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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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지난 6월 말 열대박물관(Tropenmuseum)을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다녀왔다. 열대박물관은 식민주의 탈피를 표방하며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유럽 박물관들 가운데 한 곳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파리의 인간박물관(Musée de l'Homme)과 케브랑리 미술관(Musée du quai Branly), 벨기에 테르뷰렌의 아프리카박물관(the Africa Museum)을 꼽을 수 있다. 식민주의라는 ‘원죄’를 의식하고 씻어내기 위해 기존 박물관 전시 구성을 대폭 개편하거나 새로 박물관을 건립하는 유럽 박물관들의 노력이 탈식민주의를 향해 조금이나마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식민주의의 재탕이나 회피의 교묘한 전략에 불과한 건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식민주의에 기원을 둔 유럽 박물관들은 좋든 싫든 변화의 압박에 반응하고 있으며, 상설전시와 특별전시에 그리고 신설 박물관에 이런 변화가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열대박물관은 암스테르담 도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린네우스스트라트(Linnaeusstraat)에 위치하고 있다. 트램을 내려 오스터파크(Oosterpark)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밝은 벽돌색의 단정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열대박물관 파사드는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폭이 좁고 높다란 삼각형 지붕의 건물들과 닮았지만 육중한 부피감이 남다르다. 열대박물관과 이어진 건물에는 왕립열대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하를렘에서 시작한 이 박물관이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은 1926년이었다. 원래 오스터파크 자리에 있던 공동묘지가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비게 된 공간에 새 건물을 지어 식민지연구소와 그 부속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고 하니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야심차게 새출발한 박물관이었다.   열대박물관 @염운옥   열대박물관 건물 축소 모형 Image of the scale model of the Koninklijk Instituut voor de Tropen https://www.tropenmuseum.nl/en/zien-en-doen/tentoonstellingen/whats-the-story   열대박물관의 역사는 160년에 가깝다. 명칭도 원래 열대박물관이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식민지박물관(the Colonial Museum)이었고, 1949년 열대박물관으로 개칭했다. 식민지박물관의 토대가 되는 유물 수집을 시작한 계기는 네덜란드 산업진흥협회의 해외영토에 대한 관심이었다. 1864년 아마추어 식물학자 프레데릭 반 에덴(Frederik van Eeden)는 고용주인 산업진흥협회를 설득해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네덜란드 해외영토의 천연자원, 생산품, 공예 등의 수집이 식민지 이익을 위해 중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하를렘에 있는 그의 저택은 곧 수집품으로 가득 찼고, 1871년 하를렘에 식민지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암스테르담으로의 이전 논의가 시작된 한편 암스테르담 아티스 동물원(Artis Zoo)의 인류학 유물을 양도받아 소장품이 크게 늘었다. 아티스 동물원은 동물 포획과 사육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뉴기니의 유물을 수집해왔는데 동물원을 이전하면서 인류학 유물은 식민지박물관로 보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열대박물관 컬렉션은 크게 하를렘 식민지박물관 기원(목록에서 H로 구분)과 아티스 동물원 인류학 컬렉션 기원(목록에서 A로 구분)으로 구분된다. 2014년 열대박물관은 레이덴의 민족문화박물관(Museum Volkenkunde), 베르그엔달의 아프리카박물관(Afrika Museum), 로테르담의 세계박물관(Wereldmuseum)과 함께 문화부 세계문화박물관(the National Museum of World Cultures) 산하의 한 기관으로 통합되었다. 세계문화박물관을 총괄하는 물질문화연구센터(the Research Center for Material Culture) 소장은 열대박물관의 임무는 “세계시민 양성에 공헌하는 도구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에서 책임감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물관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오면 전시실이 시작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면 방향으로 맨 먼저 시선이 닿는 벽에 영상 전시물이 걸려 있다. 세 개의 스크린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이름을 만들고 이름과 이름을 연결하는 선을 긋는다. 생명을 얻은 이름들이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풍경 같다. 글자들은 네덜란드에 의해 카리브해와 아시아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이름이다. 인도네시아, 퀴라소, 수리남에서 노예등록과 노예해방 기록을 토대로 수집한 이름들로 앞에 놓인 터치스크린을 클릭하면 해당 이름과 관련된 더 많은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노예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밝히는 것은 어렵더라도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맺은 인간관계를 기억하는 일은 노예를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터치스크린 옆의 설명문에는 1863년 네덜란드에서 노예해방이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주인 밑에서 수년간 강제노동해야만 했다는 사실, 반면 노예주는 국가로부터 노예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쓰여있다. 노예제 역사에 대한 반성의 문제가 유럽 사회에 대두되면서 프랑스 보르도에 노예제 희생자 동상에 세워졌고, 영국 리버풀에는 국제노예제박물관이 개관했다. 네덜란드에도 2002년 오스터파크에 중간항로의 고난을 형상화한 수리남 예술가 에르윈 드 드브리스(Erwin de Vries)의 청동상 작품이 세워졌다. 열대박물관의 노예 이름 영상 전시는 이러한 성찰과 기억의 노력과 같은 흐름 속에 놓인 것으로 박물관 감상의 시작 지점부터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었다.   노예 이름 영상 전시 @염운옥   전시실은 노예 이름 영상 전시를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다. 중앙에 아트리움 그레이트홀(Great Hall)을 두고 양편으로 위아래 두 개 층에 전시실이 펼쳐져 있다. 전시는 ‘인종의 창조’, ‘흑인성이라는 산물’, ‘저항’, ‘자유’, ‘창조성과 저항’의 다섯 개 주제로 이뤄져 있다. 본격적인 전시 감상을 시작하면서 먼저 눈길을 끈 점은 이 박물관이 분명하게 반인종주의 반식민주의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종은 인종주의의 아들이지, 아버지가 아니다(Race is the child of racism, not the father)”라는 미국 작가 타네히시 폴 코츠(Ta-Nehisi Coates)의 말을 내걸고 ‘인종의 창조’ 전시를 시작한다. 인종은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 개념이 아니라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 개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구성하는데 동원됐던 두개측정기, 두개고정기, 두개골 스탠드, 인체측정기, 피부색 판별 차트, 눈 색깔 판별 모형 같은 소위 ‘과학’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사용됐던 형질인류학 강의용 교재에 실린 세계인의 신체적 차이를 보여주는 도판은 인종이 존재하고 이는 피부색, 머리카락, 눈, 안면과 두개골의 신체적 차이에 나타난다는 관념을 뒷받침했던 예로 등장한다. 형질인류학이 만들어내는 인간 신체의 차이는 인종적 차이로 단순화되고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포스터, 교재, 엽서, 광고, 영화 속에서 반복되면서 인종주의를 생성한다.   형질인류학 교재 도판 @염운옥   1883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식민지 무역 박람회에서는 인간 전시가 있었다. 수리남과 인도네시아인이 보여지기 위해 앉아서 포즈를 취하거나 공연을 하면서 전시되었다. 열대박물관은 1883년 박람회 유물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 사실은 열대박물관과 식민주의의 관계를 또렷이 증명한다. 전시실에는 인간전시에 동원된 수리남인 네 사람 엘리자베스 모엔디(Elisabeth Moendi), 재클린 리켓(Jacqueline Ricket), 요하네스 코조(Johannes Kojo), 코조 아 슬렌 그리(Kojo-A-Slen-Gri)의 초상사진이 걸려 있고 이름과 약력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박람회에 온 28명의 수리남인 중에 속해 있었다. 설명문에 의하면, 코조 아 슬렌 그리의 이름은 원주민어로 ‘활기차게 걷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838년생으로 네덜란드 탐험가를 도와 수리남에서 탐험로를 개척했다고 한다. 코조는 1883년 박람회에 데려올 수리남인을 모집하는 데 조력했고, 조카 요하네스 코조를 함께 데려왔다. 이러한 설명은 19세기 말 인간전시에 자발성과 강제성, 상업주의와 인종주의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코조 아 슬렌 그리 @염운옥   박물관의 역사에 관한 전시에서는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훔친 것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제기하고, 박물관의 유물이 매매, 기부, 때로는 절도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되었다고 답하고 있다. 그리고 유물의 수집이 식민지에 대한 억압, 무역, 군사 행동, 과학 프로젝트, 선교 사업의 맥락에서 일어났으며, 소장품 대부분이 식민지 시대에서 유래한다고 고백하고, 원산국이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거나 원산국에서 문화적 가치가 더 높은 유물을 배상과 반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런 문구는 예상되는 유물 반환 논쟁을 의식한 원론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부끄러운 식민주의 과거를 박물관 역사의 일부로 명시적으로 밝힌다는 면에서는 평가해줄 면이 있다고 본다.   현재 열대박물관의 상설전시는 탈식민주의적 개입의 결과물이다. 