서 형성된다. 가령 유대-그리스교, 이슬람에서 견지하는 유일신 사상, 이에 입각한 협의의 우상숭배 금지 조항은 본래 사람이라면 현실에 덜 휘둘리면서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는 요청이지만, 그것이 점차 그런 가치에 대한 언어적 표현, 그 교리적 표현에 동의한 이들의 조직 등에 대한 충실로 둔갑한다. 문자적 교리라는 것도 언어로 표현된 신념 체계(beliefs)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하느님 같은 절대 진리 자체와 동일시되고, 그 동일시가 다시 각 지역의 문화적 삶의 방식과 만나면서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집단적 정체성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세력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직·간접적 차별을 한다.  물론 예수나 붓다 같은 종교적 천재들의 일차적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집단주의가 발붙일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전승되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제도화되어가는 과정에 제도의 유지와 강화 자체가 선각자들의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그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공간은 축소되고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은 점차 사라진다.  그 사례 중 하나로 ‘거룩함’의 개념을 볼 수 있다. 가령 기독교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 하나가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기 19:2) 라는 말이 나온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말이 당연한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따져 보면 생각해 볼 것이 많다.  이때 ‘거룩함’이란 거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부정한 것, 더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거룩함은 부정한 것과의 분리가 된다. 거룩함을 실천하려면 부정한 것을 버려야 한다. 집단적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심지어 처단하는 일까지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본래는 안과 밖이 정결한 삶을 살라는 요청이지만, 정결하지 못하다고 간주되는 세계를 부정하고 배타하고 차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결함을 유지하는 역설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거룩’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대신 ‘자비’라는 말을 썼다: “아버지가 자비로우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우시오.(누가복음 6:36) ‘거룩’이 부정한 것과 분리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반해, ‘자비’는 부정한 것을 포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거룩’을 내세우던 이들은 예수가 부정한 것(가난한 이, 병든 이, 여성...)을 포용해 ‘거룩’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차별하고 급기야 사형까지 시켰다.  문제는 예수를 따른다는 이들도 예수 메시지의 근간인 사랑과 자비 등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현 집단을 유지하는 조직과 제도 등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조직과 제도에 충실한 행위를 거룩함의 실천으로 간주해오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태도가 자기중심적 배타성으로 나타나고, 자기 집단의 관례적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저항한다.  물론 종교인들 중에도 이러한 근원적 사실을 성찰할 줄 아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기독교(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종교 전반에서 드러나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런 모순적인 현상에 대해 양식 있는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들도 커져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조직이나 집단은 어떤가. 가령 법조계, 즉 법원이나 검찰 분야는 어떤가. 법·률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가. 정당은 정치 본연의 정신을 구현하는가. 의료계나 교육계는 얼마나 다른가. 다음 기회에 전술했던 종교의 모순적 현실을 법조계의 현실을 조망하는 거울로 삼아보고자 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5-24 | hrights | 조회: 935 | 추천: 11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며느라기 시즌1’을 보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몇 달 전인 줄 알았더니 1년이 넘었다. 그사이 나는 ‘며느라기’의 주적(主敵)인 시아버지가 되었다. 선 자리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라던가? 며느라기-시즌2를 보면서 시아버지로서 심각한 판단의 변화를 거쳐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즌1에서 희망의 불온함을 느꼈다면, 시즌2에서는 그냥 불온함을 느꼈다. 장면① 딸 : 남은 밥 있어? 배가 고프네. 엄마 : 어, 김치찌개하고 있으니 먹어. (딸이 부엌으로 간 사이 아버지가 나온다. 어머니와 얘기하던 중 밥 먹고 있는 딸을 보며) 아버지 : 에휴, 애 낳고 살다 보면 다 지나갈 일을. 하여간 헛똑똑이라니까. (시즌1에서 딸은 남편과 불화 끝에 폭력까지 당하고 집에 와있다. 