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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희수(변호사), 설경(변호사),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임아영(경향신문 기자),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코로나 19가 퍼진 이후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다. 어울려 살면서 안전하다고 생각해온 오랜 우리들의 습관들을 버리고 거리를 두고 있어도 쉽게 안심이 되지 않고, 잘 알던 사람도 믿기 어려워지는 등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졌다. 매일 만나는 아이들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는지조차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거리를 두고 접촉을 줄이는 것 만이 유일한 코로나19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었다.  실용음악과(고3)를 다니는 홍이(가명)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다. 대학진학을 위해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검사를 한 결과 무증상 확진자로 확인되었고, 홍이의 확진 소식에 실용음악과 학생 모두와 실용음악과 교사들이 밀접 접촉자로 판별되어서 모두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받고 집에서 2주간의 자가격리를 했다. 또 같은 교무실을 사용한 교사들과 점심을 식당에서 같이 먹는 학생들이 선별검사를 받고서야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격리 기간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격리 기간이 끝난 학생들과 교사들은 또다시 코로나(PCR) 검사로 음성 판정을 받고서야 등교를 할 수 있었지만, 확진 학생은 검사 대신에 “격리해제자는 감염전파 우려가 없으며 PCR 음성확인서는 불필요함, 코로나19 감염 이력을 이유로 차별대우하는 경우 근로기준법상 차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위반 시 엄정대응할 것”이라는 보건소 공문만으로 등교를 했다.  의료계는 코로나가 사람 몸에 들어와 10~14일이면 전파력이 없어져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코로나19는 아직도 치료법이 연구 중인 감염병이므로 전파력이 없어진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탓에 학생들과 같이 코로나(PCR) 검사로 음성 판정을 받고 등교하리라고 생각했던 담임교사는 감염의 공포, 학급 학생의 건강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보이면서 학교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교사들의 이런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홍이에게 건강하게 학교생활을 하도록 공감하고 격려해 주며 다가가고 있었다. 교사들은 코로나19의 불안한 환경에서도 아이들이 공감 능력을 배우며 발달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freepik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고 싸우기도 하지만 이 어려운 코로나 환경을 이겨가면서 남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면서 공감 능력이 더욱 발달하고 있었다.  『공감은 상대의 마음을 느끼고 그려보는 것입니다. 상대의 정서적 반응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이랬어야 해”“라고 하는 충고나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현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학원에서 배울 수 없고 데이터를 넣는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다음에는 따라잡기도 어렵습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얻게 되는 마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경험하는 기회를 더욱 가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포스트코로나, 아이들 마음부터 챙깁니다- 하지현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06-02 | hrights | 조회: 546 | 추천: 3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검찰개혁은 물 건너갔고 공수처는 거꾸로 칼을 들었다. 소득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은 사상 최대로 벌어진 자산불평등의 격차로 돌아왔다. 전 국민의 마음이 욕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누더기인 채로, 오늘도 일하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민생과 개혁, 모두에서 실패했다. 몇 가지 공이 없지 않으나 과가 그것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성과를 굳이 언급하지 않는 이유다) 민주당과 진보는 샤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처지가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고 있다. 민주당의 실패 공식  리버럴 정권의 개혁 실패 방정식에는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공식이 있다. (쁘띠부르주아 정당이라는) 계급적 한계가 철학의 빈곤과 디테일의 결핍, 그리고 자신감 부족을 낳고, 작은 비판에도 주춤거리는 원인이 된다. 부동산, 최저임금,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이 같은 경로를 밟았다. 수사-기소 분리라는 지름길을 두고 공수처 설립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검찰개혁도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는 임기 후반기가 되면 청와대와 내각을 관료로 채운다. 세 번이나 집권한 지배블록의 일부로서 기득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소심함이 과감한 개혁을 어렵게 한다. 조선일보와 국민의힘으로 대변되는 보수세력의 맹렬한 저항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테지만, 이는 상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히 2016 촛불 이후 이들이 역사상 가장 취약한 상태였던 점을 고려하면 주된 원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리버럴 집권 세 번째의 실패이고, 한국의 리버럴이 관료들을 장악하고 부릴 수 있을 만한 의지와 실력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반민주당전선의 좌우연합적 성격  끼인 존재로서 리버럴은 좌우 모두로부터 욕을 먹게 돼 있다. 비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다수가 원하는 정책을 다수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람들이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초기에 잠깐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고, 지금은 반민주당전선이 상당히 두텁게 형성돼 있다.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마치 노무현 정부 말기 증상을 보는 듯하다.  민주당이 여당이 되면 반민주당전선은 광범위한 좌우연합전선이 된다. 정당으로 보면 국민의힘과 정의당, 원외까지 확장하면, 정통 좌파라고 할 수 있는 노동당까지 포괄한다. 보수가 집권하면 보수 내에서 비판이 나오지 않지만, 리버럴 비판 대열에는 보수와 진보가 늘 함께한다. 이것이 민주당 지지자들이 느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비밀이자,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현상의 뿌리다. 특히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보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진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언론에 대한 공격은 주로 이들에 의해 이뤄진다. ‘켄타우로스’ 민주당  민주당은 지배블록의 일부이지만, 지배블록의 일부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지난하게 이어져 온 진보진영의 숙명 같은 난제다.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민주당은 켄타우로스(반인반마)적이다. 지배블록의 일부이면서도 서민정당을 표방하며 실제로 그런 경향을 일부 갖고 있다. 조중동과 국민의힘은 진보정당을 일부러 무시하며 민주당이 진보의 전부인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민주당을 비난하여 진보를 악마화한다. 