1990년대부터 박물관의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15년부터였다. 열대박물관은 박물관의 중립성을 다시 묻고, 신자유주의적 다양성 담론을 비판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박물관을 탈식민화하자(Decolonize the Museum)’라는 시민단체와 협력해 전시에 내재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해 검토하고 성찰했다. ‘박물관을 탈식민화하자’는 20~35세의 아프리카계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인종뿐만 아니라 젠더와 장애의 관점에서 접근성을 결여한 박물관에 대해 비판하고 교차적 관점을 박물관에 요구했다. 이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전시 내용을 바꾸고 설명문을 다시 쓰는 작업이 이뤄졌다. 2017년 열대박물관이 주최한 노예제 역사에 관한 학술회의에는 미국 워싱턴의 아프로아메리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an American History & Culture) 로니 번치(Lonnie Bunch) 관장을 초청하기도 했다. 큐레이터 마틴 버거(Martin Berger)와 리처드 코피(Richard Kofi)는 개편과정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박물관으로 이곳을 꼽았다. 약 2시간 넘게 박물관을 둘러보는 동안 아트리움에서는 수리남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고 흥겨운 노래와 춤이 무대에서 펼쳐졌다. 관람하는 발걸음이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가벼워졌고, 어깨가 들썩이기도 했다. 유물에서 눈을 돌려 자꾸 아트리움 쪽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노래하며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박물관에 가득했다. 공간을 완성하는 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날 열대박물관의 주인공은 단연코 수리남 예술가들과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네덜란드는 좀 더 열린 곳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리남 음악과 춤 공연 @염운옥   1) Iris van Huis, “Contesting Cultural Heritage: Decolonizing the Tropenmuseum as an Intervention in the Dutch/European Memory Complex,” T. Lähdesmäki et al. eds., Dissonant Heritages and Memories in Contemporary Europe (Palgrave, 2019). pp. 226-237.
2023-08-10 | hrights | 조회: 674 | 추천: 6
정전 70년을 맞아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전쟁 정전일이 다가왔건만, 한반도의 현실은 핵 전쟁 발의 위기가 급속도로 고조되고 있다. 정전협정은 항구적 평화협정을 지향하고 있다. 평화협정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외국군대의 철수를 담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우보수정권은 빈껍데기의 종전선언조차 반국가세력으로 호도하고 있다. 출처 - 기독교한국신문 정전협정은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군사회담의 개최를 명문화하고 있건만, 분쟁의 평화적 해결은 요원해지고 정전협정 당사자 사이의 ‘핵 대 핵’ 대치의 악순환이 세계대전으로 급격히 발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외국군대의 주둔을 항구화하는 군사동맹은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킨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지향하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정신에도 반한다. 그러나, 극우보수정권은 핵 전쟁, 세계대전의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외국군대와의 군사동맹을 날로 강화하며 외국군대의 항구적 주둔을 꾀한다. 동족을 주적으로 간주하며 동족에 대한 선제공격과 정권 종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허구의 동족 악마화로 동족을 탓하며 동족대결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가공할 한반도 핵 전쟁의 위기를 불러와 민족의 평화적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을 뿐이다. 출처 - 경향신문 북핵 위협 증가에 대비하여 핵 확장 억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 따라 42년 만에 미국의 핵탄두 장착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전략 핵잠수함이 부산항에 기항하였다. 이에 북의 국방상은 미 전략자산 전개의 가시성 증대가 국가핵무력정책 법령에 밝혀진 핵무기 사용 조건에 해당될 수 있다는 담화로 대응하였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군사적 ‘강 대 강’ 국면이 장기화되어 오는 가운데 그 대결 국면이 최고조로 달해가는 상황이다. 북미 사이의 ‘강 대 강’ 정치군사적 대결 추세에 편승한 극우보수정권의 외세 의존의 동족대결 정책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와 함께 국가보안법에 의한 공안탄압의 전면화로 그 막무가내의 도를 더해가고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를 위해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까지 옹호하고,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를 막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국가정보원을 전면에 내세워 공안탄압을 강화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의 극우보수정권의 동족대결이 언제까지나 마구잡이로 지속될 수는 없다. 이판사판의 공안탄압도 마찬가지로 끝간데 없이 자행될 수 없다. 극우보수정권이 추종하는 북미 간 ‘강 대 강’ 국면의 지속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전쟁 위기를 격화시키며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갈수록 명백해지고 있다. 결국 북미 간 군사적 대결상태와 전쟁 위기를 끝내기 위한 평화협상에 의한 정치적, 외교적 , 군사적 해법이 모색될 수밖에 없다. 정전 70년을 맞아, 바야흐로 북미 간 ‘강 대 강’ 대결의 악순환을 지양하는 비등점이 다가오고 있다. 외세 추종의 동족대결 발상이 언제까지나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를 알 리 없는 극우보수정권은 자멸을 재촉하고 있다. 한계수명에 도달한 극우보수정권의 통치위기 수습용 공안탄압도 약발이 다해가고 있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07-25 | hrights | 조회: 705 | 추천: 8
하지 않아야 하는 게 있다 - 술 좋아 하는 시민이 올리는 충언 -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에게는 체력이든 시간이든 스스로 감당할 총량이 있으니, 애당초 ‘하면 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해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개 ‘하면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누구를 부려 먹으려는 자들이거나, 게을러서 전혀 뭔가를 해보지 않은 자들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그래서 철이 좀 든 이후 남들이 ‘〇〇〇을 하자’고 다짐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찾았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알았다. 첫째, 하지 않는 것도 하는 것만큼 힘들면서도 뿌듯하다는 사실이었다. 뭘 하지 않는데 왜 힘이 드는가? 화 안 내고 참는 게 쉬우면 누구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화가 날 때 슬기롭게 살펴 해소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둘째, 할 걸 먼저 하는 것보다 안 할 걸 먼저 안 하고 할 걸 하는 편이 훨씬 안정감과 집중력이 높인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테지만 나는 그렇다. 생각건대, 세상 일에는 나중에 도움 되는 게 있다. 도둑질도, 싸움도, 사기당하는 것도 뭔가 남는 게 있다. 그러나 흡연은 아니다. 백해무익(百害無益)이란 말이 담배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는 없다. 불행하게도 난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 사랑방에서 시작된 흡연은 지독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흡연자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도 12시간, 하루, 사흘,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심지어 1년도 끊어보았다. 그러다 다시 피고 말았다. 담배는 요물(妖物)처럼 마음에 틈만 생기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잖아! 다시 피워. 지금 힘들잖아?’라고 유혹하며 나의 여리고 허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물론 담배 끊기는 내 의지의 영역만이 아니다. 당초 담배를 파는 세상이 더 문제다.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담배를 버젓이 편의점, 수퍼에서 팔고 있는 세상이라니! 그걸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흡연공간까지 마련해주는 사회라니! 더더구나 담배를 팔아 거두는 세금 때문에 담배 판매를 합법화하는 국가라니! 나는 국가가 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로 담배 판매의 합법화를 든다. [금연 표지 : 작은아이가 일곱 살 때 그려서 내 서재, 마루, 화초가 있는 마당. 대문에 붙여놓았던 그림이다. 그놈 등쌀에 나는 담배를 끊어야 했다.] 나는 담배를 끊는 데 무려 25년 이상 걸렸다. 2004년 12월, 해골바가지 금연 그림을 그려서 방과 거실은 물론, 마당까지 따라다니던 작은 아이의 사랑스러운 성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서툰 포스터를 들고 ‘아빠, 담배 피웠지!’하고 심문하던 녀석의 표정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더하여 그때 시작한 마라톤은 흡연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스포츠였다. 그렇게 담배로부터 멀어진 지 2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담배 피는 꿈을 꾸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을 깬다. 휴~ 꿈이었구나…… 하면서. 군대 다시 가는 꿈은 안 꾼 지 이미 오래인데 말이다. 신혼 시절 안방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웠던 나의 행동에 대해 뒤늦게 진심으로 통렬히 참회한다. 