아버지의 푸념을 듣고 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밥으로 울음을 막고 있다. 결국 그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부엌을 나선다.) 장면② 딸 : 엄마는 나 임신했을 때 어땠어? 엄마 : 한없이 기뻐서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어. 딸 : 나는 나쁜 엄만가 봐. 힘들 때마다 배 속의 아기가 원망스러워.  드라마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야 하기에 인물의 성격이 조금 과장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시즌2는 두 가지 점에서 불온하다. 아마 이 불온함 때문에 시즌2는 시청률도 시즌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첫째, 특정 사람만을 이상한 사람을 만든다는 거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대표적이다. 장면①은 그렇지 않아도 명절날 술만 마시고 거드는 거 없던 기존 시아버지의 캐릭터에다가, 이혼하려는 딸에게 모진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덧씌웠다. ‘속상하니까 그렇지’라는 탈출구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그게 탈출구가 되기보다는 올가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며느리가 임신한 뒤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기 아들 밥 차려주는지 걱정하는 시어머니 캐릭터도 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 시어머니는 장면②의 따뜻한 친정어머니와 대비되면서 밉상의 성격을 완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구를 밉상으로 만드는 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시아버지가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왜곡된 감정이나 남자 중심의 사유 중 어떤 부분은 그의 인격이나 도덕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사회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둘째 불온함이 나온다. 생각 없는 관찰이 통상 그러하듯 문제나 갈등의 원인을 누군가의 품성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원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달리 생각하는 법이다. 피라밋의 낙서에도, 조선실록 곳곳에도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한 불안감이 적혀있다. 그뿐이랴. 《논어》에서부터 ‘나이 먹고 죽지도 않는 늙은이’에 대한 불만도 그만큼 회자되어 왔다. 늙음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이 골이 더 깊어졌을 뿐이다. 이 때문에 아내 대신 남편이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탁월한 선택조차 드라마에서는 거칠게 묘사되고 말았다. 하지만 왜 새로운 삶의 창조가 상처를 주고 싸워야지만 이룰 수 있는 듯 형상화되어야 하는가.  장면②로 다시 가보자. 직장생활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축복이 아닌 두려움이 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저건 나쁜 사람이라서 갖는 두려움이 아니다.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누구나 두려운 것이다.  이 장면과 관련해서 나는 새삼 내 경험이 떠올랐다. 큰아이 혼인날 내가 축사를 하면서 ‘서넛은 낳는 게 좋겠다’고 말한 대목이었다. 언뜻 형제 많은 게 참 좋다는 생각에서 대본에 없이 한 말이었다. 물론 신중한 큰아이와 맏며느리는 내 말에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반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당시 했던 말을 거의 거두어들였다. 이 사안 역시 큰아이와 며느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판단에는 아이를 낳아야 종족이 보존되던 시절이 아니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인구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다. 출생률 저하는 기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만 아니라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적게 생산하면 적게 쓰고 살면 된다. 아이를 낳을 자신들의 계획, 직장, 인생관에 따라 판단할 문제다. 사진 출처 - 며느라기 웹툰, 신지수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  아직 생각 중인 이슈가 있다. 명절날 처신이다. 며느라기 시즌1, 2에서도 단골주제가 명절, 제사였다. 우선 요즘 사람들은 거처가 가까이 모여 살기보다 떨어져 살고, 그 거처도 자주 바뀐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한 직장에 오래 있어도 본사, 지사 근무에 따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명절날 만나는 것도 맘 먹고 계획해야 한다. 삶에 지친 몸을 쉬어야 할 시간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못 할 짓이다.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볼 수 있을 거리가 아니면 오지 말라고 할 생각이다. 보고 싶으면 시간 되는 나와 집사람이 가서 볼 요량이다.  사돈댁은 부산인데, 아이들이 명절마다 우리집으로 오면 사돈 내외는 사위와 딸을 명절 내내 쭉 만나지 못하게 된다. 같은 부모인데 서운한 건 마찬가지일 터, 추석과 설을 나누어 아이들이 편한대로 가게 하면 어떨까 싶다. 분명한 거는 어느 부모나 자식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새 식구가 늘어나는 건 흥미로운 일인 듯하다. 5월 8일, 뜻하지 않았는데 큰아이가 선물과 봉투를 내밀었다. 선물은 집사람과 고모 화장품이었다.