샤이 민주당과 샤이 진보가 혼용되는 현실은 이 프레임이 대중적으로 안착했다는 걸 말해준다. 민주당이 욕을 먹으면 진보가 욕을 먹는 구조다. 진보가 민주당을 비판하면 진보가 커지는 게 아니라 보수가 커진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그 결과인 양당 정치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그래서 여전히 제도개선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건 비판의 내용과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 프레임은 악당에 유리한 게임  그런 의미에서 류호정 정의당 의원과 문정복 민주당 의원의 ‘당신 논란’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먼저 반말을 했는지, 말의 맥락을 못 알아들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도자기를 들여오면서 외교행낭을 이용했다는 잘못된 팩트를 거론했다거나 개인적으로 자리에 찾아가 항의한 것도 부적절한 행위였지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정의당이 거대 양당의 도덕성 경쟁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성 경쟁은 야당일 때 민주당이 쓰던 방식이다. 상대적으로 덜 기득권이어서 더 깨끗하다고 마케팅하는 방식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내로남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노무현과 노회찬도 이 프레임의 희생양이었다. 정의당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류호정 의원도 수행비서 해고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지 않았나.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문정복 의원(왼쪽)이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의 의사진행발언에 대해 항의하자 정의당 류호정 의원(오른쪽)이 문 의원에게 맞대응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내로남불 프레임은 도덕 기준이 높은 진보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내로남불 프레임이 특히 문제인 것은 뻔뻔한 악당들이 면죄부를 받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악당들은 나쁜 짓을 해도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악당을 비난하며 자신은 악당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조그만 잘못에도 대역죄인처럼 비난받는다. 이 과정에서 민생은 사라지고 무의미한 정쟁만 무한 생산된다. 도덕성 경쟁이 정책 경쟁의 지우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도덕성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게 도덕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도덕성을 정치적 상품으로 팔지 말라는 것이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이후 정치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도덕성 경쟁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진보가 내놓아야 할 상품은 따로 있다. 기득권에 기반한 정당들이 낼 수 없는 진보적 정책이다. 우리가 덜 타락했다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가 더 유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탈이념 시대의 진보  4·7 재보선에서 적지 않은 2030이 국민의힘을 선택했다고 해서 이들이 보수가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존의 이념지형에서 벗어나 있다. 보수든 진보든 그건 기성세대의 잣대일 뿐이다. 젊은 세대가 진보를 기피한다면 젊은 세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진보가 잘못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 진보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연연하는 진보는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차별받지 않고 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경쟁하며 쾌적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인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젊은 세대만의 요구는 아니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돈을 추구하는 경향은 어쩌면 당연한 생존본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는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역사 경험치가 낮다고 탓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고 스스로 미라가 되는 길이다. 지난 재보선에서 청년들에게 돈 몇 푼 더 주겠다는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의 공약은 청년들을 동냥이나 바라는 거지 취급하는 최악의 접근법이었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진보  정의당은 어떤가. 민주노동당 시절 각종 진보적 의제로 정치판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책만으로 보면 정의당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더 진보적으로 보인다. 민주당 의원들의 말에 토를 달듯 ‘빨간펜’ 선생 노릇을 한다거나 앞의 사례처럼 언쟁을 하는 경우만 눈에 띈다. 장애인, 소수자 인권 등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 투쟁은 중요한 진보적 과제이지만, 대중정당의 대표상품이 되어선 곤란하다. 피시의 전면화는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피시는 교육현장과 언론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가야 할 문제지 대중정당이 일상적으로 수행할 정치적 과제는 아니다. 정의당이든 노동당이든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민주당과 차별화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유능할 것 같다는 인정을 받아야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 2014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옳은 말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5-26 | hrights | 조회: 870 | 추천: 2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가유공자  「국가보훈기본법」에서는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수행”(제3조)에 공헌하고 그 과정에 희생한 이를 ‘국가유공자’로 규정해 기리고 있다. 알려진 국가유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이다.  그런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못지않은 - 보기에 따라 그 이상 가는 - 역할을 하고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김원봉은 왜 여전히 유공자가 아닐까. 김원봉이라는 사람  김원봉은 이회영 형제와 이동녕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11월에 윤세주 등과 함께 급진 민족주의적 무장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에서는 일제라는 거대한 폭력 조직에 맞서 무장 항일운동을 벌였고, 1928년 10월 이후로는 일본의 축출(驅逐倭奴), 조국의 광복(光復祖國), 계급의 타파(打破階級), 토지의 균등(平均地權)를 핵심으로 하는, 급진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그 과정에 중국의 공산당은 물론 국민당 정부와도 협력했다. 의열단 지도부의 상당수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품인 황포군관학교(1924.1~1931.10) 출신이었던 바람에, 그가 국민당 정부와도 함께 했던 것은 자연스러웠다. 1932년 10월 김원봉은 의열단의 항일정신과 연계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중국인 민족해방 혁명가 및 조선독립을 위한 운동가를 양성했다. 이 학교가 국민당 장제스의 최종 결재를 거쳐 설립되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김원봉의 눈에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비해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태도에 실망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더 급진적 민족해방운동을 했다.