내가 담배 피우던 입으로 아내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 무슨 야만이란 말인가! 나는 시험을 보면 피드백을 한다. 피드백을 하다 보면 담배 냄새를 풍기는 학생도 있는데, 나는 피드백 이전에 조근조근 왜 담배를 지금 젊을 때 끊지 않으면 안 되는지 설명한다. 그때 꼭 빼놓지 않고 말한다. “키스할 때 너무 더러운 냄새가 나거든! 너는 모르지만…….” 난 뭔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 열심히, 성실히 하는 건 잘하지 못하고 또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렇게 나는 안 해도 될 일을 먼저 쳐나가는 방식으로 내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뭔가 할 때는 슬렁슬렁한다. 다만 안 해도 되는 건 안 한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지 못하니까 예방책으로 안 할 일은 안 하는 전략을 취하는 게다. 내일 산에 가기로 되어 있거나 내일 강의 준비를 채 하지 못했으면, 오늘 저녁에 술을 마시지 않는 거다. 마셔도 컨디션 조절용으로 조금만 마시고. 특히 마라톤 대회가 있으면 적어도 넉 달 동안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실제로 마라톤 풀코스를 처음 뛸 때 그렇게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술을 마시고 칼럼, 논문을 쓰지 못하거나 토론을 포함하여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면 술은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절대 담배처럼 술을 끊을 자신도 없고, 생각도 없다. 그 좋은 술을 왜 끊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만큼 술을 좋아하는 분이 용산에도 계신 듯하다. 주량도 제법 되시는 듯하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랏일을 하고 계시니까, 내가 하는 방법 한 번 써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드리는 말이다. 국무회의가 있거나 외국순방이 있거나 안전보장회의가 있거나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사안이 있을 때는 전날 술을 안 하시는 거다. 그런 일이 없을 때가 있느냐고?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자리인 줄도 모르고 맡으신 건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나도 할 줄 아는 걸 당신이 못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 외에도 안 할 일을 하다 보니 할 일을 못하시는 건 없는지 두루 살펴보셨으면 한다. 사실 이 전략은 내 발명품이 아니다. 2천 년 전에 이미 맹자(孟子)께서도 말씀하셨다. “사람이란 하지 않는 일이 있어야 뭔가 이룰 수 있다.[人有不爲也而後可以有爲]” 달리 말하면, 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7-25 | hrights | 조회: 272 | 추천: 12
핵발전소, 방사성 물질, 그리고 자연권에 대하여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환경 자체의 권리 지구가 위기에 처했다. 인류와 생명체들의 생존이 경각에 달렸다. 지구에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 근거인 자연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욕망을 위해 끝없이 지구를 채굴하고 생명을 살상하며 땅을 소비해온 결과이다. 그동안 인간을 위해 환경을 사용할 권리(환경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내세웠다면, 이제는 ‘환경 자체의 권리’(right of the environment)를 확산시켜나가야 할 때다. 자유권과 사회권 같은 인권도 생태적 한계 안에서 조건부로 인정하는 자연 친화적 인권 의식을 확립해가야 한다. 동물들도 “살아있고 지각하는 존재로서 법인격을 가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종에 적합한 환경에서 나서 살고 자라고 죽을 기본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데이비드 보이드, 『자연의 권리』, 93-94)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가야 한다.     이익의 사유화 물론 현실은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 오늘날 지구촌의 문제는 “이익의 사유화에 관해서는 자본주의적이면서 환경 훼손이라는 비용에 관해서는 사회주의적”인 이중성에 있다. “공정한 시장경제라면 환경 비용을 유발한 자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디르크 슈테펜스, 『인간의 종말』, 214), 탄소 배출에 가격을 매기는 ‘탄소가격제’의 적극 도입도 필요한 상황이지만(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293), 현실은 그 비용을 피해자들까지 떠안은 채 오던 대로 직진하고 있다. 소수가 공적 환경을 더 많이 훼손하고 비용은 다수가 부담하는 불공정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공정성을 확보해야 할 정치도 지구를 소비하기만 하는 자본주의적 확장을 지원하고 추구하며, 그 와중에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골몰한다. 인간의 욕망이 양극화되지 않도록 공정하게 관리하려는 정치적 노력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에콰도르 헌법의 자연권 자연을 훼손하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헌법적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헌법에 ‘자연권’을 담아내야 한다. 실제로 남미의 에콰도르가 헌법에 자연권을 명시한 바 있다: “생명이 재창조되고 존재하는 곳인 자연 또는 파차마마(Pachamama, 대지의 여신)는 존재와 생명의 순환과 구조, 기능 및 진화 과정을 유지하고 재생을 존중받을 불가결한 권리를 가진다. 모든 개인과 공동체, 인민과 민족은 당국에 청원을 통해 자연의 권리를 집행할 수 있다.”(제71조) 미국 석유회사인 텍사코가 에콰도르 열대우림에서 유전을 개발하면서 오랫동안 엄청난 환경파괴를 자행했다. 이 때문에 피해를 본 에콰도르 원주민 3만 명이 텍사코를 인수한 쉐브론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미국과 에콰도르 법원 등을 오가며 결국 승소했다. 그 과정에 환경에 대한 의식이 커졌고, 헌법에 자연권을 담는 성과로 이어졌다. 2011년에는 볼리비아에서도 자연을 법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어머니 대지법’을 제정했다. 출처 - 오미아뉴스 인권의 근간, 자연권 자연권을 지킬 의무는 물론 인간에게 있다. 자연권은 “자연의 관점에서 자연을 대리 또는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권리로서, (그런 사람들이) 자연을 훼손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고 자연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권리”이다.(오동석 외, 『지구를 위한 법학』, 179) 이 자연권은 기본적인 인권 보호장치로 작용한다. “자연의 권리를 파괴하는 세력은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는 인간도 억압하기 때문”에 자연의 권리를 대리할 의무를 위해서라도 인권이 더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211-213) 자연에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생존권도 두루 강화된다. 자연권은 생태 위기 시대의 인권을 위한 근간이다. ‘비인간존재’도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내재적 가치와 존재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생태통합성의 원칙이 모든 법규범을 평가하는 최종 심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조효제, 205) 환경권과 민주적인 에너지 다행히도 대한민국헌법에서는 ‘환경권’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제35조 1항)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제30조)는 규정도 두고 있다. 타인/타국의 범죄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해 국가가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면 국가를 상대로 헌법을 준수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환경보전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권은 이 환경권 개념의 확장판으로서, 자연 파괴적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법적 근거가 된다. 당연히 자연권은 모든 인간의 생존권도 두루 강화시킨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한 독재정치가 위험하듯이, 소수 기술자에 맡겨져 있는 핵발전 기술은 반자연적이고 반민주적이며, 그만큼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소수 전문가의 손에 맡겨진 특권은 여차하면 다수에게 원치 않는 피해를 줄 가능성도 크다. 권력도 기술도 여럿이 함께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개인이 통제하고 조율할 수 있는 에너지의 생산, 보급,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핵발전보다는 가령 햇빛발전 같은 더 민주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여럿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파괴적 가능성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ALPS가 ‘다핵종제거설비’인가 일본(도쿄전력)이 후쿠시마 바닷가에서 1km 길이의 해저터널을 통해 방사성 물질 132만 톤을 방류하기 일보 직전이다. 나름의 처리를 거쳤다지만, 그 처리를 위한 설비는 일본 기업 도시바가 개발한 장치이다. 이른바 ALPS(Advanced Liquid Processing System). 우리말로 하면 ‘고급액체처리시스템’쯤 되는데, 희한하게도 이 장치를 왜 ‘다핵종제거설비’라고 의역해서 쓰고 있다. 다핵종(多核種), 즉 모든 원자핵들을 다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한 의도적 표기법으로 보인다. ‘알프스’(ALPS)라는 약자도 알프스산맥의 청정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적 조어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조차 후쿠시마 제1원전의 오염수를 태평양으로 방출하는 행위에 별 문제의식을 못느끼는 이들이 많다. 과학자들도 그런 목소리가 내기도 한다. 물론 오염수 방류는 ‘위험하다’는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더 많아 보인다. 그런데 정치가 과학의 언어를 진영논리로 몰아가면서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은 그 사이에서 부화뇌동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게 된다. 과학도 어떤 척도에서 주장하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과학도 절대적이지 않다. 