(내 것은 없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인간관계는 조국과 민족 때문에 금 가는 게 아니다) 봉투는 며느리가 준비했단다. 적지 않은 용돈이 들어있었다. 직장생활이 고된지 더 야윈 듯한 며느리의 얼굴이 겹쳤다. 문자를 보냈다. 장면③ 시아버지 : 바쁜 중에 용돈까지 챙기니 고맙구나. 담부터는 내가 밥 사는 걸로 하자. 용돈은 우리가 늙어 버는 게 없을 때 많이 다오. ^^ 맏며느리 : 네 아버님. ^^. 제가 더 잘 모셨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었습니다. 어버이날이라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다음엔 꼭 함께 만나 뵈어 시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큰아이 답장은 늘 한 문장을 넘거나 이모티콘을 넣는 적이 없다. 맏며느리는 좀 지성적이라 문장이 꽤 길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혼인한 뒤 시어머니가 권하자 바로 인권연대의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내 문자의 방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당할 때 점검해야겠다. 아무튼, 우리의 일상에는 장면①, ②보다 장면③ 쪽이 훨씬 많을 거라고 믿는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2-05-11 | hrights | 조회: 1072 | 추천: 4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꼴: 사람의 모습이나 행색을 낮추거나 비웃어 이르는 말. 어떤 상황이나 형편 또는 처지를 낮추거나 비웃어 이르는 말. (기본의미) 사물의 모양. -꼬락서니: 사람의 모습이나 행색을 속되게 이르는 말. 유의어-꼴. -꼬라지: ‘꼬락서니’의 방언. '성깔'의 방언. # 못 볼 꼴  지난 대선 이후부터 그러더니, 며칠 뒤에 있을 차기 대통령 취임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뉴스를 이미 보지 않고 있다는, 보지 않겠다는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들어보면, 어떤 이는 뉴스를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대선 결과에 대한 허무감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나아가 앞으로 벌어질 어떤 꼴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좋은 꼴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상관없는 듯했습니다.  조국수호 집회에 나오라고 종용했던 후배도, 86세대 정신 차리게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던 업계 동료도, 포털뉴스의 헤드라인조차 보지 않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일까요? # 꼬락서니  얼마 남지 않은 지방선거. 돌아가는 꼴을 보니 0.76% 포인트 차로 갈린 대선 결과를 놓고 각각 자기 논에 물 대듯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여전히 민주당스러운 근자감이 남아 있는 꼬라지고, 반면 국민의힘은 마치 대세가 기운 것처럼 폭주하는 꼬락서니입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또 어떤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요? # 꼬라지  뜬금없이 빚을 진 사람도 빚쟁이고 빚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빚쟁이란 말이, 쌀을 팔러 갈 때도 쌀 팔러 간다고 하고, 쌀을 사러 갈 때도 쌀 팔러 간다 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검찰개혁이면 검찰개혁이지 누가 어떻게 만든지도 잘 모를 ‘검수완박’이란 말이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언론에서,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검수완박, 검수완박 떠들어대는 꼬라지를 볼 때마다 정말 속에서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는 왜 쓸데없이 주변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는 뉴스를 찾아보고 검수완박 어쩌고 하는 말 때문에 이렇게 또 꼬라지를 내고 있는 걸까요? 사진 출처 - pixabay # 꼴과 주제 파악  지난 설, 저는 어머니로부터 앞으로 더는 어머니 댁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딱 잘라 어떤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확하게 “더 이상 네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지척에 살면서 두어 달 만에, 그것도 무슨 일이 있어야만 가끔 어머니 얼굴을 뵈러 오는 저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저를 파문(?)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며칠째 전화를 드려도 받지 않겠다고 하시니 어떻게 해야 어머니 마음에 드는 꼴이 될 수 있을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5-04 | hrights | 조회: 694 | 추천: 5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어째 갈수록 더 피곤하고 답답하다. 5년이라는 시간이 막막하게 느껴지더니 요즘은 두 달도 너무 지겹기만 하다. 그중 압권은 역시 공간에 의식을 지배당하는 차기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간략하게 나름대로 대선을 평가해 본다. 첫 번째, 국민들은 착한 척하고 무능력한 정부에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안 착하고 능력 있는 체하는 차기 정부를 선택했다. 둘째,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라는 위기 초기 높아졌던 연대감을 빠르게 고갈시킨 빈자리를 채운 건 각자도생과 혐오였다. 셋째, 수사도 하고 기소도 하는 ‘살아있는 권력’인 검찰 총수가 청와대까지 접수했다. 넷째, 양당제를 부추기는 대통령제 속에서 제3정당은 끊임없이 ‘철수’와 ‘비판적 지지’ 혹은 ‘너네 때문에 졌다’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섯째, 실력없으면서 청와대를 탐하는 자 선거 패하고 압수수색 90번 당할 각오를 하라.  