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연결시키면서, 조선공산당 운동을 지원했다. 공산당 운동이 항일 투쟁에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항일’과 ‘독립’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상대적으로 우파민족주의자였던 김구와도 가까웠다. 1939년 5월에는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확대하기 위해 김구와의 연명으로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원봉의 공산주의적 태도는 항일운동과 조선 광복의 수단에 가까웠고, 항일과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적절히 타협할 수 있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1)  무엇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광복군의 부사령(1942.12.5~),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군무부장(1944.4.22~)을 지냈다. 임시정부 군사방면의 최고 책임자였다. 항일운동에 그만큼 한결같이 열렬한 태도를 견지했던 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일관되게 무장 투쟁을 해온 그의 눈에 임시정부는 다소 뜨뜻미지근해 보이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항일을 위한 구체적 실천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우파에 가까웠던 김구와 항일운동 방법론상의 차이로 갈등하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 및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더 친밀했던 우파민족주의 세력(가령 한국독립당 계열)들과 마찰을 빚었다. 조국의 광복,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이 너무 명확하고 실천이 늘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kbs 인물현대사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이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미 군정의 요구 때문에, 김구가 그랬듯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여운형, 박현영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 자격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이후 임정을 매개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연대도 깨져 갔다.  친미적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해방 정국에서 그는 갖가지 수난을 당했다. 1947년 미 군정 당시 수도경찰청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기도 하고 장택상 청장에게 끌려가 수모를 겪었다. 중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조국에서 겪으면서 김원봉은 서러움에 3일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미 군정이 민전 시민대회를 금지시키고 민전을 포함한 좌파 단체를 폐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낀 김원봉은 민전 산하단체 대표 80여 명과 함께 1948년 4월 초순 월북했다. 1948년 4월 14일 개최되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조선의용대 동지였던 연안파 인물들이 건재하고 있는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김원봉은 초기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결국 북에서도 밀려났다. 남쪽 출신이라는 것이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통일을 명분으로 제국주의 수정주의자들과 손잡고 한국의 중립화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국제간첩으로 몰려 1958년 무렵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했다. 평생 죽음을 무릅쓰고 민족의 이름으로 조국의 광복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그렇게 제발로 찾아온 남과 북 모두에서 배반자 낙인이 찍혔고, 잊혀졌다. 서로 다른 공산주의  국가유공자의 근간인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자주독립”에 김원봉 이상으로 공헌한 이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초기 북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때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은 김원봉이 활동하던 당시의 공산주의는 6.25 전쟁과 전후 냉전기 등을 거치며 이념 갈등이 체화된 이후의 공산주의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김원봉의 공산주의적 사고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수단에 가까웠지, 그 자체가 지상 목적은 아니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의 양대 지도자인 김구와 공생했던 것이나, 중국 공산당에 대립했던 국민당과도 함께 했던 것도 그 증거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 책임자를 지낸 것도 그 결정적 증거이다.  김구가 우파민족주의자라면, 김원봉은 좌파민족주의자였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때의 좌·우에는 독립을 위한 방법론적 차이는 있지만, 독립을 위한 헌신의 정도에서 차이나 차별을 두기 곤란하다. 김구가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이듯이, 김원봉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는 공산주의와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의 눈으로 보는 공산주의는 다르다. 20세기 전반은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합작하며 항일운동을 같이하던 시절 아니었던가. 심지어 중국인 쑨원(손문)과 장제스(장개석)조차 대한민국 1급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던가. ‘자유중국’을 버리고 ‘중공’과 수교한 나라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 군조직의 수장이었던 김원봉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남측 출신이라는 이유로 북에서도 버림받았던 김원봉을 품지 못하면서 어찌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와 지금의 공산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설령 지금의 공산주의라고 해도,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어디 있기나 하던가. 더욱이 한국 정부가 ‘자유민주국’ 대만과 단교하고 ‘공산국’ 중국과 수교한 뒤 비할 데 없을 경제 교류를 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의 책상 위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그의 뜨겁고 지도적인 독립투쟁사를, 그의 공과를 포함하여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1)  이정식·한홍구 엮음, 『항전별곡: 조선독립동맹자료1』(거름, 1986), 135쪽; 한상도,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역사공간, 2006), 70-84쪽 참조.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1-05-21 | hrights | 조회: 711 | 추천: 9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랫동안-거의 35년 가까이- 잊고 지냈던 ⌈나와 너⌋를 떠올리게 된 것은 15개월 이상 지속된 ‘코로나19’ 사태 때문이었다. 