과학도 어떤 전제와 입장을 가지고 실험하느냐에 따라 결과값이 달라지고, 어떤 실험이든 특정한 맥락 안에서 진행되고 진술되는 한, 어느 정도 정치성을 띠고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상대적 입장 가운데 하나다.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는 행위가 왜 문제인지는 사실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과 생명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을 ‘증가’시키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위험한 ‘정도’와 ‘농도’를 따지기 이전에, 위험물을 ‘확산’시키는 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핵발전소를 가진 다른 나라도 방사성 물질을 방출하고 있지 않느냐는 항변은 그저 물타기 수법이다. 대기 중에도 방사능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는 주장도 방사성 물질을 바다로 방출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의 방사능 수치보다 ‘더 높이는’ 행위 자체를 엄단해야 한다. 오염의 ‘농도’가 아니라 오염의 ‘총량’으로 판단해야 한다. 오염의 총량을 늘리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이현령비현령, 국제.안전.기준 물론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한다고 해도 바다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오염의 농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비슷한 기준을 가지고 오염수 방류가 마치 정당한 행위라도 되는 양 일본 편을 들며 세계를 향해 의도적 여론몰이를 한다 - 실제로 일본은 IAEA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낸다. 친일적인 한국의 대통령실과 여당은 희한할 정도로 그에 부화뇌동한다. 농도가 살짝 높아진 것이 인간에게 무슨 대수냐는 식이다. 가장 그럴듯한 말은 ‘국제안전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 ‘안전’ ‘기준’이라는 것이 오염의 농도를 전보다 좀 더 높이는 정도를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일 뿐, 그것이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 조금 높은 오염이 계속되면서 지금까지 지구상의 무수한 미생물들을 죽이고, 먹이사슬로 연결된 모든 생명체들에 측정할 수 없을 위해를 끼쳐오지 않았던가. 방사능 측정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어마어마한 생물학적 피해와 미시적 세계에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늘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자연권의 제정은 바로 이러한 범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본적인 근간이 된다. 출처 - 환경재단 피해의 공유화라니, 안 된다 개인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듯이, 국가를 위해 쓰이던 핵발전소의 책임은 해당 국가가 져야 한다. 그로 인한 피해는 원칙적으로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 일본이 자기들의 기준을 정당화하며 방사능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려는 것은 오로지 돈 때문이다. 오염수를 고체화해 보관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처리한 안전한 물이라며 홍보 중인만큼 일본 안에 호수를 만들어 보존하는 것도 논리적이고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 비용이 수십 배 혹은 수백 배 더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비용만의 문제인가. 일본이 핵발전의 이익을 세계와 나눈 적이 있던가. 차라리 자국 내 보관을 할 테니 일본의 당면한 어려움을 도와달라며 세계에 호소하는 편이 더 낳지 않을까. 오염수의 방류는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은 공유화하는 전형적인 경제 및 환경 범죄다. 일본의 위험과 비용을 전 세계와 인류에 전가하는 행위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일본의 로비 탓에 오염수 방류가 ‘국제안전기준’에 부합한다는 뻔한 외교적 발언을 이어가면서도, 정작 종합보고서에는 “IAEA와 그 회원국은 보고서 사용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모순된 단서를 달아놓았다. 연구결과 방류는 정당하다고 판단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에는 책임질 수 없다니, 모순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IAEA는 유엔 산하 기구이다. IAEA의 입장은 유엔의 이전 입장과 너무나 모순된다. 가령 유엔총회에서는 이미 41년 전에 “세계자연헌장”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모든 형태의 생명은 독특하고, 인간에게 가치가 있느냐와 관계없이 존중해야 하며, 그런 인식을 다른 유기체에게도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도덕적인 행동 규범으로 인도되어야 한다.”(취지문) 너무나 상반되는 두 목소리를 모두 정당한 듯 내보내고 있으니, 유엔도 우습기 짝이 없는 조직이다. 출처 - 시사인 오염의 총량이 문제다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데이터에 대한 ‘해석’에 기반한다. 그리고 해석에는 늘 정치, 경제, 이해관계 등이 들어있다. 순수한 과학이라는 것은 없다. 전체 농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 일부 데이터에 기반한 의도적 해석이 지구를 대멸종의 위기로 몰아오지 않았던가. 오염의 ‘농도’가 아니라 오염의 ‘총량’이 문제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를 인류와 전체 생명의 근원인 공해상으로 방류하는 것은 거대한 범죄다. 원전의 혜택을 누려온 일본 안에서 해결을 해야 한다. 정말 어려우면 전 세계를 향해 도와달라고 솔직한 고백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런 것 없이 일방적으로 자행하는 데서 오는 모든 피해에 대해서는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 헌법상 자연권이 확장되면 자연을 조금이라도 더 파괴시키는 행위에 대한 국내외적 여러 처벌들이 가능할 것이다. 기후위기 및 생물종의 급감 같은 오늘의 총체적 위기가 좀 더디 오도록 하는데도 좀 더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23-07-12 | hrights | 조회: 573 | 추천: 10
이재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조국 사태’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2019년 겨울이었다. 문화부 학술담당 기자였던 나는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세대 담론’을 주제로 쓴 논문(‘386’ 담론의 계보와 정치적 의미론, 1990-2019)을 보고 기꺼운 마음으로 기사를 썼다. 거칠게 요약하면, 세대론은 마치 인종주의나 섹시즘(성차별주의)처럼 겉으로 드러난 말초적 지표(나이)로 계급 갈등을 비롯한 다른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은폐한다는 내용이었다. 신 교수는 조국 사태를 거치며 386 담론이 일베화했다며(민주화‧평등‧진보에 대한 조롱 및 공격), ‘386 말하지 않기’를 제안했다. 세대 차이는 있다 2021년 늦가을 무렵에는 고 정태인 박사가 생애 마지막 <한겨레> 인터뷰에서 “민주화 세대는 실패했다, 청년에게 자리라도 내주자”고 주장했는데, 그의 충심을 이해하면서도 논지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마치 이 나라의 모든 문제가 민주화 세대 때문인 것처럼 주장하는 <조선일보>류의 프레임을 차용한 듯한 인식에 저항감이 들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나의 정의감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검찰정권이 출범하여,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무능과 독선으로 나라를 망가뜨리는 과정을 괴로운 심정으로 지켜보며, 오히려 세대 담론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세대 담론을 무기로 민주화 세대를 폄훼하는 우파의 정치적 의도와 별개로, 진보 안에서도 역사와 세계에 대한 관점의 ‘세대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이 윤석열 정부의 압도적 실정에도 불구하고 야권에 대한 전폭적 지지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아닌지 따져보게 된 것이다. 국민들이 몰라서 문제일까? 윤석열 정부가 노동혐오와 정적탄압, 불통정치와 편향외교로 일관하며 역대급 무역적자와 세수펑크로 경제 또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데도 주류 언론은 마치 태평성대인 것처럼 윤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다. 최근만 해도 국민의힘 의원 두 명이 공천을 대가로 돈을 받은 사실이 잇따라 드러났는데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나 김남국 코인 투자 논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용히 넘어가고 있다. 같은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인데도 민주당 돈봉투 사건은 검찰이 직접 수사하며 언론을 통해 혐의가 중계되지만, 경찰이 수사 중인 김현아·황보승희 의원의 공천 대가 금품 수수 의혹은 수사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취재가 빈약하다. 검찰의 편파 수사와 피의 사실 유포, 언론의 선택적 집중 보도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기울어진 정치 지형의 세부 항목은 모두 진실이다. 그러나 그뿐일까? 이게 다 검찰과 언론 때문인데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어서 정권 심판 여론이 미약한 것일까? 출처 - 강원도민일보   급격히 노화한 386 한국 정치는 똥 묻은 개(국힘)와 겨 묻은 개(민주)의 싸움이다. 30%가량 되는 국민의힘 콘크리트 지지층을 제외하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다 더 나쁘고, 1차 개혁 대상이라는 데 동의하는 국민이 훨씬 많다. 검찰이 대통령의 충직한 사냥개로서 수사를 통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많은 국민이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류 언론이 보수 지배권력의 일원으로서 매파 이데올로그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 종합적 결과로서 한국이 보수 헤게모니 사회라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한 번도 변치 않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세 번의 정권 교체를 돌아보면, 두 번은 나라가 망할 지경의 실책(IMF와 국정농단)으로 보수가 자멸한 경우였고, 한 번의 예외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었다. 