어쨌든 선거는 모 아니면 도, 승자는 모든 걸 갖는다. 그렇게 윤석열은 기분 째지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자꾸 머리에 아른거린다. 한 명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을 이끌며 강바닥과 남북관계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은 대통령 되는 것만 생각하다 소원성취한 뒤로는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분이다. 사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 새 정부에 딱 하나 기대했던 건 공약 실천한다고 여기저기 번잡하게 만들지 않는 거였다. 어차피 제대로 된 공약도 없었고, 솔직히 공약 실천하는 걸 기대하고 찍어준 국민이 몇이나 되겠나 싶었다.  그중에서도 광화문청사 공약만은 꼭 파기하길 바랬다. 청와대를 정부서울청사로 옮긴다는 건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가 공약했고 안철수와 단일화하면서 문재인이 받은 뒤 꽤 진지하게 검토를 했지만 결국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접었던 문제였다. 사실 정부서울청사는 조금만 생각해도 청와대가 들어가기엔 적합할 수가 없는 곳이다. 이미 검토가 다 끝난 걸 모른 척하며 무려 10대 공약 가운데 하나로 꺼내는 발상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지만, 뭐 어차피 흐지부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놓고 보니, 내 생각이 짧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청와대를 정부서울청사로 옮긴다는 건 깨끗하게 포기했다. 매우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용산으로 옮긴단다. 청와대를 국민께 되돌려 준다는, 국민과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단다. 도대체 어느 국민이 청와대를 되돌려달라고 했단 말인가. 대선 공약집 어디에도 용산 얘긴 없었는데, 어떤 국민들과 언제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것일까. 그럼 국민들이 ‘청와대처럼 용와대도 국민들에게 되돌려달라’고 국민청원이라도 하면 그때는 또 어디로 이사를 가시려고 이러시나.  듣도 보도 못한 용와대 이전 사태가 제대로 될지도 걱정이지만, 그건 어차피 내가 상관할 문제 아니니 알아서 하시라고 하겠다. 그래도 두 가지는 짚고 싶다. 먼저 윤석열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라는 말을 했는데, 처음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는 건 고백해야겠다. 맞다. 공간은 의식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무실 책상 배치만 달라져도 직장문화가 달라진다. 집안 책상 배치를 바꾸고 나서 성적이 올랐다는 얘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정학이란게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산과 들, 강과 바다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살펴보는 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미 5년 전에 문재인이 집무실을 청와대 본관에서 여민관으로 옮겼다. 대통령과 수석비서관들이 걸어서 1~2분 거리에 모여서 일을 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용산으로 굳이 옮길 필요가 있을까? 인공지능으로 직업 찾아주는 어플을 비롯한 다른 많은 대선공약처럼, 청와대 공간배치도 이미 다 실현됐는데.  청와대가 풍수지리에서 흉지라는 어느 법사 얘기 때문에 청와대를 옮기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서 잠을 안 잔다는 얘길 듣고 보니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지만,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신앙 문제로 왈가왈부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청와대가 과연 흉지일까 하는 건 따져보고 싶다.  나는 청와대가 흉지가 아니라고, 결코 흉지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와대 자리에 대통령 집을 지은 뒤로 대한민국이 거쳐온 길을 보자. 말레이시아에 개발원조 받아서 다리를 세우고 필리핀으로 해외 선진문물 견학을 가던 나라가 몇십 년 만에 선진국이 됐다. 경제력은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고, 군사력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한국에서 생산한 드라마와 영화, 음악 심지어 먹거리까지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말 그대로 단군 이래 이렇게 국운이 번성한 적이 없다.  이게 다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운 뒤에 일어난 일인데, 이 정도면 흉지가 아니라 천하의 길지(吉地)가 아닐 수 없다. 어떤 분들은 비명횡사하고 자살하고 감옥 간 전직 대통령 얘길 하는데, 그건 술 덜 먹고 전임자 정치보복 안 하고 돈 욕심 덜 부리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문제다.  국민들에게 하루빨리 되돌려줘야 할 건 청와대가 아니라 코로나19 손실보상금이 아닐까 싶다. 이미 대선 당시 이재명-윤석열 모두 신속하게 50조 원 이상 규모로 손실보상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조차 금융위기 터지자마자 수정예산안을 편성했는데 문재인 정부는 깔짝깔짝 추경만 열심히 했다. 마른 수건 쥐어짠다고 물 나오는 거 아니다. '자린고비 정부'이자 '수전노 정부'로서 최선을 다했을 때 대선 결과는 이미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공간이 의식 지배하는 방법만 따지는 풍수만 쳐다보고 있기엔 국민들이 너무 피곤하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4-26 | hrights | 조회: 944 | 추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