철부지였던 시절 연애편지 쓰려면 이만한 책이 없다는 선배의 꼬임으로 산 그 책은 물리적 수명을 다하고 버려졌지만, 책이 전해준 실존적 메시지는 아직도 기억의 인화지에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나’ 그 자체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나와 너(Ich und Du)’ 사이의 나> 아니면 <‘나와 그것(Ich und Es)’ 사이의 ‘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려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언제든지 대상이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도구적인 관계인 반면에,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낯으로 사람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의 나는, 1)인간은 나 홀로 존재하거나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이며, 2)그 관계가 <나와 ‘그것=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대=사람’의 관계>가 될 때,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 된다는 부버의 두 전언 가운데 후자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사랑할 때, 나는 너로 인해서 나가 되고, 너 안에서만 나가 된다. 삶이란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그 만남이 사랑의 만남일 때 자신이 사람답다고 실감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마스크 없이 사람을 만나던 시절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지금의 나는 관계 속에서만 참된 자아와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앞의 전언에 더 끌린다.  만남 자체가 제한되면서 관계 지향적인 인간의 존재 조건이 위축되면, 인간은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기 쉽다. 신독(愼獨)이란 나에게는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래서 객관적 현실에서 관계 맺음이 어렵다면 관념적 현실에서라도 ‘사람 관계’를 떠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는 그 욕망에 졌고, 아래의 사념은 그 패배의 흔적이다. 부모와의 만남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이치(理致)라는 게 있는 것만 같다. 향유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 절감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부모 중 한 분이 최근에 식사량이 줄면서 몸무게가 부쩍 줄었다.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면서 디스크와 관절염이 심해져 걸음걸이조차 힘들어졌다. 매주 찾아뵐 때마다 기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만큼 그분의 은혜가, 아니 존재 자체가 얼마나 중(重)한지를 절감한다. 나는 인간이 벌이는 모든 일은 헛되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라는 냉소적 주장을 믿지 않는다. 순진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근거는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타이르고, 자신의 고통보다 자식의 편안을 늘 앞세우는 부모의 존재다. 그분들은 사람이 학교에서 자연의 물리나 역사의 이치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해서 인생에서 세월의 속절이나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인들이다. 부모라는 존재, 그들과의 만남은 낙관적 역사의식의 근원이지 싶다. 스승과의 만남  6개월 만에 죽마고우 둘과 스승을 모시고 막국수와 감자부침으로 점심을 했다. 중학생 때부터 뵌, 은사(恩師)라는 말에 실감을 불어 넣어준 스승과의 그 자리에서 나는 마음 놓고 편안할 수 있었다.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떼어내고, 개인적으로 방심(放心)해도 무방한 사람들과 함께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힘이다. 경제적 타산성이나 공리주의적 유용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의미의 무용한 관계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청춘과의 만남  ‘코로나19’ 사태에도 어쨌든 학교 강의는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으로든 오프라인으로든 청춘들을 만나는 일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친구는 이런 감각이야말로 늙었다는 증거라며 나를 타박했지만, 선생-학생이라는 일종의 위계관계를 전제로 한 만남일지라도 나에게 청춘을 만나는 일은 늘 흥미진진한 일대 사건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민태원, 「청춘예찬」)이기에 청춘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밝고 환한 빛이 난다. 그들을 보기만 해도, 시절은 엄혹했고 마음은 싸움에서 빗겨 있다는 부채 의식에 사로잡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던 나의 이십 대가 뒤늦게나마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든다. 사진 출처 - freepik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이상과 희망을 추구하는 ‘속성’이라는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전언에 마음이 혹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의 나이 때에는 몰랐고, 그들의 처지였을 때는 깨우치지 못했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려는 이상과 희망>을 견지하는 늠름한 후속세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설렘을 자아낸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절에도 마음이 따뜻하면 몸은 견딜 수 있다는 세속적 트임 혹은 자기-주술적 주문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서둘러 약삭빠르게 사는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 깨우침이라는 게 생기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는 걸 이제야 절감한다. ‘바이러스와의 관계’ 말고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인 때가 지금 더욱 그리운 이유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1-05-12 | hrights | 조회: 813 | 추천: 6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리나라 5000만 인구 가운데 2600만이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기도에 산다. 우리나라 전체 면적 중 고작 11.8%에 인구 절반이 모여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전, 대구, 울산, 부산, 광주 등 수도권 외 지역의 대도시(광역시) 인구까지 고려하면 흔히 도시 사람들이 ‘시골’이라고 부르는 지역 소도시의 인구는 매우 적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세종시와 제주도의 인구를 합쳐도 16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토의 대부분인 85% 면적에, 수도권과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30%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인구 10만 명이 넘지 않는 지자체가 87곳에 달했다.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105곳이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228개 지자체 중 절반 수준이 앞으로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수도권 인구 밀집과 지역의 인구감소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진부한 이야기가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부청사 및 공공기관·공기업 등이 지방 이전을 추진했지만 그 효과는 거의 미미하다. 2019년과 2020년 사이 단 한 해 동안 소멸위험 지역은 8곳이나 늘었다. 2019년 전국 읍면동 소멸위험지수 지도 사진 출처- 통계청  인구가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발생하는 여러 사회문제만큼이나 인구가 크게 줄면서 나타나는 지역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지역의 인구가 줄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재정자립도가 낮아지는 등 경제적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우려하지만, 그것만이 문제라면 인근 지역과 통폐합을 통해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역의 인구가 줄고 소멸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지역이 소멸된다는 것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역사와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고유한 문화 공동체가 없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70년대부터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고 사회의 문제로 깊어지기까지 국가는 정책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문제를 방임해왔다. 