당시는 이른바 386세대가 30~40대로서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하던 때이며, 나라의 미래 또한 이들에게 달려있었다. 나는 이들의 역동성이 한국을 아이티 강국으로 밀어올렸고, 한류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386 출신 정치인은 특별한 업적이나 성취 없이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급격히 노쇠하고 부패했다. 송영길 의원이 연루된 돈봉투 사건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민주당의 국제감각과 시대정신의 노화를 의심하게 하는 사건이 잇따라 터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편을 드는 듯한 이래경씨 혁신위원장 임명이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주한중국대사 싱하이밍을 대사관저로 찾아가 선을 넘는 발언에 판을 깔아준 사례, 중국의 티베트 점령 및 인권 탄압에 대한 도종환 의원의 발언(“그건 1951년, 1959년에 있었던 일”)은 민주당이 중국과 러시아에 편향돼 있다는 의심을 불렀다. 윤석열 정부의 미·일 편향만큼이나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인 편향이다. 이런 낡은 인식이 윤 정부와 국힘을 지지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선뜻 민주당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전면적 세대교체밖에 세 번이나 집권한 또 다른 기득권 세력이면서도 젊은 세대의 이반을 보수화라고 손가락질한 것은 아닌지 민주당은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민주화 세대와 함께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겪은 지금의 40대는 이게 다 검찰과 언론 때문이라고 같이 분노해 주지만(그마저 돈봉투와 김남국 코인 사태를 지나며 약해졌다), 그 아랫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그런데 미래는 이 아랫세대에게 있다. 이들과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세대 차이를 극복하려면 젊은 세대를 전면에 세우는 수밖에 없다. 인적 혁신만이 늙고 낡은 민주당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이다. 386을 포함한 민주화 세대는 억울할 수 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어떻게 만든 나란데’)은 태극기 세대의 특징이다. 민주화 세대 역시 계속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진보 태극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 세 번의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검찰과 언론의 편파성은 이미 입증된 상태다. 더 이상 검찰과 언론 탓을 해봐야 확장 변수는 생기지 않는다. 상수를 변수로 놓고 이차방정식을 풀려고 하니 답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재창당 수준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를 젊은 세대의 진보적 시각으로 재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태인 박사의 지적은 절반만 옳다. 민주화 세대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만 늙었을 뿐이다. 그걸 인정하는 게 혁신의 시작이다. “청년에게 자리라도 내주자.”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06-28 | hrights | 조회: 700 | 추천: 13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 대선에서 1번을 찍은 사람이 내 주위에 별로 없는 탓인지, 어쩌다 모여서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윤석열 대통령이 ‘도대체 뭘 알기나 하고 그러는 것인지’ 갑갑하다는 장탄식을 듣게 된다. 심지어 국정 전반에 대해 ‘타블라 로사(tabula rosa, 백지상태)’여서 남이 일러준 대로 하거나 써준 대로 읽거나 아니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하기 때문에, 그의 말과 글에 괜한 의미를 둘 필요조차 없다는 소리도 그럴싸하게 귀에 걸린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 국가의 안위 및 이익과 직결된 정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냐는 일부의 의구심과는 달리, 윤 대통령 스스로는 국정 전반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듯하다. 윤 대통령의 대선 캠프 대변인을 역임한 이의 전언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나 때문에 이긴 거야, 나는 하늘이 낸 사람이야”라고 자부하며 “1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웬만한 건 내가 다 알아,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아’라며 장광설을 늘어놓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점이나 입장과 다른 사람들-정권에 비판적인 국민과 야당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나 주의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출처 - 경향신문   윤 대통령의 주변에서도 그를 남다른 식견의 소유자로 믿는 것 같다. 교육 문제를 잘 모르는 대통령이 즉흥 발언으로 교육 현장의 불안감을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을 “수능 전문가”라고 치켜세우며 “저도 전문가이지만 (대통령에게) 제가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입시 관련 수사를 한 경험이 있다”며 “(대통령이) 입시에 대해 수도 없이 연구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토로했다. 또한, 경남 진주갑을 지역구로 둔 3선 의원인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인 박대출 의원도 “윤 대통령은 검찰 초년생인 시보 때부터 수십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입시 비리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뤄봤고, 특히 조국(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의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로서 “대학 제도의 사회악적인 부분, 입시 제도 전반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면서 윤 대통령을 거의 ‘최고 존엄’처럼 떠받들었다. 윤 대통령의 말과 행태를 두고서, 적지 않은 국민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런다고 의구심을 품고 있는 반면에, 본인은 내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고 있는데 ‘검사도 아닌 것들이’ 주제넘게 심통을 부린다고 믿는 것 같다. 국민은 모른다고 하고, 본인은 안다고 하는 이 괴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단, 어쩌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나라 안팎의 큰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건 ‘윤핵관(호소인)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저 대통령 놀음이나 즐기자는 심사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기가 어지간한 세상사와 나랏일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누구의 눈에게는 자만)하므로, 분명한 생각을 지닌 채 말하고 행동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윤 대통령이 구사하는 말과 행태와 정책은 그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보아야, 사실에 맞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예컨대 올해 신년사에서의 ‘노사 법치주의’ 발언을 보자. 윤 대통령은 ‘노사 법치주의’가 노동 개혁의 출발점이라면서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집회와 시위를 바로 잡는 게 법치주의인 양 말했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국민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게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즉, 국가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는 반드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로써 해야 하고, 국가 행정도 법률에 근거를 둬야 한다는 원칙이 법치주의다. 그렇다면 법대를 나오고 검사 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이 법치주의가 뭔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집회와 시위에 대한 강경일변도 대응을 정당화하고 독려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에게 익숙해 거부할 수 없는 원리인 법치주의로 포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시위노동자나 국민에 대한 규범이 아니라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퇴행’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의 권한 남용을 통제하는 원리”인 법치주의를 몰라서 오용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악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법치주의 관련 내용과 인용의 출처는 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원래, 법치주의는 ‘권력’을 ‘통제’하는 원리이다>, <<대전일보>>(23.06.12)) 윤 대통령은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기는커녕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다. 지구사적 문제인 기후 위기, 세계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투쟁,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근대화’를 했다지만 극우적 정치문화가 득세한 일본 모델과 식민지였지만 민주적 시민의 활력이 살아있는 한국 모델의 역사적 경쟁, 그리고 남북의 갈등과 대결 등과 같은 절체절명의 중차대한 문제들에서 그는 자신이 취한 입장과 정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재생에너지 대신에 핵에너지를,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국과 일본 편을 그리고 평화적 대화를 접고 군사적 대결의 위험을 높이는 쪽을 선택했다. 그 선택도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게 아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재생에너지 사업 전체가 비리 덩어리인 양 만들고, 중국과 러시아는 상종 못 할 가치 없는 국가로 몰아가는 반면에 일본은 배워야 할 아름다운 나라로 치켜세우고, 북한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는 일들이 ‘사용언론들’의 대대적인 협조 속에서 착착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도 아니고 무능한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 매우 비판적인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정치문화나 경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를 유능하게 퇴행시킨 사상 초유의 인물이다. (역사적 선을 이루려면 선한 다수의 힘이 필요하지만, 역사적 악을 실행하는 데는 악한 소수의 힘만으로 충분하다는 깨달음이라니, 쓰리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은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나 할까. 지난 1년 동안의 나라 간의 관계나 나라의 운영과 살림은, 여러 방향에서 논의되고 종합적으로 검토되지 못하고 하나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나라의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 관계에서조차 미국과 일본은 선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악이라는 ‘가치(?)’의 관점으로만 본다. 집권 세력이 바뀌었어도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식의 실리외교가 30년이 넘게 유지돼왔다는 사실은 보지 않는다. 아예 무시한다. 내정에서도 검사 출신들의 정부 요직 독식, 입법부를 무시한 행정부의 독주, 편파적인 부자 감세 정책, 원전 하나에 ‘올인’하는 에너지 정책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집단과 방향(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문제를 조감하려는 시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평생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한다. 무지보다 편향이 더 문제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가 두루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문제의 일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면적이 아니라 다면적(many-sided)일 때 실체에, 진리에 더 근접할 수 있다. 나만이, 한쪽의 이익만이, 한 관점만이 옳다는 독선에 사로잡히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자성이 아니라 남의 탓만 하게 된다. 몰라서가 아니라 어설픈 자기 생각=확증편향에 빠져 독불장군처럼 독주(아니, 폭주)하면, 국민은 그에게 요구해야 한다. 일부러 제멋대로 하지 말고 법대로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퇴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준엄하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6-20 | hrights | 조회: 320 | 추천: 9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때 존경했던 인물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반대로 한 때 꽤나 부정적으로 비치던 인물을 정반대로 재평가하게 되기도 한다. 나로서는 연개소문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연개소문을 빼놓고는 고구려 역사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했던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사를 얘기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는 존재감이 크다. 그만큼 호불호가 갈리고 평가도 제각각이다. 연개소문과 조선상고사   언제나 그렇듯, 첫인상이 절반이다. 나로선 중학교 때 학교도서관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집어든 ‘조선상고사’가 꽤나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상고사’는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청년 유학자에서 근대계몽운동가로, 마지막엔 아니키스트라는 드라마같은 삶을 살았던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던 단재 신채호가 저술했다. 물론 단재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제대로 저자의 검토도 거치지 못한 채 연재가 되는 바람에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골 중학생은 이 책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특히 이 책에서 영웅으로 묘사하는 연개소문 이야기는 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까지도 규정해 버렸다.   조선상고사를 관통하는 건 줄곧 외세라는 ‘타자’에 맞서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우리’가 아니었나 싶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식민지 노예 상태로 떨어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로선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 비친 연개소문은 당나라[唐]에 맥없이 항복하려는 사대주의 지배층을 단칼에 쓸어버리고 고구려의 기상을 결집한 끝에 당 태종이 이끄는 침략군을 통쾌하게 몰아내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다. 심지어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침략군을 저지하는 동안에 배후로 우회해 북경을 타격함으로써 당태종을 포위하는 전략가로서 면모도 보여준다. 단재가 보기에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군대를 보냈다는 기록은 패배로 인한 정치적 타격을 모면하기 위한 ‘가짜뉴스’일 뿐이다. 심지어 고구려가 당나라 침략군을 무찌르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북경 지역까지 정복했다는 설명이 진지하게 등장한다.   조선상고사에서 묘사한 연개소문 이야기에 강한 영향을 받은 건 나 뿐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 연개소문은 조선상고사를 모티브 삼아 적당하게 연개소문에게 박정희 이미지를 덧댔다. 1980년대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소설 단(丹)’ 역시 조선상고사를 차용할 뿐 아니라 당 태종이 북경 근처에서 연개소문에게 포로로 붙잡힐 뻔 했다는 무협소설 ‘영웅문’ 같은 이야기를 추가해놨다. 급기야 1990년대 나온 ‘대쥬신제국사’라는 만화에선 연개소문이 직접 당 태종을 포로로 붙잡아 항복을 받아냈다는 대목까지 등장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트이고 지식도 조금 더 쌓이고 나서 생각해봤다. 연개소문 이야기는 정반대로 읽어야 할 이야기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구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구려를 위기에 빠트린 존재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당나라와 전쟁이 그토록 불가피했다면 굳이 신라를 잠재적 적으로 돌려야 했을까. 수성전을 위주로 한 강력한 방어체계를 무시하고 굳이 대규모 회전이라는 도박을 벌여야 했을까. 동맹관계였던 백제가 무너지면 남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게 불을 보듯 뻔한데도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개소문이 665년 죽고 나서 3년도 안돼 아들 3형제가 내전으로 사실상 자멸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패가 아닐까. 출처 - KBS뉴스   무엇보다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까지 수십년간 전쟁을 하면서 겪어야 했을 고구려 민초들의 고통은 둘째치고라도, 당나라에 시종일관 강경책으로만 맞섰던 게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신라나 발해처럼 적당한 군사적 승리를 밑천 삼아 명분을 살려주며 평화를 도모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사대주의를 깬 민족자주 영웅’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선인 것일까. 애초에 그 사대주의라는 것 자체가 민족국가와 자주국가의 열망을 고대사에 투사한 우리만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500년 뒤 역사가들은 ‘조선은 속방(屬邦)이기 때문에 조선의 국내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던 전근대 한중관계와 ‘전시작전권도 없이 우리 세금으로 주한미군 모시고 사는’ 현대 한미관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사대주의’라고 평가할까.   느닷없이 사대주의 논란이 공론장을 뒤덮고 있다. 굳이 밥먹는 자리에서 흰소리를 하는 오지랖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방식 역시 그리 세련돼 보이진 않는다. 가장 황당한 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운운하는 대목인데, 미국과 일본한테 지난 1년간 어떤 식으로 굽히고 들어갔는지 세상이 다 봤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본한테 하면 가치외교, 중국한테 하면 사대주의라는 발상이야말로 내로남불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2021년 대선 국면에서 멸치와 콩을 쇼핑하는 유치한 멸공팔이를 할 때 ‘중국대사관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던 것도 떠오른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선은 넘지 말길 바랄 뿐이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06-13 | hrights | 조회: 237 | 추천: 5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임기 초창기부터 무능과 독선으로 빚은 연이은 지지율 추락에 겁먹은 정권의 위기 탈출 시도가 급브레이크도 비상등도 켜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한미일 군사동맹의 급행주로를 타고 대내적으로는 수구보수의 회귀로 직진하고 있다. 대화와 소통의 리더십을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공안탄압의 일상화, 공안통치의 전면화에 골몰하고 있다. 화물연대에 대한 전방위적 노동탄압에서 기세를 올린 때문인가 싶다. 화물 노동자의 생존권과 안전이 달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정책적 대안도 없이 제대로 된 협상조차 거부한 채 탄압으로 대응한 것이 정권의 미래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터널에 갇힌 나머지 남북관계에서 주적론과 선제공격 전쟁불사를 주창할 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대북적대강경정책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와 공안탄압의 신호탄이었다. 