몇몇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며 아파트를 건립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유치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각종 기관과 시설이 도시에 모였다.  반면 지역은 빈집이 늘고, 아이들은 줄면서 학교가 폐교됐다. 병원조차 수익성이 없다며 입주를 거부했다. 소방인력과 경찰인력도 줄어 여러 개의 읍·면을 하나의 119안전센터나 파출소가 감당하게 됐다. 지역주민들은 서울과 대도시에 살지 않고 지역에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의료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도시민들에 비해 신속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대도시로부터 밀려난 열패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소외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결코 지을 수 없는 대형 석탄화력발전소나 산업폐기물처리장 등 환경저해 시설이 밀려 들어와 환경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한다.  심지어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송전하는 과정에서 당진지역 노선은 대부분 고압송전탑을 건설해 가공선로로 지나지만, 바다를 건너 경기도 평택부터는 땅속으로 연결하는 지중화를 한다고 하니 지역적 차별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울로 대학을 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지역은 떠나야 할 곳으로 인식시키면서 어떻게 지역의 인구감소를 막고 지방소멸을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정치권과 언론, 학계 등에서 지역의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대해 수도 없이 거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다. 지역을 소외시키고 지역주민들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28 | hrights | 조회: 995 | 추천: 7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버지는 황해도 사람, 어머니는 경기도 사람이지만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비록 변두리를 전전하면서 생활해왔다고 해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행정구역상 서울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문득 ‘서울 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라고 한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1. 등신 같은 서울 놈  거의 30년 전, 제가 따르던 선생님이 늦은 나이에 수중 잠수의 매력에 빠져 저를 바다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해 여름, 경북의 수중 잠수 포인트인 ㅇㅇ군 바닷가에서 일주일 가까이 지낼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따라는 갔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저는 항상 물 밖에만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일행들이 바다 속에서 잠수를 하는 동안 저는 박찬호 선수의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그 지역 수중 잠수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수와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역시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석별의 술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20명 가까운 사내들의 술잔을 부딪는 소리가 잦아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서로의 무용담을 과시하느라 왁자지껄했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는지, 서울과 비교해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하는 자랑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다소 위험할 정도의 격한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다음에 서울에서 한번 뭉쳐 보자”는 말로 자리가 정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술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의 막내쯤 되는 20대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느닷없이 제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각하가 합천에 내려와 구속될 때까지 뭐 했십니까?”  당시 구속된 각하는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정색하며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서울 놈들은 다 등신들 아입니까?” 사진 출처 - freepik #2. 답답한 서울 놈  얼마 전에 친구 H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와 H는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저는 서울 시민이고, 그는 oo도민입니다. 그와 3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왔습니다. 각자 결혼을 하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면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짬짬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주변에 경조사가 있으면 만나곤 했습니다.  겉으로만 요란하고 속은 물렁물렁한 저와는 반대로, H는 원만한 성격에 말수는 적지만 속은 아주 단단한 사람입니다. 두어 달 만에, 서울시장 보궐선거 바로 전날 전화를 걸어온 그의 첫마디는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어때?”  “그렇지, 뭐...”  이후에 그는 주변 친구들의 안부나 돌아가신 은사님들과의 추억담 같은 이야기들을 한참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잘랐습니다.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내한테 이끌려 사전투표했어.”  열렬한 문재인 정부 지지자인 그는 그제서야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서울은 어떨 것 같아?”  “나야 잘 모르지...”  무덤덤한 제 대답에, 그는 답답하고 초조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 이 친구, 서울 사람이...”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21 | hrights | 조회: 424 | 추천: 4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뒤 언론계의 관심사 중 하나는 오세훈 시장이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오세훈 시장은 후보 시절부터 교통방송은 시사가 아닌 교통정보와 기상에 집중하라며 대립각을 세웠다. 선거 전날 뉴스공장은 오세훈 후보와 박형준 후보 관련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90분 내내 진행하면서 편파성 논란에 정점을 찍었다. 국민의 힘은 악의적이고 선동적인 방송이라며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였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교통방송에서 김어준씨를 퇴출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이십만 명이 넘게 참여했고 앞으로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총공세에도 김어준은 여전히 “쫄지마!”를 외친다. 졸긴커녕 선거 다음 날 방송에서 "('뉴스공장'이) 마지막 방송이길 바라는 분들이 많을 텐데 그게 어렵다"며 여유를 보였다.  라디오에서 아침 출근시간대 시사프로그램은 핵심 시간이다. 