급기야 군국주의 제국의 깃발을 나부끼며 대동아 공영론의 부활을 꾀하는 후예들이 식민지배의 옛 영토를 보란 듯이 활보해도 괜찮다는 역대급 친일 매국 모리배들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천박한 기질을 자랑하며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 그래도 매국 외교에 대한 국민적 반발은 의식한 듯하다. 소위 한일 셔틀 외교의 재개와 복원을 뒷받침하고 이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공안 검찰은 국가정보원을 부려 매국 보수 언론을 통해 피의사실 유포 범죄를 자행하며 끊임없이 시대착오적 종북 공안몰이에 골몰하고 있다. 출처 - 씨원뉴스   소위 검찰 특수통 칼잡이 기술에 익숙한 정권에게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벌써 공안통치 외에는 정권의 위기를 수습할 대책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있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올해 말로 국가보안법 수사권이 없어지는 국가정보원을 시도 때도 없이 주구장창 전면에 등판시키며 간첩조작 사건의 화려한 전성기로 만드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대공수사권 원상회복을 갈구하는 음지의 독버섯 세력들을 여기저기에서 끌어 모아 빨갱이 사냥에 총동원하고 있다. 적폐들과 손 맞잡고 2024년 총선 승리를 위해, 수구보수의 회귀를 향해 질주하는 모양새다. 과거 독재정권의 공안통치를 능가하는 검찰독재정권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검찰을 중심으로 소위 검찰 칼잡이들이 공안정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특성뿐이다. 한국 민중이 분단냉전체제의 장막에 갇혀 종북 공안몰이에 세뇌당하기 십상이고 그 저항력이 취약한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임기 초부터 무한 질주하는 수구보수 회귀 목적의 공안통치에 그저 손 놓고 당할 리도 만무하다. 정권의 노동탄압, 민중운동 탄압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검찰독재에 대한 잠재된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실질적인 저항력으로 결집할 것이고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북적대강경정책과 공안 통치만으로는 정권 위기의 수습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검찰독재정권이 한계점에 부딪혔다. 오죽했으면 민주노총의 집회와 시위를 불법으로 몰아가고 야간 집회와 시위를 제한하겠다는 위헌적 발상까지 나왔다. 시위 해산 및 검거 훈련에 캡 사이신 최루액까지 등장하였다. 헌법과 법치주의의 외피를 벗고 백골단과 최루탄에, 물대포까지 거리에 등장케 하고 집회와 시위에 대한 원천봉쇄까지 일상화되는 이판사판 막가파식 대응으로 일관하다보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러다 오래 못 가지’, 한국의 역사에서 독재 정권은 언제나 국민과 유리된 탓에 공안통치의 수렁에 깊이 빠져 들어가 결국 민중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비참한 말로를 예외 없이 맞이하였다. 검찰독재정권의 운명이 다하는 분수령이 될 날과 사건과 계기가 시시각각으로 그 목숨 줄을 죄어오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민중운동 진영은 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서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며 총파업과 국민적 대항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퇴로가 없는 검찰독재정권, 파멸로 나아가는 형국이다. 공안통치의 약발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고언을 전해 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대북적대강경정책에서 벗어나 남북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의 통로를 만들기 바란다. 다음으로,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의 마수에서 벗어나 더 이상 미국을 추종하지 말고 대등한 한미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성실한 사과와 피해회복을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공조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국가보안법 및 공안검찰과 국가정보원에 기대어 공안탄압으로 얻을 것은 정권의 파멸 뿐임을 자각하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보민중운동 진영과 공존을 추구하며 대화와 협상으로 민생위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검찰독재정권이 자업자득의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한국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다면, 그 외 다른 길이 없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05-31 | hrights | 조회: 698 | 추천: 4
오항녕/인권연대운영위원 - 국유 재산을 다시 보자 - “문화재가 국유재산인가요? 법령에 어떻게 되나요?” “아, 그게, 저희가 논의한 뒤에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며칠 뒤, 담당 사무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책임감이 느껴졌다.) “문화재도 국유재산입니다. 취득, 관리, 처분에서 국유재산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그럼, 겨울 나고 북쪽으로 날아가는 청둥오리도 국유재산인가요?” “네? …….” “청둥오리는 천연기념물이거든요. 무형문화재예요. 근데 그 애들이 철따라 만주나 아산만을 오가는 걸 어떻게 관리하나요? 국유재산 목록에 매번 분실, 취득이라고 적을 수도 없고.” “…….”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몇 년 전 강의 시간에 문화재 수집과 처분에 대해 논의하다가 내가 관계부처에 문의한 적이 있는데, 위는 기획재정부 담당자와 했던 실화이다. 대화 도중 청둥오리를 떠올린 건 어려서 친구, 형들과 어울려 자주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땐 그게 천연기념물인지, 잡아먹으면 불법인지, 우리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닭 대신 청둥오리였을 뿐이다. 청둥오리나 꿩, 참새, 산비둘기, 뜸북이는 우리의 간식이었다. 붕어, 미꾸라지, 가물치, 메기, 뱀장어, 조개 따위는 개천에서 구하는 간식이었듯이. [정선의 〈행호에서 고기잡이를 보다[杏湖觀漁]〉. 행호는 고양 행주산성 앞을 흐르는 한강이다. 이맘쯤이면 웅어잡이가 한창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강과 바다, 산과 들에서 생계수단을 얻었다.] 위 대화는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국유재산법은 마치 ‘국가 안에 있는 건 사유재산 빼고’ 모두 국가 소유, 즉 국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려청자,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유형문화재 뿐 아니라, 천연기념물이나 승무(僧舞) 같은 무형문화재까지 국유재산법 적용 대상이라고 답변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는 국가-정부 입장에서도 곤혹스럽다. 전화 통화 말미에 드러났듯이 ‘국유재산법의 적용을 받는 문화재인 천둥오리’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모순일 뿐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관련 공무원들은 직무유기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매년 어마어마한 국유재산을 밀반출, 밀반입하도록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상황은 〈청자상감운학문 매병〉이나 정선(鄭敾)의 〈금강전도〉가 각각 사유(私有)로 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음에도 모두 국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데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유재산법’의 논리대로라면 하나의 문화재에 두 개의 소유권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국유란 용례에 담긴 혼선은 이 개념이 공유(共有)와 사유(私有) 모두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 있는 건 사유재산 빼고 모두 국가 소유’라는 의미의 국유 용례를 통해 마치 ‘국유란 국민의 것이란 뜻’이라는 착시 현상을 만들어낸다. 국민들 것이니까 국민에 ‘의해’, 국민을 ‘위해’ 취득되고 사용되고 처분되겠지 하는 착각이다. 말하자면 국유가 공유(共有)를 뜻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더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법률에서 ‘공유(公有)’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이 공유(公有)는 지방정부의 재산이나 국유를 의미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청자상감운학문 매병〉과 정선(鄭敾)의 〈금강전도〉. 이 문화재가 국유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인천공항, 철도, 항만, 수도, … 인터넷까지 양도할 수 없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자산이다.] 한편 국유는 얼마든지 사유와 마찬가지로 처분될 수 있다. 작년 기획재정부는 ‘매각 제한 대상’인 서울 강남 소재 상업용·임대주택용 국유재산을 매각하려고 했다.(《경향신문》 2022년 8월 16일자, 인터넷판) 당시 정부는 9곳을 매각 대상으로 발표했을 뿐 어디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정부 말로는 ‘유휴·저활용 국유재산 매각·활용 활성화 방안’이었다. 그러나 6곳이 강남 지역에 있고, ‘유휴, 저활용’이 아니라 매각 대상이었던 강남구 신사동 ‘신사 나라키움’ 건물처럼 잘 사용하고 있고 곧 지하철이 들어설 곳으로 부동산업자들도 “저런 노른자위 땅은 그대로 갖고 있는게 가장 큰 이득”이라고 했단다. 이런 땅과 건물을 슬그머니 팔려고 한 것이다. 매각되었으면 누가 샀을까? 보나마나 돈 많은 개인이나 기업이 샀을 것이다. 남미의 독재국가들만 다국적 기업에 도로, 항만, 공항을 매각해서 부정한 정치자금이나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게 아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이씨 왕가가 미국에 넘긴 평안도 운산 금광 채굴권과 일본에 넘긴 경인철도 부설권부터,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교량, 공항, 이동통신 시스템, 인터넷 등이 이미 사기업에 넘어갔거나 자본가들이 탐내는 먹잇감이다. 이런 기반시설에 대한 통제, 관리권을 갖게 되면 경쟁할 필요 없이 독점, 과점 가격을 통해 위험 없이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요금 인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한국전력은 이미 무늬만 공기업이다.(윤석열 대통령은 전기요금 인상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원전이 줄지도 원전의 발전량이 줄지도 않았다.) 공사(公事)로 정부 지분 18%, 한국산업은행 33%로 명목상 정부 지분 51%를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외국인 등 주주가 차지하고 있다. 공사임에도 첫째, 이윤을 얻는 기업에 공급하는 산업용 전기는 싸고, 국민의 일상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가정용 전기는 비싸며, 둘째, 한전은 적자를 보며 세금으로 충당하는 반면, 사기업이 포함된 자회사들은 흑자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사인 척하면서 공익성을 사익으로 바꾸는 데 앞장서고 있다.(이런 사기극은 적자 KTX와 흑자 SRT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둑들이 노리는 대표적인 먹잇감, 인천공항.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는 이데올로기와 법적 장치들 때문에 한 번 사유화된 공유자산은 돌이키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지키는 게 훨씬 중요하다.] 물, 공기, 바다, 강, 산이라는 자연 외에, 우리가 그리고 후손이 누려야 할 공유자산은 의료 설비와 기술, 철도와 도로 같은 교통 시설, 도시의 공원 같은 주거 시설, 인터넷의 플랫폼 등 지천에 널려 있다. 이것이 효율화, 선진화 등의 미명으로 사유화되지 않도록, 정부가 어떤 야합을 시도하는지 어느 때보다 눈 부릅뜨고 살펴야 할 시점이다. 공유자산의 사유화는 대미 대일 굴욕외교보다 훨씬 되돌리기 어렵고, 그만큼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이런 일이 있는지 살펴보고, 보이거나 알고 있다면 인권연대, 참여연대, 경실련 등에 알린다. 언론다운 언론에 제보해도 좋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들끼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거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5-24 | hrights | 조회: 398 | 추천: 10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윤석열 대통령만큼 ‘자유’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사용한 대통령은 이제껏 없었지, 싶다. 공식적인 연설이나 축사에서 툭하면 ‘자유’라는 말을 꺼내 든다. 이번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는 ‘자유’가 총 46회 등장했단다. 역대 최대 횟수로. <국군의 날> 행사에서 ‘부대 열중쉬어’라는 간단한 말도 못 했다는 양반이 자유라는 말은 조자룡 헌 칼 쓰듯이 쓴다. 사회생활이라곤 검사 생활을 한 게 거의 전부인 그가 자꾸만 ‘자유, 자유’하는 이유가 뭘까?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일에 맘 쓰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썩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알려고 힘쓰고 싶지 않으니, 그 이유를 찾아볼 연구 의욕 따위는 없다. (물론 능력도 없다) 그래도 자문(自問)했으니, 주먹구구식이라도 자답(自答)을 해 보자. 우선 개인적-사적인 차원으로의 접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정의’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 건 독재자 전두환이었다. 전두환과 그의 수하들이 ‘정의’라는 말을 남발한 것은, 그들에게 실제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의한 독재 세력이기에 정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극악무도함과 불의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말로나마 주야장천 ‘정의, 정의’할 밖에. (당명조차 ‘민주정의당’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 사랑 역시도 비슷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대개 자유를 꿈꾼다. 그렇다면 자유의 결여 혹은 부재가 자유를 욕망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헤겔을 불러내지 않더라도, 인간은 충족된 것이 아니라 결핍된 것/부재한 것을 욕망한다. 배고플 때 음식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배불리 맛있게 식사한 직후라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진다. 목마른 데 물이 없으면 물을 찾지만, 갈증이 해소되면 물을 욕망하진 않는다. 단정할 순 없어도,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에 오랫동안 얽매인 사람이나 하늘 같은 스승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사람, 요컨대 자기보다 강한-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사람에게 억눌려 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자유’를 찾을 것이다. 불의하기에 -구두선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정의를 찾듯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자유’라는 말을 줄줄, 아니 술술 입버릇처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정윤성의 기린대로418 / 출처 - 전북일보      2.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이라는 제목의 하버드 대학교 연설(4/29) 막바지에서 화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 규정했다. 그는 자유인인가? 물론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다. 당연한 소리지만 자유인은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렇지 않다. 그런 자유가 없는 게 노예다. (자유를 상실한) 노예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주인이다. 노예는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말이 거짓말이나 허위 주장이 되지 않으려면 사실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대통령이 안 돼도 위안부 문제는 해결하겠다는 대선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책임감은커녕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인정하긴 어렵다. 한편, 그가 애용하는 ‘자유’는 냉전 시절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냉전 시기의 자유주의는 ‘친미 반공주의’를 뜻하는 편협한 정치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선/악, 흑/백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젖어서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을 양분하는 시각 자체가 냉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속성이자 산물이다. 더욱이 세계사의 변화를 자기가 주체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남(미국, 일본)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실리외교를 행하기는커녕, 마치 미국과 일본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시쳇말로, “우리 국민은 그가 사실상 노예근성을 지닌 것으로 느끼지게” 될 것 같다.        3. 자유주의를 ‘친미 반공주의’쯤으로 여기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냉전 논리의 수사일 뿐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자면,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를 포용하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폭이 넓은 이념이다. 자유주의는 폭력을 규제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자 이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국가의 첫 번째 의무를 국민의 생존권(the right of life) 보호에 두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의 보존, 즉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책무를 진다. 이러한 국가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떠받드는 천조국의 「독립선언문」에 있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의 오랜 원천이었다. 그가 자유인이라고 느낀다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면,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불안한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생명 ․ 인권 ․ 평화의 보호에 주력해야 한다. 끝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연설에서 매우 우려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지점이 있다. 독재와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세력, 인권운동가 행세”를 해서 자유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구라를 치는’ 대목이 그것이다. 증거나 사실로 입증되지도 않았건만, 민주 세력과 인권운동가를 위장한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날조 ․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위협하는 거짓 선동이 될 뿐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절제(moderation)를, 자유주의 사회를 위한 최종적 원리로 제시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그 불만]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때때로 성취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절제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은, 자유주의 자체의 재부흥, 나아가 사실상 생존의 열쇠가 될 것이다.” 자유의 향유 여부는 완벽한 성과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자기 절제에 달려있다. 시대착오적 편향을 결단인 양 우기거나 제멋대로 인권운동을 매도하는 짓은 자유가 아니라 맹목일 뿐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5-04 | hrights | 조회: 311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