가장 핫한 이슈와 인터뷰이를 놓고 날마다 치열한 섭외경쟁을 펼친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김현정의 뉴스쇼는 10여 년 전부터 당사자 인터뷰로 본격적인 라디오 시사의 장을 열었고 여러 채널에서 아침시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정권의 노골적인 압력으로 손석희씨가 하차하는 등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은 한때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가 시사프로그램의 대안으로 떠올랐고 여기서 활약한 주인공들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필두로 지상파에 대거 진출, 라디오 시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2016년 9월에 시작한 뉴스공장은 1년 만에 청취율 10%대로 올라섰고 2018년부터는 컬투쇼를 제치고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예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딴지일보와 나꼼수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어준은 형식과 가식을 던져버린 적나라함과 유쾌함으로 이를 이뤄냈다. 정색하는 시사가 아니라 풍자와 해학, 위트까지 곁들이면서 시사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청취율 1등인 동시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제재도 가장 많이 받았다.  라디오의 입장에서 보면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성공은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터넷과 영상매체의 우세 속에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라디오의 가능성과 시사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켜 줬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방송의 객관성과 중립성이 흔들린 점은 분명 위기다. 청취율을 위해서는 정치적 팬덤에 올라타는 것이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사실 청취율에 목매는 방송사로선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공정성과 객관성 이런 개념은 어떻게 보면 방송사에겐 족쇄일수도 있지만 방송이 엇나가지 않게 하는 준거이기도 했다. 이 틀을 벗어던지는 순간 자유를 얻을지언정 신뢰는 흔들릴 수도 있다. 제도권 방송, 그중에도 레거시 미디어에 너무 오래 몸답고 있어 내 생각이 고리타분하다고 하겠지만 신뢰가 무너진 방송이나 언론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잘 나가는 게 배 아프기도 하지만 고마운 마음도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침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시장 전체가 활성화되고 전체 파이가 커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늘 떠나지 않는 걱정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서울시장이 바뀐 후에도, 뉴스공장이 지금처럼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뉴스공장만의 문제도 아니고 이른바 공영방송에서는 일상화된 문제이기도 하다. 정권의 변화에 따라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은 논조와 색깔이 확확 바뀐다. 어떨 땐 너무한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이 정상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정상인지, 과연 이런 논조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늘 궁금하다. 해묵은 숙제 같은 수신료 논란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정권마다 방송의 색깔이 바뀐다면 공영방송이라 이름 붙이긴 어렵지 않을까. 그만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방송의 공영성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편파’라는 이유로 방송을 퇴출시킬 순 없다. 이런 기준을 들이댄다면 종편도 벌써 서너 개는 퇴출됐어야 마땅할 것이다. 방송사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편성권은 독립되어 있어 함부로 입김을 불어 넣을 순 없다. tbs는 지난해 2월 서울시 미디어재단으로 독립했기 때문에 인사나 재정을 통해 시장이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어렵다. 법으로 보장된 방송의 독립성이 뉴스공장에 든든한 방패막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뉴스공장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자동적으로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김어준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음모론이나 정치적 편향성을 정당화해주지도 않는다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오세훈 시장도 국민의 힘도 뉴스공장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뉴스공장을 손보지 말고 그냥 두자는 일부 보수의 비아냥거림이다. 그냥 내버려 둬서 내년 대선에서도 민주당의 엑스맨 역할을 하도록 지켜보자는 것이다. 상소문 형식의 국민청원 글로 유명해진 ‘진인’ 조은산은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로 갈등과 분열의 정치, 극성 친문 세력 놀이터에 불과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과대평가, 국민 과소평가를 들었다. 한 논객은 뉴스공장을 나치의 선전방송에 빗대기도 했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라디오의 대표 프로그램이 정권의 엑스맨 취급을 받고 정치세력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지탄을 듣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세금을 왜 교통방송에 지원해야 하냐는 질문은 나올 수밖에 없다. 청와대 게시판의 청원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팟캐스트가 아니라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 방송이기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파성이 아닐 것 같다. 막연하고도 케케묵은 골동품 같지만, 공정성과 객관성이란 단어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무엇이 객관이고 무엇이 공정인지에 대한 기준이나 주장은 다를 수 있다. 정해진 답도 없고 각자의 기준도 다르기에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공중에 떠도는 전파처럼 뜬구름 잡는 얘기 같지만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만이 맴돈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14 | hrights | 조회: 936 | 추천: 5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를 두고 벌어진 역사왜곡 논란은 결국 드라마를 조기종영하는 걸로 끝이 났다. 사실 애초에 이러저러한 논란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차분히 생각할 틈도 없이 진행된 드라마 자체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결말이 내게는 꽤나 놀라웠다.  논란을 촉발한 계기는 평안도 의주로 입국한 선교사들에게 월병 등 갖가지 중국 요리를 대접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제작한 처지에선 ‘사극도 아니고 좀비가 나오는 판타지물인데 역사왜곡 논란이 웬말이냐’고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애초에 태종과 세종 등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게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도 든다(드라마 ‘킹덤’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건 논외로 치겠다). 그냥 ‘해를 품은 달’처럼 적당히 조선시대스러운 방식으로만 처리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지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모호한 가상의 시대를 설정했더라도 요즘처럼 김치나 한복 원조논쟁이 있는 시국에서 논란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과연 ‘조선구마사’는 역사를 왜곡했을까. 사실 그 문제를 토론하는 건 내 몫은 아니다. 그 드라마를 본 적도 없고, 1차 사료에 해당하는 드라마 원본을 확인하기도 현실적으로 힘들게 됐기 때문이다. 다만 토론해보고 싶은 주제는 이런 것들이다. 만약, 그 드라마에서 선교사들이 대접받았다는 음식이 전주비빔밥이었다면 어땠을까. 선교사들과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치맥 비슷하게 생긴 음식으로 러브샷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고 한다면 지금처럼 시끄러웠을까.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베이징에서 조선 사신들과 만난 선교사들이 “교황청 문서고에서 옛 문서를 보니 이곳은 예전에 ‘코리’라는 강대한 나라가 다스렸던 땅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더라면 역사왜곡 논란이 벌어졌을까 안 벌어졌을까.  사실 한국에서 만든 사극이라면 드라마나 영화 가리지 않고 일부러 안 본 지 꽤 오래됐다. 어쩔 수 없이 본 적도 물론 있지만, 한결같이 후회만 했다. 기본적인 역사고증에 너무 무신경한 게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명량’은 ‘올바른 역사 교과서’ 시책에 부합하는 우주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30분 정도 뒤부턴 아예 중간중간 졸았다(물론 막판에 조선 수군이 엄청난 속도로 박치기 퍼레이드하는 장면은 잠이 확 깰 정도로 참신하긴 했다). ‘안시성’에선 느닷없이 ‘킹덤 오브 헤븐’의 오마주(그래 오마주라고 믿어보자)가 등장하는데 물론 이 장면도 충분히 웃겼다. 정작 역사학자들한테서 받은 조선시대 전술과 무기체계 자문을 성실하게 반영하려고 노력했던 건 역사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킹덤’이었다는건 꽤나 아이러니다.  단순히 고증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다. 어떤 드라마는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연개소문’에선 고구려가 얼마나 위대한지 설명하면서 환단고기를 근거로 드는 내레이션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에선 산동반도부터 절강성 유역까지 고구려와 백제 영역으로 표시한 지도가 버젓이 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두고 역사왜곡 논란이 뜨거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헝가리 마자르족이 부여족의 후예’라거나 ‘낙랑군이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글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데도 역사왜곡 논란은 변변치 않았다.  요즘 중국이나 일본과 관련한 역사왜곡 논란은 꽤나 예민한 주제다. 동북공정이니 일제시대 같은 주제와 연결되면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역사공부가 즐거운 것은 ‘우리 조상은 위대했다’거나 ‘우리 조상들은 넓은 부동산 가진 땅부자였다’는 걸 발견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알고보니 그거 우리가 원조’라는 걸 깨닫기 위해서도 아니다. 역사는 족보도 아니고 등기부등본도 아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 모든 역사는 ‘외국사’가 아닐까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나라나 에도막부 시절 일본은 국가목표와 운영원리, 작동방식 모두 현대 대한민국이나 일본과 너무나 다르다. 청나라와 현대 중국은 또 어떤가. 한족들에겐 황제라는 걸 강조하는 한편으론 여름마다 열하산장에 행차해서 만주와 몽골 귀족들에게 칸으로서 위엄을 세우던 청나라 지배층 모습은 현대 중국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이질적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에게 조선은 외국이다. 중국인에게 청나라는 외국이다. 일본인에겐 대일본제국이 외국이다. ‘國史’라는 일반쓰레기는 잠시 옆으로 치워놓고, 선조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설명과 예측보다는 이해와 해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재밌어지는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김치나 한복을 두고 이러저러한 헛소리가 나오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다. 맞다. 불쾌하다. 하지만 이웃이 술주정 부린다고 우리까지 똑같이 술주정 부린다면 제3자가 보기에 똑같은 술주정뱅이 두 명으로 비칠 뿐이다. ‘우리 조상은 위대했다’거나 ‘그거 다 우리거라는거 아시죠’라고 외쳐대는 게 열등감의 표현임을 떠올린다면 좀 더 대범하게 대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부러워해야 할 당사자는 총 한 자루 없이도 우주의 기운이 충만했던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냈던 촛불시민이 아니라 인구 10억 넘는데도 국가지도자 하나 제 손으로 못 뽑는 안쓰러운 이웃나라 신민들일테니까.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4-07 | hrights | 조회: 667 | 추천: 1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가보안법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트루먼 쇼의 주인공과 닮았다. 언젠가는 그 허구를 깨달을 수 있겠지만 속고 사는 세상을 모른다. 그러니 비정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정상으로 간주하며 불편함이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들 있다. 국가보안법의 억압에 갇혀 금기를 잔뜩 마음 켠켠히 쌓고 사는 사람들이 금기를 가슴 속 깊이 묻고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잊고 산다.  국가보안법의 강요된 금기가 허구를 낳았다. 허구가 금과옥조의 진실이 되었다. 그 허구가 상식이 되고 주류가 되었다. 금기가 빚은 허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억압의 대상인 금기를 자각하고 이에 저항하여 금기를 대신한 허구를 깨뜨리는 순간 국가보안법이 만든 세상은 무너진다. 국가보안법이 만든 금기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순간 죽음과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공포를 부르는 금기에 대한 문제 제기나 검증은 금물이 되었다. 금기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무관심으로 외면하고 회피하며 모른 척해야 편하다. 금기를 대신한 허구를 받아들여야 아무런 위협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금기와는 되도록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 그렇게 국가보안법이 만든 허구의 세상 안에서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지내고 사는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억압과 공포에 길들여져 저항력을 거세당한 채 분단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영화 '트루먼 쇼'  국가보안법은 반미와 친북, 연북을 금기시한다. 반미와 친북, 연북을 억압하기에 그 대신에 친미와 동족대결이 진리로 둔갑하였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할 수도, 동족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지지할 수도 없다. 국가보안법이 억압하는 금기를 일일이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금기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세뇌되었기에 금기가 무엇인지 나열하기조차 힘들다. 금기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무섭다.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연방제 통일, 주체사상, 선군정치, 강성대국 등등.  국가보안법이 주는 억압과 공포로 인하여 금기를 당연시하는 세상이다. 국가보안법의 억압과 공포에 맞서 용기를 내어 금기에 저항하는 것이 어렵고 무서운 세상이다. 금기에 도전하기가 두려워 허구가 진리로 둔갑한 세상이다. 우리 앞에 놓인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에 복종하는 굴종과 복종의 삶을 옹호하기 위해 온갖 궤변과 자기합리화가 난무하는 한국사회다. 악마와 같은 반북 메카시즘에 저항하기는커녕 동족을 악마화하고 폄훼하기에 바쁜 어중이 떠중이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상전의 주한미군 철수 협박에 놀아나 방위비 분담금 명목의 조공을 바치고도 한미동맹 강화를 예찬하는 머저리들이 부지기수다. 동족을 악마화하고 폄훼하며 비방하지 않고서는, 동족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존립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이 만든 허구의 세상이 한국의 사회의 현실이다.  상전에 매달려 동족을 증오하며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국가보안법에 순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러하기에 국가보안법의 우리에 갇힌 우리의 일상은 비정상적, 비상식적, 비양심적, 비이성적이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사회의 사상,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민생, 문화 등 전반에 지배적 영향력을 깊숙이 드리우고 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금기에 도전하는 저항력을 키워나갈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한국사회의 근본과제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이 금기시하고 억압하는 금기들을 깨뜨려 나가며 국가보안법이 만든 허구의 세상에서 탈출할 때 맞이할 수 있는 제2의 해방과도 같은 일이다. 한국 민중이 도전해야 할 국가보안법이 강요하는 금기는 부지기수이기에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의 억압에 맞서 해야 할 일도 도처에 무궁무진하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03-24 | hrights | 조회: 1132 | 추천: 4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2017년 작. 대략 내용 –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뉴욕타임즈의 ‘펜타곤 페이퍼’(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발주한 4천 장에 이르는 베트남전쟁 연구보고서) 특종 보도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힌다.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에 이르는 네 명의 대통령이 30년간 감춰온 베트남 전쟁의 비밀이 알려진다. 전쟁 상황은 불리한데도 미국 정부는 계속 승전(勝戰)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날리며 파병을 계속했다. 정부는 관련 보도를 금지시키고, 뉴욕타임즈를 국가기밀 유포로 인한 안보 위협을 이유로 법원에 기소하였다.  지금과 달리 뉴욕타임즈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워싱턴포스트. 편집장인 벤(톰 행크스)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담긴 정부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뉴욕타임즈에게 제보했던 동일 인물에게 입수한다. 벤은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조작한 사실을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최초의 여성 발행인 캐서린(메릴 스트립)은 회사와 자신,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바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지역 신문이었다. 유능한 기자를 충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주식 상장을 고려하던 중이었다. 은행과 주주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캐서린을 설득한다. 보도하면 안 된다고. 스필버그의 연출력과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볼만하다. 무엇보다 식자공(植字工)이 활자를 찾아 넣는 과정과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는 언론의 자격을 묻는 장치로 등장한다. 영화 ‘1987’의 동일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전문적인 영화평은 넘어가자.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사진 출처 - 네이버  하나는 확인하자. 무엇보다 내가 알고 있던 미국 언론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보도 태도 등과 꽤나 거리가 있는 영화의 설정이 그것이다.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 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 그리고 패배했다.”(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2, 이후, 2006)  1946년부터 8년간 미국은 베트남의 대프랑스 독립전쟁에서 프랑스의 전쟁 비용 80%를 댔다. 프랑스가 1954년 패퇴하자 1954년 응오딘디엠이라는 꼭두각시 대통령을 앉혔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쟁 동안 모두 700만 톤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다. 베트남 국민 한 사람 당 거의 200킬로그램 폭탄 하나씩.  그 와중에 1968년 미군 중대 하나가 꽝응아이 성 미라이 마을에서 450~5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한 병사의 인터뷰가 뉴욕타임즈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에서 간행된 미라이 학살 기사는 미국 언론에서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이미 미국은 베트남에 5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주둔시키고도, 20만 명을 추가로 파병하려고 했다.(영화에선 10만 명 더 파병했다고 한다.) 1971년 미국은 라오스, 캄보디아에도 대대적인 폭격을 저질렀다.  공산주의 저지를 빌미로 한 미국의 침략전쟁은 처음부터 비판을 받았다. 민권단체는 물론, 징병 대상인 젊은이들은 이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온 벨트를 박탈당했다. 대학의 반전 운동도 계속되었다. 학군단(ROTC)도 거부했다. 가톨릭 수녀와 신부도 행동에 나섰다. 참전 군인들도 반전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도 1969년 대통령 닉슨은 “나는 어떤 반전 운동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드러났고, 2년 뒤 닉슨은 쫓겨났다. 닉슨은 물론 케네디, 존슨도 의회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지속했다.(영화에선 마치 대통령 독단인 것처럼 끌고 갔다. 아니다. 미국 의회는 역시 대외 침략, 간섭에서 언제나 정부 편이었다. 멕시코, 필리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이라크 어디서나. 닉슨 하나를 꼬리 자르고, 미국 대외정책 시스템은 계속되고 있다.)  영화는 예상대로 전개된다. 뉴욕타임즈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포스트는 맥나마라 보고서를 보도하기로 한다. 그 결정은 언론사 사주(발행인이라고 부르는!) 캐서린(메릴 스트립)이 했다. 아무튼 캐서린은 돌아가는 윤전기를 보며 편집장 벤에게 말한다. “남편은 기사야말로 역사의 초고라고 했어요!” 역사학도인 나로서는 이런 말은 듣기 좋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주 캐서린은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와 오랜 친구로 나온다. 나는 캐서린이 보도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맥나마라와 나눈 다음 대화에 있다고 본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자각보다 앞서는 훨씬 보편적인 이유. 맥 : 보도 기사를 다 읽은 모양이군. 캐 : 그래. 다 읽었어. 네가 많이 힘들 거란 건 알아. 하지만 그 일을 왜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어.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 맥 : 언론은 우리를 그저 거짓말쟁이라고 쉽게 쓰겠지. 캐 : 상황을 계속 내버려 두었잖아? 내 아들은 고맙게도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넌 내 아들이 전쟁터로 가는 것도 봤잖아? 우리가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너는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많은 우리 친구들이 자식들을 보내는 걸 두고 봤어.  자식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캐서린이 보도하기로 결정한 건. 다만 이길 수 있다면 전쟁터로 내 새끼, 우리 자식을 보내도 되나? 그래도 되는 전쟁이 있나? 영광은 장군과 정치가가 가져가고, 이익은 군산복합체가 가져가며, 참전한 내 새끼, 우리 자식에게는 살아도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과 트라우마, 아니면 싸늘한 시신뿐이다.  둘째가 입대하던 날, 함께 갔다. 거기엔 아직도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문득 전쟁이 나면 저것들이 상한다는 걸 알았다. 저 꽃 같은 것들이. 내년엔 또 한 명의 ‘내 새끼’가 군대를 간다.  캠퍼스에 봄이 왔다. 오고가며 복작거리는 젊은 생명들 덕에 나도 들뜬다. 올해도 쑥스럽게 교실 뒷켠에 자리 잡은 복학생들이 있었다. 안 오실 걸 알면서도 앞쪽으로 앉으시라고 권해본다. 앞으로도 봄이면 군대 갔던 그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실로 돌아오는 세상이 계속되도록 아니, 군대를 가든 안 가든 사는 데 별 상관없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1-03-17 | hrights | 조회: 610 | 추천: 6